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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왕국 튜더 왕조 제2대 국왕 헨리 8세 Henry VIII | |||
<colbgcolor=#cf091f><colcolor=black> 왕호 | 헨리 8세 (Henry VIII) | ||
출생 | 1491년 6월 28일 | ||
잉글랜드 왕국 켄트 그리니치 그리니치 궁전[1] | |||
사망 | 1547년 1월 28일 (향년 55세) | ||
잉글랜드 왕국 런던 화이트홀 궁전[2] | |||
재위기간 | 잉글랜드, 아일랜드의 왕 | ||
1509년 4월 22일 ~ 1547년 1월 28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cf091f><colcolor=#fff> 이름 | 헨리 튜더 (Henry Tudor) | |
신장 | 188cm | ||
배우자 | 아라곤의 카탈리나 (1509년 결혼 / 1533년 무효화) | ||
앤 불린 (1533년 결혼 / 1536년 무효화) | |||
제인 시모어 (1536년 결혼 / 1537년 사망) | |||
클레베의 앤 (1540년 결혼 / 1540년 무효화) | |||
캐서린 하워드 (1540년 결혼 / 1542년 사망) | |||
캐서린 파 (1543년 결혼) | |||
자녀 | 메리 1세, 헨리 피츠로이(사생아), 엘리자베스 1세, 에드워드 6세 | ||
아버지 | 헨리 7세 | ||
어머니 | 요크의 엘리자베스 | ||
형제자매 | 아서, 마거릿, 엘리자베스, 메리, 에드먼드 | ||
장례식 | 1547년 2월 16일 | ||
버크셔 윈저 성 세인트 조지 예배당 | |||
종교 | 가톨릭 → 잉글랜드 국교회[3]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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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6세기 잉글랜드 왕국 튜더 왕조의 절대군주이자 잉글랜드 해군의 아버지이다. 또한 두 번의 대승으로 북쪽의 숙적 스코틀랜드 왕국을 제압함으로서 훗날 브리튼 섬 통일의 기초를 닦았으며, 잉글랜드 국교회를 성립시켜 이후 잉글랜드 역사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즉, 단순히 호색한이나 난봉꾼 정도로 기억해서는 절대 안 될 잉글랜드인의 정체성에 큰 영향을 미친 잉글랜드 역사상 중요한 인물이다.
귀족들을 거의 절멸시킨 장미 전쟁을 종식시키고 튜더 왕조를 개창한 헨리 7세의 차남으로 태어나 형 웨일스 공 아서의 죽음으로 왕좌에 올랐고, 6명의 아내들 중 적자녀 셋만 얻었고 그들이 모두 왕이 되었으며, 파란만장하고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며 수많은 이야기를 남기고 간 문제적 인물이다.
장미 전쟁으로 완전히 도륙난 플랜태저넷계 랭커스터 왕조와 요크 왕조의 피를 모두 이어 받았다.[4] 스페인 트라스타마라 왕실 출신의 아라곤의 카탈리나와의 이혼으로 인해 로마 가톨릭과 결별하고 잉글랜드를 독립시켜, 잉글랜드 국교회[5]를 설립함으로써, 이후 잉글랜드는 물론 유럽 기독교권의 판도 자체에도 무시 못할 영향력을 미친 장본인이기도 하다.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킨 잉글랜드 종교개혁, 그와 관련해 국내외에서 벌어진 격렬한 대립, 그리고 6번의 결혼 생활 중 2명의 왕비가 본인에 의해 처형당한 요란하기 그지없는 사생활 등, 재위 기간 (1509년 ~ 1547년) 동안 여러모로 드라마틱한 사건들로 가득하여 헨리 8세는 오늘날에도 곧잘 회자되고 여러 창작 매체 등에서 다뤄질 정도로 이래저래 언급과 인기가 많은 왕이다. "허세왕 할"(Bluff king HAL), "건장한 왕 해리"(Burly king Harry)[6]라는 애증 섞인 별명이 있을 정도이다.
2. 생애
2.1. 초기 통치
헨리 7세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왕위 계승자인 형 아서가 15세에 요절하여 새로운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1509년 아버지 헨리 7세가 승하하면서 18세의 나이로 잉글랜드의 국왕이 되었다. 전임인 헨리 7세가 가혹한 징세로 인기를 많이 깎아 먹었던 탓에 젊은 국왕 헨리 8세가 새로운 시대를 열 것이란 기대가 높았다. 헨리 8세도 그런 민심에 부응하여 헨리 7세 시절 악명이 높았던 징세관 에드먼드 더들리와 리처드 엠프슨을 체포하여, 런던 시내에 조리돌림을 한 후 처형하여 인기가 상승했다.젊은 시절부터 사냥, 마상 창 시합, 춤, 예능 같은 야외 활동을 좋아했고, 심지어 정무를 보는 것보다 더 즐겼다. 여색도 엄청 밝혀 체념한 캐서린의 묵인 하에 문란한 성생활을 일삼았다. 마상 창 시합 등 스포츠나 무예에서 연승한 건 참여한 사람들이 왕의 체면을 세워주려고 일부러 져준 것이었고, 젊어서는 놀기 바빠서 실제 정사는 토머스 울지 추기경에게 일임했다. 그러니 치세 초반의 업적은 상당수가 울지 추기경의 공인 셈이다.
동시에 당시 왕족들 중에서 공부도 상당히 잘해 라틴어와 스페인어, 프랑스어가 유창했고, 당대의 석학들과 천문학과 신학을 토론했다고 하며, 최고의 지성이었던 네덜란드의 에라스뮈스조차 칭찬할 정도였다.
헨리 8세의 초기 치세때 이탈리아에서는 전쟁이 한창이었다. 교황 율리오 2세가 교황령을 회복하기[7] 위해 전쟁을 벌였고, 풍요로운 이탈리아 내의 권리를 서로 주장한 프랑스와 합스부르크가 격렬하게 이탈리아 전쟁을 벌이는 중이었다. 이때 헨리 8세는 교황에 맞선[8] 발루아 왕조 프랑스에게 고 경고했다. 당연히 프랑스는 가뿐히 씹었다.
이에 헨리 8세는 교황청 및 합스부르크 왕조 신성 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와의 전쟁에 돌입했다. 막시밀리안 1세 치세의 합스부르크 가문은 통일 스페인의 최전성기를 개막시킨 트라스타마라 왕가와 결혼을 통한 동맹 중이었는데, 스페인은 프랑스와 단독강화하고, 언제든지 잉글랜드의 뒤통수를 칠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먼저 선수를 쳐 프랑스의 대서양 함대 기지인 브레스트에 함대를 파견하여 선제공격했으나 실패했다. 결국 헨리 8세가 직접 대륙으로 건너가 친정에 나서 막시밀리안 1세와 합류했는데 그의 꼬임에 넘어가 합스부르크 가문과 연합해 프랑스와의 일전에서 선봉으로 나서 운좋게 이겼다. 그러나 전쟁 자체는 별 성과가 없었고, 잉글랜드의 재정만 엄청나게 탕진했다.
이 시절의 헨리 8세는 오히려 종교개혁을 노골적으로 반대하는 노선을 걸었다. 성사를 옹호하고, 마르틴 루터의 신학을 공격하는 내용이 골자인 《Assertio Septem Sacramentorum》의 출판과 함께 교황청으로부터 신앙의 수호자 라는 어마무시한 칭호를 받은 것이 이 시절의 이야기이다.
2.1.1. 플로든 전투
대륙에서의 원정은 실패했으나 국내에서 그 실책을 어느 정도 만회했다. 같은 브리튼 섬 국가인 켈트계 스코틀랜드 왕국의 스튜어트 왕조 국왕 제임스 4세는 헨리 8세의 누나인 마거릿 튜더와 결혼하여 헨리 8세의 매형이 되었지만 프랑스 왕국의 발루아 왕조 편을 들어 잉글랜드와 전쟁 중이었다. 그러나 헨리 8세는 국경지대인 플로든 평원에서 스코틀랜드군과의 혈전 끝에 매형이었던 제임스 4세와 스코틀랜드 귀족 상당수를 포함한 1만 명을 전사시키고 스코틀랜드군을 거의 전멸시키며, 수도 에든버러까지 약탈하는 대전과를 거두었다. 또한 이 플로든 전투의 패배로 큰 타격을 입은[9] 스코틀랜드 국내에서는 잉글랜드와의 국력 격차를 실감하며 '잉글랜드 적대-프랑스 우호' 정책에서 전환한 대(對) 잉글랜드 주화파가 생겨나게 되었다.정통성 위협에 시달려 헨리 8세가 플랜태저넷 혈통들을 많이 처형했다는 말이 있는데 어느 정도 사실을 오인한 면이 있다. 사실 플랜태저넷 왕조의 후손들은 30년 동안의 장미 전쟁으로 거의 도륙나 있었던 상태였기에, 이미 아버지 대인 헨리 7세 때부터 살아남은 사람이 거의 없을 지경이었다. 당시 잉글랜드의 플랜태저넷 혈통은 요크 왕조 말기인 리처드 3세 때, 10여 명 남은 부계 혈통 중 8명을 죽였고, 남은 서넛 명은 튜더 왕조를 연 헨리 7세 때 처형당하거나 외국으로 도망갔다. 사실 랭커스터 왕조와 요크 왕조 모두 시조인 에드워드 3세의 아들들의 작위명에서[10] 왕조의 이름이 유래됐을 뿐, 본가는 모두 플랜태저넷 왕조였으며 실제 성씨도 플랜태저넷이었다. 후대에 들어서면서 랭커스터와 요크로 구분하는 거지, 서로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플랜태저넷이라고 싸운 것이 바로 장미 전쟁이었다.
이러한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전은 에드워드 3세의 장손, 흑태자 에드워드의 아들인 리처드 2세가 사촌 볼링브룩의 헨리에 의해[11] 폐위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폐위된 리처드 2세가 자식 없이 죽으면서 플랜태저넷의 본가는 절손되었고, 이후 볼링브룩의 헨리가 헨리 4세로 즉위하여 랭커스터 왕조를 개창했으며, 이후로도 헨리 4세의 아들인 헨리 5세와 손자인 헨리 6세가 연이어 즉위하면서 랭커스터 왕조가 계속 이어질 듯 했다. 하지만 제3대 요크 공작인 요크의 리처드가 정신병이 발병한 헨리 6세의 계속된 실정에 반발하고, 자신의 정통성을 내세우며[12] 왕위를 요구하면서 장미 전쟁이 시작되었다.
요크의 리처드는 왕이 되기도 전에 전투에서 패배해 처형당했지만, 그의 장남 에드워드 4세가 다시 세력을 결집시켜 요크 왕조의 첫 번째 왕으로 즉위했다. 이후 정신병으로 폐위된 헨리 6세의 외아들인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가 전투 도중에 사망하고, 헨리 6세 역시 유폐되어 있다가 암살이 유력한 죽음을 맞으면서 랭커스터 본가의 계열도 대가 끊겼다. 이리하여 에드워드 4세의 치세가 이어지면서 요크 왕조가 번성할 듯 보였다. 숙청당한 랭커스터 왕조의 지지자들은 헨리 6세의 이부동생 에드먼드 튜더와 플랜태저넷(랭커스터)의 몇 안남은 후손 마거릿 보퍼트[13]의 아들 헨리 튜더를 지목했다. 마거릿 보퍼트는 초대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의 증손녀로, 헨리 튜더는 모계로 에드워드 3세의 현손이며 초대 랭커스터 공작의 고손자가 되었다. 사실 랭커스터와 요크 모두 에드워드 3세의 후손이라 튜더도 까마득하게 먼 방계라고 보기도 어렵다. 그 덕에 랭커스터 가문이 절손되자 꿩 대신 닭 격으로 추대된 것이지만, 랭커스터 지지자들은 헨리 튜더를 마지막 희망으로 삼고 왕위에 추대했다.
하지만 전쟁에서 승리한 요크 왕조마저 점차 자기들끼리 내분으로 망하기 시작했다. 에드워드 4세의 둘째 동생 클래런스 공작 조지가 형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당하는 것을 시작으로, 마침내 셋째동생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가 에드워드 4세 사후 그의 아들들을 살해하고 스스로 리처드 3세로 즉위하면서 정점을 찍었다. 이 찬탈에 요크 왕조의 지지자들마저 분열하면서 헨리 튜더를 지지하고 이후 보스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를 전사시킨 헨리 튜더가 헨리 7세로 즉위하며 에드워드 4세의 장녀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하면서 미약한 정통성을 보충했는데 이 두 사람의 아들이 바로 헨리 8세였다.
