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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 Jan III Sobieski | |||
이름 | 얀 소비에스키 (Jan Sobieski) | ||
출생 | 1629년 8월 17일 | ||
폴란드-리투아니아 올레스코 올레스코 성 | |||
사망 | 1696년 6월 17일 (향년 66세) | ||
폴란드-리투아니아 바르샤바 빌라누프 궁전 | |||
재위기간 |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 ||
1674년 5월 19일 ~ 1696년 6월 17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ff0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야쿠프 소비에스키 어머니 조피아 테오필라 소비에스키[1] | |
배우자 | 마리 카지미에라 다르키앙 (1665년 결혼) | ||
자녀 | 야쿠프 루드비크 소비에스키, 테레사 쿠네군다 소비에스카 등 | ||
형제자매 | 마렉 소비에스키, 카타지나 소비에스카 등 | ||
가문 | 소비에스키 가문 | ||
종교 | 로마 가톨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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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Vēnī. Vīdī. Deus vīcit.
왔노라. 보았노라. 하느님이 승리하셨노라.[2]
1683년, 제2차 빈 공방전에서 승리한 뒤, 당시 교황 인노첸시오 11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8대 국왕. 제2차 빈 공방전에서의 맹활약으로 유명한 인물이다.왔노라. 보았노라. 하느님이 승리하셨노라.[2]
1683년, 제2차 빈 공방전에서 승리한 뒤, 당시 교황 인노첸시오 11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2. 생애
2.1. 초년기
소비에스키 가문은 폴란드 왕국 루블린주(Województwo lubelskie)의 소비에신(Sobieszyn) 출신으로, 조부인 마렉 소비에스키(Marek Sobieski) 대에 전장에서 여러 차례 군공을 세우면서 명성이 드높아진 끝에 폴란드의 유력 귀족 가문이 되었다. 아버지 야쿠프 소비에스키(Jakub Sobieski)는 루테니아 주지사를 역임하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루스 차르국, 크림 칸국, 카자크, 그리고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동방 원정을 펼칠 때 활약했으며, 말년에 크라쿠프 성주(Kasztelan)를 역임했다. 한편, 그는 어머니 조피아 테오필라 소비에스카를 통해 루테니아의 강력한 귀족 가문인 주키에프스키 가문(Żółkiewscy)과 인척 관계를 맺었으며, 1609년 클루쉬노 전투에서 6,500~6,800명을 이끌고 루스-스웨덴 연합군 35,000명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명장 스타니스와프 주키에프스키(Stanisław Żółkiewski)는 그의 외증조부였다.얀 소비에스키는 1629년 8월 17일 오후 2시에서 3시 사이에 어머니가 물려받은 올레스코[3] 성에서 태어났다. 이 사실은 어머니 조피아가 그가 태어난 직후 작성한 일기장에 기록되었다. 그는 어린 시절을 주키에프[4]에서 보냈는데, 훗날 성인이 된 뒤에도 어린 시절의 추억이 깃든 이곳을 가장 좋아했으며, 자신이 머물던 궁정을 유년기 때와 동일한 상태로 보전하게 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형 마렉과 함께 아버지의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아버지 야쿠프는 "침묵을 유지하면서 언어를 배운 사람은 없다"라며 아들들이 외국어로 대화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여기에 개인위생 유지, 자유시간의 의무적 휴식, 신앙생활 실천 등을 준수하게 했다.
1640년 크라쿠프로 이주한 뒤 그곳에 있는 노보드보르스키 중등학교[5]에 재학해 폴란드 최고의 교사들의 감독하에 수사학, 변증법, 군사 교육 등을 이수했다. 특히 얀 치나르스키(Jan Cynarski)라는 교사가 얀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뛰어난 개인이 국가를 통치하고 국가의 전투 준비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며, 항상 적절한 자금을 국고에 예비해둬야 한다고 가르쳤고, 이는 얀이 평생 간직한 신념이 되었다.
1643년 형과 함께 마지막 학년을 마친 뒤 크라쿠프 대학교 철학부에 입학해 3년간 다니면서 전 과목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뒀다. 일설에 따르면, 당시 크라쿠프 대학교 총장이었던 보이치에흐 돔브로프스키(Wojciech Dąbrowski)는, 그가 미래에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국왕이 되리라 예언했다고 한다.
1646년 졸업 후 형 마렉과 함께 2년 반 동안 여행에 나섰다. 두 사람은 베를린, 라이프치히 등 독일의 여러 대도시와 안트베르펀, 브뤼셀, 라이덴, 헤이그 등 네덜란드, 파리, 샤르트르, 오를레앙, 블루아, 앙제, 라로셸, 푸아티에, 리옹, 마르세유 등 프랑스 왕국, 그리고 런던 등 잉글랜드 왕국 등을 방문했다. 이렇게 여러 도시를 방문하는 동안 고전문헌과 역사를 공부했으며, 루이 2세 드 부르봉콩데, 찰스 2세, 오라녜 공 빌럼 2세 등 뛰어난 지휘관 및 정치 지도자들을 면담했다. 여기에 프랑스군, 스웨덴군, 스페인군의 조직 및 전투 방식을 익혔고, 요새 구축법도 유심히 지켜보는 등 군사기술을 연마했다. 당시 서유럽에서는 30년 전쟁이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그가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살펴보기 쉬웠다. 그러다 1646년 6월 23일에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파리에 가서 교황 특사가 집전하는 특별 장례미사에 참례했으며, 프랑스 왕실 근위대의 명예소령에 발탁되기도 했다.
얀은 형 마렉과 더불어 동시대 사람들 중에서 교육을 매우 잘 받은 인물이었다. 일찍부터 언어 학습을 체계적으로 수행했고 여러 곳을 여행한 덕분에, 그는 라틴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오스만튀르크어, 그리스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여기에 수사술에 있어서도 매우 높은 수준을 갖춰서, 많은 이들을 연설을 통해 자기 편에 포섭시킬 수 있었다. 그는 고전문학과 인문주의 사상가들의 서적을 탐독했으며, 빌라누프(Wilanów)에 도서관을 세우고 7,000여 권에 달하는 개인 도서를 거기에 보관할 정도로 도서 애호가이기도 했다. 그가 수집한 도서 중에는 증조부 스타니스와프 주키에프스키와 키르홀름 전투의 영웅 얀 카롤 코드키에비츠의 저서도 포함되었다. 얀은 정치 문제에도 관심이 깊었다. 개인적으로 집필한 글에서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정치 체계가 불완전하다'고 지적했다. 특히 세임의 업무는 특권을 보다 많이 보장받는데 매몰되었고, 국가의 이익보다 귀족들의 이익이 우선시된다고 지적했다.
