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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쿠레슈티일포브 지방 | București - Ilfov | ||||||||||||||||||||||||||||||||||||||||||||||||||||||||||||
부쿠레슈티★ | 일포브 주 (부쿠레슈티) | |||||||||||||||||||||||||||||||||||||||||||||||||||||||||||
북동부 지방 | Nord-Est | ||||||||||||||||||||||||||||||||||||||||||||||||||||||||||||
바커우 주 (바커우) | 보토샤니 주 (보토샤니) | 이아시 주 (이아시) | 네암츠 주 (피아트라네암츠) | 수체아바 주 (수체아바) | 바슬루이 주 (바슬루이) | |||||||||||||||||||||||||||||||||||||||||||||||||||||||
남동부 지방 | Sud-Es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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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 지방 | Sud - Muntenia | ||||||||||||||||||||||||||||||||||||||||||||||||||||||||||||
아르제슈 주 (피테슈티) | 컬러라시 주 (컬러라시) | 듬보비차 주 (트르고비슈테) | ||||||||||||||||||||||||||||||||||||||||||||||||||||||||||
지우르지우 주 (지우르지우) | 이알로미차 주 (슬로보지아) | 프라호바 주 (플로이에슈티) | 텔레오르만 주 (알렉산드리아) | |||||||||||||||||||||||||||||||||||||||||||||||||||||||||
남서부 지방 | Sud-Vest Oltenia | ||||||||||||||||||||||||||||||||||||||||||||||||||||||||||||
돌지 주 (크라이오바) | 고르지 주 (트르구지우) | 메헤딘치 주 (드로베타투르누세베린) | 올트 주 (슬라티나) | 발체아 주 (름니쿠발체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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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드 주 (아라드) | 카라슈세베린주 (레시차) | 후네도아라 주 (데바) | 티미슈 주 (티미쇼아라) | |||||||||||||||||||||||||||||||||||||||||||||||||||||||||
북서부 지방 | Nord-Vest | ||||||||||||||||||||||||||||||||||||||||||||||||||||||||||||
비호르 주 (오라데아) | 비스트리차너서우드주 (비스트리차) | 클루지 주 (클루지나포카) | 마라무레슈 주 (바이아마레) | 사투마레 주 (사투마레) | 설라지 주 (잘러우) | |||||||||||||||||||||||||||||||||||||||||||||||||||||||
중부 지방 | Centru | ||||||||||||||||||||||||||||||||||||||||||||||||||||||||||||
알바 주 (알바이울리아) | 브라쇼브 주 (브라쇼브) | 코바스나 주 (스픈투게오르게) | 하르기타 주 (미에르쿠레아치우크) | 무레슈 주 (트르구무레슈) | 시비우 주 (시비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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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0px -10px" | | 부쿠레슈티 București Bucharest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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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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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남부 루마니아[1] | |||
면적 | 238.㎢ | |||
인구 | 2021년 1,716,983명 (루마니아 1위) | |||
인구 밀도 | 7,218명/㎢ | |||
시간대 | UTC+2 (서머타임 준수) | |||
웹페이지 | 공식홈 부쿠레슈티 무역관 (KOTRA) 주 루마니아 대한민국 대사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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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쿠레슈티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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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쿠레슈티 도심부 |
튀르키예어: Bükreş (뷔크레슈)
영어: Bucharest (부카레스트)
1. 개요
부쿠레슈티(Bucureșt)는 루마니아 수도로 최대도시다. 인구는 약 188만 명이며, 수도권(일포브 주)까지 합친 인구는 215만 명이다. 1990년대 초에는 200만을 돌파하기도 했다. 발칸의 파리(Micul Paris)라는 별명이 있다. 실제로 1920년대나 1930년대 사진을 보면 프랑스 풍의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많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집권기를 거치면서 이러한 건물들이 많이 파괴되었다. 지명 유래는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기쁨"을 뜻하는 "Bucur"혹은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에서 유래할 가능성이 높다.
2. 날씨
기후는 연교차가 큰 냉대 습윤 기후(Dfa)지만[2] 1월 평균기온 -2.4°C, 7월 평균기온 22°C로 위도에 비하면 크게 춥지는 않다. 강수량은 고른 편이나(595mm) 겨울 강수일수는 6일정도로 생각보다 적은 편이다. 일조량은 7월이 가장 많으며(288.3시간) 12월에는 가장 적다.(62시간)3. 역사
1459년 블라드 3세가 세운 왕궁 (쿠에르타 베체)
고대 시기 북쪽 호수 및 디보티차 강 남안에 다키아인 마을이 들어섰고, 로마 제국과 교류했다. 전설에 따르면 중세 시기 부쿠르라는 목동이 도시를 세웠다 하며, 또한 왈라키아 공국의 창건자로 전해지는 라두 네그루가 창건했다고도 한다. 다만 고고학 발굴로는 14세기까지 도시가 없었고, 공식적으로는 1459년 9월에 드라큘라의 모델로도 알려진 보이보드 (왕공) 블라드 3세가 디보티차 북안에 궁전을 세우며 부쿠레슈티가 창건되었다. 블라드 3세는 기존 수도인 트르고비슈테 외에 부쿠레슈티를 하계 수도로 삼았고, 강력한 성채를 세웠다. 1462년, 오스만 제국과 동맹한 동생 라두 3세에게 축출된 블라드 3세는 1476년 몰다비아 공국의 슈테판 3세와 함께 부쿠레슈티를 탈환하고 복위했다. 오스만 제국은 도시를 뷔크레슈 (بكرش)로 지칭했고, 직할지로 삼지는 않았지만 예니체리 병력을 주둔시켰다.
