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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2a3e><colcolor=#ffffff> 헝가리 왕국 아르파드 왕조 제5대 국왕 언드라시 1세 I. András | |
출생 | 1015년 |
헝가리 왕국 세케슈페헤르바르 | |
사망 | 1060년 12월 6일 이전 (향년 45세) |
헝가리 왕국 지르츠 | |
재위 | 헝가리 왕국의 왕 |
1046년 ~ 1060년 12월 6일 이전 | |
배우자 | 키예프의 아나스타시야 |
아버지 | 바줄 |
어머니 | 타토니 가문의 여인 |
형제 | 레벤테, 벨러 1세 |
아들 | 셜러몬, 다비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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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헝가리 왕국의 제5대 국왕.2. 생애
1015년경 헝가리 왕국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니트러 공작 바줄과 타토니 가문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여인 사이에서 출생했다. 형제로 형 레벤테, 동생 벨러 1세가 있었다. 1031년 9월 2일 헝가리 초대 왕 이슈트반 1세의 유일한 후계자였던 임레 왕자가 헤기쾨츠첸티엠레(현재 루마니아 산팀레우)에서 사냥하던 중 멧돼지의 뿔에 찔려 죽었다. 임레 사후 차기 후계자로는 이슈트반 1세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었던 바줄이 유력하게 거론되었다. 그러나 이슈트반 1세는 바줄이 경박하고 어리석으며 가톨릭 신앙도 두텁지 못하니 왕위를 이을 그릇이 안 된다고 판단하고, 오르세올로 페테르를 후계자로 지명했다.일타이크 연대기에 따르면, 이에 반감을 품은 바줄은 네 명의 귀족을 꼬드겨 왕을 암살하게 했다. 그러나 암살은 실패했고, 이슈트반은 네 귀족들의 팔을 자르게 한 뒤 바줄의 두 눈을 멀게 했다. 반면 바줄의 혈통을 이어받은 왕들의 치하에서 쓰여진 후기 헝가리 연대기에 따르면, 이슈트반은 바줄을 후계자로 지명하려 했지만 그의 아내 기젤라를 포함한 바줄의 적들이 왕의 사절이 도착하기 전에 바줄의 눈을 멀게 하고 귀구멍을 납으로 채워버렸다고 한다.
바줄의 세 아들들은 체포를 피해 폴란드 왕국으로 달아났다. 이후 벨러 1세는 폴란드에 남았고, 언드라시와 레벤테는 키예프 루스로 망명하여 키예프 대공 야로슬라프 1세의 보호를 받았다. 1038년, 언드라시는 야로슬라프 1세의 딸인 키예프의 아나스타시야와 결혼했다. 그는 이 결혼 후 정교회로 개종하고 키예프 루스의 수호 성인 성 안드레아의 이름을 따서 새 이름을 부여받았다. 다만 고대 기록에서는 그의 초명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한편, 헝가리에서 오르세올로 페테르는 헝가리인 귀족들을 정치에서 소외시키고 독일인과 이탈리아인에게 중요한 직책을 부여했다. 게다가 외국군을 데려와서 헝가리 민중을 억압했고, 신성 로마 제국의 속국을 자처했다. 이에 반감을 품은 귀족들은 1045년 반란을 계획했다. 겔러트 주교는 바줄의 아들들을 헝가리 왕위에 세우기로 마음먹고 키예프에 사절을 보내 자신의 뜻을 알렸다. 이에 레벤테와 언드라시는 1046년 비밀리에 헝가리로 이동했다.
이 무렵, 바타에서 이교도 반란이 발발하여 코로스 일대에 빠르게 확산되었다. 1046년 9월, 반란군은 아바우이바르에서 헝가리에 비밀리에 잠입한 레벤테, 언드라시를 접견했다. 그들은 기독교를 배제하고 마자르 고유의 신앙으로 돌아간다면 왕으로 추대하겠다고 제안했고, 두 사람은 동의했다. 이후 반란군이 수도를 향해 진격하자, 페테르는 헝가리를 탈출해 아우크스부르크에 집결하고 있는 독일군과 합세하려 했다. 그러나 국경 인근의 자몰리 마을에서 언드라시를 추종하는 이들에게 포위되었다. 페테르와 소수의 추종자들이 한 저택에서 사흘간 항전했지만 끝내 제압당했고, 페테르는 1046년 10월 세케슈페헤르바르로 끌려간 뒤 실명형에 처해졌다. 그 직후 레벤테가 사망했는데,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에 세케슈페헤르바르의 세 주교는 논의 끝에 1046년 말 언드라시를 새 왕으로 옹립했다.
그는 왕좌에 오르자마자 반란군과 맺었던 약속을 무효화하고 기독교 진흥 정책을 실시했다. 1047년 귀족들을 규합하여 반란군을 진압한 뒤, 반군에 의해 살해된 사제들을 대체하기 위해 프랑스로부터 사제들을 초빙했다. 또한 신성 로마 제국과 평화 협약을 맺고자 황제 하인리히 3세에게 사절을 보내 영토를 양도하고 공물을 바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충성을 맹세하라는 요구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로 인해 평화 협상은 중단되었다.
