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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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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 제2대 국왕
영국 윈저 왕조 초대 국왕
조지 5세
George V
파일:King_George_1923_LCCN2014715558_(cropped).jpg
출생 1865년 6월 3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잉글랜드 런던 말보로 하우스
(現 영국 잉글랜드 런던 말보로 하우스)
사망 1936년 1월 20일 (향년 70세)
영국 잉글랜드 노퍽 주 샌드링엄 하우스
묘소 영국 잉글랜드 버크셔 윈저 성
재위기간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국왕
1910년 5월 6일 ~ 1936년 1월 20일
영국 자치령 국왕
1910년 5월 6일 ~ 1936년 1월 20일
인도 황제
1910년 5월 6일 ~ 1936년 1월 20일
서명
파일:조지 5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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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353b4><colcolor=#fff> 가문 윈저 가문[1]
이름 조지 프레더릭 어니스트 앨버트
George Frederick Ernest Albert
아버지 에드워드 7세
어머니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공주
형제자매 앨버트 빅터, 루이즈, 빅토리아, 모드, 알렉산더 존
배우자 테크의 메리 (1893년 결혼)
자녀 에드워드 8세, 조지 6세, 메리, 헨리, 조지,
종교 성공회 (잉글랜드 국교회)
장로회 (스코틀랜드 국민교회)[2]
군사 경력
복무 영국 해군
1877년 ~ 1892년
최종 계급 중령 (영국 해군)
명예 계급 원수 (영국 육군)
원수 (영국 해군)
원수 (영국 해병대)
원수 (영국 공군)
}}}}}}}}}
파일:조지 5세 공식 초상화_루크 필데스.jpg
공식 초상화
1. 개요2. 칭호3. 재위 국가4. 생애5. 가족관계
5.1. 조상5.2. 자녀
6. 닮은꼴7. 알렉산드르 3세와의 공통점8. 고달팠던 개인사9. 기타10. 대중매체11.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조지 5세 국왕 성탄 기념 연설[3]
국민들은 곧 나를 일컬음이라.
영국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국왕이고 현 영국의 왕조인 윈저 왕조의 창시자이자 첫 국왕.

에드워드 7세의 차남이자 요절한 형 앨버트 빅터 왕세손의 동생이며 엘리자베스 2세의 할아버지이다.

큰진외증조할아버지 조지 4세의 사망 이후 80년 만에 조지라는 칭호를 쓴 국왕이다.

2. 칭호


즉위 직후 칭호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과 해외 영국 자치령의 왕, 신앙의 수호자, 인도의 황제이신 조지 5세 폐하(His Majesty George V, by the Grace of God, of 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and of the British Dominions beyond the Seas, King, Defender of the Faith, Emperor of India)'였었다. 그런데 아일랜드 독립전쟁으로 인해 북아일랜드를 제외한 영국령 아일랜드 대부분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자 1927년에 칭호법을 개정(Royal and Parliamentary Titles Act 1927) 다음과 같이 칭호를 변경하였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와 해외 영국 자치령의 왕, 신앙의 수호자, 인도의 황제이신 조지 5세 폐하(His Majesty George V, by the Grace of God, of Great Britain, Ireland and the British Dominions beyond the Seas, King, Defender of the Faith, Emperor of India)'

이때 국명의 경우엔 1927년 법 개정으로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에서 '그레이트브리튼 북아일랜드 연합 왕국'이 됐지만[5], 아일랜드 자유국영연방 탈퇴 전까지 영국 국왕을 군주로 하는 입헌군주제를 유지했다. 때문에 왕의 칭호에서는 '아일랜드'를 '북아일랜드'로 고치지 않고 남겨서 여전히 아일랜드 전체의 군주임을 나타내고, 대신 '연합 왕국'을 왕의 칭호에서 뺌으로써 북아일랜드를 제외한 아일랜드가 더 이상 연합 왕국에 속하지 않음을 나타내려 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는 공식적인 칭호상의 문제일 뿐, 실질적으로 조지 5세는 여전히 연합 왕국(UK)의 왕이었다.

3. 재위 국가

파일:British_Empire_1921.png
▲ 조지 5세가 재위중이던 1921년 최대에 달한 대영제국의 영토
국가 즉위년일 퇴위년일 재위기간 비고
<colbgcolor=#c2e68b,#4f7419> 영국 1910.5.6. 1936.1.20. 25년 259일
캐나다 1910.5.6. 1936.1.20. 25년 259일
호주 1910.5.6. 1936.1.20. 25년 259일
뉴질랜드 1910.5.6. 1936.1.20. 25년 259일
인도 제국 1910.5.6. 1936.1.20. 25년 259일 황제위
뉴펀들랜드 1910.5.6. 1936.1.20. 25년 259일 [6]
남아프리카 연방 1910.5.31. 1936.1.20. 25년 234일
아일랜드 1922.12.6. 1936.1.20. 13년 46일