3.1. 왈라키아 공국의 주요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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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7년 미르체아 2세가 동북쪽 외곽에 세운 마르쿠타 성당 및 수도원. 루마니아에서 현재까지 쓰이는 가장 오래 된 건물이다. |
블라드 3세 이후로도 보이보드들은 부쿠레슈티에 자주 머물렀다. 1550년대에 미르체아 5세는 쿠에르타 베체를 증축, 성당을 더했다. 그는 또한 시가지를 두르는 방벽과 수도 시설을 세웠고, 이후 부쿠레슈티는 왈라키아의 주요 도시 중 하나로 성장했다. 다만 오스만 제국의 개입으로 보이보드가 바뀔 때마다 부쿠레슈티에는 오스만 군대가 진주했고, 1554년 몰다비아 군대 및 오스만 제국의 예니체리 부대가 도시를 약탈했다. 1558년에 복위한 미르체아 5세는 부쿠레슈티에서 오스만 관리들의 집전 하에 보야르 (귀족)들과 화해 의식을 거행했으나, 오스만 관리들이 떠난 후 여러 보야르와 성직자들을 처형했다. 1573년 알렉산드루 2세 미르체아는 도시의 첫 인쇄소를 세웠다.
1574년 4월, 몰다비아의 보이보드 이오안 3세 첼 비테아즈가 부쿠레슈티를 함락했다. 겨우 도주한 알렉산드루 2세는 이듬달 도시를 수복한 후, 몰다비아의 허수아비 군주 빈틸라를 처형하고 그 수급을 왕궁의 문에 못 박았다. 1594년 11월에는 오스만 제국에 반기를 든 보이보드 미하이 2세가 왈라키아에 많은 채무자를 두고 있던 오스만 채권자들과 부쿠레슈티 주둔 오스만 군대를 학살했다. 이에 1595년 여름, 대재상 코자 시난 파샤가 9만 대군과 왈라키아로 진격했다. 미하이 2세가 산지로 피신하자 시난 파샤는 부쿠레슈티를 무혈 점령, 대대적으로 파괴했고, 성당을 모스크로 개조했다. 그는 메흐메트 파샤 휘하 1만 병력을 배치했지만, 같은해 10월 미하이 2세가 수복한다.[3]
1600년 미하이 2세의 축출 후 부쿠레슈티는 잿더미 속에서 재건되었다. 17세기 들어 비교적 온건해진 오스만 지배 하에서 왈라키아와 발칸 반도 각지 간의 무역이 확대되며 부쿠레슈티는 상업 도시로써 성장했고, 17세기 후반에는 왈라키아 최대 도시가 되었다. 1632-54년간 왈라키아를 안정적으로 통치한 마테이 바사라브는 트라고베슈테와 함께 부쿠레슈티를 공동 수도로 삼았고, 1640년에 궁전을 재건했다. 1655년 2월, 마테이 바사라브가 고용했던 세르비아계 세이멘 용병대가 그의 사후 반란을 일으켜 부쿠레슈티를 함락한 후 약탈을 자행했다. 비록 보이보드 콘스탄틴 셰르반이 트란실바니아의 도움으로 진압했지만, 여러 보야르들이 살해된 왈라키아 공국은 침체기를 겪는다.
1658년 왈라키아 보야르들은 오스만 조정의 승인 하에 미네아 3세를 새 보이보드로 추대했고, 이에 콘스탄틴 셰르반은 성채에 농성하며 막 재건된 시가지에 방화했다. 그럼에도 결국 후자는 축출되었다. 얼마 후 도시를 방문한 오스만 여행가 에블리야 첼레비는 돌과 벽돌로 복구되던 시가지를 언급했다. 1659년, 트란실바니아의 도움으로 자립을 시도하던 미네아 3세가 폐위된 후 보이보드에 오른 게오르게 기카는 부쿠레슈티를 수도로 삼았다. 1660년대 초엽과 1675년 부쿠레슈티는 흑사병의 창궐로 피해를 입었다. 1688년에는 대튀르크 전쟁기에즉위한 보이보드 콘스탄틴 브랑코비아누에 의해 최초의 루마니아어 성경 완역본인 부카레스트 성경이 출판되었다.
3.2. 왈라키아 공국의 수도
1698-1702년에 세워진 모고쇼아이아 궁전. 1714년 콘스탄틴 브랑코비아누의 처형 후 오스만 당국이 몰수해 여관으로 활용했다.
모고쇼아이아 궁전의 정전 건물. 베네치아 양식이 가미되었다. 1768-74년 오스만군, 1916년 독일군의 포격으로 피해를 입었다.
본래 대튀르크 전쟁에 있어 오스트리아 측에 협력하기로 했던 콘스탄틴은 막상 즉위 후에는 중립을 지켰고, 이에 1689년 11월 합스부르크 제국군이 부쿠레슈티 등 왈라키아 주요 도시들을 점령했다. 이를 용인하던 콘스탄틴은 독일 병사들이 약탈을 자행하자 분노해 오스만 제국에 지원을 요청하고 퇴쾨이 임레의 헝가리 독립군과 함께 합스부르크 제국군을 격파해 축출했다. 안정을 회복한 콘스탄틴은 1694년 부쿠레슈티의 첫 공립 교육 시설인 성 사바 학교[4]를 세웠고, 1698년 부쿠레슈티를 공국의 수도로 공식 선포했다. 26년에 달하는 그의 치세 동안 도시에는 비잔틴-르네상스 양식을 절충한 브랑코벤 양식의 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콘스탄틴은 기존 왕궁을 수리하고 두 개의 궁전을 추가로 건설했는데, 그중 1698-1702년에 세워진 모고쇼아이아 궁전은 베네치아 양식의 로지아로 유명했다.