하인리히 3세의 당시 관심사는 이탈리아 반도 북부였으나 언젠가 헝가리를 다시 속국으로 삼기 위해 전쟁을 벌일 가능성이 높았다. 언드라시는 이에 대비하고자 1048년 초 폴란드에서 동생 벨러를 불러 헝가리군 총사령관으로 삼았다. 그러면서 국토의 3분의 1을 벨러에게 주고 자신의 허락 없이도 독자적으로 통치할 권한을 부여했다. 또한 자신이 죽으면 벨러가 뒤이어 왕위에 오르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1050년, 하인리히 3세가 예상대로 헝가리를 향해 진군했다. 그들은 두 방향에서 동시에 진격했다. 하인리히 3세가 이끄는 본대는 바그 강을 건너 니트라 강을 거슬러 내려가서 슈타이어마르크를 거쳐 트란스다뉴비아로 진격했다. 레겐스부르크의 게브하르트 주교가 이끄는 또다른 군대는 도나우 강을 확보하고 보급품을 군대에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벨러는 이에 맞서 청야 전술을 구사했다. 독일군은 가는 곳마다 황폐화되어 있어서 식량과 물자를 제대로 구하지 못해 굶주림에 시달렸지만, 진군을 강행한 끝에 헝가리의 수도 세케슈페헤르바르에 도착했다.
벨러는 적의 보급로를 차단한 후 소규모 기병대를 이끌어 적의 진지를 급습해 화살을 날린 뒤 적이 반격하기 전에 빠져나가기를 반복했다. 이로 인해 탈진한 데다 세케슈페하르바르의 방비가 강했기 때문에 공성전을 벌여봐야 공략할 가능성이 희박했기에, 독일군은 공성전을 포기하고 보급품을 운반하는 선박이 있는 베르테스를 향해 북쪽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그러나 벨러는 적의 의도를 간파하고 사절 한 명을 독일인으로 가장하여 게브하르트 주교에게 보내 배를 거둬들여 본국으로 철수하게 했다. 이로 인해 베르테스에 도착했을 때 선박이 없자, 독일군은 완전히 낙심한 채 레겐스부르크로 퇴각했다. 그 과정에서 헝가리군이 끈질기게 추격하는 바람에 많은 사상자와 포로가 발생했다.
하지만 하인리히 3세는 실패에 굴하지 않고 1051년 봄에 헝가리를 다시 침공했다. 독일군은 도나우 강을 따라 내려가다가 포조니를 포위하여 8주 동안 공성전을 벌였다. 이때 조문트라는 이름의 수비대 전사가 밤에 강을 헤엄쳐서 적 선박 근처에 숨은 뒤 배 밑바닥에 구멍을 뚫었다. 이로 인해 배에 물이 차서 작전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게 되자, 독일군은 어쩔 수 없이 퇴각해야 했다.
그 후 하인리히 3세는 교황 레오 3세의 중재에 따라 헝가리와 평화 협상을 벌였다. 그는 상당한 돈과 영토를 요구했지만, 독일 내부에서 황제에 대항하는 반란이 터지는 바람에 협상이 중단되었다. 1056년 하인리히 3세가 죽고 6살 된 아들 하인리히 4세가 독일왕이 되었다. 왕의 어머니로서 섭정을 맡은 푸아투의 아녜스는 국내 사정이 불안한 상황에서 헝가리와 이 이상 전쟁을 이어가는 것은 무익하다고 여기고 1058년 헝가리에게 어떠한 요구도 하지 않은 채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이때 양자는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언드라시 1세의 아들 셜러몬과 하인리히 3세의 딸인 슈바벤의 유디트와 약혼했다.
언드라시 1세는 전쟁을 종결한 후 아들 셜러몬을 공동 왕으로 내세웠다. 그러자 전쟁을 승리로 이끈 벨러가 반발했고, 헝가리 왕국은 또다시 내란의 조짐을 보였다. 얼마 후 둘째 아들 다비드가 태어났지만, 언드라시 1세는 기쁨을 채 누리기 전에 뇌졸중에 걸려서 신체 일부가 마비되었다. 그는 자신이 이대로 죽으면 동생 벨러가 두 아들을 해칠까 두려워했다. 왕실 고문들은 벨러를 죽이라고 권했지만, 언드라시는 문제를 평화롭게 해결하고 싶었기에 벨러에게 셜러몬을 위해 은퇴하기를 권하기로 했다.
1059년, 언드라시 1세는 벨러를 티서바르코니의 별궁으로 초대한 뒤 그에게 왕관과 검을 내밀며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지시했다. 왕관은 왕국을, 검은 두카트를 상징했다. 벨러가 왕관을 선택한다면 왕의 추종자들이 그 자리에서 그를 죽일 것이고, 그가 검을 가져가면 그는 자신이 맡은 영지에서 평화롭게 통치할 수 있었다. 벨러가 한동안 망설이고 있을 때 벨러의 추종자인 미클로스가 "오래 살고 싶으면 검을 선택하십시오."라고 속삭였다. 벨러는 그 말에 따라 검을 선택했고, 언드라시는 동생을 돌려보냈다.
그 후 벨러는 형이 언젠가는 자신을 해칠 거라 여기고 폴란드 국왕 볼레스와프 2세의 지원을 받아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언드라시는 이에 맞서 아녜스 황후의 지시에 따라 바이에른, 보헤미아, 작센에서 파견된 독일군의 지원을 받았다. 양자는 몬슨 인근에서 맞붙었고, 반나절 동안 이어진 격전 끝에 벨러가 승리했다. 언드라시는 신성 로마 제국으로 망명하려 했지만, 사전에 탈출로를 차단한 벨러의 기병에 의해 사로잡혔다. 이후 바코니 숲의 지르크 저택에 갇혀 지내다 1060년 12월 6일 이전에 사망했다. 사후 티하니 수도원의 교회 지하실에 묻혔고, 벨러가 새로운 헝가리 국왕 벨러 1세로 등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