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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 제국 합스부르크 왕조 제10대 황제 레오폴트 1세 Leopold I | |||
<colbgcolor=#ffcc20><colcolor=black> 이름 | 레오폴트 이그나츠 요제프 발타자르 펠리치안 (Leopold Ignaz Joseph Balthasar Felician) | ||
출생 | 1640년 6월 9일 | ||
오스트리아 대공국 빈 | |||
사망 | 1705년 5월 5일 (향년 64세) | ||
오스트리아 대공국 빈 | |||
재위기간 | 신성 로마 황제, 로마왕 | ||
1658년 7월 18일 ~ 1705년 5월 5일 | |||
보헤미아 국왕 | |||
1656년 ~ 1705년 5월 5일 | |||
오스트리아 대공, 크로아티아 국왕 | |||
1657년 ~ 1705년 5월 5일 | |||
헝가리 국왕 | |||
1655년 ~ 1705년 5월 5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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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츠노이부르크의 엘레오노레 마그달레네 (1676년 결혼) | |||
자녀 | 마리아 안토니아, 요제프 1세, 마리아 엘리자베트, 레오폴트 요제프, 마리아 안나, 마리아 테레지아, 카를 6세, 마리아 요제파, 마리아 막달레나 | ||
아버지 | 페르디난트 3세 | ||
어머니 | 스페인의 마리아 아나[1] | ||
형제 | 페르디난트 4세, 마리아 안나, 필리프 아우구스트, 막시밀리안 토마스 | ||
종교 | 가톨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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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성 로마 제국의 합스부르크 왕조 제10대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대공, 보헤미아 왕,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왕이다. 오스트리아 대공으로서는 레오폴트 6세이다.[2]합스부르크 제국 역사에서 걸출한 업적을 남긴 군주 중 한 명이다. 전쟁으로 시작해 전쟁으로 끝났다는 평까지 들을 정도로 치세가 모두 전쟁으로 도배되었던, 유럽의 격동기의 인물이다. 개인적으로 부침은 있었지만 걸출한 외교력을 바탕으로 오스만 제국을 헝가리 왕국에서 몰아내며 근대 유럽의 판세를 바꾸어 놓았고, 이를 통해 합스부르크 제국의 중흥의 기반을 만들었다.
레오폴트 1세 대에 티롤과 외지오스트리아[3]를 다스렸던 티롤 분가[4]의 대가 끊기면서 프리드리히 3세 및 막시밀리안 1세 대에 일시적으로 통일되기도 했었던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분할 상속이 완전히 끝났다.
선대부터 수차례 거듭된 근친혼으로 인해 이쪽도 친척인 카를로스 2세만큼은 아니지만 근친혼으로 인한 주걱턱과 유전병이 심각한 편이었다. 다만 초상화의 경우 그의 겸손함 때문에 오히려 신체적 결함이 강조되어져 그려졌다고 한다.[5]
2. 생애
페르디난트 3세와 마리아 안나[6]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원래는 형 페르디난트 4세가 제위를 계승할 예정이었기에, 어려서부터 가톨릭 신학교로 들어가 종교인이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7] 레오폴트는 프랑스어를 싫어해 궁중에서 프랑스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8] 형 페르디난트 4세가 1654년 이른 나이에 천연두로 급사하면서 갑작스레 제위 계승을 준비하게 되었고, 뒤이어 아버지 페르디난트 3세가 1657년에 죽으면서 얼떨결에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지인 오스트리아 대공국, 보헤미아 왕국,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을 물려받았고, 1658년 7월 18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열린 황제선거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되었다.18세의 어린 나이로 제위에 오른 데다, 30년 전쟁으로 피폐해진 합스부르크 제국을 재건해야하는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거기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원한 원수, 프랑스 왕국의 부르봉 왕조는 그의 제위계승을 방해하는 공작까지 펼쳤다. 프랑스의 재상 쥘 마자랭 추기경이 바이에른 선제후 페르디난트 마리아[9]를 황제로 선출하려 했다.
결국 레오폴트 1세는 프랑스로부터 제위계승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조건으로 같은 합스부르크 왕가인 스페인에 대한 지원을 포기하는 실책을 저지르고 말았다. 한 술 더 떠, 프랑스와 스페인 영토를 균등분할하기로 합의한 사실까지 탄로나면서[10] 스페인에서의 감정이 크게 나빠졌다. 레오폴트는 그 대신 독일 제후들의 연합인 라인 연맹에 가담하였다.
