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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대관식을 받은 적이 없는 로마왕이지만 사실상 황제였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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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프로방스 국왕 보소 5세의 아들이었으며, 별칭은 '맹인왕' 루이(Louis the Blind)였다. 어머니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도비쿠스 2세의 딸 에르멘가르다(Ermengarda)였다.2. 생애
887년 1월 부왕이 사망하자 프로방스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프로방스의 백작들은 그의 모후인 에르멘가르다를 집정으로 선출했으며, 루이 3세의 삼촌 리샤르가 왕을 보좌하도록 했다. 동년 5월 에르멘가르다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비만왕' 카를 3세의 궁정으로 루이 3세를 보내 국왕임을 인정받으려고 했다. 카를 3세는 루이 3세를 양자로 받아들였고, 모자를 자신의 보호하에 두었다.890년 발랑스에서 열린 프로방스 카톨릭 성직자 회의에서 루이 3세를 아를, 프로방스, 부르고뉴의 국왕으로 선출하여 즉위했고, 894년 루이 3세는 아르눌프의 궁전으로 가 제후로서의 충성을 맹세했다.
896년 루이 3세는 사라센과의 전쟁을 개시했다. 899년 무슬림 침입자들이 생트로페에 상륙해 기지를 건설했고, 루이 3세는 재위 기간 동안 그들과 맞서 싸웠다.
당시 이탈리아 반도는 마자르족의 침략에 시달렸고, 국왕인 베렝가리오 1세의 무능함으로 인해 일부 이탈리아 귀족들은 루이 3세를 이탈리아의 왕으로 즉위시키려고 했다. 이에 루이 3세는 알프스산맥을 넘어 베렝가리오 1세를 격파하고, 그를 과거 롬바르디아의 수도였던 파비아(Pavia)까지 추격하며, 몰아붙였다. 이후 루이 3세는 901년 교황 베네딕토 4세에 의해 황제(皇帝, emperor)로 즉위했다. 그러나 902년 반격한 베렝가리오 1세에게 패배해 도주했으며, 프로방스로 귀환한 이후 이탈리아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서약했다.
905년 루이 3세는 재차 이탈리아를 침공했지만 바이에른과 이탈리아의 연합군에게 패배하고, 베로나(Verona)에서 생포당하고 말았다. 동년 7월 21일에 두 눈이 찔려 실명하는 수모를 당했고 신성 로마 황제와 이탈리아 국왕의 왕관을 반납해야 했다. 이후 프로방스, 부르고뉴(부르군트)를 계속 통치했지만 실권은 백작 위그에게 있었다.
이후 죽을 때까지 은둔하며 살다가 48세경인 928년 7월 5일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