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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10 05:31:19

빅토리아 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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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어트 왕조
하노버 왕조
조지 1세 조지 2세 조지 3세
조지 4세 윌리엄 4세 빅토리아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
에드워드 7세 조지 5세
윈저 왕조
조지 5세 에드워드 8세 조지 6세
엘리자베스 2세 찰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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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353b4><colcolor=#fff>
영국 하노버 왕조 제6대 국왕
빅토리아 여왕
Victoria
파일:Queen_Victoria_by_Bassano.jpg
대관식 공식 초상화 ▼
파일:빅토리아 여왕 공식 초상화.jpg
출생 1819년 5월 24일
영국 잉글랜드 런던 켄싱턴 궁전
사망 1901년 1월 22일 (향년 81세)
영국 잉글랜드 와이트 섬 오스본 하우스
재위기간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여왕
1837년 6월 20일 ~ 1901년 1월 22일
캐나다 자치령 여왕
1867년 7월 1일 ~ 1901년 1월 22일
인도 여제
1876년 5월 1일 ~ 1901년 1월 22일
오스트레일리아 연방 여왕
1901년 1월 1일 ~ 1901년 1월 22일
서명 파일:빅토리아 여왕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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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353b4><colcolor=#fff> 가문 하노버 가문
이름 알렉산드리나 빅토리아
Alexandrina Victoria
아버지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
어머니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빅토리아 공녀
배우자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알베르트 공자
(1840년 결혼 / 1861년 사망)
자녀 빅토리아, 에드워드 7세, 앨리스, 알프레드, 헬레나, 루이즈, 아서, 레오폴드, 베아트리스
종교 성공회 (잉글랜드 국교회)
장로회 (스코틀랜드 국민교회)[1]
}}}}}}}}}
1. 개요2. 칭호3. 생애4. 장수
4.1. 재위 50주년, 골든 주빌리4.2. 재위 60주년, 다이아몬드 주빌리
5. 가족 관계
5.1. 조상5.2. 자녀5.3. 남편과의 순애보
6. 재위 국가7. 평가8. 여담
8.1. 혈우병8.2. 외모지상주의8.3. 친조부모보다 가까운 외할머니8.4. 기타
9. 대중매체10. 둘러보기

1. 개요

영국여왕이자 인도 제국의 여제이며 하노버 왕조의 마지막 군주. 대영제국최전성기[2]를 상징하고 동시에 당시 전세계를 호령하던 서양의 제국주의를 대표하는 군주이기도 하다.[3]

영국과는 달리 하노버 왕국에는 살리카법이 적용되어 여성 군주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빅토리아의 즉위와 함께 조지 1세부터 윌리엄 4세까지 지속된 영국과 하노버 왕국동군연합이 종료되었다.

2. 칭호

문장
파일:영국 국장(1837).svg
잉글랜드
Dieu et mon droit
하느님과 나의 권리
파일:영국 국장(스코틀랜드, 1837-1952).svg.png
스코틀랜드
Nemo me impune lacessit
누구도 나를 함부로 할 수 없다

처음 즉위할 때는 영국의 국왕이었고 유럽의 여러 지위들과 나중에 인도 제국의 황제 자리까지 겸임한 결과 공식 칭호가 다음과 같이 늘어났다.
'Her Majesty Victoria, by the Grace of God, of 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Queen, Defender of the Faith, Princess of Hanover and Duchess of Brunswick and Lunenburg, Princess of Saxe-Coburg and Gotha and Duchess in Saxony, Empress of India, Sovereign of the Royal Family Order of King George IV, Sovereign of the Most Noble Order of the Garter, Sovereign of the Most Ancient and Most Noble Order of the Thistle, Sovereign of the Most Illustrious Order of Saint Patrick, Sovereign of the Most Honourable Order of the Bath, Sovereign of the Most Distinguished Order of Saint Michael and Saint George, Sovereign of the Order of British India, Sovereign of the Indian Order of Merit, Sovereign of the Most Exalted Order of the Star of India, Sovereign of the Royal Order of Victoria and Albert , Sovereign of the Most Eminent Order of the Indian Empire, Sovereign of the Imperial Order of the Crown of India, Sovereign of the Distinguished Service Order, Sovereign of the Royal Victorian Order'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의 여왕, 신앙의 수호자, 하노버의 공주이자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여공작[4], 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자비이자 작센의 왕자비[5], 인도의 여제, 조지 4세 왕립 기사단장, 가터 기사단장, 엉겅퀴 기사단장, 성 패트릭 기사단장, 바스 기사단장, 세인트마이클앤드세인트조지 기사단장, 영국령 인도 기사단장, 인도 메리트 기사단장, 인도성(星) 기사단장, 로열 빅토리아·앨버트 기사단장, 인도 제국 기사단장, 인도 왕좌 기사단장, 무공 기사단장, 빅토리아 왕립 기사단장이신 빅토리아 여왕 폐하'
이렇게 굉장히 길고 장황한 칭호 때문에 국가 간의 공식적인 조약에서도 "Her Majesty Victoria, by the Grace of God, of 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Queen, Defender of the Faith"까지만 쓰고 그 뒤는 "etc.,etc.,etc.,(기타 등등,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으로 생략해서 표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3. 생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빅토리아 여왕/생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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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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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빅토리아 여왕/생애#s-|]]번 문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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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빅토리아 여왕/생애#|]]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4. 장수

4.1. 재위 50주년, 골든 주빌리

1887년 6월 20일, 여왕은 남편 앨버트 공이 묻혔던 프로그모어의 나무 아래에서 아침 식사를 하는 것으로 즉위 50주년(골든 주빌리)의 일정을 시작했다. 이후 기차를 타고 윈저 성에서 패딩턴, 다시 런던으로 갔으며 이날 저녁 버킹엄 궁전에서는 왕실 가족과 50개국의 군주를 비롯해 해외의 영국 식민지를 통치하는 고위 관료들이 참석한 호화로운 연회가 열렸다.

