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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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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2. 중, 근세
2.1. 내전2.2. 내전 이후2.3. 혼란 재개2.4. 덴마크의 부흥과 칼마르 동맹
2.4.1. 덴마크-노르웨이 탄생과 칼마르 동맹2.4.2. 칼마르 동맹 출범2.4.3. 칼마르 동맹 해체와 덴마크-노르웨이
3. 근대
3.1. 덴마크-노르웨이 해체와 빈 체제3.2. 크리스티안 8세 시대3.3. 프레데리크 7세 시대와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
3.3.1. 간헐적 휴전과 프로이센의 이탈3.3.2. 덴마크의 승리3.3.3. 덴마크의 자유주의 헌법의 갱신과 올덴부르크 왕조의 단절
4. 현대
4.1. 20세기 초반의 덴마크4.2. 20세기 중후반의 덴마크4.3. 현황
5. 역대 덴마크 국왕6. 관련 문서7. 둘러보기
Chapter 5 : Denmark's history

1. 고대

기원전 4세기에서 1세기 사이에 덴마크를 비롯한 스칸디나비아 반도 남부 일대는 오늘날보다 더 춥고 습윤하였다. 해당 지역은 아열대 지방처럼 질병이 만연한 것은 아니었고 이는 인구 증가속도가 식량 생산 증가속도보다 훨씬 더 빨라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스칸디나비아 남부 예텔란드와 고틀란드 섬의 노르드인들이 유틀란트 반도를 넘어 중유럽과 서유럽 각지로 이동,팽창하였다. 유틀란트 반도의 원주민들은 다른 유럽인들에 비해 비교적 피부가 검고 키가 작았다는 기록이 있으나 스칸디나비아 남부 예텔란드와 고틀란드 섬을 통해 계속 노르드인이 유입되면서 결국은 노르드인들과 동화되었다.

이 지역은 고대 로마 제국내 영역에는 속하지 않았으나 다른 게르만족 거주 지역과 마찬가지로 로마 제국과의 교류로 인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고고학적 연구 결과 로마에서 주조된 주화나 사치품을 비롯하여 농업 기술과 재배 작물의 범위가 서기 1~5세기 동안 꾸준히 증가한 것으로 밝혀졌다.

서기 6세기 무렵 동로마 제국의 프로코피우스요르다네스 같은 역사가들에 의해 데인족이라는 명칭이 최초로 역사 기록 상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스칸디나비아 남부와 유틀란트 반도에 거주하던 데인족들은 다른 노르드인들과 함께 서기 5~7세기 유틀란트 반도를 근거지로 북해와 지중해 각지를 약탈과 병행하는 교역을 하며 브리튼 제도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 정착촌을 건설하였다.

2. 중, 근세

덴마크는 오랫동안 여러 개의 부족 단위로 분열되어 있었으나 노르웨이 같은 험준한 산맥과 스웨덴 같은 빽빽한 산림도 없었기 때문에 통일 국가의 형성을 방해할 만한 지리적인 요인은 적은 편이었다. 936년 옐링 지역의 군주가 된 고름이 대대적인 정복 활동을 벌이며 덴마크의 통일 사업을 시작하여 덴마크 서부를 지배하던 울라프 가문의 시그트리그 그누파손을 물리치고 유틀란트 반도를 통일하였다. 고름은 인근 노르웨이 통일 왕국의 초대 왕 하랄 1세의 아들 에리크 1세와 자신의 딸인 건힐다를 결혼시키며 친선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리고 고름의 아내인 티레가 덴마크와 독일의 국경인 다네비르케 방어벽을 세우며 국경선을 확정지었다고 한다. 다만 다네비르케 장벽은 오늘날 남아있지는 않다.

한편 비록 티레가 그리스도교에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 고름 역시 티레를 상당히 아껴 그녀가 죽자 그녀를 기리는 룬문자 비석을 세울 정도였지만 고름 스스로는 전통적인 북유럽 신화의 열렬한 숭배자였다. 이에 947년 독일의 작센 북부 지역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지배에 항거하는 이교도 슬라브족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아들인 하랄 고름손 블로탄을 보내 이들을 지원하였다. 이 반란은 3년이나 이어졌으나 950년 신성로마황제 오토 1세의 대대적인 반격을 받으면서 진압당하고 말았다. 덴마크 군도 유틀란트 반도로 쫓겨갔고 오토 1세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신성로마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매년 공물을 바치는 굴욕적인 조건으로 강화조약을 체결해야만 했다.

덴마크에서는 958년 고름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하랄 고름손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하랄 고름손은 '푸른 이빨'이라는 뜻의 '블로탄(blatǫnn)'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전투 중에 부러진 이빨 대신 파란색 의치를 넣었기 때문이라는 설과 블루베리를 너무 좋아하여 항상 이빨이 파랗게 물들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하랄 고름손 블로탄은 아버지가 완료하지 못한 덴마크 통일 사업이 완수하여 최초의 통일 덴마크의 왕인 하랄 1세로 즉위하였다. 또한 하랄 1세 블로탄은 아버지와 달리 그의 어머니인 티레의 영향으로 그리스도교에 대한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960년경 직접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그리스도교를 덴마크의 국교로 선포하였다.

하랄 1세 블로탄은 덴마크의 전통 신앙에 따라 이교도식으로 매장된 부모의 무덤 사이에 옐링 교회를 세우고 부모의 시신을 이장하였다. 그리고 부모인 고름과 티레 부부를 추모하기 위해 룬문자 비석을 세우게 되었다. 이는 아버지 고름이 티레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석과 함께 '옐링 비석'이라고 불리며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특히 고름이 세운 비석과 달리 하랄 1세 블로탄이 세운 비석에는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가 새겨져 있어 하랄 1세 블로탄의 시대에 덴마크가 그리스도교 국가가 되었음을 알려주는 증거가 되었다.

덴마크를 통일하고 그리스도교화를 통해 국가 체제도 정비한 하랄 1세 블로탄은 이웃한 노르웨이로 영토를 확대하고자 했다. 당시 하랄 1세 블로탄의 누이인 건힐다와 결혼하였던 노르웨이 왕 에리크 1세가 그의 동생인 호콘 1세에게 축출당하고 954년 사망하면서 건힐다가 다섯 아들과 함께 친정인 덴마크에 와 있던 상황이었다. 하랄 1세 블로탄은 조카의 왕위를 되찾아 준다는 명분을 내세워 에리크 1세의 아들인 하랄 에리크손의 형제들을 앞세우고 노르웨이를 침공하였다. 전쟁 초기에는 노르웨이의 호콘 1세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쳤고 심지어는 호콘 1세가 일시적으로 유틀란트 반도로 반격을 해오기도 했으나 결국 961년 노르웨이의 남서쪽에 있는 피티아르 섬에서 싸우다 전사하면서 하랄 1세 블로탄의 최종적인 승리로 끝났다.

이후 하랄 1세 블로탄은 에리크 1세의 아들 중 장남인 하랄 에리크손을 노르웨이 왕 하랄 2세로 즉위시키고 노르웨이를 덴마크의 속국으로 삼았다. 그러나 노르웨이의 왕이 된 하랄 2세의 실질적인 통치력은 노르웨이의 서부 지역 일대에만 머물러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하랄 2세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오슬로의 지방 영주인 트뤼그비 울라프손과 구드라드 비아른손, 그리고 라데 백작(Jarl of Lade)인 시구르드 호콘손을 살해하였고 전통 신앙 숭배도 금지시켰다. 이에 따라 노르웨이에서 하랄 2세에 대한 반감이 퍼져 나갔고 덴마크 왕 하랄 1세 블로탄 역시 하랄 2세가 덴마크의 종주권에서 벗어나려는 것은 아닌 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때 하랄 2세에게 살해당한 시구르드 호콘손의 아들인 새로운 라데 백작 호콘 시구르드손이 970년 하랄 1세 블로탄의 묵인을 얻어 하랄 2세를 암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후 노르웨이에서는 덴마크의 지원을 받은 라데 백작 호콘과 하랄 2세의 형제들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으나 덴마크의 하랄 1세 블로탄의 지원을 받은 라데 백작 호콘이 최종적으로 승리하였다. 그리고 하랄 1세 블로탄은 노르웨이의 남동부를 덴마크의 영토로 합병하며 직접 통치하였으나 노르웨이 서부 지역은 라데 백작 호콘을 봉신으로 임명하여 간접적으로 통치하였다. 이렇게 하여 하랄 1세 블로탄이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아우르는 제국을 건설하였고 그의 별명인 '블로탄(푸른 이빨)'은 오늘날 근거리 무선 기술 표준인 '블루투스(Bluetooth)'의 어원이 되었다.

노르웨이의 왕위까지 차지한 하랄 1세 블로탄은 이제 신성 로마 제국의 종주권에서 벗어나고자 하였고 973년 신성로마황제 오토 1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오토 2세가 즉위하자 이듬해인 974년 신성 로마 제국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비록 하랄 1세 블로탄은 노르웨이의 호콘의 지원까지 받아 호기롭게 독일 국경 너머로 침공하였지만 다네비르케 전투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하랄 1세 블로탄은 유틀란트 반도를 상실한 채 덴마크령 노르웨이로 도망쳐야 했고 노르웨이 서부 지역에 대한 통제권도 상실하여 라데 백작 호콘이 실질적인 노르웨이의 군주가 되었다. 비록 하랄 1세 블로탄은 983년 훗날 메클렌부르크를 지배하게 되는 북방 슬라브족인 오보트리테와 동맹을 맺고 신성 로마 제국 세력을 몰아내며 유틀란트 반도를 되찾는 데 성공하지만 이듬해 아들인 스벤 1세의 반란으로 인해 살해당하고 만다.

스벤 1세가 덴마크 왕이 되었을 때 잉글랜드에 대한 바이킹 일파인 데인족의 침공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노르웨이 출신인 울라프 트뤼그비손이 두각을 나타내었다. 울라프 트뤼그비손은 노르웨이의 왕 하랄 2세에게 살해당했던 트뤼그비 울라프손의 아들로 전설에 따르면 아버지가 죽은 이후 어머니 아스트리드와 함께 러시아의 키예프 대공인 블라디미르 1세의 궁정에서 바이킹의 전사로 자라났다고 한다. 이후 울라프 1세는 바이킹의 수장이 되어 프랑스와 아일랜드, 잉글랜드의 해안 일대를 습격하며 공포의 대상으로 군림하였다. 스벤 1세는 994년 울라프 트뤼그비손과 함께 잉글랜드의 노섬브리아를 침공하여 잉글랜드 왕 애설레드 2세로부터 매년 막대한 공물을 제공받는 조건으로 강화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울라프 트뤼그비손은 애설레드 2세와 함께 잉글랜드의 앤도버에서 그리스도교의 견진성사를 받고 애설레드 2세의 대부가 되었다.

한편 덴마크의 하랄 1세 볼로탄 시절에 독립하였던 노르웨이는 통치권을 장악한 라데 백작 호콘이 점차 오만하게 굴면서 각지에서 반란이 들끓었고 결국 995년에 호콘이 부하들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노르웨이가 반란으로 혼란스러워졌다는 소식을 들은 울라프 트뤼그비손은 노르웨이로 귀국하였고 라데 백작 호콘이 암살당하자 자신의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노르웨이의 왕위를 차지하고 울라프 1세로 즉위했다. 그리고 열렬히 그리스도교 포교에 나서 노르웨이 서부 해안 지방과 인근 섬인 페로 제도, 셰틀랜드 제도, 오크니 제도 및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하였으나 앞선 노르웨이 왕들과 마찬가지로 울라프 1세도 노르웨이 내륙 지방에 대해서는 거의 통치력을 행사하지 못했고 그리스도교도 전파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울라프 1세의 가장 큰 위협은 덴마크의 스벤 1세였다. 스벤 1세는 부왕인 하랄 1세 볼로탄 시절의 노르웨이 통치권을 되찾고자 하였고 이를 위해 스웨덴 왕 울라프 3세 쇠트코눙 및 호콘의 아들인 라데 백작 에리크 호코나르손과 동맹을 맺었다.