4. 생애

파일:2uumb4lbcee01.jpg
파일:georgeV.webp
영국 해군 사관후보생 시절 말년의 모습[7]
1865년 6월 3일,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 재임기간에 런던 말버러 하우스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조지 프레드릭 어니스트 앨버트로 여왕의 장남인 웨일스 공 앨버트 에드워드(훗날 에드워드 7세)와 크리스티안 9세의 장녀인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공주의 3남 3녀 중 둘째이자 차남으로 태어났다. 1865년 7월 7일 유아세례를 받았다. 계승 서열은 아버지 웨일스 공 앨버트 에드워드와 형 클래런스와 애번데일 공작 앨버트 빅터 왕자에 이어서 3위였다. 그의 위로는 형 클래런스와 애번데일 공작 앨버트 빅터 왕자가, 밑으로는 프린세스 로열 루이즈, 빅토리아 공주, 웨일스의 모드 공녀와 남동생 웨일스의 알렉산더 존 공자가 있었다. 이 중 알렉산더 존은 조산아로 태어나고 하루 만에 요절했고 앨버트 빅터는 28세의 나이에 독감으로 죽었다. 그의 왕비는 테크의 메리[8][9]인데 원래는 형 앨버트 빅터 왕세손의 약혼녀였다. 그러나 그가 결혼 직전인 1892년 1월 14일에 28세의 나이에 독감으로 요절해서 조지가 형의 약혼녀 메리를 신부로 맞은 것이다.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의 뜻에 따른 결혼이었으나 둘은 평생 서로를 존중하며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다.[10] 둘은 장남 에드워드(훗날 에드워드 8세), 차남 앨버트(훗날 조지 6세), 고명딸 메리 공주, 3남 헨리와 4남 조지 그리고 5남이자 막내인 왕자를 두었다.

군주로서의 소양이 필요한 교육은 모두 후계자였던 형 앨버트의 몫이었고, 조지는 자기가 왕이 될 거라고는 까맣게 모른 채 적성을 찾아 해군 장교의 길을 걸었다.[11] 하지만 1892년 형 앨버트 왕자가 급사하며 예상치 못하게 갑자기 왕세손[12]이 되어, 전유럽의 군주제가 위태로운 상황에서 굳건한 의지와 책임감으로 왕실을 지켜내기 위해 애썼다. 한편 군주의 소양에 대한 교육을 받지 못한 것은 나중에 그의 발목을 붙잡기도 했는데, 단어 '지식인(highbrow)"과 "눈썹(eyebrow)"를 혼동하고, 심지어 철도 짐꾼의 지적 수준에 머물러있다는 평을 듣는 등 그의 형 앨버트 빅터 왕자와 더불어서 지적으로 우수하지 못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한다.

형이 사망하고 자신이 왕위 계승 서열 2위가 된 후,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요크 공작에 서임되었으며, 미래의 군주 즉위를 대비해 별도로 붙여진 교사로부터 헌법사 수업을 듣기도 했다. 한편 그는 주로 노퍽의 작은 별장인 ‘요크 별장(York villa)’에 거주했는데, 이는 그의 취미가 사냥이나 낚시처럼 일반적인 사교계나 문화생활 참여와는 동떨어진 것이었기에 그런 것이었다. 그들 내외의 삶은 왕족이라기보단 중산층의 삶에 가까웠으며, 방문자들은 그 별장을 작고 침울한 별장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실제로 부인인 메리 또한 이런 삶을 지루해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 당시 조지 5세는 이런 삶을 매우 즐긴 것으로 보이는데, 심지어 그가 모은 우표 수집 앨범에는 당시 대영제국에서 발매했던 모든 우표가 들어있었다. 그런데 그 양이 무려 각각 50쪽자리 앨범 328개.

이후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이 사망하고 아버지가 에드워드 7세로 즉위하자 자신은 계승 서열 1위인 왕세자로서 콘월 공작과 로스시 공작 작위를 받았고 9개월 동안 해외순방을 한 뒤[13] 아버지의 생일날인 11월 9일에 정식으로 왕세자인 프린스 오브 웨일스가 되었다. 1901년 남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캐나다 등 대영제국의 자치령과 식민지들을 차례로 순회했는데, 이는 당시 식민지부 장관인 조지프 체임벌린이 기획한 것으로 보어 전쟁에 참가한 식민지들에 대한 보상을 내리는 성격이 있었다. 이 행사에서 대부분의 식민지나 자치령 백인들과 여러 아프리카 지도자들로부터 환영받았지만 남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에 거주하는 보어인들은 그를 별로 환영하지 않았는데, 이는 보어 전쟁으로 인한 영국에 대한 보어인들의 반감 때문이었다.

이와는 별개로 오스트레일리아가 영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이 출범한 것이 당시였는데, 조지 5세는 호주 의회에서 오스트레일리아 연방 의회의 개회를 맡았다. 한편 그는 뉴질랜드를 방문하기도 했는데, 이는 당시 오스트레일리아나 다른 지역에 비해 본토에서 별 관심을 받지 못했던 뉴질랜드에 대한 영국인들의 관심을 키우기도 했다.

