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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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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fff>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초대 국왕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
Zygmunt II August
파일:6DC2DC4B-59E2-4B3E-B283-C74F93386C34.jpg
출생 1520년 8월 1일
폴란드 왕국 크라쿠프
사망 1572년 7월 7일 (향년 51세)
폴란드-리투아니아 크니신
재위 폴란드 왕국의 국왕, 리투아니아 대공국 대공
1548년 4월 1일 ~ 1572년 7월 7일
배우자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
(1543년 결혼 / 1545년 사망)
바르바라 라지비우
(1547년 결혼 / 1551년 사망)
오스트리아의 카타리나
(1553년 결혼 / 1572년 사망)
아버지 지그문트 1세
어머니 보나 스포르차
형제 야드비가, 안나, 이자벨라, 조피아, 안나, 카타지나, 올브라흐트
문장 파일:Coat_of_Arms_of_Jagiellon_kings_of_Poland.svg
서명
파일: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 서명.svg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치세
2.2.1. 바르바라의 폴란드 왕비 등극을 위한 정치 투쟁2.2.2. 리보니아 전쟁2.2.3. 루블린 조약2.2.4. 종교 정책2.2.5. 예술 진흥 정책
2.3.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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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어: Zygmunt II August
리투아니아어: Žygimantas Augustas

폴란드 왕국 야기에우워 왕조 7대 국왕, 리투아니아 대공국 22대 대공. 동군연합이었던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를 통합시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초대 군주가 되었다. 폴란드 르네상스의 정점을 이끈 군주로 일컬어진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1520년 8월 1일 폴란드 왕국의 수도 크라쿠프에서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1세밀라노 공작 잔 갈레아초 스포르차의 딸 보나 스포르차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보나 스포르차는 르네상스를 신봉하는 인물로, 로마 제국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녀는 아들이 로마 제국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처럼 위대한 인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아우구스트(August)'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는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계승할 야기에우워 왕조의 유일한 인물[1]이었기 때문에 폴란드에서 가장 유명한 학자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고, 어머니의 세심한 보살핌을 받았다. 1522년 아버지와 함께 리투아니아 공동 대공이 되었고, 1529년에는 선거를 통해 폴란드 공동 국왕으로 등극했다. 폴란드 국왕 대관식은 1530년에 거행되었다.

1526년, 사촌형 러요시 2세모하치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에 참패해 목숨을 잃었다. 이후 헝가리 왕국은 합스부르크 가문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1세를 따르는 합스부르크 헝가리서포여이 야노시를 받드는 동헝가리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서포여이 야노시는 지그문트 1세의 차녀 이자벨라와 결혼하였으며 보나 스포르차는 강력한 반 합스부르크 파였기에, 합스부르크 가문 내에서는 자칫했다간 중부 유럽 최강의 국가 중 하나인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헝가리 분쟁에 개입해 서포여이 야노시를 지원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감돌았다.

이에 합스부르크 가문 에서는 폴란드 왕자 지그문트 아우구스트와 페르디난트 1세의 딸인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를 결혼시켜서 분쟁을 미연에 방지하기로 했다. 지그문트 1세 역시 모스크바 대공국과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가문이었던 합스부르크 가문을 적대할 수는 없었기에 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양자는 1530년 11월 11일 포즈난에서 예비 결혼 협약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결혼은 엘리자베트가 7살이 되는 1533년에 이뤄지기로 했고 지참금은 100,000두카트였다. 폴란드는 그 대가로 신부에게 노비 송치, 산노크, 프셰미실, 비예츠를 제공하기로 했다.