6월 21일, 덮개가 열린 사륜마차를 탄 여왕은 인도 기병대의 호위를 받으며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행차한 뒤 버킹엄 궁전으로 돌아왔다. 버킹엄 궁전 앞에 운집한 군중들은 궁전 발코니에서 모습을 드러낸 여왕을 향해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이날 저녁 연회에 참석한 여왕은 각국 외교관들과 인도의 라자들을 접견했고,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불꽃놀이를 구경했다.

골든 주빌리 행사 때 여왕은 인도인 시종 두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시중들도록 했고, 그 두 사람 중 하나인 압둘 카림은 얼마 지나지 않아 승진해 여왕에게 우르두어를 가르치고 집사 역할을 수행하기에 이른다. 인종 차별이 극심했던 당대의 관점에서는 매우 파격적인 일이라 여왕의 주변에서는 카림을 악의적으로 비방했지만 여왕은 들은 척도 않고 그를 가까이에 두었다.

4.2. 재위 60주년, 다이아몬드 주빌리

파일:290327-1338459379.jpg

1896년 9월 23일부로 당시까지 영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집권한 할아버지 조지 3세의 재위기간을 경신했다. 식민지 장관 조지프 체임벌린은 다음 해인 1897년 즉위 60주년(다이아몬드 주빌리) 행사 때 이를 함께 기념해 대영제국과 여왕을 더욱 빛나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따라 1897년에 거행된 다이아몬드 주빌리 행사에서는 영국 식민지 자치령의 모든 총리와 총독 들이 초대받았고, 거창한 행렬에는 영국 전역의 군대들도 참여했다.

1897년 6월 20일, 이날은 일요일이었기에 여왕은 윈저 성 내의 성 조지 예배당에서 기도를 했다.

6월 21일에는 외국 사절들을 접견하기 위해 런던으로 돌아왔다.

공식 행사일인 6월 22일, 여왕의 행렬은 세인트 폴 대성당 야외에서 거행된 기념식에 이어 런던 남부와 국회의사당을 지나 버킹엄 궁전으로 돌아왔는데, 무개마차에 탑승한 노구의 여왕을 향해 수많은 인파가 축하와 환호를 아낌없이 보냈다. 이날 저녁 여왕은 '내가 거리를 지날 때마다 본,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열정과 환희로 가득한 모습에 진심으로 놀랍고 감동받았다'고 일기에 적었다. 버킹엄 궁전에서 열린 공식 만찬과 더불어 여왕의 며느리 알렉산드라 왕태자비는 런던의 빈민 40만 명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행사를 베풀었다.

영국 역사상 처음 거행된 다이아몬드 주빌리는 여왕과 대영제국 모두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야외에서 거행된 기념식은 78세의 고령인 여왕에게는 무리여서 그로 인해 류마티스성 관절염이 악화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빅토리아 여왕 이후 2번째 다이아몬드 주빌리가 거행된 것은 115년 뒤인 2012년, 여왕의 현손녀인 엘리자베스 2세 때였다.

당시 조선에서도 이 기념식에 사절을 파견했는데, 그 주인공은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6개국 겸임공사였던 민영환이었다. 그는 1897년 3월 24일 4명의 수행원과 함께 서울을 출발해 나가사키, 상하이, 마카오, 싱가포르를 거쳐 인도양을 지나 수에즈 운하를 통과해 지중해에 도달했다. 여기서 다르다넬스 해협을 지나 흑해로 들어가 오데사에 상륙한 다음 기차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해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국서를 바치고 열흘 동안 체류하다가 6월 1일런던으로 출발했다. 민영환 일행이 런던에 도착한 것은 6월 5일이었으며 6월 22일에 거행된 기념식에 참석하고 7월 17일에 귀국길에 올랐는데, 민영환은 이때의 노정을 <사구속초(使歐續草)>라는 여행기로 남겼다.

6월 26일에는 영국 해군의 대함대(Grand Fleet)가 관함식을 개최했다. 이때 선박 엔진의 역사를 바꾼 아주 유명한 난입 사고가 있었다. 증기 터빈 문서 참고.

5. 가족 관계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빅토리아 여왕/가족 관계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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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www.gogmsite.net/queenvictoriaprincealbertan.jpg
빅토리아 여왕의 가족, 프란츠 하버 빈터할터, 1846년
(왼쪽부터) 차남 알프레드[6], 장남 에드워드, 빅토리아 여왕, 앨버트 공, 차녀 앨리스, 3녀 헬레나, 장녀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
파일:3706caa1d84866f64aff1d48828831d4.jpg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 그리고 아홉 자녀들
파일:The-christening-of-Prince-Edward-Albert.jpg
4대가 한 사진에 찍힌 모습. 빅토리아 여왕, 에드워드 7세[7], 에드워드 8세[8], 조지 5세[9]

5.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빅토리아 여왕
(Victoria)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
(Prince Edward, Duke of Kent and Strathearn)
조지 3세
(George III)
웨일스 공 프레더릭
(Frederick, Prince of Wales)[10]
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아우구스타 공녀
(Princess Augusta of Saxe-Gotha-Altenburg)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샤를로테 공녀
(Charlotte of Mecklenburg-Strelitz)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카를 루트비히 프리드리히 공작
(Duke Charles Louis Frederick of Mecklenburg-Strelitz)
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의 엘리자베트 알베르티네 공녀
(Princess Elisabeth Albertine of Saxe-Hildburghausen)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빅토리아 공녀
(Princess Victoria of Saxe-Coburg and Saalfeld)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 프란츠 프리드리히
(Francis Frederick, Duke of Saxe-Coburg and Saalfeld)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Ernest Frederick, Duke of Saxe-Coburg and Saalfeld)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조피 공녀
(Princess Sophia of Brunswick-Wolfenbüttel)
로이스에베르스도르프의 아우구스테 카롤리나 여백작
(Countess Augusta Carolina of Reuss-Ebersdorf)
로이스에베르스도르프 백작 하인리히 24세
(Henry XXIV, Count of Reuss-Ebersdorf)
에어바흐쇤베르크의 카롤리나 여백작
(Countess Carolina of Erbach-Schönberg)