3.2.1. 파나리오테스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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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0-22년에 세워진 크레츨레스쿠 성당 | 1808년 마누크 베이가 세운 카라반사라이인 마누크 여관 (하눌 마누크) |
오스만-합스부르크 전쟁기이던 1716년 1월, 보이보드 슈테판 칸타쿠지노는 합스부르크 측과 내통하다 들통나 처형되었다. 이후 파나리오테스인 니콜라에 마브로코르다트가 첫 그리스인 보이보드로 선임되었다. 다만 3주 만에 오스트리아 군이 부쿠레슈티를 함락했고, 니콜라에는 빈으로 압송되었다가 1718년 파사로비츠 조약 후에야 석방되어 복위했다. 이후 니콜라에는 화재와 역병을 극복하고 콘스탄틴 시기의 안정을 회복하며 통치하다 1730년에 사망했고, 아들 콘스탄틴은 라코비차 및 기카 가문과 대립하며 여러 차례 폐위와 복위를 반복했다. 1750년대에는 다시 역병이 엄습했다. 1764년 보이보드 슈테판 라코비차는 새 법률에 반발한 보야르들을 탄압하다가 부쿠레슈티 주민들의 봉기에 직면하자 유혈 진압했는데, 보다 못한 오스만 제국이 이듬해 개입해 폐위시키고 기카 가문을 보이보드에 옹립한다.
1769년에 오스만 제국을 침공한 러시아 제국군이 11월에 부쿠레슈티를 함락, 보이보드 그리고레 3세 기카를 끌고갔다. 1770년 6월 러시아 군이 철수하자 대주교 부자우의 초청으로 마놀레 기아니 루세트가 보이보드에 즉위했고, 그는 오스만 군의 도시 약탈을 방지했다. 하지만 같은해 11월 러시아 군이 재차 남하해 도시를 재점령했다가, 1774년에 부쿠레슈테에서도 일부 논의된 퀴췩 카이나르자 조약 체결 후에야 회군했다. 뒤이어 보이보드에 오른 알렉산드루 입실란티는 감세와 군대 창설 등 왈라키아의 근대화를 이끌었다. 1775년 그는 전란으로 파괴된 기존 왕궁을 대신하기 위해 디보티차 강 남안의 미하이 보다 수도원 인근에 새 왕궁인 쿠르테아 누아를 건설했다.
1786년 보이보드에 오른 니콜라에 마브로게니 역시 외곽의 샘에서 상수관을 연결해 주민들이 강물보다 깨끗하 식수를 구하게 해주었고, 외곽에 여름 별장을 세웠다. 오스만-합스부르크 전쟁기인 1789년에는 오스트리아 제국이 재차 부쿠레슈티를 점령했고, 1791년에 철수했다. 뒤이어 즉위한 보이보드들은 비딘의 파샤 겸 보야르인 오스만 파즈반토을루의 공세에 시달렸다. 1793년 부쿠레슈티는 역병과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었고, 1801년 5월 오스만 파즈반토을루의 군대가 접근하자 부쿠레슈티의 주민 중 상당수가 트란실바니아의 브라쇼브로 이주했다. 1802년 5월에는 부쿠레슈티의 수비대 및 알바니아 용병대가 급료 지불을 요구하자 보이보드 미하이 수추는 트란실바니아로 망명했다. 이에 알바니아 용병들이 궁전을 약탈하고 도시를 불태우겠다며 위협하자 오스만 주둔군이 개입해 진압했다.
1802년 10월과 1804년에 일어난 지진으로 불안정하던 도시는 9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전쟁기인 1806년 12월 러시아 군에게 점령되었다. 러시아의 후원으로 보이보드에 오른 콘스탄틴 입실란티의 치세인 1808년, 그의 채권자 겸 재무관인 아르메니아인 보야르 마누크 베이 (에마누일 마르자이안)가 현재까지 호텔로 쓰이는 마누크 한을 건설했다. 1812년 5월, 마누크 베이 등의 중재로 열린 협상으로 오스만-러시아 제국 간의 휴전 조약인 부쿠레슈티 조약이 체결되었다. 같은해 8월, 러시아 군의 철수 후 보이보드로 즉위한 이오안 카라제아가 부쿠레슈티에 도착한 첫날 밤에 쿠르테아 누아 (신 왕궁)에 화재가 발생해 전소되는 변고가 있었다. 1813년에는 페스트가 창궐했고, 1814년까지 이어지며 4만에 달하는 부쿠레슈티 주민이 희생되었다. 역병 기간동안 이오안은 코트로체니 수도원에 피신했다.1821년 3월에 보이보드에 즉위한 투도르 블라디미레스쿠는 그리스 민족주의 비밀결사인 필리키 에테리아의 일원이었고,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의 봉기군을 수용했다. 하지만 막상 오스만 제국이 진압에 나서자 투도르는 중립으로 돌아섰다. 그해 5월 오스만 군이 부쿠레슈티에 당도하자 보야르와 주민들은 저항하지지 않고 성문을 열었다. 봉기군과 함께 트르고비슈테로 피신했던 투도르는 오스만 제국과의 내통 혐의로 처형되었고, 8월에 반란을 완전히 진압한 오스만 군대는 1826년까지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에 주둔하며 군정을 실시했다. 동시에 파나리오테스 대신 현지 보야르들을 다시 보이보드로 선임했고, 이로써 등극한 그리고레 4세 기카는 1826년 악케르만 조약으로 왈라키아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을 키우며 자치권을 확대했다.[5] 그는 외국 출신 성직자들을 추방하며 종교적 자립도 이루었다.