지그문트 2세의 친할아버지인 카지미에시 4세는 엘리자베트의 외증조부이기 때문에[2] 두 사람은 오촌 관계였다. 따라서 이 결혼이 성립되려면 교황청의 허가가 필요했다. 1531년 8월 24일, 교황 클레멘스 7세는 특별 결혼 허가를 발령했다. 1533년, 페르디난트 1세는 폴란드 측에 약혼 선물을 보냈다. 그 선물은 미래의 폴란드 국왕을 위한 금박 퍼레이드 갑옷과 2개의 안장으로 구성되었다. 이후 보나 스포르차가 결혼의 성립을 강력하게 반대했기 때문에 수년간 지연되었지만, 지그문트 1세가 왕비의 반대를 무릅쓰고 진행시킨 끝에 1538년 6월 16일 보헤미아 왕국브레슬라우에서 결혼 조약이 최종 성립되었다. 1538년 7월 17일 인스브루크에서 약혼식이 거행되었다.

보나 스포르차는 아들의 약혼식이 거행된 뒤에도 엘리자베트가 폴란드 왕비가 되는 걸 원하지 않았고,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의 막내딸인 발루아의 마르그리트[3]에게 합스부르크 가문에 맞서 프랑스와 폴란드의 결혼 동맹을 맺을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결혼 절차는 착실히 진행되었고 1543년 5월 엘리자베트와 지그문트 아우구스트의 결혼식이 바벨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이때 엘리자베트는 폴란드 왕비라는 칭호를 받았는데 보나 스포르차는 자신이 졸지에 '오래된 왕비'가 되어버렸다며 엘리자베트를 더욱 싫어했다. 이후 신혼부부는 빌뉴스에 거주했다.

그러나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않았다. 지그문트 아우구스트는 엘리자베트와 결혼하기 전부터 정부를 여러 명 두었고 엘리자베트가 별로 매력적이지 않다고 여기고 혼외 관계를 계속했다. 엘리자베트는 엄격한 가정환경에서 자라면서 순종적이고 소심한 성격이었기에 남편의 비행과 시어머니 보나의 시집살이에 대해 제대로 따지지 못했다. 더구나 뇌전증에 걸려 여러 차례 발작을 일으켰고 지그문트 2세는 그런 엘리자베트를 보고 혐오감마저 느꼈다. 지그문트 1세와 여러 폴란드 귀족들은 시어머니에게 냉대받고 남편에게 외면당하는 착한 엘리자베트를 동정했고, 지그문트 아우구스트에게 아내를 좀 더 잘 대해달라고 충고했지만 잘 먹히지 않았다. 그러다가 1545년 6월 15일, 엘리자베트는 간질 발작으로 인해 건강이 쇠약해진 끝에 사망했고 빌뉴스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지그문트 2세는 여러 정부 중에서 리투아니아 헤트만 예르지 라지비우의 딸이며 리투아니아 귀족 스타니슬로바스 고슈타우타스의 미망인이었던 바르바라 라지비우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엘리자베트 사후 그녀와 비밀 결혼했다. 1548년 2월 2일, 지그문트 아우구스트는 피오트르쿠프에서 부모에게 결혼 소식을 알렸다. 이 사실이 널리 알려지자 폴란드 귀족들은 세임의 허가 없이 결혼이 거행되었다며 발칵 뒤집혔고, 지그문트 아우구스트의 어머니 보나 스포르차 역시 아들이 정부에게 놀아난 끝에 결혼해버렸다며 노발대발했다. 이후 바르바라는 지그문트 아우구스트를 유혹하기 위해 주술이나 미약을 사용했다는 비방에 시달렸다. 한편 리투아니아 귀족들은 지그문트 아우구스트와 바르바라의 결혼에 공개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이 일로 라지비우 가문의 권세가 높아질 것을 우려했다.

