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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da00><colcolor=#000000> 벨기에 제3대 국왕 알베르 1세 Albert I | |||
출생 | 1875년 4월 8일 | ||
벨기에 브뤼셀 | |||
사망 | 1934년 2월 17일 (향년 58세) | ||
벨기에 나뮈르 마르셰르담 | |||
재위기간 | 벨기에인의 왕 | ||
1909년 12월 23일 ~ 1934년 2월 17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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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네덜란드어: 알버르트 레오폴트 클레먼스 마리아 메인라트[2] (Albert Leopold Clemens Maria Meinrad) | ||
프랑스어: 알베르 레오폴드 클레망 마리 맹라드 (Albert Léopold Clément Marie Meinrad) | |||
아버지 |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왕자[3] | ||
어머니 |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의 마리 | ||
형제자매 | 보두앵, 앙리에트, 조제핀 마리, 조제핀 카롤린 | ||
배우자 |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1900년 결혼) | ||
자녀 | 레오폴드 3세, 샤를, 마리조제[4] | ||
종교 | 가톨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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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알베르 1세의 어진이 있는 금화와 우표 |
▲ 알베르 1세 부부의 사진이 있는 회중시계. 뒷면에는 벨기에 왕실 문양이 있다. |
벨기에의 제3대 국왕.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벨기에군을 이끌고, 전후에 국가의 재건을 지도한 국왕으로 알려졌다.
2. 생애
레오폴드 2세의 조카로 왕위에 올랐다.[5]에드워드 7세의 장례식에서. 뒷줄 왼쪽부터 노르웨이 국왕 호콘 7세, 불가리아 차르 페르디난트 1세, 포르투갈 국왕 마누엘 2세, 독일 황제 빌헬름 2세, 그리스 국왕 요르요스 1세, 그리고 맨 오른쪽이 알베르 1세 본인. 앞줄은 스페인 국왕 알폰소 13세, 영국 국왕 조지 5세,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8세. |
1909년에 즉위한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전에 벨기에 육군을 강화시키는 일을 하였으며, 1913년 징병제 제안의 찬성을 얻었다. 1914년 여름에는 독일과 프랑스 각국에게 벨기에의 중립을 천명하였고, 8월 2일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독일군 벨기에 영토 통행 요구를 거부하였다.
이틀 후에 독일군의 침공이 시작되었는데 알베르 1세가 직접 벨기에군의 총지휘를 맡았으나, 10월에 일어난 안트베르펜의 함락 후에 이세르 강으로 후퇴 명령을 내렸다. 그 이후, 독일군은 플랑드르 남서부를 제외한 벨기에 전역을 차지하였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전쟁 중 군대와 함께 지속적으로 항전했고 드판(De Panne)에 있는 사령부에 남아 전선을 시찰했다. 1918년 9월에 협상국의 공세로 반격이 시작되자 프랑스-벨기에 연합군의 사령관을 지내면서, 오스탕드와 브뤼헤를 탈환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런 1차 대전 당시 활약 덕분에 군인왕(Koning-Soldaat)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알베르 1세의 아들인 레오폴드 3세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무능한 행보로 결국 전후 쫓겨나다시피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떠나야했던 점을 고려한다면 상당히 비교되는 행보. 실제로 전쟁 당시 벨기에군이 착용한 철모인 아드리안 헬멧을 착용하고 찍은 사진이 지금도 알베르 1세를 대표하는 사진 중 하나다.
종전 이후 15년 동안 국가의 재건에 힘쓰면서 독일군에 의하여 파괴된 산업의 재건을 추진하였다. 또 이 시기 벨기에의 주요 정당이었던 가톨릭당, 자유당, 사회당을 묶어 거국중립내각을 구성하고 남성 대상이긴 하지만 보통 선거권을 확립하는데 성공했다.
또한 1차 대전의 후유증으로 벨기에 내에서 반독일 감정이 심해지자 선제적으로 기존의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를 벨기에 왕조로 이름을 변경했다. 비슷한 시기 영국의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 역시 이름을 윈저 왕조로 변경했다.
1934년 2월 17일 나뮈르 근처에 있는 마르셰르담에서 암벽등반을 하다가 암벽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하도 황당한 죽음이다보니 사망 당시에는 암살이나 자살같은 음모론도 돌았던 모양이지만 후대의 분석 결과 실족사가 분명하다고 한다. 사망 이후에는 브뤼셀 라켄 지구에 있는 성모 교회에 묻혔다.
3.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1남 | 레오폴드 3세 (Leopold III) | 1901년 11월 3일 | 1983년 9월 25일 | 스웨덴의 아스트리드 공주[6] 슬하 2남 1녀[7] |
릴리안 바엘 슬하 1남 2녀 | ||||
2남 | 플랑드르 백작 샤를 왕자 (Prince Charles, Count of Flanders) | 1903년 10월 10일 | 1983년 6월 1일 | |
1녀 | 이탈리아의 왕비 마리아 주세피나 (Marie-José, Queen of Italy) | 1906년 8월 4일 | 2001년 1월 27일 | 움베르토 2세 슬하 1남 3녀[8] |
[1]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의 벨기에 침공의 영향으로 가문 이름을 작센코부르크고타에서 변경.[2] 독일어 표기는 알베르트 레오폴트 클레멘스 마리아 마인라트.[3] 레오폴드 1세의 삼남, 레오폴드 2세의 동생.[4] 이탈리아 왕국 마지막 국왕인 움베르토 2세의 부인.[5] 레오폴드 2세는 1남 3녀를 두었으나, 아들 브라반트 공작 레오폴드는 폐렴으로 아홉 살에 요절했다. 당시에는 벨기에 왕가에 살리카법이 적용되었기에 레오폴드 2세의 세 딸은 계승권이 없었고, 원래대로라면 알베르의 부친 필리프 왕자가 차기 계승권자가 되어야 했겠지만 1905년에 형 레오폴드 2세보다 먼저 사망해서 왕이 되지는 못했다.[6] 1935년 사망[7] 룩셈부르크의 대공비 조제핀샤를로트, 보두앵, 알베르 2세[8] 나폴리 공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마리아 가브리엘라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