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 대한 내용은 레오폴트 1세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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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da00><colcolor=#000000> 벨기에 초대 국왕 레오폴드 1세 Léopold I | |||
출생 | 1790년 12월 16일 | ||
신성 로마 제국 작센코부르크잘펠트 코부르크 에렌부르크 궁전 | |||
사망 | 1865년 12월 10일 (향년 74세) | ||
벨기에 브뤼셀 라컨 | |||
재위기간 | 벨기에인의 왕 | ||
1831년 7월 21일 ~ 1865년 12월 10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ffda00><colcolor=#000> 가문 |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 | |
이름 | 네덜란드어: 레오폴트 요리스 크리스티안 프레데릭 (Leopold Joris Christiaan Frederik) | ||
프랑스어: 레오폴드 조르주 크리스티앙 프레데리크 (Léopold Georges Christian Frédéric) | |||
독일어: 레오폴트 게오르크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Leopold Georg Christian Friedrich) | |||
아버지 | 프란츠 폰 작센코부르크잘펠트 | ||
어머니 | 로이스에베르스도르프의 아우구스테 여백작 | ||
형제자매 | 조피, 안토이네테, 율리아네, 에른스트 1세, 페르디난트, 빅토리아, 마리아네, 프란츠 | ||
배우자 | 웨일스의 샬럿 (1816년 결혼 / 1817년 사망) | ||
루이즈 도를레앙 (1832년 결혼 / 1850년 사망) | |||
자녀 | 루이 필리프, 레오폴드 2세, 필리프[1], 샤를로트, 조르주(사생아), 아르튀르(사생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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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colbgcolor=#a80d53> 레오폴드 1세의 모노그램. |
2. 생애
독일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는 프란츠 폰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2], 어머니는 에베르스도르프 여백작 아우구스테 로이스이다. 젊었을 때는 나폴레옹 전쟁에 참가하기도 하였다.영국 국왕 조지 4세의 외동딸로 차기 영국 왕위 계승자인 샬럿 공주와 결혼했다. 샬럿 공주와 레오폴드는 서로를 열렬히 사랑했으나 일각에서는 영국 왕실의 재산과 권력을 노린 결혼이라면서 레오폴드를 비난하기도 하였다. 만약 샬럿 공주가 오래 살았다면 레오폴드가 조카 앨버트 대공의 역할을 대신 맡았을지도 모르지만 결혼한 다음 해 샬럿 공주가 아들을 사산하고 사망했다.[3] 샬럿 공주의 사망은 부모와 영국 국민들에게 큰 충격과 비탄을 안겨줬지만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레오폴드였다. 레오폴드는 아내가 죽은 뒤에도 영국에 남았으며 평생 첫 아내를 잊지 않았다.
신생 그리스 왕국의 왕으로 추대받았으나 거절하였고 1831년 독립한 벨기에의 왕으로 즉위한다. 뛰어난 외교술로 위태로운 벨기에의 독립을 유지하는데 기여하였으며, 유럽 대륙을 휩쓴 혁명의 물결 속에서도 벨기에의 입헌군주제를 공고히 했다.
1832년 프랑스 국왕 루이필리프 1세의 딸 루이즈와 재혼했다. 루이즈는 아름답고 조용한 여성으로 첫 아내 샬럿 공주를 잊지 못하는 남편을 위로하기 위해 고명딸에게 샬럿 공주의 이름을 붙이기도 하였으며[4] 레오폴드 1세도 그녀를 아내로서 존중하고 항상 함께 했다. 아르카디 클라렛 등 남편의 정부를 참을성 있게 견뎠으나 이것이 탈이 되었는지 아버지 루이필리프의 퇴위 소식이 전해지자 충격을 받고 병에 걸려 결국 사망했다.