2.2. 치세

2.2.1. 바르바라의 폴란드 왕비 등극을 위한 정치 투쟁

지그문트 아우구스트와 바르바라 라지비우의 비밀 결혼 사건으로 폴란드 정계가 어수선하던 1548년 4월 1일, 지그문트 1세가 81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빌뉴스에서 바르바라와 함께 있던 그는 대관식을 거행하기 위해 크라쿠프로 갔고, 바르바라는 빌뉴스에 남았다. 그해 9월, 대관식을 마친 지그문트 2세는 바르바라를 폴란드로 초대한 뒤 신하들에게 바르바라를 소개했다. 이후 그해 10월 31일부터 12월 12일까지 피오트로쿠프에서 열린 세임에서 바르바라를 폴란드 왕비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피오트르 크미타 소비에스키, 얀 가브리엘 텡친스키, 피오트르 보라틴스키를 비롯한 폴란드 마그나트(Magnat)[4]들은 바르바라를 왕을 현혹시킨 요부라고 비난하며 당장 바르바라와 헤어지라고 요구했으며, 이를 들어주지 않으면 반란을 일으키겠다고 위협했다. 지그문트 2세는 이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고 아내를 끝까지 옹호했으며, 심지어 퇴위까지 고려했다. 결국 세임은 별다른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산회했다. 이후 지그문트 2세와 바르바라는 크라쿠프에 입성했고, 바르바라는 1549년 5월에 남편으로부터 카우나스 성, 알리토스, 메르키네, 네무나이티스, 비르슈토나스, 지에즈마리아이, 카르멜라바, 빌키야, 다르수니스키스 등 많은 봉토를 수여받았다. 얼마 후, 귀족들은 바르바라를 지그문트 2세의 아내로 인정하지만 폴란드 왕비로서의 대관식을 거행하지 않는다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지그문트 2세는 그렇게 하면 바르바라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가 적법한 자식으로 인정받지 못할 거라 여기고 거부했다.

1549년 여름, 지그문트 2세는 귀족들의 반란으로부터 왕권을 지키기 위해 독일왕 겸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1세와 동맹을 맺고 누나 이자벨라 야기엘론카가 페르디난트 1세의 통치 국가 중 하나인 헝가리 왕위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을 도와주던 걸 중지했다. 또한 교황청이 바르바라와의 결혼을 허락하도록 유도하고자 이단을 금지하는 칙령을 반포했으며, 귀족들이 결혼에 반대하지 않도록 위협하거나 뇌물을 주거나 정중하게 설득했다. 그러면서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어머니 보나 스포르차를 마조프셰로 보내버렸다.

1550년 5~7월에 열린 세임에서, 왕에게 회유된 귀족들은 왕의 의지가 굳건한 이상 결혼을 반대하지 않기로 했다. 비록 명시적인 허가가 내려지지는 않았지만, 지그문트 2세는 왕비 대관식을 즉시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그리하여 바르바라는 1550년 12월 7일 바벨 대성당에서 그니에즈노 대주교인 미코와이 지에르츠고프스키에 의해 폴란드 왕비로 등극했고, 어머니 보나 스포르차 역시 어쩔 수 없이 동의하겠다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바르바라는 발열, 복통, 식욕 상실에 시달렸고, 급기야 배에 고름이 가득 찬 덩어리가 나타나는 증세를 보였다. 지그문트 2세는 아내를 어떻게든 치료하려 애썼고, 고약한 고름 냄새가 나는 아내를 곁에서 정성껏 돌봤다. 그러나 바르바라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고, 결국 1551년 5월 8일 크라쿠프에서 사망했다.

지그문트 2세는 바르바라를 잃은 것에 깊은 슬픔에 빠졌고, 더욱 진지해지고 내성적인 성격이 되었다. 그는 이후로 무도회를 피했고, 죽을 때까지 검은 옷을 입었다. 이후 1553년 7월 합스부르크 가문루스 차르국의 동맹을 막기 위해 페르디난트 1세의 또다른 딸인 오스트리아의 카타리나와 결혼했지만 이 결혼 역시 행복하지 못했다. 지그문트 2세는 카타리나가 뚱뚱하고 둔해서 매력이 없다고 여겼고 카타리나는 과거 형부였던 지그문트가 자신의 언니 엘리자베트를 박대해 젊은 나이에 사망하게 만들었다며 혐오했다. 카타리나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정책을 합스부르크 가문에 유리하게 만들도록 유도하려 애썼고, 왕을 알현하려는 합스부르크 사절단과 먼저 만나 지그문트 2세를 어떻게 회유해야 하는 지를 공모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지그문트 2세는 환멸을 느껴 카타리나를 라돔으로 보내고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게 했다.