5.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녀 독일 제국의 황후 빅토리아
(Victoria, German Empress)
1840년 11월 21일 1901년 8월 5일 프리드리히 3세
슬하 4남 4녀[11]
1남 에드워드 7세
(Edward VII)
1841년 11월 9일 1910년 5월 9일 덴마크의 알렉산드라[12]
슬하 3남 3녀[13]
2녀 헤센 대공비 알리체
(Alice, Grand Duchess of Hesse and by Rhine)
1843년 4월 25일 1878년 12월 14일 헤센 대공 루트비히 4세
슬하 2남 5녀[14]
2남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알프레트
(Alfred, Duke of Saxe-Coburg and Gotha)
1844년 8월 6일 1900년 7월 30일 러시아의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15]
슬하 1남 4녀[16]
3녀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크리스티안 공자비 헬레나
(Helena, Princess Christian of Schleswig-Holstein)
1846년 5월 25일 1923년 6월 9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크리스티안 공자
슬하 3남 2녀[17]
4녀 아가일 공작부인 루이즈 공주
(Princess Louise, Duchess of Argyll)
1848년 3월 18일 1939년 12월 3일 제9대 아가일 공작 존 캠벨
3남 코넛과 스트래선 공작 아서 왕자
(Prince Arthur, Duke of Connaught and Strathearn)
1850년 5월 1일 1942년 1월 16일 프로이센의 루이제 마르가레테 공주
슬하 1남 2녀[18]
4남 올버니 공작 레오폴드 왕자
(Prince Leopold, Duke of Albany)
1853년 4월 7일 1884년 3월 28일 발데크피르몬트의 헬레네 공녀
슬하 1남 1녀[19]
5녀 바텐베르크의 하인리히 공자비 베아트리스
(Beatrice, Princess Henry of Battenberg)
1857년 4월 14일 1944년 10월 26일 바텐베르크의 하인리히 공자
슬하 3남 1녀[20]

앨버트 공과의 사이에서 4남 5녀를 낳았다.[21] 그 자녀들이 당대 유럽 왕가들과 혼인을 맺어서[22] 유럽의 많은 왕실[23]이 빅토리아 여왕의 피를 잇게 되었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유럽할머니. 자녀가 9명, 손주는 42명이고 증손주는 85명에 달하니 결코 빈말이 아니다. 현재 영국[24] 왕실을 비롯하여 노르웨이[25], 스웨덴[26], 덴마크[27], 스페인[28] 국왕이 모두 그녀의 후손들이다.

5.3. 남편과의 순애보

남편 앨버트 공과의 사랑이 널리 알려져 있다. 빅토리아가 발랄한 성격이었던 반면 앨버트는 과묵한 편으로 성격 차이가 컸지만 둘 사이의 유대감은 어느 누구보다도 강했다고 한다. 둘 사이의 금슬은 무척 각별해 20년 간의 결혼 생활 동안 무려 9명의 자녀를 낳았다. 결혼 기간의 반은 임신 기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빅토리아는 앨버트 공의 머리카락이 담긴 장신구를 달고 다녔는데 이게 유행이 되어 죽은 자를 기리기 위해 머리카락을 담은 장신구를 다는 풍습이 생겼다고 한다.

앨버트 공이 장티푸스로 죽은 뒤[29] 빅토리아 자신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40년 동안 남편을 기리는 의미로 매일 고인의 옷을 펼쳐놓고 언제나 검은 옷만을 입었다. 이 때문에 검은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 하얀 레이스를 얹은 모습이 빅토리아 여왕의 특징처럼 굳어진다.

뿐만 아니라 여왕은 윈저 성에서 앨버트 공이 임종을 맞은 침실을 그대로 보존했으며 잠자리에 들 때도 앨버트 공이 생전에 입던 옷 등 유품을 곁에 놓았다고 한다.

남편 앨버트 공의 죽음이 빅토리아 여왕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는 두 사람이 결혼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드 1세[30]에게 쓴 편지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저의 행복은 끝났습니다. 제게 이 세상은 없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앨버트 공은 빅토리아 여왕을 번쩍 들어서 집무실에서 침실로, 침실에서 집무실로 데려다 주었다는데 아무리 앨버트 공이 건장한 남자였다고 해도 이건 분명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앨버트 공 사후 존 브라운이라는 하인이 이 역할을 대신했는데, 존 브라운이 앨버트 공의 외모를 닮기도 해서 잠깐 동안 스캔들이 퍼지기도 했다.[31]

두 사람 사이의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어느 날 둘이 부부싸움을 하고는 앨버트 공이 너무 화가 나 방문을 잠그고 틀어박혔다. 빅토리아 여왕이 화해할 목적으로 노크를 하자 앨버트 공이 볼멘소리로 누구냐고 물었고, 빅토리아 여왕이 '영국의 여왕입니다'라고 하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성과 없이 집무실로 돌아온 여왕은 두 번째로 노크를 하고 이번에는 '빅토리아입니다'라고 했지만 여전히 앨버트 공은 문을 열지도 말하지도 않았다. 다시 한참을 고민하다 좋은 생각이 떠오른 여왕은 꼭 통하기를 바라면서 세 번째로 노크를 했고, 앨버트 공이 이번에는 또 누가 왔냐고 여전히 언짢은 목소리로 묻자 '당신의 사랑스러운 아내예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문이 활짝 열리고 앨버트 공은 아까의 찡그린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환한 표정으로 양팔을 벌리고 여왕을 맞이했다고 한다. 카푸친 교회 문서와 오토 폰 합스부르크 문서에도 나와 있는 합스부르크 가문 장례식이 연상되기도 하는 부분.

6. 재위 국가

파일:British_Empire_in_1901.png
1901년 사망 직전, 빅토리아 여왕의 통치 영역
국가 즉위년일 퇴위년일 재위기간 비고
<colbgcolor=#c2e68b,#4f7419>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1837. 06. 20. 1901. 01. 22. 63년 216일
파일:캐나다 자치령 국기(1868-1921).svg 캐나다 자치령 1867. 07. 01. 1910. 05. 06. 33년 205일
파일:인도 제국 국기.svg 인도 제국 1876. 05. 01. 1901. 01. 22. 24년 266일 황제위
파일:호주 국기.svg 호주 자치령 1901. 01. 01. 1901. 01. 22. 21일

7. 평가

영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산업, 군사 등 다방면에서 엄청난 변혁이 있었던 여왕의 64년 치세는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Era)로 불린다. 이 시대는 고전적이면서 보수적인 도덕주의, 엄숙주의와 더불어 허영과 위선 같은 상반된 면모가 병존하던 때로 기억된다.

