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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대관식을 받은 적이 없는 로마왕이지만 사실상 황제였던 인물
}}}}}} ||필리프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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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왕 필리프 Philipp von Schwaben | |||
<colbgcolor=#ffcc20><colcolor=black> 제호 | 필리프 폰 슈바벤(Philipp von Schwaben) | ||
출생 | 1177년 2월/3월 | ||
이탈리아 왕국 파비아 | |||
사망 | 1208년 6월 21일 (향년 31세) | ||
신성 로마 제국 프랑켄 밤베르크 | |||
재위기간 | 로마왕 | ||
1198년 3월 8일 ~ 1208년 6월 21일 | |||
슈바벤 공작 | |||
1196년 8월 15일 ~ 1208년 6월 21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ffcc20><colcolor=#000> 배우자 | 이레네 앙겔리나 | |
자녀 | 베아트릭스, 마리아, 쿠니군데, 엘리자베스 | ||
아버지 | 프리드리히 1세 | ||
어머니 | 베아트리체 1세 | ||
종교 | 가톨릭 | }}}}}}}}} |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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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엔슈타우펜 왕조 출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로 위로는 형들이 있었기에 필리프는 제위는 물론이고 슈바벤 공작도 되기에도 거리가 먼 인물로 보였기에 열두 살이 되던 1189년, 아델베르크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 생활을 했으나 바로 다음 해에 아버지 프리드리히가 1190년 6월 10일 제3차 십자군 원정에 참전해 아르메니아 왕국 살레프강을 도하하는 도중 서거했다. 1191년 작은형 하인리히 6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되면서 필리프는 뷔르츠부르크 주교로 승격되었다.형 하인리히 6세에 의해 1195년 토스카나 변경백에 선임했으며, 이때 환속하면서 동로마 제국 황제 이사키오스 2세의 딸 이레네와 약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했다. 하지만 하인리히 6세가 1197년 9월에 죽었을 때 그의 상속자 프리드리히는 아직 3살의 어린 나이였으므로 호엔슈타우펜 왕조를 지지하는 독일의 제후들은 프리드리히의 삼촌인 슈바벤의 필리프를 다음 후보로 내세웠다.
이에 필리프는 벨프 가문과의 제위 계승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보헤미아 공국을 끌어들이고자 오타카르 1세를 보헤미아 국왕으로 승격시킴과 동시에 왕위 계승권을 보장했다. 이에 필리프의 경쟁자였던 벨프 가문의 오토 4세는 오타카르 1세를 회유해 필리프를 배신하게 만들려고 보헤미아 왕위를 승인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 또한 이참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권 약화를 유도하고자 보헤미아 왕위를 승인했다.
이후 1198년 3월 필리프는 황제선거에서 독일왕으로 선출되었고, 어린 조카의 이권을 지켜주겠다는 명분으로 제위에 도전하고자 독일로 떠났다. 이에 이 기회에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기로 마음먹은 피렌체, 아레초, 루카, 피사, 피스토이아, 포지본시, 프라토, 시에나, 볼테라 등 토스카나 변경주의 유력 도시들이 토스카나 연맹을 결성하고 신성 로마 제국에 공동 대응하기로 결의했다.
이리하여 토스카나는 제국의 통제에서 벗어났고 토스카나 변경주는 유명무실해졌다. 1201년 처남인 알렉시오스 4세의 망명을 받아주고 한 동안 보호해줬다. 1208년 6월 필리프가 딸을 아내로 주지 않는 것에 원한을 품은 것이 원인이 되어 로마 교황이 옹립한 비텔스바흐 가문의 바이에른궁정백 오토 8세[1] 등에 의해 암살되었다. 부인 이레네 또한 그자리에 있었고, 간신히 몸을 피했지만 당시 임신 중인 몸으로 남편이 살해된 충격을 받아 유산 끝에 남편의 뒤를 따라 갔다.
[1] 오토 8세는 호엔슈타우펜 왕조를 섬겼던 칼덴의 하인리히(Heinrich von Kalden)에게 처형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