995년 에이리크 6세가 사망하면서 스웨덴의 울로프 3세 쇠트코눙이 스웨덴 국왕으로 즉위했다. 초기 북유럽 역사를 기록한 브레멘 주교의 아담에 의하면 에이리크 6세가 994년 덴마크 국왕 스벤 1세를 잉글랜드로 내쫓고 995년 사망할 때까지 덴마크를 지배했지만 에이리크 6세가 사망하자 스벤 1세에게 덴마크를 빼앗겼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 울로프 3세 쇠트코눙이 덴마크 왕위를 두고 다투게 되었지만 울로프 3세 쇠트코눙의 어머니이자 에이리크 6세의 미망인인 시그리드가 스벤 1세와 재혼하면서 화해하였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에이리크 6세가 덴마크를 지배했다고 한 시기에 스벤 1세는 잉글랜드로 쫓겨난 것이 아니라 잉글랜드를 공격하고 있었기 때문에 브레멘 주교 아담의 기록은 그 사실성을 의심받고 있다.

어쨌든 울로프 3세 쇠트코눙와 덴마크의 스벤 1세의 동맹은 사실로 보이는데 실제로 스벤 1세가 노르웨이의 올라프 1세 트뤼그비손을 몰락시키는 데 동참했다. 1000년 노르웨이의 올라프 1세가 벤드족의 땅인 포메른을 습격하고 노르웨이로 되돌아가는 것을 노려 덴마크의 스벤 1세는 스웨덴의 울로프 3세 쇠트코눙 및 라데 백작 에리크 호코나르손과 연합하여 공격을 개시했다. 이렇게 벌어진 스볼데르 전투에서 올라프 1세는 11척으로 총 70척을 상대해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에 놓였고 결국 라데 백작 에리크에게 생포되어 바다에 던져졌다. 이후 비록 라데 백작 에리크가 노르웨이의 통치를 위임받았고 겉으로는 종주권을 덴마크와 스웨덴이 양분했고 울로프 3세 쇠트코눙이 노르웨이의 트뢰넬라그를 획득하는 대신에 덴마크의 스벤 1세가 노르웨이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다.

이후 스벤 1세는 다시 잉글랜드로 관심을 돌렸다. 그러던 중 잉글랜드에서 덴마크에 보내야 하는 막대한 공물 때문에 데인세라는 이름으로 중과세가 시행되고 이에 신음하던 잉글랜드인의 불만이 팽배해지자 1002년 11월 13일 성 브리아스 축일을 기해 잉글랜드 왕 애설레드 2세가 데인족에 대한 대학살을 명령했다. 이 학살에 자신의 누이가 포함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스벤 1세는 격분하여 잉글랜드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리고 비록 1003년과 1004년 잉글랜드를 대대적으로 침공했으나 정복에 실패한 후 한동안 원정을 중지했으나 1013년에 아들 크누드를 데리고 다시한번 대규모 원정군을 이끌고 잉글랜드로 향하여 이번에는 대승을 거뒀다. 잉글랜드의 애설레드 2세는 프랑스 왕국노르망디로 도망쳤고 스벤 1세가 1013년 크리스마스에 잉글랜드 왕으로 선포되었다.

스벤 1세는 덴마크, 노르웨이, 잉글랜드의 3개국을 지배하게 되었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1014년 2월 사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비록 스벤 1세가 사망당시 크누드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덴마크 귀족들은 스벤 1세의 장남인 하랄 2세를 덴마크 왕으로 세웠고 노르웨이에서는 최초의 노르웨이 왕 하랄 1세의 후손 올라프 하랄드손에게 1015년 노르웨이 왕위를 계승시켰다. 또한 잉글랜드인들도 크누드의 왕위 계승을 인정하지 않고 스벤 1세에 의해 축출된 애설레드 2세를 귀국시켜 다시 왕으로 옹립했다. 크누드는 스벤 1세의 사망 이후 일단 잉글랜드를 떠나 덴마크로 갔지만 형의 덴마크 왕위 계승을 인정하고 1015년 잉글랜드로 되돌아와 1016년 노섬브리아를 장악하고 웨식스로 진군하였다.

1016년 4월 애설레드 2세가 사망하자 웨식스의 수석 고문들과 귀족, 교회인들의 회의인 위턴회의(Witenagemot)는 크누드를 막아낼 수 없자 전쟁의 참화를 피하기 위해 크누드를 왕으로 선출했으나 런던에서는 이 결정을 따르지 않고 애설레드 2세의 아들인 에드먼드 2세를 자신의 왕으로 옹립했다. 이에 크누드와 에드먼드 2세가 전쟁을 벌였고 에드먼드 2세가 '용맹왕(Ironside)'이라는 별명처럼 한때 크누드를 거세게 몰아붙였으나 결국 1016년 10월 18일 에식스의 에싱턴 전투에서 크누드가 대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크누드와 에드먼드 2세가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웨식스는 에드먼드 2세가 통치하는 대신에 나머지 노섬브리아와 머시아는 크누드의 차지가 되는 합의가 이루어졌으나 에드먼드 2세가 같은 해 11월 급사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크누드가 잉글랜드 전체의 왕이 될 수 있었다.

크누드는 잉글랜드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애설레드 2세의 미망인인 노르망디의 엠마와 결혼하였고 그 대신 애설레드 2세와 엠마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노르망디에서 사는 조건으로 살려주었다. 이렇게 하여 살아남은 아이 중에는 나중의 참회왕 에드워드도 포함되어 있었다. 1018년 하랄 2세가 사망하면서 크누드는 덴마크 왕위까지 계승하게 되었으나 덴마크에서 크누드의 왕위계승에 반대하는 귀족들이 포메른의 벤드족과 동맹을 체결하자 1019년 잉글랜드 군을 이끌고 덴마크로 향하여 반대파를 일소하였다. 그리고 여동생 에스트리드와 결혼한 울프 야를을 덴마크의 섭정으로 임명하고 재혼한 노르망디의 엠마로부터 얻은 하레크누드를 덴마크의 왕위 계승자로 선포한 뒤 1022년 잉글랜드로 귀환하였다.

1022년 스웨덴 왕 울로프 쇠트코눙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아눈드 3세 야코브가 새로운 스웨덴의 왕이 되었다. 아눈드 3세 야코브는 부왕 울로프 3세 쇠트코눙과 마찬가지로 노르웨이의 올라프 2세와 동맹관계를 유지하였다. 노르웨이의 올라프 2세의 지원을 받은 아눈드 3세 야코브가 덴마크까지 위협하기 시작하자 덴마크 섭정 울프 야를이 1026년 반란을 일으켜 크누드의 어린 아들인 하레크누드를 왕위에 올리는 일이 일어났다. 이에 잉글랜드군을 이끌고 다시 덴마크로 돌아온 크누드가 울프 야를을 제압하였고 같은 해 벌어진 스웨덴-노르웨이 함대를 상대로 벌인 헬게 강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다. 그리고 1028년 노르웨이 지주들을 매수하여 노르웨이 왕인 올라프 2세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게 만든 후 노르웨이 왕위까지 차지했다.

이렇게 하여 크누드는 잉글랜드-덴마크-노르웨이의 3개국 왕위를 모두 차지하면서 북해를 내해로 가지는 '북해 제국(North Sea empire)' 혹은 '앵글로-스칸디나비아 제국'이라고 불리는 대제국을 건설하는 데 성공했다. 이 때문에 크누드에게는 '대왕(the Great)'라는 칭호가 붙었다. 크누드는 흘라티르의 에리크의 아들인 호콘 에릭손을 노르웨이 섭정으로 삼았으나 호콘이 1030년 사망했기 때문에 크누드의 첫번째 왕후 앨프지푸에게서 낳은 아들인 스벤을 노르웨이의 왕으로 임명했다. 같은 해 러시아로 망명을 떠난 올라프 2세가 스웨덴 왕 아눈드 3세 야코프의 지원을 받아 노르웨이 회복을 노렸지만 스티클레스타 전투에서 패배하고 전사하였다. 그러나 올라프 2세는 노르웨이에 그리스도교를 널리 전파시킨 공을 인정받아 성인으로 추증되었을 정도로 노르웨이 사람들에게 여전히 많은 신망을 얻었고 이 덕분에 키예프 루스로 망명을 떠나 있던 그의 아들인 망누스가 나중에 재기에 성공했다.

한편 크누드는 노르망디의 엠마와 결혼하고 엠마만 합법적인 왕후로 인정하면서 그녀의 소생인 하레크누드 만이 합법적인 왕위 계승권자가 되었고 첫 번째 왕후였던 앨프지푸의 아들들은 모두 서자로 격하되었기 때문에 분쟁의 불씨를 남겨두고 말았다. 비록 크누드가 엠마 소생인 하레크누드를 덴마크의 왕위 계승자로 선포하였지만 이미 앨프지푸의 아들인 스벤이 노르웨이 왕이 되었고 앨프지푸의 또 다른 아들인 해럴드가 머시아 백작 레오프릭의 지지를 받아 잉글랜드 내에서 상당한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이 때문에 1035년 크누드가 사망하자 그의 제국은 아들들의 내분으로 무너져 내리고 만다.

크누드가 죽은 이후 하레크누드는 덴마크의 왕위만 문제없이 계승하였을 뿐 잉글랜드는 머시아 백작 레오프릭의 지지 아래 앨프지푸의 아들인 해럴드가 섭정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통치권을 장악하였다. 더구나 노르웨이의 왕으로 임명되었던 스벤이 올라프 2세의 아들인 망누스 1세에게 쫓겨나면서 하레크누드는 노르웨이의 망누스 1세 때문에 잉글랜드에는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이 틈을 타고 해럴드가 1037년 하레크누드와 그의 모후인 엠마를 지지하던 웨식스 백작 고드윈을 추방하고 잉글랜드 남부의 귀족들까지 모두 제압한 뒤 스스로 잉글랜드 왕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크누드가 수립했던 북해 제국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한편 노르웨이 왕이 된 망누스 1세는 본래 노르웨이 국왕 올라프 2세와 잉글랜드 출신 노예인 알프힐드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였다. 망누스 1세가 4살에 불과한 나이에 올라프 2세는 크누드에게 폐위당하여 스웨덴 국왕 아눈드 3세 야코브의 도움을 받아 키예프 루스로 망명을 떠났다. 이후 키예프 루스에서 성장하였으나 1035년 크누드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스벤 크누드손이 노르웨이 왕위를 상속받게 되자 그의 지배를 원치 않았던 노르웨이 귀족인 아이나르 탐바르스켈피르와 칼프르 아르네손이 망누스 1세를 왕으로 옹립하고자 했다. 11살의 망누스 1세가 이를 위해 스웨덴으로 향했고 망누스 1세의 아버지인 올라프 2세를 지원했던 스웨덴 왕 아눈드 3세 야코브로부터 이번에도 도움을 받아 노르웨이 왕위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크누드의 아들인 스벤이 노르웨이에서 쫓겨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이후 하레크누드가 노르웨이를 다시 합병시키기 위해 전쟁을 벌였으나 1039년까지 결판이 나지 않았다. 이에 덴마크의 하레크누드와 노르웨이의 망누스 1세는 서로 협상을 가지고 둘 중 더 오래 사는 사람이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왕위를 모두 차지하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1040년 잉글랜드에서 해럴드 1세가 급사하자 하레크누드가 잉글랜드 왕위를 되찾기 위해 떠났으나 1042년 하레크누드도 잉글랜드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이후 잉글랜드 왕위는 하레크누드와 어머니가 같고 아버지가 다른 형제이자 애설레드 2세의 아들인 참회왕 에드워드가 이어받아 앵글로-색슨 왕조를 부활시켰고 덴마크 왕위는 하레크누드와의 사전 약속에 따라 망누스 1세의 차지가 되었다.

