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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독립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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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독립 전쟁
Ελληνική Επανάσταση του 1821
Yunan İsyanı يونان عصياني
Greek War of Independence
파일:Georg-Perlberg-1807-1884-Siege-of-the-Acropolis-during-the-Greek-War-of-Independence.jpg
기간
1821년 2월 21일 ~ 1829년 9월 12일
장소
그리스, 에게해
원인
그리스 민족의식의 고조
교전 국가 및 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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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라힘 파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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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군|]] 50,000명
결과
그리스, 연합군의 승리
영향
그리스의 독립

1. 개요2. 요약3. 배경
3.1. 오를로프 봉기 (1770년)3.2. 필리키 에테리아
4. 전개
4.1. 모레아: 봉기의 시작4.2. 그리스 전역으로의 확산4.3. 1822년, 독립 선포와 해외 원조4.4. 히오스 섬 학살 (1822년)4.5. 위기와 극복4.6. 두 차례의 내분과 소강기4.7. 메흐메드 알리의 개입
4.7.1. 이브라힘 파샤의 모레아 공세4.7.2. 3차 메솔롱기 공방전 (1825-26)4.7.3. 마니 반도 침공 (1826)
4.8. 중남부 그리스 (아테네) 전역
4.8.1. 아라호바 전투 (1826)4.8.2.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구원 실패
4.9. 유럽 3국 연합군의 개입
4.9.1. 나바리노 해전 (1827)4.9.2. 프랑스 군의 모레아 원정 (1828)
5. 종전6. 여담

[clearfix]

1. 개요

1821년 그리스 혁명가들이 4세기 가까이 그리스를 지배하던 오스만 제국에 봉기하여 일어난 독립 전쟁. 최종적으로 그리스가 서구 열강인 대영제국, 프랑스 왕국, 러시아 제국의 지원을 받아 전쟁에서 승리했으며 그 결과로 그리스 제1공화국이 탄생했다.

2. 요약

1821-22년에 그리스 독립군은 모레아와 중부 그리스 및 에게 해 도서 지역 대부분을 석권하고 오스만 제국의 토벌군도 수차례 격퇴하며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1823년부터 그리스 임시정부의 파벌들이 서로 내전을 벌이며 약해졌고 오스만 술탄 마흐무트 2세는 이집트 총독인 메흐메드 알리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메흐메트 알리는 영토를 대가로 아들 이브라힘 파샤 등 그리스 독립군에 대한 토벌군을 보내기로 동의했다. 이브라힘은 1825년 2월에 상륙하여 펠로폰네소스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저항의 상징이던 메솔롱기와 아테네가 1826-27년에 연달아 함락되며 혁명은 실패한 것처럼 보였다.

그때 빈 체제를 지키고자 중립을 지키던 러시아, 영국, 프랑스가 개입을 결정했고 1827년에 삼국 연합 해군 함대를 그리스로 보냈다.[1] 오스만-이집트 연합 함대가 이드라 섬을 공격한다는 소식에 연합 함대는 나바리노에서 오스만 해군을 요격해 격파했다. (나바리노 해전) 이후 1828년에 이집트 군대는 프랑스 원정군의 압력으로 철수했고, 그리스 남부의 오스만 주둔군은 항복했으며 그리스 독립군은 그리스 중남부를 탈환했다.

3. 배경

그리스는 15세기에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된 후 몇 세기 동안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그동안 그리스에서 봉기가 몇 차례 일어났지만 매번 성공을 이루지 못했고, 그리스 북부를 중심으로 이슬람화 및 튀르크화가 이루어졌다. 다만 코르푸 등 여러 이오니아 제도의 섬들은 베네치아 공화국 령으로 남으며 그리스 문화를 유지했고, 크레타의 경우 17세기 중반에야 정복되었다. 그리스 본토 중에서는 산지가 대부분인 모레아 (펠로폰네소스 반도)가 1687년 ~ 1715년간 베네치아 령이 되었고, 오스만 제국이 재정복한 후에도 클레프트라 불리는 산적단이 저항을 이어갔다.

3.1. 오를로프 봉기 (1770년)

한편 러시아 제국은 제3의 로마를 자처하며 많은 동로마 유민들을 수용했고, 1739년 아조프를 확보한 후 끊임없이 지중해 진출을 노리며 그리스의 독립 투쟁을 부추겼다. 1768년 오스만 제국과 전쟁에 돌입한 러시아는 1770년 2월, 대부분 그리스계로 구성된 수백의 병력과 무기를 모레아 중에서도 오지인 마니 반도에 보냈다. 이후 2천여 봉기군이 조직되어 옛 동로마 거점인 미스트라스를 점령하고 임시정부를 구성했다. 코린토스에서도 주민들이 봉기해 나풀리오를 포위했고, 파트라스와 모넴바시아의 오스만 수비대 역시 포위되었다. 케팔로니아, 자킨토스 섬에서는 5천의 자원병이 꾸려져 봉기군에 합류했다. 그리스 중부의 메솔롱기와 나프팍토스에서도 봉기가 벌어졌고, 크레타에서는 2천의 봉기군이 무슬림들을 죽이며 봉기했으나 결국 진압되었다.

4월에 봉기군은 모레아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인 나바리노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렸다. 다만 러시아 함대의 코로니 포위가 실패하고, 모레아에서도 광범위한 호응이 없었으며 결정적으로 약속되었던 러시아 제독 알렉세이 오를로프의 1만 대군 파견은 없었기에 봉기는 점차 실패로 향했다. 6월에 러시아 함대가 떠나자 오스만 대재상 무흐신자데 메흐메드 파사가 나풀리오를 거점으로 반격에 나섰고, 알바니아 민병대를 동원해 반란을 빠르게 진압했다. 그 과정에서 2만 이상의 그리스 인이 살해되거나 고향에서 쫓겨났다.

비록 실패했지만 오를로프 봉기는 오스만 제국의 자원과 관심을 남쪽에 붙잡을 수 있었고, 러시아 해군은 그리스인들의 도움으로 1770년 7월에 체슈메 해전에서 승리하며 전쟁에서 우세를 점했다. 1774년에 체결된 퀴췩 카이나르자 조약에서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 내 정교도들의 보호자가 되어 더욱 그리스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했다. 1770년 이후 봉급 대신 현지인들을 약탈하며 주둔하던 알바니아 민병대는 1779년 오스만 당국에 의해 축출되었다. 또한 저항의 중심지였던 마니 반도 일대는 1776년부터 현지 부족장들이 베이로 임명되는 자치령이 되었는데, 카푸단 파샤 (대제독)의 감시를 받긴 했지만 추후 독립전쟁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3.2. 필리키 에테리아

프랑스 혁명 이후 유럽을 휩쓴 민족주의의 여파로 그리스에서 독립을 향한 열망이 더욱 커졌다. 특히 이오니아 제도는 1797년부터 프랑스, 러시아, 영국의 지배를 받으며 그리스 본토에 저항 의식을 퍼뜨렸다. 그리고 1814년 러시아 제국령 오데사에서 "친우회"(Φιλική Εταιρεία, 필리키 에테리아)라는 비밀 조직이 결성되어 그리스 해방 운동을 벌였다. 1804년, 1815년의 두 차례 봉기 끝에 세르비아 민족이 4세기 만에 자치를 얻어 세르비아 공국을 새운 것은 그리스 민족주의자들에게 큰 영감이 되었다. 이러한 민족 해방 분위기 속에서 친우회는 펠로폰네소스 반도, 다뉴브 공국 (루마니아), 코스탄티니예 등지에서 반란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는데 반란은 1821년 3월 25일에 계획되었다. 그러나 친우회의 계획은 오스만 당국에 의해 발각되어 반란이 앞당겨졌다.

4. 전개

첫 번째 반란은 1821년 2월 21일 (또는 3월 6일) 다뉴브 공국들 (몰다비아 & 왈라키아)에서 시작되었다. 혁명 지도자인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가 오스만 치하 왈라키아에서 봉기를 일으킨 투도르 블라디미레스쿠와 합세하기 위해 프루트 강을 건너 오스만 영토로 진군했으며 이 사건은 그리스 독립 전쟁의 시작을 알렸다. 오스만 제국은 정교회에 책임을 묻고 코스탄티니예에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와 정교회 인사들, 많은 민간인들을 처형했다. 입실란티스는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남하할 예정이었지만 러시아와의 관계가 틀어져 지원을 받지 못했다. 그는 왛라키아 공국의 수도 부쿠레슈티를 점령하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얼마 안가 오스만 제국의 토벌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4.1. 모레아: 봉기의 시작

모레아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는 총독 후르쉬드 파샤가 야니아 (이오안니아) 총독 알리 파샤 토벌에 동원되어 정예 병력과 함께 부재한 틈에 반란이 벌어졌다. 클레프트 (그리스인 산적) 두목 테오도로스 콜로코트로니스는 1821년 1월 26일, 모레아의 주요 인사들을 모아 봉기를 결의한 후 3월부터 모레아 남부를 즁심으로 게릴라 전에 나섰다. 당시 모레아 주둔 오스만 정규군은 1천여에 불과했고, 순식간에 농촌 지역들이 독립군 수중에 떨어졌다. 동시에 클레프트가 교통로를 위협하자 모레아 서남부 메세니아의 도시 칼라마타의 수비대장 술레이만 아가는 명목상 술탄의 신하인 마니의 베이 (태수)인 페트로스 마브로미할리스 (페트로베이)에게 도움을 청했다.[2] 하지만 이미 페트로스는 그리고리오스 파파플레사스에게 독립군에 가담하도록 설득된 상태였고, 그걸 알지 못한 술레이만 아가는 페트로스의 아들 일리아스가 이끄는 150명의 마니오트 부대에 더하여 또다시 증원 병력을 요청했다. 이는 독립군 측의 공격 신호였고, 3월 17일에 페트로스는 아레오폴리스에서 봉기했다.

그는 테오도로스와 함께 2천 마니오트 병력을 모아 3월 21일에 아레오폴리스에서 서쪽의 메세니아 반도로 출정, 다음날 칼라마타에 당도했다.[3] 곧 디미트리오스 파파초니스가 1천 독립군과 합류했고,[4] 그리고리오스 등도 합류했다. 3월 23일 아침, 주민들의 봉기와 함께 술레이만 아가는 무기를 내어주며 항복했다. 입성 후 독립군은 동로마 시기에 세워진 칼라마타의 성 사도 성당에서 찬송가를 불렀다. 또한 독립군은 칼라마타에 향후 남부 모레아의 자치를 담당할 메세니아 평의회를 세워 약 360여년 만에 그리스인의 정부를 구성했다. 3월 25일에는, 모레아 서북쪽의 도시 파트라스에서는 주교 게르마노스가 십자가 깃발을 내걸며 반오스만 봉기를 선포했다.[5] 같은날 독립군이 성채를 제외한 파트라스를 점령, 무슬림 구역을 파괴했으나 4월 3일 오스만 군이 시가지를 상당 부분 파괴하며 탈환했다. 한편 칼라마타에서는 향후 진격로를 두고 토론이 벌어졌다. 테오도로스는 모레아 총독부가 있는 트리폴리스를 바로 공격하자 주장했고, 페트로스는 작은 마을들을 먼저 접수할 것을 주장했다. 결국 전자는 휘하 부대와 모레아 중부로 떠났고, 페트로스는 자신을 '왕공'이라 소개하며 유럽 각국에 전쟁 계획을 알렸다.