헨리 8세는 완전히 명맥이 끊긴 랭커스터 왕조의 혈통을 친할머니 마거릿 보퍼트에게서 물려받았고 요크 왕조의 혈통으로 봐도 에드워드 4세의 장녀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아들이라 에드워드 4세의 외손자였다. 때문에 요크 왕조의 잔당들이 반란의 수괴로 내세운 워릭 백작(클라렌스 공작의 아들)과 존 드라폴[14]보다 정통성에서 더 앞서 있었다. 게다가 워릭 백작은 헨리 7세 때 런던탑에 감금되었다가 성인이 돼서 탈옥하고 간수들을 매수하려다 처형당하고, 존 드라폴은 반란군을 이끌다가 전사해서 헨리 8세의 정통성을 위협할 만한 인물은 남아있지 않았다.
클라렌스 공작 조지 또한 형 에드워드 4세가 즉위하면서 덩달아 왕족으로 격상된 것이지 실제 계보는 에드워드 3세의 고손자에 불과했기 때문에 정통성이 미약한 건 매한가지였다. 형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당한 클라렌스 공작의 후손이나 에드워드 4세의 누이의 아들보다, 에드워드 4세의 장녀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아들인 헨리 8세가 지닌 요크 혈통이 더 우선이었다. 그나마도 헨리 7세 시기에 요크 왕조의 잔당들이 대거 숙청되었고 남은 사람들마저 거의 대부분 헨리 8세가 숙청하면서 기존의 튜더 가문보다 까마득하게 먼 방계로 어설프게나마 왕조의 피를 이은 가문 몇 개만 살아남았기 때문에 정통성에 큰 위협은 되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헨리 8세의 숙청은 혈통을 가리지 않았다. 그는 왕가 혈통이 섞이지 않은 전통 대귀족들도 대거 숙청했다. 그 결과 다음 다음 대인 엘리자베스 1세 시절에 잉글랜드의 전통 귀족 가문은 남작까지 합쳐야 수십 개 가문에 불과했고, 공작 가문은 장자 서리 백작이 처형당하고 손자도 훗날 처형당하는 노퍽 공작 하워드 가문 하나만 남을 정도였다.
그러던 중 대륙에서는 막시밀리안 1세의 손자 카를 5세가 즉위했다. 헨리 8세는 신성 로마 제국과 스페인을 통치하며 프랑스와 대치 중이던 젊은 황제 카를 5세를 지지했으며 여전히 프랑스 영토에 대한 욕심이 있었지만, 교황 레오 10세와 토마스 울지 추기경의 설득 하에 일단 런던에서 불가침 조약을 맺으며 후에 프랑수아 1세를 초청하여 칼레에서 연회를 열었다. 한편으로는 카를 5세가 이탈리아 전쟁의 분수령이었던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스를 캐바르고 프랑수아 1세를 사로잡는 등, 군사력이 날로 강해질 무렵 헨리 8세는 울지 추기경의 주도하에 모어 성에서 프랑스와 강화 조약을 맺었다.[15]
2.2. 이혼과 잉글랜드 종교 개혁
헨리 8세의 이혼과 종교개혁의 원인은 복잡한 정치적 상황 때문이었다.[16] 마침 헨리 8세 치세에는 종교개혁 열풍이 대륙에서 불고 있었는데, 헨리는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 시기 발표한 논문에 대한 대한 반박문을 작성하기도 하는 등 가톨릭 신앙을 유지하며 교황의 정치적 동반자이기도 했다.[17] 이 공로로 1521년 8월에 헨리 8세는 레오 10세로부터 신앙의 수호자(Fidei Defensor), 영어로는 'Defender of Faith'라는 거창한 칭호를 받았다. 이 'Fidei Defensor'라는 칭호는 현재 찰스 3세에 이르기까지도 영국 국왕의 공식 타이틀로 유지되고 있다.훗날 헨리 8세가 잉글랜드 국교회를 세웠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런데 헨리 8세의 <수장령> 선포와 일련의 종교개혁 조치는 사실 교리, 교회 조직, 성사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2.2.1. <수장령>
헨리 8세의 <수장령>을 비롯한 일련의 조치는 잉글랜드의 왕과 법률 기관이 '교회의 자산 운용을 감찰할 권리와 성직자에 대한 형사 재판 권한이 있음'을 선언한 것뿐이었다.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그(교황)는 로마의 주교일 뿐, 관할권을 벗어난 초법적이며 불법적인 통치를 종식시킨다'는 명분으로 더 이상 잉글랜드 교회(Church of England)에 간섭하지 말라는 뜻에 불과했다. 교회의 방향이나 정체성과 관련된 신학적, 전례적, 교리적 논쟁은 계속해서 벌어졌다. 자세한 것은 성공회 문서 참고.헨리 8세는 자기 형 아서 튜더의 약혼자였던 아라곤의 카탈리나와 결혼했다. 캐서린은 헨리 8세의 형 아서가 결혼한 지 20주만에 병에 걸려 죽었지만 계속 잉글랜드에 남아있었다. 왕권 강화를 위해 구두쇠였던 시아버지 헨리 7세가 캐서린의 지참금 20만 두카트를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실에 반환하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차남 헨리가 형 아서의 약혼자 캐서린과 결혼하는 것은 당시 윤리상으로도 문제가 있었는데, 교회법상으론 근친혼에 해당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유럽 왕실들은 촌수로는 거의 죄다 근친혼이었지만 교황청에선 거의 예외 없이 그리스도교 군주 사이 결합을 대의로 인정했기에 이번에도 교황의 관면이 뒤따랐다. 헨리 8세는 즉위한 지 2개월 만에 교황 율리오 2세에게 관면을 받아 결혼하였다.
그런데 불행히도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들은 줄줄히 요절이나 사산이 되었고, 딸인 메리 공주만 살아남고 캐서린이 더 이상 아이를 낳기 어려운 나이가 되자 큰 문제가 일어나게 되었다. 메리 공주를 당시 풍속대로 외국 왕가에게 시집보내면 하나 남은 계승권이 외국에 넘어가는 셈이었고, 아들이 없는 상황에서 헨리 8세가 죽을 경우, 헨리 7세 치세 이전 근 30여년 간 벌어졌던 왕위 계승 다툼인 장미전쟁이 재현될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단순히 아들을 보고 싶은 것뿐이었다면 정부를 두면 될 일이고, 실제로 1519년 정부(첩) 엘리자베스 블런트에게서 헨리 피츠로이라는 남자 사생아를 얻어 공작 작위 2개와 백작 작위 1개를 퍼주었다. 그러나 사생아는 사생아일 뿐 왕위 계승자가 될 수는 없는 법이었고, 헨리 피츠로이도 요절했다.
중세 시절, 자식이 없어서 왕조가 끊기거나 아들 없이 딸만 있어서 가문의 영지가 다른 나라로 넘어가는 일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여계 계승은 남자 계승자가 없을 경우 예외적으로 두는 수단이었고, 그나마도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경우는 보기 힘들었다. 일단 대륙의 프랑크 왕국 계통의 신성 로마 제국과 프랑스 왕국은 <살리카법>이 엄격하게 적용되어 남계가 절손되면 상위 군주에게 영지가 몰수되거나 아주 먼 친척에게 새로 분봉되었다. 프랑크 왕국 계통이 아닌 유럽 국가에서도, 딸에게 무사히 물려주는 경우보다 후계자가 어리거나 여성인 경우 무력으로 찬탈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이베리아 반도의 카스티야와 아라곤과 같은 동군연합을 예로 들자면,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는 카스티야 왕국의 공동 통치자로 명목상 인정받긴 했지만 어떠한 권력도 누리지 못했다. 여기에 페르난도가 이사벨 1세 사후에 재혼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요절하여 외손자인 카를 5세(카를로스 1세)에게 계승권이 넘어간 것일뿐 당시 풍속에선 여성 승계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합스부르크 가문만 봐도 보헤미아 왕국-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 왕국 야기에우워 왕조와의 결혼을 통해 러요시 2세 전사 후 정당한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었으나, 이 경우에도 동부 에르데이 지역을 중심으로 한 헝가리 귀족들이 왕위 계승을 인정하지 않았던 데다가 오스만 제국의 간섭으로 인해 서부 일부만 가져올 수 있었고, 보헤미아 왕국에는 여러 이권과 자치권을 퍼줘야 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통치한 발루아-부르고뉴 공작가만 보더라도 부르고뉴 전쟁 중 용담공 샤를이 낭시 전투에서 처참하게 전사하고, 외동딸인 마리 드 부르고뉴만 남은 상태에서 여계 승계를 금지하는 <살리카법>을 근거로 프랑스 왕이 상위 군주의 권한으로 영지 몰수를 시도하자 당시 부르고뉴 궁정에서 합스부르크의 막시밀리안 1세에게 SOS를 쳐서 무력으로 저지한 것이지, 결혼으로 온전히 왕국이 상속되는 경우는 일반적이지 않았다.[18] 더군다나 잉글랜드는 역사상 헨리 1세(노르만 왕조 제3대 왕)가 자신의 외동딸인 마틸다(잉글랜드)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음에도 여계 승계에 부정적인 신하들 덕에 쫓겨났고, 그 이후로도 당시 기준으로는 여왕이 없었다.[19]
30여 년에 걸쳐 왕위 계승을 두고 장미전쟁을 벌여 피를 흘린 역사적 경험 때문에, 헨리 8세의 아래에 있는 신하들도 하나 남은 왕위 계승권이 외국으로 유출되는 사태를 극도로 염려했다. 메리 1세 같은 여자 임금은 남편에게 강력히 영향을 받는다고[20] 생각했기 때문에 신하들은 헨리 8세가 새 장가 들기에 찬성했다. 보통은 혼인무효를 교회에서 승인받으면 기존 자식들에게는 계승권을 인정하고 기존 왕비에게는 막대한 재산을 하사해서 좋게 내보내거나, 쫓아내더라도 수녀원으로 유폐하고 끝냈다. 헨리 8세처럼 무일푼으로 쫓아내거나 목을 쳐버리는 경우는 드물었다.
게다가 잉글랜드는 다른 유럽 국가들과 달리 이미 국왕의 나라가 아니라 잉글랜드 자체로 국가 정체성이 뚜렷해진 상황이라, 외국인 왕이 들어앉아서 잉글랜드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을 폄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아라곤의 카탈리나의 친정인 스페인 왕실[21]과 메리 공주의 지지 기반은 종교적으로 가톨릭 세력과 외세인 합스부르크 제국 및 스페인이었기 때문에 메리에게 왕위가 넘어갈 경우 합스부르크 가문과 결혼할 확률이 높았으며(실제로 그러했고) 그렇게 된다면 잉글랜드는 국익과 무관하게 합스부르크 가문의 대외정책에 일방적으로 끌려가게 되는 형편이 되기에 잉글랜드 내부에서 그런 상황을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결국 헨리 8세는 중세 군주들이 이혼을 원할 때처럼 교황청에 혼인무효[22]를 요청했다. 그러나 교황청에선 헨리 8세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명분으론 '전임 교황의 결정을 번복할 수 없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아라곤의 카탈리나의 친정 조카가 스페인 국왕이며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카를로스 1세(카를 5세)였기 때문이었다. 황제도 황제지만 이 시기는 사코 디 로마(로마 대약탈), 즉 황제군에 의해 로마가 잿더미가 되고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막대한 타격을 입으며 쇠락한 상태여서, 로마 교황이 도저히 황제의 심기를 거스를 수가 없었다.
결국 이 문제는 소송전으로 발전하여 헨리 8세는
"캐서린이 전 남편 아서와 부부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나와의 결혼은 무효다!"
라고 주장했고, 캐서린은 "나는 아서와 부부관계를 맺은 적이 없기 때문에 이전 결혼은 정당한 사유로 무효가 되었으며, 따라서 헨리와의 결혼 역시 적법하다."
라고 주장했다. 《구약성경》의 <레위기>가 어쨌니 저쨌니 하는 지리한 재판 끝에, 교황청에선 결정에 따른 정치적 부담을 들어 재판을 무기한 연기하거나 로마에 와서 시비를 가리라는 쪽으로 결정이 났다. 이는 합법적으로 이혼이 불가능해졌다는 걸 뜻했다.1529년 8월, 혼인무효가 무산된 책임을 물어 재상 토머스 울지 추기경을 궁정에서 쫓아내 요크로 돌려보내고[23] 토머스 모어가 대법관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혼인무효에 이론적 근거[24]를 제공한 종교개혁 성향의 신하들을 총애하기 시작했는데 마침 캔터베리 대주교가 사망하자 대륙 신학을 공부하고 와서 교황청과의 단절을 주장한 토머스 크랜머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했다.[25] 최후의 시도로 교황청에 영국 대사를 보내봤지만, 이미 클레멘스 7세는 사코 디 로마로 카를 5세에게 사로잡혀 산탄젤로 성에 감금된 처지라 아무 것도 해줄 수가 없었다.