2.2.2. 리보니아 전쟁

부왕 지그문트 1세 치세인 1525년, 튜튼 기사단알브레히트루터교회로 개종한 뒤 폴란드 국왕의 가신이자 프로이센 공국의 공작이 되기로 했다. 그러면서 튜튼 기사단의 리보니아 지부인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에게 개신교로 개종하고 폴란드 왕국의 가신이 되라고 설득했다. 그러나 리보니아 기사단은 이에 격렬하게 반발했다. 1557년, 알브레히트가 형제 빌헬름과 루터교 목사들을 파견해 명령을 시행하자, 가톨릭을 믿는 기사 및 영주들이 반란을 일으켜 빌헬름과 메클렌부르크-가데부슈 공작 크리스토프를 체포했다. 자력으로 이를 막지 못했던 알브레히트는 지그문트 2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가톨릭 국가의 군주가 개신교를 신봉하는 봉신을 위해 가톨릭 반란군을 진압해야 하는 기묘한 상황이었지만, 지그문트 2세 본인이 종교에 별 관심이 없던 데다 주군으로서 봉신의 곤경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를 내세워 리보니아로 군대를 파견했다. 1557년 7월 가톨릭 리보니아 영주들은 폴란드군에 대적하지 못하고 항복했고, 1557년 9월 14일 포즈볼 조약에 서명했다. 이 조약에 따르면, 대부분의 리보니아 영토는 폴란드의 주권을 인정하고,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은 해체되며 마지막 기사단장인 고트하르트 케틀러는 쿠를란트와 쳄갈렌의 공작에 선임되어 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보다 앞선 1554년,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은 루스 차르국과 15년 평화 협약을 맺으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와 동맹을 맺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이제 리보니아가 폴란드에 예속되자, 루스 차르국의 차르 이반 4세는 계약 위반이라고 여기고 전쟁을 단행하기로 마음먹었다. 1558년 1월 22일, 이반 4세는 리보니아를 폴란드의 침략으로부터 해방시키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전쟁을 선포했다. 그 해 5월에 도르파트가 루스군에 함락되었고, 7월에는 나르바가 함락되었으며, 레발은 별다른 저항 없이 항복했으며, 그 외의 여러 요새가 루스군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이에 리보니아 현지군은 1,200명의 란츠크네히트, 100명의 포수를 고용한 뒤 반격을 개시해 라크베레를 성공적으로 탈환했다. 이후에도 여러 요새가 리보니아군에 넘어갔지만, 도르파트, 나르바 및 여러 소규모 요새들은 루스군에게 남아 있었다.

1559년 1월, 루스군은 재차 공세를 개시해 리보니아의 여러 요새를 함락했다. 하지만 그해 5월 크림 칸국과의 전쟁이 발발하자, 리보니아와 6개월간의 평화 협정을 맺었다. 리보니아 측은 처음에는 페르디난트 1세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하자 폴란드-리투아니아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1559년 6월, 리보니아 전역은 제1차 빌뉴스 조약을 통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정식 보호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폴란드 세임은 이 조약이 리투아니아 대공국에만 이롭다고 여기고 조약 동의를 거부했다. 1560년 1월, 지그문트 2세는 루스 기병대가 리보니아 시골 지역을 약탈하는 것을 막기 위해 사절단을 모스크바에 파견했지만 별다른 응답을 받지 못했다.

지그문트 2세는 강성해지고 있는 루스 차르국과 당장 정면 대결을 벌이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고 판단했다. 그 대신, 그는 외교를 통해 우호국을 끌어들이려 했다. 1561년 스웨덴 국왕 에리크 14세의 군대가 레발을 포함한 에스토니아 북부 일대를 정복한 후 에스토니아 공국을 세우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봉신국인 쿠를란트 공국과 맞닿게 되자, 그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에리크 14세의 형제이며 핀란드 공작인 요한과 누이 카타지나 야기엘론카의 결혼을 주선했다.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은 동생이 외국의 공주와 결혼하면 자신의 위치가 위험해질 것이라고 판단한 에리크 14세는 명확한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안 요한은 에리크 14세의 동의 없이 혼담을 진행했다.

