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 | ||||
출생 | 1755년 6월 30일 | |||
왈라키아 공국 부쿠레슈티 | ||||
사망 | 1834년 4월 29일(향년 78세) | |||
왈라키아 공국 부쿠레슈티 | ||||
재위기간 | 왈라키아 보이보드 | |||
1822년 6월 30일 ~ 1828년 5월 10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디미트리에 기카 어머니: 마리아 바카레스쿠 | ||
이복형제 | 알렉산드루 2세 기카 | |||
배우자 | 마리아 한제를리 | |||
자녀 | 디미트리에 기카 | |||
가문 | 기카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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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왈라키아 공국 제92대 보이보드.2. 생애
1755년 6월30일 왈라키아 공국의 중심지 부쿠레슈티에서 몰다비아와 왈라키아 보이보드 그리고레 3세 기카의 형제인 디미트리에 기카와 마리아 바카레스쿠의 아들로 출생했다. 이복형제로 알렉산드루 2세 기카가 있었다. 그는 부쿠레슈티 학교에서 공부했으며, 그리스어와 프랑스어에 능통했다. 1793년 고등 판무관이 되었고, 1796년 고위 클루체르(clucer, 궁정에 식량과 기타 필수품을 공급하는 관료)를 역임했고, 1799년부터 1800년까지 부쿠레슈티 경찰 고위 소장, 1800년 지방 자치 단체의 고위 전령, 1813년에는 어퍼 컨트리의 대 전령, 1817년에는 부쿠레슈티 반(Ban)이 되었다.1821년 2~6월 투도르 블라디미레스쿠의 봉기가 오스만 제국군에 의해 제압된 뒤, 오스만 제국은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에 군대를 배치하고 군정 통치를 실시했다. 1822년 봄, 그리고레는 이오안 스투르자, 이오르다케 라슈카누, 게오르게 쿠자 및 기타 9명의 몰다비아 및 왈라키아 보야르와 함께 콘스탄티니예로 찾아가서 오스만 제국의 주권을 인정하고 공물을 납부하며, 오스만군의 주둔을 받아들일 테니 전통 영주의 통치를 복원해달라고 요청했다. 1822년 7월 1일, 오스만 파디샤 마흐무트 2세는 이를 받아들이고, 앞으로는 오스만 당국이 파나리오테스에 속한 인사를 임의로 왈라키아나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선임하지 않고 보야르들이 선출하고 오스만 당국이 승인하는 구조로 회귀하기로 했다. 그 후 그리고레는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선임되었고, 이오안 스투르자는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선임되었다.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선임된 그는 권좌를 탈취하려는 일부 보야르의 정치적 공세에 맞섰으며, 500만 탈러에 달하는 빚더미에 짓눌린 왈라키아 재정을 개선하기 위해 파나리오테스 통치 기간 동안 면제되었던 포도주세를 부과하려 했다. 그러나 보야르들의 비협조로 인해 세금 부과가 이뤄지지 않았다. 그는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러시아 제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1826년 10월 7일,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 사이에 애커만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협약은 오스만 파디샤가 러시아의 동의 없이 왈라키아와 몰다비아 등 다뉴브 공국의 통치자를 바꾸는 것을 금지했다.
이리하여 입지를 다진 그는 왈라키아의 피폐해진 농업을 되살리는 일련의 정책을 실시했다. 또한 성 사바 수도원에 학교를 다시 열었으며,디니쿠 골레스쿠의 주도로 문학 협회가 신설되는 걸 도왔고, 그리스어 학교가 왈라키아의 여러 곳에서 건설되는 걸 용인했다. 여기에 거리 포장을 위한 규정을 반포하는 등 부쿠레슈티의 환경 개선과 관련된 조치를 내렸으며, 일전에 러시아군에 가담하여 오스만 제국에 대항한 왈라키아인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판두리 군단을 조직해 왈라키아 방위를 맡겼다.
1828년 5월 7일, 러시아 제국군이 그리스 독립 전쟁을 치르는 그리스인을 돕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프루트 강을 건너 왈라키아 공국의 행정권을 장악했다. 러시아 장군 페오도르 페트로비치 팔렌 백작은 왈라키아 총독으로 선임되었고, 몰다비아와 왈라키아 디반(Divan, 국가평의회)의 전권대표직도 맡았다. 그리고레 4세는 5월 10일에 온 가족과 함께 브라쇼프로 망명했지만, 그곳을 지배하던 합스부르크 제국이 그가 자국 영토에 거주하는 걸 허용하지 않자 별 수 없이 부쿠레슈티로 돌아가서 조용히 지내다가, 나중에 칼다루사니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1829년 전쟁이 종결된 뒤 부쿠레슈티 자택으로 은퇴하여 조용히 지내다가 1834년 10월 16일에 사망했다.
3. 가족
- 마리아 한제를리(1779 ~ 1871): 왈라키아 공국 86대 보이보드 콘스탄틴 한제를리의 딸.
- 콘스탄티노스 기카스(1804 ~ 1867): 바노스, 디바니온 회장 겸 내무장관.
- 게오르기오스 기카스(1805 ~ 1828): 왈라키아 포체드닉.
- 스카를라트 기카스(1808 ~ 1875): 로고테테스.
- 디미트리에 기카(1816 ~ 1897): 몰다비아 왈라키아 연합공국 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