마지막 시도까지 빗나가자, 1534년 11월. 헨리 8세는 이미 잉글랜드 교회에서 싹튼 종교개혁 성향 성직자 귀족들의 지지를 배경으로 <수장령>(Acts of Supremacy, 首長令)을 선포했다.[26] 그리고 나서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후속조치로 <수장령>에 이어 <반역법>(Treason Act)을 제정하여, 잉글랜드 통치자에게서 나온 처분을 외국에 상소함을 반역으로 선언했다. 더불어 이런 권한을 부인하는 것까지 반역으로 선언했다.
잉글랜드 교회 내부의 전통주의 성향의 성직자들은 일단 <수장령>에 몇몇 조건을 거는 정도로 반항시도를 하다가, 헨리 8세의 뜻이 워낙 강경했기에 <수장령>을 받아들였다. 이 당시까지도 독실한 가톨릭 성향 교도들은 '임금님이 교황과 적당히 싸우다 말겠지' 하는 생각이 강했다. 중세 유럽 군주들도 일시적으로 난리치다가 교황청과 화해하던 것이 다반사였기 때문이었다. (종교개혁 성향의 젠트리 계층은 헨리 8세의 조치를 완전히 환영했다.)
그러나 <수장령>을 죽어라고 거부한 신하들이 둘이나 있었다. 헨리 8세의 심복이자 대법관으로 대륙 신학의 영향을 받은 신교도 성향의 신하들을 탄압하는데 등용했던 토머스 모어[27]와 존 피셔 주교[28]를 1535년에 처형하고 수도원을 파괴하자 더 이상 참지 못한 교황 클레멘스 7세는 1538년 12월에 헨리 8세를 파문에 처했다.[29]
그런데 신앙의 수호자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의 아버지인 교황님에게 개기지 말라고 말해서 교황청으로부터 칭찬(?)까지 받은 헨리 8세가 왜 이리 갑자기 변하며 여자 하나에 빠져 교황에 뒷통수를 쳤나라는 의문점이 들 수 있다. 당연히 앤 불린보다 아들 낳기 염원이 큰 것이었고, 원래 헨리 8세 이전의 역대 잉글랜드 국왕과 로마 교황와의 사이는 그다지 사이가 원만한 편이 아니었다. 앙주(플랜태저넷) 왕조 시절인 존 왕 치세때도 수도원과 교회를 털고, 성직자들의 수입을 가로챘다가 파문당하기도 했고, 그 아버지인 헨리 2세 시기에는 토마스 베켓을 죽이고 용서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막후 타협을 통해 대부분의 실리, 특히 성직자 처분권을 잉글랜드 왕이 가져갔으며, 에드워드 1세 시절에도 교회와 수도원 재산을 놓고 교황과 한바탕 싸웠다. 아비뇽 교황 시절에는 교황들을 프랑스 카페 왕실의 앞잡이로 생각하여 무시했으며, 백년전쟁 시기에는 실제로 아비뇽으로 대포를 끌고 가서 교황청을 협박해 돈을 뜯기도 했다. 또한 아비뇽-로마 교회의 대분열기에도 역시 대립교황들 사이에서 간을 보면서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헨리 8세 또한 교황청에 그다지 고분고분한 편은 아니었다. 헨리 8세는 즉위 초부터 잉글랜드 교회를 스스로 통제하고 싶어했고, 재상 토머스 울지 추기경을 영국 내에서의 '교황청의 사절'로 인정해달라고 계속 주장했으나 번번히 거부당했다. 교황청에서 보기엔 울지를 교황청 사절로 인정하면 사실상 잉글랜드 내에서 교황의 대리인이 되는 것인데, 울지는 헨리 8세의 충실한 신하이니 헨리 8세가 울지를 핑계삼아 잉글랜드 교회를 마음대로 다룰 것이 빤히 보였기 때문이다. 거기다 1516년 라이벌인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가 교황군을 격파하고 볼로냐 화약을 통해 프랑스 교회에서의 실질적인 권한을 취득하자 고까운 탓도 있었다. 교황청에서 세세한 명분들을 얻은 대신 프랑스 내 9개 대주교 자리를 포함하여, 주교, 수도원장ㆍ수녀원장 등 600여 개 성직 임명권과 교회 수입을 프랑스 국왕에게 양도하는, 사실상 교황청의 완전한 항복에 가까운 조치였기 때문이다.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결과인 잉글랜드 국교회(세계성공회의 모태)의 역사는 해당항목 성공회의 잉글랜드 교회의 역사 참조 바람.
2.2.2. 수도원 통폐합
이후 헨리 8세는 1535년 2월에 <수도원폐쇄령>(Act for the Dissolution of the Lesser Monasteries)을 의회에서 승인했다. 해당 법의 내용들을 뜯어보면 다음과 같다.[참조1]- 해당 법이 공포되기 1년 전에 이러한 조치가 취해진 수도원들도 이 법에 의해 적법한 것으로 취급.
- 연 자산 가치 200파운드 이하인 수도원의 모든 자산을 국유화한다.[31]
- 왕은 이렇게 확보한 자산을 헛되이 쓰거나 사사로이 취급하지 않는다.[영문1]
- 왕이 국유화한 수도원의 원장의 채무를 구제한다.[영문2]
- 국유화한 수도원의 원장에게는 연금이 지급되며 수사와 수녀들은 새출발지원금을 받거나[영문3], 보다 대규모의 수도원으로 옮겨야 하며, 이로 인해 수도원을 옮기려는 수사/수녀들은 반드시 받아줘야 한다.[영문4]
그 와중에 교회니 수도원에서 성혈이 발현되었다니 뭐니 하면서 순례자들을 꼬이던 곳의 비밀이 알고 보니, 모두 닭이나 염소 피라는 게 낱낱이 폭로되면서 분노한 농민들까지 수도원을 때려 부수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다.
2.2.3. 반발과 반란
수도원의 통폐합이 집행될 무렵, 잉글랜드 북부에서는 흉작과 그로 인한 스태그플레이션이 일어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여러가지 부작용이 야기되었다. 흉작으로 고통받는 농민들은 그나마 종교 행위로 심리적 위안을 얻고 있었는데 이를 방해받는 결과가 되었거나, 특히 환속한 수녀들의 경우에는 새출발을 위한 지원금이 모자라는 상황이 생겼다.[36] 게다가 수도원의 통폐합은 오늘날로 치자면 복지 시스템을 대격변 수준으로 갈아엎은 셈이었는데, 본당 단위로 관리되는 새로운 구휼 체계가 1536년도에 의회에서 통과되었다고는 하지만[37] 배고프고 불안한 상황에 그러한 교육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인클로저 운동의 여파도 이러한 불만을 부추기면 부추겼지 잠재우지는 않았다.한편 수도원의 통폐합 그 자체는 물론이고, <An Act Concerning the Uses and Wills>를 통한 부동산 소득 제한은 기득권의 불만을 야기했다. 또한 여러 교구를 소유하던 주교들은 한 교구만 빼고 수입을 완전히 몰수하며, 기존 교구 수입의 10%를 또 바치라는 법률도 통과되었다.이로 인해 잉글랜드 북부에서는 여러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고, 특히 1536년 10월의 은총의 순례로 그 절정을 찍게 되었다. 이때 지도자로 선임된 로버트 애스크(Robert Aske)는 정당성을 위해 나름대로 내부 규율을 엄격히 유지하고, 불만의 대상으로 국왕 헨리 8세 본인을 지목하는 것만은 철저히 막았다.[38] 그러자 헨리 8세도 타협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는지 폰트프랙트 성[39]에서 협상 자리를 만든 다음, 24개의 요구사항을 접수한 뒤 '이번만은 사면해 줄 테니 스스로 해산하라'고 명령하면서 애스크의 세력을 해산시켰다.
그런데 행정 처리 속도에 불만을 가진 프랜시스 비고드 경(Sir Francis Bigod)이 세력의 일부를 다시 규합해서 1537년 스카보로 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비고드 경의 세력은 요크셔의 베벌리에서 야습을 당해 궤멸되었고 비고드 경, 로버트 애스크를 비롯한 '은총의 순례' 수뇌부들은 모두 반역죄로 검거돼서 사형당했다.
2.2.4. 수도원 철폐
헨리 8세는 뜬금없이 후속 조치로, 1538년에 죽은 지 360년이 넘은 토마스 베켓(1118~1170) 캔터베리 대주교를 역모 혐의로 고발해 법정에 출두하도록 30일의 기간을 주었다. 물론 당연히 베켓은 나타날 리가 없었고, 이에 따라 베켓에게 유죄를 선고한 다음 켄터베리 대성당에 있는 그의 무덤을 부수고 유해를 불태운 뒤 무덤을 찾는 순례객들이 바친 막대한 보물을 몰수했다. 이는 헨리 8세가 가톨릭 신앙인이었을 때, 로테르담의 에라스뮈스의 영향으로 성유물이나 성해 공경 전통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던 영향도 있었다.또, 은총의 순례 반란의 진압 이후로는 수도자들이 자발적으로 수도회 자산을 바치고 환속하는 현상도 관찰된다.[참조2] 결국 1539년의 <An Act for the Dissolution of the Greater Monasteries>를 통해, 통폐합된 대형 수도원들마저 모두 국유화되었다.
2.3. 후반 통치
윌리엄 틴들과 마일스 코버데일의 영어 번역본 《성경》이 존 로저스에 의해 출판되었다. 이후 재세례파 인사들도 반역죄 혐의로 처형시켰다.[41]헨리 8세는 중년에 이르러서도 마상 창시합을 하다가 낙마 사고를 당해 한쪽 다리를 크게 다쳤고, 그로 인해 장애가 생기면서 예전과 달리 야외활동을 마음껏 즐길 수 없게 되었다. 이로 인해 생긴 스트레스 때문인지 나이가 들수록 생활태도가 방종해졌고, 과식을 일삼으면서 고도 비만이 되어 버렸다.[42]
원래 다혈질적이고 충동적인 성미의 소유자였지만 다리를 다치기 전에는 기분이 좋을 때 그나마 너그럽고 호탕한 면모라도 있었다. 하지만 다리를 다친 후로는 짜증을 잘 내고 신경질적인 성격이 되었다고 한다. 거기에 왕비를 둘이나 참수시키고 중용했던 관리들의 목까지 베어댔기 때문에, 신하들은 언제 헨리 8세의 심기를 거슬러 목이 날아갈까 두려움에 떨었다.[43] 정서적으로도 굉장히 불안정했으며 나이가 들면서는 병으로 인해 앓아눕는 일도 많아지기 시작했다. 또한 몸 곳곳에 종기와 수포가 자라 보기에 몹시 흉했으며 악취도 지독했다. 게다가 통풍을 심하게 앓았으며 낙마로 다친 다리의 상처는 크게 악화되어 그를 고통스럽게 했다.
한편 카를 5세와 프랑수아 1세가 다시 한 번 싸울 조짐을 보이자 마침 모어 성 조약에 따른 상납금을 받지 못하고 있던 참에, 카를 5세와 동맹을 맺고 프랑스와의 전쟁에 다시 돌입했지만 여기서도 별 소득이나 이득은 없었다. 심지어 카를 5세가 멋대로 프랑수아 1세와 화해하고 마무리짓자[44] 전비만 잔뜩 탕진하여 헨리 8세만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었다.
앤 불린과 제인 시모어를 거쳐 신성 로마 제국의 개신교 제후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볼 생각으로, 토마스 크롬웰의 추천 및 주선하에 클레베의 앤과 4번째 결혼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절반은 앤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한데다 절반은 정치적 이유로[45] 크롬웰을 재판도 없이 처형해버렸다. 또한 클레베의 앤과의 결혼도 '첫날밤을 보내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서 무효화시켰다. 하지만 크롬웰은 <수장령>에 적극적으로 협력했고, 심지어 재무에서도 독보적으로 유능했던 관료였던지라, 천하의 헨리 8세마저 크롬웰의 처형 후에야 그 공백을 느끼며 뼈저리게 후회했다.[46] 기껏 <수장령>으로 열심히 국유화한 교회 자산을 헐값에 처분하며 전비를 대다가 왕권이 기우는 단초가 본격적으로 눈에 띄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헨리 8세가 말년에 들인 마지막 왕비 캐서린 파도 아내라기보다는 까다로운 환자가 되어버린 늙은 남편의 실질적인 간병인이었다. 지금에야 영화나 드라마로 많이 미화되어서 드라마틱한 삶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의 재위 말년 즈음에는 튜더 궁정의 모두가 미친 왕이 빨리 죽기만을 기도했고 그가 죽자 신하와 백성을 가리지 않고 모든 잉글랜드 사람들이 기뻐했다고 한다.