한편 1905년에는 인도를 방문했는데, 그는 인도에서 공공연하게 자행되는 백인의 인도인에 대한 인종차별에 혐오감을 느껴 인도인의 참정권을 확대하는 운동을 벌였다. 한편, 이와는 별개로 인도 방문 이후 1906년 스페인에서 벌어진 알폰소 13세의 결혼식에 참가했는데, 거기서 신랑과 신부를 노리는 암살 미수 사건이 일어나 휘말릴 뻔하기도 했다.
파일:에드워드7세_장례식_참여한_군주_사진.jpg
부왕 에드워드 7세의 장례식에서
뒷줄 왼쪽부터 노르웨이 국왕 호콘 7세, 불가리아 차르 페르디난트 1세, 포르투갈 국왕 마누엘 2세, 독일 제국 황제 빌헬름 2세, 그리스 국왕 요르요스 1세, 벨기에 알베르 1세
앞줄 스페인 국왕 알폰소 13세, 조지 5세 본인,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8세

파일:조지 5세 시대의 각국 군주들.jpg
조지 5세 시대의 각국 군주들.[14]

1910년, 부왕 에드워드 7세가 죽자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의 왕이자 인도 제국의 황제로 즉위했다. 한편 조지 5세는 즉위식에서 읽는 즉위 선언문은 성공회의 수호자라는 영국 국왕의 책무에 따라 전통적으로 반가톨릭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15], 그는 이 내용을 읽는 것을 거부했고, 결국 새로 길이가 짧아지고 반가톨릭적인 내용이 지워진 새로운 즉위 선언문이 쓰여졌다.
파일:235379-1323770146.jpg
1911년 인도를 방문해 마하라자들의 문안을 받는 조지 5세.
즉위 1년 후인 1911년 6월 22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열었다. 그 후 아일랜드와 영국령 인도 제국을 방문하였고, 델리 더르바르에 참석하여 공식적으로 인도 제국 황제에 즉위하였다. 이것은 영국 국왕이 인도 황제로서 직접 델리 더르바르에 참석한 첫 사례였다. 이 때 인도 제국의 수도를 캘커타에서 델리로 공식적으로 이전하는 것을 선포하였다. 그 후 인도 전역을 순회한 후 영국으로 돌아왔다.
파일:440px-A_Good_Riddance_-_George_V_of_the_United_Kingdom_cartoon_in_Punch,_1917.png
1917년 6월 17일, 시사잡지 <펀치>에 실린 풍자화[16]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며 왕실은 독일계 가문명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었다. 하노버 왕조빅토리아 여왕앨버트 공과 결혼한 이후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로 개명된 것에서 알 수 있듯 영국 왕실은 친가와 외가 모두 독일계 왕조였는데, 전쟁 중에 높아지는 사회주의 분위기와 군주들의 전쟁[17]이라는 국민들의 반감에 반 독일 정서까지 겹치며 왕가는 생존을 위해 개명을 고려하고 있었다.

1917년 당시 국왕 조지 5세 본인은 가문명을 바꾸는 것에 반감이 있었으나, 1917년 6월 13일 독일 제국군고타 폭격기런던을 폭격하자, 가문명은 반드시 바꿔야 할 문제로 바뀌었고, 독일어로 된 가문명을 대체할 이름들을 찾았다. 당시 언급된 주요 후보로는 플랜태저넷이나 튜더, 스튜어트 같은 옛 왕조 이름이나 '튜더스튜어트', '피츠로이', '겔프' 등이 거론되었으나 옛 왕조 이름은 끝이 안 좋았던 역사를 연상케 했고, 이외에는 이국적인 느낌이라고 거절당했다. 바로 그날 왕실 비서관이던 스탬포드햄 경이 자신이 일하고 있는 근무지이자 정복왕 윌리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왕실 별궁인 '윈저 성'의 이름을 따 가문명으로 제안하여 받아들여졌다.[출처]

이때 덩달아 강제로 개명된 가문 이름이 독일의 명문가 바텐베르크(Battenberg)이다.[19] 독일어로 산(山)을 뜻하는 '베르크(berg)'를 같은 의미의 영단어 '마운트(mount)'로 고치고, '바텐(Batten)'을 영어식 독음인 '배튼'으로 바꾼 뒤 본래 배열과 바꿔서 '마운트배튼(Mountbatten)'으로 개명했다. 조지 5세의 친척들이기도 했던 바텐베르크 가문 사람들은 "그동안 영국을 위해 헌신한 대가가 성씨를 갈아버리는 거냐"며 반발하기도 했다.[20] 사촌인 독일 제국의 황제 빌헬름 2세는 '윈저의 즐거운 아낙네들'이라는 희곡 제목을 비꼬아서 "셰익스피어의 희극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즐거운 아낙네들'을 봐야겠다"고 빈정댔다.[21]

하지만 전쟁이 끝난지 약 두 달 후인 1919년 1월 18일, 막내아들인 존 왕자가 13세의 나이에 뇌전증으로 사망했다.[22]

그래도 이 바텐베르크 가문은 그나마 형편이 나은 축에 속한다. 이들은 독일어를 영어로 바꾼 수준으로 개명했지만, 독일과의 연관이 더 큰 가문들은 얄짤없이 원래 이름을 내다버려야 했다. 예를 들자면 메리 왕비의 친정인 테크 공작 가문은 원래 이름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이 케임브리지 가문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이름을 쓰게 되었고,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가문 친척들은 독일의 본가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폐위되어 버리게 되었다. 애초에 개명을 명령한 영국 왕실 본인들부터 독일 색채를 완전히 뺀 윈저로 개명했으니, 그나마 독일식 성의 흔적을 남긴 바텐베르크 가문은 영국 왕실도 못 누린 혜택을 받은 셈이다.