3.2.2. 근대화, 자치를 위한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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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7년 3월의 부쿠레슈티 대화재 | 1848년 9월, 스피리 언덕에서 오스만 진압군에 맞서는 혁명군 |
그리고레 4세의 치세에 성 사바 수도원 학교와 디보티차 강의 다리들이 재건되었고, 시내의 도로가 포장되었다. 한편 19세기 초엽 부쿠레슈티 교외 지역에는 개인 소유의 정원과 과수원이 들어섰다. 그리스 독립 전쟁과 함께 진행된 10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전쟁에서 1829년 5월, 러시아 군이 부쿠레슈티를 다시 점령했다. 이듬해 체결된 아드리아노폴리스 조약에서 왈라키아와 몰다비아 공국은 오스만-러시아 제국의 2중 보호령이 되었고, 러시아 제국은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에 군정을 실시했다가 1834년에야 철수했다. 러시아의 왈라키아-몰다비아 군정의 치소는 부쿠레슈티였고, 파벨 키셸레프 총독은 1829년과 1831년의 역병에 대처했다. 러시아 군정기에 중심 도로가 구획되었고, 나무판 대신 돌로 포장되었으며 디보티차 강 주변 습지가 매립되어 시가지의 경계가 확립되었다.
또한 군정 기간에 신설된 왈라키아 군이 수비대로 배치되었고, 소방대가 개선되었으며 중요하게도 왈라키아 헌법이 제정되어 독립국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1834년 군정이 끝난 후 그리고레 4세의 형제 알렉산드루 2세 기카가 보이보드가 되었고, 새 왕궁인 고스포다르 궁이 세워졌다. 1838년 1월의 지진과 1839년 3월의 홍수에도 도시는 빠르게 성장했다. 알렉산드루 2세는 1838년 부쿠레슈티에 첫 군사 학교와 병영을 세웠고, 첫 오페라 공연을 열었다. 비슷한 시기 근대적인 의학 학교도 세워졌고, 1840년에는 완전한 독립을 주장하던 보야르 이온 캄피네아누가 체포되었다. 심해지는 러시아의 내정간섭에 분노한 알렉산드루 2세는 1841년에 필리키 에테리아 단원들을 체포했다. 이에 국가의회가 반발하며 혼란이 일었고, 결국 1842년 러시아-오스만 양국은 그를 폐위하고 게오르게 비베스쿠를 보이보드로 추대했다.[6]
1847년 3월 부쿠레슈티 대화재가 발생하여 전체 건물의 1/3에 해당하는 1850개 건물이 전소하고 도심의 마할라 (구역)들이 대거 폐허가 되었다. 재건에 있어 기존의 목조 건물들은 오스트리아식 2층 벽돌 건물들로 대체되었고, 근대식 도시 계획이 실행되었다. 1848년 6월에는 유럽을 휩쓴 1848년 혁명의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 지식인들이 왈라키아의 완전한 독립과 만민의 평등 및 자유를 명시한 이슬라즈 선언을 공표했고, 부쿠레슈티에서도 시민들이 광장에 모여 봉기한 후 고스포다르 궁전으로 향했다. 군경의 무대응 덕여 봉기 지도부는 궁전에 들어가 게오르게를 압박, 선언문에 서명하고 헌법으로 반포하게 했다. 이틀 후 게오르게는 퇴위했고,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7월에는 토지개혁에 반대한 보야르들이, 8월에는 임시정부 의장이던 부쿠레슈티 대주교 네오피트 2세가 임시정부 전복을 기도했으나 모두 진압되었다.
본래 반러 성향의 임시정부에 호의적이던 술탄 압뒬메지트 1세는 더 온건한 인사들로 내각을 구성하도록 압박했으나, 이마저도 러시아의 차르 니콜라이 1세는 거부했다. 이후 러시아의 군사 개입이 예상되자, 또다시 러시아 군의 다뉴브 유역 남하를 방지하고자 했던 압뒬메지트 1세는 푸아트 파샤를 부쿠레슈티의 감독관으로 파견했다. 연이은 정변 시도들과 함께 러시아의 침공설로 부쿠레슈티에서는 혼란이 일었고, 9월 중순에 봉기군이 내부무를 장악한 후 보야르들의 특권을 명시한 문서들을 불태웠다. 임시정부의 급진화를 막고자 했던 푸아트 파샤는 9월 말에 2만의 오스만 병력과 함께 부쿠레슈티에 진입했고, 서남쪽 스피리 언덕 (현 인민궁전 일대)에서 일단의 소총병들이 저항한 것 외에 도시는 무혈 장악되었다. 이후 콘스탄틴 칸타쿠지노가 카이마캄 (행정관)으로 부임했고, 봉기 지도부를 체포 및 추방했다.