1562년 10월 4일, 카타지나는 요한과 결혼식을 거행했다. 이에 분노한 에리크 14세는 1563년 8월 요한의 거처인 오보 성을 함락시키고 요한을 체포했다. 카타지나에게는 폴란드로 돌아갈지 성에 유폐될지 선택지가 주어졌고, 카타지나는 남편 곁에 있는 것을 선택했다. 요한과 카타지나는 그립스홀름 성에 유폐되었다. 이에 지그문트 2세는 같은 해 10월 에리크 14세에 맞서기 위해 덴마크뤼베크 시와 동맹을 맺었다.

1563년, 이반 4세는 리투아니아를 대대적으로 침공해 비쳅스크를 습격했고, 뒤이어 폴라츠크를 공략했다. 이에 리투아니아군은 반격을 가했고, 1564년 바르바라 라지비우의 남자 형제였던 미코와이 라지비우가 이끄는 리투아니아군 10,000명이 루스군 17,000 ~ 24,000명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고 적군 사령관 표트르 이바노비치 슈이스키를 전사시켰다. 당대 연대기에 따르면, 리투아니아군은 적으로부터 막대한 전리품을 탈취했는데, 그 양이 엄청나서 군인들은 빵을 무료로 분배받았고 갑옷은 헝가리 금화 1개에 팔렸다고 한다. 이후에도 리투아니아군은 루스군을 계속 몰아붙인 끝에 리보니아 해안 지대를 확보했다. 반면 리보니아 중부의 도시와 마을들은 여전히 루스군의 지배를 받았다.

1564년, 루스 차르국의 왕족이자 유력한 사령관이었던 안드레이 미하일로비치 쿠르브스키가 이반 4세의 숙청을 피해 리투아니아에 망명했다. 지그문트 2세는 그에게 볼히니아에 있는 코벨 마을을 수여했고, 안드레이는 1564년 말 폴란드-리투아니아 군대를 이끌고 벨리키에 루키 일대를 황폐화시켰다. 쿠르브스키는 1564년에서 1579년 사이에 이반 4세와 독설이 담긴 서신을 여러 차례 주고받았고, 1573년에 이반 4세를 미쳐버린 폭군으로 매도하는 팜플렛을 배포하기도 했다.

1566년 5월, 리투아니아 외교관들이 모스크바에 방문해 리보니아를 루스 차르국과 분할하고 스웨덴을 에스토니아에서 몰아내기 위한 합동 공세를 펼치자고 제안했다. 이에 이반 4세는 리보니아 남쪽의 쿠를란트와 리투아니아-러시아 국경 지대의 폴라츠크를 리투아니아에게 양도할 테니 리가를 포함한 리보니아 전체를 루스 차르국이 갖겠다고 밝혔다. 리투아니아인들은 발트해 무역이 리가를 통해 이뤄졌기 때문에, 리가를 포기하라는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다. 게다가 이반 4세는 7월에 도르파트, 나르바 외에도 사레마 섬까지 루스 차르군의 영역에 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협상은 중단되었고, 양자는 국경 지대에서 수차례 맞붙었지만,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한편, 에리크 14세는 카타지나와 요한의 결혼을 무효화하고자 이반 뇌제에게 카타지나를 보낼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스투레 가문 인사 살해, 평민 카린 몬스도테르와의 결혼으로 스웨덴 귀족들의 미움을 산 에리크 14세는 그전에 폐위되었고, 요한와 카타지나는 1569년에 각각 스웨덴 국왕과 왕비로 등극해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우호 관계를 맺었다. 1570년, 폴란드-리보니아와 루스 차르국간의 3년 휴전 협정이 맺어지면서, 양국간의 전쟁은 일단 마무리되었다.