당시 자유당 정부에서 1911년에 예산안에 대해 상원의 거부권을 무력화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려 했는데, 조지 5세는 상원을 압박해 1911년 의회법(Parliament Act)을 통과시켜 국민이 직접 선출한 서민원이 선출되지 않은 귀족원에 대해 우위를 점하게 만들었다. 한편 1928년에 대공황이 벌어지자 대공황 수습 대책을 대신들과 논의하기도 했다.

1915년에 있었던 낙마 사고와 제1차 세계 대전, 지속적인 흡연 등이 맞물려 건강이 점점 악화되었다. 만성적인 기관지염으로 세 차례나 요양을 갔고 1928년 11월에는 패혈증에 걸렸다. 말년에는 산소 호흡기에 의존해야 했으며 의식이 오락가락했다. 어쩌다가 의식이 돌아오더라도 치매에 걸려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헛소리를 계속했으며[23] 주위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당시 주치의인 도슨 경은 안락사를 옹호하던 의사였는데, 조지 5세가 감기 증세까지 겹쳐 임종이 임박해지자 국왕의 위엄있고 평안한 죽음을 위하여 조지 5세의 의사를 묻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치사량의 약물을 주입했다. 강한 종교적 신념이 있었던 메리 왕비웨일스 공은 이를 분명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기에 그들의 의사는 묻지 않았다. 아무튼 왕실 관계자들이나 간호사든 간에 그냥 통상적인 주사를 놓는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도슨경의 의도를 몰랐고, 주사를 놓은지 약 1시간 뒤인 1936년 1월 20일 밤 11시 55분에 세상을 떴다.[24] 조지 5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제국은 어떠한가?"[25]라고 당시 비서가 증언을 했지만, 진짜로 죽는 순간을 끝까지 지켜봤던 주치의 도슨 경의 기록에 의하면 조지 5세의 마지막 말은 간호사가 진통제로 모르핀을 주사하려고 했을 때 했던 "이 빌어먹을 놈아"였다고 한다. 이 사실은 한참 동안 비밀에 묻혀졌다가[26] 50년 뒤인 1986년에 공개되었다. 참고로 도슨 경이 조지 5세의 승하 소식을 전한 곳이 타임지였다.

생전에는 자식들한테 매우 엄격하기로 유명했는데 이게 좀 막장 부모 수준이었다.[27] 그러나 성격이 난폭했다거나 자식들에게 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유년 시절부터 사관학교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배운 인간관계가 군대식 인간관계 뿐인 게 문제였다. 자식들이 어렸을 때에는 다정하게 대해줬는데, 좀 더 자라서 본격적으로 교육을 시작할 때가 되자 문제가 생겼다. 본인이 경험한 거라고는 군대식 교육법 뿐이었기 때문.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데이비드 캐넌다인 교수는 조지 5세에 대해서 '국민의 아버지 노릇은 완벽하게 했으나, 정작 자기 아이들 아버지 노릇하는 법은 끝내 배우지 못했다'고 평했다. 그것 때문에 자식들과의 관계도 별로 좋지 못한 편이었다고. 그래도 반항하기 일쑤였던 장남 에드워드 8세보다는 눈물 많고 소심했지만[28] 말 잘 듣던 차남 조지 6세를 좀더 편애했다고도 한다.

그래도 무서운 아버지가 손주바보 할아버지가 되는 경우가 곧잘 있는 것처럼, 손녀들이 태어난 뒤로는 할아버지 노릇은 잘 했다. 오죽하면 말년에는 차남이 왕이 돼서 손녀한테 왕관을 물려줬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였다고. 물론 속썩이는 장남이 못마땅했던 것도 감안해야겠지만, 그냥 '차라리 둘째가 낫겠다' 하는 정도를 넘어 '손녀에게 왕위가 갔으면 좋겠다'고까지 한 걸 보면 손녀바보였던 게 맞는 듯하다. 그리고 조지 5세가 차남에게 왕위를 물려주지는 못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장남인 에드워드 8세월리스 심프슨과 결혼하겠다며 왕위를 포기하고 퇴위하자, 차남인 조지 6세가 왕이 되고 그의 장녀(즉 조지 5세의 장손녀)가 후계를 이어 엘리자베스 2세가 되었기 때문.