이후 오스만 군과 러시아 군이 함께 부쿠레슈티에 주둔했고, 1851년 4월에야 철수했다. 한편 사태가 수습된 후 보이보드에 즉위한 게오르게의 동생 바르부 슈티르베이는 혁명 이후 폐쇄된 학교들을 재개장했고, 노예제 약화 및 소극적 토지 개혁 등의 온건적 개혁을 추진했다. 혁명으로 중단되었던 부쿠레슈티 대극장은 1852년에 완공되었다. 크림 전쟁 개전 직전인 1853년 7월, 러시아 군이 재차 왈라키아를 장악했고, 바르부는 빈으로 망명했다. 러시아 군은 오스만 군과의 다뉴브 전선에서 여러번 패배한 1854년 7월에야 철수했다. 이후 오스만 제국과 동맹한 오스트리아 제국이 군정을 실시하다가 1856년 파리 조약으로 종전이 이루어지자 오스만 제국이 옛 보이보드 알렉산드루 2세를 카이마캄으로 선임했다. 러시아-오스트리아-오스만 군정 시기 가로등이 조성되고 전신국, 근대 학교, 치슈미구 정원이 세워졌다.
3.3. 몰다비아 왈라키아 연합공국
1868년 부쿠레슈티 전경
파일:부쿠레슈티 대학.jpg
1864년부터 조성된 부쿠레슈티 대학
1857년 왈라키아 임시 국회는 몰다비아와의 통합안을 결의했고, 이듬해 파리 조약에서도 열강들이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 하에 양국의 연합을 승인했다. 1858년 10월 알렉산드루 2세의 퇴위 후 왈라키아에서는 통합 반대파가 정국을 주도했다. 한편 1859년 1월, 몰다비아에서는 혁명을 지지하던 자유주의자 알렉산드루 이오안 쿠자가 보이보드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같은달 왈라키아에서의 선거에서도 통합 반대파의 분열 덕에 알렉산드루가 보이보드로 선출되었다. 그는 양국의 돔니토르 (전권자)로써 양국을 각각 통치하다가, 1862년 2월에 완전히 통합된 몰다비아 왈라키아 연합공국 (루마니아 공국)이 설립되었고, 부쿠레슈티가 통합 루마니아 국가의 단독 수도로 고정되었다.
알렉산드루는 시내의 도로 포장을 개선하고, 1864년 부쿠레슈티 대학을 설립하는 등 근대화에 착수했다. 1865년에는 부쿠레슈티와 그 외항인 지우르지우와의 철도 건설이 시작되었다. 같은해 3월에는 디보티차 강이 범람해 홍수가 발생, 도심 일부가 파손되고 다수가 사망했다. 한편 급격한 토지 개혁을 추구하고 반대파를 의회에서 배제하며 보수파의 반발을 사던 알렉산드루는 결국 1866년 2월에 쿠데타로 폐위되었다. 이후 독일 귀족 카롤 1세가 돔니토르가 되었다. 카롤 1세는 우선 작년의 홍수 후 창궐하던 역병에 대처했다. 또한 가스 전구 가로등이 개설되었고, 1869년에는 루마니아 첫 기차역인 필라레트 역이 지우르지우 방면으로 운영을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 마차 트램과 전화선이 설치되었고 여러 관공서와 공장이 세워졌으며 도심을 가로지르는 대로가 놓였다. 1871년에는 보불 전쟁의 여파로 친불 성향의 루마니아인 주민들과 독일계 주민들이 충돌하는 일도 있었다. 1877년 4월, 제1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발발하자 부쿠레슈티 주민들은 러시아 제국군의 진주를 환영했다. 이에 다뉴브 건너편의 오스만 군대가 루마니아 영토를 포격했고, 5월에 루마니아 의회는 완전한 독립을 선포하며 오스만 제국에 납부할 예정이던 91만 레우의 연공을 군비로 전환한 후 플레벤 공방전 등에서 러시아 군을 도와 참전했다. 전후 1878년 7월, 오스만 조정이 독립을 승인하면서 루마니아 공국은 1881년에 왕국으로 개편되었다. 왕국 승격을 전후로 1837년부터 쓰였지만 노후했던 고스포다르 왕궁이 증축되었고, 1880년 4월에는 루마니아 은행이 완공되었다.
3.4. 루마니아 왕국
1892년 루마니아 국립 우체국으로 세워진 국립 루마니아 박물관
1891-93년에 세워진 부쿠레슈티 대학 부속 도서관
19세기 말엽 카롤 1세의 치세에서 부쿠레슈티는 폭풍 성장을 거듭하며 아름답게 꾸며졌다. 우선 1882년에 제한적이지만 전기가 보급되었고, 1883년에는 범람 방지를 위해 디보티차 강이 직선화되었다. 1885-8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의 관계 단절 후로도 30여년간 부쿠레슈티에는 760개 이상의 새 사업체가 세워지는 등 경제적 번영이 이어졌다. 1888-97년에 걸쳐 세워진 국립 음악당인 루마니아 아테나이움은 부쿠레슈티에서 처음으로 강화 콘크리트를 사용한 건물이었다. 1897-1900년에 세워진 국영 은행인 CEC 은행 본부 건물은 네오르네상스 양식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1900년 전후로 부쿠레슈티는 동방의 파리 (Parisul Estului)라 불리기도 했다. 1850년 경에 6만명 정도이던 인구는 연합공국 설립기인 1860년 무렵 10만, 왕국 승격 시기인 1880년 무렵 20만을 돌파했고, 1912년에는 34만에 이르렀다.