얀 소비에스키는 지리학에도 열성적이었다. 프란치스코회 수도자 빈첸초 코로넬리가 1684년에 설립한 역사상 최초의 지리학회인 아르고나우타 학회(Akademia Argonautów)의 명예회원이 되었으며, 지리, 도시 전망 및 지도에 관한 서적을 수집했다. 또한 수학, 천문학, 건축학, 공학에 관심이 많았으며,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 같은 서유럽의 유명한 과학자들과 서신을 교환했고, 폴란드의 발명가이자 물리학자인 티투스 리비우시 부라티니(Tytus Liwiusz Burattini), 폴란드 건축학자 스타니스와프 솔스키(Stanisław Solski), 단치히의 천문학자 얀 헤벨리우시(Jan Heweliusz) 등 폴란드 인사들과 친분을 두텁게 다졌고, 개인적으로도 천체 및 지구본, 현미경, 2개의 망원경 등 관찰 도구 세트를 주문하기도 했다. 얀 헤벨리우시는 1679년 그단스크에서 출판한 작품 <Machinae coelestis pars Posterior rerum uranicarum Observations>의 서문에서 얀의 천문학 지식을 칭찬했다.
2.2. 군사령관 시기
1648년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카자크를 선동해 우크라이나 일대에서 대규모 봉기를 일으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형 마렉과 함께 조국으로 돌아간 뒤 군대에 입대하여 윙드 후사르에 배속되었다. 1649년 반란군에 포위된 즈보루프[6] 요새 구출 작전에 투입되어 상당한 공적을 세웠으며, 1649년 또는 1650년 베우즈주(Województwo bełskie) 지방의회(Sejmik)의 의원이 되었다. 1651년 베레스테치코 전투에 참전했다가 전투 둘째 날 머리에 심각한 부상을 입고 의식을 잃었다가 부하들 덕분에 구출되었다.1652년 6월, 형 마렉은 바토흐[7] 전투에 참전했다가 폴란드군이 궤멸되었을 때 생포된 뒤 수천 명의 폴란드 포로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당시 얀은 전염병에 걸려 르부프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기에, 마렉이 맞이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653년 병세가 회복된 그는 대령으로 승진한 뒤 즈바니에츠[8] 전투에서 크림 타타르인과 맞서 싸웠다. 이때 그는 무슬림에 대한 증오심에 경도된 나머지 타타르 사절단을 매복 공격했다가 사령관 스테판 차르니에츠키(Stefan Czarniecki)의 제지로 중단했다. 이후 타타르인과의 협상에 참여했으며, 심지어 폴란드 측의 인질이 되어 타타르 숙영지에 머물면서 타타르군의 동향을 주의깊게 관찰했다. 1654년 3월 29일부터 5월 21일까지 코스탄티니예의 폴란드 공사관에 근무하면서 오스만 튀르크어와 크림 타타르어를 익혔다.
1655년, 폴란드-리투아니아군 장교로서 오흐마투프[9] 전투에 참전해 루스-카자크 연합군을 상대로 분전했다. 그러나 스웨덴 국왕 칼 10세 구스타브가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루스와 카자크의 연이은 공세에 정신 못차리는 틈을 타 폴란드를 대대적으로 침공하면서 대홍수가 발발하자, 그는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하고 1655년 10월 16일 알렉산데르 코니에츠폴스키(Aleksander Koniecpolski)가 이끄는 상비군(Wojsko kwarciane)의 대령 자격으로 우이시치에(Ujście)에서 항복하고 칼 10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 후 스웨덴군과 함께 프로이센 공국으로 진군했고, 뒤이어 고웜프(Gołąb)와 야로스와프(Jarosław)로 진군했으며, 폴란드 병사들이 스웨덴에 귀순하도록 유도했다.
그러나 폴란드 전역에서 스웨덴군에 맞선 무장 봉기가 일어나고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귀족들이 폴란드 야전원수 스테판 차르니에츠키와 리투아니아 대원수 파베우 얀 사피에하(Paweł Jan Sapieha)의 지휘 아래 통합되어 대대적으로 반격하면서 스웨덴군이 수세에 몰리자, 그는 1656년 3월 24일 완추트(Łańcut)에서 스테판 차르니에츠키에게 귀순했다. 이에 격분한 칼 10세 구스타브는 얀을 비롯한 배신자들의 초상화와 명판을 교수대에 내걸라고 명령했다. 그 후 얀은 비엘코폴스카(Wielkopolska) 지방과 프로이센에서 예지 루보미르스키(Jerzy Lubomirski)의 지휘 아래 여러 전투를 치렀다. 1656년 4월 7일 바르카(Warka) 전투에 참전해 스웨덴군을 격파하여 바르샤바 외곽까지 추격했으며, 4월 19일에 디미트르 예지 비시니오비에츠키(Dymitr Jerzy Wiśniowiecki)와 함께 토룬 요새를 공략했다. 그해 5월 말에는 바르샤바 인근의 숙영지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와 합류했으며, 5월 26일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대기수로 발탁되었다. 그해 7월 28일부터 7월 30일까지 얀 2세와 칼 10세가 바르샤바를 놓고 정면 대결한 전투에 참전해 2,000명의 타타르 기병대를 효과적으로 지휘해 스웨덴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10]
1657년, 리투아니아를 독립시키고 자기가 리투아니아의 군주가 되려는 야심을 품은 리투아니아 야전원수 야누시 라지비우(Janusz Radziwiłł)와 손잡은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죄르지 2세 라코치(II. Rákóczi György)를 응징하고자 트란실바니아로 쳐들어간 예지 루보미르스키의 원정에 동행했다. 죄르지 2세는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의 압도적인 기세에 연전연패한 끝에 미엔지부즈[11] 요새로 퇴각했다가 적군에 완전히 포위되자 폴란드에 120만 플로린 상당의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고 크라쿠프, 브제시치 등 점령지에서 군대를 철수시키는 조건으로 신변의 보장을 약속받고 항복했다.
1658년 10월, 얀은 알렉산데르 코니에츠폴스키와 함께 비스와강 하구의 도시 슈툼(Sztum)과 토룬을 공략한 뒤 왕실군 대령으로 승진했고, 이듬해 정식으로 세임 의원이 되었다. 한편, 카자크는 흐멜니츠키 사후 하댜치 연합을 결성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측에 기존 체제를 폴란드-리투아니아-루테니아의 삼국 연합으로 개편하고 정교회를 가톨릭과 동등한 지위에 부여한다면, 앞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위해 싸우겠다고 제안해왔다. 당시 얀도 해당 안건을 논의하고자 열린 세임에 참석했다. 1660년 3월 19일 스트리[12] 성주이자 외국인(Autorament) 보병연대의 지휘관이 되었다.