스웨덴 국왕 칼 10세 구스타브가 폴란드 왕위를 노리던 에르데이 공국의 라코치 죄르지 2세와 짜고 오스트리아를 공격하자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연합하여 대항하기도 했다. 거기다 영원한 숙적 프랑스는, 태양왕이라 불린 루이 14세의 통치하에 적극적인 확장정책을 펼치면서 오스트리아와 잦은 충돌을 벌이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프랑스군의 맹공으로 여러 차례 불리한 상황에 놓이곤 했다. 거기다가 프랑스가 이교도인 오스만 제국과 공수동맹까지 맺어, 오스만으로부터 여러 차례 공세를 받았다. 1663년에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였을 때는 생고타르 전투의 승전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슬로바키아 일대인 상헝가리(Felvidék)의 에르셰쿠이바르를 오스만 제국에게 내주면서 불리한 조건으로 향후 20년간 서로 침략하지 않는다는 조약을 맺었다. 이 때문에 크로아티아의 주요 귀족인 즈린스키, 프랑코판 가문 등이 반발하여 그들을 가혹하게 처분했고 이러한 귀족 탄압이 원인이 되어 퇴쾨이 임레의 주도로 상헝가리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퇴쾨이 임레가 메흐메트 4세와 카라 무스타파 파샤에게 빈을 공격해줄 것을 요청하면서 1683년 제2차 빈 공방전이 벌어졌고 레오폴트 1세는 일찌감치 빈을 포기하고 파사우로 피난을 떠났다. 다행히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의 도움으로 위기는 벗어날 수 있었다. 그 후 뛰어난 장군인 사부아 공자 외젠의 활약으로 오스만 제국군을 몰아내면서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을 맺어 오스만 헝가리 대부분과 에르데이 공국을 되찾았고, 헝가리 의회로부터 합스부르크 왕가가 헝가리의 왕위를 세습한다는 약속을 받아냈다.[11] 하지만 1697년 프랑스와의 전쟁을 끝낼 때는 슈트라스부르크를 프랑스에 양도했다.
잦은 전쟁으로 파탄난 재정을 메꾸기 위해 헝가리 왕국을 착취하는 한편 대외전쟁에서 독일 제후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보니 이들에게 저자세로 나가며 우대책을 써야하기도 했다. 1663년에는 제국의회가 해산되고 레겐스부르크 제국의회가 새로 만들어졌다. 또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이 하노버 선제후가 되었다.[12] 이는 안 그래도 결속력이 약한 신성 로마 제국에 큰 타격이었다. 이 와중에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에게 왕의 지위를 내려 프로이센 왕국을 공식적으로 출범시켰는데[13], 반 세기 후에 일어난 일을 생각한다면 실책으로 비춰질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이건 논란의 여지가 상당히 있는 부분인데, 당시 합스부르크 제국에게 최대의 적은 프랑스 왕국과 오스만 제국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프랑스는 당시 유럽의 인구대국으로 국력에서 합스부르크 제국에게 밀리지 않는 강대국이었다. 그러다보니 프랑스를 확실히 막아야 하는 레오폴트 입장에서는 자신을 제대로 지지해줄 세력이 하나라도 더 필요했다.[14]레오폴트 1세로서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등장이라는 미래의 변수를 예상할 수도 없었고, 무엇보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주요 원인은 카를 6세가 아들을 낳지 못한 것이지, 레오폴트 1세가 이에 직접적인 원인 제공을 했다고 보긴 어렵다. 실제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를 왕으로 만들어 준 것은 황제선거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경향이 강했고, 그는 왕이 되는 대가로 오스트리아에 파병을 해야 했으며 칭호 역시도 König in Preußen, 즉 프로이센 안에서는 왕이라는 조금 격이 낮은 칭호를 써야 했다.
그걸로 부족해 철저한 가톨릭 국가답게 개신교에 대한 탄압에 더더욱 박차를 가해서 상공업의 발전도 지지부진했다. 특히 오스트리아의 상공인 계층은 개신교 신자가 많았기에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죄다 프랑스[15]와 네덜란드 등지[16]로 빠져나가게 되었다.
그나마 합스부르크 제국의 불세출의 명장인 사부아 공자 외젠 덕분에 여러 차례 위기를 넘기고 오히려 대튀르크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면서 페르디난트 1세가 헝가리 왕위를 승계한 이래 150년 동안 분열되었던 헝가리 전역을 재통합하는데 성공했다.[17] 말년에는 자신이 버리다시피 한 스페인 왕위가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에 간다는 사실에 스페인의 중요성을 뒤늦게 깨닫고[18]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 개입하여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었으나 전쟁 중인 1705년에 64세의 나이로 죽었다.
