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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4 23:48:30

카미야네치포딜스키

Kamianets-Podilskyi
Кам'янець-Подільський
카미야네치포딜스키
파일:카미야네치포딜스키.png 파일:카미야네치포딜스키휘장.png
<rowcolor=#000000> 시기 시장
국가
[[우크라이나|]][[틀:국기|]][[틀:국기|]]
흐멜니츠키주
면적29km2
인구97,908명[1]
시간대UTC+02:00(서머타임 적용)
1. 개요2. 언어별 표기3. 역사4. 관광

[clearfix]

1. 개요

우크라이나 흐멜니츠키주(Хмельни́цька о́бласть)에 위치한 도시. 인구는 약 10만 명이다.

2. 언어별 표기

우크라이나어 Ка́м'яне́ць-Поді́льський(카미야네치포딜스키)
러시아어 Каменец-Подольский(카메네츠포돌스키)
폴란드어 Kamieniec Podolski(카미에니에츠 포돌스키)
루마니아어 Camenița(카메니차)
튀르키예어 Kamaniçe(카마니체)

3. 역사

다키아인들이 이 자리에 마을을 세운 것이 시초로 여겨진다. 11세기경에는 키예프 공국의 영토가 되었으나, 키예프 공국이 몽골 제국의 침입으로 붕괴된 후 14세기 무렵에 폴란드 왕국의 영토가 되었다. 폴란드 왕국이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되어 강성해지면서 이곳은 타타르인오스만 제국의 침입을 막는 요충지로 성장하여 거대 요새가 세워졌다. 폴란드-리투아니아가 귀족 공화정처럼 운영될 때에 카미야네치포딜스키는 바르샤바, 크라쿠프, 포즈난, 그단스크, 토룬, 르부프, 빌노 등과 함께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1672년, 오스만 제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체결한 부차치 조약으로 오스만 제국이 신설한 카마니체 에얄레트(Eyalet-i Kamaniçe)에 속하게 되었다. 얀 3세 소비에스키제2차 빈 공방전에서 활약하여 오스만 제국을 몰아붙인 결과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다시 폴란드-리투아니아에 편입되었다. 1791년, 제2차 폴란드 분할의 결과로 러시아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점령 하에 있기도 했다. 그러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러시아 제국은 동유럽 영토 대부분을 상실하였고, 이 도시를 대신 차지해야 할 독일 제국은 여력이 다해 이곳을 통치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이 이 도시를 차지하기도 했고, 폴란드 제2공화국소비에트 러시아가 이 도시를 두고 다투기도 했다. 그러나 1921년에 체결된 리가 조약에 따라 이 도시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고, 소련 성립 이후 우크라이나 SSR의 관할이 되었다. 그 뒤로 부농들은 모두 땅을 빼앗겼으며, 그 땅은 집단농장으로 편입되었다.

당시 카미야네치포딜스키는 우크라이나인러시아인이 많았지만, 폴란드인아르메니아인, 유대인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독소전쟁은 이 도시의 소수민족들에게는 재앙과도 같았다. 독소전쟁 당시 나치 독일은 카미야네치포딜스키를 점령하고 수많은 유대인들을 강제수용소로 끌고 갔다. 1944년에는 독일군소련군의 포위에서 탈출한 카메네츠-포돌츠크 포위전이 있기도 했다. 결국 소련은 독일군을 몰아내고 카미야네치포딜스키를 다시 차지했으며, 폴란드인을 모조리 폴란드로 쫓아냈다. 또한 나치가 들어섰을 때 잠시 득세했던 민족주의 세력들 역시 시베리아로 보내는 것으로 대응했다.

1991년 소련 해체로 인해 우크라이나의 영토가 되었다.

4. 관광

14세기에 지어진 캬미야네치포딜스키 요새(Кам'янець-Подільська фортеця)[2]이 있는 곳으로, 루테니아인이 세운 성채 중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곳이다. 오스만 제국이 강성할 당시 이 요새는 기독교의 보루이자 폴란드로 가는 관문으로 불리며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대오스만 전선의 핵심 지역이었다.[3] 해외 매체에서 우크라이나 베스트 여행지를 소개할 때 꼭 들어가는 곳으로,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이 지역만의 스타일로 지어진 성이기에 굳이 역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한번 가볼 만 하다.
파일:KP.jpg
카미야네치포딜스키는 성 자체도 아름답지만 푸른 녹음과 어우러진 전원적인 우크라이나 시골의 모습을 보여준다. 성과 함께 마을을 둘러보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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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통계인구, 2021년 기준.[2] 폴란드어로는 카미에니에츠 포돌스키 요새(twierdza w Kamieńcu Podolskim)[3] 그래서 1672년 부차치 조약으로 카미야네치포딜스키 요새가 오스만 측에 넘어가자 폴란드-리투아니아는 가히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 훗날 국왕이 되는 얀 소비에스키의 출중한 지도 하에 오스만 제국으로 넘어간 영토 일부를 되찾는데 성공하지만, 카미야네치포딜스키는 오스만 제국이 대튀르크 전쟁에서 패배한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간신히 수복했다. 그런데 이때 즈음이면 오스만 제국이 쇠퇴해서 오히려 카미야네치포딜스키가 갖던 대오스만 방벽의 의미가 크게 퇴색되었고 오히려 스웨덴루스 차르국-러시아 제국,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프로이센 왕국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안보의 최대 위협으로 떠오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