독립군이 처음부터 분열을 겪었음에도 저항의 불길은 그리스 전역으로 퍼졌고, 많은 무슬림들이 북쪽으로 피난을 갔다. 그리고 4월 28일, 페트로스의 마니오트 부대는 카리타이나에서 테오도로스와 합세해 트리폴리스를 포위했다. 여러 독립군 부대가 각자 포위망을 구축하는 가운데, 테오도로스는 3천의 클레프트 부대와 함께 인근 산지의 발테시에 진영을 세웠다. 5월 7일, 아르고스의 4천 알바니아 부대와 합세한 트리폴리스 수비대는 5월 24일에 루비 베이의 지휘 하에 발테시로 출진했다. 루비 베이는 발테시 진영에 당도해 항복을 요구했으나 거절되자 공격했다. 치열한 전투 중, 7백의 별동대와 외부에 있던 테오도로스가 돌아와 오스만 군의 측면을 공격하자 전세는 역전되었다. 루비 베이는 6백여 전사자를 남긴 채 성으로 패주했고, 독립군은 불과 150명만을 잃었다. 이후 테오도로스는 불과 3일만에 트리폴리스 주변에 깊이 1m, 너비 2m의 참호를 파 도시를 봉쇄했다. 이에 8월 10일, 3천의 수비대가 식량을 얻기 위해 나와 인근 농촌을 약탈했으나 돌아가던 중 참호에서 테오도로스의 기습 공격으로 4백여 전사자를 내었다. 이후 수비대는 성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후 성내의 식량이 떨어져가자 테오도로스는 알바니아 부대와 협상, 2천 5백의 알바니아 병력이 안전 철수를 보장받아 아르고스로 향했다.

베흐람 파샤의 5천여 원군도 9월 7일, 바실리카 전투에서 2천여 그리스 군에게 패퇴했다. 9월 22일, 함락이 임박하자 2만의 그리스 병력이 트리폴리스 인근에 모였다. 다음날, 독립군은 성벽의 약한 부분을 돌파해 도시를 함락했다. 수비대는 성채로 후퇴했으나 3일 후 물이 떨어져 항복했다. 그후 독립군은 테오도로스의 제지에도 3일간 1만여명의 무슬림과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나플리오로 도주헌 소수의 기병대와 몸값을 받아내기 위한 97명의 관리 및 후르쉬드 파샤의 하렘, 노예로 잡힌 여인과 아이들을 제외한 성내의 모든 인원이 살해됨으로써 모레아의 무슬림 공동체는 소멸했다. 트리폴리스 공방전 중인 7월 23일, 약 4달 간의 포위 끝에 모넴바시아의 수비대가 항복했다.[6] 그 무렵 역시 3월부터 독립군에게 포위된 메세니아의 나바리노 (필로스)[7]와 메토니 (모돈)의 수비대 및 주민들은 굶주림에 시달렸는데, 마침 오스만 함대가 구원에 나섰다. 비록 메토니는 보급을 받아 포위를 버텼지만, 나바리노에는 미치지 못했다. 결국 나바리노 주민들은 조금씩 탈출하거나 항복했으나 그리스 군에 붙잡혀 죽었고, 수비대는 8월 들어 항복 협상에 나섰다. 그리스 군은 수비대 측에 이집트로의 안전 철수를 보장했고, 수비대는 모든 재물을 포기하며 8월 19일에 성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리스 군은 포위 도중 지휘관이 전사한 것을 들어 서약서를 찢고 3천에 달하는 수비대와 주민들을 잔혹히 학살했다.[8]

모레아에서의 봉기 성공 후 크레타 섬, 마케도니아, 그리스 중부에서도 반란이 잇따랐다. 그리스 독립군은 점령지의 유대인, 무슬림, 오스만 제국의 동조자로 의심되는 기독교인들을 학살했다. 오스만 제국 역시 아나톨리아, 크레타, 콘스탄티노폴리스, 키프로스, 마케도니아, 에게 해 제도에서 그리스인들을 학살했다. 독립군 측을 파면하며 오스만 제국에 충성을 보이려 노력했던 그리스 정교회 총대주교 그레고리오스 5세는 교수형에 처해진 후 시신이 금각만에 던져졌고, 7월까지 1백여명의 주교와 드라고만 (통역가) 및 수백의 그리스인 상인들이 살해되었다. 스미르나에서는 그리스인 학살 파트와 (법리 해석) 요청을 거부한 무프티 (이슬람 성직자)가 이슬람 광신도에게 살해되기도 했다.

4.2. 그리스 전역으로의 확산

중부 그리스에서도 1821년 3월 말부터 미솔링기 등 각지에서 봉기가 일어났고, 3월 31일 아타나시오스 디아코스가 이끄는 독립군이 보이오티아의 리바데이아를 장악했다. 이틀 후에는 독립군이 테베를 장악했고, 아테네에서도 독립군이 조직되어 기독교도 주민들을 살라미스로 피신시킨 후 오스만 수비대가 배치된 아크로폴리스를 포위했다. 해상에서도 4월 10일에 오스만 지배에서 벗어난 프사라 섬을 중심으로 저항이 이어졌다. 4월 18일에는 사모스 섬에서도 봉기가 일어나 저항에 가담했다. 심지어 오스만 해군 기지인 차나칼레에서 멀지 않은 사모트라케[9] 섬에서도 주민들이 세금을 거부하며 관리들을 체포하고 자립을 선포했다. 특히 프사라 해군은 오를로프 반란 때에 효과가 있던 화공선 공격을 통해 5월 27일, 에레소스에서 오스만 함선을 격침시켰다.

독립군의 기세가 오르자 야니아의 신임 총독 오메르 브리오니가 8천의 토벌군과 남하했고, 4월 22일 아타나시오스 디아코스가 2천여 병력과 알라마 (테르모필레)에서 맞섰으나 패한 후 사로잡혀 관통형으로 처형되었다.[10] 다만 5월 8일, 오메르 브리오니는 그라비아에서 게릴라 전에 시달린 후 당초 목적이던 트리폴리스 구원을 포기하고 에우보이아 섬으로 물러났다. 한편 재정비 후 오메르 브리오니는 6월 10일에 리바데이아를 탈환했고, 뒤이어 아테네로 향해 7월 20일 입성하며 아크로폴리스를 구원했다. 하지만 바실리카 전투의 패전보가 들리자, 9월에 그는 임지인 이오안니아로 철수했다. 이후 1822년 1월 14일, 아크로코린트의 오스만 수비대가 긴 협상 끝에 항복하며 모레아 봉기군이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넘어 그리스 중부의 동료들과 합세할 수 있게 되었다.

테살로니키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북부에서도 독립의 불길이 일었다. 1810년대 말부터 엠마누엘 파파스가 지하조직을 구성했고, 3월 말에는 밀수한 무기를 아토스 산에 숨겼다. 이후 4천의 독립군이 봉기하고 프사라 함선들은 테살로니키 인근 지방을 습격했다. 이에 5월부터 오스만 당국은 세레스, 테살로니키 등지에서 무기 색출에 나서며 많은 상인들을 체포했다. 5월 17일에 독립군이 폴리기로스를 장악하고 할키디키에서도 소요가 벌어지자 살로니카 총독 유수프 베이는 2백여명의 그리스인 수감자들을 처형했다. 그럼에도 저항의 불길이 카산드라 반도, 타소스 섬 등으로 퍼지고 도로를 위협하자 하지 메흐메드 바이람 파샤가 출정해 렌티나 고개에서 독립군을 격파했다. 10월 30일, 신임 살로니카 총독 메흐메드 에민 아불루바드는 카산드라에서 독립군을 격파했고 엠마누엘 파파스 등의 생존자들은 프사라 해군에게 구출되었다.[11] 1822년 3월 무렵 클레프트 두목 아나스타시오스 카라타소스는 베르미오 산지에서 2천여 독립군을 모아 베로이아를 공격했으나 오스만 원군이 당도해 격퇴되었다.

이에 메흐메드 에민이 1만 정규군 및 1만 민병대와 진압에 나서 아나스타시오스의 거점인 나우사로 진격했다. 3월 26일 나우사에 도착한 메흐메드 에민은 5천여 수비대에게 항복을 요구했으나 거절되자 4월 들어 공격에 나섰다. 4월 12일, 포격으로 성문이 부서지자 오스만 군이 도시로 진입했다. 수비대는 물론 여인들까지 목숨을 끊으며 저항했으나 나우사는 함락되었고, 주민들은 학살되거나 노예가 되었다. 다만 아나스타시오스는 일가족과 함께 탈출하여 테살리아 지역에서 게릴라 전을 이어갔다. 나우사와 함께 저항이 거셌던 카산드라 지역 역시 초토화되었다. 이후 소수의 잔당이 숨어들거나 망명하며 그리스 북부에서의 저항은 소멸되었다.

한편 크레타와 키프로스에서도 독립군이 조직되었다. 비록 키프로스에서는 당국의 삼엄한 감시로 적극적인 무장 투쟁은 없었으나, 주민들은 목숨을 걸고 그리스 본토로 보급품을 보내거나 혹은 참전하여 전쟁 기간동안 약 1천여명이 독립군에 합류했다. 1821년 7월 초엽, 독립군 측 서신을 압수한 키프로스 총독 퀴취크 파샤는 시리아에서 4천의 원군을 부른 후 대대적인 무기 적발 및 체포 작전에 나섰다. 7월 9일, 퀴취크 파샤는 니코시아 성을 봉쇄한 후 47명의 주요 인사들을 처형했다. 다음날에는 섬의 모든 수도사들이 처형되었고, 뒤이어 각 마을들의 그리스인 지도자들이 처형되었다. 이로써 교수형에 처해진 대주교 키프로니오스를 포함한 2천여 키프로스 주민이 처형되었다. 따라서 키프로스는 비록 독립전쟁에 직접 참여하거나 전투가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독립군 측에 많은 도움이 되었고 적지 않은 순교자를 내었다.

오스만 조정은 여러 반란 세력 중에서도 수도에서 멀지 않은 사모트라케 섬을 본보기로 토벌하기로 하여

사모트라케에서는 사모스 출신의 교관이 민병대를 조직해 훈련시켰지만, 본토에서 멀고 자체적인 탄약 생산 능력이 없었기에 방어에 취약했다.