3. 평가
헝가리를 가혹하게 탄압하는 등[19] 몇몇 실책이 있긴 하나 레오폴트 1세는 유능하고 수완이 뛰어난 군주 중 한명이었다.네이버 지식평가에서 연재 중인 주경철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교수의 서양근대인물열전을 봐도 레오폴트 1세를 외교적으로 뛰어난 인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끌어들여 제2차 빈 공방전을 승리로 이끄는 등 오스만 제국 및 유럽의 다른 나라 왕들에 비해 외교적 평범함을 넘어서 그 당시 국제 정세 속에서 월등한 인물이었다고 평하고 있다.
다만 이 평가는 어디까지나 합스부르크 가문과 오스트리아 중심의 평가이고, 합스부르크 세습령 내부의 체코, 크로아티아, 헝가리에서는 평가가 좋지 않다. 특히 그가 가혹하게 탄압했던 헝가리에서는 원수로 평가받는다.
4. 가족관계
4.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레오폴트 1세 (Kaiser Leopold I.) | <colbgcolor=#fff3e4,#331c00> 페르디난트 3세 (Kaiser Ferdinand III.) | <colbgcolor=#ffffe4,#323300> 페르디난트 2세 (Kaiser Ferdinand II.) | |
내지오스트리아 대공 카를 2세 (Erzherzog Karl II. von Innerösterreich) | |||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A] (Maria Anna von Bayern) | |||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 (Maria Anna von Bayern) | |||
바이에른 공작 빌헬름 5세 (Herzog Wilhelm V. von Bayern) | |||
로렌의 르네 (Renée de Lorraine) | |||
스페인의 마리아 아나 (María Ana de España) | |||
펠리페 3세 (Rey Felipe III de España) | |||
펠리페 2세 (Rey Felipe II de España) | |||
오스트리아의 안나 (Anna von Österreich) | |||
오스트리아스티리아의 마르가레테 (Margarete von Österreich) | |||
내지오스트리아 대공 카를 2세 (Erzherzog Karl II. von Innerösterreich) | |||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A] (Maria Anna von Bayern) |
4.2. 아내
<colbgcolor=#ffd700><colcolor=black>그리스풍으로 묘사된 레오폴트 1세 일가 중앙에 레오폴트 1세, 좌측에 요제프 1세, 우측에 카를 6세가 서 있다. 샤를 브와(Charles Boit) 작(1703년) |
총 3번 결혼했는데 이는 첫번째와 두번째 아내가 연달아 요절하고 남성 상속자를 얻지 못해서 재혼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첫번째 황후는 펠리페 4세의 딸로 3촌이자 4촌인 스페인의 마르가리타 테레사[22]였고, 두번째 황후는 6촌 관계의 오스트리아티롤의 클라우디아 펠리치타스[23]였는데 마르가리타와 클라우디아 모두 22살에 사망했다. 세번째이자 마지막 황후는 6촌 관계의 팔츠노이부르크의 엘레오노레 막달레네[24]로 그녀와의 사이에서 10명의 자녀들을 낳았다. 요제프 1세와 카를 6세가 엘레오노레의 아들들이다.
<colbgcolor=#ffd700><colcolor=black>첫 번째 황후 마르가리타 테레사 |
<colbgcolor=#ffd700><colcolor=black>두 번째 황후 클라우디아 펠리치타스 |
<colbgcolor=#ffd700><colcolor=black>세 번째 황후 엘레오노레 마그달레네 |
4.3.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스페인의 마르가리타 테레사 (Margarita Teresa of Spain) | ||||
1녀 | 바이에른 선제후비 마리아 안토니아 (Maria Antonia, Electress of Bavaria) | 1669년 1월 18일 | 1692년 12월 24일 |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 슬하 1남 |
팔츠노이부르크의 엘레오노레 막달레네 (Eleonore Magdalene of Pfalz-Neuburg) | ||||
1남 | 요제프 1세 (Joseph I) | 1678년 7월 26일 | 1711년 4월 17일 |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빌헬미네 아말리 슬하 1남 2녀[25] |
2녀 |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총독 마리아 엘리자베트 (Maria Elisabeth, Governor of the Austrian Netherlands) | 1680년 12월 13일 | 1741년 8월 26일 | |