이후 망누스 1세는 크누드의 누이 동생인 에스트리드와 울프 야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자 울프 야를이 반란에 실패하여 크누드에게 살해당한 이후 스웨덴으로 망명을 떠나 있던 스벤을 귀국시켜 덴마크 부왕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북해 제국을 재건하기 위해 망누스 1세가 잉글랜드 왕위도 요구하고 나섰으나 포메라이나의 벤드족과 전투를 벌이는 동안 스벤이 덴마크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 반란을 일으켜 스벤 2세 에스트리드센으로 덴마크 왕위에 오르면서 더이상 잉글랜드에 신경쓸 수 없게 되었다. 망누스 1세는 스벤 2세를 연이어 격파하고 스웨덴으로 쫓아냈으나 동로마 제국에서 용병으로 활약한 망누스 1세의 숙부인 하랄 시구르손이 1045년 노르웨이로 귀국하여 노르웨이 동부 지역을 요구하고 나서며 스벤 2세와 연대를 도모했다. 이에 망누스 1세는 어쩔 수 없이 하랄 시구르손을 노르웨이의 공동왕 하랄 3세로 인정해야만 했다. 이 때부터 노르웨이는 공동왕 즉위가 관행이 되었다. 그리고 망누스 1세가 다시 덴마크 공격에 나섰지만 1047년 갑자기 사망하고 말았다.

망누스 1세가 사망하자 노르웨이 왕위는 하랄 3세가, 덴마크 왕위는 스벤 2세가 각각 차지하게 되었지만 이후로도 노르웨이와 덴마크의 전쟁은 15년간이나 계속되었다. 그 사이 스웨덴에서도 1050년경 아눈드 3세 야코브가 사망하고 그의 이복 형인 에문드 2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하지만 에눈드 2세는 선왕인 아눈드 3세 야코브보다도 나이가 많아 노왕이라고 불렸고 더욱이 그의 아들인 아눈드 에문드손이 요절하고 에문드 2세도 재위 10년만인 1060년에 사망하면서 문쇠 왕조가 단절되고 말았다. 이제 스웨덴은 에문드 2세의 사위인 스텐킬에 의한 스텐킬 왕조가 새롭게 시작되었지만 내정 정비 때문에 노르웨이와 덴마크의 전쟁에 개입할 수 없었다. 그리고 노르웨이와 덴마크의 전쟁은 덴마크의 스벤 2세가 노르웨이의 하랄 3세에게 패배를 거듭했지만 하랄 3세가 약탈에만 몰두하면서 덴마크를 끝내 정복하지 못했다. 결국 1062년 니즈 전투를 끝으로 둘은 상대방을 각국의 군주로 인정하였고 1064년 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한편 잉글랜드에서 참회왕 에드워드가 1066년 1월 사망하고 고드윈 백작 해럴드 2세가 왕위를 차지하였으나 그의 동생인 토스티그가 반기를 들었다. 하랄 3세는 토스티그를 지원하여 대대적으로 잉글랜드를 공격하였으나 1066년 9월 스탐퍼드브리지 전투에서 패배하고 하랄 3세도 전사하고 말았다. 하랄 3세가 죽자 그의 두 아들인 울라프 3세와 망누스 2세가 공동으로 노르웨이를 통치하게 되었다. 그런데 하랄 3세의 잉글랜드 침공은 예기치 않게 해럴드 2세를 유인한 셈이 되었는데 하랄 3세가 잉글랜드를 침공한 지 한달 후인 1066년 10월 노르망디 공작 기욤 2세가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럴드 2세를 격파하고 잉글랜드 왕 윌리엄 1세로 즉위하는 노르만 정복이 일어난다.

하랄 3세가 사망한 이후 덴마크의 스벤 2세는 더이상 위협당할 일이 없어졌고 1068년 노르웨이와와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스벤 2세도 잉글랜드를 욕심내어 1069년 잉글랜드 왕 에드먼드 2세의 손자인 에드가 애설링의 반란을 지원하였으나 이듬해 윌리엄 1세와 협정을 맺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이후 스벤 2세는 꾸준히 왕권 강화를 추진하였고 스칸디나비아 총대주교구를 세울 야심을 가진 함부르크-브레멘 대주교 아달베르트의 영향으로 덴마크 교회가 독일인 성직자로 채워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잉글랜드에서 앵글로-데인족 성직자를 대거 데려오기도 하였다. 스벤 2세는 1060년 덴마크 교회를 8개의 교구로 나누며 주교구를 정비하였고 1072년 함부르크-브레멘 대주교 아달베르트가 사망하면서 덴마크 교회의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참고로 스벤 2세는 브레멘 주교인 아담과도 친분이 있어 그가 북유럽의 초기 역사를 기록한 "함부르크-브레멘 대주교구의 역사"를 저술할 때 많은 정보를 제공하기도 했다.

1074년 덴마크 왕 스벤 2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하랄 3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하랄 3세는 자신을 왕으로 선출해준 덴마크 귀족들에게 휘둘려야 했고 왕위를 노리는 이복동생들도 견제해야만 했다. 이 때문에 하랄 3세는 대외 영토 확장보다는 내부적으로 왕권을 강화하는 데 온 힘을 기울여야 했다. 그러나 하랄 3세는 1080년 사망하였고 이후 하랄 3세에게 추방당하여 스웨덴에 머물던 그의 이복동생인 크누드가 크누드 4세로 덴마크 왕위를 이어받았다. 크누드 4세는 적극적으로 그리스도교를 장려하여 교회의 권위를 강화시키고 십일조를 강화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왕권을 신장시키고자 하였다.

1085년 크누드 4세는 잉글랜드를 침공하고자 농민들을 징집하고 함대를 준비했으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가 덴마크 남부의 슐레스비히를 위협했기 때문에 잉글랜드로 향하지 못했다. 이후 추수기가 도래하면서 징집된 농민들이 해산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크누드 4세의 이복 동생인 올루프가 이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나섰다. 이 때문에 올루프는 플랑드르로 추방당했으나 결국 군대는 해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1년 뒤 크누드 4세가 다시 군대를 소집하고 했으나 이에 반발한 농민 반란이 일어나면서 살해당하고 만다. 그리고 플랑드르로 추방당했던 올루프가 자신의 동생인 닐스를 플랑드르에 인질로 맡긴 뒤 귀국하여 다른 이복동생인 에리크를 추방하고 올루프 1세로 왕위를 이어받는데 성공했다.

올루프 1세의 치세는 계속된 흉년으로 얼룩졌기 때문에 덴마크인들은 "교회에 헌신했던 크누드 4세를 살해한 것에 대한 천벌을 받는 것"이라는 생각이 퍼졌다. 더욱이 오덴세에 있던 크누드 4세의 무덤에서 기적이 일어났다는 소문까지 퍼지면서 크누드 4세에 대한 공경심이 일어났고, 성인 시성까지 추진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올루프 1세는 1095년에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고 이후 그의 동생으로 왕위에 오른 에리크 1세가 1101년에 로마를 직접 방문하여 교황 파스칼 2세로부터 크누드 4세의 성인 시성을 승인받는데 성공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1104년 지금의 스웨덴 남부 스코네룬드 대주교구가 수립되었고 이로서 덴마크 교회를 비롯한 스칸디나비아 교회들이 함부르크-브레멘 대주교구에서 독립하게 되었다. 이후 에리크 1세는 갑자기 성지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났고, 1103년 키프로스 섬에서 병을 얻어 사망하게 된다.

에리크 1세가 병사한 이후 그의 동생으로 동행하고 있던 스벤이 왕으로 선출되지만 귀국 도중에 마찬가지로 병사하자 플랑드르에 올루프 1세 대신에 인질로 붙잡혀 있던 다른 동생인 닐스가 귀국하여 1104년 덴마크 왕위를 이어받았다. 스벤 2세 에스트리드센의 아들로서 5번째 왕위 계승이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105년 스웨덴 왕 잉에 1세의 딸인 마르가레타와 결혼하였는데 그의 아들인 망누스가 1125년 스웨덴 왕위를 이어받아 망누스 1세로 잠시 즉위하게 된다. 그 대신에 에리크 1세의 적자이자 닐스의 조카인 남부 유틀란트(슐레스비히) 공작 크누드 라바르가 유력한 덴마크 왕위계승 후보자로 손꼽히게 되지만 1130년 마르가레타가 사망하면서 망누스도 폐위당하고 만다. 비록 닐스가 즉위한 이후 초기 27년간은 평화로왔지만 이제 닐스의 아들인 망누스와 조카인 크누드 라바르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면서 내전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2.1. 내전

1074년 스벤 2세가 사망한 후 그의 다섯 아들인 하랄 3세, 크누드 4세, 올루프 1세, 에리크 1세, 닐스가 차례로 왕위를 이어받는 형제 상속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닐스가 나이가 들자 1131년 닐스 이후의 왕위를 두고 닐스의 아들인 망누스와 에리크 1세의 아들인 슐레스비히(남유틀란트 반도) 공작 크누드 라바르가 서로 다투기 시작하였다. 비록 망누스가 크누드 라바르를 살해했지만 크누드 라바르의 이복 동생인 에리크가 지지 세력을 모아 반란을 일으키면서 본격적인 내전이 시작되고 말았다.

망누스는 유틀란트 반도에 강력한 기반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이자 현직 왕인 닐스의 후원을 받고 있었고 룬드 대주교 아세르 토르킬손의 지지도 받았기 때문에 매우 유리한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처음에는 에리크가 연이어 패배한 채 잠시 스코네로 후퇴해야만 했지만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로타르 3세의 봉신이 되는 조건으로 군사 지원을 받아내는데 성공하였다. 또한 에리크가 덴마크 교회를 다시 독일의 함부르크-브레멘 대주교구 관할로 귀속시키고자 했기 때문에 룬드 대주교 아세르 토르킬손도 에리크의 편으로 돌아섰다. 1134년 6월 닐스와 망누스가 에리크와 최후의 결전을 벌이기 위해서 스코네의 포테비크 만에 상륙하였으나 오히려 에리크가 독일에서 데려온 중장 기병 덕분에 승리하였다. 패배한 망누스가 전사했고 닐스는 슐레스비히로 달아났으나 얼마 뒤 그곳에서 살해당하고 만다.

이제 에리크는 스코네에서 의회를 소집하여 덴마크 국왕 에리크 2세로 선출되었고 룬드를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 이 때 자신의 또 다른 형인 하랄 케샤가 슐레스비히에서 별도로 의회를 개최하여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하랄 케샤와 그의 아들들을 모두 죽였으나 올라브 하랄센만은 놓치고 말았다. 이후 에리크 2세는 정통성 부족 때문에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많은 특권과 작위를 부여했고 룬드 대주교 아세르 토르킬손이 1137년 사망하자 조카인 에스킬을 룬드 대주교로 임명했으나 지나치게 잔혹하게 정적들을 숙청하는 공포정치를 펼쳤기 때문에 1137년 우르네회베드 의회에서 살해당하고 말았다. 이제 에리크 1세의 사생아 딸인 라근힐드가 덴마크 귀족 하콘 위데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인 에리크 3세가 덴마크 왕위를 이어받게 되었다.