3. 평가
이렇게 적고 보면 헨리 8세가 그냥 정신병자처럼 보이지만, 그 긴 치세 기간 동안 막장스러운 태도로만 일관했다면 한때 잉글랜드 국민들로부터 해리 왕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나름대로의 인망은 얻어낼 수는 없었다. 주변인들과 신하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까놓고 말해서 높으신 분들의 일은 알 바가 아닌 백성들에게는 호탕하고 강력한 왕으로 여겨지기도 했었다.
헨리 8세의 치세는 평가가 많이 갈리지만 잉글랜드가 최초로 열강의 위치에 오른 시기로 통치에선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시대의 흐름에 맞춰 귀족들보다는 학식으로 무장한 신규 계층을 등용하여 사회 발전에 이바지했다는 호평도 받고 있다. 앞서 토머스 울지 추기경은 푸주간 백정의 아들이었고, 토머스 크롬웰은 대장장이의 아들이었으나 고등교육 하나로 재상에 오른 입지적인 인물이었다.
또한 헨리 8세는 집안에서 놀기만 한 것이 아니라, 프랑스-카를 5세와의 연이은 충돌이나 아일랜드 원정을 비롯해, 당시 잉글랜드에서는 오랜만에 출현한 대외정책과 외교에 굉장히 적극적인 왕이었다.[47] 위에서는 삽질의 연속처럼 표현되어 있지만 헨리 7세가 리처드 3세를 물리치고 즉위하기까지 장미전쟁과 요크 가문 출신 왕들의 불안정한 치세를 거치며 플랜태저넷 왕가내의 싸움으로 박터지던 기억이 남아있던 당시 잉글랜드 입장에서 보면, 헨리 8세의 저런 적극적인 대외정책에 대해 잉글랜드 또한 나름대로 국제 정세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열강 대열에 합류했다는 깊은 인상을 받을 만도 했을 것이다. 비록 헨리 8세가 대륙에선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지만 튜더-스튜어트 왕조 시절의 잉글랜드는 이후에도 유럽 정세에 군사적•경제적으로 계속 관여하며 열강 행세를 하여 유럽에서의 영향력이 강해지게 되는데 그 시초가 어찌 보면 헨리 8세라고도 할 수 있다.
실제로 헨리 8세는 즉위 초부터 선왕 헨리 7세 시절부터 추진[48]되던 해군 증강 정책의 기조를 이어받아 조선 시설을 정비하는 등 해군력 강화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이것이 헨리 8세의 최대 치적으로 꼽힌다. 헨리 8세는 즉위 초 5년 만에 해군의 규모를 선왕 때보다 4배나 증강시켰고[49], 이를 발판으로 유럽에서 잉글랜드 왕국이 열강으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1546년에는 해군청을 신설하여 영국이 해양강국으로 뻗어나가는데 필요한 정책적 발판도 만들어냈다.
이런 의도에서 당시로서는 최첨단 기술을 총동원한 강력한 전함[50]인 메리 로즈 호를 만들었다. 이 전함을 건조한 목적은 헨리 8세가 프랑스를 침공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심혈을 기울여 만든 메리 로즈 호는 34년 간 전장에서 활약했지만 1545년 솔렌토 만 해전에서 제대로 공격 한 번 못 해보고, 헨리 8세가 보는 앞에서 홀라당 가라앉고 말았다.
훗날 수백 년이 지나서야 인양에 성공했는데 인양해놓고 보니 실로 공을 들인 흔적들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메리 로즈 호의 대포는 당시 유럽 대륙에서 제일가는 대포 장인에게 의뢰해 사정거리가 다른 대포보다 월등히 나은 것이었고, 배의 설계 구조도 과거의 어느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것을 시도해서 어느 배보다도 거대하고 초강력한 전함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었다. 특히 내부에서 온전하게 장궁들이 출수되면서 영국 장궁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현재 메리 로즈 호의 선체와 유물들은 포츠머스 히스토릭 독야드에 전시되고 있다. 메리 로즈 호와 그 유물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링크를 참고하자.
메리 로즈 호의 침몰은 솔렌토 만 해전 당시 대포 발사를 위해 열었던 포문을 닫지 않아 열린 포문으로 바닷물이 밀려들어오면서 선체가 중심을 잃고 침몰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대포 포문을 배 밑까지 설치하고, 이 대포가 너무 무거웠던 데다가 너무 많은 인원을 태운 탓도 침몰 원인으로 한 몫 했다. 전문가들은 메리 로즈 호가 위력을 발휘했다면 엄청났을 거라고 추정한다. 무게 중심 불량은 카락선의 구조적인 문제도 있었으며 이 문제를 개선시키기 위해 갤리온으로 발전했다.
메리 로즈 호는 홀라당 가라앉았지만 헨리 8세는 그 외에도 재위 기간 내내 전함 건조에 공을 들여서 헨리 8세가 승하할 때 50여 척에 달하는 신규 전함을 건조할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당장 그와 같이 해군을 증강했던 헨리 8세의 목표는 결국 실현되지 못한 대륙 공격이었을지 모르나 이런 해군력 증강과 조선시설의 기반 정비는 결과적으로 그의 딸인 엘리자베스 1세가 스페인의 아르마다를 상대하는데,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훗날 세계 최강으로 불리게 될 영국 해군의 전통 마련의 토대가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도 군사적인 면에서 헨리 8세의 공도 꽤나 큰데, 당시 스페인-신성 로마 제국의 군대가 우수한 화기의 운용으로 프랑스를 격파하면서 유럽 최강대국의 자리를 차지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한 화기의 도입과 화기에 대한 대처 방안의 마련에 적극적이기도 했다.[51] 이 일환으로 신개념의 방어 시설을 건축하기도 했는데 원형의 탑들을 두른 독특한 포대를 해안 방어용으로 만들기도 했다. 원형으로 탑을 만든 것은 적의 포격에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헨리 8세의 군사적 중흥이 비록 프랑스나 스페인 같은 대륙의 강적들을 상대할 때는 치세 중에 투자한 것에 비해 큰 재미를 보지 못했지만, 르네상스의 기술적 진보에서 낙후돼 있었던 스코틀랜드를 상대할 때는 큰 위력을 발휘했다. 1513년엔 잉글랜드가 프랑스와 전쟁 중인 틈을 타서 스코틀랜드에 뒷치기당했지만, 잉글랜드군은 (본인이 지휘한 건 아니었지만) 플로든 전투에서 귀족들을 포함한 스코틀랜드의 병사 1만 명과 제임스 4세를 전사시키고, 수도 에든버러를 약탈했다. 제임스 4세는 헨리 8세의 누나 마거릿 튜더의 남편이었는데 헨리 8세가 자기 누나는 과부에 섭정으로, 조카 제임스 5세는 생후 18개월에 즉위하게 만들어 줘서, 너무 어린 왕에다가 섭정 문제를 놓고 마거릿과 귀족들 간에 벌어진 격렬한 대립 등으로 인해 스코틀랜드는 알아서 내부 권력다툼에 빠져 한동안 잉글랜드에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대신 헨리 8세가 조카 제임스 5세에게는 스코틀랜드를 때려잡고 부왕을 죽인 철천지 원수 그 자체인 외삼촌으로 찍힌 건 당연했지만.
제임스 5세와 스코틀랜드가 여전히 반(反) 잉글랜드 - 친(親) 프랑스 정책을 펴자 1542년에 왕비 제인 시모어의 오빠를 파견하여 솔웨이 전투에서 겨우 병력 3천으로 5~6배 많은 스코틀랜드군을 격파하고 제임스 5세는 병사했다.
헨리 8세는 승리의 여세를 몰아 에든버러를 또 한번 약탈하여 싹 다 털어먹고는 스코틀랜드와의 화약에서 자기 아들 에드워드 튜더와 메리 스튜어트의 결혼을 강요했다. 그래서 이 전쟁을 '거친 구혼'이라는 뜻인 Rough Wooing이라고 부른다.
이 무식한 청혼에 갓난 메리 스튜어트는 외가인 기즈 가문이 있는 프랑스로 도망가야 했는데, 기즈 가문은 프랑스 궁정에서 준왕족 급이라 프랑스에서 유년기를 보낸 메리는 왕세자인 프랑수아 2세와 결혼할 수 있었다. 거기다 기즈 가문은 골수 가톨릭이라 성공회 성향의 잉글랜드와는 견원지간이었다. 메리 스튜어트가 성인이 될 때까지 프랑스에서 자랐기에 조약은 지켜지지 않았지만, 2번에 걸쳐 스코틀랜드 병력을 싹싹 털어 먹었기 때문에 이때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의 완전 정복에 거의 성공할 뻔했다.
비록 프랑스의 개입으로 스코틀랜드를 복속시킨다는 전략적 목표 달성은 실패했지만, 이 전쟁을 계기로 스코틀랜드인들은 더이상 자국이 잉글랜드와 1대1로 대결하기에는 국력의 차이가 너무나 벌어졌다는 걸 통감하게 되었다. 이는 종교개혁을 통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양쪽 모두 개신교로 이념적 동지가 되자 스코틀랜드 측에서 더이상 대립을 그만두고, 잉글랜드와 관계를 개선한 다음 결국 연합왕국으로 나아가는 초석을 마련하게 되었다.
1536년 웨일스를 완전히 잉글랜드 왕국에 흡수시켰고, 1541년에는 대대로 아일랜드 총독을 독점하며 반 독립상태였던 킬데어 가문을 소환, 숙청하고 아일랜드 반란을 평정하면서 더블린 의회에서 '아일랜드의 왕' 칭호를 수여받았다. 사실상 브리튼 섬과 아일랜드 섬을 평정하고 대영제국의 기초를 닦은 격이었다. 단, 스코틀랜드의 경우, 헨리 8세 본인 치세에 한해서는 반란에 반응했다는 모양새로 넘어갈 수는 있지만, 웨일즈와 아일랜드를 복속시키고 지배하는 과정에서는 그 악행 때문에 켈트계로부터 두고두고 잉글랜드에 대한 반감을 사게 만드는 업보의 단초를 제공했다. 특히 튜더 왕가의 시조가 웨일즈계인 이상, 웨일즈의 잉글랜드에 대한 불신에 단단히 한 몫했다.
하지만 백년전쟁부터 내려오는 프랑스 영토에 대한 야욕, 스코틀랜드나 아일랜드와의 전쟁 등은 물론이고, 즉위 초기부터 궁전 건축, 연회, 예술 등에 쓰인 막대한 지출 등 왕권 과시는 국제적인 과시나 투사를 감안하더라도 국고에 과도한 부담을 주었다. 특히 유럽 대륙을 상대로 한 군사 정책의 경우, 배를 띄우고 상륙이 강제되는 규모의 대규모 작전을 수행했으면서도 얻어낸 건 별로 없었다. 이러한 규모의 과도한 지출은 부왕 헨리 7세가 재건한 건전 재정조차 당해내지 못할 정도였다.
'면세 혜택이나 교황이 하사한 특권을 바탕으로 엄청난 부를 쌓아왔던 수도원을 잉글랜드에서 직접 관리하자'는 여론의 흐름을 타 국고를 채웠으면서도, 의도를 의심당해도 할 말 없는 행동을 한 것도 사실이다. <수장령> 이후로 지속된 군사 활동은 물론 1537년 '은총의 순례' 세력의 주동자들을 소탕할 때 로버트 애스크도 처형했기 때문이다. 만약 비고드 경과 당시 군사 활동을 지휘한 일부만 정확히 골라 처형했으면 오히려 '대화로 해결하자는 것을 무력으로 해결하려 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 본보기를 보여준' 예시로 남았을 것이다. 게다가 유럽 대륙을 상대로 또 소득 없는 군사 활동을 벌여 지출을 키우고 특히 토마스 크롬웰이 처형당한 이후에는 근시안적으로 자산[52]을 매각하며 국고를 채우다가 왕권이 위협당하는 단초까지 제공했다.
젠트리 계층의 부상은 후대의 왕들의 국고 관리 난이도를 대폭 상승시켰다. 바로 젠트리를 섣불리 건드리면 안 된다는 중압감 때문에 엘리자베스 1세는 왕실 토지나 국유 재산을 매각하는, 장기적으로는 왕권을 더욱 하락시키는 고육지책을 동원해야 했다. 엘리자베스 1세의 후임인 스튜어트 왕조의 제임스 1세도 본인이 검소한 성품임에도 불구하고 국고와 관련해서 의회와 두고두고 마찰을 빚었으며, 급기야 찰스 1세는 무리수를 두다가 처형당하기까지 했다. 이후 헨리 8세 때 성장한 신흥 계층 젠트리들은 일정 재산과 학식을 갖추고 대륙의 개혁 신학이라는 이데올로기로 무장하여 왕실의 자의적인 과세에 반발했기 때문에 헨리 8세 시절부터 이미 스튜어트 왕가 시절의 청교도들과의 갈등의 씨를 뿌렸다고 보면 된다.