4.3. 1822년, 독립 선포와 해외 원조

1821년 12월, 펠로폰네소스 반도 동부의 피아다 (네아에피다브로스)에 독립군 지도부가 모여 국민의회를 열었다. 1822년 새해에 국민의회는 그리스 독립을 선포했고, 1월 15일에는 알렉산드로스 마브로코르다토스와 디미트리오스 입실란티스가 각각 총리와 입법원장을 맡은 그리스 제1공화국 정부를 구성했다. 독립전쟁의 성과와 함께 유럽 각국에서는 빈 회의에 따라 (러시아가 단교를 선포한 것을 제외하면) 정부 차원의 지원은 없었지만 여론의 호응과 함께 3백여 의용군이 마르세유를 거쳐 그리스로 향했다.[12]

서유럽 각 대학에서 유럽이 그리스에 빚을 지고 있다는 취지의 강의가 열렸고, 의용병 모집과 모금 및 보급품 기부 행사가 뒤따랐다. 국가 중에서는 아이티 제1공화국이 1822년 1월 15일에 처음으로 그리스 독립을 인정했다. 다만 유럽에서는 가장 그리스에 호의적이던 러시아머저도 메테르니히의 설득에 넘어간 알렉산데르 1세가 대오스만 선전포고를 주장하던 그리스계 외무부장 요안니스 카포디스트리아스를 해임하는 등 차가운 반응을 보였다. 12월 14일에는 신성동맹이 그리스 독립군에 대해 무모하다며 비판했다.

4.4. 히오스 섬 학살 (1822년)

1822년 들어 에게해 각지에서 그리스 선박들은 오스만 선박들을 공격하며 병력 및 물자 수송을 방해했다. 3월 무렵, 사모스 섬을 장악한 독립군은 인근 큰 섬인 히오스 섬에 상륙해 튀르크 인들을 공격했으나 수비대가 성채로 피신하고 주민들 중 소수만이 호응하자 철수했다. 이후 3월 31일, 원군으로 파견된 카푸단 파샤 (대제독) 나수흐자데 알리 파샤 (카라 알리)의 함대가 히오스 섬에 당도해 약탈과 방화를 저질렀다. 4월 12일부터 오스만 군은 그리스에서의 무슬림 학살에 대한 보복이라며 그리스의 저항 의지를 꺾기 위한 본보기로 히오스에서 학살을 자행했다. 이후 아나톨리아에서 증원된 3만의 병력이 가세하여 (이슬람 개종을 거부하는) 3세 미만의 아동, 12세 이상의 남성, 40세 이상의 여성을 목표로 하여 대대적인 살상을 벌였다. 5월 7일, 영국 전함 세링가파탐이 근처를 지났지만 구조 요청을 접하고도 중립 명령을 따라 개입하지 않았다. 약 3달 간의 학살 끝에 10만이 넘었던 히오스 인구 중 최소 2만 5천이 사망했고, 4만 5천이 노예가 되었으며 1~2만명이 프사라 등지로 도망쳤다.[13]

5월 28일에는 오스만 조정에게서 크레타 총독위를 받은 메흐메드 알리가 사위 하산 파샤의 지휘 하에 파견한 이집트 함대가 크레타 서부의 수다 만에 상륙해 마을들을 불태우며 진압에 나섰다. 한편 히오스 학살에 대한 복수를 위해 그리스 정부는 34만 2천 쿠로쉬를 모아 프사라, 히드라 선박들을 중심으로 카라 알리 함대에 대한 공격 계획을 세웠다. 6월 18일 밤, 풍향이 맞고 오스만 해군이 라마단 바이람 (이둘 피트르) 축제를 맞아 경계가 느슨해진 틈에 84문의 대포를 실은 카라 알리의 기함인 만수르 알 리와에 두 화공선을 보냈다. 불은 빠르게 번졌고, 화약고에 이르자 대폭발을 일으켰다. 전함은 완파되었고, 떨어지는 돛대에 맞아 죽은 카라 알리를 포함해 2천여명이 사망했다. 2286명 중 생존자는 180여명에 불과했다. 다만 사망자 중 다수는 코스탄티니예로 팔리려던 히오스인 포로들이었다. 그렇지만 대제독의 죽음은 오스만 제국의 반격에 상당한 지장을 주었고, 그리스 독립군의 활동은 더욱 북쪽으로 반경을 넓힐 수 있었다.

4.5. 위기와 극복

오메르 브리오니의 남하 당시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포위를 풀고 도주했던 6백의 독립군은 그가 떠난 후 1822년 봄에 프랑스 자원병들과 함께 재차 포위에 나섰다. 포격이 이어지자 6월 9일, 오스만 수비대는 병력과 주민들의 아나톨리아로의 안전한 철수와 남고자 하는 튀르크인에 대한 안전 보장을 조건으로 항복했다. 하지만 항복 후 히오스 섬 학살 소식에 분노해 있던 그리스 민병대가 공격을 가해 성내 인원 중 절반 가량을 학살했고, 알바니아계 주민들에 대한 폭력과 살해가 발생했다. 한편 6월, 알리 파샤를 토벌한 후 그대로 에피로스에 주둔 중이던 후르쉬드 파샤는 기독교도 알바니아 부족인 술리오트의 습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후 해임되었다. 이후 술리오트 병력은 메솔링기에서 그리스 독립군에 합류했고, 후르쉬드 파샤의 대군은 이오안니아 총독 오메르 브리오니에게 인도되었다. 후자는 에피로스의 아르타 인근 페타에 주둔하던 알렉산드로스 마브로코르다토스 휘하 2천의 독립군 및 유럽 자원병들을 공격하기 위해 출정했다.

마브로코르다토스는 페타 마을 양쪽의 언덕에 병력을 분산했고, 켈프트 두목 고고스 바콜라스와 마르코스 보트사리스 간의 반목을 고려해 동쪽 언덕에 배치한 두 부대 사이에 타지역 부대를 두었다. 7월 16일, 8천의 오스만 군대가 초승달 형태로 다가왔고 6백의 기병대가 서쪽 언덕으로 돌격했다. 유럽 자원병들을 중심으로 독립군은 일제 사격을 가해 수차례 기병 돌격을 격퇴했다. 하지만 동쪽 언덕에서는 오스만 측과 내통한 고고스 바콜라스의 부대가 철수해버리며 알바니아 민병대가 쉽게 그리스 진영을 점령했다. 이후 오스만 군은 페타 마을을 점령, 서쪽 언덕을 후방에서 공격했다. 포위된 그리스 군은 붕괴되어 93명의 유럽 자원병 중 68명을 포함한 3백여명이 전사했고, 다수가 사로잡혔다. 이후 그리스 군은 메솔링기로 철수했다. 또한 그 무렵 신임 모레아 총독 마흐무드 드라말리 파샤가 8천 기병을 포함한 2만 대군을 모아 라리사에서 남하했다. 그의 목표는 코린트를 점령, 포위된 나플리오를 구원, 트리폴리스를 탈환이었다.

우선 지투니 (라미아)를 쉽게 점령한 그는 7월 17일, 그리스 수비대가 도주한 코린토스를 장악했다. 이후 드라말리 파샤는 이미 독립군에게 함락된 아테네 수복과 나플리오 구원 중 후자로 결정하고 남하했다.[14] 7월 24일, 오스만 대군이 아르고스에 당도하자 역시 그리스 군은 도주했다. 이에 모레아 전역에서 제1공화국의 무능에 대한 비판과 히오스 섬과 같은 학살극에 대한 공포가 일었다. 마니오트 부대는 오스만 군을 막기는 커녕 동포 난민들을 약탈하다 이탈했고, 드라말리 파샤는 후방에 병력도 남기지 않은 채 우선 항복 위기에 놓인 나플리오에 기병대를 보내 구원했다. 뒤이어 드라말리 파샤는 아르고스 인근 라리사 성채에 디미트리오스 입실란티스 휘하 수비대가 있는 것을 확인했다. 동시에 나플리오에서 합류하기로 했던 함대가 파트라스에 있는 것이 확인되자 참모들은 코린토스로 합류해 우선 보급을 받을 것을 제안했으나, 드라말리 파샤는 그대로 공격을 지시했다.

12일간 버티던 성채에는 물이 바닥났고, 디미트리오스는 항복을 요구한 사절 앞에서 6개월은 더 버틸 것이라며 허세를 부린 후 8월 3일 밤에 수비대와 몰래 빠져나와 도주했다. 한편 모레아 북부는 독립군의 청야 전술로 인해 물자 공급이 불가했고, 아르고스 남쪽부터는 포도 농장과 수로가 가득하여 기병대의 진군이 어려웠다. 이에 2월부터 파트라스를 포위 중이던 테오도로스 콜로코트로니스는 5천의 클레프트 민병대를 모아 물과 가축을 찾는 오스만 군에 대해 게릴라 전에 나섰고, 디미트리오스 등도 8천의 병력과 산지에서 기습을 가했다. 테오도로스는 더 나아가 우물을 파괴, 가져갈 수 없는 식량을 불태웠고 오스만 군은 사실상 아르고스 평원에 갇혀버렸다. 결국 8월 6일, 드라말리 파샤는 후퇴 명령을 내리며 퇴로인 데르베나키 고개의 장악에 나섰다.

선발대로 파견된 1천의 알바니아 부대는 무사히 데르베나키에 당도했지만, 기병대는 도중 화공을 앞세운 그리스 군의 기습을 받았다. 말에 올라 도망친 소수 외에 나머지 기병들은 말을 잃은 후, 도보로 도망치다가 협곡에 숨은 저격수들에 의해 전멸되었다.[15] 8월 8일에는 드라말리 파샤의 본대가 역시 기습으로 큰 피해를 입고, 무거운 짐은 모두 버리며 간신히 데르베나키를 통과해 코린토스로 돌아왔다.[16] 이때 보병들은 거의 전멸했고, 파트라스로 탈출하려던 3천여 패잔병도 기습을 받아 일부만 살아남았다. 결과적으로 드라말리 파샤의 2만 대군 중 6천명 정도만이 생환했다. '드라말리의 재앙'이란 관용어를 남긴 드라말리 파샤는 그해 말엽 코린토스에서 병사했고, 모레아는 안정을 되찾았다. 11월에는 그리스 화공선이 테네도스의 오스만 함대 공격했다.