3녀 | 포르투갈의 왕비 마리아 아나 (Maria Anna, Queen of Portugal) | 1683년 9월 7일 | 1754년 8월 14일 | 주앙 5세 슬하 5남 1녀[26] |
4녀 | 마리아 테레지아 여대공 (Archduchness Maria Theresa) | 1684년 8월 22일 | 1696년 9월 28일 | |
2남 | 카를 6세 (Karl VI) | 1685년 10월 1일 | 1740년 10월 20일 |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슬하 3녀[27] |
5녀 | 마리아 요제파 여대공 (Archduchness Maria Josepha) | 1687년 3월 6일 | 1703년 4월 14일 | |
6녀 | 마리아 막달레나 여대공 (Archduchness Maria Magdalena) | 1689년 3월 26일 | 1743년 5월 1일 |
5. 기타
아들 요제프 1세, 증손자 요제프 2세와 마찬가지로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미사곡과 오라토리오 무용조곡[28]들을 작곡했으며, 첫번째 아내 마르가리타 테레사가 죽었을 때는 직접 레퀴엠을 작곡할 정도였다. 사냥과 승마에도 취미가 있었다.[1] 펠리페 3세의 딸.[2]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1세는 알브레히트 1세의 아들 중 한 명이다.[3] 슈바벤과 알자스에 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월경지[4] 페르디난트 2세의 남동생인 레오폴트 5세로부터 시작된 분가이다.[5] 심하게 튀어나온 입술과 주걱턱 때문에 말년까지도 콧수염을 고집하였는데, 동시기의 10살 연상 찰스 2세와 2살 연상 루이 14세도 젊은 시절에는 콧수염을 길렀지만 17세기 후반에 들어 유행의 변화로 깔끔하게 면도했던 것과 대조적이다.[6] 스페인 국왕 펠리페 3세의 딸. 페르디난트와 안나는 서로 사촌이었다. 참고로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는 펠리페 3세의 큰딸의 아들이니 이종사촌 형이다.[7] 그렇다고 순수한 종교인은 아니다. 왕위 계승에서 밀린 유럽 왕실의 일원들은 이렇게 교회에 들어갔다가 이후 고위 성직자까지 올라가서 다른 의미로 권력을 가지게 된다. 일본의 다이묘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차남 이하는 승려가 되는게 관례였다.[8] 대표적인 사례가 사부아 공자 외젠을 처음 만났을때인데, 이탈리아 혈통이지만 프랑스에서 자란 외젠에게 이탈리아어 할줄 아냐 물어보고 그렇다고 답하니 그럼 이탈리아어로 말하자고 하였다.[9] 루이 14세의 아들인 그랑 도팽 루이의 장인이다. 프랑스는 이러한 것을 한 번 더 벌이는데 1690년대 요제프 1세를 로마왕으로 선출할 당시 바이에른을 포섭하고 팔츠 계승전쟁으로 팔츠 선제후국을 루이 14세의 동생 오를레앙 공작에게 내주려고 했다. 그러나 이는 바이에른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여담으로 페르디난트 마리아의 아들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당시 장남이 스페인 국왕이 되지 못하자 왕이 되려는 욕구를 버리지 못해 프랑스를 믿고 레오폴트 1세에게 대들다가 블렌하임에서 털렸다.[10] 카를로스 2세가 후사 없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1670년에 분할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에 의하면 프랑스가 저지대와 북아프리카, 남부 이탈리아, 나바라를 얻고 오스트리아가 아메리카와 스페인 본토, 북부 이탈리아를 얻는 것이었다고. 그러나 당시 레오폴트에게는 마리아 안토니아를 제외하고 후사가 없었지만 루이 14세에게는 후계자인 그랑 도팽 루이가 있어서 후일 자신이 모든 영토를 상속받게 될 것이라 짐작한 루이 14세는 바이에른 선제후와 동맹을 맺어 오스트리아의 영토를 바이에른에게 주고 자신이 스페인과 부속 영토 전체를 차지하기로 하지만 이 계획은 바이에른 선제후가 반대하고 레오폴트가 후사를 얻음에 따라 유야무야 되었다.[11] 더 정확히는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만 헝가리 왕위 후보자로 출마할 수 있도록 계승법을 바꾸었다. 통념과 달리 헝가리 왕국과 보헤미아 왕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될 때까지 선출제를 유지했다.[12] 자신의 아들인 요제프 1세와 카를 6세를 신교도 가문인 벨프 가문의 공녀들과 결혼시켰는데, 이 가문이 선제후가 됨에 따라 동맹을 강화하려 한 것이다. 여담이지만 뤼네부르크계는 훗날 영국 왕실이 되는 하노버 왕조이고 볼펜뷔텐계는 주로 프로이센 왕국과의 연관성이 깊은데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프로이센 원수인 페르디난트 공작이 볼펜뷔텐계의 수장이었다. 