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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11 10:49:36

하인리히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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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Henry_I_the_Fowler.jpg
Heinrich I
가문 오토 왕조
출생 876년
사망 936년 7월 2일 (향년 59~60세)
멤레벤
재위
기간
독일 국왕 919년 5월 24일 ~ 936년 7월 2일
작센 공작 912년 11월 30일 ~ 936년 7월 2일

1. 개요2. 생애3. 오토 왕조4. 기타5. 미디어에서

[clearfix]

1. 개요

작센 공작 출신의 독일 왕국의 국왕이자, 오토 왕조의 시조였다. 서프랑크 왕국의 정계를 양분하고 있었던 카롤루스 왕가의 국왕 루이 4세로베르 왕가 출신의 권신 대 위그에게 각각 딸들인 게르베르가와 헤드비게를 시집보내어 로테르 왕과 위그 카페 왕의 외조부가 되었다.

2. 생애

독일의 5대 부족 공국들 중 하나인 작센 공국을 다스리던 류돌핑거(리우돌핑) 가문에서 태어나 912년에 작센 공작이 되었다. 하인리히의 어머니는 프랑켄 바벤베르크 가문의 헤드비가로, 그녀는 루도비쿠스 1세의 외손녀이자 베렝가리오 1세의 여자형제, 프리울리의 잉겔트루데의 딸이다.

동프랑크의 국왕 콘라트 1세가 자손없이 승하하여 왕가의 대가 끊기게 되자 죽기 직전의 콘라트 1세가 선양한 차기 국왕 후보로서 왕의 사후 프랑켄 부족 대표와 작센 부족 대표의 승인을 받고 동프랑크의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당시 슈바벤 부족 대표와 바이에른 부족 대표가 하인리히 1세를 인정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바이에른 출신의 아르눌프(Arnulf)를 국왕으로 내세웠다.

이후 내전이 일어날 기세...였지만 하인리히 1세가 슈바벤과 바이에른 측의 편익을 지켜주는 조건(교회 지배권 등)으로 이들로부터도 왕위 계승을 인정받아 정식 국왕으로 임명되었다.[1]

하인리히 1세는 자신을 '독일인들의 왕'이라 칭했다. 이때문의 그의 즉위를 공식적인 독일 왕국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하인리히 1세가 '정통 왕족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국왕이 되길 원하는 크고 작은 반란들이 끊임없이 일어났으나 이를 진압하고 왕권을 강화시켰으며, 동쪽으로는 슬라브족마자르족, 서쪽으로는 서프랑크 왕국과 다투면서 독일을 지켜냈다. 하지만 사후에는 '새 사냥을 좋아하는 왕'[2]이었다든지, '성 건축을 좋아하는 성덕후 왕'이었다든지 하는 루머로 오랫동안 꽤 시달렸다가 최근 긍정적인 쪽으로 재발견 되는 중이다. 치세 내내 축성사업을 대대적으로 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성 쌓는 걸 좋아하는 덕후여서가 아니라 유목 기마 전사들인 마자르족의 침입과 약탈을 막기 위한 국경 방어의 일환으로, 이는 대단히 중요한 업적이었다.

3. 오토 왕조

하인리히 1세의 아들인 오토 1세는 부왕이 승하한 후 부족 대표들의 선거를 통해 왕위를 이어받고, 훗날 신성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가 되었다.

하인리히 1세는 작센 부족 공국을 다스리던 류돌프(류돌핑거, 리우돌핑) 가문 출신이었는데, 그가 독일 왕위에 오르고 그의 아들 오토 1세가 제위에 오른 후 그의 가문은 오토 왕조라고 불리게 되었다. 게르만 부족들은 전통적으로 분할상속제를 취하는 가문이 많았는데, 하인리히 1세는 분할상속의 전통을 깨고, 장자상속제를 확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그의 왕국(훗날 제국)은 후손들에게 온전히 세습되었다.

4. 기타

하인리히 1세가 사망하고 1000년 뒤 1936년, 나치에 의해 그의 업적은 나치의 선전으로 활용되었고, 나치는 아돌프 히틀러를 하인리히 1세에 치환하면서 독일의 번영을 위해서라면 히틀러에게 충성을 바쳐야 한다는 내용으로 국민들을 선동했다. 당연히 빼도박도 못한 고인능욕이다.

5. 미디어에서

<리턴 투 캐슬 울펜슈타인>에서 언데드의 힘으로 제국을 세운 후, 적이 보낸 수도승에게 봉인당했다는 설정이 있으며, 나치 독일의 오컬트 집단에 의해 되살아난다. 하인리히 1세(울펜슈타인 시리즈) 참조.


[1] 하지만 이후 하인리히 1세는 왕권이 커지자 슈바벤과 바이에른으로부터 다시 교회 지배권을 돌려받았다.[2] 그래서 이 사람의 영어 위키백과 항목명이 'Henry the Fowler'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