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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18 16:51:02

모스크바 대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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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대공국
Великое Княжество Московское

Velikoye knyazhestvo Moskovskoye
Principality of Moscow
파일:모스크바 대공국 국기.sv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37px-Seal-of-Ivan-4_1539_a.svg.png
국기 국장[1]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oscow1500.png
1283년~1547년
킵차크 칸국의 속국(1283~1480)
성립 이전 차르국 선포 이후
노브고로드 공화국 루스 차르국
블라디미르-수즈달
<colbgcolor=#A71E22> 위치 동유럽
수도 모스크바
정치체제 전제군주제[2]
국가원수 벨리키 크냐즈(대공)
주요 대공 드미트리 돈스코이
이반 3세
이반 4세
언어 중세 러시아어
민족 루스인(러시아인)
왕조 류리크 왕조
국교 러시아 정교회
통화 루블
언어별 명칭
러시아어 Великое княжество Московское
(Velikoye knyazhestvo Moskovskoye)
중세 러시아어 Московь / Русь
(Moskovĭ / Rusĭ )
중세 몽골어 ᠣᠷᠤᠰ (Orus)
영어 Grand Duchy of Moscow, Muscovy

1. 개요2. 역사
2.1. 다닐 알렉산드로비치: 몽골군의 위협으로부터 필사적인 도주2.2. 유리: 킵차크 칸의 봉신2.3. 이반 1세: 킵차크 칸의 세무관2.4. 흑사병 이후, 드미트리 돈스코이: 정교회와의 협력, 일시적인 독립과 재복속2.5. 바실리 1세: 칸에게 대항2.6. 바실리 2세2.7. 이반 3세: 타타르로부터의 독립, 제3의 로마, 차르 선포2.8. 바실리 3세, 이반 뇌제
3. 정치 및 행정4. 군주5. 여담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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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세 말기에 설립된 키예프 루스[3] 계열의 제후국 중의 하나.

키예프 루스에서 갈라져 나온 수많은 제후국들 중 북동쪽에 위치한 제후국이었던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에서 출발해 몽골-타타르의 멍에 시기에 세력을 크게 키워 제후국들 중 최종 승리자가 되어 타타르의 멍에 시기를 종식시키고 동북부의 루스 지역을 통합하여[4], 루스 차르국을 세우면서 모스크바 대공국 - 루스 차르국 - 러시아 제국 - 소비에트 연방 - 러시아 연방[5]으로 이어지는 현대 러시아의 기틀을 닦은 국가이다.

편의상 모스크바라는 이름으로 자주 불리지만 공식적인 국호로써의 러시아 사용이 기록으로 입증되는 가장 오래된 시기이며[6] 타국과의 공식 외교 문서에서 차르 칭호가 사용됬던 시기이기도 하다.[7][8]반대로 제정 시대부터 러시아 학자들은 각각 정치적 중심지였던 키예프,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시대를 구분하여 모스크바 대공국과 루스 차르국 기간을 합해서 모스크바 루스(Московская Русь)라는 용어를 쓰기도 한다. 한편 이반 3세부터 표트르 1세까지의 기간을 루스 국가(Русское государство)로 명명하기도 한다.

이렇게 후대에까지 명칭이 엄격하게 정리되지 않은 것은 키예프 루스 시대의 한 류리코비치 구성원이 여러 크냐지 작위를 동시에 차지하는 전통과 관념이 이어져서 당대에 이미 혼동되었기 때문이다. 당대인들에게 러시아는 한 군주가 모스크바 대공국을 비롯한 여러 공국과 민족들을 통치하는 일종의 동군연합 혹은 여러 제후국들의 연합체로 여겨졌다.

예를 들어 알렉산드르 넵스키의 손자이자 2대 모스크바 크냐지인 유리 다닐로비치는 블라디미르의 대크냐지이자, 노브고로드의 크냐지였다. 이반 3세의 최상위 작위는 '전 루스의 군주(Государь Всея Руси)'였다. 즉 이들에게 있어서 모스크바 크냐지는 자신들의 가진 여러 하위 작위 중 하나에 불과했다. 때문에 엄밀히 말하자면 모스크바 대공국은 전체 국가가 아니라 그것을 구성하는 제후국 혹은 지방 중 하나에 불과했다.[9]

2. 역사

원래 모스크바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의 일부분이었다. 그러다 몽골 제국키예프 루스 침략[10]과 붕괴 이후 많은 루스인 난민들이 오카 강과 볼가 강 사이의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몽골 침략자들은 너무 먼 곳에서 와서 숫자가 적다보니 세세한 구석구석까지 직접 통치하긴 무리였고, 고향과 환경이 비슷하고 유목하기 좋은 우크라이나-남러시아 평원에 더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모스크바 같이 숲이 우거진 이런 오지들은 우크라이나 평야지대보다는 몽골-타타르인들로부터 훨씬 안전했다.