거기다가 프리드리히 대왕의 왕비 역시도 이 가문 출신이다.[13] 신성 로마 제국에서 왕의 지위는 제위 계승 후보인 독일왕과 선제후인 보헤미아 왕밖에 없었기 때문에 본토인 브란덴부르크는 변경백-선제후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의 형식적인 봉신국이었다가 독립한 프로이센 공국의 이름을 빌려 왕으로 승격시켰다. 따라서 프로이센의 왕(König von Preußen)이 아닌 프로이센에서의 왕(König in Preußen)으로 칭했다. 동양으로 비유하면 외왕내제와 비슷하다.[14] 당장 자기 손녀인 마리아 테레지아 조차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당시 프랑스-스페인이 신성 로마 제국 내의 프로이센, 바이에른 선제후국, 팔츠 선제후국, 작센 선제후국과 연합했고 슐레지엔을 프로이센에게 떼어 준 후에야 해결되었음을 생각해보자. 게다가 프로이센 왕국은 의외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제국이 멸망하는 상황에서도 다른 영방국가들과는 다르게 끝까지 오스트리아를 저버리지 않았다.[15] 낭트 칙령이 폐지된 건 1685년이라 그때까진 프랑스는 개신교를 차별하지 않았기에 주로 프랑스로 도피했다.[16] 프랑스가 위그노 학살을 할 때부터 전통적인 종교적 망명의 땅으로 인식되었다.[17] 다만 오늘날의 티미쇼아라를 중심으로 하는 바나트(Banat) 지역은 둘째 아들 카를 6세가 수복했다.[18] 사실 스페인 왕위는 별 관심 없었고 스페인이 보유한 밀라노 공국,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왕국 등 이탈리아 영토에 더 관심이 많았다. 실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지기 전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제국이 체결한 밀약의 쟁점은 스페인령 이탈리아 영토였지 스페인 왕위 자체는 후순위였다.[19] 당장 제2차 빈 공방전의 원인이 퇴쾨이 임레의 봉기였는데, 퇴쾨이 임레는 1664년 버슈바르 조약에 불만을 품고 쿠데타를 일으키려다가 제압당한 헝가리 귀족의 아들이었다. 레오폴트 1세는 카를로비츠 조약 이후 헝가리 왕국의 옛 수도였던 비셰그라드를 헝가리인의 민족 정신이 되살아난다는 이유만으로 파괴해버렸고, 이러한 헝가리 탄압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도중 퇴쾨이 임레의 양아들이었던 라코치 페렌츠 2세가 쿠루츠 봉기를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A] 페르디난트 1세의 외손녀다.[A] 페르디난트 1세의 외손녀다.[22] 외삼촌 펠리페 4세와 누나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의 딸이기 때문에 외사촌임과 동시에 외조카가 된다. 펠리페 4세가 조카인 마리아나와 결혼하면서 이런 개족보가 되었다. 마르가리타 테레사는 카를로스 2세의 친누나이기도 한데 병약하고 지적 장애가 있던 카를로스와 달리, 머리가 좋고 예술에도 관심이 있어 부부간의 금슬은 좋았고 레오폴트 역시 마르가리타를 평생 좋아했다고 한다.[23] 레오폴트 1세의 할아버지인 페르디난트 2세가 클라우디아 펠리치타스의 할아버지인 오스트리아 대공 레오폴트 5세와 형제지간이었다.[24] 레오폴트 1세의 할머니인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가 엘레오노레 막달레네의 할머니인 바이에른의 막달레네와 자매지간이었다. 팔츠 선제후 필리프 빌헬름의 장녀. 필리프 2세 빌헬름은 팔츠지메른 분가의 마지막 선제후인 카를 2세가 후손없이 죽으면서, 그의 팔츠-노이부르크계 친척으로서 팔츠 선제후국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루이 14세가 팔츠 선제후위는 자신의 제수와 동생에게 있다고 주장하면서, 9년 전쟁을 일으키자 이를 막기 위해 사위인 레오폴트에게 의존했다. 심지어 또 다른 딸인 마리아 안나를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에게 시집보내 동맹을 강화하려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외손녀인 이사벨 파르네제의 남편 펠리페 5세는 적이었던 루이 14세의 손자이고, 카를로스 3세부터 모든 스페인 국왕들(부르봉 파르마 공작과 부르봉 양시칠리아 포함)은 모두 필리프 2세 빌헬름의 후손이다.[25] 폴란드 왕비 마리아 요제파, 신성 로마 제국 황후 마리아 아말리아 등[26] 스페인의 왕비 바르바라, 주제 1세, 페드루 3세 등.[27] 마리아 테레지아 등[28] 오페라 황금사과의 오라토리오를 썼는데, 상당한 걸작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