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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2a3e><colcolor=#ffffff> 헝가리 왕국 프르셰미슬 왕조 국왕 보헤미아 왕국 프르셰미슬 왕조 7대 국왕 폴란드 왕국 프르셰미슬 왕조 2대 국왕 바츨라프 3세 Václav III | |
출생 | 1289년 10월 6일 보헤미아 왕국 프라하 |
사망 | 1306년 8월 4일 (향년 16세) 보헤미아 왕국 올로모우츠 |
재위 | 헝가리 왕국과 크로아티아 왕국의 왕 |
1301년 ~ 1305년 | |
보헤미아 왕국의 왕 | |
1305년 ~ 1306년 8월 4일 | |
폴란드 왕국의 왕 | |
1305년 ~ 1306년 8월 4일 | |
배우자 | 테첸의 비올라 (1305년 결혼) |
자녀 | 엘리자베트(사생아) |
아버지 | 바츨라프 2세 |
어머니 | 합스부르크의 유타 |
형제 | 안나, 엘리슈카, 마르케타 |
종교 |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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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 왕국 프르셰미슬 왕조 국왕, 보헤미아 왕국 7대 국왕, 폴란드 왕국 프르셰미슬 왕조 2대 국왕. 3개국을 동시에 다스렸으나 16살 때 암살당하는 바람에 프르셰미슬 왕조는 단절되었다.2. 언어별 표기
체코어 | Václav III (바츨라프 3세) |
헝가리어 | Vencel (벤첼) |
크로아티아어 | Vjenceslav (벤체슬라브) |
폴란드어 | Wacław III Czeski (바츠와프 3세) |
3. 생애
1289년 10월 6일 보헤미아 왕국의 수도 프라하에서 보헤미아 국왕 바츨라프 2세와 합스부르크 가문의 유타(Jutta von Habsburg 1271~1297)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에게는 함께 태어난 쌍둥이 형제 아네슈카가 있었지만, 아네슈카가 얼마 안가 사망했고 다른 형제들도 일찍 죽었기 때문에 사실상 외아들이 되었다. 1298년 2월 12일 9살의 나이에 빈에서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1세와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언드라시 3세가 지켜보는 가운데 언드라시 3세의 딸인 10세의 에르제베트와 약혼했다.1301년 1월, 언드라시 3세가 사망하면서 수 세기 동안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으로 군림하던 아르파드 왕조가 단절되었다. 언드라시 3세 생전부터 헝가리 왕을 자처하던 나폴리 왕국의 카로이 로베르트 왕자가 에스테르곰으로 가서 에스테르곰 대주교의 추대를 받으면서 헝가리 국왕이 되는 듯했지만, 헝가리 귀족들은 교황이 지지하는 그를 왕으로 받아들이면 자신들이 교황의 간섭에 시달릴 것을 우려했기에 추대하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전통적으로 대관식이 거행되는 세케슈페헤르바르가 아닌 에스테르곰에서 대관식이 거행된 것은 무효라며 카로이 로베르트의 집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소집된 헝가리 의회에서는 바츨라프 왕자와 니더바이에른 공작 오토 3세가 유력 후보로 거론되었다. 그러다가 바츨라프 2세로부터 막대한 뇌물을 받아챙긴 귀족들은 바츨라프 왕자를 헝가리 국왕으로 추대하기로 결의했다. 1301년 8월 27일, 아버지가 보내준 수행원과 보헤미아군과 함께 세케슈페헤르바르에 도착한 뒤 컬로처 대주교로부터 왕관을 쓰고 '라슬로'라는 왕호를 사용했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그를 '라슬로 5세'라고 칭하기도 한다.
헝가리 영주들은 대부분 그의 집권을 받아들였지만, 크로아티아 영주들은 카로이 로베르트만을 왕으로 모셨다. 이에 1301년 8월 말, 이반 쾨체그가 이끄는 왕실군이 출진해 에스테르곰을 공략했고, 카로이는 헝가리 남부로 피신했다. 하지만 카로이를 따르는 주들을 본격적으로 정벌하려는 시도는 이뤄지지 않았고, 헝가리는 카로이를 지지하는 세력과 바츨라프를 지지하는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그나마도 강력한 권세를 떨치는 귀족들이 국정을 주도했고, 바츨라프와 카로이 모두 별다른 실권이 없었다.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보헤미아 왕 바츨라프 2세에게 자신의 허락 없이 아들을 헝가리 왕으로 세운 것에 항의하는 서신을 보냈다. 1301년 9월 헝가리를 방문한 교황 사절 니콜로 보카시니는 헝가리 고위 성직자들에게 교황이 헝가리 왕으로 인정한 카로이를 지지하라고 설득했다. 이에 보헤미아 왕국은 헝가리 귀족들을 묶어두기 위해 그들에게 큰 영지와 높은 관직을 주었다. 그 결과, 바츨라프를 헝가리 왕으로 세우는 데 일조했던 컬로처 대주교 이슈트반을 포함한 많은 고위 성직자들이 1302년 상반기에 카로이 지지로 돌아섰지만, 귀족들은 바츨라프를 계속 왕으로 모셨다.