에리크 3세가 왕이 된 이후 덴마크는 에리크 3세의 우유부단하고 소극적인 통치로 인하여 많은 혼란을 겪어야 했다. 먼저 도망쳤던 하랄 케샤의 아들 올라브 하랄센이 스코네에서 왕위를 참칭하다가 살해당했고 다음으로 독일 북부의 이교도 부족인 벤드족에게 해안 지역을 약탈당했으나 이를 막아내지 못하여 많은 피해를 입어야 했다. 결국 1146년 에리크 3세가 폐위당하고 말았고 이후 닐스의 손자이며 망누스의 아들인 크누드가 유틀란트 귀족들의 지지를 받으며 왕위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그렇지만 셸란 섬과 스코네의 귀족들이 크누드 5세를 인정하지 않은 채 에리크 2세의 사생아인 스벤을 대립왕 스벤 3세로 내세웠기 때문에 덴마크는 다시 내전에 휩싸였다.

비록 1147년 크누드 5세가 셸란 섬을 정복하고 스벤 3세를 유틀란트 반도로 끌고 온 후 감옥에 가두는 데는 성공했지만 덴마크의 주변 바다를 위협하는 벤드족과 전쟁을 벌여야 했기 때문에 다시 스벤 3세와 화해했다. 그리고 스벤 3세에게 벤드족을 상대하도록 했지만 크누드 5세가 소극적인 지원으로 일관했기 때문에 스벤 3세가 해전에서 벤드족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이에 스벤 3세가 다시 크누트 5세와 맞서기 시작했고 자신을 도와준 크누트 라바르의 아들이자 자신의 사촌인 발데마르를 슐레스비히 공작으로 임명한 후 1150년 크누드 5세를 공격하여 스웨덴으로 쫓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이듬해 크누드 5세가 스웨덴 국왕 스베르케르 1세와 독일왕 콘라트 3세의 도움을 받아 덴마크를 재침공하였으나 스벤 3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군대를 격파했다. 그렇지만 1152년 콘라트 3세가 사망하고 그의 조카인 프리드리히가 새로운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된 후 덴마크의 내전에 대한 중재에 나서면서 스벤 3세, 크누드 5세, 발데마르 1세가 화해를 위해 메르제부르크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스벤 3세가 덴마크 왕으로 공인받았으나 대신에 크누드 5세가 덴마크의 일부를 통치하도록 결정되었고 발데마르 1세의 슐레스비히 공작 지위도 그대로 유임되었다. 그러나 스벤 3세가 크누드 5세에게 재기할 발판을 얌전히 내줄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아주 작은 지역만 내주었고, 이로 인해 1154년 크누드 5세가 슐레스비히 공작 발데마르 1세와 동맹을 체결하고 메르제부르크 조약의 파기를 선언해 버렸다.

이렇게 하여 내전이 재개되었고 이번에는 스벤 3세가 패배한 채 독일로 도망쳐야 했다. 그러나 1157년 스벤 3세가 독일의 강력한 제후인 작센-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사자공의 지원을 받아 돌아오면서 덴마크 귀족들은 덴마크 왕국을 유틀란트 반도, 셸란 섬, 스코네로 3분할하기로 결정했다. 스벤 3세가 유틀란트 반도와 스코네의 왕으로 인정받았고 크누드 5세는 셸란 섬의 왕이 되었다. 하지만 1157년 8월 스벤 3세가 크누드 5세 및 발데마르 1세를 모두 죽이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로스킬레에서 연회를 개최하였다. 덴마크 역사에서 '로스킬레 대학살'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크누드 5세가 살해당했으나 발데마르 1세는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발데마르 1세가 반격에 나서면서 같은 해 10월 그라테 황야의 전투가 벌어졌고 이 전투에서 발데마르 1세가 스벤 3세를 살해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로서 26년간이나 지속된 덴마크의 오랜 내란이 끝나고 발데마르 1세가 최종 승자가 되었다.

2.2. 내전 이후

26년간이나 지속된 덴마크의 오랜 내란의 최종 승자가 된 발데마르 1세는 어린 시절 셸란 섬의 유력 귀족인 아세르 페네슬레브의 아들인 압살론과 의형제가 되었는데 이제 왕위에 오르자 1158년 압살론을 로스킬레 주교로 임명하고 그의 조언을 받으며 덴마크를 통치하기 시작했다. 발데마르 1세가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종주권을 인정하면서 프리드리히 1세가 교황 알렉산데르 3세와 분쟁을 벌이며 세운 대립교황 빅토리오 4세를 지지했기 때문에, 알렉산데르 3세를 지지하던 룬드 대주교 에스킬이 망명을 떠나야 했다. 그렇지만 1164년 빅토리오 4세가 죽고 새로운 대립교황 파스칼 3세가 즉위하자 1167년 발데마르 1세는 로스킬레 주교 압살론의 조언에 따라 알렉산데르 3세를 지지하는 것으로 마음을 바꿨고, 이에 에스킬이 1168년 덴마크로 돌아오게 되었다.

1169년 발데마르 1세는 로스킬레 주교 압살론과 함께 덴마크의 해안을 위협하고 있던 벤드족에 대한 토벌에 나서서 벤드족의 요새인 뤼겐 섬을 로스킬레 주교구에 편입시켰다. 그리고 벤드족의 수도인 아르코나마저 점령한 후 이교도 사원을 파괴하고 벤드족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며 덴마크의 영역을 독일 북부의 포메라이나 지역까지 확장시켰다. 한편 덴마크로 되돌아온 룬드 대주교 에스킬이 1170년에 발데마르 1세의 아버지인 크누트 라바르를 성인으로 시성하였고 발데마르 1세의 아들인 크누트 6세를 공동 통치자로 축성하면서 발데마르 1세가 교황 알렉산데르 3세와 대립하고 있던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종주권에서 벗어나는 데는 성공했지만 1177년 룬드 대주교 에스킬의 친척들이 반란 음모에 가담했기 때문에 에스킬은 다시 프랑스로 추방당하게 되었다.

이후 압살론이 룬드 대주교로 임명되면서 그의 영향력이 더욱 강화되었고 발데마르 1세가 압살론의 조언에 따라 강압 정치를 펼쳤기 때문에 몇 번의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으나 모두 진압되었다. 참고로 압살론은 외레순 해협의 남단에 있는 하븐이라는 작은 도시에 1167년부터 성을 세우고 해자를 둘러 요새화하기 시작했는데 이 요새가 발전하면서 훗날 덴마크의 수도인 코펜하겐이 된다. 또한 발데마르 1세는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공격에 대비하여 군사력을 늘리고 국경 지역의 요새를 개선하였는데 결국 1181년 동등한 자격으로 프리드리히 1세와 동맹을 맺는 데 성공한 뒤 이듬해 사망했다. 이렇게 발데마르 1세가 내전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벤드족을 물리치며 영토를 크게 확장했으며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독립하는 업적을 남겼기 때문에 덴마크 역사에서 발데마르 1세는 '대왕(den Store)'의 호칭을 얻게 된다.

1182년 발데마르 1세가 사망하자 이미 공동왕이 되었던 그의 장남 크누드 6세가 단독으로 통치를 시작하였고 부왕과 마찬가지로 룬드 대주교 압살론에게 여전히 조언을 받았다. 크누드 6세는 1184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다시 자신의 종주권을 인정할 것을 요구하고 나서자 거절하였다. 이로 인해 프리드리히 1세의 사주를 받은 포메른 공작 보기슬라프 1세가 덴마크를 공격해 오자 압살론이 이끄는 덴마크 함대를 보내 보기슬라프 1세를 격파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보기슬라프 1세의 근거지까지 처들어가 보기슬라프 1세로부터 봉신 서약까지 받아내었다. 이 이외에도 크누드 6세는 1197년 에스토니아인 이교도를 토벌하는 북방 십자군을 이끌기도 했다.

한편 크누드 6세에게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동생인 슐레스비히 공작 발데마르 2세가 가장 유력한 왕위계승 후보자가 되었다. 그러나 발데마르 2세의 나이가 너무 어리기 때문에 슐레스비히 주교인 동명의 발데마르가 후견인이 되었지만 주교 발데마르는 야심만만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홀슈타인 백작 아돌프 3세와 함께 크누드 6세를 폐위시키고 그 자신이 왕이 될 음모를 꾸몄다. 사전에 이를 감지한 발데마르 2세가 1192년 오벤로로 초빙하자 주교 발데마르가 스웨덴령 노르웨이로 도망쳤고 이듬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지원을 받아 35척의 선단을 이끌고 덴마크를 공격했으나 크누드 6세에게 패배하여 수감되었다. 몇 년이 지난 뒤인 1199년 홀슈타인 백작 아돌프 3세도 반란을 일으켰으나 1201년 최종적으로 토벌당했다.

1202년 크누드 6세가 사망하면서 발데마르 2세가 덴마크 왕위를 계승하였다. 발데마르 1세와 크누트 6세 시절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룬드 대주교 압살론이 이미 전년도인 1201년 사망했기 때문에 발데마르 2세는 독자적으로 덴마크를 통치하게 되었다. 발데마르 2세는 즉위 직후 엘베 강 북쪽의 영토를 양도받는 조건으로 반란을 일으켰던 홀슈타인 백작 아돌프 3세를 석방하였다. 그리고 1206년에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요청을 받아 다시는 정치에 간섭하지 않는 조건으로 주교 발데마르도 석방하여 주었다. 그러던 중 신성로마제국에서는 1197년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가 사망하고 그의 어린 아들인 프리드리히 2세만 남겨지자 독일 제후들이 프리드리히 2세의 독일왕위 선출을 인정하지 않았고 이에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슈바벤 공작 필리프벨프 가문의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오토 4세가 서로 왕위를 다투게 되었다. 이에 발데마르 2세는 오토 4세를 지지하는 대가로 홀슈타인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았다.

1207년 주교 발데마르가 브레멘 대주교로 선출되고 오토 4세에게 맞서서 대립왕이 되었던 호엔슈타인 가문의 슈바벤 공작 필리프가 이를 승인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발데마르 2세가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항의하였고 1208년 슈바벤 공작 필리프가 암살당하면서 오토 4세가 최종 승자가 되자 인노첸시오 3세도 1209년 주교 발데마르를 파문하고 발데마르 2세의 요청에 따라 슐레스비히 주교 니콜라스 1세를 브레멘 대주교로 임명해야 했다. 그러나 1210년 발데마르 2세가 인노첸시오 3세와 다시 대립하며 파문을 당하자 1214년에 벨프 가문의 연합에서 탈퇴한 채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프리드리히 2세를 지지하고 나섰다. 결국 1215년 오토 4세가 폐위되면서 프리드리히 2세가 독일의 단독왕이 되었고 발데마르 2세는 프리드리히 2세를 지지한 대가로 옛 벤드족의 영토와 엘베 강 및 엘데 강 북쪽의 영토까지 모두 얻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한편 발데마르 2세는 1206년부터 에스토니아의 이교도에 대한 북방 십자군 원정을 벌이기 시작했다. 발데마르 2세는 리보니아의 리가 주교인 알브레히트 폰 북스회프덴과 동맹을 맺고 그가 조직한 종교기사단인 검의 형제 기사단 및 벤드족의 지원을 받아 1219년 에스토니아의 대부분을 정복하였다. 참고로 6월 15일에 벌어진 린다니세 전투에서 덴마크군이 고전하고 있을 때 하늘에서 붉은 바탕의 하얀 십자가 모양의 깃발이 내려와 승리할 수 있었다는 전설에서 오늘날의 덴마크 국기가 유래하게 되었다. 이후 발데마르 2세는 에스토니아를 레발도르파트의 2개의 주교구로 나누고 지배하였으나 1222년 리가 주교 알브레히트 및 검의 형제 기사단과 갈등이 발생하였다. 이에 정복한 영토를 분할하여 발데마르 2세가 레반 주교구와 북부 에스토니아를 통치하게 되었고 검의 형제 기사단은 남부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덴마크는 남쪽으로는 홀슈타인과 동쪽으로는 에스토리아 북부에 이르며 그 영토가 크게 확장되었다.