이전 국왕들과는 달리 사생활에서 매우 엄격한 도덕주의를 추구한 여왕의 영향으로 귀족 부인이 누군가와 스캔들이 있다는 소문이 나면 그 여성은 살롱에 출입할 수 없었고 남성 귀족들은 자신의 정부가정부라 속였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표면적으로만 그런 거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할 거 다 하면서도 그걸 드러내지 않고 더욱 은밀하게 숨긴, 속되게 표현하면 위선의 시대였다.
즉, 귀국에서 가져간 부는 모두 중국인의 정당한 몫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무슨 권리로 중국인을 해치는 약을 사용하는 것입니까?
그들이 고의로 우리에게 해를 입힌 것이 아닐지언정, 탐욕스럽게 이득을 갈구하는 그들은 타인을 해친다 하여도 상관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질문을 허락하신다면 묻겠습니다.
폐하의 양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임칙서가 빅토리아 여왕에게 보내는 편지의 일부.[32]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은 국제적으로 최전성기를 누렸으나 그것은 다시 말해 아시아, 아프리카제3세계수억 명의 사람들이 영국에 의해 고통받았음을 의미한다.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한 수많은 국가들의 국민들은 나라를 잃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다.

산업 혁명의 여파로 극심한 가난과 고된 노동 속에서 고통받던 노동자들이 뭉친 차티스트 운동의 전성기도 빅토리아 시대였다. 이들은 노동자들의 참정권, 선거권을 요구했으나 군홧발에 짓밟혔다. 그래도 노동자들의 요구를 계속 무시할 수는 없었고 결국 노동자들도 선거권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는 남성에 한해서였고 여성이 선거권을 가지게 되는 건 제1차 세계 대전 이후로 가야 한다. 빅토리아 여왕은 여왕으로서 권력을 휘두르는 여성임에도 정작 여성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불쾌하게 여겼다.[33]

산업 및 기술도 이 시대에 발전했지만, 이후 영국 자동차 산업이 몰락하는 계기가 되는 적기조례가 제정되기도 하였다.

8. 여담

8.1. 혈우병

역사적으로 유명한 혈우병 보인자다. 이로 인해 유럽 왕실이나 귀족 가문들이 골치를 앓았고 심하면 가문이 단절되기도 했다. 이 중에는 후일 국제정세적으로 영국의 적국이 되는 나라들도 있었기 때문에 우스갯소리로 '혈우병으로 적 왕가의 씨를 말린 영국의 진정한 최종 병기'라고 불리기도 한다.

가장 유명한 곳이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 니콜라이 2세와 결혼한 헤센의 알릭스 공녀는 빅토리아의 외손녀로서 혈우병 유전자를 물려받았고, 다섯 자녀들 중 유일한 아들로서 황태자였던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가 혈우병을 갖고 태어나고 말았다. 이 때문에 황태자의 혈우병을 치료한답시고 그리고리 라스푸틴이 등용되어 득세하고, 결국 제국이 혁명으로 멸망하면서 황실 직계인 니콜라이 2세 부부와 자녀들 그리고 러시아 황족들 상당수가 총살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한 마디로 빅토리아 여왕의 유전자 때문에 러시아 제국이 멸망한 셈이다.[34] 그나마 로마노프 왕조는 당대 끝판왕 수준의 아들부자여서 직계는 끊겼어도 후손 자체가 아예 단절되지는 않았지만. 공교롭게도 이 시기 러시아 제국대영제국유라시아 패권을 두고 서로 다투던 사이라이벌 국가의 황실을 여왕이 혈우병으로 몰락시킨 셈이 되었다.[35]

스페인 왕실인 보르본 왕조도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이자 혈우병 보인자인 빅토리아 유지니 왕비가 알폰소 13세와 결혼하면서 혈우병이 퍼졌다. 그래서 알폰소 13세는 스페인 왕실에 혈우병을 퍼뜨렸다며 아내인 빅토리아 유지니는 물론 빅토리아 여왕까지 깠다. 웃긴 건 정작 빅토리아 유지니 왕비는 결혼 전부터 알폰소에게 자신이 혈우병 보인자일 수도 있다는 것을 여러 번 밝혔고, 알폰소의 가족들부터 빅토리아 유지니의 가족들까지 결혼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라며 말렸지만 알폰소 13세 본인이 밀어붙여서 결혼한 것이다. 그래도 다행히도 로마노프 왕조 직계나 테크 가문과 달리 알폰소와 빅토리아 유지니의 차남 세고비아 공작 인판테 하이메와 사남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이 아들을 낳아서 왕조가 단절되지는 않았다.[36]

둘째 손자인 조지 5세의 처가, 즉 사돈 되는 테크의 메리 공녀 집안 역시 여왕께서 혈우병 유전으로 본의 아니게 남계 후손 단절에 한 몫을 했다. 어찌 된 거냐 하면 빅토리아 여왕의 친손녀이자 혈우병 보인자였던 올버니의 앨리스 공녀가 테크의 메리의 막내 남동생인 알렉산더 케임브리지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둘 사이에는 2남 1녀가 태어났으나 장남 루퍼트는 혈우병 탓에 1928년 교통사고로 인한 뇌출혈로 요절했고 차남도 태어난 지 얼마 안 돼서 죽어 알렉산더와 앨리스의 남계 혈통은 끊겼다. 하필이면 알렉산더의 형들도 아들들을 일찍 잃거나 아예 자식이 없었는데[37] 알렉산더마저 혈우병의 영향으로 아들을 모두 일찍 잃는 바람에 결국 테크 가문의 남계 후손이 아예 끊기고 만다.