1897-1900년에 은행 건물로 세워진 CEC 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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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97년에 세워진 루마니아 아테나이움 (좌) / 1898-1906년에 시장 호르헤 그리고레 칸타쿠지노가 세운 칸타쿠지노 궁전 (우) |
1916년 8월 루마니아 군은 루세 습격을 시작으로 1차 대전에 협상국 편으로 참전했다. 이후 독일-오스트리아-불가리아의 25만 대군이 왈라키아를 침공했고, 루마니아 군은 3개월 이상 성공적으로 지연전을 펼쳤으나 결국 12월 6일에 독일군이 부쿠레슈티에 입성했다. 친독 임시 정부는 2억 1500만 레우의 배상금을 편성했고, 그중 8600만 레우가 부쿠레슈티에 부과되었다. 이아시로 천도했던 루마니아 왕국은 1918년 11월 말의 종전 후에 환도했다. 1918년 12월에는 루마니아 사회주의 당이 조직한 파업 시위대에 군경이 발포했다. 1919년 12월, 루마니아 지도자들은 아테나이움에 모여 기존 루마니아 왕국[7]과 베사라비아 & 부코비나 & 트란실바니아와의 합병을 결의했다. 전간기에도 1백개 이상의 사업체가 생기는 등 경제적 성장이 이어졌고, 1928년부터는 매년 인구가 3만 이상씩 늘었다.
1878년에 명명된 승리의 거리와 1929-34년에 세워진 전파 타워 (우측)
1936-37년에 중건된 루마니아 왕궁
기존 왕궁이 1926년에 화재를 겪은 후 1936-37년에 화려하게 중건되었다. 1929년에는 전기 트램이 개통했고, 1930년대 카롤 2세의 치세 시기에 많은 네오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이 세워졌다. 그 무렵 북쪽 외곽의 작은 호수들이 정비되었다. 1933년 2월에는 도시 외곽의 크리비차 공단에서 대규모 파업 노동 쟁의가 있었는데, 7명의 노동자가 희생되며 진압되었다. 한편 권위적 독재를 지속하던 카롤 2세는 나치 독일의 압박으로 1940년에 트란실바니아, 남도브루자, 베사라비아 등의 영토를 인접국들에 할양하며 여론의 분노를 산 끝에 이온 안토네스쿠의 쿠데타로 폐위되었다. 1941년 1월에는 파시즘 조직인 철위대가 무장 폭동을 일으켜 120여 유대인 주민이 학살되고 1천여 사상자를 내며 진압되었다. 안토네스쿠는 추축국에 가담했고, 1944년 봄에 영국 & 미국 공군이 도시를 폭격해 5천 5백의 주민이 희생되었다.
3.5.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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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57년에 세워진 스탈린 양식으로 세워진 자유 언론 전당 | 차우세스쿠 시기에 세워진 공공 아파트 |
차우세스쿠가 4만명을 강제 이주시킨 후 1983년부터 건설한 인민 궁전 일대
1944년 8월, 허수아비 국왕이던 미하이 1세가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후 연합군으로 전향하자 같은 날과 다음날 독일 공군이 부쿠레슈티를 폭격해 국립 극장 등의 도심부 건물들이 파괴되었다. 이로써 부쿠레슈티는 4개월 사이에만 연합국과 추축국 모두에게 공습을 당한 비운의 도시가 되었다. 뒤이은 루마니아 군과 독일군 간의 시가전 끝에 8월 31일, 소련군이 부쿠레슈티에 입성하며 총성은 멎었다. 그리고 1945년 2월, 루마니아 공산당은 왕궁 앞에 대규모 시위를 조직하여 니콜라에 서너테스쿠 내각을 무너뜨렸다. 소련의 압박 하에 페트루 그로자의 인민 민주 전선 내각이 출범했고, 1946년 11월의 총선거에서 좌파가 대승을 거둔 후 1947년 11월 왕의 날에 벌어진 군주제 옹호 시위를 진압했다. 결국 그해 12월에 그로자의 압박 하에 미하이 1세가 퇴위하며 루마니아 인민공화국이 설립되었다.
공산 정권 하에서 부쿠레슈티에는 반세기 가량 최고층 건물 지위를 유지한 자유 언론 전당과 국립 오페라 전당 등 여러 사회주의 리얼리즘 건물들이 세워졌다. 1950-60년대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 정권 시기와 1960-70년대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정권 시기 경제 성장과 함께 사회주의적 체계화 하의 새로운 도시 계획이 세워졌고, 구도심의 역사적 건물들이 상당수 철거된 후 거대한 공공 건물들로 대체되었다. 1968년 8월, 차우세스쿠의 반소련 연설 후 다뉴브 작전과 같은 침공을 우려한 군중이 즉석으로 애국 근위대를 구성하기도 했다. 1977년 3월 루마니아 지진으로 부쿠레슈티에서만 1400명 이상이 사망했다 이후 차우세스쿠는 무너진 구도심의 성당 등 많은 건물들을 철거하고 인민궁전을 세웠다. [8] 차우세스쿠 정권 시기 구도심의 20% 이상이 '재개발'되며 많은 문화 유산이 사라졌다.
한편 1970년대의 호황기에 시가지가 외곽으로 확정되며 1948년에 102만이던 인구는 1977년 180만으로 증가했다. 1979년에는 부쿠레슈티 지하철이 개통했고, 1980년대에는 시내에 '배고픔 서커스'라 불린 다수의 정형화된 거대 쇼핑몰이 세워졌다. 그 무렵 차우세스쿠가 추진한 부쿠레슈티-다뉴브간 운하는 완공되지 못했지만, 디보티차 강의 2차 직선화는 이루어졌다. 배급제가 부활하는 등 경제 악화 속에서 동유럽 혁명의 영향을 받아 1989년 12월, 티미쇼아라의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부쿠레슈티에서도 12월 21일부터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고, 세쿠리타테 (보안군)가 발포해 50여명이 사망했다. 12월 22일에는 시위대에 가담한 루마니아 인민군과 세쿠리타테 간의 시가전이 벌어졌고, 결국 시위대는 차우세스쿠의 도피 후 (여전히 공사 중이던) 인민궁전을 장악하며 루마니아 혁명을 성공시켰다.