4. 기타
- 파란만장한 사건들로 가득한 헨리 8세의 치세기는 후세의 창작자들에게도 많은 영감을 제공하여, 오늘날에도 수많은 작품들을 통해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6명의 부인에 관한 일화와 영국사에 별로 없는 절대군주의 이야깃거리를 남겨서인지 오늘날 영국에서도 사극이나 역사 소설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배경이 헨리 8세 시대이다.
- 살아생전 사람을 엄청 많이 죽였다. 아내들을 갈아치우고 죽이는 일로도 유명하지만, 정치적 숙청 또한 정말 많이 해서 굉장히 많은 사람을 죽였다.
- 무술에도 관심이 많아 본인이 직접 갑주를 입고 말을 타며 무술 단련을 하고, 마상 시합에도 참여하기도 했으며, 하마 전투용 갑옷과 강철치마 갑옷, 기타 호화로운 야전용 갑옷(Field Armour)을 포함해 수많은 무구들을 남겼다.
- 잉글랜드의 느슨한 관습법으로 존재하던 <소도미법>을 본격적으로 공식화하여 동성애를 한 귀족을 교수형에 처하게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 영국의 로열메일과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부,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컬리지를 창립하기도 했다.
- 엄청난 미식가이자 대식가였다고 한다. 특히 식사를 하면 하루에 접시를 20개나 비웠을 정도라고 한다. 한 귀족이 헨리 8세의 변을 치우는 일을 했는데, 다른 귀족들이 "그런 영광스런 일을 해서 어떠냐?"[53]고 묻자 "왕이 대식가인 건 알겠다"고 답했을 정도. 워낙 많이 먹다보니 용변을 보는 횟수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젊은 시절에는 운동을 열심히 하면서 나름 체중 관리를 했으나, 마상시합 중 낙마사고로 다리를 다친 이후에는 운동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탓에 폭식을 하다보니[54] 점점 살이 쪄서, 노년에는 허리둘레가 54인치(140cm)에 가까웠다고 한다. 헨리 8세의 옷 한 벌에 무려 성인 남자 셋이 들어간다는 얘기도 있었으니.
- 6명에 달하는 아내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기묘하게도 일정 부분의 패턴이 있다.
- 이혼→ 처형→ 병사의 단계를 반복하였다.
- 처형당한 왕비들의 처형 명목은 둘 다 다른 남자와 놀아났다는 간통죄였다.
- 다만 이런 '패턴의 반복'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나 징크스라기보다는 일정 부분에 대해서는 헨리 8세의 행동에 따른 필연적 결과였다고 볼 여지가 있다. 말하자면 일국의 왕 답게 정략결혼을 한 상태에서 톡톡 튀는 매력을 가진 새 여자에게 빠져 새 장가를 들고 싶어진 것이다. 그런데 왕과 정략결혼을 할 정도로 강력한 정치적 배경을 가진 통치 가문의 딸을 쉽게 치워버릴 수는 없다. 그나마 정치적인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정식으로 이혼하여 공식적으로 상황을 정리해야 하는 것.
그런데 처음에는 이 난리법석을 벌여가며 맞이한 새 왕비의 파격적인 매력에 푹 빠져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자 그 파격성이 오히려 피로감을 불러일으켜 관계가 파탄에 이르게 된다. 즉, 속된 말로 하면 '질렸다'. 그렇다고 또 이혼 소동을 벌이면 망신도 이만저만이 아니겠지만... 이번 왕비는 정치적 배경이 아니라 이성적 매력 덕분에 왕비가 된 케이스라 왕의 총애 이외에 별 힘은 없으므로 정치적 부담 없이 치워버리는 것이 가능하다. 그 핑곗거리가 간통죄가 된 것 역시, (왕비가 정말로 국왕 시해 음모라도 꾸민 것이 아닌 이상) 왕비의 간통은 곧 반역이나 다름없이 여기지므로 왕비를 한방에 날려버리는데는 간통죄만큼 효과적인 핑곗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앤 불린과 캐서린 하워드 모두 파격적이고 톡톡 튀는 매력으로 왕을 사로잡았는데, 이는 곧 두 사람 모두 당대 사회가 요구하는 정숙하고 얌전한 여성상의 통념에 맞게 행동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므로 혐의를 덮어씌우기에는 더욱 편리하기까지 했을 것이다. 그래서 둘 다 간통죄로 한방에 날려버렸고, 자기가 자초한 일이지만 이쯤되면 본인도 꽤나 지쳤을 것이다. 그래서 다음 아내(왕비)는 사고 안 칠 얌전하고 조용한 사람으로 맞아들였고, 사고를 안 쳤으니 이혼도 처형도 안 당하고 있다가 병으로 죽었다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중 제인 시모어가 병으로 일찍 죽은 것은 불운이지만, 저 난리를 쳐놓고도 정신을 못 차리고 또 똑같은 짓을 반복한 결과 패턴의 반복이 나타난 것이다. 결국 헨리 8세에게는 양심만 없었던 것이 아니라 통찰력과 자기반성도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 덤으로 3의 배수 왕비의 사인이 두 번 다 산후 질병인 것 역시, 전근대의 출산은 그만큼 위험한 일이었음을 의미하는 것.
- 이름도 캐서린 파를 제외하면 캐서린-앤-제인-앤-캐서린의 데칼코마니 현상을 볼 수 있다. 다만 캐서린이 절반인 것에서 알 수 있듯, 이 역시 유럽어권에서 사용되는 인명의 가짓수 자체가 그리 많지 않았기에 생긴 일이다.
- 여섯 왕비와의 관계를 통해 헨리 8세의 성격도 유추해 볼 수 있는데 순종적이던 셋째, 여섯째 왕비와의 사이는 좋았고 첫째 왕비와는 처음엔 사이가 좋았고 혼인 기간도 오래 유지했지만 고생 끝에 이혼한 후 엄청나게 박대하고 넷째 왕비와는 순순히 이혼에 동의해주자 좋은 대우를 해준 점을 통해 자기에게 잘 맞춰주면 잘 대해주는데 반대로 자기에게 안 맞춰주면 집요하게 미워하는, 매우 자기중심적 성격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자기에게 잘 맞춰주는 사람은 진심으로 좋아하고 잘해준 편이라는 게 인간적인 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하도 여자관계가 개판이다 보니 나중에는 모두가 알아주는 결혼 기피 대상이 되기도 했다. 제인 시모어 사후 네 번째 왕비를 맞을 때 우여곡절이 많아서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의 어머니이기도 한 프랑스의 마리 드 기즈에게 청혼했더니 "제가 큰 여자인 건 맞지만 아쉽게도 제 목은 너무나도 가늘답니다."라는 답변으로 차이고[55] 밀라노의 크리스티나에게 대사를 보내 청혼했다가 "나에게 목이 2개 있다면 기꺼이 귀국의 국왕께 하나를 드리겠지만, 불행하게도 나에게는 목이 하나밖에 없습니다!"라며 대놓고 헨리 8세의 과거를 끄집어내며 퇴짜를 놔버렸다.
- 헨리 8세의 전신 초상화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고간의 볼록 튀어나온 것은 코드피스라고 부르는 당대에 유행하던 패션이다. 본래 실용적 목적으로 만들었지만 나중엔 저렇게 뽕처럼 쓰이게 되었다. 아들 에드워드 6세의 초상화에도 볼 수 있다.
- 당시 잉글랜드의 상류층이었던 왕족들과 귀족들은 육식 위주로 과식을 하는 과시적인 식사를 했는데, 당연히 이는 건강에 좋지 않았다. 헨리 8세도 그가 먹는 식단에서 야채가 20%도 되지 않았다. 오히려 섬유질이 많은 야채, 생선, 빵을 먹던 서민층의 식사가 건강에 좋았다. 야채는 당시 상류층 사회에서는 '하층민이나 먹는 것'으로 취급당해 귀족들은 잘 먹지 않았지만, 사실 잉글랜드는 야채, 과일 등의 생산도 부족하다 보니 야채와 과일을 충분히 먹을 수가 없었고[56] 결과적으로 상류층의 영양 섭취의 불균형을 초래했다. 헨리 8세가 50대에 승하한 것도 잘못된 식습관이 큰 원인을 차지한다.[57]
- 키가 188cm로 엄청난 장신이다. 오늘날에도 저정도 키면 세계 어디를 가도 장신 소리를 듣는데 저 당시에는 말할 것도 없다. 근대 이전 키 180cm 이상인 군주는 흔하지 않았다.
- 마상시합 관련 기록들의 경우, 신하들이 일부러 져준 경우가 많다고 한다.[58] 심지어 프랑수아 1세와 연회를 열 때는 마상시합까지 열고 직접 참가하여 겨루었는데 두 왕이 쌍으로 지랄을 해서 신하들이 11번이나 연속으로 져주느라 고생(?)했다는 기록도 있다.
- 프랑수아 1세와의 연회와 관련해서, 그에게 메쳐졌다는 일화가 있다. 하지만 헨리 8세는 자신의 다리에 걸려 넘어진 것이라고 주장했고, 그의 신하들은 체면을 세워 주기 위해 그의 말이 거짓인지 사실인지도 모르고 헨리 8세의 승리를 선언했다. 심지어 일정에 없던 일기토를 먼저 요청한 건 헨리 8세 측이라는 기록도 있는데, 여차직하면 헨리 8세가 먼저 외교적 결례를 범한 셈이 될 수도 있다. 프랑수아 1세도 젊은 시절에 브르타뉴 지역의 레슬링 선수들한테 레슬링을 배웠기 때문에 뛰어난 레슬링 실력을 지녔다. 참고로 헨리 8세는 188cm의 엄청난 장신이였지만 프랑수아 1세의 키는 그보다 훨씬 더 큰 200cm였다. 레슬링을 배운데다가 체격까지 더 크니 당연히 헨리 8세가 질 수 밖에(...)
- 의외로 들리겠지만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갖추어 작사 작곡을 많이했으며 튜더 시대의 대표적인 음악가로 꼽힌다. 《Henry VIII's songbook》이라는 당시의 악보집이 지금까지도 남아있으며 대부분이 그가 작곡한 음악으로 유튜브에 검색하면 전곡을 들을 수 있다. 유명한 악곡 <그린슬리브즈>도 튜더 시대의 음악이라 그가 앤 불린을 위해 작곡한 것으로 생각하는 인식이 퍼져있었으나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해당 노래의 스타일이 엘리자베스 1세 이후의 스타일이라고 하여 지금은 부정되었다.
- 스탕달의 《적과 흑》을 보면 근세 말~근대 초 유럽에서 헨리 8세가 받았던 평가에 대해 알 수 있다. 평민으로써 사교계에 진입한 쥘리앙 소렐이 '사교계에서의 처신에 주의해야 할 사항'의 예시로 듣는 조언중에 '헨리 8세와 같은 인물을 괴물이라고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있다. 그 말을 듣는 상대도 십중팔구는 그렇다고 생각하겠지만, 왕당파 성향이 강한 사교계의 인물들로써는 어쨌건 평민 출신인 쥘리앙이 어쨌건 군주인 헨리 8세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심지어 나쁘게 평가하는 것을 불쾌히 여길 것이라는 것. 중요한 것은 (이웃 국가인 프랑스와 영국의 라이벌 의식은 감안해야겠지만) '괴물[59]같은 행적을 보인 군주'의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힌 인물이 바로 헨리 8세라는 점이다.
- 말년에 1544년 인쇄된 '시편 및 기도문'의 한 사본에 낙서를 끄적였던 것으로 확인됐다. #
- 아버지인 헨리 7세보다는 외할아버지 에드워드 4세를 닮았다는 평이 많다. 젊은 나이에 즉위하여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고 많은 기대를 받았다는 점, 훤칠한 키와 당당한 체격, 젊었을 때는 훈훈한 인상에 건강했지만 나이가 들며 비만으로 활력을 잃었다는 점, 복잡한 여자관계 등 공통점이 많다.
5. 가족
- 부모나 형제자매는 헨리 7세 참조.
