<colbgcolor=#000><colcolor=#fff> '''''' | |||
출생 | 미상 | ||
사망 | 1530년 8월 29일 (향년 ?세) | ||
재위기간 | 왈라키아 보이보드 | ||
1529년 3월 ~ 1530년 6월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블라디슬라프 3세 어머니: 미상 | |
가문 | 다니슈티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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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왈라키아 공국 제31대 보이보드.2. 생애
왈라키아 공국 제28대 보이보드 블라디슬라프 3세의 아들이다. 1529년 1월 2일, 보니치 네그루와 포스텔닉 드라간이 이끄는 보야르들이 왈라키아 보이보드 라두 5세와 장남 블라드를 살해하고 바사라브 6세를 새 보이보드로 선임했다. 그러나 그들은 2월 5일 마음을 바꿔 바사바르 6세를 축출했고, 네그루 본인이 공석이 된 보이보드의 섭정을 자처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모이세를 보이보드로 선임하도록 했다.모이세는 초기엔 오스만 파디샤 쉴레이만 1세에게 복종했다. 그는 파디샤의 지시에 따라 트란실바니아 도시인 시비우에 사절을 보내 오스만 제국의 봉신이 된 동헝가리 왕국의 국왕 서포여이 야노시에게 복종하라고 요구했다. 시비우가 거부하자, 그는 보복에 착수해 시비우 외곽 지역을 약탈했다. 그러던 1529년 9월 27일에서 10월 14일까지 18일간 이어진 제1차 빈 공방전이 오스만 제국의 패배로 끝나자, 그는 오스만 제국과 관계를 끊고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1세, 몰다비아 공 페트루 4세와 연합하려 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크라이오베슈티 가문의 지지를 받았지만, 다른 보야르들은 거의 지지하지 않았다.
1530년 2월 13일, 모이세는 크라이오베슈티 가주의 자매와 결혼했다. 이때 그는 네그루와 드라간을 비롯한 반 오스만 연합에 거부하는 인사 몇 명이 결혼식에 참석한 틈을 타 긴급 체포한 뒤 처형했다. 이에 보야르들은 오스만 제국 영토로 피신한 뒤 블라드 6세를 새 보이보드로 추대하고 오스만 제국의 승인을 얻었다. 블라드 6세는 그해 5월 왈라키아로 쳐들어갔고, 모이세는 6월에 시비우로 피신했다. 블라드 6세는 시비우에 사절을 보내 모이세를 넘기거나 죽이라고 요구했지만, 시비우 시민들은 모이세가 이제 자기들의 동맹이 되었다며 거부했다.
1530년 8월 24일, 모이세는 페르디난트 1세의 지원을 받아 왈라키아로 진군해 슬리티나에서 크라이오베슈티 가문의 군대와 합류했다. 8월 29일 텔레오르만의 비쇼아라에서 오스만 제국군과 연합한 블라드 6세와 격돌했으나 참패를 면치 못하고 전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