데르베나키 전투 후 그리스 서부에서는 오메르가 남하하여 독립군이 철수한 메솔링기를 10월 25일에 파트라스 주둔 함대까지 동원해 포위했다. 6백의 병력과 대포 14문 만을 지닌 수비대에 비해 포위군은 10배가 넘었지만, 휘하 병력을 보존하고 싶던 오메르는 협상에 나섰다. 성내의 마브로코르다토스는 협상을 지연시켰고, 11월 8일에 봉쇄를 뚫은 1천의 병력 및 물자가 증원되자 협상을 파했다. 이에 약 한달간 포격을 퍼부운 오스만 군은 성탄 전야에 총공격을 계획했는데, 오메르의 그리스인 비서가 성내에 몰래 알렸다. 따라서 총공격은 실패했고, 12월 31일 오메르는 포위를 풀었다. 철수하던 도중 오스만 군은 물이 불어난 아켈루스 강을 건너다 5백여명이 익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한편, 드라말리 파샤의 철수 후 수개월간 포위된 나플리오의 수비대는 9월 중순 무렵 84척의 오스만 함대가 해상 봉쇄를 뚫으려다 화공선 공격으로 1척을 잃은 것으로도 철수하는 어이없는 사건 이후로도 계속 버텼다. 하지만 드라말리 파샤의 부고 후 희망을 잃은 나플리오 수비대는 결국 테오도로스에 항복했다. (12월)

4.6. 두 차례의 내분과 소강기

연이은 진압 시도를 모두 격퇴하며 아티카, 아이톨리아, 모레아를 확보한 그리스 독립군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다만 독립군은 각 부대마다 분열되어 있었고, 데르베나키 전투를 승리로 이끈 테오도로스의 명성이 절대적으로 높아지면서 기존의 마브로코르다토스 등 정부 인사들이 불만을 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정부가 나플리오를 국민의회 개회지로 정하며 테오도로스에게 도시를 넘기라 명하자 그는 소유권 이전 없이도 개회가 가능하다며 거부했다. 혼란 속에서 2차 국민의회는 1823년 3월 1일 아스트로스에서 열렸고, 테오도로스와 마브로코르다토스는 각각 부총리와 입법원장으로 선출되었다. 테오도로스는 수용했지만 마브로코르다토스의 입법원장 취임을 막았고, 분노한 의회는 테오도로스 등 5인 위원회를 탄핵했다. 이후 트리폴리스의 기존 행정부와 크란디에 세워진 새 행정부 간의 내전이 벌어졌고, 정부군이 2주간 트리폴리스를 포위한 끝에 구 행정부가 해체되며 테오도로스는 나플리오로 떠났다. 다만 이후로도 나플리오 반환을 두고 분쟁은 이어지며 2차 내전의 불씨로 남았다.

한편 1823년 3월, 코스탄티니예의 토파나 병기창이 폭발하며 오스만측 화약과 대포 상당수가 사라졌다. 이로써 전쟁 지속 능력이 약화된 오스만 조정은 정규군 대신 알바니아 민병대를 대거 그리스 전선에 투입했다. 사령관으로 임명된 슈코더르 (스쿠타리) 총독 무스타파 부샤티는 7월, 오흐리드에 1만 병력을 집결한 후 핀도스 산맥을 따라 남하해 카르페니시에 주둔했다. 이에 메솔롱기에 주둔 중이던 술리오트 지휘관 마르코스 보트사리스가 1천 2백의 병력과 함께 출정해 정찰 후 8월 21일에 야습을 가했다. 오스만 진영은 혼란에 휩싸였고, 격전 중 보트사리스는 복부 부상을 입은 후에도 계속 지휘다가 총에 맞아 죽었다. 그럼에도 술리오트 부대는 계속 싸워 오스만 측에 1천여 전사자를 안겼고 총 1700자루와 많은 가축을 약탈했다. 비록 오스만 군의 남하를 막지는 못했지만 큰 타격을 준 보트사리스의 장례는 메솔롱기에서 성대히 치러졌다. 8월 29일, 그리스 군이 재차 오스만 군을 기습했으나 2백여 전사자를 내며 패퇴했다.

무스타파 부샤티는 9월 17일, 오메르의 병력과 합세한 후 9월 20일에 3천 5백의 수비대가 배치된 메솔롱기를 포위했다. 오스만 군은 우선 인근의 거점인 아이톨리코 섬에 포격을 가한 후 공격했으나 격퇴되었다. 11월 17일, 250여 술리오트 부대가 오스만측 보급 물자를 장악하자 포위 진영 내의 알바니아 병사들은 식량을 두고 부족끼리분쟁을 벌였다. 결국 3일 후 무스타파 부샤티는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한편 이후 메솔링기에는 영국인 귀족 바이런 경이 자원병으로 합류했는데, 그는 1824년 4월에 그곳에서 병사했다. 1824년 2월에는 그리스 정부가 런던에 파견한 특사단이 약 1년 간의 노력 끝에 47만 2천 파운드의 차관을 얻어내어 고질적이던 자금난이 해결되었다. 그 무렵 메세니아의 민병대가 코로니 (코론) 점령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것을 제외하면 전선에서 소강기가 이어지던 그해 6월 20일, 오스만 제국의 신임 카푸단 파샤인 코자 휘스레브 메흐메트는 그리스 해군력의 중심인 프사라 섬을 침공했다. 45척에 달하는 프사라 함대는 나플리오 등 본토 곳곳에 퍼져 있었기에 2천의 오스만 군은 쉽게 상륙했고, 팔라이오카스트로 성채에 피신한 병사들과 주민들은 '자유 아니면 죽음'이라 적은 깃발을 내걸며 결사 항전했다. 이어 오스만 군이 성채에 진입하자 주민 중 안토니오스 브라차노스가 화약고에 불을 붙여 함께 폭사했다.

영국인 목격자에 의하면 '베수비오 화산과 같은' 이 폭발과 2일에 걸친 침공의 결과, 프사라 주민 및 히오스 학살 당시 피난민들을 포함한 1만 7천여명이 살해되거나 노예로 잡혀갔다. 수천여명만이 모레아로 피난했고, 프사라 섬은 폐허로 남았다.[17] 프사라 침공 후 오스만 함대는 히오스와 함께 아나톨리아와 근접한 독립군 휘하 섬인 사모스를 노렸다. 프사라 때와 달리 그리스 함대는 사모스 방어에 나섰고, 2번의 화공선 공격 중 콘스탄티노스 카나리스가 직접 조종한 후자가 성공했다. 불이 붙은 오스만 함선은 폭발하며 인근 선박과 지상군에도 피해를 주었다. 이후의 전투에서도 4번의 화공선 공격에 튀니지와 트리폴리 함선이 파괴되자 오스만 함대는 1천의 사망자 및 대포 1백문의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이를 지켜본 지상의 오스만 군의 사기 역시 저하되었고, 탈영자가 나왔다. 이날 8월 6일은 사모스의 기념일로 남았다.

사모스 해전 후 철수했던 오스만 함대는 크레타에서 발진한 이집트 전함들의 합세로 1백여 척에 이르게 되자 8월 24일부터 코스 섬 일대에 퍼져 있던 75척의 그리스 함대를 공격했다. 8월 29일에는 86척의 오스만-이집트 함대가 나머지 함대와 떨어져 인근 게론타스 만에 있던 15척의 그리스 선단에 유리한 바람을 이용해 집중 공격을 가했다. 이에 그리스 측은 구명보트까지 활용해 위치를 조정하며 화공선을 보냈고, 그로써 적 함대가 분산되자 틈을 통해 넓은 바다로 빠져나갔다. 뒤이어 풍향이 그리스 측들에 유리하게 바뀌자 그들은 재차 화공을 가했고, 이로써 튀니지 전함이 불타자 나머지 오스만 함대는 혼란에 빠져 철수했다. 이로써 사모스는 독립군 수중으로 확고히 남게 되었다. 하지만 그해 10월, 모레아파 당선자가 부재한 선거 결과에 불복한 테오도로스가 트리폴리스 주민들과 함께 봉기하며 2차 내전이 터졌다. 다만 그가 우물쭈물 하는 동안[18] 정부군이 루멜리아 및 에피로스 병력을 모아 코린토스와 아카이아로 진격했고, 1825년 1월 테오도로스는 사로잡혀 팔라미디에 수감되었다가 5월에야 이브라힘 파샤의 침공에 직면하여 사면 및 석방되었다.

4.7. 메흐메드 알리의 개입

오메르 브리오니, 무스타파 부샤티, 마흐무트 드라말리 등이 모두 실패하자 마흐무트 2세는 이미 디리야 토후국을 멸망시킨 이집트 총독 메흐메드 알리에게 지원을 부탁했다. 이미 이집트 군은 1822년 5월부터 114척의 함선이 크레타에 파병된 상태였다. 파병군 지휘관이자 메흐메드 알리의 사위 하산 파샤가 1823년 2월에 급사하자 다른 사위 후세인 베이가 포병 및 기병대를 포함한 1만 2천의 튀르크-이집트 병력과 함께 투입되었다. 그리스 정부는 1차 내전 후 소강기이던 그해 6월 23일, 엠마누엘 톰바지스를 크레타 지휘관에 임명해 다양한 파벌을 통합하게 했다. 그는 게르게리에 3천 병력을 모았으나 8월 23일, 아무르겔레스 전투에서 후세인 베이에게 3백 병력을 잃고 패했다. 이후 1824년 봄까지 후세인 베이는 독립군을 산지의 몇몇 거점으로 몰아넣었다.

그 무렵 술탄에게서 아들 이브라힘 파샤의 크레타, 키프로스, 모레아와 함께 시리아 지배권까지 약속받은 메흐메드 알리는 대규모 원정군을 준비했다.[19] 1824년 7월 19일, 전함 54척과 운송선 400척의 대규모 함대가 이브라힘 파샤의 지휘 하에 알렉산드리아를 출항했다. 함대에는 보병 1만 4천, 기병 2천, 포병 5백명에 대포 150문이 승선했다. 이집트 함대는 8월 말엽에 보드룸에서 오스만 함대와 합류했고, 5천 병력을 실은 70척의 그리스 함대와 맞섰다. 이러한 사모스 전투를 지켜본 이브라힘 파샤는 화공선의 위협으로 당장 에게 해를 건너는 것은 어렵다 여겼고, 우선 크레타와 로도스를 오가며 월동했다. 다만 그러다 1825년 들어 그리스 정부가 거의 파산하며 임금이 체불된 함대 선원들이 파업을 단행하자, 이브라힘 파샤는 모레아 상륙을 단행했다. 비록 2월 7일, 런던에서는 110만 프랑의 2번째 차관이 성사되어 그리스 독립군을 위한 증기선 구입 등이 추진되었으나 이미 이집트 군을 막기엔 늦은 때였다.[20]

1825년 2월 24일, 이브라힘 파샤는 4천 보병 및 4백 기병을 실은 50척의 선발대와 모레아 서남쪽 메세니아 반도의 메토니에 상륙했다. 며칠 내로 이집트 군은 메토니 및 코로니 성채를 접수했고, 3주 후 보병 1만 및 기병 1천의 후발대와 합류했다. 당시 내전의 여파가 있었고, 이집트 군이 강풍이 부는 겨울철에 상륙을 감행할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던 그리스 군은 제대로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스 인들은 키가 작고, 종종 기생충 감염으로 애꾸이며, 조잡한 붉은 제복을 입은 이집트 징집병들을 무시했다. 하지만 프랑스 교관의 근대식 훈련을 받은 그들은 기존의 알바니아-튀르크 군대와 달리 전선을 이탈하지 않으며 그리스 군을 연이어 격파한다. 따라서 이집트 군의 참전은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4.7.1. 이브라힘 파샤의 모레아 공세