발데마르 2세는 1215년에 이미 장남인 동명의 발데마르를 공동 통치자로 임명하였기 때문에 후계 구도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 했다. 그러나 1223년 사냥을 나갔다가 슈베린 백작 하인리히의 기습 공격을 받아 동명의 아들 발데마르와 함께 유폐당하고 말았다. 이후 덴마크 귀족들은 발데마르 2세 부자의 석방을 위해 오랫동안 협상을 벌여야 했고 1225년이 되어서야 막대한 배상금과 볼모를 제공하고 그동안 점령한 영토 중 뤼겐 섬과 에스토니아를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포기하는 조건으로 겨우 석방시킬 수 있었다. 이후 발데마르 2세가 1227년 반격을 시작했으나 오히려 보른회베드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에이데르 강 남쪽의 홀슈타인과 북독일 영토를 모두 상실했다. 이로서 덴마크와 독일의 경계선은 엘베 강에서 다시 에이데르 강으로 후퇴하였다.

2.3. 혼란 재개

덴마크는 본래 발데마르 2세에 의해 공동 통치자로 임명받았던 동명의 아들 발데마르가 1231년 요절하였기 때문에 그의 이복동생인 슐레스비히 공작 에리크 4세가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그리고 발데마르 2세는 다른 아들들에게도 봉토를 나눠졌는데 아벨이 슐레스비히 공작이 되었고 크리스토페르 1세가 롤란 섬 및 팔스테르 섬의 영주가 되었으며 크누트가 레발 공작이 되었다. 이 때문에 1241년 발데마르 2세가 사망하고 에리크 4세가 덴마크의 단독 통치자가 된 후 이들 형제들 사이의 내분이 발생하게 된다.

가장 먼저 슐레스비히 공작 아벨이 1237년 홀슈타인의 아돌프 4세의 딸 메히틸트와 결혼하였는데 이듬해 아돌프 4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들인 요한과 게르하르트의 후견인이 되었고 아벨이 아예 슐레스비히의 독립을 추진하였기 때문에 에리크 4세와 분쟁을 벌이게 되었다. 비록 에리크 4세와 아벨이 1244년 잠시 휴전을 했으나 1246년 에리크 4세가 아벨의 처가인 홀슈타인을 공격하면서 내전이 재개되었다. 1247년 아벨이 홀슈타인 세력을 이끌고 유틀란트 반도와 퓐 섬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여기에 에리크 4세의 다른 동생들인 크리스토페르 1세와 크누트까지 가세하였다.
이후 에리크 4세가 아벨, 크리스토페르 1세, 크누트를 모두 포로로 붙잡았고 누이 소피가 중재에 나서면서 겨우 내란이 종식되었지만 1250년 에리크 4세가 아벨의 거주지인 고트르프 성에 머물고 있을 때 아벨의 시종이 갑자기 에리크 4세를 살해해 버렸다. 비록 아벨이 에리크 4세의 시해와 무관하다고 맹세를 하면서 덴마크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었지만 재위 1년 반만인 1252년에 프리슬란트의 농민 반란을 진압하던 중 그 역시 살해당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에리크 4세의 시해 사건의 배후로 아벨을 의심한 사람들은 천벌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게 된다.

아벨이 죽은 후 왕위를 이어받은 크리스토페르 1세는 아벨이 에리크 4세의 시해 음모의 배후로 의심받는 것을 이용하여 아벨의 후손이 가진 상속권을 박탈하고자 에리크 4세의 성인 시성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에리크 4세가 치세 중에 교회의 면세 특권 폐지를 추진하면서 교회와 마찰을 빚었기 때문에 쉽게 승인되지 않았다. 또한 아벨의 아들인 발데마르 아벨센이 슐레스비히 공작이 되지 못하도록 방해하였으나 1253년 발데마르가 홀슈타인의 지원을 받아 슐레스비히를 장악하는 데 성공하면서 오히려 슐레스비히가 반독립 상태가 되었다.

그러던 중 크리스토페르 1세도 에리크 4세와 마찬가지로 교회에 세금을 부과하려고 했기 때문에 룬드 대주교 야코브와 마찰을 빚었다. 룬드 대주교 야코브는 크리스토페르 1세를 파문했고 1257년에는 크리스토페르 1세의 아들인 에리크 5세에 대한 공동 왕위에 대한 대관식 집전도 거부했다. 이에 크리스토페르 1세는 야코브를 체포하여 우스꽝스러운 복장을 입히고 행진을 시키며 망신을 준 후 감옥에 가둬 버렸다. 비록 야코브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다른 덴마크 주교들은 야코브의 성무 금지령을 이행하지 않았지만 크리스토페르 1세도 야코브의 도움 없이는 에리크 4세의 시성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아벨의 후손의 상속권을 제한할 수 없었고 결국 1257년 슐레스비히 공작 발데마르가 죽자 그의 동생인 에리크 아벨센이 슐레스비히 공작 지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

1259년 크리스토페르 1세가 만찬 중에 갑자기 독살당하면서 그의 아들인 에리크 5세가 10살의 나이에 덴마크 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그의 모후인 마르가레테가 섭정이 되었는데 마르가레테는 크리스토페르 1세의 정적이었던 룬드 대주교 야코브 및 슐레스비히 공작 에리크와 힘겨운 싸움을 해야했다. 또한 이러한 혼란을 틈타 뤼겐 지역에서 야로마르 2세가 벤드족을 규합하여 유틀란트 반도를 침공하였지만 마르가레테가 이를 효과적으로 막아내지 못하면서 1259년 링스테드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였고 이듬해에는 코펜하겐까지 약탈당해야 했다.

비록 벤드족이 야로마르 2세가 갑자기 암살된 이후 철수했지만 그동안 마르가레테의 세력이 많이 약화되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슐레스비히 공작 에리크가 1261년에 반란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슐레스비히 공작 에리크가 불리했지만 휴전 협상을 빌미로 시간을 번 사이 북독일 지역의 동맹군을 끌어들였고 결국 로헤데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마르가레테와 에리크 5세 모자를 포로로 붙잡는데 성공했다. 비록 마르가레테는 왕실 재산의 일부를 넘기는 조건으로 석방되었지만 에리크 5세는 계속해서 인질이 되었고 1264년이 되어서야 교황 우르바노 4세의 중재로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성년이 된 에리크 4세가 직접 덴마크를 통치하게 되면서 왕권 강화와 귀족 세력 억압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1272년 슐레스비히 공작 에리크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발데마르를 슐레스비히 공작으로 승인하지 않은 채 직접 슐레스비히를 통치하였다. 또한 1276년에는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아들인 에리크 6세를 후계자로 지명하는 데도 성공했다. 그러나 덴마크 귀족들이 반격에 나서면서 1282년 왕권 제한과 고대 관습의 존중, 그리고 귀족 권한의 보장을 그 내용으로 하는 덴마크 역사상 최초의 칙허장인 '혼드페스트닝(handfæstning)'을 승인해야만 했다. 또한 이듬해에는 덴마크 의회의 강요로 에리크의 아들 발데마르를 슐레스비히 공작으로 인정해야만 했다. 이후 에리크 5세는 1286년 스티그 안데르센과 야코브 닐센의 음모로 갑자기 살해당했는데 그들이 에리크 5세를 살해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에리크 5세의 갑작스런 암살 이후 그의 장남인 에리크 6세가 왕위를 계승했지만 그의 나이가 어려 그의 모후인 브란덴부르크의 아그네스가 섭정이 되었고 이로인해 북독일 귀족들의 덴마크에 대한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섭정 정부는 에리크 5세의 암살범인 스티그 안데르센과 야코브 닐센을 추방했으나 스티그 안데르센은 노르웨이 왕 에리크 2세의 지원을 받으면서 덴마크 일대를 오랫동안 약탈하고 다녔다. 또한 에리크 5세의 살해범 중에 인척이 있었던 룬드 대주교 옌스 그란이 이들을 공개적으로 지원하였기 때문에 교회와의 갈등도 시작되었다. 이에 에리크 6세는 동생인 에스토니아 공작 크리스토페르 2세에게 룬드 대주교 옌스 그란을 체포하여 투옥하도록 했고 노르웨이와 강화 조약을 맺은 뒤 스티그 안데르센도 격파했다.

그렇지만 2년뒤 룬드 대주교 옌스 그란이 탈출하여 교황 보니파시오 8세에게 에리크 6세를 고발하는 일이 일어났다. 보니파시오 8세가 에리크 6세를 파문하고 옌스 그란에게 막대한 배상금을 지급하도록 했기 때문에 에리크 6세가 보니파시오 8세에게 선처를 호소하여 1303년 배상금의 8할을 탕감받는 대신에 옌스 그란을 다시 룬드 대주교로 복귀시키는 타협이 겨우 이루어졌다. 이렇게 내정이 안정을 되찾자 에리크 6세는 북독일을 침공하여 1304년 독일왕이자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1세로부터 엘베 강의 북쪽 지역을 넘겨받았다.

한편 에리크 6세는 평소 마상 시합을 좋아했고 매일 유흥에 젖은 생활을 했기 때문에 점점 왕실 재정이 바닥이 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에리크 6세는 각종 세금을 만들어 농민들과 귀족들에게 부과했고 그걸로도 모자랐기 때문에 에리크 6세는 왕실 재산을 팔거나 담보로 독일 귀족들에게 돈을 빌리기 시작했다. 더구나 1312년 덴마크에 대기근이 닥쳤을 때도 세금 징수의 강도를 낮추지 않아 많은 반란이 일어났으나 에리크 6세는 전혀 개의치 않은 채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했고 반란에 가담한 귀족들을 처형하며 그 재산을 몰수했다.

이제 덴마크의 점점 재정 상황은 악화되기만 하였고 이에 에리크 6세는 1313년 왕실의 모든 재산을 슐레스비히에 저당을 잡혔고 1315년부터 1317년까지 다시 대기근이 발생하자 퓐 섬까지 독일 귀족들에게 저당을 잡혀야 했다. 이렇게 에리크 6세의 방만한 경영으로 인해 덴마크는 거의 파산 일보 직전까지 갔고 교회, 농민, 귀족들의 저항도 매우 극심해졌으며 유일한 치적이었던 북독일의 획득 영토도 로스토크와 뤼겐을 제외하고는 모두 상실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리크 6세는 1319년 죽을 때까지 낭비벽을 고치지 못했기 때문에 로스토크도 메클렌부르크에게 넘기고 스코네도 저당을 잡혀야 했다.

1319년 에리크 6세가 사망하면서 그의 동생인 크리스토페르 2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본래 크리스토페르 2세는 형인 에리크 6세가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유력한 왕위계승 후보자로 손꼽혔으나 에리크 6세의 수탈 정책에 반발한 귀족들의 반란 세력에 가담했기 때문에 덴마크에서 추방당해야 했다. 이후 비록 형이 사망한 뒤 귀국하여 덴마크 왕위에 오르기는 성공했지만 왕권이 매우 미약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왕권을 극도로 제한하는 내용의 '대헌장(덴마크어 Handfæstning)'에 서명해야만 했다. 이제 덴마크 주교들은 로마교황의 승인없이는 추방되거나 투옥되지 않게 되었고 면세 특권도 얻었다. 또한 덴마크 귀족들도 자신의 소작농에 대한 수수료를 마음대로 올릴 수 있었고 전쟁에 참여해야하는 의무도 폐지되었다.