2.2.3. 루블린 조약

파일:루블린 연합.jpg
얀 마데이코 작, <루블린 연합>, 1869년.

지그문트 2세 치세의 가장 큰 성과는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하나의 국가인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으로 통합하고, 독일어를 사용하는 프로이센 공국 및 도시들과도 연합한 루블린 조약을 성사시킨 것이었다. 1569년 1월, 지그문트 2세는 폴란드 도시 루블린 근처에서 세임을 개최하고 양국의 통합안을 제시했다. 리투아니아 귀족들은 자신들의 지위와 부가 부유한 폴란드 대귀족이 아닌 소귀족들과 동등한 수준으로 떨어질 것을 우려하여 이 협약을 맺기를 꺼렸다. 특히 지그문트 2세의 전 처남인 미코와이 라지비우는 이 합의가 폴란드에 의한 리투아니아의 평화적 병합이라며 반대했다. 하지만 동방에서 150년 이상 지속된 모스크바 대공국과의 전쟁으로 인해 리투아니아 각지가 황폐화되었고, 모스크바 대공국의 뒤를 이은 루스 차르국이 이반 4세의 지도하에 계속 강성해지자, 리투아니아 귀족들은 현실적으로 폴란드 왕국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직시했다.

지그문트 2세는 1385년 야드비가 여왕과 요가일라 대공의 결혼으로 이뤄진 두 나라의 동군연합은 오래 지속되기엔 불안한 요소가 많다고 여겼고, 후손을 얻지 못한 자신이 야기에우워 왕조의 마지막 국왕이 될 것임을 직시하고 왕조의 유산을 보존하고자 했다. 그는 조약 반대 세력을 설득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탁월한 웅변술과 외교력을 갖췄던 그는 리투아니아 세임에 지속적으로 참석해 귀족들을 열심히 설득했고, 때로는 뇌물 공세를 벌였다. 이에 여러 귀족이 설득되었는데, 특히 포들라시에, 볼히니아, 포돌리아, 키예프 등 루테니아 일대의 귀족들은 폴란드가 제공하는 정치적, 경제적 잠재력을 활용하기를 열망하고, 1569년 3월 1일 왕이 제시한 조건에 동의했다.

다른 리투아니아 귀족들은 얀 히에로니모비치 코드키에비츠[5]를 중심으로 한 연합에 긍정적인 리투아니아 귀족 및 폴란드 대귀족들의 열렬한 설득을 받았다. 그들은 루블린 조약을 받아들인다면 자신들과 동등한 지위와 명예를 보유하는 걸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했다. 결국 1569년 7월 1일, 리투아니아 귀족들은 폴란드 국왕이 아니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국의 군주에게만 충성을 바친다는 조건으로 루블린 협약을 승인했다. 7월 4일, 지그문트 2세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군주 자격으로 이 협약에 서명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이제 한 명의 왕에 의해 통치되고 하나의 의회를 가지며, 리투아니아 대공 선출 제도는 폐지되었다. 다만 행정과 재정 그리고 군대와 사법권은 각각 독립적으로 운영하기로 합의했으며, 당시에는 아직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법 체제가 더 정교하고 판례가 많다는 점 때문에 연방의 법 체계는 리투아니아 대법전을 기본으로 하여 1571년 5월 3일에 반포되었다.

프로이센 공국과는 루블린 조약과 별개로 프로이센 공국의 어린 공작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의 섭정이자 이복누나 야드비가와 결혼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아힘 2세 헥토어와 조약을 체결하여 알브레히트의 안스바흐 분가가 단절된다면 브란덴부르크의 호엔촐레른 가문 직계가 프로이센 공국을 물려받는 것을 인정했다.

2.2.4. 종교 정책

아버지 지그문트 1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기에, 루터교회를 대상으로 지속적인 박해를 가했다. 반면에 지그문트 2세는 종교에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신하가 가톨릭을 받들든, 마르틴 루터장 칼뱅의 주장을 따르든, 정교회를 믿든, 유대교를 믿든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한 번은 신하들이 종교 논쟁에서 어느 편을 들어야 하는지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나는 자네들 양심의 왕이 아니다.