3.6. 현대
시가지 북쪽의 플로레스카 금융 지구
2000년대 초반에 세워진 신식 아파트 단지
혁명 후로도 임시정부 격인 루마니아 구국정부에 대한 학생 및 노동자 시위가 이어졌고, 1991년 9월 광부들의 시위는 4명이 사망하며 진압되었다. 1992년에는 부쿠레슈티 대학교에 루마니아의 첫 인터넷이 연결되었다. 부쿠레슈티는 현재도 루마니아의 중심 도시로 기능하고 있으며 2000년대 이후 루마니아의 경제가 호전되면서 부쿠레슈티의 외관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2015년 10월, 시내의 클럽에서 벌어진 화재 및 압사 사고로 64명이 사망하는 비극이 있었다. (콜렉티브 나이트클럽 화재)
4. 교통
- 도시철도 : 부쿠레슈티 지하철(1~5호선): 2020년 9월 15일 5호선이 개통했다. 2026년 이후에는 6호선도 개통될 예정이다. 최초 개통 시기가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집권기인 1979년인데,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차우셰스쿠가 한 공사장에 있었던 공원을 보고 싶다고 인부에게 복구를 요구해 복구되었던 적이 있다.
- 철도 : 부쿠레슈티 북역(이곳에서 루마니아 전국 각지로 연결되는 국내열차 및 오스트리아 빈/독일 뮌헨/헝가리 부다페스트/우크라이나 키이우/몰도바 키시너우/불가리아 소피아 행 국제열차 탑승 가능)
현재 신형 열차를 계속 도입하고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열차들이 예전 냉전 초창기 시절부터 계속 운행해온 구형이 대부분인데, 마치 1950년대 영화에서나 볼법한 오래된 모습에 에어컨이 없어서 정말 심각하게 덥다. 여름에 열차를 통해 여행을 한다면 이점 유의해야 한다. 부쿠레슈티 북역뿐 아니라 대부분의 역들도 굉장히 오래되어 옛 향수를 맛볼 수 있다. - 공항 : 대한민국 직항편은 없어서 폴란드 바르샤바, 튀르키예 이스탄불,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경유해야 한다.
- 헨리 코안더 국제공항 : 좀 더 크지만 시내와 더 멀다. 헨리 코안더 국제공항은 원래 명칭이 오토페니 공항인데 2004년에 개명한 것이다. IATA 코드는 오토페니 때의 OTP. 남동유럽 최대 규모의 공항으로 TAROM 루마니아 항공사의 허브공항이다.
- 아우렐 블라이쿠 국제공항 : 시내에 더 가깝지만 규모가 더 작다. 2012년을 기점으로 거의 모든 상용편은 헨리 코안더에 넘겨주고 지금은 차터편이나 개인 비즈니스편에서만 사용되고 있다. 차우셰스쿠가 비상시에 탈출하려고 국제 공항용 규격으로 자신의 관저와[9] 연결되도록 만들었다는 썰이 있다. IATA 코드는 BBU.
5. 기타
도심부 전경
상기했듯 영문 명칭 때문에 이웃국가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와 혼동하는 일도 있다. 그래서 루마니아 당국에서는 영어권 관광객을 의식하여 'Bucharest not Budapest'라는 캠페인을 진행[10]하기도 했다.
왈라키아 공국 시기 오스만 조정에 의해 임명된 보이보드들은 관례적으로 칼리아 셰르반 보다 (Calea Şerban Vodă)' 문을 통해 도시에 입성하고 바카레슈티 수도원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 인민궁전(Casa Poporului)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야심작이며, 펜타곤에 이어 세계에서 두번째로 큰 행정용 건물이다. 자세한 사항은 항목 참조.
루마니아의 IT 인프라 등이 다른 동유럽 국가들보다 양호하기 때문에 IT 업체들이 부쿠레슈티에 데이터 센터 등을 구축해놓은 경우가 많다. MS나 HP 등이 대표적.
동구권, 발칸 국가중에서는 소득수준이 꽤나 높은 편에 속하고, 이에 따른 시민들의 생활수준도 꽤 높으며 정말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도시중 하나이다. 의외로 많은 유럽 유학생들이 약학 등을 공부하러 부쿠레슈티로 모인다.
차우셰스쿠 당시의 반달리즘에 가까운 행태는 차우셰스쿠의 몰락 이후에도 그 여파가 가시지 않아서 부쿠레슈티는 지금도 인구가 좀 있는 유럽 주요 도시 중에서는 매우 삭막한 모습이고 볼거리가 그렇게 많지 않다. 특히나 구시가지와 신시가지의 경계가 모호한 편. 볼거리라면 후술할 인민 궁전이나 정교회 성당, 콘크리트 아파트(...) 정도? 물론 그 와중에 살아남은 부쿠레슈티 왕궁 같은 역사적 건물들도 의외로 꽤 있긴 하지만 부다페스트나 프라하 같은 다른 동유럽 도시(심지어 제2차 세계 대전과 유고슬라비아 전쟁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던 바르샤바, 베오그라드, 사라예보 등과 비교해도)들과 비교하면 볼 게 많이 없다. 1920년대 부쿠레슈티의 모습과 비교하면 매우 안타깝다. 또라이 독재자가 정권을 잡으면 경제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완전히 아작이 난다는 뼈아픈 교훈을 부쿠레슈티는 몸소 겪은 셈. 그나마 다향인 점은 민주화 이후 경제가 안정되기 시작하자 구 시가지의 복원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부쿠레슈티가 차우셰스쿠로 인하여 많은 피해를 입었고 왈라키아 공국의 옛 수도 트르고비슈테도 대부분 건물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루마니아 고유의 문화를 보고 싶으면 몰다비아 지역의 이아시나 수체아바 등으로 가는 것이 낫다. 특히 수체아바 근처 부코비나의 다섯 개 수도원은 루마니아 정교회의 정수로 꼽히는 건축물들이다. 흔히 많이 가는 트란실바니아의 시기쇼아라, 브라쇼브, 시비우 등은 독일인이 주로 거주하던 헝가리 왕국의 영토였던지라 루마니아 문화와는 거리가 먼 독일풍의 도시이며 클루지나포카, 티미쇼아라 등은 헝가리 색채가 강하다.