대헌장으로 인하여 이제 크리스토페르 2세는 귀족과 주교의 동의없이는 어떠한 결정도 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국왕임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크리스토페르 2세는 1321년에 벌어진 북독일과의 전쟁을 계기로 왕권 강화를 추진하여 아들 에리크를 공동 통치자로 선언하고 새로운 세금 제도를 만들었기 때문에 덴마크 귀족 및 주교들과 갈등이 일어났다. 결국 1326년 홀슈타인-렌즈부르크 백작 게르하르트 3세 및 홀슈타인-플뢴 백작 요한 3세를 중심으로 귀족들의 반란이 일어나 크리스토페르 2세가 폐위되었고 대신에 게르하르트 3세의 조카인 슐레스비히 공작인 발데마르 3세가 왕으로 선택되었다. 발데마르 3세는 게르하르트 3세의 누이인 아델하이트의 아들이자 옛 아델 왕의 후손이었다.

즉위 당시 발데마르 3세의 나이가 12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게르하르트 3세가 섭정이 됐다. 또한 게르하르트 3세는 덴마크 왕위와 슐레스비히 공작위를 동일 인물이 겸하지 못하게 하는 이른바 '발데마르 헌장(덴마크어 Constitutio Valdemariana)'을 통과시켜 발데마르 3세의 슐레스비히 공작령까지 넘겨받았다. 이렇게 하여 게르하르트 3세가 유틀란트 반도와 슐레스비히 지역을 차지했고 요한 3세는 셸란 섬과 퓐 섬을 사유화했다. 대신에 덴마크는 이제 왕이 유명무실해진 채 귀족들의 세상이 되었고 이로 인해 농민들이 과중한 세금에 시달리면서 연이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비록 덴마크가 혼란스러워지자 크리스토페르 2세가 왕으로 복위했지만 여전히 아무런 실권이 없었다. 대신에 왕위에서 밀려난 발데마르 3세는 다시 슐레스비히 공작이 되었다.

1331년 게르하르트 3세와 요한 3세가 서로 대립하였기 시작했고 크리스토페르 2세가 요한 3세를 지원했으나 그 해 11월 다네비르크 전투에서 요한 3세가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이제 요한 3세는 게르하르트 3세의 봉신이 되어야 했고 크리스토페르 2세는 롤란 섬으로 유폐되었다가 1332년 사망했다. 이후 덴마크는 왕위가 비어있는 상태가 8년간이나 지속되었고 덴마크의 땅을 저당잡은 독일 귀족들이 덴마크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1332년에서는 스코네에서는 반란이 일어나 스웨덴의 왕에게 자신을 통치해줄 것으로 요구하는 등 덴마크는 국가로서의 통일성마저 유지하지 못할 정도로 큰 혼란을 겪어야 했으나 크리스토페르 2세의 막내 아들인 발데마르 4세가 등장하면서 부흥에 성공하게 된다.

2.4. 덴마크의 부흥과 칼마르 동맹

덴마크 왕 크리스토페르 2세의 막내 아들로 태어난 발데마르 4세는 부왕 크리스토페르 2세가 폐위되고 덴마크가 홀슈타인의 독일 출신 백작인 게르하르트 3세와 요한 3세의 지배를 당하면서 1328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에게로 망명을 떠나야 했다. 이후 발데마르 4세는 루트비히 4세의 궁정에서 성장했고 18세가 된 1338년부터 루트비히 4세의 아들인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루트비히 5세의 도움을 받아 덴마크를 되찾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이때 유틀란트 반도의 지주인 닐스 에베센이 1340년 게르하르트 3세를 암살하는 데 성공했고 이어서 비보르 의회에서 발데마르 4세를 왕으로 선출했다. 비록 발데마르 4세를 왕으로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닐스 에벨센은 같은 해 11월에 암살당했지만 발데마르 4세는 요한 3세와 협정을 맺고 덴마크 왕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아버지 크리스토페르 2세와 같은 허수아비 왕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왕권을 제한하는 내용의 대헌장 서명은 거부하였다.

이제 발데마르 4세가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저당잡힌 덴마크 영토를 되찾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이 때문에 우선 죽은 슐레스비히 공작이자 전임 덴마크 왕이던 발데마르 3세의 누이 헬비그와 결혼하여 북유틀란트 반도의 북부를 차지했고 북유틀란트 북부 지역의 농민들에게 중과세를 부과하여 그 돈으로 나머지 북유틀란트 반도를 모두 되찾는데 성공했다. 다음 차례는 셸란 섬이었는데 먼저 로스킬레 주교의 도움을 받아 코펜하겐을 확보하였고 이어서 홀슈타인 출신의 독일 귀족들을 몰아내며 셸란 섬 전체에 대한 장악에 나섰다. 그리고 도중에 중간에 돈이 부족해지자 1346년 프로이센의 튜튼 기사단과 협상을 벌여 에스토니아를 매각하였고 그 자금을 이용하여 셸란 섬과 퓐 섬의 대부분을 되찾게 되었다.

1346년 보헤미아 왕인 카를 4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를 폐위시키고 새로운 황제로 선출되었는데 이듬해 루트비히 4세가 사망하면서 이제는 루트비히 4세의 아들인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루트비히 5세와 대립하게 되었다. 이에 발데마르 4세는 1349년부터 북독일 상황에 개입하여 이듬해 루트비히 5세와 카를 4세의 화해를 주선하고 그 대가로 북독일의 뤼겐과 로스토크에 대한 권리를 재확인 받았다. 또한 1355년에는 스웨덴에서 내분이 발생하자 스웨덴의 망누스 4세를 지원하기로 하고 자신의 막내딸인 마르그레테를 망누스 4세의 아들이자 노르웨이 국왕인 호콘 6세와 결혼시키기로 하였으나 곧 그를 배신하고 스웨덴령이 되었던 스코네 지방만 1360년에 다시 탈환했다. 그러나 이후 다시 망누스 4세와 화해하고 1363년 마르그레테를 호콘 6세와 결혼시켰다.

이렇게 발데마르 4세가 덴마크의 영토를 영토를 성공적으로 수복했으나 그 과정에서 지나치게 중과세를 부과해서 원성이 커졌다. 더욱이 1349년부터 흑사병이 창궐하여 인구가 극감하면서 농사를 지을 사람이 부족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세금은 이전보다 더 과중해졌기 때문에 참다 못한 유틀란트 귀족들이 1350년 홀슈타인 백작들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 비록 1354년 발데마르 4세가 칼룬보르 의회를 통해서 통치권을 재확인 받아 군대를 증강시키며 유틀란트 반도의 반란은 진압하는 데 성공했으나 퓐 섬에서도 연이어 반란이 일어났다. 그리고 발데마르 4세는 퓐 섬의 반란군과 협상을 하는 척하면서 오히려 암살을 시도하여 많은 비난을 샀기 때문에 유틀란트 반도에서 다시 한번 반란이 일어났다.

한편 발데마르 4세가 1360년 스코네를 되찾은 데 이어 이듬해인 1361년에는 스웨덴의 동쪽에 있는 고틀란드의 비스뷔를 포함하여 섬 대부분을 정복하면서 발트해 무역을 거의 장악하자 북독일의 한자동맹 도시들과도 마찰이 일어났다. 여기에 스웨덴에서 메클렌부르크 공작 알브레히트 2세의 동명의 아들인 메클렌부르크의 알브렉트가 망누스 4세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메클렌부르크와 스웨덴이 반(反) 발데마르 4세 동맹에 가담하였다. 그리고 계속해서 발데마르 4세와 맞서고 있던 홀슈타인과 유틀란트 반도의 귀족들도 여기에 가세하였다.

결국 발데마르 4세가 1368년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어쩔 수 없이 1370년 슈트랄준트 조약을 체결하고 한자동맹에게 발트해를 둘러싼 자유 무역의 특혜를 인정해야만 했다. 그리고 발데마르 4세는 1372년 덴마크로 되돌아온 후 마지막 반격을 위해서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에게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귀족들에 대한 파문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교황사절단이 도착하기도 전인 1375년 10월 사망하고 말았다. 결정적으로 가장 문제는 발데마르 4세의 유일한 아들인 롤란 공작 크리스토페르가 이미 1363년 사망하였기 때문에 덴마크에는 더이상 왕위를 계승할 적장자가 없다는 것이었다.

2.4.1. 덴마크-노르웨이 탄생과 칼마르 동맹

덴마크는 1375년 발데마르 4세가 사망한 후 정통성 있는 왕위계승 후보자가 없기 때문에 덴마크 왕위가 비어있는 대공위 시대가 한동안 이어졌다. 그리고 처음에는 발데마르 4세의 딸인 잉에보르가 메클렌부르크 공작 알브레히트 2세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하인리히 3세와 결혼했기 때문에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알브레히트 4세가 할아버지인 메클렌부르크 공작 알브레히트 2세의 후광에 힘입어 강력한 왕위계승권자로 부상했다.

하지만 독일의 메클렌부르크 공작 가문이 이미 스웨덴 왕위를 차지한 상태에서 더 이상 스칸디나비아에 대한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덴마크 귀족들이 이를 거절하고 노르웨이 국왕 호콘 6세와 결혼한 발데마르 4세의 딸 마르그레테의 아들인 올루프 2세를 1376년 덴마크 왕으로 선출했다. 그리고 1380년 노르웨이의 호콘 6세가 사망하자 올루프 2세가 노르웨이 왕 올라브 4세로 즉위하면서 이제 덴마크와 노르웨이가 동군연합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올루프 2세의 나이가 아직 너무 어렸기 때문에 마르그레테가 섭정이 되었다.

본래부터 마르그레테도 스웨덴의 망누스 4세의 왕위를 빼앗은 메클렌부르크의 알브렉트를 상대로 자신의 아들인 올루프 2세가 망누스 4세의 외손자임을 내세워 스웨덴 왕위 계승권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올루프 2세가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왕이 되어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게 되었고 스웨덴 사람들도 올루프 2세가 왕이 되는 것에 대하여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이 올루프 2세에 의해 하나로 통합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올루프 2세가 1387년 17세의 나이에 갑자기 사망하면서 무산되었다.

이후 마르그레테는 자신의 외교적 역량을 총동원하여 언니 잉게보르그의 외손자이자 포메라이나 공작 바르티슬라프 7세의 아들인 포메른의 에리크를 양자로 삼아 덴마크 왕위를 계승시키고 덴마크 왕 에리크 3세로 즉위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노르웨이는 국가자문위원회에 의해 통치되었지만 사실상 마르그레테가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모든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1389년 알브렉트와 대립하던 스웨덴 귀족들의 요청에 따라 사망한 스웨덴의 실력자 부 욘손 그리프의 막대한 영지까지 대부분 넘겨받는데 성공하였다. 이 때부터 마르그레테는 스웨덴의 '여군주이자 통치자'로 선포되었고 1389년 2월 스웨덴을 공격하여 오슬레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알브렉트도 생포하는 데도 성공하였다.