고등학교 생물 교과서에서 유전병 관련해서 자주 언급된다. 여왕의 부모와 남편 모두 혈우병 보인자가 아니어서 여왕의 어머니 켄트 공작부인불륜을 저지른 게 아니냐는 의혹도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돌연변이로 보고 있다.[38] 여왕의 자식들 중 차녀 앨리스와 4남 레오폴드, 5녀 베아트리스가 혈우병을 물려받았다.

바텐베르크의 빅토리아 유지니 공녀의 4남 곤살로 왕자(1914 ~ 1934) 이후로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들 중 혈우병 환자는 현재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다만 아주 미미한 확률로 차후에도 빅토리아 여왕의 여계 후손이 아들을 낳는다면 혈우병 환자가 다시 나타날 수도 있다.

8.2. 외모지상주의

외모지상주의자로 유명하다.[39] 남편 앨버트 공의 외모에 반해 사랑에 빠진 것은 유명하고 미인으로 유명한 증손녀인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녀[40]우리 예쁜 앨리스라고 부르며 매우 아꼈다고 한다. 앨리스는 여왕의 손자인 조지 5세의 결혼식 때 신부 들러리를 섰는데 여왕이 직접 들러리로 앨리스를 지목한 것이라고 한다. 당시 일기장에 여왕은 앨리스가 아주 예뻤다고 적어놓았다.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를 남편 엘버트 공 다음으로 매력적인 남자라고 평한 바 있다.

파일:빅토리아 여왕과 알렉산드르 2세(1839).jpg

1839년 봄에는 러시아체사레비치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를 만나서 함께 춤을 춘 적도 있었다.[41] 빅토리아 여왕은 자신의 일기에 '알렉산드르는 굉장히 매력적인 남자였으며, 그와 함께 한 시간이 매우 즐거웠다.'고 서술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깊은 호감을 느꼈지만 국가적으로 볼 때 두 사람의 결혼은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42] 설령 이루어지더라도 대영제국과 러시아 제국은 서로 세계의 패권을 두고 싸우는 사이였으며, 이는 양국에게 매우 부담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감정을 정리했다.[43]

8.3. 친조부모보다 가까운 외할머니

특이하게도 당대 공주들은 타국의 왕실로 시집가면 친정과 연락을 주고받기는 했지만, 친정에까지 자주 방문하지 않으며 자녀들도 친정으로 잘 데리고 가지 않았다. 그러나 빅토리아 여왕은 본인이 군주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시집간 딸들과 편지를 굉장히 많이 주고 받았으며, 여왕의 딸들 역시 본인의 자녀들을 데리고 영국에 방문하면서 빅토리아 여왕과 자주 만나고 교류했다. 그래서 빅토리아의 외손주들이 친조부모보다 외할머니 빅토리아와 더 가까웠다. 특히 외손녀들이 그런 경향이 강했다.

장녀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의 자녀들은 나이별로 두 그룹으로 나뉘었는데 첫째 빌헬름 2세, 둘째 샤를로테, 셋째 하인리히는 어머니 빅토리아가 양육을 잘 못해서 이를 보다 못한 친조부모인 빌헬름 1세아우구스타 황후가 데려다가 직접 양육했다. 그래서 세 자녀는 친조부모와 가까웠고 친조부모도 빌헬름, 샤를로테, 하인리히만 예뻐했다. 반면 나중에 태어난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의 자녀들인 빅토리아, 조피, 마르가레테는 친조부모가 찬밥 취급했고 이 세 딸들은 반대로 어머니 빅토리아와 외할머니 빅토리아 여왕과 더 가까웠다.

차녀 헤센의 대공비 앨리스는 독일로 시집간 뒤에도 생활 방식과 자식들의 교육 방법을 영국식으로 고수했기 때문에 앨리스의 딸들인 빅토리아, 엘리자베트, 이레네, 알릭스는 어릴 때부터 외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과 외가인 영국 왕실과 긴밀하게 지냈다. 특히 최초로 영국에서 태어난 손녀이자 이름부터가 외할머니에게서 따온 앨리스의 장녀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가 여왕의 총애를 많이 받았다. 이후 어머니 앨리스를 디프테리아로 안타깝게 잃은 빅토리아 공녀에게 여왕이 지속적으로 편지를 보내며 조언하고 위로해 주면서 더욱 친밀해졌고, 여왕과의 관계는 조손보다는 모녀 관계에 가까워서 빅토리아 공녀는 자신이 정서적으로는 영국인이라고 느끼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는 어머니 사후 외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은 앨리스의 다른 딸들도 마찬가지였다.
파일:295579-1340801910.jpg
빅토리아 유지니와 빅토리아 여왕
막내딸 베아트릭스 공주의 고명딸인 빅토리아 유지니도 역시 외할머니인 여왕과 매우 가까웠다.