메세니아 북단의 나바리노 만을 좋은 항구라 판단한 이브라힘 파샤가 필로스 (나바리노)로 진군하자 3월 28일, 그레고리오스 쿤투리오티스가 이끄는 그리스 군이 나플리오에서 출정했다. 하지만 후자는 3일만에 트리폴리스에서 와병했고, 다음 사령관이 된 키리아코스 스쿠르티스는 해전에는 능했어도 지상전 경험은 전무했다. 후자의 5천여 그리스 군은 필로스에서 내륙 방면인 크렘미디에 주둔했다. 뒤이어 4월 19일, 이브라힘 파샤는 3천의 보병 및 4백의 기병대와 나타났다. 키리아코스는 마을 옆 언덕에 진영을 세웠는데, 군데군데 틈이 있었고 이집트 기병대는 현지 무슬림 주민이 알려준 샛길을 통해 기습을 가했다. 그리스 군은 일제 사격으로도 격퇴에 실패하자 5백여 전사자 및 포로를 남기고 내륙 산지로 철수했다. 키리아코스의 절망적인 통솔력에 실망한 그리스 병사들은 각자의 고향을 지키기 위해 흩어졌고, 모레아 서부에서 이집트 군을 막을 세력은 없었다. 이브라힘 파샤는 '모레아 전역을 불태우고 파괴하겠다'며 엄포를 놓았고, 그리스인들 사이에서는 그가 기독교도 주민을 노예화 하여 이집트로 보낸 후 이집트 농민들을 정착시키는 '야만화 계획'이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21]

5월 8일에 이브라힘 파샤는 3천 병력과 필로스 (나바리노) 인근의 섬 스팍테리아를 공격했고, 1천여 그리스 군은 350의 전사자를 남기며 배를 타고 도주했다. 며칠 후 나바리노의 그리스 수비대가 항복했고, 그리스 함대는 화공선으로 메토니의 이집트 함선 12척을 파괴했지만 이미 이브라힘 파샤는 나바리노를 굳건한 육상 거점으로 삼은 후였다. 위기를 느낀 그리스 정부는 5월 17일, 테오도로스를 석방하며 저항을 돕도록 했다. 또한 이집트 군의 기세를 꺾고자 그리스의 사제 출신 내부무 장관인 그리고리오스 파파플레사스가 3천 병력과 나바리노 방면으로 진군, 메세니아 반도 북단의 마니아키에 주둔했다. 5월 19일 밤, 이브라힘 파샤가 6천 이상의 병력과 다가오자 그리스 병사들 중 절반 가량이 겁을 먹고 탈영했다. 그리고리오스는 애국주의 연설로 더이상의 이탈을 막았고, 다음날에 이집트 군이 공격하자 그리스 군은 결사항전 했으나 결국 압도되었다. 전투 결과 그리스 군은 그리고리오스 포함 1천여명이 전사하며 패배했고, 이집트 군도 4백여 명이 전사했다. 이브라힘 파샤는 용감히 싸운 그리고리오스의 시신을 수습해[22] 나무에 묶고는 그 머리에 입을 맞추며 '만약 모든 그리스인이 그와 같다면, 나는 이 원정을 맡지 않을 것이다'라 말하며 존경을 표했다.

6월 들어 이브라힘 파샤가 모레아 중부로 진격하자 테오도로스는 카리테나로 도주했고, 이집트 군은 수비대와 주민 모두가 떠난 트리폴리스를 무혈 점령했다. 일부 병력을 남긴 이브라힘 파샤는 5천 군대와 함께 그리스의 임시 수도인 나플리오 점령을 위해 아르고스 평원으로 나아갔다. 6월 24일, 이집트 군이 나플리오 인근의 밀 저장고인 레르나 제분소에 접근하자 그리스의 국방장관 안드레아스 멕타사스와 디미트리오스 입실란티스 등이 350의 병력과 수비에 나섰다. 레르나 제분소는 나플리오의 식량을 책임졌기에 석벽과 깊은 연못, 습지 등으로 둘러져 있는 요새였고 근해에는 2척의 전함이 방어를 도왔다. 이집트 군이 다가오자 그리스 병사들은 역시 동요했으나, 얀니스 마크리얀니스 장군은 모든 말과 선박을 숨겨 배수진을 쳤다. 얀니스는 후퇴 권유를 받자 소수의 군대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승산이 있다며 만약 죽더라도 숭고한 죽음일 것이라며 결의를 다졌다. 6월 25일, 이집트 군은 초기 공세에서 레르나 제분소의 석벽을 돌파했으나 수비대의 일제 사격으로 격퇴되었다. 이후 수비대가 검과 함께 돌격했고, 마침 나플리오에서 50명의 원군이 당도해 도왔다. 50명을 잃고 물러난 이브라힘 파샤는 적의 방어 태세가 굳건하고, 나플리오 근해의 영국 함대가 수비를 도울 수도 있다 여겨 6월 29일에 트리폴리스로 철수했다.

나플리오를 포기하며 회군하며 이브라힘 파샤는 분풀이로 아르고스에 방화하여 도시를 파괴했다. 한편 이브라힘 파샤의 진격에 그리스 인들의 반이집트 감정이 거세졌고, 보복이 계획되었다. 그 결과 8월 4일에 콘스탄티노스 카나리스가 2척의 전함과 3척의 화공선을 이끌고 이집트 해군 거점인 알렉산드리아 항에 나타났다. 그는 화공선으로 항구에 밀집 정박해 있던 이집트 함대를 기습하려 했으나 역풍이 불어 한 척의 화공선만 접근에 성공했고, 그마저도 이집트 측이 빠르게 밀어내는데 성공했다. 이후 이집트 전함들과 해안 포대의 포격이 있었으나 정확하지 못했고, 그리스 함선들은 무사히 퇴각했다. 이 소식을 접한 메흐메드 알리는 크게 분노했다고 한다. 한편 9월 말엽, 나플리오의 그리스 정부는 라깁 파샤 모스크를 국회의사당으로 개조하며 민족주의를 고취했다. 그 무렵 전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4.7.2. 3차 메솔롱기 공방전 (1825-26)

이집트 군대가 그리스 남부에서 활약함과 함께 오스만 제국은 그리스 중부에서 대대적인 반격을 준비했다. 1825년 봄, 테살리아 남부의 독립군을 소탕하며 술탄의 신임을 얻은 레쉬트 메흐메드 파샤는 '메솔링기 혹은 자네의 목' 중에 하나만 떨어질 것이라는 명령을 받은 후 오메르와 함께 8천의 정규군을 포함한 2만 대군을 모아 남하했다. 이에 3천여 메솔링기 수비대는 성형요새처럼 지그재그로 돌출된 보루를 만들고[23] 50문의 대포를 두어 교차 사격이 가능하게 대비했다. 4월 15일, 메흐메드 파샤는 메솔링기에 당도하여 휘하 4천의 그리스 노예 공병들로 참호를 파게 하며 도시를 포위했다. 이어진 공성전에서 포위군은 성벽이 무너질 때마다 돌격했지만 격퇴되었고, 남녀를 불문한 주민들은 밤새 성벽의 틈을 메웠다. 이후 포위군은 한동안 봉쇄에만 전념했다.

8월 들어 포위군은 도시를 위에서 포격하기 위해 토루를 쌓았고, 포격에 견디지 못한 수비대는 프랭클린 보루를 포기하며 그 뒤에 참호와 내벽을 세웠다. 8월 말엽, 포위군이 2번째 토루를 쌓자 수비대가 땅굴을 판 후 폭약을 넣어 파괴했다. 뒤이어 수비대는 야습을 통해 첫번째 토루도 파괴했고, 그 흙으로 성벽의 무너진 부분을 수리했다. 토루 작전이 실패한 후 포위군은 땅굴 작전에 나섰으나 역시 실패했고, 역으로 수비대가 오스만 진영 밑으로 땅굴을 파 폭약으로 터뜨렸다. 이에 오스만 병사들이 수비대의 습격에 대비하기 위해 지상의 구멍 주변에 몰려들자, 그리스 군은 그 밑에서 훨씬 더 많은 폭약을 터뜨려 많은 사상자를 야기했다. 한 그리스 병사는 당시 적진과 성벽 위로 산산조각난 살점들이 떨어져내렸다고 기술했다. 그 무렵 그리스 해군이 화공선을 통해 코린트 만의 오스만 함대를 몰아내고 메솔롱기의 보급에 성공하며 도시를 말려죽이려던 오스만측 계획은 무산되었다.

10월에는 폭우로 오스만 진영이 진탕으로 변했고, 소강 상태가 이어졌다. 승리를 확신한 그리스 진영은 칼라모스 섬으로 피신했던 여성과 아이들을 귀환시켰고, 장군 중 하나는 아예 성내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에 그리스 병사들이 밤새 축배를 들며 공포탄을 쏴대자 다음날 아침 오스만 병사들이 무슨 일로 소란이었냐고 소리쳐 물었고, '장군님 결혼식이었다'는 답을 듣자 '부부에게 장수를! 행복하길!'이라 화답하는 미담도 있었다. 이렇듯 양측은 대립하면서도 전투 외 시간에는 친근한 말을 주고 받기도 했고, 해당 결혼식 후에는 아예 기념으로 장기간 전투를 멈췄다.[24] 휴전이 이어지던 그해 늦가을, 메흐메드 알리는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1만 병력을 실은 135척을 그리스로 보냈다. 나플리오 점령 실패 후 재정비하던 이브라힘 파샤는 증원 병력과 합세한 후, 노상의 모든 것을 파괴하며 코린트 만을 건너 1826년 1월에 메솔롱기 포위망에 합류했다. 이에 영국령 이오니아 제도의 판무관 프레데릭 애덤이 양측의 중재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2월 24일부터 이집트 군은 다량의 포격에 나섰다. 3일간 메솔롱기에는 5256발의 포탄과 3314발의 박격포탄이 떨어졌고, 시가지가 대부분 파괴되었다. 그럼에도 수비대는 여성들까지 합세하여 3차례의 이집트 군의 공세를 모두 격퇴했다. 그동안에도 그리스 해군은 오스만 함대의 봉쇄를 뚫고 도시에 보급을 지속했다. 무력 점령이 어렵다 판단한 이브라힘 파샤는 도시의 완전한 봉쇄를 위해 82척의 소형 전함과 5척의 함포선을 동원해 인근 섬들에 대한 장악에 나섰다. 3월 9일, 후세인 베이가 이끄는 1천 이집트 군은 61명의 수비대가 배치된 바실라디 섬을 공격해 하루 간의 격전 끝에 점령했다. 3월 12일에는 집중 포격을 당한 돌마스, 포로스, 아나톨리콘 섬의 수비대가 항복하며 도시는 해상으로도 완전히 봉쇄되었고 그리스 해군은 더이상 보급품을 전할 수 없었다.