1660년 9월 16일 루바르[13] 전투에서 루스군 격파에 일조했으며, 10월 7일 스워보디시체[14] 전투에서도 루스군 격파에 기여했다. 10월 17일 추드누프[15]에서 카자크가 루스 차르국에 대한 충성 서약을 파기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충성을 맹세하고, 그 대가로 루테니아 공국으로서 연방의 회원국이 되어 자치권을 보장받는 내용의 협정을 체결한 4명의 왕실 위원 중 한 명이었다. 1663년 얀 2세의 루스 원정에 참여해 국왕의 고문으로서 몇 가지 조언을 했으며, 원정군이 모스크바로의 진군을 포기하고 철수할 때 소시니차(Sośnica)와 코피시니키(Kopyśniki)에서 아군을 추격해온 루스군과 카자크군을 격파했다.
1664년 12월, 세임은 예지 루보미르스키가 외국과 음모를 꾸민 정황이 드러났다며 모든 명예와 존엄성을 박탈하고 추방형을 선고했다. 스테판 차르니에츠키는 루보미르스키를 대신해 야전원수가 되었고, 얀 소비에스키는 왕실 총사령관이 되었다. 루보미르스키는 해외로 망명한 뒤 국내에 남아있는 추종자들을 결집해 반기를 들 준비에 착수했다. 1665년 2월 16일, 차르니에츠키가 르부프 인근 소코우프카[16]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얀 2세를 절대적으로 지지했던 그의 죽음으로 인해 왕실군의 사기가 꺾였다. 그해 4월 30일, 예지 루보미르스키가 800명의 독일 용병대를 이끌고 연방으로 돌아왔다. 이에 폴란드-리투아니아군 다수가 그를 추종하면서, 루보미르스키의 반란이 본격적으로 발발했다. 얀 소비에스키는 얀 2세의 편에 서서 옛 상관과 맞서 싸웠다. 그러나 1666년 7월 13일 몬트비(Mątwy) 전투에서 왕실군이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는 걸 막지 못했다. 1666년 7월 31일, 웽고니체(Łęgonice) 마을에서 비벤테 레게 선거를 도입하려는 얀 2세의 계획을 완전히 포기하고 얀 2세가 추진하려고 했던 개혁 역시 포기하며, 반란군 전원을 사면하기로 한 합의가 이뤄지면서 내전이 종식되었다.
1667년 10월 4~16일에 포드하이체[17] 인근에서 페트로 도로셴코(Петро Дорошенко) 원수의 지휘 하에 압도적인 숫자로 밀어붙이는 카자크와 타타르 연합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당시 그는 요새에 근거지를 둬서 적과의 정면 대결을 회피하면서, 소규모 분견대를 여러 개 조직해 타타르인들이 각지에서 자유롭게 약탈하지 못하도록 막는 임무를 수행하게 했다. 이로 인해 약탈을 제대로 할 수 없어 식량난에 시달린데다 요새 공략도 공성 무기 부족으로 인해 번번이 실패한 연합군이 철수하자, 그는 즉시 추격해 대승을 거두었다. 1668년 2월 5일, 그는 공적을 인정받아 왕실 대원수에 발탁되었고, 이때부터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국정 및 군대 전반에 강력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1668년 9월 16일, 얀은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의 퇴위 선언서에 서명했다. 그 후 그는 프랑스 출신 아내 마리 카지미르 다르키앙의 영향으로 친프랑스파의 수장이 되었고, 그니에즈노 대주교이자 폴란드 추기경 미코와이 프라즈모프스키(Mikołaj Prażmowski), 리투아니아 총리 크시슈토프 지그문트 파츠(Krzysztof Zygmunt Pac), 왕실 재무장관 얀 안제이 모르시틴(Jan Andrzej Morsztyn)과 함께 루이 2세 드 부르봉콩데를 폴란드 국왕으로 세우려 했다. 그러나 1669년 6월 19일 선거 결과 대홍수 이후 외국인들에 대한 불신이 깊어진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귀족 다수의 몰표로 미하우 코리부트 비시니오비에츠키가 당선되자, 이에 강한 불만을 품었다. 1669년 10월 1일~11월 12일 미하우의 대관식이 거행되는 내내 그의 사주를 받은 무리가 야유를 퍼붓고 행사 진행을 방해했으며, 나중에는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로부터 '롱그빌 공작 샤를 파리 도를레앙을 차기 국왕으로 지원하라'는 제의를 받아들여 미하우를 폐위시키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미하우를 지지하는 귀족들은 이같은 얀의 행보에 격분해 그를 세임 재판에 회부하려 했다. 이에 얀은 추종자들과 함께 트렘보블라[18] 인근에서 연맹을 결성하고 사병을 동원했다. 이로 인해 내란이 벌어질 조짐이 보이자, 귀족들은 어쩔 수 없이 얀 소비에스키에 대한 세임 재판을 포기했다. 이후에도 상호간의 갈등은 이어졌다. 1671년 오스만 제국의 위협이 가시화되는 상황에서도, 세임은 얀 소비에스키에 대한 국방비 지원을 거부했고, 미하우는 얀 소비에스키의 명령을 무시하고 볼히니아를 제멋대로 떠나버린 스타니스와프 비지츠키(Stanisław Wyżycki)의 연대에 겨울 숙영지를 제공하고 체불된 임금을 일부 지불하는 등 얀 소비에스키를 견제했다.
1672년, 오스만 제국은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그럼에도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는 또다른 내전이 일어났다. 미하우를 지지하는 귀족들은 고웜프(Gołąb)에 집결한 뒤 연맹(Konfederacja)을 결성하고, 미하우를 적대하던 미코와이 프라즈모프스키의 모든 직위를 박탈했으며, 얀 소비에스키와 그의 친척들의 재산을 약탈했다. 여기에 일부 리투아니아 귀족들이 코브린[19]에서 연맹을 결성해 고웜프 연맹을 지원했다. 얀 소비에스키는 이에 맞서 자신을 따르는 군대를 소집한 뒤 미코와이 프라즈모프스키 등과 함께 슈체브제신(Szczebrzeszyn) 연맹을 설립했다. 이리하여 오스만 제국의 침략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양자간의 무력 충돌이 벌어지려 하자, 교황 특사 프란체스코 본비시(Francesco Buonvisi)와 크라쿠프 주교 안제이 트셰비츠키(Andrzej Trzebicki)가 중재에 나섰지만, 양자가 자기들의 입장을 고집하던 터라 화해가 쉽사리 이뤄지지 않았다.
1672년 6월, 오스만 제국의 파디샤 메흐메트 4세가 지휘하는 10만 대군이 카미에니에츠포돌스키 요새를 포위했다. 수비대는 2달간 끈질기게 버텼지만 원군이 좀처럼 오지 않자 결국 그 해 8월 26일에 항복했다. 뒤이어 르부프도 포위된 지 10일만에 함락되었고, 타타르 별동대는 흐루비에슈프(Hrubieszów), 야스워(Jasło) 일대를 약탈했다. 급기야 타타르군이 미하우가 머물고 있고 민병대가 집결하고 있던 고웜프로 접근하자, 상원 의원들은 크게 놀라 얀 소비에스키에게 이들을 막아달라고 요청했다.