5. 가족관계

5.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조지 5세
(George V)
<colbgcolor=#fff3e4,#331c00> 에드워드 7세
(Edward VII)
<colbgcolor=#ffffe4,#323300> 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자 앨버트
(Prince Albert
of Saxe-Coburg and Gotha)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 1세
(Ernest I, Duke of Saxe-Coburg and Gotha)
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공녀 루이제
(Princess Louise of Saxe-Gotha-Altenburg)
빅토리아 여왕
(Victoria)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
(Prince Edward, Duke of Kent and Strathearn)[29]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빅토리아 공녀
(Princess Victoria of Saxe-Coburg and Saalfeld)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공주
(Princess Alexandra
of Denmark)
크리스티안 9세
(Christian IX)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빌헬름

(Friedrich Wilhelm,
Duke of Schleswig-Holstein-Sonderburg-Glücksburg)
헤센카셀의 루이세 카롤리네
(Princess Louise Caroline of Hesse-Kassel)[30]
헤센카셀의 루이제
(Princess Louise of Hesse-Kassel)
헤센카셀의 빌헬름
(Prince William of Hesse-Kassel)
덴마크의 샤를로테 공주
(Princess Charlotte of Denmark)[31]

5.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남 에드워드 8세
(Edward VIII)
1894년 6월 23일 1972년 5월 28일[32] 월리스 심프슨[33]
2남 조지 6세[34]
(George VI)
1895년 12월 14일 1952년 2월 6일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슬하 2녀[35]
1녀 프린세스 로열 메리
(Mary, Princess Royal)
1897년 4월 25일 1965년 3월 28일 6대 헤어우드 백작
헨리 래슬스

슬하 2남[36][37]
3남 글로스터 공작 헨리 왕자
(Prince Henry, Duke of Gloucester)
1900년 3월 31일 1974년 6월 10일 앨리스 몬터규 더글러스 스콧[38]
슬하 2남[39]
4남 켄트 공작 조지 왕자
(Prince George, Duke of Kent)
1902년 12월 20일 1942년 8월 25일 그리스와 덴마크의 마리나 공주[40]
슬하 2남 1녀[41]
5남 영국의 존 왕자
(Prince John of United Kingdom)
1905년 7월 12일 1919년 1월 18일

6. 닮은꼴

파일:3982198321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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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쪽이 니콜라이 2세고 조지 5세인지 찾아보자.[정답]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와는 서로 이종사촌 형제 관계로 조지 5세가 세 살 연상이었다. 조지 5세의 모후인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공주니콜라이 2세의 모후인 덴마크의 다우마 공주가 친자매였다.[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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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진 모두 오른쪽이 영국의 왕비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공주
왼쪽이 러시아의 황후 덴마크의 다우마 공주다.

자매였던 어머니들이 쌍둥이처럼 빼닮았듯 사촌이었던 조지 5세와 니콜라이 2세 또한 몹시나 닮았다. 둘이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 쌍둥이로 보일 정도. 외모도 비슷하고 키도 거의 비슷한 덕분에 사촌형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니콜라이 2세는 피로연에서 신랑으로 착각한 사람들에게 축하받는 해프닝을 겪기도 했다. 또한 러시아 혁명 이후 러시아 황족들이 모조리 죽어나가는 와중에 모국인 덴마크로 망명한 이모 마리아 황태후가 영국을 방문했을 때, 조카인 조지 5세를 보고 죽은 아들이 살아 돌아온 것으로 착각했다는 웃지 못할 일화도 있다.[44]

반면 성격은 정반대였는데 조지 5세는 근엄하고 엄격하다 못해 혹독한 일면이 있는 성격인 것에 비해, 니콜라이 2세는 우유부단하고 남에게 끌려다니는 성격이었다. 일국의 통치자로서의 면모도 정반대였다. 조지 5세는 가족에게는 가혹할지언정 나라를 전쟁의 위기에서 지킨 반면, 니콜라이 2세는 가족에게는 다정했었으나, 나라를 파국으로 몰고갔다. 일각에서는 차라리 조지 5세가 러시아의 차르였고 니콜라이 2세가 영국의 왕이었다면, 러시아의 운명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예상도 있다.

둘 다 할아버지, 아버지보다 키가 작은 것도 똑같다.[45]

독일의 빌헬름 2세와도 고종사촌 관계[46]이지만 이쪽은 그렇게 닮은 편은 아니다. 빌헬름이 형이다.

외모 뿐 아니라 평소 취향도 닮은 편이었고, 사람들에게 인기도 받는 편인데, 진짜 자녀 교육 방식은 각자 다르다. 조지 5세 집안은 아들부잣집[47]에 딸 한 명이 있고, 니콜라이 2세 집안은 반대로 딸부잣집에 아들 한 명이 있는데[48], 니콜라이 2세는 정말이지 자식들에게 온화하고 다정다감한 아버지였지만, 조지 5세는 다혈질에 군인 특유의 괄괄한 성미 때문에 자녀들에게 항상 고함만 쳤고 특히 에드워드 8세와의 사이는 가장 안좋았다. 또한 정치 성향도 정반대였는데 내치에 전력을 다한 조지 5세와는 달리 니콜라이 2세는 나라를 사이비 교주에게 맡긴 채 사실상 방치해버렸다. 그 결과 니콜라이 2세와 그 일가족은 혁명이 일어나는 와중에 비명횡사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지만 조지 5세와 그 일가족은 천수를 다 누렸고 그의 증손자는 현재도 영국의 국왕이다.