5.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헨리 8세 (Henry VIII) | <colbgcolor=#fff3e4,#331c00> 헨리 7세 (Henry VII) | <colbgcolor=#ffffe4,#323300> 제1대 리치먼드 백작 에드먼드 튜더 (Edmund Tudor, 1st Earl of Richmond) | |
오웬 튜더 (Owen Tudor) | |||
발루아의 카트린 (Catherine of Valois) | |||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 (Lady Margaret Beaufort) | |||
제1대 서머셋 공작 존 보퍼트 (John Beaufort, 1st Duke of Somerset) | |||
블렛소의 마거릿 보챔프 (Margaret Beauchamp of Bletso) | |||
요크의 엘리자베스 (Elizabeth of York) | |||
에드워드 4세 (Edward IV) | |||
제3대 요크 공작 요크의 리처드 (Richard of York, 3rd Duke of York) | |||
세실리 네빌[60] (Cecily Neville) | |||
엘리자베스 우드빌 (Elizabeth Woodville) | |||
제1대 리버스 백작 리처드 우드빌 (Richard Woodville, 1st Earl Rivers) | |||
룩셈부르크의 자퀘타 (Jacquetta of Luxembourg) |
5.2. 왕비들
헨리 8세와 왕비들의 생애를 한눈에 이해할 수 있게 다음 표를 삽입한다. 마지막 왕비 캐서린 파의 생존에서 알 수 있듯이, 그녀만이 유일하게 왕비로서 국왕의 죽음을 볼 수 있었다.[61] 1537년부터 1540년까지와 1541년부터 1543년까지 약 5년은 헨리 8세가 독신이었던 기간이다.<rowcolor=#fff> 이름 | 키워드 | 생몰년도 (최종 연령) | 재위 기간 (년) | 재위 전 |
헨리 8세 | 국왕 | 1491 ~ 1547 (56) | 1509 ~ 1547 (38) | 왕위 계승자 |
<colcolor=#fff> 아라곤의 카탈리나 | 이혼 | 1485 ~ 1536 (51) | 1509 ~ 1533 (24) | 아서 튜더[62]의 부인 |
앤 불린 | 참수 | 1501[63] ~ 1536 (35)[64] | 1533 ~ 1536 (3) | 아라곤의 카탈리나의 시녀 |
제인 시모어 | 죽음 | 1508 ~ 1537 (29) | 1536 ~ 1537 (1) | 앤 불린의 시녀 |
클레베의 앤 | 이혼 | 1515 ~ 1557 (42) | 1540 ~ 1540 (0) | - |
캐서린 하워드 | 참수 | 1523 ~ 1542 (19) | 1540 ~ 1541 (1) | 클레베의 앤의 시녀 |
캐서린 파 | 생존 | 1512 ~ 1548 (36) | 1543 ~ 1547 (4) | - |
5.3.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아라곤의 카탈리나 (Catherine of Aragon) | ||||
1녀 | 메리 1세 (Mary I) | 1516년 2월 18일 | 1558년 11월 17일 | 펠리페 2세 |
앤 불린 (Anne Boleyn) | ||||
2녀 | 엘리자베스 1세 (Elizabeth I) | 1533년 9월 7일 | 1603년 3월 24일 | |
제인 시모어 (Jane Seymour) | ||||
1남 | 에드워드 6세 (Edward VI) | 1537년 10월 12일 | 1553년 7월 6일 |
이외에도, 그의 사생아로 추정되는 이들이 여럿 있으나, 헨리 8세는 헨리 피츠로이를 제외하면 자신의 자식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 헨리 피츠로이(1519년 6월 15일 ~ 1536년 7월 23일) : 정부 엘리자베스 블런트(Elizabeth Blount)와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 아들이다. 사생아임에도 아버지 헨리 8세에 의해 리치몬드와 서머셋 공작에 봉해졌고, 3대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의 딸 메리 하워드와 결혼했지만 17살에 자녀없이 요절했다.
다음은 그의 사생아일 가능성이 있지만, 헨리 8세가 인정하지 않은 이들이다.
- 엘리자베스 테일보이스(1520?년 ~ 1563년) : 헨리 피츠로이를 낳은 엘리자베스 블런트의 또다른 자식. 블런트가 1520년 길버트 테일보이스와 결혼한 후에 태어나서 테일보이스의 이름을 물려받았지만, 결혼과 출생 시기로 미루어볼 때 헨리 8세의 아이로 추정된다.
- 캐서린 캐리(1524?년 ~ 1569년) : 앤 불린의 언니인 메리 불린의 딸. 당시 메리 불린은 헨리 8세의 총신이었던 윌리엄 캐리의 아내였다.
- 토마스 스터클리(1524?년 ~ 1578년) : 제인 폴라드의 아들로, 제인 폴라드는 당시 휴 스터클리의 아내였다. 그는 성인이 되어 헨리 8세의 기사 및 에드워드 시모어[65]의 부하가 되었으나, 에드워드 시모어가 몰락한 후 프랑스로 망명했고, 용병이 되었다.
- 리차드 에드워즈(1525년 3월 25일 ~ 1566년 10월 31일) : 어머니는 아그네스 에드워즈. 그는 시인이자 극작가가 되었다.
- 헨리 캐리(1526년 3월 4일 1596년 7월 23일) : 메리 불린의 또다른 자식. 헌스던 남작.
- 에설레다 말테(1527?년 ~ 1559년) : 어머니는 불확실하다. 존 말테라는 재단사가 그녀를 자신의 아이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하자, 헨리 8세가 그에게 왕실 저택을 하사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녀가 헨리 8세의 사생아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여담으로 해당 저택은 현재 제인 시모어의 소유로 알려졌다.
이 제인 시모어가 아니다. - 존 페로(1528년 ~ 1592년 11월 3일) : 어머니는 메리 버클리. 그녀의 남편은 토마스 페로. 다만 이는 존 페로 후손들의 주장이므로 신빙성이 떨어진다.
6. 대중매체에서
6.1. 소설
6.2. 게임
- <대항해시대2>에서 영국 국왕으로 등장하는데 초상화와는 얼굴이 딴판이다. 옷토 스피노라로 진행 시 옷토에게 스페인 함대를 나포하는 사략 함대의 결성을 명령하며 지원금을 대주겠다고 한다. 그러나 길버트라는 오만한 감독관의 농간으로 이 일처리를 길버트 남작에게 모두 위임하는 바람에 꼴랑 금화 300닢에 심플튼호(카라벨 라티나)로 시작하게 만든다. 엔딩도 에제키엘 사령관을 꺾은 옷토가 헨리 8세를 알현하면서 보게 되는데 옷토의 보고 중에 끼어든 길버트의 항의를 씹고 옷토의 공적을 치하하며 왕실 해군총사령관으로 임명한다.
- <문명 시리즈>에서는 <문명 2>에서 딸인 엘리자베스 1세와 함께 잉글랜드 문명을 이끈다. 다만 문명마다 개성이 생긴 것은 후속작인 <문명 3>부터의 일이라 지도자로 나온다는 점 이외에 특기할 만한 사항은 없다.
6.3. 만화
- <미스터 피바디와 셔먼 쇼>에서는 기본적으로 매정하고 호색한 사람으로 나온다.
- <심슨 가족>에서는 영국 역사에 관한 에피소드에 등장하며 헨리 8세가 후계자를 만드는 내용을 일부 다뤘다. 이 때 헨리 8세는 호머 심슨이 역할을 맡았고 호머 심슨의 성격을 그대로 뒀는데 놀랍게도 성격이나 행동만큼은 고증 오류가 거의 없다. 윗 내용을 보고 난 뒤 시즌 15의 에피소드 11 편인 <Margical History Tour>를 보면 참으로 기가 막힌다. 물론 내용은 사실과 다르게 개판이다.
6.4. 노래
- <식스 더 뮤지컬>은 헨리 8세의 6명의 아내들이 환생하여 자신의 삶과 애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형식의 뮤지컬이다. 영국에서 초연이 올라왔으며 2023년 한국 초연이 올라왔다.
6.5. 영화
- 1969년 개봉한 <천일의 앤>에서는 배우 리처드 버튼이 연기했다. 헨리 8세의 전형적인 이미지인 변덕스런 호색한을 연기한다. 아들을 낳지 못한 캐서린 왕비는 이미 냉대하고 있고 궁정 무도회에서 만난 앤에게 반해 그녀와 헨리 퍼시의 결혼을 막고 어떻게든 꼬셔보려 하지만 차갑기만 한 앤을 어찌 할 줄 모른다. 급기야 앤에 대한 욕망에 더해 남자 후계자를 얻어야겠다는 강박으로 캐서린 왕비를 내쫓고, 가톨릭 교회와도 갈라서서 마침내 앤 불린의 마음을 얻지만 아들을 낳지 못하는 앤에게 실망해 애정이 식어간다. 그리고 캐서린 때와 똑같은 구도로 제인에게 눈이 돌아가 앤과 갈등하다 결국 앤을 처형시킨다. 그야말로 진퉁 나쁜 남자다. 나쁘지만 매력적인 남자가 아니라 그냥 나쁜 놈.[67] 자신을 거부하는 앤에게 거의 강압에 가까운 애정 공세를 퍼붓는데, 그게 매력으로 보이기에는 치사한 짓도 많이 했다. 자신을 왕이 아닌 사랑에 빠진 남자로 보아달라고 앤에게 작업을 걸다가도 앤에 계속 거절하자 왕의 권위를 내세워 궁정에 붙들어두고, 눈독 들인 제인 시모어를 앤이 궁정에서 추방해버리자 제인를 다시 데려오기 위해 앤을 협박한 카드가 자기 말 안 들으면 엘리자베스의 계승을 인정하는 법을 통과시키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앤이 끝까지 거부하며 성질을 긁자 손찌검까지 했다. 자기 정당화에도 능해서 그러기 위해선 스스로에게도 거짓말을 한다. 앤 불린을 내쫓고 제인 시모어를 들이기로 마음먹고 어떻게든 핑계를 찾아내라고 크롬웰에게 윽박을 질러놓고는, 재판에서 (고문과 협박으로 조작된) 불륜 증언들이 나오니까 거기에 스스로 넘어가 감옥에 있는 앤을 찾아와 불륜을 저질렀나 아닌가 확인을 받고 싶어한다.(그러면서 "네가 진실을 말하든 거짓을 말하든 나는 알 수 없겠지."라고 자신이 정말 불륜의 피해자인 양 행세를…) 악에 받친 앤이 바람도 피웠고 당신을 사랑한 적도 없다고 발악하자 돌아와서는 "앤은 불륜을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내게 사랑한다고 거짓말을 했으니 죽어 마땅하다."면서 집행 명령에 서명을 한다. 그러고는 앤이 처형되자 바로 제인에게 간다.
- 2008년 개봉한 영화 <천일의 스캔들>에서는 배우 에릭 바나가 연기했다. 처음에는 앤 불린(나탈리 포트만)이 아닌 그 동생 메리 불린(스칼렛 요한슨)에게 반해 정부로 삼는다. 하지만 메리가 자신의 사생아를 임신하고 있던 중 유산의 기미가 보여 태아의 안전을 위해 격리 생활을 하는 동안, 야심에 불타는 앤의 유혹에 넘어가 메리를 버리고 앤을 택한다. 하지만 메리가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아들을 낳아줬기에 여전히 신뢰하기는 하는 듯. 이후 앤을 정부로 삼으려 하나, 앤은 헨리의 욕망을 부채질하면서도 끝내 몸은 허락하지 않으면서 '정부로 그치긴 싫으니 왕비로 삼아달라, 그러면 아들을 낳아주겠다'고 한다. 이에 헨리는 앤과 결혼하기 위해 캐서린 왕비를 내치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지지부진한 신경전과 법정 공방을 벌이며 스트레스를 잔뜩 받고, 결국 기어코 캐서린을 쫓아낸 날 앤을 찾아와서 '내가 너 때문에 이 나라를 두동강내는 등 별 짓을 다 했으니 너에게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음을 증명하라'며 그 자리에서 앤을 강간한다. 직후부터 앤에게서도 마음이 떠났는지 곧바로 앤을 냉대하기 시작한다. 설상가상 앤은 첫 아이로 딸을 낳고 그 뒤에 가진 아이는 유산한 뒤, 불안과 스트레스로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다시 임신을 해야 한다며 친동생 조지 불린을 침실로 끌어들인다. 이를 목격한 조지의 아내 제인 파커가 왕에게 이 사실을 고하자, 헨리는 앤이 자신을 배신하고 남동생과 근친상간을 했다며 분노하여 사형을 선고한다. 앤의 동생이자 헨리의 옛 연인인 메리가 찾아와 제발 언니를 살려달라고 간청하지만, 헨리는 이를 수락할 것처럼 말하면서 메리를 돌려보낸 뒤 나중에 '네가 아직 살아있는 건 내가 너를 존중하고 아끼기 때문이나 두 번 다시 이런 자비는 없을 것'이란 내용의 편지를 보내고 기어코 앤을 참수한다.