1302년 9월, 카로이가 바츨라프가 있던 부더를 포위했다. 그는 부더 시민들에게 바츨라프를 인도하라고 요구했지만, 수비대와 시민들은 끝까지 바츨라프를 지지했다. 그 사이, 이반 쾨체그가 이끄는 군대가 도착하여 포위를 풀었고, 카로이는 어쩔 수 없이 달마티아로 철수했다. 교황 사절 니콜로 보카시니가 부더에서의 성무 집행을 금지한다고 선언하자, 부더의 사제들은 교황과 헝가리의 주교들을 파문했다. 1303년, 보니파시오 8세는 바츨라프 2세에게 로마로 출두해서 입장을 밝히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바츨라프 2세가 응하지 않자, 그해 5월 31일에 바츨라프 왕의 헝가리 왕 선출은 무효이며 카로이야말로 헝가리 왕이 되어야 한다는 교령을 반포했다. 여기에 독일왕 알브레히트 1세도 바츨라프 2세에게 아들을 헝가리에서 내보내라고 요구했다.
상황이 이처럼 악화되자, 많은 헝가리 귀족들이 카로이 편에 돌아섰고 바츨라프 왕의 세력은 부더와 그 주변 지역으로 축소되었다. 바츨라프 2세는 아들을 구하고 카로이를 무찌르기 위해 1304년 5월 대군을 이끌고 헝가리로 진군했다. 그의 군대는 슬로바키아 서부 일대를 행진하며 무자비하게 약탈한 뒤 에스테르곰을 공략하고 에스테르곰 주교 에호르를 생포했다. 그러나 카로이를 지지하는 영주들의 세력이 만만치 않은 데다, 아들을 왕으로 받든 영주들도 제대로 협조해주지 않고 자기들 권익을 챙기는 데 급급한 모습을 보이자, 그는 아들이 헝가리에 계속 체류했다간 위험해지겠다고 판단했다. 이에 아들을 보헤미아로 데려가되 헝가리 왕위는 계속 유지하고 이반 쾨체그를 왕을 대신하여 헝가리를 이끌 통치자로 세웠다. 이때 헝가리의 성 이슈트반 왕관 역시 보헤미아로 이송되면서, 헝가리 민심이 악화되었다.
1304년 9월, 카로이와 오스트리아 공작 루돌프 3세가 모라비아를 침공했지만 바츨라프 2세에게 격파되었다. 이후 알브레히트 1세와 바츨라프 2세간에 평화 협상이 진행되었으나, 이 무렵 건강이 악화된 바츨라프 2세는 1305년 4월부터 병상에 누워서 사경을 헤매다가 1305년 6월 21일에 사망했다. 그리하여 바츨라프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헝가리-크로아티아 왕위에 아버지가 지니고 있던 보헤미아와 폴란드 왕위까지 물려받았다. 그러나 당시 그가 처한 상황은 좋지 않았다. 왕실의 재정은 빚더미에 쌓였고, 폴란드의 상황은 귀족들의 연이은 반란으로 인해 혼란스러웠으며, 헝가리에서는 이름만 내걸었을 뿐 왕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없었다.
그는 일단 독일왕 알브레히트 1세와의 평화 협상을 이어갔다. 1305년 8월 18일, 알브레히트 1세는 보헤미아 국왕을 반역자로 비난했던 칙령을 취소하고 바츨라프의 전임자들이 소유한 권리와 특권을 확인했다. 이리하여 폴란드와 헝가리에 대한 권리를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 대가로, 그는 체브스코(Chebsko)를 알브레히트 1세에게 양도하고 베틴 가문에 모젤을 넘겨야 했다. 신성 로마 제국과의 분쟁을 종결한 뒤, 바츨라프는 헝가리 문제로 눈길을 돌렸다. 그는 무력으로 해결하기에는 전쟁 비용을 감당하기 힘들고 성공 가능성도 불확실하다고 보고 외교로 해결하기로 했다. 1305년 10월 9일, 그는 브르노에서 헝가리 왕위에서 물러나고 성 이슈트반 왕관과 보석을 포함한 헝가리 왕좌에 대한 권리를 니더바이에른 공작 오토 3세에게 넘겼다. 그 대신 니더바이에른 공국과 군사 동맹을 맺고 그들의 지원을 받아 폴란드 왕위를 유지하고자 했다.
한편, 그는 언드라시 3세의 딸 에르제베트와 맺었던 약혼을 파기하고 테셴-아우슈비츠 공작 메세크의 딸 비올라와 결혼했다. 이 선택은 당대에도 의외라는 평을 받았다. 테셴 공작의 권위나 위세 모두 프르셰미슬 왕조에 비할 바 아니었고, 폴란드에서 프르셰미슬 왕조의 역량을 강화하는 데 별다른 도움을 주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즈브라슬라프 연대기 작가 페트르 자타프스키는 그가 강력한 권위를 갖춘 왕족과 결혼해서 권세가 지나치게 강해지면 자기들을 억압할 것을 우려한 보헤미아 귀족들이 일부러 보잘 것 없는 공작의 딸과 결혼하라고 부추겼다고 기술했다. 반면 일부 학자들은 그가 폴란드의 수도 크라쿠프를 온전히 소유하기 위해 보헤미아와 크라쿠프간의 연락로 사이에 있는 테셴-아우슈비츠를 확실한 동맹으로 삼고자 결혼을 주선했다고 추정한다. 그는 이와 더불어 1306년 2월 13일 여동생 안나를 케른텐 공작 하인리히와 결혼시킴으로써 아군을 늘리고자 했다.