재미있게도 루이즈 왕비의 동생들인 둘째 처남 루이와 두 처제 마리, 클레망틴은 레오폴드 1세의 조카들과 결혼했다. 루이는 레오폴드 1세의 형 페르디난트 공자의 딸인 빅토리아와 결혼했고, 마리는 레오폴드 1세의 누나 안토이네테의 아들인 뷔르템베르크의 공작 알렉산더와, 클레망틴은 빅토리아의 작은오빠인 아우구스트와 결혼했다.[5][6]
빅토리아 여왕과 그녀의 남편 앨버트 대공의 숙부로[7] 빅토리아 여왕이 아버지처럼 존경했던 든든한 조언자였다.
3.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남 | 벨기에의 왕세자 루이 필리프 (Louis Philippe, Crown Prince of Belgium) | 1833년 7월 24일 | 1834년 5월 16일 | |
2남 | 레오폴드 2세 (Leopold II) | 1835년 4월 9일 | 1909년 12월 17일 | 오스트리아의 마리 헨리에테[8] 슬하 1남 3녀[9] |
카롤린 라크루아 (논란) 슬하 2남 | ||||
3남 |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왕자 (Prince Philippe, Count of Flanders) | 1837년 3월 24일 | 1905년 11월 17일 |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의 마리 공녀[10] 슬하 2남 3녀[11] |
1녀 | 멕시코의 황후 카를로타 (Charlotte, Empress of Mexico) | 1840년 6월 7일 | 1927년 1월 19일 | 막시밀리아노 1세 |
[1] 알베르 1세의 아버지[2] 프란츠의 장남이자 레오폴드 1세의 형인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에른스트 3세가 공작으로 재위하고 있던 1826년에 베틴 가문 중 에른스트 계열의 군주들 사이에서 영지 조정이 일어나,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국이 해체되고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이 결성되었기 때문에 그의 형인 에른스트 3세 때부터(이때부터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 1세로 불리게 된다.) 가문명이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으로 불리게 된다.[3] 만약 이 아들이 살았더라면 영국 국왕이 되어 빅토리아 여왕의 역할을 대신하였을 것이다.[4] 벨기에의 언어인 프랑스어로는 샤를로트. 후에 멕시코의 황제가 되는 막시밀리아노 1세와 결혼하며 비정한 국제 정세 속에서 버림받은 남편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다 결국 미쳐버리고 감금되어 죽었다.[5] 루이즈 왕비와 레오폴드 1세의 나이가 22살이나 차이가 났기 때문에, 레오폴드 1세의 조카들은 오히려 루이즈의 형제자매들과 나이가 비슷했다. 루이는 나이가 빅토리아보다 8살 많았고, 마리는 알렉산더보다 9살 어렸고, 클레망틴은 아우구스트보다 1살 연상이었다. 참고로 클레망틴과 아우구스트의 결혼을 주선한 사람은, 다름아닌 아우구스트의 숙부이자 클레망틴의 형부인 레오폴드 1세였다.[6] 이 중 클레망틴과 아우구스트의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아들이 불가리아 왕국의 초대 국왕인 페르디난트 1세이다. 따라서 페르디난트 1세는 레오폴드 1세의 조카손자이자 처조카가 된다. 또한 마리의 손자인 알브레히트는 1921년 뷔르템베르크 왕가의 직계가 단절된 후 왕가의 수장이 되어, 현재 뷔르템베르크 왕가는 알브레히트의 후손에 의해 이어지고 있다.[7] 레오폴드 1세는 빅토리아 여왕의 어머니 켄트 공작부인 빅토리아와 앨버트 대공의 아버지 에른스트 1세의 동생이었다.[8] 레오폴트 2세의 손녀이다.[9] 작센코부르크고타의 필리프 공자비 루이제, 오스트리아의 황태자비 스테파니, 나폴레옹 공비 클레망틴 등[10] 루마니아 왕국의 초대 국왕 카롤 1세의 여동생이자, 페르디난드 1세의 고모다.[11] 알베르 1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