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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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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 제국 룩셈부르크 왕조 초대 황제
하인리히 7세
Heinrich VII
파일:Henry_Lux_head.jpg
<colbgcolor=#ffcc20><colcolor=black> 제호 하인리히 7세 (Heinrich VII)
출생 1273년
신성 로마 제국 에노 백국 발랑시엔(Valenciennes)
사망 1313년 8월 24일 (향년 39~40세)
이탈리아 부온콘벤토
재위기간 신성 로마 황제
1312년 6월 29일 ~ 1313년 8월 24일
이탈리아 국왕
1311년 1월 6일 ~ 1313년 8월 24일
독일왕
1308년 11월 27일 ~ 1313년 8월 24일
룩셈부르크 백작
1288년 6월 5일 ~ 1313년 8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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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cc20><colcolor=#000> 배우자 브라반트의 마르가레타
자식 얀 루쳄부르스키, 마리, 베아트릭스
아버지 룩셈부르크 백작 하인리히 6세
어머니 베아트리스 다베네
형제 발람, 펠리시타, 발두인[1], 마르가레테
종교 가톨릭 }}}}}}}}}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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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어: Heinrich VII. (하인리히 7세)
룩셈부르크어: Heinrich VII. vu Lëtzebuerg
이탈리아어: Enrico VII (엔리코 7세)
라틴어: Henricus VII (헨리쿠스 7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룩셈부르크 백작[2].

2. 생애

신성 로마 제국 에노 백국 발랑시엔[3]에서 룩셈부르크 백작 하인리히 6세와 아벤느 가문의 베아트리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비교적 지엽적이고 속이 좁은 군주였으며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사용했다. 그가 룩셈부르크 백작 시절 이미 프랑스 왕국의 신하가 되는 것에 찬성했으며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를 보호하려고 했다. 이것은 신성 로마 제국이 약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룩셈부르크 백작으로서는 봉건적인 분쟁에서 평화를 지켜 영지를 효과적으로 다스렸다.

하인리히 7세는 합스부르크 가문알브레히트 1세가 1308년 5월 암살당하자 제국 내부의 정치적인 책략에 말려 들어갔다. 필리프 4세는 즉시 자신의 형제인 샤를 드 발루아[4]를 다음 독일왕으로 선출하기 위해 공격적으로 지원했다. 필리프 4세는 교황 클레멘스 5세가 자신의 손아귀에 있는 것을 믿었으며 선제후들에게 돈을 풍성하게 뿌렸다. 그러나 샤를 드 발루아를 지원하는 쾰른 대주교 비르네베르크의 하인리히 2세는 프랑스가 강성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라인 궁정백 루돌프가 샤를 드 발루아의 가장 강력한 경쟁 상대가 되었다.

비록 필리프 4세의 신하였지만 하인리히는 프랑스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선제후들 사이에서 중도파 후보자로 적합한 양상을 띄었다. 또한 그는 거대한 영토를 가진 거물도 아니었고 샤를과 루돌프 사이에 낀 어중간한 입지였다. 하인리히의 동생인 트리어 대주교 발두인은 대폭적인 양보를 해 쾰른의 하인리히를 포함한 선제후의 과반수를 설득했다. 이래서 하인리히는 능숙하게 교섭을 한 결과로 1308년 11월 27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열린 황제선거에서 6표를 얻어 독일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아헨에서 1309년 1월 대관식을 치렀다.

그뒤 보헤미아 왕국의 공주인 엘리슈카가 그의 궁정으로 망명하자 가문의 세력을 늘릴 기회를 잡았다. 엘리슈카는 형부인 케른텐의 하인리히로부터 보헤미아 왕위를 되찾기 위해 제국의 힘을 빌리려했고 그 대가로 하인리히 7세의 아들인 룩셈부르크의 요한에게 청혼해 1310년 8월 30일에 결혼했다. 어쨌든 하인리히 7세는 며느리인 엘리슈카의 청에 따라 그해에 제국군을 보헤미아로 파견했고 12월 19일 프라하를 함락시키면서 자신의 아들인 요한을 보헤미아의 국왕 얀으로 즉위하게해 룩셈부르크 가문이 보헤미아 왕위를 겸하게 되었다.

이후 가문의 세를 불리는데 취미가 들었는지 1311년 1월 밀라노에서 롬바르디아의 왕위를 차지했고 사보이아 백작 아메데오 5세의 도움을 얻어 피에몬테와 롬바르디아의 도시들을 굴복시켰다. 그는 선포한 평화와 공명정대한 정의의 계획에 따라 싸우는 세력들을 화해시켰고 유배자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돌려보낸 유배자들 대부분이 황제를 편드는 기벨린(황제파) 파벌이란 혐의를 받고 있기에 당시 교황을 편들고 있던 구엘프(교황파) 파벌이 장악한 피렌체를 중심으로 한 토스카나로마냐 지방에선 의혹과 불만의 소리가 일어나 그해 2월 소요가 발생하였고 같은해 5월엔 브레시아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하인리히 7세는 4개월이 지난 9월에야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다.

다음해인 1312년 5월초 하인리히 7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대관식을 치르기 위해 로마로 갔으나 나폴리 왕국로베르토를 위시한 구엘프 파가 즉각 로마 일부를 장악했다. 이를 막아야할 교황은 당시 아비뇽에 계속 있었기에 교황이 부재중이었던 로마를 구엘프 파벌이 쉽게 장악할 수 있었다. 이에 하인리히 7세는 자신이 이끌고 온 군대와 도시 내에 아직 남아 있던 기벨린 파벌과 함께 시가전으로 점차 구엘프 파벌을 구축하면서 6월 29일에야 부재중인 교황을 대신해 로마의 추기경들에 의해 황제의 관을 썼고 그해 8월 하인리히 7세는 토스카나의 구엘프 파벌을 토벌하기 위해 다시 토스카나로 군대를 이끌고 북진했다.[5]

하인리히 7세는 토스카나의 여러 도시들을 점령했지만 구엘프 지도격의 도시였던 피렌체는 함락시키는 데 실패한다. 그뒤 자신에게 우호적이였던 피사에 장시간 체류하다가 같은해 8월 나폴리로 원정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다시 한번 남진했다. 허나 시에나를 점령하려다가 실패하고 얼마안가 열병으로 향년 38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유해는 피사 대성당에 묻혔다.

[1] 나중에 트리어 대주교가 되었다.[2] 우연의 일치겠지만 황제로서도 하인리히 7세인데 룩셈부르크 백작으로서도 하인리히 7세이다.[3] 현재는 프랑스에 있다.[4] 필리프 6세의 아버지.[5] 이 과정을 지켜본 단테 알리기에리는 그를 이탈리아를 구원할 정치적 메시아로 보고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독일에서는 '단테의 황제'(Dantes Kaiser)로 불리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