1263년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의 지배자이자 블라디미르 대공[11]이었던 알렉산드르 네프스키가 사망하고 그의 동생인 야로슬라프 3세가 그 뒤를 잇게 되면서,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의 아들이자 두 살에 불과했던 다닐 1세에게 가장 가치없는 모스크바의 땅을 수여하면서 내쫓았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당시 키예프-루스 계열에서도 왕가로 불리던 류리크 왕조의 인물이 모스크바에 자리를 잡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모스크바 공국이 수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신생 모스크바 공국은 도시 주민의 비중은 매우 낮았던 반면 농촌 인구는 난민 인구 증가에 힘입어 빠르게 증가했다. 이 지역은 인구가 매우 적어서 공후들이 난민들을 초청하여 자신들의 영토에 이주시켰기 때문이다. 잉여 생산물을 킵차크 칸국에 다 갖다바치는 형편이 되면서 키예프 공국 시절과 다르게 상업은 거의 비중이 없었으며 자급자족적인 경제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2.1. 다닐 알렉산드로비치: 몽골군의 위협으로부터 필사적인 도주

다닐 알렉산드로비치의 40년 통치기 동안에는 딱 한 차례 콜롬나 지역을 공격한 것을 제외하면 대외적인 활동이 없었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이 시기 모스크바는 1238년 몽골제국의 침공으로 한 번 불탔고 1293년에는 아예 도시 전체가 탈탈 털리는 사태까지 빚어져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바쁜 시기였기 때문이다. 결국 몽골군의 위협을 피해 숲에 보호를 받고 강을 끼고 있는 조금 더 안전한 지역으로 도시를 옮기면서 어느정도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2.2. 유리: 킵차크 칸의 봉신

다닐 알렉산드로비치 사후 그의 아들인 유리가 모스크바 공작위를 계승하면서 본격적으로 힘을 키우기 시작했다. 공작위를 계승한 유리는 서쪽으로 세력 확장을 꾀하면서 동시에 모든 러시아 제후들의 종주권을 지니고 있던 킵차크 칸국의 우즈베크 칸과 친하게 지내면서 러시아 제후들 사이에서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 하였다. 심지어는 우즈베크 칸의 여동생과 혼인을 맺기까지 했는데 때문에 칸은 유리에게 블라디미르 대공이란 작위를 인정해주었다. 그 결과 유리는 노브고로드 공화국을 비롯한 북서부 지역의 키예프-루시 계열 제후들에게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입지를 얻게 되었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당시 모스크바 공국은 트베리 공국이라는 나라와 대공 자리를 두고 대결하던 상황이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 유리가 우즈베크 칸의 누이와 결혼하고 이를 계기로 대공이라는 작위까지 내리자 이를 셈 낸 트베리의 공후가 모스크바를 침공하고 우즈베크 칸의 누이를 사로잡았다. 공교롭게도 트베리 공국 군대에게 사로잡힌 우즈베크 칸의 누이가 병으로 사망하자, 유리는 트베리 공작 미하일이 우즈베크 칸의 누이를 독살한 것 같다고 일러바쳤고, 우즈베크 칸 입장에서는 자기 누이가 죽은게 보통 일은 아니다보니 조치를 취하게 되었다. 모스크바를 침공해서 대승을 거두었던 트베리 공작 미하일은 킵차크 칸국 사라이의 조정에 출두하여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당했다. 이후 모스크바 공국의 군대와 몽골 군대는 트베리 공국을 계속 공격하였고, 이 과정에서 트베리 공국이 황폐화되면서 모스크바 대공국은 경쟁자를 누르고 세력을 확장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2.3. 이반 1세: 킵차크 칸의 세무관

유리의 뒤를 이은 이반 1세도 아버지를 따라 칸에게 열심히 비비면서 대공작위를 계속 유지하였고, 더불어 모든 러시아 제후국들이 칸에게 바치는 공물과 세금을 걷어들일 수 있는 권리를 따냈다. 덕분에 모스크바 대공국은 이 공물과 세금을 적당히 빼돌리면서(…) 한층 더 자신들의 세력을 키울 수 있는 밑거름으로 삼았다. 이후 이반 1세의 계승자들은 동슬라브권 통합에 힘썼다. 1326년에는 루스 세계 전체를 관할하던 키예프 부주교좌가 쇠퇴한 우크라이나 땅을 벗어나 모스크바로 옮겨져, 키예프 루스의 위상을 사실상 계승했다. 한편 이 시기부터 역시 같은 지역에서 세력확장을 꾀하던 리투아니아 대공과 라이벌 관계를 세우게 되었다.