CSA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 FCSB와 FC 디나모 부쿠레슈티, FC 라피드 부쿠레슈티의 연고지이며 이들의 경기장인 아레나 나치오날러가 부쿠레슈티에 있다.[11]
마이클 잭슨이 Dangerous 투어를 진행할 당시에 방문했다. 1992년 10월 1일에 Complexul Sportiv National Stadium에서 7만명의 관객과 함께했는데 공연이 매우 파워풀하고 완벽한데다, 소련 붕괴 후 냉전 체제가 와해되면서 동구권의 문화개방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가장 먼저 서방세계 팝스타를 맞이했다는 상징성, 그리고 그만큼 마이클 잭슨측도 엄청난 물량과 역량을 퍼부어 만들어낸 공연이었다. 그덕에 네자리수에 달하는 관객들이 열광하다가 실신해 현장 의료진에 실려가는 상황이 속출하였다.[12] 이 Dangerous World Tour 부쿠레슈티 공연은 역대 최고의 콘서트라고 불릴 정도의 포스를 뿜어내어 마이클 잭슨의 팬이라면 누구나 다 알 정도로 필수요소화되었다.그래서 마이클 잭슨의 공식 유튜브 채널에, 88년 웸블리 공연과 함께 공연 전체 실황을 볼 수 있게 영상이 올라와있다. ###. 히스토리 투어를 진행하던 때에도 방문하여 1996년 9월 14일에 National Stadium에서 7만명의 관객과 함께 했다.
차우세스쿠의 공산 독재 이후 사람들이 살 집을 잃게 되면서 부쿠레슈티 지하에서 사는 사람들이 늘었는데, 이들은 sewer dwellers, 즉 하수구 거주민들이라고 부른다. 이들의 대부분이 부랑자와 마약중독자라서, 루마니아와 부쿠레슈티의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
6. 대중매체에서
-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서 버키가 떠돌아다니며 지내는 곳으로 등장한다. 이는 버키 반즈 역을 연기한 세바스찬 스탠의 고향이 루마니아라서 그런 듯. 실제로 작중에서는 배우가 루마니아어를 구사하며 자두흥정(...)을 하는 모습이 나온다.
- 토니 에드만의 배경이 되는 도시다.
- 오픈월드 게임인 GTA 4의 실질적 최종보스인 다르코 브레비치가 숨어 있던 곳이다. 이후 붙잡혀 니코 앞에 끌려오게 된다.
[1] 부쿠레슈티는 다른 주에 속하지 않은 수도이다.[2] 최한월 0°C기준. -3°C 기준으론 온난 습윤 기후(Cfa)다.[3] 이때 트란실바니아 공 지그몬드 바토리가 합세한다[4] 아기오스 사바스 아카데미. 현 부쿠레슈티 고등학교이다[5]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 제국의 동의 없이 보이보드를 폐위할 수 없었다[6] 게오르게는 친러 정책을 추진하며 이에 반발한 국가의회를 1844년에 해산했고, 반대파를 배제했다.[7] 왈라키아, 몰다비아에 1913년에 획득한 북도브루자 포함[8] 대신 차우세스쿠는 여러 성당을 신축했다[9] 이전에는 인민궁전과 연결되도록 지었다고 써있었는데, 여기서 말하는 궁전은 차우체스쿠 일가가 살았던 관저인 Palatul Primaverii (프리마베리 궁전)이다. 실제로 차우체스쿠 관저 바로 앞의 2호선 Aviatorilor역과 아우렐 블라이쿠 국제공항은 지하철로 한 역 거리이다.[10] 참고로 헝가리와 루마니아의 국가 관계는 트란실바니아로 인해 아주 나쁘다. 헝가리 입장에서 트란실바니아는 에르데이 공국, 라코치 페렌츠 2세의 쿠루츠 봉기, 1848년 헝가리 혁명 등 헝가리 민족주의 운동의 산실이었지만 그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대부분 농노에 불과했으나 인구 과반수를 점유하던 루마니아인을 가혹하게 탄압했기 때문이다.[11] CSA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는 스타디오눌 스테아우아라는 경기장을, FC 라피드 부쿠레슈티는 스타디오눌 라피드-줄레슈티라는 경기장을 따로 사용한다.[12] 일명 실존했던 패왕색 패기 보유자.jpg같은 이름의 짤방이 돌아다니는 원 소스가 이 공연이다. 마이클 잭슨의 어느 공연이 안그랬겠냐만 부쿠레슈티 공연은 혼절한 관객이 스태프들의 도움을 받아 실려나가는 장면들이 편집없이 생생히 담겨있어서 더 현장감이 느껴진다. ###. 단, 다수의 실신자,부상자가 발생하긴 했지만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썰은 거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