6.6. 드라마
- 2007년 캐나다 드라마 <튜더스>에서는 배우 조너선 리스 마이어스가 연기했다. 초반 시즌에서의 헨리 8세는 젊고 패기 넘치며 잘생긴 왕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가끔씩 굴욕적인 장면이 보인다. 나도 할 수 있다며 홧김에 말을 타고 제방을 뛰어넘으려다 진흙 속에 거꾸로 빠져 질식사할 뻔했으며[68] 마상 창시합 중에는 보호구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아서 머리를 잘못 맞아 사고사할 위험에 처하는 등 가끔씩 유치하고 경솔한 모습을 보인다. 또한 은근히 소심하며 하찮은 일로 화를 잘 내는 신경질쟁이라서 보는 내내 그의 행각에 휘둘리는 주변인들을 보면 가엾을 지경이다. 앤 불린을 처형했을 때 후련해진 듯이 웃던 모습은 정말 그녀를 사랑하기는 한 건지 비정하게 느껴지는 모습. 곧바로 제인 시모어와 혼인하면서 제인의 사려깊은 행동을 통해 가족이 생기지만 그에게 인간성을 준 제인은 얼마 안 가서 사망한다. 어찌보면 캐서린을 버리고 앤을 죽인 징벌과도 같은 느낌. 하지만 그녀의 노력이 빛을 발했는지 앤이 죽고 나서는 다른 이의 아이 취급하던 엘리자베스와 외면하고 있던 메리[69]에게도 애정을 쏟는다. 하지만 시시때때로 변하는 외교 관계 때문에 메리가 약혼을 번복하는 사태가 이어지는 등 좋은 아버지라고 할 수 없다.[70] 딸 엘리자베스가 총명함을 드러낼 때는 딸에게 다정히 대해주면서도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는 했는데 마지막 화에서 엘리자베스를 볼 때마다 앤 불린을 떠올리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또한 앤을 처형했던 일에 대해서도 자연스레 떠올랐기에 어느 정도 엘리자베스를 냉대했다는 것도 밝혀진다.[71] 에드워드에 대해서는 그토록 원하던 아들이었기 때문에 병에 걸리지 않게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지극정성을 다하지만 그런 모습이 과해보일 지경이다.[72] 에드워드가 열병에 걸려 사경을 헤맬 때엔 스코틀랜드에서 달려와 밤새 병상을 지키기도 했다. 항상 안하무인이고 거침이 없던 그였지만 결국에는 나이가 들고 마지막에는 병이 들어 무력하기 짝이 없는 왕으로 전락한다. 그런 그의 눈앞에 캐서린, 앤, 제인이 환각인지 유령인지 알 수 없는 생생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어찌 보면 가장 헨리를 사랑해줬던 아내들은 헨리에게 차가운 비난을 가한다. 캐서린은 자신이야말로 헨리의 진정한 아내였으며 그가 자신을 내친 뒤 딸 메리도 냉대하여 시집을 못 가게 한 것을 질타한다. 앤은 자신이 결백했음을 헨리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캐서린 하워드의 처형에 대해 말하며 냉소를 짓는다. 그에게 가장 순종적이었으며 그의 오랜 소망을 이뤄준 유일한 아내였던 제인마저 헨리의 잘못으로 자신의 아들인 에드워드가 일찍 죽을 것이라고 원망하며 사라져 헨리를 죄책감에 시달리게 만든다. 마지막 시즌에서 늙고 병들어 죽음을 눈앞에 둔 헨리는 가장 절친했던 친구이자 한때 매형이기도 했던 찰스 브랜던과 오랜 세월 동안의 냉랭함을 풀고 간신히 화해한다. 그러나 그때 브랜던은 중병을 앓고 있었기에 헨리와 화해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사하고 이로써 유일하게 남은 친우마저 잃게 된 헨리는 크게 상심하며 친우의 장례를 챙겨준다. 토머스 크롬웰, 토머스 모어 등 자신을 생각하던 신료들을 자신의 손으로 없애버린 대가인지, 그는 결국 홀로 남아 쓸쓸한 말로를 맞는다. 엔딩에서는 죽음을 준비하며 마지막 아내인 캐서린 파와 메리를 비롯한 자녀들을 다른 궁으로 보낸 뒤 초상화[73]를 헨리가 지켜본다. 이후 뒤돌아가면서 초상화를 배경으로 헨리 8세의 죽음과 그의 후계자들인 에드워드 6세, 메리 1세, 엘리자베스 1세의 간략한 후일담이 자막으로 나오며 엔딩 크레딧이 올라온다.
- 2014년 영국 드라마 <울프 홀>에서는 배우 대미언 루이스가 연기했다. 헨리 8세가 살이 찌기 시작한 시점 전[74]이라 날씬한 모습이다. 변덕스러운 왕. 매력적이며 쾌활하고 너그러운 호인처럼 보이다가도, 금방 잔인하고 매정한 면을 드러낸다. 천한 신분 출신의 토머스 크롬웰을 마치 형제처럼 살갑게 대하다가, 어느 날 "내 말대로 안 하면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하는 식이다. 젊은 시절부터 절대적인 군주로 군림해 온 탓인지 무엇이든 자신이 원하는 대로 돌아가야만 하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경우 용서가 없다. 토머스 울지 추기경의 경우 오랜 세월 동안 지금까지 왕을 충직하게 섬겨온 인물이나 바티칸 교황청을 상대로 한 아라곤의 카탈리나와의 결혼 무효화 협상에서 실패하자 바로 팽해버린다. 그 빈 자리에 들어앉힌 사람이 토머스 크롬웰. 튜더 왕가가 끊길까봐 걱정하고 있으며, 아직은 유럽에서 소국인 잉글랜드의 군주로서 늘 전전긍긍하고 있다. 드라마 시작점에서는 앤 불린에게 푹 빠져 있으나[75] 앤이 딸을 낳고 유산을 거듭하자 사랑은 금방 식고 열렬하게 사랑했던 그녀에게 무서울 정도로 냉정해진다. 이제는 조용한 시녀 제인 시모어와 결혼하기로 마음을 굳힌 이후 크롬웰에게 앤의 숙청을 명령한다. 첫 부인인 아라곤의 캐서린에게 그랬듯이, 앤에게 작별 인사도 고하지 않고 그녀를 런던 탑에 가둬 놓고서는 "저 여자는 아마 수백 명이랑 잤을 거다", "분명 근친상간도 했을 거야"라고 태연하게 말할 정도였다. 앤이 처형된 후 토머스 크롬웰을 환하게 웃으면서 포옹하는 모습, 왕에게 안기면서 토머스 크롬웰이 짓는 착잡한 표정에서 그의 무시무시함의 진가가 드러난다.
- 2015년 스페인 드라마 <위대한 대제, 카를로스(Carlos, rey emperador)>에서도 등장한다. <튜더스>가 카를 5세를 제대로 고증했다면 이 드라마는 헨리 8세를 제대로 고증했다.
6.7. 기타
-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는 탄압을 받은 가톨릭 교회가 그려놓은 초상화 이야기가 나온다. 그의 초상화를 거꾸로 뒤집으면 사탄의 형상이 나타난다.
[1] 現 영국 잉글랜드 그레이터 런던 그리니치[2] 現 영국 잉글랜드 그레이터 런던 시티 오브 웨스트민스터[3] 성공회 체계의 모체가 되는 잉글랜드 국교회가 바로 이 사람 치세에 출범했다.[4] 친할머니 마거릿 보퍼트 쪽으로 랭커스터 왕조, 아버지 헨리 7세 쪽으로는 프랑스의 발루아 왕조, 어머니 엘리자베스 쪽으로 요크 왕조의 피를 이어받았다.[5] 성공회의 전신[6] 실제로 말년에 비만이 심해지기 이전에는 건장한 체격이었다.[7] 교회 대분열시기, 로마와 가까운 지역을 제외한 교황령은 거의 반 독립 상태로 떨어져 나갔고, 로마로 교황이 귀환했어도 세금 내기를 거부하며, 프랑스나 합스부르크, 다른 이탈리아 도시들과 연맹하여 간섭도 거부했다.[8] 백년전쟁 참조.[9] 특히 플로든 전투 당시 스코틀랜드는 제임스 4세가 4만 명이나 되는 병력을 동원하고, 주요 귀족들이 참전했으며 이탈리아에서 갑주를 대량으로 수입하여 귀족들과 병사들을 무장시키는 등, 그렇지 않아도 가난한 국가의 역량을 총동원했다.[10] 초대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에드워드 3세의 3남), 초대 요크 공작 랭글리의 에드먼드(에드워드 3세의 4남).[11] 초대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의 아들이다.[12] 3대 요크 공작 리처드의 친할아버지인 초대 요크 공작 랭글리의 에드먼드는 에드워드 3세의 4남으로, 에드워드 3세의 3남인 초대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보다는 확실히 왕위 계승 순위가 낮았다. 하지만 에드워드 3세의 2남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의 유일한 여계 후손이(라이오넬은 외동딸밖에 없었다.) 3대 요크 공작의 어머니였기 때문에, 이를 통해 3대 요크 공작은 모계 혈통으로 보면 자신의 왕위 계승 순위가 랭커스터 왕조보다도 더 앞선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3대 요크 공작은 곤트의 존의 외손녀인 세실리 네빌과 결혼하면서, 그들의 자식들(에드워드 4세, 클라렌스 공작 조지, 리처드 3세)은 요크 왕조에 이어 랭커스터 왕조의 혈통까지 이어받게 되었다.[13] 보퍼트 가문은 곤트의 존과 그의 정부이자 세번째 아내인 캐서린 스윈포드의 자식들이 창시한 가문이다.[14] 에드워드 4세의 누이 서포크 공작부인 엘리자베스의 아들. 리처드 3세가 왕비 앤 네빌과 외아들 미들헴의 에드워드가 죽자 일단 추정 상속자로 지명한 인물이다.[15] 1년에 상납금 2만 파운드를 받으며 메리 튜더의 빚을 청산하는 댓가로, 프랑수아 1세의 구조를 돕고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 영토에 대한 야욕을 버리는 것이었다.[16] 자세히 설명하자면 당시 유럽은 <살리카법>에 의하여 여성이나 여계 후손은 왕위를 이을 수가 없었는데, 헨리 8세는 아라곤의 카탈리나와의 사이에서 3남 3녀를 얻었지만 훗날 메리 1세가 되는 딸 하나만 남고 다른 아이들은 일찍 잃었다. 거기다 정부가 낳은 자식은 서자일 뿐 후계자가 되지 못해서 헨리 8세는 캐서린에게서 무조건 아들을 보아야 했다. 그러나 이미 당시 헨리 8세가 40세를 넘겼고, 그보다 여섯 살이나 연상인 캐서린도 더 이상 후사를 기대하기 힘들자 헨리는 새로운 왕비를 들여 아들을 보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캐서린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었고, 헨리의 무관심과 바람기도 참아줄 만큼 남편에게 헌신한 왕비였는데 그녀를 왕비 자리에서 폐위한 것이었다.[17] 사실 논문은 잉글랜드 주교들이 쓴 것을 헨리 8세의 명의로 발표한 것이었다. 당시 풍속에선 발표자의 명의가 주장을 뒷받침하는 데 중요했기에 흔한 일이었다.[18] 그나마도 절반은 프랑스 발루아 왕조에 뜯겼고, 손자대인 카를 5세 시절까지도 전쟁 상태였다가 결국 카를 5세가 프랑수아 1세에게 합스부르크 가문의 북이탈리아 지배권을 인정받는 조건으로 몰수된 영토를 포기했다.[19] 다만, 마틸다가 폐위된 이유에는 그것보다는 세금 문제가 한 몫하긴 했다. 그리고 프랑크족이 특수한 경우인 것이지, 다른 게르만족계들은 여왕이 종종 나오긴 했었다. 또한 그 이후에는 계승할 만한 여성 후계자가 없었고.[20] 사실 메리 1세가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조의 제2대 왕 펠리페 2세와 결혼했을 당시, 펠리페가 이전 결혼에서 낳은 돈 카를로스가 스페인과 이탈리아를 물려받고, 메리 사이에서 적자가 태어날 경우, 그 아이가 저지대와 잉글랜드 왕위를 물려받을 예정이었다. 스페인 대제국으로 통합될 예정은 전혀 아니었다.[21] 다만 캐서린의 친정은 트라스타마라 왕조로, 압스부르고 왕조 이전 카스티야 연합 왕국과 아라곤 왕국의 왕실이었다.[22] 가톨릭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이혼(divorce)을 인정하지 않는다. 다만 몇 가지 경우에 '혼인무효'(annulment)라는 것은 가능하다. 자세한 것은 혼인성사 참조.[23] 울지는 원래 요크 대주교였다. 추기경임에도 불구하고 캔터베리 대주교가 왜 못 되었냐면, 울지 이전에 취임한 캔터베리 대주교가 80세 넘게 장수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엔 주교들이 임지에서 벗어나 여러 교구를 소유하며 빨대만 꽂고 다른 곳에서 수입만 차지하는 경우가 잦았다.[24] 단순 어거지가 아니라 이미 교회법상으로 명백하게 근친상간이었다. 이 때문에 결혼 당시에도 이런 의견이 없는 게 아니었다. 또 개혁 성향 개신교 신학자들은 당연히 교황의 권위를 인정치 않은데다가, 개신교 신학에선 '결혼은 교회에서 주관하는 성사와 상관없다'는 게 통설이었기 때문에 주저없이 주장한 것이다. (반면 가톨릭에서 결혼(혼인성사)은 성사 중 하나로 매우 중요시된다.)[25] 교황청은 헨리 8세가 막 나갈 걸 방지하려고 했는지, 예상 외로 크랜머에게 임명장까지 보내주었다.[26] 실제로는 의회에서 통과되었기 때문에 령(令)이 아니라 법(法)이라고 해야 올바른데 잘못 번역되었다. <수장법>으로 바꿔 불러야 하겠지만, 워낙 <수장령>으로 자주 쓰였고 널리 알려졌기에 보통 <수장령>으로 쓴다.[27] 헨리 8세는 절친 토마스 모어를 시켜서 대륙 신학에 영향받은 옥스퍼드 대학교, 케임브리지 대학교 신학교수 40명을 체포하고 6명을 화형시켰다. 그런데 헨리 8세가 이혼을 밀어부치자 모어는 이에 반대하며 1532년 5월, 대법관에서 사임했다.