7. 알렉산드르 3세와의 공통점

이종사촌동생인 니콜라이 2세와 도플갱어 수준으로 똑같이 생겨서 자주 비교되고는 하지만 그것만 빼면 오히려 니콜라이 2세의 아버지로 이모부인 알렉산드르 3세와 공통점이 더 많다.

차이점이 있다면 조지 5세의 윈저 왕조는 지금도 영국의 군주를 하고 있지만 알렉산드르 3세의 로마노프 왕조는 알렉산드르 3세 사후 다음 군주인 니콜라이 2세러시아 혁명으로 멸망했다.

8. 고달팠던 개인사

살아생전 개인으로서의 삶은 우여곡절이 많았다. 물론 다른 친척들이나 군주들이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빌헬름 2세처럼 군주제가 폐지되면서 폐위되거나 총살까지 당한 니콜라이 2세에 비할 바는 되지 못하지만.[50]

9. 기타

10. 대중매체

11.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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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생애
재위 시기 조지 5세 시대 (제1차 세계 대전)
가족 관계 가족 관계
아버지 에드워드 7세 · 어머니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 배우자 테크의 메리 · 형 앨버트 빅터 · 동생 프린세스 로열 루이즈, 웨일스의 모드 · 장남 에드워드 8세 · 차남 조지 6세 · 장녀 프린세스 로열 메리 · 3남 글로스터 공작 헨리 왕자 · 4남 켄트 공작 조지 왕자 · 5남 영국의 존 왕자
기타 God Save the King · 윈저 왕조 ·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 · 대영제국 · 조지 5세 거리 · 킹 조지 5세급 전함 (킹 조지 5세급 전함(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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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인해 가문 이름을 색스코버그고타에서 윈저로 변경.[2] 영국 국왕은 잉글랜드에서는 성공회 신자로, 스코틀랜드에서는 장로회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며, 빅토리아 여왕 시대부터 왕족이 밸모럴 성에 거주할 때는 크래디 커크에서 예배하는 전통이 시작되었다.#[3] 1932년 크리스마스에 라디오를 통해 방송된 연설로, 역대 영국 국왕 중 최초의 방송 연설로 기록됐다.[4] 형 앨버트의 사망으로 왕의 장남 자격으로 콘월 공작 작위 수여.[5] 그런데 영국이 아일랜드를 분리시킨 건 1922년이다. 5년 넘게 똥배짱[6] 뉴펀들랜드는 1949년까지 형식상으로나마 자치령으로 남아 있었지만, 대공황의 여파로 경제가 붕괴하여 1934년부터 영국에 직할 통치를 요청하여 실질적으로는 영국에서 파견된 뉴펀들랜드 정부위원회(Newfoundland Commission of Government)가 통치하는 속령에 가까웠다.[7] 컬러복원한 사진[8] 외숙모 올가 왕비의 6촌 동생이기도 하다. 조지의 장인이자 메리 왕비의 아버지인 프란츠 폰 테크가 올가 왕비의 어머니 알렉산드라 대공비의 외사촌이다.[9] 둘 다 조지 3세의 후손이다. 조지 3세가 조지 5세에게는 진외고조할아버지가 되고 메리에게는 외증조할아버지가 된다. 따라서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과 장모 메리 애들레이드는 사촌 관계이기도 하다.[10] 비슷한 사례로 이모부이자 러시아 황제인 알렉산드르 3세가 있다.[11] 어릴 때부터 밀덕이었으니 덕업일치를 이룬 것이다.[12] 이때는 아직 할머니 빅토리아가 살아있었기에 아버지 에드워드도 왕세자였다.[13] 이때 자녀들은 조부모인 에드워드 7세와 알렉산드라 왕비 부부에게 맡겨져 각별한 사랑과 돌봄을 받았고 특히 웨일스 공비 메리는 자녀들을 매우 아껴서 자녀들과 떨어지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공무로 떨어져 눈물을 흘리기도 할 정도였다.[14] 경술국치 이후라 순종은 없다.[15] 이전 19세기까지만 해도 영국의 가톨릭 신자들은 사회의 여러 영역에서 공공연한 차별과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16] 영국 제국관을 쓴 조지 5세가 독일산(Made in Germany) 왕관을 빗자루로 쓸어버리는 모습을 통해 영국의 왕조명 변경 사건을 풍자했다.[17] 프랑스미국을 제외하고 주요 참전국들이 대부분 군주국이었으며, 이런 반 군주 분위기는 1차 대전 말기부터 러시아 제국로마노프 왕조, 독일 제국호엔촐레른 왕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합스부르크 왕조 등 수많은 군주 가문들의 몰락으로 이어진다.[출처] 다큐멘터리 '윈저 이야기: 영국 왕실의 비밀'[19] 19세기 중엽 헤센 대공 루트비히 3세의 동생 헤센의 알렉산더 공자율리아 하우케귀천상혼으로 생겨난 가문이다.[20] 다만 바텐베르크의 경우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제1해군경에 있었고 얼마 뒤 중순양함 세척이 독일 유보트에 1척에게 격침된 사건으로 비난을 받았던 이유가 있었다. 