8.4. 기타


파일:attachment/partition_ching.jpg

9. 대중매체

빅토리아 시대가 영국이 세계를 주름잡던 시절을 상징하다 보니 '산업화가 왕성하게 일어나 사회가 급속하게 발전하고, 제국주의적 팽창이 미화되고, 상류층과 하류층의 격차가 뚜렷하고, 사회 분위기가 어딘가 어두우면서 엄숙한데 여왕이 다스리는 시대'라는 묘사가 있으면 십중팔구는 빅토리아 시대를 모델로 삼았을 가능성이 높다. 고전적한 가구 및 벽지와 함께하는 마차와 증기 기관은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상징이자 아이덴티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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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Greatest Britons
※ 2002년 영국 BBC 방송이 영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영국인 100명'을 선정
TOP 10
<rowcolor=#ffe> 1위 2위 3위 4위 5위
윈스턴 처칠 이점바드 킹덤 브루넬 다이애나 스펜서 찰스 다윈 윌리엄 셰익스피어
<rowcolor=#ffe> 6위 7위 8위 9위 10위
아이작 뉴턴 엘리자베스 1세 존 레논 호레이쇼 넬슨 올리버 크롬웰
11위~100위
<rowcolor=#ffe>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어니스트 섀클턴 제임스 쿡 로버트 베이든 파월 알프레드 대왕 아서 웰즐리
<rowcolor=#ffe>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마거릿 대처 마이클 크로포드 빅토리아 여왕 폴 매카트니 알렉산더 플레밍
<rowcolor=#ffe>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앨런 튜링 마이클 패러데이 오와인 글린두르 엘리자베스 2세 스티븐 호킹
<rowcolor=#ffe>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윌리엄 틴들 에멀린 팽크허스트 윌리엄 윌버포스 데이비드 보위 가이 포크스
<rowcolor=#ffe>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레오나르드 체셔 에릭 모어캠브 데이비드 베컴 토머스 페인 부디카
<rowcolor=#ffe>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스티브 레드그레이브 토머스 모어 윌리엄 블레이크 존 해리슨 헨리 8세
<rowcolor=#ffe>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찰스 디킨스 프랭크 휘틀 존 필 존 로지 베어드 어나이린 베번
<rowcolor=#ffe>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보이 조지 더글러스 베이더 윌리엄 월레스 프랜시스 드레이크 존 웨슬리
<rowcolor=#ffe>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아서 왕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 로버트 스콧 이넉 파월
<rowcolor=#ffe>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클리프 리처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프레디 머큐리 줄리 앤드류스 에드워드 엘가
<rowcolor=#ffe> 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조지 해리슨 데이비드 애튼버러 제임스 코널리 조지 스티븐슨
<rowcolor=#ffe>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찰리 채플린 토니 블레어 윌리엄 캑스턴 바비 무어 제인 오스틴
<rowcolor=#ffe> 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윌리엄 부스 헨리 5세 알레이스터 크로울리 로버트 1세 밥 겔도프 (아일랜드인)
<rowcolor=#ffe> 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무명용사 로비 윌리엄스 에드워드 제너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찰스 배비지
<rowcolor=#ffe> 81위 82위 83위 84위 85위
제프리 초서 리처드 3세 J. K. 롤링 제임스 와트 리처드 브랜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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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노
(아일랜드인)
존 라이든 버나드 로 몽고메리 도날드 캠벨 헨리 2세
<rowcolor=#ffe> 91위 92위 93위 94위 95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J. R. R. 톨킨 월터 롤리 에드워드 1세 반스 월리스
<rowcolor=#ffe>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리처드 버튼 토니 벤 데이비드 리빙스턴 팀 버너스리 마리 스톱스
출처
같이 보기: BBC 선정 최악의 영국인, 위대한 인물 시리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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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atest Britain Monarch
※ 2012년 영국 데일리 텔레그래프가 여론조사업체 ICM에 의뢰해 영국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TOP 5
<rowcolor=#ffe> 1위 2위 3위 4위 5위
엘리자베스 2세 빅토리아 여왕 엘리자베스 1세 헨리 8세 헨리 5세
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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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선정 세계의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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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은 세계사에 이름을 남긴 여성들을 선정했다.
긍정적 영향을 미친 여성들뿐 아니라 '세계사에 족적을 남긴 여성들'을 뽑았기 때문에 부정적인 인물들 혹은 논란 있는 인물들도 있다.
성인들
성모 마리아 예수의 테레사 마더 테레사
지도자들
앙겔라 메르켈 베나지르 부토 예카테리나 2세 캐시 프리먼 서태후
클레오파트라 코라손 아키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달리아 그리바우스카이테 다이애나 스펜서
지우마 호세프 에디트 크레송 엘레오노르 다키텐 엘리너 루스벨트 엘리자베스 1세
엘리자베스 2세 엘런 존슨 설리프 에바 페론 골다 메이어 그로 할렘 브룬틀란
한나 수호츠카 하트셉수트 인디라 간디 이사벨 1세 제니 시플리
줄리아 길라드 칼레다 지아 킴 캠벨 마거릿 대처 마리 앙투아네트