[28] 교황청에서는 피셔 주교가 헨리 8세에 의해 감금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설마 추기경을 처형하랴 싶어서 옥중에서 추기경으로 임명했으나 헨리 8세는 개의치 않고 피셔를 처형했다.[29] 관점을 완전히 돌린다면, 1천 년 이상 가톨릭 국가였던 잉글랜드를 한 순간에 반(反) 가톨릭 국가로 만든 국왕의 명령에 대해 단 2명(그것도 성직자는 오직 피셔 추기경 하나)만이 목숨을 걸고 반대했다는 것은 또 다른 면을 시사한다. 그만큼 잉글랜드 내에 종교개혁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는 것이다. <튜더스> 같은 작품에서 <수장령>을 반대하는 신하가 둘 밖에 안 나오는데, 대표적인 인물 둘만 넣은 게 아니라, 정말로 둘 밖에 없었다.[참조1] Henry Gee,'Documents Illustrative of English Church History'[31] 'ornaments, jewels, goods, chattels'도 언급된다. 즉 부동산이나 금융 자산뿐만 아니라 십자가, 성상, 촛대 등 성물들까지 싸그리 긁어간다는 뜻이다.[영문1] 'use of his majesty without spoil, waste, or embezzling the same'[영문2] his highness shall satisfy, content, and pay all and singular such just and true of the debts which are owing to any person or persons by the chief governors of any the said religious houses, in as large and ample manner as the said chief governors should or ought to have done if this Act had never been made.[영문3] 'shall have their capacities, if they will, to live honestly and virtuously solved abroad, and some convenient charity disposed to them towards their living[영문4] it is ordained by the authority aforesaid, that the chief governors and convents of such honourable great monasteries shall take and accept them into their houses, from time to time, such number of the persons of the said convents as shall be assigned and appointed by the king's highness, and keep them religiously, during their lives, within their said monasteries.[36] '자립을 돕기 위해서는 경제 활동에 제약이 더 큰 쪽이 오히려 더 몫을 받아야지!'라고 할 수 있겠지만, 오히려 그러한 사고방식이 얼마나 대단하고 기발한 것인지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37] 빈민 기부를 위한 모금이나 물자는 본당의 모금함을 통해 모아야 하며, 구제를 받고 싶으면 이 모금함을 열 줄 아는 사람, 즉 동네 관리나 주임신부를 통해 빈민 기금을 받아가는 식이었다.[38] 수도원의 통폐합으로 인한 부작용이 얼마나 심하든간에 잉글랜드 역사상 최고의 절대왕권을 유지하고 있었던 헨리 8세를 비난하는 순간, '은총의 순례'에 가담한 사람들은 얄짤없이 반역죄로 목이 달아날 수 있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39] 오늘날의 서요크셔에 있다.[참조2] 'Letters and Papers, Foreign and Domestic, Henry VIII, Volume 13 Part 1, January-July 1538'[41] 대놓고 이단 혐의로 순교하게 된 것은 가톨릭 복고 성향을 보인 메리 1세 치세에서의 이야기이다.[42] 특히 채소를 멀리하고 대신 독한 술과 고기들을 마구잡이로 폭식하면서 비만이 더 심해졌다. 물론 당시 유럽 왕족과 귀족들이 채소가 가난한 하층민들이나 먹는 저급한 식재료라며 싫어했고, 고기를 마음껏 먹는 식생활이야말로 고귀한 습관이라고 여겼던 문화적 배경도 작용했다.[43] 물론 그만큼 헨리 8세 때 잉글랜드 국왕의 왕권이 강력해졌으며, 정점에 달했다는 뜻이 된다.[44] 카를 5세는 종교 개혁으로 인한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의 이반으로 동생에게 전담시키던 신성 로마 제국 문제도 신경써야 했고,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도 있었기에 프랑스와 계속 싸울 수가 없었다.[45] 일단 클레베의 앤과의 결혼을 주선한 토마스 크롬웰에게 '배신감'을 느낀 듯한 정황이 있다. 또한 <수장령>에 반대하며 일으킨 반란이 제압당하면서 세력이 위축된 잉글랜드 북부 귀족들도 이 틈을 노려 하워드 가문을 중심으로 목소리를 키우기 시작했다.[46] 이후 신하들이 크롬웰을 모함했다는 식으로 역정을 냈다는 일화도 있다.[47] 비단 잉글랜드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체계적이고 법치에 기반한 관료제와 중앙 정부 체제는 떠오른 지 얼마 안 됐고, 여전히 정치는 나라를 가족이나 사람 신체에 비유하며, 국왕을 나라의 아버지이자 우두머리로 생각하고 국왕 개인의 카리스마와 능력과 상징성이 더 중요하던 시대였다. 이 시대 국왕들의 사치와 과시는 단순한 개인적 허영이 아니라 저런 권위와 통솔력을 발휘하는 통치 이데올로기 강화의 중요한 과정이었고, 이런 면에서는 아직 기사도적 가치관이 강렬하던 시기이니 헨리 8세처럼 대중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는데 거리낌이 없고 놀기 좋아하며 호탕하고 호방한 인물상이 크게 유리했다. 반면에 부왕인 헨리 7세는 수전노에다가 뒷공작을 좋아하며 내성적, 과시욕이 없는 사람이라 이런 면에서 국왕답지 않은 좀생이 같다는 혹평을 많이 들었다.[48] 다만 헨리 7세는 짠돌이였기 때문에 상설적으로 유지되는 해군 자체를 증강하기보다는, 유사시에 해군으로 징집할 수 있는 민간 선박의 건조 및 임대를 통한 수익 확보에 더 치중했다. 전투용 시설을 평시에는 철거하고 상선이나 수송선으로 쓰다가 전시에는 전투용 시설을 급히 설치해서 해군으로 징집하는 형식이었다.[49] 사실 그의 치세 초창기에 이룬 것들은 토머스 울지의 공이 크기도 했다.[50] 카락선의 끝판왕 격이다.[51] 당시 잉글랜드는 아직까지도 화승총보다는 장궁을 무기로 쓰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정책과는 별개로 헨리 8세 본인은 장궁을 가장 잉글랜드적이고, 나라의 상무정신을 상징하는 물건이라고 크게 평가하며 본인도 사냥과 활쏘기 시합을 통해 장궁술을 계속 연마했고, 병과에서 도태시키지 않았다. 기술적으로도 16세기 초중반이라면 여전히 우천이나 화승총으로 대응할 수 없는 돌발적인 상황 등에서 여전히 활이 의미 있는 보충 전력이 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했다.[52] 즉, <수장령>으로 확보한 교회의 자산도 포함[53] 현대인에겐 무슨 비아냥처럼 들리지만, 전근대에 왕과 같은 권력자의 배설물을 치우는 것은 정말 농담이 아니라 아주 높으신 분들이나 맡을 수 있는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어의처럼 국왕의 몸에 손을 댈 수 있었는데, 이럴 수 있는 보직은 상당히 드물다! 또한 국왕의 가장 사적인 공간을 공유하는고로 국왕과 왕실의 개인사와 비밀, 정치·행정 업무를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았으며(헨리 8세의 담당관도 무려 후작이다.), 거기에 국왕의 건강 상태를 가장 가까이에서 확인하는 자리이므로 왕이 그 사람을 전폭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는 뜻이 되기에 누릴 수 있는 권세도 대단했다. 지도자의 건강 상태가 주요한 국가 기밀인 것은 현대에도 마찬가지이므로, 결코 아무에게나 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엘리자베스 1세 역시 부왕 헨리 8세처럼 귀족에게 용변을 맡겼고, 헨리 8세의 이후 시대 인물인 루이 14세에도 그의 요강을 담당하는 일은 고위 귀족이 맡았다. 조선에서도 왕의 변을 내의원에서 맛보고 연구했을 정도.[54] 그것도 기름지며 단 음식을 매일 먹으니 비만이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55] 이는 도끼로 참수형을 당한 앤 불린의 유언을 인용한 비아냥이었다.[56] 심지어 헨리 8세는 먹는 과일조차 당도가 매우 높은 달콤한 과일만 먹었다. 당도가 높은 과일을 지나칠 정도로 많이 먹으면 당연히 몸에 좋지 않다.[57] 다만 당시 기준으로 50대는 충분히 사망할 만한 나이이기는 하다.[58] 사실 이는 중세 유럽에서 흔한 일이었다. 왕을 이기면 왕에게 미운 털이 박혀 불이익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시합이 격렬해지다가 실수로 왕이 죽는 일이라도 일어나면 그래도 시합 중에 일어난 일이니 살인죄나 반역죄로 처벌되지는 않겠지만 불이익의 정도는 더욱 강할 것이다. 실제로도 그런 사례가 있기도 하고.[59] 물론 이 괴물은 한국어에서 종종 쓰듯 대단하다는 경탄의 의미가 아니라 거의 순수하게 비판적인 의미에 가깝다.[60]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의 외손녀다.[61] 클레베의 앤 역시 헨리 8세의 사망 시점까지 살아있었지만, 폐위된 지 오래였다.[62] 헨리의 친형.[63] 앤 불린의 출생 연도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1507년생이라는 설도 있다.[64] 1507년생설 기준으로는 29세.[65] 헨리 8세의 세번째 아내 제인 시모어의 오라버니이자 서머싯 공작.[66] 동명의 연극으로도 유명하다. 영화는 연극의 명성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작품. 시대극의 측면에서도 볼만하며 주인공의 연기가 일품. 1967년 아카데미 작품상 및 남우주연상 포함 6개 부문 수상.[67] 사실 실제 헨리 8세도 이와 비슷한 모습을 많이 보였기에 이러한 점이 고증을 잘해낸 것이다.[68] 이때 신하들은 머리가 진흙 속에 박혀 다리를 버둥거리는 헨리 8세를 보고 재미있다고 깔깔 웃다가 뒤늦게야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알고 사색이 되어 뛰어간다.[69] 프랜시스 브라이언을 보내 자신의 권위를 인정하고 캐서린과 자신의 결혼이 무효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서류에 겨우겨우 서명했기 때문에 누그러진 점도 있었다.[70] 실제로 메리에게는 전혀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다. 아라곤의 카탈리나와 이혼한 후에는 메리를 딸 대우도 안 해줬으며 결정적으로 혼사도 나 몰라라 해서 혼기도 놓치게 만들어 버렸다.[71] 실제로도 헨리 8세는 엘리자베스에게도 메리에게 하는 것처럼 공주 작위와 계승권을 박탈하고 궁전에서 쫓아내며 죽을 때까지 엘리자베스를 보지 않을 정도로 박대했다.[72] 이 과보호가 도리어 에드워드 6세의 면역력을 떨어뜨렸다는 주장도 있다.[73] 얼굴은 배우 조너선 마이어스의 얼굴이므로 원본보다는 훨씬 슬림하게 그려졌다. 이보다 앞서 그렸던 초상화가 있는데 자신을 단순히 쇠약해진 노인의 모습으로만 묘사한 것에 못마땅해 하면서 다시 그리도록 명했던 것이다. 실제 역사대로 초상화를 그린 화가는 한스 홀바인으로 설정되었다.[74] 1536년 1월 24일 열린 마상시합에 참가했다가 낙마한 후 2시간이나 의식을 잃었다. 원체 대식가인지라, 운동으로 몸매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이 사고로 다리를 심하게 다쳐서 운동을 하지 못하게 된 후, 살이 찌기 시작했다. 한편으로 2시간이나 무의식 상태였다는 것은 뇌손상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의 성격이 이 사고로 인한 뇌손상으로 인해서 잔학무도해졌지 않을까 하는 설도 있다. 이 당시 왕비는 앤 불린이었는데 남편의 사고 소식을 들은 충격으로 유산했다.[75] 앤을 생각하면 욕망에 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