격침된 것 자체가 비난받을 건 아니고 고작 잠수함 한 척에게 중대형함이 격침당하는 건 분명 해군성에 스파이가 있을 것이고 그 스파이는 독일계인 바텐베르크 가문일 거라는 이야기. 결국 해군성의 바텐베르크는 제1해군경에서 사직해야 했고, 가문은 결국 마운트배튼으로 개명한다. 이 해군성의 바텐베르크의 둘째 아들이 마지막 인도 총독이자 제1해군경을 지낸 루이 마운트배튼.[21] 정작 이렇게 말해놓고 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고 끝내 폐위당해 현재까지 가문 전체가 복권되지 못한 사람은 빌헬름 2세다.[22] 존은 뇌전증 뿐만이 아니라 지적장애까지 앓고 있었으며 형제들과도 멀리 떨어져 지내곤 했었고 1916년부터 공식 석상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여담으로, 존보다 11살이나 많았고 존과 함께 지낸 적이 거의 없었던 형이자 조지 5세의 장남인 에드워드 8세는 동생의 죽음을 유감스럽고 성가신 것이라고 여겼다고 한다(...)[23] 영화 킹스 스피치에 묘사된다.[24] 사망한 또 다른 원인은 여동생들 중에서도 특히 가장 사이가 좋았던 둘째 여동생인 빅토리아 공주가 자신의 저택에서 죽자 이에 여동생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아서 조지 5세가 빅토리아의 사후 한 달만에 죽었을 수도 있다.[25] 이것도 내치를 걱정했던 왕의 마지막 의무감 같은 것으로 해석하기 어렵다. 조지 5세는 마지막 순간에 치매에 걸린 상태였으며, '제국'도 무슨 살아있는 사람처럼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지 5세가 정신을 차렸을 때마다 기억 속에 있던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냐는 식으로 묻는 와중에 나온 것이 제국은 어떤가였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게 들렸다는 듯.[26] 도슨 경이 1945년 사망할 때까지도 상원의원직을 역임한 거만 봐도 왕실관계자가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훨씬 뒤였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27] 원래 왕위에 오를 예정이 아니었고 본인도 직업군인으로 살려고 했기 때문에 군인 정신이 매우 강했다. 그와 반대로 아버지 에드워드 7세는 조지 5세의 자식들과 자주 놀아주며 손주들을 많이 예뻐해줬다.[28] 말더듬 증세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유명하다. 자세 교정을 받으면서 더 심해졌다고. 후일 언어치료를 받아 증세가 어느 정도 호전되고 연설에 대한 두려움도 극복했다고 한다.[29] 조지 3세의 4남이다.[30] 프레데리크 5세의 외손녀이다.[31] 프레데리크 5세의 손녀이다.[32] 조지 5세 자녀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았다.[33] 살면서 유일하게 결혼했던 심프슨과의 사이에서 적자녀는 없지만, 결혼하기 전 만나던 애인과의 사이에서 사생아를 낳았다는 루머가 꽤 있다.[34] 4남 조지 왕자와 이름 같냐는 말이 있는데 본명이 앨버트 프레더릭 아서 조지이고 왕명을 퍼스트 네임이 아닌 미들네임 중에서 채택하였다. 할아버지인 에드워드 7세와 증조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왕이 되기 전까지는 앨버트 왕자라고 불렸다. 에드워드 7세도 마찬가지.[35] 엘리자베스 2세, 스노든 백작부인 마거릿 공주.[36] 7대 헤어우드 백작 조지 래슬스, 제럴드 래슬스[37] 메리 공주의 가계는 다른 형제들에 비해 상당히 복잡하고 구성원이 많은 편이다. 사생아들도 상당한 데다가 다들 자식들을 비교적 많이 낳았기 때문. 사생아의 사생아라는 가계도 있다.[38] 영국 왕실 인물 중 가장 장수한 인물. 1901년 12월 25일에 태어나 2004년 10월 29일 만 102세로 사망하였다.[39] 글로스터의 윌리엄 공자,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 공자.[40] 요르요스 1세의 손녀이자 필립 공과는 사촌지간이다.[41] 켄트 공작 에드워드 공자, 아너러블 레이디 오길비 알렉산드라 공녀, 켄트의 마이클 공자.[정답] 세 사진 모두 오른쪽이 조지 5세다. 이 둘은 성격 차이 때문에 인상이 서로 다른데 눈을 보면 알겠지만 조지 5세는 군인 성격 때문에 인상이 억세고 니콜라이 2세는 순한 인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키는 니콜라이 2세가 더 크다. 니콜라이 2세가 170cm, 조지 5세가 168cm.[43] 친자매였어도 결혼 후의 생활은 전혀 달랐다.[44] 사실 마리아 황태후는 죽을 때까지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그 때문에 죽은 아들이나 손자, 손녀를 사칭하는 자들이 있으면 호통을 치며 만나지도 않았다고 한다.[45] 조지 5세의 할아버지인 앨버트 공의 키는 180cm, 아버지인 에드워드 7세의 키는 173cm고 니콜라이 2세의 할아버지인 알렉산드르 2세의 키는 186cm, 아버지인 알렉산드르 3세의 키는 190cm다.