2.4. 흑사병 이후, 드미트리 돈스코이: 정교회와의 협력, 일시적인 독립과 재복속

하지만 잘나가던 모스크바 대공국도 1350년 흑사병의 창궐로 기세가 한 풀 꺾이게 되었는데 무엇보다 공작가가 직격탄을 맞는 바람에 타격이 더 컸다. 결국 9세의 나이로 드미트리 이바노비치가 모스크바 공작위를 계승하게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대공위도 수즈달 공작에게 빼앗겼고, 리투아니아와 무슬림 유목민 등에 둘러싸여 자칫 잘못하면 멍석말이를 당할 위기에 처하였다.

이에 드미트리는 러시아 정교회와 적극 협력하면서 세력을 안정화시켰고, 킵차크 칸국에 대항하여 러시아의 독립을 꾀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 드미트리는 러시아 정교회의 공권력을 자청하고 있었는데, 러시아 정교회 사제들이 적극적으로 러시아 제후들을 설득하였고 그 결과 결성된 러시아 제후 연합군이 쿨리코보 전투에서 권신 마마이가 이끄는 킵차크 칸국을 관광태우는 쾌거를 얻었다.

그 결과 러시아는 칸에게 종속된 관계를 청산할 수 있었고 드미트리는 돈스코이별명을 얻으며 러시아의 영웅으로 칭송받게 되었다. 하지만 1382년 토흐타미쉬 칸이 병력을 이끌고 모스크바를 침공하여 역관광당하는 바람에 다시 칸에게 예속된 위치로 돌아갔다.

2.5. 바실리 1세: 칸에게 대항

이 사태로 인해 러시아의 독립이 다소 늦춰지게 되었지만 러시아인들에게 몽골과 맞서 싸워서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세워주웠다. 게다가 킵차크 칸국이 티무르 제국에게 털리고 국가 막장 테크를 타기 시작하자, 드미트리의 뒤를 이어 모스크바 대공국을 계승한 바실리 1세는 대놓고 칸에게 바칠 공물과 세금을 쌩까기 시작했다.

더불어 리투아니아 대공의 사위가 되어 스몰렌스크를 흡수하면서 발생할지 모르는 마찰을 방지하였고, 동쪽의 니즈니노브고로드와 북쪽의 볼로그다를 흡수하면서 세력을 키웠다. 게다가 다른 강력한 경쟁자였던 제후국들이 계승권 투쟁 등으로 분열되어 가면서 모스크바 대공국은 손쉽게 러시아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해나갈 수 있었다.

2.6. 바실리 2세

바실리 1세를 계승한 바실리 2세가 반란으로 폐위되어 잠시 대공위를 놓고 혼란기를 겪기도 했고, 카잔 칸국과의 싸움에서 패배해 포로로 끌려가 장님이 되는 굴욕을 당하기도 했지만, 굳건히 대공위를 지키면서 국가를 유지할 수 있다.

2.7. 이반 3세: 타타르로부터의 독립, 제3의 로마, 차르 선포

그리고 바실리 2세의 아들인 정치, 군사, 외교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이반 3세가 대공위를 물려받았고, 노브고로드 공국을 비롯한 다른 러시아 제후들을 갈아버리거나 복속시키면서 통합했다. 더불어 명목상이긴 해도 지속되고 있던 타타르와의 예속관계를 완전히 청산하여, 통일되고 독립된 러시아의 국가를 완성시켰다. 더불어 이반 3세는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조카인 조에 팔라이올로기나[12]와 혼인하면서 교황청으로부터 제3의 로마라는 명예를 받게 되었다. 이후 스스로를 독립국가의 수장인 '고수달'이라 선포하여[13] 모든 루스의 군주임을 선언했다.

2.8. 바실리 3세, 이반 뇌제

이후 모스크바 대공국이란 명칭은 이반 3세의 계승자인 바실리 3세와 이반 뇌제 통치기까지 이어졌으나, 이반 뇌제가 1547년 모스크바 대공국이 아닌 루스 차르국을 선포하면서 '러시아'란 이름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3. 정치 및 행정

루스 차르국 시대의 정치 및 행정 조직들은 모스크바 대공국 시절에 기본적인 틀이 갖춰졌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발전, 전문화된 것이다. 사실상 근본적인 차이는 없으니 해당 항목 참고.