그후 이브라힘 파샤는 주민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거나 노예로 팔리는 조건의 항복을 제안했으나 거절되자 공격을 재개했다. 4월 6일, 레쉬트 메흐메드가 2천 알바니아-튀르크 병력과 도시에서 가까운 클레이소바 섬을 공격했으나 상륙 후 갯벌에 발이 빠졌다. 이에 수비대의 쉬운 표적이 되었고, 레쉬트 메흐메드 본인도 부상을 입으며 물러났다. 뒤이어 후세인 베이가 3천 이집트 병력과 재차 공격했으나, 수비대의 집중 사격을 받아 전사했다. 지휘관을 잃은 이집트 군은 혼란에 빠졌고, 이브라힘 파샤가 아랍어로 이건 지하드라며 독려했음에도 결국 점령에 실패했다. 클레이소바 공격으로 2천에 달하는 병력을 잃은 포위군은 봉쇄에 집중했다.

길어진 봉쇄로 굶주리게 된 주민들은 개와 고양이까지 잡아먹은 후 식재료 취급을 안하던 해초까지 먹었으나 제대로 영양분을 얻지 못해 각종 병에 걸렸다. 4500의 여자와 아동을 포함한 8천의 주민과 3천 5백의 수비대 중 다수는 피골이 상접해 제대로 걷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고, 지도부는 회의 끝에 탈출을 결심했다. 거동이 불편한 2천여 명은 집에 화약과 남아 적군과 함께 폭사하도록 지시되었고, 포로들은 전부 처형되었다. 다만 이브라힘 파샤는 블가리아인 전향자들 통해 탈출 계획을 접했고, 야간 전투에 대비했다.[25] 4월 10일 밤, 구름이 달을 가린 어둠 속에서 성벽을 지킬 5백 병력만 남기고 수비대는 세 부대로 나뉘어 5천여 주민들과 함께 널판지로 동쪽 성벽의 도랑을 건넜다. 하지만 약속되었던 루멜리아 사령관 요르요스 카라이스카키스의 배후 공격은 없었고, 구름이 걷히며 탈출을 알게된 포위군이 발포하며 소동이 일었다. 주민들이 다시 성으로 도망치는 혼란 속에서 오스만-이집트 군은 도시로 진입해 살육, 약탈, 강간을 벌였다.

아비규환 속에서 수천여명이 밟혀 죽거나 도랑에 떨어져 익사했고, 점령군의 방화로 도시는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밝게 빛났다. 포성과 절규가 뒤섞인 상황에서 탈출한 주민들도 상당수가 알바니아 민병대에게 죽거나 노예로 잡혔고, 끝까지 탈출에 성공한 인원은 8천 중 1천여명에 불과했다. 종려주일인 다음날, 이브라힘 파샤는 기병대와 함께 입성했고 폭사한 주민들 외에 나머지는 죽거나 노예로 잡혔다. 튀르크 군인들은 3천 두의 잘린 머리를 성벽 위에 진열했다. 비록 결국 함락됐지만 메솔롱기의 처절한 저항과 학살은 들라크루아 등이 작품을 남길 정도로 서유럽의 관심과 동정을 받았고, 결국 빈 체제를 어기는 군사 개입으로 이어지게 된다. 따라서 메솔롱기는 그리스에서 히에라폴리스 (성스러운 도시)로 여겨진다. 하지만 당시 전황에선 메솔롱기 함락은 그리스 측의 뼈아픈 손실이었고, 중부 전선의 붕괴로 이어졌다. 메솔롱기 함락 소식을 접한 나플리오의 의사당은 1시간 반동안 침묵에 빠졌다. 그나마 5월에 영국에서 구매한 최신형 증기선 카르테리아 호가 당도한 것이 그리스 측의 희망이었다.

4.7.3. 마니 반도 침공 (1826)

메솔롱기 함락 후 모레아로 돌아온 이브라힘 파샤는 아직 모레아에서 독립군 수중에 있는 마니 반도와 나플리오 중 후자의 침공을 결정했다. 그는 우선 서신을 보내 항복하지 않으면 헉살하겠다어 엄포를 놓었는데, 마니오트 측이 '올테면 와봐라' 식의 답변을 보내자 7천 병력과 남하했다. 6월 23일, 이브라힘 파샤는 칼라마타를 지나 반도 깊숙히 진군하다가 알미로 인근의 베르가스 요새에 배치된 2천 5백여 그리스 군의 저항에 부딪혔다. 이집트 군은 우선 육상에서의 포격을 통해 성벽을 부수려 했으나 실패하자 두 척의 전함에서 함포 사격을 실시했다. 지원사격과 함께 보병대가 8차례나 공격했으나 모두 격퇴되었고, 테오도로스가 2천의 구원 병력과 다가오자 이브라힘 파샤는 철수를 지시했다. 마니오트 부대는 이집트 군을 칼라마타까지 추격했고, 공성전 및 후퇴 도중 이집트 군은 약 2천 5백의 전사자를 내었다.

베르가스 전투와 함께 마니 반도를 관통하기 위해 아레오폴리 남쪽의 디로스 만에 상륙한 1천 5백의 이집트 군도 다수의 여성을 포함한 마니오트 부대에 패배했고, 5백명만이 6월 26일에 이집트 함대에 의해 구출되었다. 군대를 재정비한 이브라힘 파샤는 8월 들어 라코니아 출신의 그리스인 전향자 보스니아스에게 8천 병력을 주어 마니 반도를 재차 공격했다. 8월 27일, 보스니아스는 카리오폴리에서 폴리아라보스로 향하던 중 테오도로스 스타타코스와 그의 가족 13인이 버티는 성탑을 마주했다. 보스니아스는 협상에 나섰고, 그들이 항복을 수용하며 직접 무기를 가져가라 하자 응했다가 살해당했다. 이후 이집트 군은 2문의 대포로 성탑을 부수었고, 8월 28일에 폴리아라보스에 당도했다. 그곳의 험준한 암반 지대에 배치된 2천의 마니오트 부대는 노약자 주민들을 산으로 대피시키고 성벽을 요새화 해두었다. 이집트 군이 접근하자 수비대는 성을 내려와 기습했고, 이집트 군은 4백의 전사자를 내며 패주했다. 마니오트의 전사자는 10여명에 불과했다. 이후 마니 반도에 대한 침공은 없었다.

4.8. 중남부 그리스 (아테네) 전역

메솔롱기의 함락 후 레쉬트 메흐메드는 독립군 측에 자진 해산 시 사면을 제안했고, 오랜 전쟁에 지친 그리스 중부의 많은 저항 세력들이 수용하여 귀가했다. 모레아의 여러 호족들도 왈라키아와 같은 고도의 자치권을 대가로 오스만 측과 협상하려 했다. 1826년 6월 들어 아티카와 아이톨리아 등이 모두 정리되자 레쉬트 메흐메드는 모레아 밖의 유일한 독립군 거점인 아테네로 진군했다. 1년여 간 7천의 전사자를 낸 이집트 군이 모레아 내륙의 게릴라 세력 토벌에만 치중하며 합류하지 않았다. 따라서 6월 말엽, 레쉬트 메흐메드는 자신 휘하의 1만 병력으로만 아테네를 포위했다. 8월 18일에 게오르기오스가 포위망을 뚫고 도시를 구원하려 했으나, 3백의 전사자를 내며 격퇴되었다.

이후 아테네 수비대는 아크로폴리스로 철수했고, 8월 25일부터 본격적인 공성전이 시작되었다. 메솔롱기 때처럼 오스만 군은 봉쇄한 채로 포격을 가했고, 수비대 역시 메솔롱기에서 살아남은 장교들의 지휘 하에 습격과 땅굴 및 폭파로 반격했다. 한편 중부 그리스의 잔존 병력과 철수한 요르요스와 유럽 자원병들은 아테네 남쪽의 피레로스, 엘레오시스, 팔레론에 거점을 두고 가끔씩 포위망을 뚫어 아크로폴리스에 보급품을 전했다. 그는 포위군의 후방과 보급로를 여러 차례 습격했고, 11월에는 아라호바 전투에서 승리했다. 이후 그리스 군은 2월의 카마테로 전투와 4월의 팔레론 전투에서 오스만 군과 정면으로 맞섰으나 모두 패했고, 구원 가능성이 없어지자 한달 후 아크로폴리스 수비대가 항복했다.

4.8.1. 아라호바 전투 (1826)

포위된 아크로폴리스의 상황은 점점 나빠졌다. 10월 13일, 수비대를 이끌던 얀니스 구라스가 포위측 저격수에게 살해되었고 일주일 후에는 후임 지휘관 얀니스 마크리얀니스가 같은 날에만 3번이나 부상을 입었다. 그 무렵, 요르요스는 메솔롱기에서 탈출한 병력 및 휘하 민병대와 함께 코린트 만의 돔브레나로 향했다. 10월 27일, 그는 1천여 병력으로 3백의 오스만 군이 피신한 암피사 요새를 공격했다. 교전이 장기화되던 11월 14일, 리바데이아의 무스타파 베이가 3백의 기병을 포함한 2천 구원병과 남하해오자 요르요스는 포위를 풀고 맞섰다. 11월 17일, 그리스 군은 호소이스 루카스 수도원을 지나 디스토모에 주둔했다. 동시에 무스타파 베이는 오스만측 화약 저장고가 있는 아탈란티를 위협하던 그리스 정찰대를 격퇴한 후 다벨리아의 하기아 예루살렘 수도원으로 향했다. 무스타파 베이는 현지 수도원장을 요르요스의 행방 및 준비 태세를 물었고, 수도원장은 그가 아직 돔브레나에 있으며 오스만측 구원병 남하 소식을 모른다는 거짓을 고했다.

무스타파 베이는 이를 믿어 안심하면서도 수도사들이 자신의 위치를 발설하지 않도록 배신하면 죽인다고 엄포를 놓으며 감시하게 했다. 이후 그는 부관 (카히야)과 식사하며 향후 계획을 논의했는데, 터키어에 유창한 한 수도사가 엿듣는데 성공했다. 뒤이어 수도사들은 비밀리에 모여 독립군 측에 해당 내용을 전하기로 결정했다. 전령으로 낙점된 막내 수도사 판푸티오스 카리토스가 감시를 피해 디스토모 진영에 소식을 전하고 다음날 아침 보초의 인원 점검 전에 침대로 복귀하는데 성공했다. 한편 요르요스는 오스만 군의 예상 진군로 상에 있는 아라호바 마을과 그 남쪽 고개에 각각 500명, 400명의 병력을 배치했다. 동시에 디스토모와 아라호바 사이에는 공격 산호를 알릴 50명을 두었고, 일대의 저항 세력들에게 전투가 임박했음을 알렸다.