1672년 10월, 얀 소비에스키는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출진해 니에미루프[20] 전투에서 타타르군을 격파했고, 뒤이어 코마르노 전투와 페트란카 전투에서 2개의 타타르 부대를 격파했다. 그러나 병력 모집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에, 폴란드 국내로 곧 들이닥칠 오스만 제국의 12만 대군을 막아낼 방도가 없었다. 결국 1672년 10월 16일 또는 18일,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메흐메트 4세와 부차치 조약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폴란드-리투아니아는 포돌리아주(Województwo podolskie), 브라츠와프주(Województwo bracławskie) 및 우안 우크라이나 남부 지역을 오스만 제국에 넘기고, 매년 22,000탈러를 조공으로 바쳐야 했다.
이 협약 소식이 알려지자, 귀족들은 패배나 다름없는 조약에 깊은 굴욕감과 두려움을 느끼고, 서로간의 갈등을 접어놓고 오스만 제국에 힘을 합쳐 맞서기로 결의했다. 1673년 3월, 고웜프 연맹과 슈체브제신 연맹 인사들이 바르샤바에서 화해와 평온을 위한 세임을 연 뒤 서로 화해하고 부차치 조약 비준을 거부하며, 군대를 대대적으로 모집하고 전쟁을 치르기 위한 특별세를 거두기로 결의했다. 여기에 교황청이 보낸 자금을 포병 육성에 사용하기로 했다.
1673년 10월 8일, 미하우는 스크바자바[21] 인근 숙영지에서 40,000명의 군대와 대포 50문을 시찰했다. 그러나 얼마 후 중병에 걸리는 바람에 얀 소비에스키에게 지휘권을 넘겼다. 후세인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군 35,000명과 대포 120문이 이에 맞서기 위해 드네스트르강변에 세워진 호침 요새에 집결하자, 얀 소비에스키는 오스만군이 추위에 익숙하지 않은 점을 이용해 일부러 강추위가 몰아치고 있던 11월 초 호침 요새를 급습했다.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던 11월 11일 새벽,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은 요새를 향해 대포를 일제히 사격해 성벽을 무너뜨렸다.
이후 얀 소비에스키가 친히 보병과 용기병들을 이끌고 허물어진 성벽으로 돌진했다. 오스만군은 시파히를 파견해 역공을 가하려 했지만, 그들이 윙드 후사르에게 궤멸되면서 무위에 그쳤다. 이윽고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이 요새에 성공적으로 진입하자, 오스만군은 극심한 공황에 빠져 드네스트르강 건너편 강둑으로 도주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리는 바람에 다리가 허물어졌다. 35,000명의 병사들 중 불과 수천 명만이 간신히 탈출해 카미에니에츠포돌스키로 도착했고, 나머지 장병들은 죽거나 생포되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의 사상자는 알려지지 않았다.
얀 소비에스키는 호침 전투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둔 뒤 여세를 이어가 몰다비아로 진군해 주민들의 호응에 힘입어 장악에 성공했다. 여기에 왈라키아도 오스만 제국과의 관계를 끊고 폴란드-리투아니아 편에 섰다. 그러나 얼마 후,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은 미하우가 1673년 11월 10일에 르부프 궁전에서 위장병에 시달리다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했고, 귀족들은 새로운 왕을 선출하기 위해 군대를 철수시키기로 했다. 그후 1674년 5월 21일에 열린 선거에서, 얀 소비에스키는 귀족 3,450명의 지지를 확보하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새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로 등극했다.[22]
2.3.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이 미하우 왕이 사망한 것 때문에 공세를 중단하고 철수한 뒤, 오스만군은 전열을 재정비한 뒤 마즈마캄(kajmakam)[23] 카라 무스타파의 지휘하에 반격을 개시해 수체아바(Suceava), 네암츠(Neamț), 호침을 탈환했다. 그러나 1674년 여름 루스 차르국이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한 뒤 오스만군이 장악했던 우안 우크라이나 전체를 점령하자, 오스만군은 방향을 돌려 우크라이나 탈환 작전에 나섰다. 얼마 후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치르기 위해 남부 전선으로 돌아온 얀 3세는 오스만 제국군이 루스군을 막기 위해 우크라이나로 간 틈을 타 공세를 개시해 브라츠와프, 모힐레프, 바르[24] 등 여러 도시와 요새를 탈환하고 우크라이나의 폴란드 남부 국경을 방어하는 강력한 요새선을 재구축했다. 그의 군대는 점령지에 숙영지를 세우고 겨울 동안 주둔했고, 그는 브라츠와프에 본부를 세웠다.1675년 봄, 오스만 파디샤 메흐메트 4세의 사위이자 알레포의 파샤인 이브라힘 시슈만이 반격 작전을 개시해 다뉴브 강을 따라 진군했고, 크림 칸국의 칸 셀림 기라이가 이끄는 타타르군은 스미와[25] 인근에 진영을 세웠다. 이후 오스만-타타르 연합군은 자워지체[26] 올렉신체[27], 포차유프[28], 스카와트[29], 야누프[30], 부드자누프[31], 시비시[32]를 잇따라 공격하고 타르노폴, 비시니오비에츠[33], 미쿨린체[34], 부차치, 자바우프[35]를 함락했으며, 타타르 분견대는 드네프르 강을 건너 보이니우프[36]를 불태우고 포쿠치에(Pokucie) 지방[37]을 황폐화시켰다.
얀 3세는 이에 대응해 전 병력을 르부프에 집결시켜 반격을 준비했고, 마리 왕비와 자녀들은 전쟁의 고난에 왕과 동행하기를 원해 8월 20일에 르부프로 찾아갔다. 8월 24일,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은 르부프로 진군하던 타타르군을 격파했다.
이 소식을 접한 크림의 칸 셀림 기라이는 적의 기세가 만만치 않은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서쪽으로의 공세를 취소했다. 이후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미처 공략하지 못했던 성들을 공략하기로 하고 9월 9일 포드하이체 성을 포위해 이틀만에 함락했고, 9월 20일 트렘보블라 성을 포위했지만 10월 11일까지 함락에 실패했다. 그러다 추운 날씨가 가까워지고 적군이 접근해오자, 드네프르 강 너머로 철수했다. 1676년 8월, 오스만-타타르 연합군은 전력을 보충해 재차 공세를 개시해 포쿠탸를 공략하고 스타니스와부프를 향해 진군했다. 얀 3세는 보이니우프 인근에서 타타르 분견대를 무찌른 뒤 주라프노 요새에 주둔해 수적으로 훨씬 많은 적군에 대항했다.
1676년 9월 25일부터 10월 14일까지 3주간 이어진 주라프노 전투에서, 오스만-타타르 연합군은 주라프노 요새를 포위 공격했지만, 효과적인 방어 전술을 구사한 얀 3세에게 가로막혀 좀처럼 함락시키지 못했고, 얀 3세가 사전에 분산시킨 폴란드-리투아니아 기동대의 유격 전술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다. 결국 얀 3세를 꺾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고, 갈수록 급박하게 돌아가는 루스 차르국과의 전쟁도 신경써야 했던 오스만 제국은 얀 3세에게 평화 협상을 제의했고, 얀 3세는 즉시 받아들였다.