4. 군주

5. 여담

러시아의 모스크바 편중 현상을 모스크바 공국이라고 비꼬아 말하기도 한다. '루스의 대표자', '슬라브족의 종주국' 등을 자처하는 러시아를 폴란드 등 반러 감정이 강한 중유럽, 동유럽 국가들이 조롱할 때, '모스크바국 사람'이란 뜻의 '모스깔(Moskal; Москаль)'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다만 양키와 비슷하게 오히려 러시아인에 대한 격식 없는 친근함을 나타낼 때 쓰기도 한다.

6. 관련 문서


[1] 동로마 제국의 쌍두독수리 문양으로 1472년부터 사용.[2] 다만 귀족회의인 보야르 두마(Боряская дума)나 모스크바 대주교가 차르를 넘어서는 권력을 휘두른 기간이 상당히 길다. 공식적으로 전제군주정을 표방했지만, 실질적으로 내부사정에 따라 그때그때 달랐다고 봐야 정확하다.[3] 동슬라브족 전체의 시조격인 국가이며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의 공통된 역사이다.[4] 남서부는 리투아니아 대공국, 그리고 그 뒤를 이은 폴란드-리투아니아가 18세기 말까지 차지한다. 이를 계기로 동슬라브족러시아 / 벨라루스 / 우크라이나로 정체성이 갈라지게 된다. 러시아는 독자적인 동슬라브족이었고, 벨라루스는 리투아니아의 영향을, 우크라이나는 폴란드의 영향을 받게 된다. 1569년 루블린 조약으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하나의 영토가 되었고, 그 과정에서 우크라이나 지역은 완전히 폴란드 왕국에 편입되었다.[5] 엄밀히 말하자면 모스크바 대공국~러시아 제국 기간은 단절없는 단일국가고 군주의 명칭에 따른(대공-차르-황제) 시대상 분류에 가까우며, 소련(정확히는 러시아 민족의 RSFSR)과 러시아 연방으로의 변화도 어디까지나 정치 체제와 주된 이념이 교체되었을 뿐이지 민족 국가로서의 러시아는 모스크바 대공국 이래로 한 번도 멸망한 적이 없다고 보는 것이 옳다.[6] '러시아'라는 단어 자체는 '루스인의 땅'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단어에 어원을 두므로 훨씬 전부터 사용되었지만 국명으로써 러시아 내외부의 공문서에서 쓰인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7] 마찬가지로 '임페라토르' 칭호 역시 표트르 1세가 공식화하기 전에 이미 공문서에서 쓰이고 있었다. 차르-임페라토르를 왕-황제 같은 상하관계로 보는 경향이 강한데 표트르 1세가 임페라토르를 내세운 명분 중 하나가 옛 모스크바 군주들이 (비잔틴 황제와 대등한) 차르로 불렸다는 것이었다. 고로 사실상 단어가 바꼈을 뿐 의미는 똑같았던 것.[8] 그런데 정작 1917년 혁명 이전까지 러시아 내부적으로는 벨리키 크냐지, 차르, 임페라토르 등의 잘 알려진 칭호보다는 영어의 소버린(Sovereign)에 대응되는 고수다리(государь)[14]을 훨씬 많이 썼다. 이반 3세의 공문서에서의 칭호도 '전루스의 고수다리(Государь Всея Руси)'이 맨 앞에 있고 차르, 크냐지가 그 뒤에 있다.[9] 합스부르크 가문이 신성로마제국의 제후국인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본거지로 삼아 다른 제후국들을 병합하여 황제위까지 올랐으나 당대에도 그 둘은 구분되었고, 후대 학자들이 '합스부르크 제국'이라는 용어를 따로 만들어서 쓰는 것을 생각해보면 된다.[10] 칭기즈칸의 손자 바투 칸이 주도했다. 그에게 침략 명령을 내린 건 삼촌이자 칭기즈칸의 아들인 오고타이 칸.[11] 당시 러시아 제후들 중에서도 최고란 의미를 지녔던 작위이다.[12] 콘스탄티노스 11세의 동생인 토마스 팔레올로고스의 딸이다.[13] 이반 3세 이전 모스크바 대공국 지도자들은 '크냐즈'라고 불렸고, 이반 3세는 스스로를 왕이라는 뜻의 '고수달'이라는 칭호를 부여했으며, 후대에 즉위하는 이반 4세부터는 모스크바 지배자들이 스스로를 '차르'로 칭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