11월 18일 아침, 신호가 전달된 후 오스만 군의 선발대가 아라호바에 진입했다. 그중 알바니아 병사들이 일부 주택들에 막 뚫은듯한 총안을 수상했다 여긴 순간 교전이 시작되었고, 영문도 모르던 주민들은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 이후 오스만 본대가 합류하자, 요르요스는 전 병력을 모아 그들의 포위를 시도했다. 무스타파 베이는 5백의 병력으로 요르요스를 저지하며 나머지는 언덕과 시가지에 배치했다. 시내 바위의 오스만 군은 그리스측 우익의 공격에 결사 저항해 격퇴해 상당수를 패주시켰다. 이에 술리오트 부대가 재차 공격해 오스만 장교를 전사시키고 탈주자들을 모았다. 이에 오스만 군의 우익 일부가 도주했으나 그리스 군에게 따라잡혀 몰살되었다. 다만 나머지 오스만 군이 계속 버티자, 일부 그리스 군이 오스만 측보다 더 높은 언덕에 올라 무스타파 베이가 이끈 3차례의 반격을 격퇴했다. 이후 그리스 군이 오스만 군을 완전히 포위했고, 밤동안 양측은 목책을 세웠다.

큰 교전 없이 하루가 지난 11월 20일, 그리스 측에 450의 병력이 증원되어 아라호바 방면 도로 감시에 투입되었다. 다음날에는 압둘라 아가가 8백의 오스만 원군과 접근했다. 그는 병력을 나눠 소부대는 교란용으로써 하기아 예루살렘 수도원으로, 대부대는 그리스 군의 후방을 공격해 무스타파 베이의 탈출을 돕기 위해 제메노로 향했다. 다만 무스타파 베이가 서둘러 제메노로 출격했다 패했고, 압둘라 파샤의 선발대도 매복에 패해 30여 전사자를 내며 철수했다.[26] 포위된 오스만 군인들은 굶주림 속에서 가을의 폭우까지 맞자 협상을 요구했고, 무스타파 베이가 나섰다. 하지만 요르요스가 모든 무기와 돈을 버리고, 자신과 부관 및 동생을 인질로 두며 리바데이아 및 암피사를 할양하라는 조건을 내걸자 무스타파 베이는 사자를 보내 '전쟁!'을 3번 외치게 함으로써 거절했다. 11월 22일 아침, 요르요스는 오스만 진영에 일제 사격을 가했고 독려 중이던 무스타파 베이가 이마에 총을 맞은 후 곧 사망했다. 오스만 지도부는 그의 죽음을 감추려 했다.

다음날, 눈보라 속에서 부고를 알게된 알바니아 장교들은 협상안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싸우지 않겠다며 지휘를 맡은 부관을 위협했다. 11월 24일 낮, 압둘라 아가마저 철수하자 7백여 오스만 군은 수도원 방면의 그리스측 초소를 뚫고 탈출했다. 하지만 재정비한 그리스 군이 따라잡아 그들을 양분했고, 눈보라 속에서 3백여명만 살아남았다.[27] 이후 진영에 남은 5백여 오스만 군은 무장해제 했으나 자비를 구하던 부관까지 전부 학살되었다.[28] 전투 결과 1700여명이 사망한 오스만 군에 비해 그리스군 사상자는 30여에 불과했고, 많은 전리품을 얻었다.[29] 승리 후 요르요스는 300두의 수급으로 '오스만식' 해골 피라미드를 세웠고, 무스타파 베이와 부관의 수급 사이의 비석에 '야만족에 대한 그리스의 승리 트로피'라 적었다. 또한 그는 오스만 측의 대승 기념 방식대로 적의 귀를 잘라 염장하여 나플리오에 보냈다.

아라호바 전투는 그리스 중부 전선을 더 오래 유지시키며 독립군이 런던 조약과 유럽 열강들의 개입이 이루어질 때까지 버틸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었다. 아라호바에서의 승리는 패배감에 눌려 있던 독립 그리스 전역에서 기념되었고, 민요도 제작되었다. 이후로도 오스만 군은 지속적으로 그리스 군의 암피사 포위를 풀고 아크로폴리스 포위망을 지원하기 위해 남하했다. 그럼 요르요스는 테살리아와 아티카 간의 보급로를 방해하며 12월 5일에는 아탈란티 인근 투르코초리에서 대규모 오스만 보급대를 격파했다. 그 무렵, 프랑스인 필헬레네 샤를 니콜라 파비에가 꼭 필요로 하던 탄약과 함께 5백의 병력을 아크로폴리스에 잠입시켰다.[30]

4.8.2.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구원 실패

12월 말엽, 4개월째 포위된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구원을 위해 그 서쪽의 엘레우시아에 주둔하던 1천여 그리스 군은 2천명 이상의 병력을 증원받았다.[31] 3천 5백으로 늘어난 병력은 디오니시오스 부르바키스의 지휘 하에 메니디에 주둔했다. 1827년 1월 22일에 소규모 오스만 군을 격파한 디오니시오스는 1월 26일, 아테네 북쪽의 카마테로에 주둔했다. 그 무렵 피레우스의 무니키아 언덕에 세워진 그리스 군과 유럽 자원병들의 진영을 공격하려던 레쉬트 메흐메드는 마음을 바꿔 1월 27일, 2천의 보병 및 6백의 기병과 함께 카마테로로 향했다. 이에 디오니시오스는 선봉대와 함께 평원에 나열했고, 나머지 병력은 인근 산기슭에 배치했다. 레쉬트 메흐메드는 후자에 포격을 가하여 묶어두며 기병대로 전자를 공격해 격파했고, 이후 총공격을 가하자 그리스 군은 3백 이상을 잃으며 살라미스 섬으로 패퇴했다. 레쉬트 메흐메드는 디오니시오스의 수급을 술탄에게 전리품으로 보냈다.

한편 1827년 들어 나플리오 정부는 영국인 귀족 출신 자원병들에게 여러 부대의 지휘권을 맡겼다. 2월 5일, 영국인 토마스 고든 대령이 지휘하는 2천 3백의 그리스 군이 피레우스에 상륙해 오스만 군이 장악한 아이오스 스피리돈 수도원을 포위했다. 3월에는 테오도로스와 친한 리처드 처치와 코크란 경이 각각 육군과 해군 지휘관으로 선임되었다. 다만 후자는 그리스 임시정부 측이 화합할 때까지 상륙을 거부했고, 이에 3월 31일에 그리스 의회는 전 러시아 외무부장을 지낸 요안니스 카포디스트리아스를 총리로 선출했다. 한편 아이오스 스피리돈 수도원의 수비대는 안전 철수를 대가로 항복했으나 행군 중 사격을 당해 대부분 살해되었다.

그리스 임시정부의 통합 후, 4월 들어 리처드 처치와 코크란 경은 피레우스로 향하여 아테네 구원을 준비했다. 하지만 진군 계획일 직전인 4월 22일, 사령관으로 유력했던 요르요스가 오스만 군과 전초전 중 중상을 당하고 다음날 사망하며 그리스 군의 사기를 저하시켰다. 요르요스는 죽기 전에 오스만 군과 정면으로 대결하지 말고 보급로 차단에 주력하라 유언했다. 그러나 코크란 경은 평원에서의 야습을 주장하며 아테네 남쪽 팔레론의 3천 그리스 군에게 피레우스의 7천 병력과 합류하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피레우스 진영은 야습 작전에 대한 지휘부 간의 의견 충돌로 흩어졌다. 이에 레쉬트 메흐메드는 신속히 기병대를 보내어 양측이 합류하기 전에 팔레온 부근에 당도했고, 공격을 예상하지 못했던 그리스 군은 절반에 달하는 1천 5백이 전사했다.[32]

팔레온 전투는 독립전쟁 사상 그리스 군의 최대 패배 중 하나였고, 피레우스의 그리스 병력은 살라미스 등지로 철수했다. 따라서 완전히 봉쇄된 아크로폴리스의 수비대는 6월 5일에 항복해 프랑스 군의 감독 하에 철수했다. 1827년 여름 무렵, 그리스 독립 세력은 나플리오와 마니 반도 및 내륙 산악지대 정도로 국한되었다. 독립군에게는 최악의 순간이었고, 메흐메드 알리는 모레아를 완전히 평정하고자 1만의 2차 증원 병력을 준비시켰다. 풍전등화에 놓인 그리스 임시정부를 구원한 것은 그해 7월 6일에 체결된 런던 협정이었다.

4.9. 유럽 3국 연합군의 개입

나폴레옹 전쟁 후 피로가 쌓인 유럽은 빈 체제와 '유럽의 콘서트'로 대표되는 현상 유지 및 힘의 균형을 추구하는 외교 정책을 견지하며 그리스에 개입하지 않았다. 그러다 1823년 2월에 영국 정부가 오스만 측에 기독교도 신민들을 존중해야만 친교를 유지할 수 있다고 압박하며 태도 변화를 암시했고, 1824년과 1825년의 차관으로 런던은 사실상 독립군의 물주가 되었다. 또한 1825년 12월에 러시아의 새 차르로 부임한 니콜라이 1세는 1826년 4월 4일, 영국과 상트페테르부르크 의정서를 맺어 오스만 종주권 하에서 그리스의 자치권을 기반으로 전쟁 종식을 중재하기로 결의했다. 또한 러시아는 오스만 측에 최후 통첩을 하여 그해 10월 7일에 왈라키아, 몰다비아 공국들에서 철수하고 세르비아 공국의 자치권을 인정한다는 악케르민 협정을 맺었다.

러시아와 영국의 행보를 지켜보던 프랑스의 샤를 10세도 그리스에 대한 영향력 행사를 주장했고, 3개국은 1827년 7월 6일에 런던 조약을 맺었다. 조약문은 오스만 제국이 그리스의 자치를 인정하되 연공을 받는 등 명목상의 종주권을 유지하고, 이러한 조건 하에 한달 내로 휴전하지 않는다면 군사 개입에 나선다는 내용이었다. 한편 7월 말엽, 이집트의 메흐메드 알리는 그리스 해군력의 중심인 히드라 섬을 공격하기 위해 1만을 태운 함대를 알렉산드리아에 모았다. 그리고 8월 29일, 오스만 조정은 런던 조약 비준을 거부했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 지중해 함대가 아르고스 만으로 향해 HMS 아시아 호에서 그리스 대표단과 회담했고, 알렉산드로스 마브로코르다토스의 비준으로 군사 개입이 본격화되었다.

4.9.1. 나바리노 해전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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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에서 출항한 이집트 함대가 다가오자, 영국과 프랑스는 그리스로 오지 말 것을 경고했다. 하지만 9월 8일, 이집트 함대가 나바리노에서 기존 오스만-이집트 함대와 합류하자 4일 후 12척의 영국 함대가 근해에 나타났다. 다음날에는 8천의 러시아 함대, 7척의 프랑스 함대가 합류했다. 영국 함대 지휘관 에드워드 코드링턴과 프랑스 함대 지휘관 앙리 드 리니는 이브라힘 파샤와 협상했으나, 후자는 술탄의 히드라 원정 명령을 준수해야 한다며 맞섰다. 이에 코드링턴은 이집트 함대가 귀국 외의 행선지를 정한다면 파괴할 것이라 위협했고, 이브라힘 파샤는 그리스 군의 지속적인 공격을 불평하면서도 술탄에게 명령을 변경할 수 있는지 상주했다. 그러자 코드링턴은 일시적 휴전의 준수를 약속하며 몰타로 회항했고, 프랑스 함대 역시 에게 해로 떠났다.