[46] 조지 5세의 첫째 고모인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빌헬름 2세의 어머니다.[47] 참고로 아들부잣집 끝판왕은 빌헬름 2세다. 슬하에 6남 1녀.[48] 참고로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딸부잣집에 유일한 아들이 혈우병 환자여서 아들 병 고치려고 그리고리 라스푸틴을 등용했다가 러시아 제국이 멸망하는 데 한몫해서 부각이 잘 안 되는데 니콜라이 1세 이래로 러시아 황실은 아들부자들이 훨씬 더 많았다. 니콜라이 1세가 4남 4녀, 알렉산드르 2세가 6남 2녀(귀천상혼 자녀까지 합하면 8남 4녀), 알렉산드르 2세의 남동생들인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이 4남 2녀,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이 2남,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이 6남 1녀를 두었다. 알렉산드르 2세의 차남 알렉산드르 3세가 4남 2녀, 그 밑에 동생인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이 4남 1녀를 두었고, 사촌인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대공이 6남 3녀,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대공이 6남 1녀를 두었다.[49] 알렉산드르 3세의 형 니콜라이 황태자의 키는 193cm, 조지 5세의 형 앨버트 빅터 왕태손의 키는 185cm로 190cm의 알렉산드르 3세, 168cm의 조지 5세보다 키가 크다.[50] 그래도 빌헬름 2세는 다른 군주들과는 달리 군주제 폐지 이후로도 많은 재산을 가지고 네덜란드로 망명해서 천수를 누리다 갔다.[51] 특히 빅토리아와 사이가 좋았다. 빅토리아가 사망한 1달 뒤, 조지 5세 본인도 사망했다.[52] 다만 모드 왕비는 둘째 오빠 조지 5세가 사망한 2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53] 숙부 에든버러 공작 알프레드 왕자의 장녀[54] 장남 에드워드 8세, 차남 조지 6세, 손녀 엘리자베스 2세, 증손자 찰스 3세.[55] 제1차 세계대전 전후로 승전국과 패전국, 그리고 양쪽의 식민국들 대부분은 군주제가 폐지되고 공화정이 수립되었다.[56] 다만 빌헬름 2세는 조지 5세의 아버지이자 본인의 외삼촌인 에드워드 7세에게 사탄이라고 패드립을 친 바 있다.[57] 그 이유는 니콜라이 2세의 아내인 알렉산드라 황후가 독일 헤센 대공국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은 1차 세계 대전의 적국이었던 대독 감정이 아주 좋지 않아서, 알렉산드라 황후까지 망명시킬 경우 정치적으로 큰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이 밖에도 피의 일요일 사건의 부적절한 대응으로 인해 러시아는 물론, 타국에서도 니콜라이 2세의 평가는 최악의 폭군 그 자체였다.[58] 또한 니콜라이 2세를 구했다가 영국의 노동자 계급을 자극하여 영국에서도 러시아처럼 공산주의 혁명이 터질 수 있다는 점도 문제였다. 러시아에서 인류역사상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 제정이 붕괴되자, 유럽 각국의 노동자 계급이 그에 영향을 받아 공산주의에 대한 관심과 지지가 높아졌다. 당시 영국 노동자들의 상황이 열악하여 자본가 및 귀족에 대한 반감이 치솟는 상황이었는데, 영국 정부와 왕실이 나서서 니콜라이 2세 일가를 구출한다면 영국 노동자들이 그에 불만을 품어 공산주의 혁명이나 폭동이 터질 가능성이 있었다.[59] 참고로 조지 5세는 니콜라이 2세의 아내인 알렉산드라 황후와도 사촌 남매였다. 조지 5세의 둘째 고모 앨리스 모드 메리의 딸이 알렉산드라.[60] 조지가 몰타에 있었던 건 해군 장교 시절이다.[61] 실제로는 루이 14세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62] 첫 번째는 건조되기 전에 HMS Monarch로 이름이 바뀌었으므로 제외하면 2차례.[63] 젊은 시절 키는 170cm이다.[64] 빅토리아 여왕의 막내딸 베아트리스 공주의 고명딸.[65]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의 자녀들.[66] 특히 큰아들과 넷째 아들 켄트 공작 조지 왕자가 속을 많이 썩였다. 이에 비해 병약하고 말을 더듬었지만 왕족으로서의 의무에 충실하려 했던 조지 6세가 조지 5세의 눈에 흡족했을 만하다.[67] 막내아들 은 뇌전증으로 1919년 1월 18일, 13살의 나이에 사망했다.[68] 약간 치매 증상을 보인다. 이런 아버지를 걱정하는 조지 6세와 달리 에드워드 8세는 "그 꼰대, 아직도 멀쩡하면서 나한테 양위하려고 쇼하는거임"이라는 막말도 서슴치 않는다.[69] 이러한 1인 다역이 가능한 이유는 앞서 서술된 문단에서도 보다시피, 서로가 친척지간인 데다 특히 조지 5세는 니콜라이 2세와 도플갱어로 착각할 정도로 많이 닮아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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