1676년 10월 17일, 양자는 주라프노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더 이상 연 공물을 바치지 않으며, 부차치 조약에서 오스만 제국이 가져간 영토 중 빌라체르크바, 파보워치를 포함한 드네프르 강변 지역 일부는 폴란드-리투아니아에 반환되었다. 반면 리투아니아에 거주하는 타타르인들은 오스만 제국의 통치하에 귀속되었다. 이후 이 타타르인들은 카미에니에츠포돌스키 인근에 정착해 폴란드-리투아니아에 대항하는 오스만군 수비대를 지원했다.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이 종식되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오랜만에 평화의 시기를 맞이했다. 그는 이를 기회로 삼아 군사개혁을 대대적으로 단행했다. 군대는 연대 단위로 재편되었고, 보병은 파이크를 버리고 배틀액스의 일종인 버디슈로 무장했으며, 대포가 크게 늘어나고 새로운 포병 전술이 도입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경무장한 윙드 후사르가 주류였던 폴란드 기병대는 중무장한 후사르와 용기병 위주로 편성되었다. 한편, 그는 강력하고 효율적인 왕실 정부를 수립하여 국가를 개혁하려고 했다. 이를 위해 왕의 생애 동안 후계자를 선출하는 비벤테 레게(vivente rege) 시스템을 도입해 폴란드에서 세습 군주제를 도입하려 했으며, 세임의 역할을 제한하려 했다. 그러나 폴란드 귀족들이 기득권을 순순히 내놓으려 하지 않고 거세게 반발했기 때문에, 그의 계획은 좀처럼 실현되지 않았다.
얀 3세는 리투아니아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데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1673년 호침 전투에서 완승을 거둔 직후 리투아니아군을 이끌고 철수해버렸고, 1674년 국왕 선거 때 차르 알렉세이 1세를 지지한 미하우 카지미에시 파츠의 권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리투아니아 귀족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애썼다. 그러나 미하우와 세력 다툼을 벌이고 있던 크시슈토프 지그문트 파츠을 비롯한 리투아니아 귀족들은 미하우를 실각시키는 것보다는 얀 3세의 간섭을 방지하는 편이 훨씬 낫다고 여겨 이에 불응했고, 얀 3세를 지지했던 폴란드의 라지비우 가문과 사피에하 가문 역시 얀 3세를 위해 미하우를 물리쳐 줄 의향이 없었다. 결국 미하우는 리투아니아에서 계속 독자적인 세력을 이끌었고, 루스 차르국, 오스트리아, 브란덴부르크 등과 잇따라 접촉해 얀 3세를 폐위시키기 위한 음모를 꾸미곤 했다. 얀 3세는 이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내전을 원하지 않았기에 무력을 동원해 미하우를 물리치려 하지 않았다.
얀 3세는 스웨덴과 프랑스의 지원을 받고 대홍수 시기에 폴란드로부터 독립해버린 프로이센 공국을 정복하고 싶어했다. 그는 이 지역의 통제권을 회복한다면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재건 사업에 절실하게 필요한 수익을 얻을 수 있으리라 여겼다. 1675년 6월 11일, 얀 3세는 프랑스 정부와 야보루프 비밀 조약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폴란드는 프랑스로부터 보조금을 받고 프로이센에 대한 폴란드의 주권을 인정받는 대가로 프랑스가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것을 지원하기로 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과의 전쟁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1679년 네이메헌 평화조약을 맺어버렸고, 얀 3세는 이에 몹시 실망해 친프랑스 세력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1683년, 얀 3세의 정적들은 로렌 공작 샤를 5세[38]를 왕으로 옹립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이 음모는 곧 발각되었고, 프랑스 사절은 그 해 세임 기간 동안 얀 3세를 폐위시키려는 계획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추방되었다. 이후 그는 프랑스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합스부르크 가문과 화해하는 쪽으로 관심을 돌리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와 동맹을 맺었고, 잠재적인 정적이었던 스타니스와프 얀 야브워노프스키를 대원수에 선임했다.
1683년 3월, '오스만 제국군이 대규모 군사 원정을 준비하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얀 3세는 르부프나 크라쿠프가 표적이 될 것을 우려하여 국경 요새들의 방비를 강화하고 동원령을 내렸다. 하지만 상 헝가리에서 반 합스부르크 봉기를 일으킨 퇴쾨이 임레의 요청을 받아들여 침공을 개시한 메흐메트 4세와 카라 무스타파 파샤의 목표는 연방이 아니라 빈이었다. 그해 7월, 오스트리아 특사는 바르샤바로 달려와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의 구원을 요청했다. 얀 3세는 빈이 무너진 뒤 오스만 제국군의 다음 목표는 자국이 될 거라 확신하고, 빈을 구원하기로 마음먹었다. 8월 15일, 얀 3세는 마리 왕비와 함께 크라쿠프에서 출발하여 흐르자누프, 미슬로비체, 벵진 및 비톰을 거쳐 타르노프스키에 고리에 이르렀다. 이후 아내와 작별인사를 하고 크라쿠프로 돌려보낸 뒤 계속 남하해 8월 25일 트로파우에서 집결한 군대와 합세했다. 9월 3일 툴른에서 로렌 공작 샤를 5세 휘하 바이에른 및 작센군과 합류한 뒤 빈으로 진군해 9월 11일 빈 인근에 도착했다. 이때 오스만 제국군이 성벽을 거의 뚫어 함락이 임박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전면공격을 통해 적군을 괴멸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얀 마데이코 작, <빈 전투 후 교황에게 승리의 메시지를 보내는 얀 소비에스키>, 1880년.
9월 12일 이른 아침, 22,000~27,000명의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이 포함된 65,000~75,000명의 연합군이 카라 무스타파가 지휘하는 140,000여 명의 오스만군을 향해 공세를 개시했다. 얀 3세는 칼렌베르크 언덕 정상에서 보병들이 격전을 벌이는 상황을 관찰하다가 오후 5시경에 오스트리아, 독일 기병대와 함께 후사르를 친히 이끌고 언덕 아래로 돌격했다. 오스만군은 이 돌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무너졌고, 얀 3세는 적진에 침투한 뒤 카라 무스타파의 거의 부서진 천막 안에 들어가 승리를 선언했다. 이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 15,000명이 전사한 반면, 기독교군의 사상자는 3,000명에 불과했다. 얀 3세는 이날 마리 왕비에게 보낸 편지에서 빈 주민들의 반응을 아래와 같이 묘사했다.
"모든 평민은 내 손과 발과 옷에 입을 맞추었고, 다른 사람들은 나에게만 손을 대며 '아, 저 용감한 손에 입맞추자!'라고 말했다오."