메리 로빈슨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미첼 바첼레트 미셸 오바마 박근혜
잔 다르크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 쑹메이링 탄수 칠레르 테오도라
바이라 비케프레이베르가 빅토리아 여왕 비그디스 핀보가도티르 비올레타 차모로 측천무후
잉락 친나왓
발견자들
에이다 러브레이스 어밀리아 에어하트 바버라 매클린톡 캐롤라인 허셜 도러시 호지킨
엘리자베스 블랙웰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히파티아 제인 구달 캐서린 존슨
리제 마이트너 마거릿 미드 마리아 미첼 마리 퀴리 마리암 미르자하니
레이첼 카슨 로잘린드 프랭클린 사카자위아 발렌티나 테레시코바
예술가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코코 샤넬 도로시아 랭 프리다 칼로 카라 워커
메리 카사트 쿠사마 야요이 자하 하디드
사회운동가들
앨리스 워커 앤절라 데이비스 앤 로이페 아얀 히르시 알리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엘프리데 옐리네크 그레타 툰베리 제인 폰다 주디 시카고 리마 보위
나오미 클라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수잔 팔루디 타우왁쿨 카르만 와리스 디리
말랄라 유사프자이 마거릿 생어 마리아 몬테소리 해리엇 터브먼 캐롤리 슈니먼
로자 파크스 시린 에바디 왕가리 마타이 에멀린 팽크허스트 글로리아 스타이넘
작가들
에밀리 디킨슨 제인 오스틴 사포버지니아 울프 마거릿 애트우드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헬렌 켈러 J. K. 롤링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무라사키 시키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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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선수들
베이브 디드릭슨 빌리 진 킹 파니 블랑커스쿤 재키 조이너커시 미아 햄
나디아 코마네치 세레나 윌리엄스
퍼포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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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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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럴딘 페라로 해티 캐러웨이 힐러리 클린턴 저넷 랭킨 매들린 올브라이트
낸시 펠로시 넬리 테일로 로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셜리 치점 빅토리아 우드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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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국 국왕은 잉글랜드에서는 성공회 신자로, 스코틀랜드에서는 장로회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며, 빅토리아 여왕 시대부터 왕족이 밸모럴 성에 거주할 때는 크래디 커크에서 예배하는 전통이 시작되었다.#[2] 대영제국을 선두로 하여 여러 유럽 국가들의 제국주의기술발전이 절정에 달했던 이 시절을 아예 영국에서는 빅토리아 시대라 일컫기도 한다.[3] 존재 자체가 대영제국의 상징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카이저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유사한 점이 많다.[4] 상기 두 개는 하노버 왕국의 공주이자 왕족으로서 받은 것이다.[5] 상기 두 개는 작센코부르크고타의 통치가문 일족인 앨버트 공의 부인으로서 받은 것이다.[6] 당시 배변의 편의를 위해 남자아이에게 드레스를 입히는 문화가 있었기 때문에 치마를 입고 있다.[7] 오른쪽 인물.[8] 빅토리아 여왕이 안고 있다.[9] 왼쪽 인물.[10] 조지 2세의 장남이다.[11] 빌헬름 2세, 작센마이닝겐 공작부인 샤를로테, 하인리히 왕자, 샤움부르크리페의 아돌프 공자비 빅토리아, 그리스의 소피아 왕비, 헤센의 방백비 마르가레테[12] 크리스티안 9세의 장녀이다.[13] 클래런스와 애번데일 공작 앨버트 빅터 왕자, 조지 5세, 파이프 공작부인 루이즈 공주, 노르웨이의 메우드 왕비[14] 밀포드 헤이븐 후작부인 빅토리아 마운트배튼, 러시아의 옐리자베타 표도로브나 대공비, 프로이센의 하인리히 왕자비 이레네, 헤센 대공 에른스트 루트비히, 러시아의 황후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15] 알렉산드르 2세의 차녀이다.[16] 루마니아의 마리 왕비, 러시아의 빅토리야 표도로브나 대공비, 갈리에라 공작부인 베아트리스 공주[17]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 알베르트[18] 스웨덴의 왕세자비 마르가레타[19] 애슬론 백작부인 앨리스 공주,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카를 에두아르트.[20] 스페인의 왕비 빅토리아 에우헤니아[21] 빅토리아 여왕은 아이를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남편인 앨버트 공이 자식을 많이 갖기를 원했고, 남편이 원하는 거면 뭐든지 다 들어주고 싶은 빅토리아가 적극적으로 호응 해주면서 이렇게 많은 아이들을 낳게 된 것. 심지어 계속된 임신&출산 스트레스로 여왕의 과격한 성격이 갈수록 심해지자 주치의들이 더 이상 아이를 갖지 않기를 권유했지만 빅토리아 부부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22] 여왕은 딸들을 외국 왕실로 시집보내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장녀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와 차녀 앨리스는 남편 앨버트 공의 의사가 워낙 강해서(앨버트 공은 평생 동안 고향 땅 독일을 사랑하고 그리워했으며 독일의 통합을 꿈꾸었다.) 설득당했다고 한다. 3녀 이후로는 사위들에게 영국에서 평생 살 것을 조건으로 결혼을 허락했다. 근데 장녀 빅토리아와 차녀 앨리스가 정말 많은 자식을 낳은 데다 그 자식들이 또 다른 왕실과 통혼을 하면서 빅토리아 여왕의 혈통은 전 유럽의 왕실로 퍼져나갔다.[23] 군소 공국을 제외하고 왕실만으로 따져도 독일, 그리스, 유고슬라비아, 러시아, 루마니아,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스페인에 이른다.[24] 장남 에드워드 7세의 차남 조지 5세의 손녀의 엘리자베스 2세의 장남, 또는 차녀 앨리스 공주의 외손녀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녀의 아들 필립 공의 장남이 찰스 3세.[25] 장남 에드워드 7세의 3녀 모드 공주의 손자가 하랄 5세.[26] 3남 아서 왕자의 장녀 마거릿 공주의 손자, 또는 4남 레오폴드 왕자의 장남 카를 에두아르트의 외손자가 칼 16세 구스타프[27] 3남 아서 왕자의 장녀 마거릿 공주의 증손이 프레데리크 10세[28] 5녀 베아트리스 공주의 장녀 바텐베르크의 빅토리아 유지니의 증손, 또는 장녀 빅토리아의 3녀 조피의 증손, 또는 장녀 빅토리아의 장남 빌헬름 2세의 외손녀 프리데리케의 외손자가 펠리페 6세[29] 아들 에드워드 7세 때문에 공이 42세의 나이로 일찍 죽었다는 설도 있다. 