그의 치세 동안 여러 폴란드 및 리투아니아 대귀족들이 루터교회 또는 칼뱅교회로 개종했는데, 대표적인 인물로 스타니스와프 자모이스키, 얀 자모이스키, 미코와이 레이, 안제이 프리츠 모드제프스키, 라스코의 얀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슐라흐타로 진입하기 위해 유니테리언으로 개종하는 일도 빈번했다.

지그문트 1세 치세 때부터 왕실 비서로 일하면서 정치작가로도 활동하던 안제이 프리츠 모드제프스키는 <교회론>을 집필했다. 그는 이 저서에서 폴란드에 대한 교황의 간섭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교황은 발을 올리고 거기에 입맞춤하라고 요구하고 있으며, 마치 신의 비밀 계획에서 나온 것처럼 모든 사람이 자신의 명령에 따르도록 강요한다. 그리고 그들은 인간일 뿐인데도 신성한 명예를 부여받기를 원한다.

그러면서 폴란드 내 교회의 지위를 규제하고, 국가에 종속되고 교황권으로부터 독립된 국가교회를 설립할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1534년 헨리 8세의 <수장령>에 의한 성공회 창설에 영감을 받은 것이었다. 지그문트 2세는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고, 1555년 피오트르쿠프에서 열린 세임에서 이 안건을 제시했다. 귀족들은 새로 제안된 폴란드 교회에 성직자의 권리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했는데, 특히 독신제를 폐지하자고 주장했다. 일부 가톨릭 주교들은 이를 지지했고, 폴란드, 리투아니아, 프로이센 등지의 모든 종파들을 공통 종교 아래 통합할 필요성을 인정했다.

지그문트 2세는 교황 바오로 4세에게 세임의 결정을 알리며 승인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바오로 4세는 교황의 권위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간주하고 파문을 내리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지그문트 2세와 세임은 이 일로 인해 신성 로마 제국 등 가톨릭 국가들과 전쟁이 벌어질 것을 우려해 계획을 취소했다. 그렇지만 개신교는 계속해서 확산되었고, 1565년에는 칼뱅주의에서 파생된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분파인 폴란드 형제단이 탄생했다. 지그문트 2세가 사망한 지 1년 후인 1년 후인 1573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맹 주민들의 종교의 자유를 부여하는 바르샤바 조약이 세임에서 체택되기도 했다.

2.2.5. 예술 진흥 정책

지그문트 2세는 아버지 지그문트 1세가 시작한 폴란드 르네상스 후원을 이어갔다. 그는 크라쿠프, 빌뉴스, 니에포워미체 및 바르샤바의 성채를 포함한 여러 왕실 거주지 개발을 실시했다. 1560년대엔 티코친 성을 인수해 르네상스 방식으로 재건했다. 티코친 성은 재무부와 도서관, 무기고를 갖춘 왕실 거주지로 사용되었다. 한편, 그는 보석과 원석을 열성적으로 수집했다. 그의 컬렉션은 16개의 상자에 보관되었는데, 그 중에는 카를 5세의 루비, 합스부르크 독수리 문양이 새겨진 다이아몬드 메달이 있었다. 1571년 동헝가리 국왕인 조카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가 사망한 뒤, 그는 성 이슈트반 왕관을 본떠서 만든 헝가리 왕관을 물려받았고, 스웨덴 왕관을 별도로 구입해 티코친 성의 개인 금고에 보관했다. 여기에 파디샤의 검, 30개의 말 덫, 20개의 개인용 갑옷을 갖췄으며, 1550 ~ 1560년에 브뤼셀에서 제작한 테피스트리 컬렉션 360개도 티코친 성에 보관되었다.