이후 얀 3세는 신성 로마 제국과 함께 신성동맹을 결성하고 패주하는 적군을 맹추격해 10월 9일 파르카니에서 적병 10,000명을 사살하는 승리를 거둔 뒤 12월에 크라쿠프로 귀환했다. 교황 인노첸시오 11세는 9월 12일을 성모 성명 축일로 제정하면서, 그를 빈과 유럽의 구원자라고 칭송했다.
1684년,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오스트리아, 베네치아, 교황령과 함께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설립한 신성 동맹의 회원국이 되었다. 그 후 수년간 포돌리아, 몰다비아, 왈라키아로 여러 차례 원정에 착수했지만, 오스만군이 야전을 기피하고 견고한 성채에 의지해 버티는 터라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빈을 구원해준 대가로 오스트리아로부터 영토나 정치적 보상을 받아내는 데 실패했고, 이로 인해 입지가 점차 약화되었다. 급기야 얀 3세가 프랑스와 관계를 끊기로 하면서 정권에서 소외된 사피에하 가문이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와 손잡고 자신을 타도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정황이 드러났다. 하지만 그는 내전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피에하 가문의 사과를 받고 사면시키는 선에서 일을 매듭지었다.
1686년, 얀 3세는 루스 차르국의 지원을 받기 위해 모스크바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이 협약은 20년전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가 알렉세이 1세와 맺었던 안드루소보 평화 협약 조건을 그대로 승인했다. 그 결과 스몰렌스크, 키유프를 포함한 우크라니아 동부 일대에 대한 루스 차르국의 지배는 확고해졌다. 또한 루스 차르국은 폴란드-리투아니아 내 정교회 신자들을 보호할 권리를 인정받았다. 이는 장래에 루스 차르국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내정에 간섭하는 구실을 했다. 이렇듯 폴란드-리투아니아 측이 광범위한 양보를 했지만, 정작 루스 차르국은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위해 군사적, 정치적 지원을 거의 제공하지 않았다.
2.4. 말년과 사망
얀 3세의 무덤. |
얀 3세는 오랜 전쟁으로 비만, 통풍, 신장결석, 고혈압, 부비동염, 매독 등의 질병을 앓았다.[39] 아들 야쿠프를 후계자로 삼기 위해 자신의 생애 동안 차기 국왕 선거를 집행하려 했지만 실패로 돌아가자, 1691년 아들 야쿠프를 몰다비아 공국의 호스포다르로 앉히기 위한 원정에 착수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그 후 그는 더이상 원정을 진두지휘할 몸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고 국경지대에 강력하고 최신형의 요새 건설을 실시했다.
1693년 아들 야쿠프가 빈에 비밀 사절단을 종종 보내고 비공식 황실 대사를 자처했으며, 자신을 추종하는 파벌을 독자적으로 결성하는 움직임을 보인다는 정보가 입수되자, 부자간의 관계는 급격히 안 좋아져서 나중에는 함께 살지도 않게 되었다. 1696년 6월 17일, 얀 3세는 빌라누프 궁전에서 심장마비로 급사했고, 크라쿠프의 바벨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그의 심장은 바르샤바의 카푸친 교회에 안장되었다.
얀 3세 사후, 아들 야쿠프 루드비크 소비에스키는 1697년에 열린 국왕 선거에 출마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유산을 놓고 어머니와 분쟁을 벌이는 모습을 보이면서 귀족들의 신망을 잃었고,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해 폴란드 귀족들의 지지를 확보한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에게 패배했다. 그는 폴란드 추기경 미하우 스테판 라지요브스키와 함께 콩티 공작 프랑수아 루이 드 부르봉콩티를 국왕으로 세우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가 곧 마음을 바꿔 새 국왕 아우구스트 2세와 협상했다. 그러나 도중에 반란을 조직하려 했다는 고발을 당하고 샤울리아이와 푸츠크시를 몰수당했다.
이에 반감을 품은 야쿠프는 실레시아의 올라바로 망명한 뒤 대북방 전쟁 시기에 스웨덴 국왕 칼 12세의 힘을 빌려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이 되려 했지만, 스웨덴군에 합류하러 가던 중 브로츠와프에서 작센군에 체포된 뒤 플레이센부르크와 쾨니히슈타인에 잇따라 감금되었다. 당초 야쿠프를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으로 세우려 했던 칼 12세는 그가 그 꼴이 되자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를 대신 내세웠다. 야쿠프는 1706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에 더는 도전하지 않겠다"는 서약서에 서명하고 풀려났지만, 수년간 폴란드 귀족들과 접촉해 왕위에 도전할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결국 기회는 오지 않았고, 1717년에 열린 세임에서 몰수되었던 가족 재산이 회복되자 아우구스트 2세와 화해한 뒤 주키에프에서 조용히 지내다 1737년 12월 19일에 뇌졸중에 걸려 사망했다.
3. 가족관계
- 증조부: 얀 소비에스키(1518년 ~ 1564년)[A]
- 할아버지: 마레크 소비에스키(1550년 ~ 1605년)
- 할머니: 야드비가 스노브코브스카
- 아버지: 야쿠프 소비에스키(1591년 5월 5일 ~ 1646년 6월 23일)
- 어머니: 조피아 다닐로비츠조브나(1607년 ~ 1661년 11월 27일)
- 형: 마레크 소비에스키(1628년 5월 24일 ~ 1652년 6월 3일)
- 자기자신: 얀 3세 소비에스키: (1629년 8월 17일 ~ 1696년 6월 17일)
- 여동생: 조피아 소비에스카(1630년 3월 19일 ~ 어렸을 때 사망)
- 여동생: 카타르치나 소비에스카(1634년 1월 7일 ~ 1694년 9월 29일)
- 여동생: 안나 로잘리아 소비에스카(1636년 8월 5일 ~ 1655년)
- 남동생: 스타니스와프 소비에스키(1638년 3월 29일 ~ 어렸을 때 사망)
- 남동생: 스타니스와프 소비에스키(1641년 9월 16일 ~ 어렸을 때 사망)
- 배우자: 마리 카지미르 다르키앙(1641년 6월 28일 ~ 1716년 1월 30일)
- 장남: 야쿠프 루드비크 소비에스키(1667년 11월 2일 ~ 1737년 12월 19일)
- 장녀, 차녀: ??, ??(1669년 5월 9일)[41]
- 3녀: 테레사 테오필라 소비에스카(1670년 10월)
- 4녀: 아델라이다 루드비카 소비에스카(1672년 10월 15일 ~ 1677년 2월 10일)
- 5녀: 마리아 테레사 소비에스카(1673년 10월 18일 ~ 1675년 12월 7일)
- 6녀: ??(1674년)
- 7녀: 테레사 쿠네군다 소비에스카[42](1676년 3월 4일 ~ 1730년 3월 10일)
- 차남: 알렉산더 베네딕트 소비에스키(1677년 9월 9일 ~ 1714년)
- 8녀: ?? (1678년)
- 3남: 콘스탄티 브와디스와프 소비에스키(1680년 5월 1일 ~ 1726년 7월 22일)
- 4남: 얀 소비에스키(1683년 6월 4일 ~ 1685년 4월 12일)[A]
3.1. 아내 마리 카지미르 다르키앙
Marie Casimire Louise de La Grange d'Arquien(1641년 6월 28일 ~ 1716년 1월 30일)
얀 3세 소비에스키는 왕비 마리 카지미르 다르키앙을 진심으로 사랑한 애처가로도 유명하다. 마리는 루이 13세의 동생 가스통 도를레앙의 호위대장이었던 앙리 알베르 드 라 그랑주 다르키앙의 딸로, 1645년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의 왕비가 된 곤차가느베르의 마리아 루이사의 시녀가 되었다. 1648년 브와디스와프 4세가 사망한 뒤 프랑스로 돌아가 고향인 느베르에 있는 수도원 학교에서 4년간 공부했다가 1653년 새로운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와 재혼한 마리아 루이사에게 시녀로 재발탁되었다.