이후 알브렉트는 6년 간이나 스코네의 린드홀름 성에 감금되어야 했고 1395년 거액의 보상금을 받는 조건으로 스톡홀름을 공식적으로 포기하게 된다. 그 사이 마르그레테가 이미 스웨덴의 통치권을 장악하였기 때문에 1396년 포메른의 에리크를 노르웨이 왕위와 스웨덴 왕위에 모두 즉위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포메른의 에리크는 노르웨이 왕으로서는 에리크 3세, 스웨덴 왕으로서는 에리크 13세로 각각 명명된다. 이어서 마르그레테는 1397년 6월 스웨덴의 동남부에 있는 칼마르에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의 3개국 귀족 의회를 소집하여 3개국의 연합안을 통과시키는데 성공하면서 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이 서로 동군연합 상태가 되는 '칼마르 동맹(Kalmar Union)'이 성립되었다. 그리고 포메른의 에리크가 3개국의 통합 왕이 되어 같은해 6월 7일에 3개국 합동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비록 공식적으로는 포메른의 에리크가 통합 왕이었지만 여전히 마르그레테가 실질적인 통치자로 군림했다. 그렇지만 마르그레테는 칼마르 동맹의 3개국 통합 헌법을 비준시키는 데는 실패하여 칼마르 동맹은 하나의 국가가 아닌 국가 연합체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스칸디나비아 3개국은 칼마르 동맹을 결성한 이후에도 여전히 독자적인 귀족 의회를 가지며 고유의 법과 관습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일반적으로 칼마르 동맹의 주도권은 덴마크가 행사했고 나머지 노르웨이와 스웨덴은 종속적인 지위에 머물렀다. 이렇게 스칸디나비아를 하나로 통합시킨 업적을 남긴 마르그레테는 마지막으로 덴마크 남부의 홀슈타인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하여 전쟁을 벌이던 중 1412년 갑자기 사망하였다.

2.4.2. 칼마르 동맹 출범

칼마르 동맹

2.4.3. 칼마르 동맹 해체와 덴마크-노르웨이

덴마크-노르웨이 왕국

3. 근대

3.1. 덴마크-노르웨이 해체와 빈 체제

그동안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은 1814년 3월 31일 파리가 먼저 항복하고 4월 11일 나폴레옹 1세도 퇴위하면서 제6차 대프랑스 동맹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빈에서 전후처리를 위한 빈 회의가 시작되었고 프랑스 혁명 이전으로 유럽 질서를 되돌리자는 대원칙은 합의되었지만 주요 승전국 간의 이해 관계가 첨혜하게 대립되면서 협상이 장기화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1815년 2월 26일 나폴레옹 1세가 유배지였던 엘바 섬에서 탈출하여 3월 20일 프랑스 황제로 복위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협상이 갑작스럽게 급물살을 탔고 6월 9일 '빈 조약'이 체결되면서 이른바 '빈 체제'가 성립되었다. 그리고 나폴레옹 1세도 6월 18일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프로이센 동맹군에게 최종적으로 패배하면서 다시는 재기하지 못하게 되었다.

한편 빈 협상에서 덴마크의 외무장관인 닐스 로젠크란츠가 대표단으로 참석했고 프레데리크 6세도 빈에 직접 머무는 성의를 보였다. 하지만 덴마크는 가장 마지막에 반(反) 프랑스 동맹으로 돌아선 만큼 발언권이 매우 미약했다. 주요 승전국인 영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가 대립하기 시작하자 패전국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가 발언권을 강화시키며 스페인, 포르투갈, 스웨덴과 공조를 이뤘지만 덴마크는 여기에서도 빠지고 말았다. 결국 빈 조약을 통해서 스웨덴의 노르웨이 영유가 공인되었지만 당초 덴마크가 스웨덴으로부터 양도받았던 스웨덴령 포메라이나가 최종적으로 프로이센의 차지가 되었다. 그 대신 덴마크가 얻은 것이라고는 하노버로부터 양도받은 독일의 작은 지역인 작센-라우엔부르크 공국 뿐이었다.

3.2. 크리스티안 8세 시대

1839년 프레데리크 6세가 사망하자 예정대로 그의 사촌인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가 덴마크 왕위를 물려받고 크리스티안 8세로 즉위했다. 비록 크리스티안 8세는 많은 자유주의자들의 기대 속에서 즉위했지만 이들의 염원을 저버리고 전제군주정을 추구하여 많은 반발을 샀다. 그러나 이미 1830년 프랑스에서 '7월 혁명(July Revolution)'이 일어나고 같은 해 네덜란드 남부도 벨기에로 독립는 '벨기에 혁명(Belgian Revolution)'에 성공하면서 자유주의 물결이 점차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1848년 전 유럽을 뒤흔드는 자유주의 혁명으로 발전하지만 정작 덴마크는 그 직전인 1848년 1월에 크리스티안 8세가 사망하면서 자유주의 혁명을 피하게 된다.

한편 아이슬란드는 874년 노르웨이의 잉골프 아르나르손이 최초로 정착했고 930년 자치 의회인 '알팅그(Althing)'가 성립되면서 '아이슬랜드 자유국(Icelandic Commonwealth)'이 건국되었다. 그리고 1262년 노르웨이에 합병당한 뒤에도 알팅그를 유지했지만 1800년에 최종 폐지되었다. 그러나 1814년 킬 조약을 통해서 노르웨이와 덴마크 사이의 동군연합이 해체되면서 이제 아이슬란드는 노르웨이의 영토에서 벗어난 채 덴마크의 영토로 탈바꿈하였고 1843년 3월 알팅그가 재건되면서 자치제가 부활하였다.

이와 별도로 덴마크는 인도 식민지 일부를 200년간 유지하고 있었다. 인도 식민지는 '덴마크 동인도 회사(덴마크어 Østindisk Kompagni)'에 의해 처음으로 개척되었으나 1729년 덴마크 동인도 회사가 최종 해산된 이후에는 '덴마크 아시아 회사(덴마크어 Asiatisk Kompagni)'가 그 권리를 넘겨받았다. 그리고 1772년 덴마크 아시아 회사가 독점권을 상실한 뒤 인도 식민지는 덴마크 왕실 소유가 되었지만 크리스티안 8세는 인도 식민지 중에서 타밀나두의 타랑감바디를 1839년에, 서벵골의 세람푸르를 1845년에 각각 영국에게 매각하였다. 이에 따라 덴마크의 인도 식민지는 니코바르 제도만 남게 되었는데 여기도 1868년 영국에게 매각된다.

다시 돌아와서, 왕위문제가 있었는데 크리스티안 8세에게는 왕위를 이어받을 적장자인 프레데리크 7세가 있었지만 그는 첫 번째 부인인 프레데리크 6세의 딸 빌헬미나 마리아와 1837년 이혼했고 2번째 부인인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카롤리네 마리안네와도 1846년 이혼한 상태였다. 더구나 2번의 결혼에도 불구하고 자식을 얻지 못했고 너무 병약하게 오래 살지 못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에 따라 덴마크 왕위계승에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한 크리스티안 8세는 왕위계승법을 변경하고자 했다. 그 결과 크리스티안 8세의 여동생인 루이세 샤를로테가 빌헬름 폰 헤센-카셀과 결혼하여 낳은 딸인 루이제 폰 헤센-카셀에게 왕위계승권이 넘어가면서 장차 루이제 폰 헤센-카셀의 남편인 슬레스비-홀스텐-쇤더보르-글뤽스보르 가문의 크리스티안(훗날의 크리스티안 9세)에게 덴마크 왕위계승권이 부여된다.

3.3. 프레데리크 7세 시대와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

1848년 1월 크리스티안 8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프레데리크 7세가 새로운 덴마크 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프레데리크 7세는 즉위 직후 1848년을 휩쓴 유럽의 자유주의 혁명 물결 속에서 자유주의 내각을 지명하고 1849년 6월 양원제 의회를 규정한 새로운 헌법을 비준하면서 절대왕정의 덴마크를 입헌군주제 국가로 탈바꿈시켰다. 한편 프레데리크 7세는 2번의 이혼 이후 1850년 8월에는 평민 출신의 발레 무용수 루이제 크리스티네 라스무센과 3번째 결혼을 강행하며 귀족들의 거센 반발을 사기도 했지만 여전히 왕위를 이어받을 자식은 태어나지 않았다.

한편 유틀란트 반도의 아이다 강 북부의 슐레스비히 공국은 1157년 슐레스비히 공작 발데미르 1세가 덴마크 왕위에 오른 이후부터 덴마크와 동군연합 상태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1459년 슐레스비히 남쪽의 홀슈타인 공국도 신성로마제국의 봉토로 남겨둔다는 조건 아래 덴마크 왕실의 소유가 됐다. 이후부터 슐레스비히 공국과 홀슈타인 공국인 하나의 공동체가 되면서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국으로 통칭되기 시작했고 1544년 덴마크 왕실의 올덴부르크 가문(House of Oldenburg)과 그 방계인 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House of Holstein-Gottorp)이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국을 공동 통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2차 북방 전쟁(Second Northern War, 1655년 ~ 1660년)을 통해 체결된 1658년의 '로스킬레 조약(Treaty of Roskilde)'과 '코펜하겐 조약(Treaty of Copenhagen)'을 통해서 홀슈타인-고토르프 공국이 덴마크로부터 분리되었다.

이후 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이 유명의 명문 가문이 되었고 외가 혈통을 통해 1751년에는 스웨덴 왕인 아돌프 프레드리크를, 1762년에는 러시아의 차르인 표트르 3세를 각각 배출하기도 했다. 특히 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의 직계 혈통인 표트르 3세가 러시아 차르가 되면서 러시아와 홀슈타인-고토르프 공국의 동군연합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1773년 러시아와 덴마크 사이에 체결된 '차르스코예 셀로 조약(Treaty of Tsarskoye Selo)'을 통해서 덴마크는 왕실 가문의 발상지인 올덴부르크 백작령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는 대신에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국에 대한 온전한 권리를 획득하였다. 그리고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국은 1815년 덴마크가 빈 조약으로 획득한 작센-라우엔부르크 공국과 함께 추가적으로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했다.

그렇지만 슐레스비히 공국과 홀슈타인 공국, 작센-라우엔부르크 공국은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차이점이 많았다. 본래 신성로마제국의 봉토였던 홀슈타인 공국과 작센-라우엔부르크 공국은 나폴레옹 전쟁 동안 해체된 신성로마제국을 대신하여 1815년 빈 체제로 성립된 '독일 연방(독일어 Deutscher Bund)'에 가입했지만 신성로마제국이 봉토가 아니었던 슐레스비히 공국은 독일 연방에 소속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슐레스비히 공국과 홀슈타인 공국은 오랫동안 단일 공국처럼 생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으로 민족주의 사상이 전파되자 슐레스비히 공국에 살던 사람 중 덴마크인들은 슐레스비히 공국을 분리시켜 덴마크에 아예 합병시키자고 주장했고 독일인들은 슐레스비히 공국마저 독일 연방에 소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던 중 1848년 1월 프레데리크 7세가 새로운 덴마크 왕으로 즉위하자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국에서 대표단을 파견하여 슐레스비히 공국도 독일 연방에 속하게 해달라고 청원하였으나 거절당했다. 그러자 슐레스비히 공국 안의 독일인들이 반발하며 봉기를 일으켰고 렌츠부르크를 점령한 후 킬에서 임시정부를 구성했다. 그리고 덴마크로부터 독립하여 독일 연방에 가입할 것을 결정하고 독일 연방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자 독일 연방의 의회가 군대 파견을 결정하였고 특히 빈 회의 당시부터 슐레스비히를 탐냈던 프로이센이 가장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First Schleswig War)이 시작되었다.