지그문트 2세는 단편소설, 시, 풍자를 즐겨 읽었다. 당대 폴란드 최고의 작가로 손꼽히는 얀 코차노프스키는 크라쿠프 주교였으며 역시 뛰어난 문학가로 명성이 자자했던 피오트르 미슈코프스키의 소개로 1563년부터 왕의 비서가 되었고, 지그문트 2세는 코차노프스키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문학적 지식을 향유했다. 또한 그는 이탈리아 금세공인, 보석상 등을 대거 고용해 왕궁에서 활동하게 했다.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던 생식 판화 제작자 조반니 야코포 카라글리오는 폴란드에 고용된 뒤 동전, 보석, 메달 제작을 전담했다. 그가 이 시기에 제작한 메달과 동전에는 지그문트 2세를 포함한 야기에우워 왕조의 마지막 구성원들의 얼굴이 들어 있었다.

1558년 10월 18일, 지그문트 2세는 크라쿠프에서 베네치아까지 운영되는 폴란드 최초의 정규 우편 제도를 도입하고 폴란드 우체국을 설립했다. 모든 유지 비용은 왕실이 부담했으며, 게시물은 대부분 이탈리아인이나 독일인이 관리했다. 1562년부터는 과 신성 로마 제국의 여러 도시까지 포괄하게 되었고, 폴란드와 합스부르크 제국에 속한 지역간의 지속적인 통신이 가능해졌다. 지그문트 2세가 사망한 지 1년 후인 1573년에는 바르샤바와 비스와 강을 가로지르는, 유럽에서 가장 긴 다리가 건설되었다.

2.3. 사망

세 번째 왕비 카타리나와의 혼인무효 요청이 교황에게 거부당한 후 자식을 볼 가망이 없자 절박해진 지그문트 2세는 폴란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들을 내연녀로 삼았고, 세임은 이렇게라도 해서 왕이 사생아라도 낳는다면 정식으로 입적시켜 후계자로 삼도록 합의했지만 지그문트 2세는 왕비는 커녕 내연녀들에게서도 단 한 명의 자녀도 얻지 못했다. 이 때문에 불임의 문제가 있었던 건 여자들이 아닌 지그문트 2세인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지그문트 2세는 결혼을 3차례나 하고 수많은 내연녀를 두었음에도 단 한 명의 자식도 얻지 못한 것에 몹시 괴로워했고, 통풍과 신장 결석에 시달렸으며, 말년에 결핵에 걸렸다. 베네치아 대사였던 안토니오 마리아 그라치아니는 지그문트 2세가 교황 특사 조반니 프란체스코 코멘도네를 접견했을 때 지팡이 없이는 서 있을 수도 없을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1572년 봄부터는 고열에 시달리다가 크니신에 있는 개인 휴양지로 가서 요양 생활을 하다가 1572년 7월 7일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이후 그의 유해는 인근의 타코친 성에 보관되었다가 1573년 크라쿠프로 이송되었고, 1574년 2월 바벨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사후에 그의 누이였던 안나 야기엘론카가 남편 바토리 이슈트반과 함께 폴란드-리투아니아 공동 국왕으로 옹립되었지만 자식을 낳지 못한 채 1596년에 사망하면서, 수세기 동안 중동부 유럽을 호령했던 야기에우워 왕조는 단절되었다.


[1] 사촌형인 보헤미아 왕국-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 왕국러요시 2세루드비크 국왕 시절 군주가 외국에 머무르면서 생긴 부작용으로 인해 폴란드 귀족들이 반대하여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계승권이 없었다.[2] 엘리자베트의 어머니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언너가 지그문트 2세의 친사촌이었다.[3] 나중에 이탈리아 전쟁을 끝낸 카토캉브레지 조약으로 사보이아 공작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와 결혼해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를 낳는다.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와 결혼할 당시에도 만혼이었을 만큼 본인에게 맞는 결혼 상대가 없다는 이유로 늦은 나이까지 결혼을 하지 않았다.[4] 폴란드 왕국의 소수의 대귀족 가문들.[5] 폴란드-리투아니아 역사상 최고의 기병대장이었던 얀 카롤 코드키에비츠의 아버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