즈브라슬라프 연대기에 따르면, 바츨라프는 아버지를 섬겼던 노련한 신하들의 조언을 듣지 않고 또래 귀족들과 어울려 지냈으며, 그들로부터 온갖 추잡한 이야기를 듣고 음란해져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무절제한 성생활을 보냈고, 술에 중독되어 술에 빠져 지냈다. 젊은 귀족들은 왕을 그렇게 만든 뒤 그로부터 보물, 마을, 도시 등 많은 재산을 빼돌렸고 여러 특권을 받아냈다고 한다. 그러던 중 브와디스와프 1세가 저항군을 이끌고 크라쿠프를 위협하면서 폴란드에 대한 프르셰미슬 왕조의 입지가 위태로워지자, 그는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 토지세를 부과해 군자금을 마련하여 용병들을 고용한 뒤 폴란드 원정에 착수하려 했다. 귀족들이 토지세에 반발하자, 그는 그들의 재산을 강압적으로 몰수하고 많은 이를 죽이거나 감옥에 가두었다.
1306년 7월, 바츨라프는 군자금을 어느정도 확보한 뒤 올로모우츠로 가서 용병들을 모집했다. 그러는 동안 보헤미아 정부를 처남이자 케른텐 공국의 공작인 하인리히에게 맡겼다. 그런데 1306년 8월 4일, 그는 올로모우츠에서 암살당했다. 이때 그의 나이 16살이었다. 올로모우츠 수도회 부고는 이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보헤미아의 왕 바츨라프 3세가 오후에 야외를 거닐다가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튀링겐의 콘라트에게 살해되었다.
즈브라슬라프 연대기는 암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그는 여름에 더위를 식히려고 셔츠와 망트만 입은 채 궁전에 있었다. 이때 절대적으로 사람으로 여겨져서는 안 되고 오히려 사탄의 동반자, 범죄의 저자, 자연에 대항하는 적, 모든 악의 찌꺼기와 악취를 가진 사람이 음모를 전혀 모르는 청년에게 접근해 적절한 기회를 얻어서 그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세 번 입히고 도망쳤다. 우리 모두는 오늘날까지도 누가 그렇게 엄청난 불명예의 가해자였는지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러나 보텐슈타인의 콘라트라는 기사가 피 묻은 칼을 손에 들고 궁전에서 뛰어나와 도망치는 것이 목격되었다. 그리고 밖에 있던 사람들은 그가 말을 하기도 전에 그를 붙잡아 왕의 살인자로 죽였다. 그가 유죄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 유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은 내가 알고 있고, 전세계에 알려진 것이다.
다른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점심 식사 후 낮잠, 또는 산책으로 혼자 있던 중에 보덴슈타인의 콘라트라는 하급 기사에게 살해되었고, 암살자는 분노한 왕의 수하들에게 체포된 뒤 사지가 찢겨진 후 개의 먹이로 주어졌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독일왕 알브레히트 1세가 바츨라프 암살을 사주했다고 주장하며, 다른 학자들은 브와디스와프 1세가 암살을 사주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그를 죽이고 보헤미아의 실권을 잡으려는 케른텐 공작 하인리히나 토지세를 강요받은 것에 불만을 품은 보헤미아 및 모라비아의 귀족 세력 등이 암살 배후로 지목되었지만, 진상은 현재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그는 생전에 왕비로 들였던 비올라로부터 자식을 낳지 못했고, 단지 사생아로 엘리자베트만 뒀다. 이리하여 프르셰미슬 왕조는 단절되었고, 처남 하인리히가 보헤미아 국왕 인드르지흐 코루탄스키(Jindřich Korutanský)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1307년 알브레히트 1세가 보헤미아를 침공해 프라하를 점령하고 아들 루돌프 3세를 보헤미아 국왕 루돌프 1세로 선출했다. 이후 보헤미아는 루돌프 1세와 인드르지흐와의 내전에 수년 간 시달렸다. 1307년 루돌프 1세가 사망하면서 인드르지흐가 복위했지만, 1310년 보헤미아 귀족들에게 축출되고 룩셈부르크 가문 출신의 얀 루쳄부르스키가 보헤미아 국왕으로 등극했다.
바츨라프의 사생아인 엘리자베트는 시토회 수녀원으로 들어가 수녀로 지내다가 베네딕토회 수녀원으로 옮겼다. 1340년 모라비아의 푸스티메르에 수녀원을 세우고 그곳의 수녀원장으로 지내다가 1347년경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