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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1E6C5><colcolor=#000000>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 1세 Ernst I., Herzog von Sachsen-Coburg und Gotha | |
이름 | 에른스트 안톤 카를 루트비히 (Ernst Anton Karl Ludwig) |
출생 | 1784년 1월 2일 |
신성 로마 제국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국 코부르크 | |
사망 | 1844년 1월 29일 (향년 60세) |
독일 연방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 고타 | |
재위 |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국의 공작 |
1806년 12월 9일 ~ 1826년 11월 12일 | |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의 공작 | |
1826년 11월 12일 ~ 1844년 1월 29일 | |
배우자 | 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루이제 공녀 (1817년 결혼 / 1826년 이혼) |
뷔르템베르크의 마리 여공작 (1832년 결혼) | |
자녀 | 에른스트 2세, 알베르트 |
아버지 |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 프란츠 |
어머니 | 로이스에베르스도르프의 아우구스테 여백작 |
형제 | 조피, 안토이네테, 율리아네[1], 페르디난트, 빅토리아, 레오폴드 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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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의 초대 공작이자 에른스트 2세와 앨버트 공의 아버지로 빅토리아 여왕의 외숙이자[2] 시아버지다. 벨기에의 초대 국왕 레오폴드 1세의 큰 형이다.또한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 에드워드 7세, 헤센의 대공비 앨리스,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알프레드,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크리스티안 공자비 헬레나, 아가일 공작부인 루이즈, 코넛과 스트래선 공작 아서 왕자, 올버니 공작 레오폴드 왕자, 바텐베르크의 하인리히 공자비 베아트리스의 친할아버지다.
2. 가정 생활
아내 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루이제와는 영지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문 내의 결정에 따라 정략 결혼을 했던 탓에 차남 알베르트가 태어났을 때는 이미 각자 애인을 두고 사실상 별거에 들어간 상태였다. 참고로 둘 다 여자, 남자를 밝히고 성적으로 문란했다.그러다가 루이제의 정부 중 한 명이 유대인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손절 각 재고 있었던 에른스트는 이 사실이 밝혀지자마자 공식적으로도 루이제와 이혼하고 쫒아내서 객사시켰다. 예나 지금이나 유대인은 악의 축 취급받았으니까.
에른스트 1세는 아들들인 에른스트와 알베르트가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것은 물론, 장례식에 참여하는 것도 금지했고 두 아들은 부모의 이혼 이후 영영 어머니를 보지 못했다. 에른스트와 알베르트에게 당연히 이 사건은 큰 트라우마였는데 정작 두 형제는 이후 정반대의 인생을 살게 된다.
장남 에른스트 2세는 여자와 결혼에 대한 불신에 사로잡혀 방탕한 생활을 하다 성병에 걸려(...) 후사를 얻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차남 알베르트는 반대로 "나는 아버지처럼 되지 않을 거다."라고 다짐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이후 조카 뷔르템베르크의 마리 여공작과 재혼했다.
3. 말년
차남 알베르트의 어린 시절 당시를 이야기하는 것 말고는 이후로 잘 언급이 안 되지만 56세까지 살아서 아들들이 결혼하는 것도 보게 된다. 그러나 장남 에른스트 2세는 바덴의 알렉산드리네와 결혼했지만 성병에 걸려 자녀를 낳지 못했다.차남 알베르트는 대영제국의 빅토리아 여왕과 결혼하여 영국식 이름인 앨버트 공으로 불리게 되었다. 두 아들들의 결혼 이후 에른스트 1세는 앨버트 공과 빅토리아 여왕의 자녀들인 장손녀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 장손 에드워드 7세, 둘째손녀 앨리스 공주가 태어나는 것까지 보게 된다. 앨버트 공과는 가정사 문제로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둘째 아들 덕분에 대가 끊길 뻔한 것을 면했으며 그 둘째 아들의 후손들이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니 어찌보면 성공한 인생.
4. 여담
- 차남 앨버트 공이 워낙 미남이여서 모친인 루이제가 유대인 정부와 간통해서 낳은 아들이라는 루머가 돌기도 했는데, 상단의 초상화를 보면 알겠지만 차남인 앨버트만큼은 아니여도 에른스트 1세도 나름 준수한 미남이다.
5.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남 |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 2세 (Ernest II, Duke of Saxe-Coburg and Gotha) | 1818년 6월 21일 | 1893년 8월 22일 | 바덴의 알렉산드리네 공녀 |
2남 | 영국의 국서 앨버트 공 (Albert, Prince Consort of the United Kingdom) | 1819년 8월 26일 | 1861년 12월 14일 | 빅토리아 여왕 슬하 4남 5녀[3] |
[1]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대공(파벨 1세의 차남)의 아내였지만 1820년에 이혼했다.[2] 어머니 켄트 공작부인 빅토리아의 오빠다.[3] 독일 황후 빅토리아, 에드워드 7세, 헤센 대공비 알리체,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알프레트,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크리스티안 공자비 헬레나, 코넛과 스트래선 공작 아서 왕자, 올버니 공작 레오폴드 왕자, 바텐베르크의 하인리히 공자비 베아트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