1655년 3월, 당시 크라스니스타프의 스타로스타였던 얀 소비에스키는 바르샤바에서 열린 세임에 참석했다가 궁중연회 도중에 마리와 마주쳤다. 그는 마리의 미모와 탁월한 지성에 한 눈에 반했고, 마리 역시 그에게 호감을 품었다. 1656년 얀 소비에스키가 얀 2세의 왕실 기수로 발탁된 뒤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진전되었지만, 청혼과 결혼식은 이뤄지지 않았다. 1658년 3월 3일, 마리는 마리아 루이사의 지시에 따라 산도미에시 주지사인 얀 소비에판 자모이스키와 결혼했다. 두 부부는 4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그 중 누구도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지 못했고, 얀 소비에스키와 마리는 남몰래 사랑을 속삭이는 편지를 주고받았다.
1665년 4월 7일, 얀 소비에판 자모이스키가 사망했다. 얀 소비에스키와 마리는 그로부터 1달 후인 5월 14일에 비밀 결혼식을 거행했고, 7월 5일에 공식적으로 결혼식을 거행했다. 이에 얀 소비에판 자모이스키의 애도 기간에 축하행사를 거행하고, 자모이스키가 사망한 지 5주 만에 비밀 결혼식을 연 행태에 대한 세간의 비난이 쏟아졌고, 폴란드 시인 얀 안드레이 모르슈틴은 얀 소비에스키와 마리 부부를 비꼬는 신랄한 시를 집필하기도 했다. 하지만 얀 소비에스키는 이러한 비난을 꿋꿋이 감내하면서 마리를 보호했다. 1673년 11월 10일 미하우 코리부트 비시니오비에츠키 왕이 사망한 뒤, 몇몇 추종자들은 "마리와 이혼하고 미하우 왕의 미망인인 오스트리아의 엘레오노라와 재혼한다면 왕위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지만, 그는 "마리가 왕위보다 소중하다"며 단호히 거부했다. 얀 소비에스키는 뛰어난 지성을 갖춘 아내 마리의 의견을 전적으로 존중했고, 그녀의 의중에 따라 친 프랑스파가 되었다.
마리는 1676년 2월 2일 바벨 대성당에서 남편과 함께 대관식을 치르고 폴란드 왕비로 등극했다. 그녀는 폴란드-프랑스 동맹을 이끌기 위한 남편의 정책을 강력히 지지했으며, 이와 동시에 루이 14세가 자신의 가족들에게 특권을 부여하도록 힘썼다. 그러면서 남편이 루이 14세처럼 폴란드에 절대군주제를 구축하길 원했기에 귀족들의 특권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시키려는 계획을 추진했다. 한편, 마리는 루이 14세가 칼뱅파를 추방시킨 퐁텐블로 칙령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면서, 폴란드 역시 이를 받들어 완전한 가톨릭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폴란드 귀족들은 왕비의 이같은 정치적 개입에 분개했고, 그녀에 대한 악성 소문이 떠돌았다.
얀 소비에스키는 아내의 조언을 대부분 귀담아들었고, 신하들과 외국 사절들은 마리가 왕을 좌지우지한다고 느꼈다. 1678년 리투아니아의 펙 가문이 얀 3세를 폐위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러 찾아온 노보고로드 총리 미코와이 브와디스와프 프셰지크는 왕비가 왕이 "문을 열어도 좋다"고 허락할 때까지 문을 두드린 다음 군주의 손을 잡고 프랑스어로 말하면서 힘차게 자신 옆으로 이끄는 광경을 보고 혐오감을 느꼈다는 평을 남겼으며, 프랑스 사절은 1675년 야보로프 비밀 협약을 맺기 전에 루이 14세에게 "오직 폴란드의 왕비만이 그녀의 남편인 국왕이 조약을 체결할 수 있도록 설득할 수 있기 때문에" 그녀와 협력할 것을 추천하기도 했다.
폴란드 귀족들은 이런 마리를 "거만하고 자기중심적이고 권력욕이 강한 여자"라고 비방했지만, 얀 3세는 그녀를 몹시 사랑했다. 타국 군주들이 대개 정부를 두고 사생아를 낳는데 비해, 그는 오직 마리만 가까이 해 13명의 자식을 두었다. 마리 역시 얀 3세에게 진심어린 애정을 품었고, 남편이 원정을 떠날 때 최대한 따라가며 힘을 보탰다. 두 사람은 일생 동안 연애편지를 자주 주고받기도 했다. 이 편지에는 서로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것뿐만 아니라 국정 문제 및 왕실이 처한 문제에 대한 논의, 일상적인 일에 관한 이야기 등이 담겨 있으며, 얀 소비에스키가 주로 아내에게 상담을 요청하고 마리가 답하는 식으로 전개되었다. 마리는 훗날 회고 편지에서 남편의 통치 기간 동안 자신이 가졌던 큰 정치적 영향력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고인이 된 남편이 제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보다 더 많이 사랑했기 때문에, 당면한 모든 문제의 책임을 졌습니다. 그는 저보다 훨씬 지혜로웠으며, 저를 기쁘게 하고 제가 허용하는 모든 일을 했습니다."
얀 소비에스키가 사망한 후, 마리는 3년간 폴란드에 머물다 1699년에 로마로 떠났다. 그녀는 유명한 예술 후원자이자 스웨덴 여왕이었던 크리스티나 여왕이 창립한 아카디아 교황청립 아카데미에 들어가려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도 그녀는 팔라제토 주카리에 머물면서 이탈리아 음악가 도메니코 스카를라티의 후원자로서 명망을 이어갔으며, 1704년 9월 12일 빈에서 거둔 남편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핀치오 언덕에 있는 수도원으로 가는 길에 조명을 밝히고 음악과 노래가 어울러진 엄숙한 행렬이 자신의 저택에서 수도원까지 이어지는 행사를 개최해 세간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말년에는 프랑스로 이주해 블루아에서 여생을 보냈고, 1716년 1월 의사의 지시에 따라 위세척을 받은 직후 사망했다. 사후 블루아의 성 구세주 교회의 유스타스 성당에 안장되었다가 1717년 바르샤바의 카푸친 교회로 이송되어 남편의 무덤 옆에 안장되었고, 1733년에 얀 소비에스키와 마리의 유해 모두 크라쿠프의 바벨 대성당으로 이장되었다.
