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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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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프랑크 왕국 카롤루스 왕조 제4대 국왕
카롤루스 제국 제6대 황제
카를 3세
Karl III
파일:charles the fat.jpg
<colbgcolor=#ffcc20><colcolor=black> 제호 카롤루스 임페라토르 아우구스투스
(KAROLUS IMPERATOR AUGUSTUS)[1]
별칭 비만왕 카를 (Karl der Dicke)
출생 839년 6월 13일
바이에른
사망 888년 1월 13일 (향년 48세)
노이딩겐
재위기간 카롤루스 제국 황제
881년 2월 12일 ~ 887년 11월 11일
동프랑크인의 왕, 알레마니아 국왕
876년 8월 28일 ~ 887년 11월 11일
이탈리아 국왕
880년 3월 22일 ~ 887년 11월 11일
서프랑크인의 왕, 아키텐 국왕
884년 12월 6일 ~ 887년 11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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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cc20><colcolor=#000> 배우자 슈바벤의 리카르디스
(862년 결혼)
자녀 베른하르트
아버지 루트비히 2세
어머니 알트도르프의 엠마
형제 힐데가르트, 카를로만, 이름가르트, 지셀라, 루트비히, 베르타
종교 가톨릭 }}}}}}}}}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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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틴어: Karolus III | Carolus III Crasus
독일어: Karl III | Karl der Dicke (Karl III der Dicke)
프랑스어: Charles III le Gros
카롤루스 3세 | 카를 3세 비만왕

카롤루스 제국의 명목상 황제이자, 동프랑크와 서프랑크의 통합 군주가 되었지만 바이킹의 침략으로 몰락하였고,[2] 그의 죽음으로 카롤루스 제국도 해체되었다.

2. 생애

동프랑크 왕국 카롤루스 왕조의 초대 국왕인 '독일인' 루트비히 2세의 세 아들 중 막내였으며, 카롤루스 대제의 증손으로 태어났다.

동프랑크의 왕이 되기 이전, 큰형 카를로만이 아버지 루트비히 2세에게 대항하여 일으킨 반란에 참가했으며, 그 대가로 864년 슈바벤 공작과 라이티아 백작을 얻고 865년 알레마니아 분국의 분봉왕을 거쳤다. 876년 아버지 독일인 루트비히 2세가 승하하자 알레마니아의 왕이 되었다. 879년 병석에 누운 형 카를만(카를로만)으로부터 이탈리아 왕국의 통치권을 위임받았고, 880년 이탈리아를 상속받았다. 881년 로마 교황 요한네스 3세로부터 축성을 받고 카롤루스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882년 동프랑크 왕국의 국왕이었던 형 루트비히 3세(청년왕)가 승하하자 바이에른, 프랑켄, 작센을 차지하고, 동프랑크의 국왕이 되었다. 884년 샤를로망 2세가 사고로 죽자, 5촌 조카의 자리도 가져가 서프랑크 왕국의 국왕이 되었다. 이로써 카롤루스 대제 이후 베르됭 조약, 프륌 조약, 메르센 조약, 리베몽 조약으로 분열되었던 프랑크 왕국을 일시적으로 재통일했다.

하지만 간질뇌졸중 등의 질병으로 인해 제대로 정무를 주관할 수 없었다. 서자였던 베른하르트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기 위해 황후 슈바벤의 리첼다에게 간통 혐의를 주장하며 폐위시키려고 했으나, 리첼다는 온갖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결백을 주장했다. 이에 리우트바드 주교는 그녀가 무죄라고 선고했다. 일련의 실정들로 인해 카를 3세는 여러 귀족들은 물론 교단과도 불화를 겪게 되었다.

특히 886년 서프랑크의 수도 파리에 침공한 바이킹을 돈으로 매수해 돌려보낸 일이 발각되어, 조카인 아르눌프를 중심으로 한 귀족들의 반란에 직면하게 되었다.

맏형 카를만(카를로만)의 서자였던 아르눌프는 처음에는 아버지의 영토인 바이에른을 요구했으나, 숙부인 카를 3세가 바이킹을 돈으로 매수해서 되돌려보냈다며 그에게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전국으로 확산시켰다. 아르눌프와 동프랑크의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서프랑크의 귀족들 특히 로베르 왕가의 라울 등은 아르눌프의 봉신이 되는 조건으로 반란에 협력했다. 887년 11월 왕을 자처한 아르눌프는 군대를 이끌고 제국의 수도인 아헨에 입성했다. 이어 11월 11일 비만왕 카를 3세는 아르눌프에 의해 개최된 프랑크푸르트 제국의회에서 폐위되었다.

알레마니아로 옮겨간 카를 3세는 노이딩겐에서 888년 1월에 붕어했다. 그의 퇴위와 죽음을 기점으로 카롤루스 대제가 만든 카롤루스 제국(프랑크 왕국)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그는 명백하게 서프랑크의 왕으로도 재위했지만, 그가 동프랑크(독일)왕 출신인데다가 바이킹을 제대로 방어하지 못하며 몰락, 실각하였기에 프랑스인들은 그를 샤를 3세로 간주하지 않으려 했고, 이후 단순왕 샤를을 샤를 3세로 칭했다. 이러한 오류로 인해 후대인들이 혼란을 겪는 경우가 많다. 역사학계에서 이를 바로잡으려는 시도가 여러번 있었고 지금도 진행 중이지만 이미 천년 이상 굳어져 버린 관계로 완전한 수정은 요원할 것으로 보인다. 현대에서는 비만왕와 단순왕을 중복해서 모두 샤를 3세로 표기하는 추세다.


[1] 당대에 발행된 동전에 적힌 로마식 제호[2] 이후 서프랑크와 동프랑크의 통합 군주는 더이상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