하지만 9월 30일에 필리헬레네인 프랭크 해이스팅스가 증기선 카르테리아를 포함한 4척의 함대로 코린트 만에 진입, 암피사 인근 이테아 항에 주둔하던 오스만 함대를 공격해 2척을 나포하고 7척을 불태우며 도발했다. 분노한 이브라힘 파샤는 카르테리아를 반드시 격침시키겠다며 일부 전함을 보냈는데, 이테아 해전 소식을 듣지 못한 코드링턴은 오스만 함대의 움직임을 막았다. 다음날에는 이브라힘 파샤가 친히 이끈 전함도 막아섰다. 이후 3국 연합 함대가 다시 나바리노 근해에 집결하자, 협상이 파괴되었다고 여긴 이브라힘 파샤는 전투를 준비했다. 그러던 10월 20일, 기상 조건이 악화되자 연합 함대는 나바리노 만으로 피하며 이집트 함대가 히드라 섬으로 향하자 않도록 감시했다. 한편 영국 함선에서 보트를 보내 이집트측 화공선을 치워달라 요구했는데, 이집트 군인의 발포로 영국 장교가 사망했다. 이에 영국 전함이 총을 쏘고, 이집트 전함이 대포를 쏘며 교전이 시작되었다.

이집트 함대는 화공을 시도했으나 큰 효과를 보지 못했고, 압도적인 화력 하에 전함들을 잃어갔다. 코드링턴은 수차례 교전 중단을 지시했지만 안개와 포성 및 전투의 열기 속에 묻혔다. 거기에 일부 이집트 지휘관들은 영국 전함들에 곧바로 발포하지 않고 협상하려 하는 등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구체적인 전략이 실행되지 못한 이집트 함대는 2/3 가량이 침몰되거나 운항 불능이 되었고, 후자의 선원들은 적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자폭하거나 불을 질러 자침하였다. 3천 이상의 오스만 전사자 중 상당수가 그 과정에서 발생했다. 89척 중 75척이 침몰한 이집트 함대에 비해 연합 함대는 고작 3척이 운행 불능이 되는 것에 그쳤고, 사망자 수도 181명에 불과했다. 14척의 살아남은 이집트 함대는 알렉산드리아로 도주했고, 술탄은 연합국들에 배상을 요구했지만 오스만 측이 먼저 발포했다며 묵살되었다. 이에 3국의 대사들이 코스탄티니예에서 추방되었다. 승리 소식이 전해지자 그리스 각지에서 며칠간 종을 울리거나 불을 피우는 등 축하가 있었다. 하지만 영국의 조지 5세는 부적절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4.9.2. 프랑스 군의 모레아 원정 (1828)

1828년 1월 28일, 요안니스 카포디스트리아스는 나플리오에 도착해 총리가 되었다. 그는 매일 오전 5시 ~ 오후 10시까지 17시간 근무하며 테오도로스와 친분을 쌓는 등 내부 통합에 힘썼고, 외교 경험을 바탕으로 열강들로부터 더 많은 차관과 더 넓은 영토를 확보하려 노력했다.

5. 종전

1829년에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와 아드리아노플 화약을 맺고 그리스의 독립을 인정했다. 같은 해에 그리스는 런던 회의에서 국제적인 독립 국가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열강의 간섭으로 그리스는 공화국 대신 군주국으로서 독립하게 되었다. 열강은 바이에른 왕국의 왕자 오토를 그리스의 초대 왕 오톤으로 세웠다.

이 전쟁으로 오스만 제국 역사상 처음으로 오스만 제국 산하의 민족이 독립해 떨어져나가게 되었다. 다만 이때 성립된 그리스인의 민족국가는 봉기의 근원지였던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아티카 주변만을 포함하고 있었고 여전히 다수의 그리스인들은 오스만 제국의 산하에 있었다. 이후 그리스는 현재의 영토를 확보하게 되는 1912년 발칸 전쟁까지 천천히 오스만 제국이 점령하던 그리스 반도와 지중해의 섬 지역 영토를 병탄해 나갔다.

6. 여담

한편 이 전쟁은 빈 체제의 모순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빈 회의를 통해 성립된 빈 체제는 당시 유럽 내에서 타국의 영토, 주권 존중 및 간섭 금지를 내세웠으나, 예외적으로 내셔널리즘 및 자유주의 운동이 벌어지면 체제 국가 모두가 힘을 합쳐 이를 진압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그리스 독립 전쟁은 위에서 열거한 모든 사항들과 정확하게 반대되는 행위였던 것.[33] 물론 이 전쟁의 당사자인 그리스와 오스만 제국이 모두 빈 회의를 주도한 5개국이 아니었고 그리스의 독립이 유럽 내적으로 굉장한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이때는 유야무야 넘어갔으나, 결국 빈 체제는 1854년 크림 전쟁으로 신성 동맹이 붕괴되며 외교적으로는 끝을 맺는다.[34]

열렬한 그리스빠[35]였던 조지 고든 바이런이 참전했다가 사망한 전쟁이다. 이후 그리스에서는 바이런을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운 영국의 헌신적인 영웅으로 대접하고 있으며, 아테네의 제우스 신전 근처에 '바이런을 안은 아테나 여신상'을 세워 그를 기리고 있다.


[1] 이는 당시 서유럽 국가 내부에서 강력한 그리스 지지 여론이 불었던 것이 한몫했는데, 서유럽 국민들은 압재자 오스만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그리스를 당시 빈 체제 이후로 조금씩 부활하고 있던 자유주의적 시각에 투영하여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유주의 열망은 멈추지 않아서, 결국 프랑스에서 3년 후 1830년 혁명으로 샤를 10세가 퇴위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으며, 21년 후에는 전 유럽을 뒤흔든 대사건을 일으킨다.[2] 칼라마타 수비대장 술레이만 아가 아르나우토글루는 3월 들어 봉기 소식에 우려를 표하며 자신의 병력으로 클레프트가 통제되지 않자, 마니의 베이 페트로스에게 도움을 청한다. 비록 마니오트 부대를 성내로 들이진 않았지만, 그들이 주변에 주둔지를 세우는 것을 막진 못했다.[3] 테오도로스는 도시 동남쪽의 주변 언덕들에 주둔했다.[4] 미트로스 페트로바스, 파나기오티스 케팔라스 포함[5] 3월 25일은 현재까지도 그리스 독립기념일로 기념된다.[6] 이후 그리스 군대 내에서는 전리품 분배를 놓고 다툼이 일었다[7] 정확히는 새 성채인 네오카스트로. 콘스탄티노스 피에라코스 마브로미할리스의 지휘 하에 포위함[8] 그리스 군이 여인들의 옷을 벗기자 그들은 바다에 투신했고, 남은 아이들은 바위나 바다에 던져져 살해되었다[9] 오스만 핵심부와 가까웠지만 좋은 항구가 없어 사실상 세금만 내는 자치 지역이었다[10] 전향하면 장교를 시켜준다 했으나 그리스 인으로 태어나 그리스 인으로 죽는다 답하고 긴 창에 꽂혀 죽었다. 다음날까지 살아있어 지나가던 그리스 인이 고통을 끝내려 죽였다고도 함[11] 하지만 파파스는 항해 도중 사망한다[12] 대부분 프랑스, 영국, 독일, 이탈리아 출신이었다. 다만 유럽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소수지만 왔다. 의용병 중 1백 이상이 전사했다[13] 그리스 사가들은 최대 5만 명이 학살되었다고 적었다. 노예로 잡힌 이들 중에서는 이슬람 개종 후 관리가 되어 무스타파 카즈나다르, 이브라힘 에뎀 파샤 등 고관에 오른 인물들도 나왔다.[14] 유수프 파샤와 알리 파샤는 코린토스 거점을 강화하고 해군을 건설해야 한다 주장했지만 묵살되었다[15] 이때 그리스 군은 말, 보물, 가축 등 다양한 전리품을 얻었다.[16] 드라말리 파샤는 서두르다 터번과 칼도 잃어버렸다. 그리스 군은 노새 1300마리, 말 400마리, 낙타 700마리 등을 얻었다[17] 이후 1912년 10월 21일, 1차 발칸 전쟁 시에 그리스 군이 점령한다. 다만 지금도 독립전쟁 이전의 인구인 7천을 넘지 못한다[18] 아들 파노스의 전사로 큰 충격을 받았다[19] 그중 크레타, 모레아는 아예 이집트 관할로 들어감[20] 영국 측은 그리스 정부의 채무 관리 능력을 믿지 못해 그리스계 영국인 등으로 위원회를 조직해 자산 운용을 맡겼다. 역시나 그리스 정부는 1878년까지도 차관을 다 갚지 못했다.[21] 이에 그리스 내에서는 유럽의 '인도주의적 개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고, 유럽 대사들의 질문에 오스만 조정과 이브라힘 파샤는 부인했으나 서약은 거부했다. 특히 러시아는 사실이라면 퀴취크 카이나르자 조약 위반이라며 경고했다. 영국은 오스만 제국이 러시아에 무너지게 두지 않기 위해 계획을 막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22] 혈흔과 먼지를 닦았다[23] 해당 보루에는 벤자민 프랭클린, 빌럼 오라녜,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 스칸데르베그 등 독립 영웅들의 이름을 붙였다[24] 휴전 기간에 오스만 진영을 방문한 그리스인 기술자는 설계가 엉망징창이라 묘사하기도 했다.[25] 혹은 정보를 받았지만, 최소한의 출혈로 도시를 함락하기 위해 묵과했다 함[26] 그리스 군은 보급 물자를 실은 가축 80여 마리를 얻었다[27] 이것도 젤리지안나이오스란 그리스인 변절자의 도움 덕이었다고[28] 50명의 포로도 곧 병사했다[29] 많은 가축, 깃발 23개, 많은 무기와 탄약을 얻었다[30] 하지만 그 후 신이 난 수비대가 오스만 군에 난사해대며 그는 한동안 아크로폴리스에 고립되었다[31] 프랑스 군에서 복무한 콘스탄티노스 데니스 부르바키 (디오니시오스 부르바키스)가 먼저 8백 ~ 1천 병력과 루타르키에 상륙, 본래 요르요스와 합세하려 했으나 정부 지시로 엘레우시아의 바소스 마브로부니오티스와 합류했고, 파나기오타키스 노타라스가 1천 2백 병력과 합류함[32] 5명의 부족장을 포함한 모든 술리오트, 크레타 부대 및 22명의 유럽 자원병과 270명의 정규군이 전사했다.[33] 엄연한 주권국이었던 오스만 제국의 정치에 개입하였으며, 자유주의적 행위를 저지하기는 커녕 도왔다.[34] 물론 이후로도 빈 체제 자체는 여러 차레 부활과 붕괴를 반복하였고, 최종적으로는 1914년 벌어진 제1차 세계 대전을 거점으로 완벽하게 소멸하였다.[35] 19세기 유럽의 친그리스 문화와 정치 사조를 필헬레니즘(Philhellenism)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