1848년 3월 31일 프로이센을 비롯한 독일 연방에서 파견한 군대가 도착하기 이전에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서 7,000명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병사들이 먼저 플렌스보리(독일명 플렌스부르크)를 점령했으나 뒤이어 덴마크 군 7,000명이 나타나자 4월 9일 바우 전투(Battle of Bov)에서 덴마크 군이 승리하였다. 하지만 증원군으로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에른스트 폰 브랑겔이 이끄는 프로이센 군 12,000명이 나타나자 4월 23일 슐레스비히 전투(Battle of Schleswig)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이제 덴마크는 이제 단순히 슐레스비히를 내주는 것을 넘어서 유틀란트 반도까지 프로이센 군에게 위협을 당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다만 프로이센과 독일 연방의 덴마크 공격은 국제적인 지원없이 이루어졌다는 점이 덴마크에게 유일한 희망이었다.

당시 빈 체제는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서 퍼져나간 프랑스 혁명의 자유주의 사상과 나폴레옹 1세의 지배에 맞서기 위해 자연 발생한 민족주의를 억압하는 것을 대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유럽의 주요 강대국들은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슐레스비히의 분리 독립을 원하지 않았다. 이에 독일 연방의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가 지원을 거절했고 러시아도 프로이센에게 병력을 철수하지 않으면 동맹을 파기하겠다고 외교적 압박을 가했으며 영국도 자신의 중재 제의를 덴마크에게 거절당하기는 했지만 함대를 파견하여 프로이센에 대한 무력시위에 들어갔다. 심지어 덴마크의 오랜 앙숙인 스웨덴조차 덴마크를 지원하기 위해 병력을 파견하기도 했다.

그 사이 독일에서도 1848년 '3월 혁명(독일어 Märzrevolution)'이 일어나면서 빈 체제를 주도했던 오스트리아의 총리인 클레멘스 벤첼 로타어 폰 메테르니히-비네부르크가 실각했고 프로이센에서도 자유주의 내각이 들어섰다. 그리고 5월에는 독일의 통일을 위한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독일어 Frankfurter Nationalversammlung)'가 결성되어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도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한 반감이 심했기 때문에 프로이센의 자유주의 내각과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에 대한 불만이 많아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에서 이탈하고자 했다. 다만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철수 명령에도 불구하고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에른스트 폰 브랑겔은 독일 연방의 의회의 명령을 따르겠다며 항명하였다.

3.3.1. 간헐적 휴전과 프로이센의 이탈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 자체도 1848년 5월 28일의 니뵐 전투(Battle of Nybøl), 6월 5일 디브뵐 전투(Battle of Dybbøl)에서 덴마크 군이 승리를 거두면서 프로이센에게 그리 유지하지 않게 되었다. 결국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에 대한 반감과 국제적인 압박 속에서 8월 26일 덴마크와 '말뫼 협정(Convention of Malmö)'을 체결했다. 비록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가 반발했지만 프로이센의 결정을 뒤집을 힘이 없었다. 그리고 10월에 '런던 협상(London conference)'을 통해서 덴마크는 슐레스비히를 홀슈타인으로부터 분리시키고 홀슈타인이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가 추진하던 통일된 독일 제국에 속하는 대신에 슐레스비히는 독자적인 헌법을 갖는 조건으로 덴마크가 지배하는 방안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런던 협상의 최종안으로 영국과 러시아가 슐레스비히의 분리를 제안했지만 덴마크가 강력하게 반대했기 때문에 협상이 무산되고 1849년 2월 23일 전쟁이 재개되었다. 이제 슐레스비히-홀슈타인과 독일 연방의 61,000명의 군대가 유틀란트 반도로 진격하자 덴마크 군은 유틀란트 반도의 북부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7,000명의 수비 병력을 유틀란트 반도 동부의 프레데리시아에 남겼고 인근의 퓐 섬에 있는 예비대의 지원을 받으며 1849년 7월 6일 프레데리시아 전투(Battle of Fredericia)에서 승리하였다. 이에 따라 7월 10일 또 다른 휴전 조약이 체결되었고 그 사이 독일에서는 통일 독일의 황제를 제안받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이를 거절한 채 오히려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에 대한 탄압에 나서면서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가 1849년 6월 18일 해산되었다.

독일 자체에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내세운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의 통일 노력이 좌절되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를 그대로 덮어 놓은 채 전쟁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자는 최후의 방안을 제안했지만 그동안 덴마크의 슐레스비히 영유를 보장해주었던 러시아가 거부의 뜻을 밝혔다. 이미 러시아는 헝가리가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을 추진하자 오스트리아의 요청을 받아 군사 개입하여 1849년 8월에 모두 진압한 바 있었기 때문에 여차하면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에도 개입할 태세였다.

본래부터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에 거리를 두고 있던 오스트리아도 헝가리의 분리 독립을 막아내는 데 러시아의 도움을 받은 만큼 러시아와 입장을 같이 했고 영국도 덴마크가 계속해서 전쟁에 휩싸이는 동안 발트 해 무역에 방해를 받았기 때문에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의 조속한 종식을 원하고 있었다. 이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외교적인 고립을 타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1848년 '2월 혁명(French Revolution of 1848)' 이후 나폴레옹 1세의 조카임을 내세워 대통령에 당선된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동맹을 맺는 것 뿐이었으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혐호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1850년 7월 2일 덴마크와 프로이센 사이에 '베를린 조약(Treaty of Berlin)'이 체결되면서 덴마크는 장차 독일 연방의 승인 여부와 무관하게 홀슈타인에 대한 지배 권리를 인정받았다.

3.3.2. 덴마크의 승리

그 사이 1850년 4월 독일 연방군의 총사령관이 카를 빌헬름 폰 빌리젠으로 교체되었으나 덴마크 군이 7월 25일 이스테드 전투(Battle of Isted)에서 승리를 거뒀다. 비록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군이 결정적인 피해를 입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스테드 전투는 이제 전황이 덴마크에게 완전히 기울었음을 상징하는 전투가 되었다. 그리고 국제 사회가 다시 중재에 나서면서 8월 2일 영국, 프랑스, 러시아, 스웨덴이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 대한 덴마크의 권리를 인정하는 '런던 의정서(London Protocol)'를 날인했고 나중에 오스트리아도 추가로 서명하였다. 11월 카를 빌헬름 폰 빌리젠이 최후의 반격에 나서서 유틀란트 반도에 대한 재공세를 시도했으나 1850년 11월 24일의 로토르프 전투(Battle of Lottorf)에서 덴마크 군에게 패배하면서 좌절되었다.

이후 지리한 강화 협상이 2년 간이나 이어졌고 1852년 5월 유럽의 5대 강대국인 오스트리아, 프랑스, 프로이센, 러시아, 영국과 함께 덴마크 및 스웨덴까지 날인한 새로운 런던 의정서가 발표되었다. 이를 통해서 덴마크의 봉토인 슐레스비히 공국과 독일 연방 소속의 홀슈타인 공국 및 작센-라우엔부르크 공국 모두 덴마크와 독일 연방 중 어느 하나에 병합되지 않은 채 자치권을 유지하고 덴마크 왕이 군주를 겸하는 동군연합이 되기로 결정되었다. 이와 별도로 왕위를 물려받을 자식이 없던 프레데리크 7세가 사망한 뒤 왕위 계승 전쟁이 재개될 것을 우려하여 프레데리크 7세의 후계자로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 가문의 크리스티안이 국제적으로 공인되었다.

3.3.3. 덴마크의 자유주의 헌법의 갱신과 올덴부르크 왕조의 단절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을 통해서 덴마크는 홀슈타인 공국, 슐레스비히 공국, 작센-라우엔부르크 공국을 지켜냈지만 덴마크 입장에서는 슐레스비히 공국의 병합에 실패한 것에 불만을 가졌고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국에는 여전히 많은 독일인들이 거주했기 때문에 분쟁 요소는 여전히 존재했다. 또한 덴마크에 비준되었던 자유주의 헌법이 이들 세 공국에는 적용되지 않으면서 이 지역은 여전히 절대왕정 체제를 유지하게 되었다. 이에 프레데리크 7세는 1855년 10월 덴마크의 헌법을 세 공국에도 적용시키려고 했지만 1858년 2월 독일 연방의 의회에서 독일 연방에 속하는 홀슈타인 공국 및 작센-라우엔부르크 공국에 대한 덴마크 헌법의 비준을 거부했다.

이에 따라 덴마크 왕국과 슐레스비히 공국은 덴마크 헌법이 적용되었지만 홀슈타인 공국과 작센-라우엔부르크 공국은 덴마크 헌법이 적용되지 않은 채 별도의 헌법도 제정되지 않는 어정쩡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러자 프레데리크 7세는 슐레스비히 공국에 대한 지배력 만이라도 확고히 하기 위하여 1863년 11월 이른바 11월 헌법(덴마크어 Novemberforfatningen)을 제정하여 슐레스비히 공국을 직접적으로 덴마크 왕국에 병합시키지 않은 채 연합 의회를 구성하여 양 국을 통치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은 11월 15일 프레데리크 7세가 11월 헌법에 서명하기도 전에 사망하고 말았다.

이후 예정되로 슬레스비-홀스텐-쇤더보르-글뤽스보르 가문의 크리스티안이 새로운 덴마크의 왕인 크리스티안 9세로 즉위하면서 1448년부터 시작된 오랜 덴마크의 올덴부르크 왕조가 단절되고 올덴부르크의 방계의 방계인 '글뤽스보르 왕조(Lycksborgske slægt)'를 개창되었다. 그리고 크리스티안 9세가 프레데리크 7세가 추진한 11월 헌법에 서명하게 되지만 이것이 슐레스비히 공국을 덴마크 왕국에 병합시키지 않겠다는 런던 의정서를 위반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크리스티안 7세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국의 계승을 반대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에 평소부터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국을 눈독 들이고 있던 올덴부르크 왕가의 또 다른 방계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아우구스텐부르그 가문의 프레데리크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국에 대한 상속권을 주장하고 나서면서 1864년 프로이센에 의한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Second Schleswig War)이 발발하고 만다. 이 전쟁에서 독일에 패배한 덴마크는 사실상 약소국으로 전락했고, 독자적으로 무력을 투사하기 힘든 지경에 몰리게 된다.

4. 현대

4.1. 20세기 초반의 덴마크

전쟁에서 패배한 덴마크는 홀슈타인과 슐레스비히를 상실했다. 사실상 유틀란트 반도 주변의 약소국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이후 올덴부르크가를 대신해서 글뤽스부르흐가(家)의 크리스티안 9세(재위 1863∼1906)가 왕위에 올라 왕조를 열었고, 산업화와 내정을 다지면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과 경제-외교적인 협조를 다졌다. 20세기 초부터는 사회복지제도를 정비하였고,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중립을 지켰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한 이후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베르사유 조약으로 북슐레스비히를 덴마크령으로 회복하는데 성공했다.

4.2. 20세기 중후반의 덴마크

그러나 이는 독일의 치열한 복수심을 자극하여, 결국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침공을 받게 되었다. 덴마크 국경수비대는 압도적인 독일군에 저항하였으나 결국 전력의 열세로 6시간만에 항복하고 덴마크 영토는 나치 독일의 통제에 들어갔다. 크리스티안 10세는 나름 저항을 하였으나 1944년까지 덴마크는 독일의 통제하에 있었다. 1944년 6월 아이슬란드가 덴마크령에서 독립하였다. 1945년 나치 독일이 패망한 이후 덴마크는 해방되었으며, 독일에 짓밟힌 경험을 계기로 전통적인 중립정책을 깨고 NATO에 가입하였다.

4.3. 현황

이후 덴마크는 사회복지제도를 좀 더 발전시키고, 다른 스칸디나비아 국가와 협력을 다지고 있다. 그린란드의 기지를 미국에 제공하였고, 도널드 트럼프가 그린란드를 미국령으로 판매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지만, 거절하였다.

5. 역대 덴마크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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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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