4. 창작물에서
4.1. 영화 및 드라마
4.1.1. 빈 전투
- 2012년작 영화 <빈 전투>에서 예지 스콜리모프스키가 연기했다.
4.2. 만화 및 애니메이션
4.3. 소설
4.3.1. 폴란드
- 1983년 소설인 폴란드에서 등장했다.
4.3.2. 바로크 사이클
- 2003년부터 연제된 바로크 사이클에서 잠깐 언급됐다.
4.3.3. 명군이 되어보세!
3부에서 유럽에 견서사로 간 주인공 성친왕이 얀 3세의 서녀 올렝카와 사랑에 빠지게 되어 얀 3세를 도와 제2차 빈 공방전에 선봉으로 참전하여 큰 전공을 올리고 올렝카를 아내로 맞는다. 그 후 성친왕은 형의 제위를 계승받아 대한 태황 건흥제가 되며 올렝카도 귀비의 작호를 받고, 건흥제와 올렝카의 사이에서 태어난 두 딸이 각각 러시아와 후금의 황후가 되어 얀3세의 핏줄을 이어가게 된다.4.3.4. 폴란드 여왕 키우기
폴란드 여왕키우기에서는 주인공의 장인이자, 조력자로 등장한다. 원래 역사와 달리 1674년에 태어나서 얼마안가 죽은 첫째딸이 살아있다.[44]처음에는 왠 타타르인하고 연애하는 딸을 미쳤다고 생각했으나 그 타타르인이 희대의 전술천재라는것을 깨닫자 그를 아끼고 인정해준다.
한편으로는 이제 다 늙은왕이라서 미래를 걱정하던중 죽기전에 꿈속에서 폴란드 국왕들[45]을 만나고 폴란드의 미래를 위해 주인공과 첫째딸을 밀어준다.
4.4. 게임
4.4.1. Europa Universalis IV
- 2013년 출시된 Europa Universalis IV에선 로딩 화면에 등장했다.
4.4.2. 도미네이션즈
- 얀 소비에스키의 후사르 윙이 유물로 등장한다.
5. 기타
별자리 중에서 방패자리의 유래가 된 인물이다.폴란드 500즈워티 지폐의 인물이다.
[1] 혼전성 다니워비치(Daniłowicz).[2]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를 인용한 것이 맞다.[3] Olesko. 현 우크라이나 서부 올레스코(Олесько).[4] Żółkiew. 현 우크라이나 서부 조우크바(Жовква).[5] Kolegium Nowodworskie. 현 바르트워미에이 노보드보르스키 크라쿠프 제1일반고등학교(I Liceum Ogólnokształcące im. Bartłomieja Nowodworskiego w Krakowie)[6] Zborów. 현 우크라이나 서부 즈보리우(Зборів).[7] Batoh. 현 우크라이나 중서부 체트베르티니우카(Четвертинівка).[8] Żwaniec. 현 우크라이나 서부 즈바네츠(Жванець).[9] Ochmatów. 현 우크라이나 중부 오흐마티우(Охматів).[10] 바르샤바 전투 자체는 스웨덴이 이겼으나 피로스의 승리였다.[11] Międzybóż. 현 우크라이나 중서부 메지비즈(Меджибіж).[12] Stryj. 현 우크라이나 서부 스트리(Стрий).[13] Lubar. 현 우크라이나 중서부 류바르(Любар).[14] Słobodyszcze. 현 우크라이나 중서부 슬로보디시체(Слободище).[15] Cudnów. 현 우크라이나 중서부 추드니우(Чуднів).[16] Sokołówka. 현 우크라이나 서부 소콜리우카(Соколівка).[17] Podhajce. 현 우크라이나 서부 피드하이치(Підгайці).[18] Trembowla. 현 우크라이나 서부 테레보울랴(Теребовля).[19] Kobryń. 현 벨라루스 남서부 코브린(Кобрин).[20] Niemirów. 현 우크라이나 서부 네미리우(Немирів).[21] Skwarzawa. 현 우크라이나 서부 스크바랴바(Скварява).[22] 다만 대관식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으로 인해 얀 소비에스키가 최전선에 나가 있어야 했기 때문에, 1676년 2월 2일이 되어서야 치러졌다.[23] 오스만 제국의 지방 행정관[24] Bar. 현 우크라이나 중서부 바르(Бар). 1768년 이곳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이 바르 동맹(Konfederacja barska)을 결성하여 반러 봉기를 일으켰다.[25] Smiła. 현 우크라이나 중부 스밀라(Сміла).[26] Załoźce. 현 우크라이나 서부 잘리즈치(Залізці).[27] Oleksińce. 현 우크라이나 서부 올렉신치(Олексинці).[28] Poczajów. 현 우크라이나 서부 포차이우(Почаїв).[29] Skałat. 현 우크라이나 서부 스칼라트(Скалат).[30] Janów.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에 야누프/이바니우(Іванів)라는 지명이 많으므로 어딘지 정확히 알기 힘듬.[31] Budzanów. 현 우크라이나 서부 부자니우(Буданів).[32] Świrz. 현 우크라이나 서부 스비르즈(Свірж).[33] Wiśniowiec. 현 우크라이나 서부 비시니베츠(Вишнівець).[34] Mikulińce. 현 우크라이나 서부 미쿨린치(Микулинці).[35] Zawałów. 현 우크라이나 서부 자발리우(Завалів).[36] Wojniłów. 현 우크라이나 서부 보이닐리우(Войнилів).[37] 우크라이나어로 포쿠탸(Покуття) 지방으로 현 행정구역상 서부 이바노프란키우스크주의 중부와 남부에 해당한다.[38] 전 왕 미하우 코리부트 비시니오비에츠키의 미망인 엘레오노레와 결혼했다. 나중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는 프란츠 1세의 할아버지.[39] 이 시기에 주치의 안제이 자우스키가 신장결석 치료를 위해 그의 몸에 다량의 수은을 투여해 건강이 더 나빠졌다.[A] 얀 3세 소비에스키와 이름이 같다.[41] 쌍둥이였지만, 둘 다 출생 직후 사망했다.[42]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과 결혼.[A] [44] 나중에 밝혀진 사실은 여주인공 엘주비에타 안나 비셰니엡스카의 영혼이 들어가서 살수있었다.[45] 피아스트, 카지미에시 3세,야드비가 여왕이나 브와디스와프 1세,자신의 주군이었던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