나이 20살이 되도록 주색잡기에 빠져 살던 큰아들 에드워드가 여왕과 다툰 후 가출하듯 별장으로 떠나고 앨버트 공이 아들을 훈계하기 위해 무리하게 따라나섰다가 비를 맞아 폐렴에 걸려 죽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여왕은 큰아들 에드워드를 죽는 순간까지 용서하지 않았다고 한다.[30] 빅토리아에겐 외가 쪽으로, 앨버트 공에겐 친가 쪽으로 숙부가 되는 인물. 빅토리아의 사촌언니가 되는 조지 4세의 딸 샬럿 공주의 남편이기도 하다.[31] 실제로 빅토리아 여왕의 관 안에 존 브라운의 사진을 넣었고, 그녀의 손에 브라운의 어머니의 반지를 끼웠다고 한다. 그가 죽었을 때는 앨버트 공을 잃었을 때만큼 고통스럽다고 언급하기도 하였다.[32] 이 편지는 1840년 1월에 영국에 도착했으나, 영국 정부는 이 편지를 정식 외교문서로 인정하지 않았다.[33] 재밌게도 훗날 철의 여인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마거릿 대처 역시 영국 역사상 첫 여성 총리였으며 엘리자베스 2세를 존경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 정치참여에 비판적이었다고 전해진다.[34] 사실 이 무렵 러시아 제국은 라스푸틴이 득세하지 않았어도 언젠가는 무슨 일이 터졌을 만큼 속으로 곪아가던 상태라, 엄밀히 따지면 빅토리아에게서 유전된 혈우병은 러시아 제국 멸망의 근원적 '원인'은 아니고 일을 촉발시킨 '방아쇠'라고 할 만하다.[35] 다만 러시아 황실 자체는 영국 왕실과 친척관계라 러시아 혁명 때 로마노프 일가의 구출을 미적거려 결과적으로 그들이 몰살당하는 것을 막지 못한 걸 조지 5세는 두고두고 후회했으며, 이 때문에 나중에 그리스에서 쿠데타가 일어날 때 재빠르게 왕족들을 구출한다. 이 중에는 후일 영국의 국서가 되는 왕자도 있었다.[36] 빅토리아 유지니의 증손자가 현 스페인 국왕인 펠리페 6세다. 다만 펠리페 6세는 딸만 두 명인지라 남계후손이 이어지는 건 차남 하이메의 후손이다.[37] 알렉산더의 큰형은 2남 2녀를 두었으나 장남은 외동딸만 둔 채 사망하고 차남은 전사했으며, 작은형은 아예 자녀도 없이 사망했다. 다만 형들은 혈우병과는 상관이 없었지만.[38] 학설에 따르면 아버지의 나이가 많을 때 태어난 딸에게는 돌연변이로 혈우병 인자가 생길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한다. 빅토리아 여왕은 아버지가 50대일 때 태어난 늦둥이다. 영화나 게임의 영향 때문에 돌연변이라면 몸에 눈이 여러 개 달려 있거나 괴물같은 힘, 이상한 초능력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지만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생기면 그냥 그 유전자가 생산하는 단백질이 기능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즉, 혈우병 인자가 생긴다는 게 없는 인자가 생겨나는 게 아니고, 혈액응고 관련 단백질을 생산하는 유전자 중 하나에 돌연변이가 생겨 기능을 잃은 것이다. 나이가 많아질수록 유전체를 복제하는 과정에서 제대로 복제되지 않고 돌연변이가 생길 확률이 높아진다. 일례로 다운증후군은 산모의 나이가 40대 이상의 노산일 경우 발병률이 급격히 치솟는다. 일각에서는 근친혼 때문에 혈우병이 발생한 것이 아니냐고 얘기하는 경우도 있으나, 그 이유는 아니다. 근친혼은 돌연변이의 위험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희귀 열성 인자의 발현 가능성을 높인다. 앨버트 공이 빅토리아 여왕의 외사촌이라 그런 오해가 생긴 것으로 추정되지만 혈우병 유전자는 빅토리아 여왕이 가지고 있었고 앨버트 공은 혈우병이 없었기 때문에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이 사촌관계인 사실은 혈우병과는 무관하다.[39] 사실 이런 성격은 그 당시 여성, 그것도 군주에게는 매우 특이한 케이스였다. 왜냐하면 그 당시 왕족, 귀족들은 배우자의 외모와는 전혀 상관 없이 혼인을 맺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40] 외손녀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차녀 앨리스 공주의 장녀)의 장녀이자 엘리자베스 2세의 남편 필립 공의 어머니이다.[41] 두 사람은 7촌이다.[42] 알렉산드르의 아버지 니콜라이 1세"황후감이 필요하지 여왕의 남편이 될 필요는 없다."며 반대했다. 부동항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던 니콜라이의 입장에서 영국이 계속 시비걸고 방해했기 때문에 당연히 영국을 싫어했다.[43] 이렇게 썸을 탔던 두 사람은 나중에 2대에 걸쳐서 사돈이 된다. 알렉산드르 2세의 딸 마리야와 빅토리아 여왕의 차남 알프레드 왕자가 결혼했고, 알렉산드르의 친손자 니콜라이 2세와 빅토리아의 외손녀 헤센의 알릭스 공녀가 결혼했고, 알렉산드르의 친손자인 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과 빅토리아의 친손녀 작센코부르크고타의 빅토리아 멜리타 공녀가 결혼했다.[44] 번역이 틀린 게 아니라 유럽에서 군주과 교황은 자신을 복수형으로 지칭한다. 이를 장엄복수형이라고 하며 유럽권에서 일반적이다. 고대 히브리어에서도 야훼를 언급할 때 신의 존함을 사용하는 것을 신성모독이라 여긴 나머지, 가장 드높여부르는 대명사로 우회해서 언급하고자 장엄복수형을 사용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45] 이때는 첫딸을 임신중이었다.[46] 사실 오르톨랑 요리법은 현대식 푸아그라도 따위로 만드는 수준으로 극악무도하기로 악명이 높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47] 물론 사진을 찍었을 당시에는 전직 대통령 시점이었다. 참고로 애덤스가 대통령으로 집권하던 시기는 사진의 태동기라 인물 촬영이 사실상 불가능했다.[48] 즉 빅토리아의 장남 에드워드 7세가 니콜라이 2세의 이모부이다.[49] 니콜라이 2세는 빌헬름 2세와는 서로 7촌 지간이기도 하며 사적으로는 매우 가까웠던 사이이기도 하다.[50] 후대에 대놓고 중국에 대한 합병을 목표로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도 같은 이유로 가장 승승장구할 때조차 중국의 동부 해안 지대만 간신히 차지했다.[51] 여담으로 닥터후에서 11대 닥터 역으로 제나 콜먼과 호흡을 맞춘 맷 스미스는 다른 드라마에서 빅토리아의 현손녀의 남편이자 역시 빅토리아의 후손이기도 한 필립 마운트배튼 역을 맡았다는 것도 흥미로운 점이다.[52] 해당 에피소드에서 빅토리아 여왕 역을 맡은 배우 폴린 콜린스(Pauline Collins)는 닥터후 올드 시즌에서 아역으로 등장한 경력이 있다고 한다. 기네스북에 등재된 최장기 방영 드라마의 위엄. 이후 뉴 시즌 10 에피소드 9 <화성의 여제(The Empress of Mars)>에서 화성에 간 영국군이 챙겨간 초상화로 등장하는데, 이 초상화 역시 폴린 콜린스를 모델로 했다.[53] 한국으로 치면 대충 '정조대왕이 사실 도깨비였다' 같은 내용이라는 얘기다. 왕실과 역사적 인물 놀려먹기에 대한 거부감이 아시아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면모를 잘 보여주는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