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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 왕국 Königreich Preußen Kingdom of Prussia | |||
국기(1892~1918) | 국장(1871~1918) | ||
Suum cuique 각자에게 각자의 것을 | |||
상징 | |||
국가 | Preußenlied Borussia Heil dir im Siegerkranz | ||
위치[1] | |||
1701년 1월 18일 ~ 1918년 11월 9일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 바이마르 공화국 (프로이센 자유주) | ||
프로이센 공국 | |||
역사 | |||
1701년 왕국 승격 1740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756년 7년 전쟁 1807년 틸지트 조약 1871년 독일 제국 성립 1918년 군주정 폐지, 제국 멸망 | |||
지리 | |||
<colbgcolor=#fff> 위치 | 중부 유럽 | ||
수도 | 베를린 | ||
면적 | 348,779km² | ||
인문환경 | |||
인구 | 40,169,219명(1910년) | ||
언어 | 독일어 | ||
종교 | 개신교[2](국교), 가톨릭, 유대교 | ||
민족 | 독일인 | ||
정치 | |||
정치 체제 | 전제군주제 → 입헌군주제[3] | ||
국가원수 | 국왕[4] | ||
왕조 | 호엔촐레른 가문 | ||
주요 국왕 | 프리드리히 1세 프리드리히 대왕 빌헬름 1세 | ||
주요 수상 | 오토 폰 비스마르크 | ||
경제 | |||
통화 | 라이히 탈러(1701년 ~ 1750년) 탈러(1750년 ~ 1857년) 베라인스탈러(1857년 ~ 1873년) 골트마르크(1873년~ 1914년) 파피어마르크(1914년 ~ 191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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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701년부터 1918년까지 존속한 독일 제국 내의 왕국. 신성 로마 제국 동북쪽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에서 출발하여 독일 제국 수립의 주역으로 성장한 국가이다.한국에서는 세계사 연구가 지금보다도 훨씬 부실하여 영어 자료에만 의존하던 과거에 영어 표기인 '프러시아 왕국'도 사용되었으나, 점차 원어인 독일어 표기인 프로이센 왕국(Königreich Preußen)으로 정착되어가는 추세이다.[5]
2. 역사
왕국으로 승격되기 전 동군연합 시절의 역사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과 프로이센 공국 참조.1701년에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프리드리히 1세로 즉위하면서 영지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및 동군연합인 프로이센 공국이 통합하여 단일 왕국으로 승격하였다. 사실상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위주의 통합 및 승격이었기 때문에 브란덴부르크가 본체였으나[6], 프로이센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은 브란덴부르크가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 왕국 안에 있는 선제후국이었기 때문이다. 선제후가 독립적인 국가의 칭호인 '왕(König)'을 사용할 시 독일왕(Rex in Germania)과 구분이 안되기 때문이다.[7] 그래서 신성 로마 제국 영토에 있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은 브란덴부르크 왕국이라 하지 못하고, 신성 로마 제국 영토 바깥에 있는 프로이센 지역에 기반하여 독립국의 왕임을 내세울 수 있는 프로이센 왕국이라고 칭하였다.[8] 신성 로마 제국의 동맹국이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귀족 의회인 세임이 브란덴부르크의 선제후가 왕이란 칭호를 쓰는 것을 반대하기도 하였지만, 정작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이자 작센 선제후인 아우구스트 2세는 찬성했기 때문에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의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1세 대관식 때 아우구스트 2세는 축하 편지를 보냈다.
프로이센 왕국은 브란덴부르크, 프로이센 공국, 베스트팔렌의 클레베-마르크 등 여러 곳으로 떨어져 있는 영토로 성립되어 있기 때문에 각 지역은 개별적인 법률과 신분제 의회를 갖고 있었으나,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선제후의 주도로 중앙집권제가 완료되면서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시대에는 절대주의 국가체제가 확립되었다.
8만 명이라는 거대한 정예 상비군과 세수 중심의 관료기관을 바탕으로 하여 막강한 중앙집권을 이룬 프로이센은 이때부터 북부 유럽의 패자로 돌변하였다. 9만 명의 황제군(Kaiserliche Armee)에 비해서는 적었으나, 프로이센군은 영토 대비 8만 명을 차지하는 많은 숫자였으며 왕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자들만 정예 병사로 뽑았기 때문에 반란이 일어나도 금방 제압하고 중앙집권화가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때에는 대북방전쟁에 참전, 오데르강 하구의 주요 항구인 슈테틴을 확보하였고 프리드리히 2세 때에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 참전해 합스부르크령 보헤미아의 핵심 영토였던 슐레지엔을 장악하였다.
7년 전쟁에서는 크게 밀리면서 나라가 완전 망할 뻔 했지만, 러시아 제국의 표트르 3세가 주도한 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으로 인해 기사회생하였다. 어쨌든 프로이센은 여러 차례의 전쟁을 통해 자신이 북독일의 강자임을 증명하였다. 그리고 제1차 폴란드 분할 때에는 서프로이센을 확보하면서 브란덴부르크 본토와 동프로이센을 연결하는 숙원을 달성하였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사망한 이후에는 추가로 두 차례의 추가적인 폴란드 분할을 통해 바르샤바까지 영토를 확장하였고, 프랑스 혁명전쟁에 참전했다가 가장 먼저 프랑스 혁명정부를 승인하는 조건으로 마인 강 이북의 영토 점유를 인정받았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등장한 이후에는 오히려 프랑스 편에 붙어 하노버와 브레멘 등을 합병하는 등 크게 세력을 키웠다.
하지만 프로이센 내에서 나폴레옹에 대한 반감은 알게 모르게 점점 커져갔고, 결국 당대의 먼치킨 나폴레옹한테 도전했다가 제4차 대불동맹 전쟁에서 패배, 틸지트 조약(1807)으로 그동안 확보한 영토들을 거의 다 잃으며 일시적으로 프랑스 제1제국의 속국이 되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몰락할 즈음에는 다시 동맹군에 가담해 주요 승전국 중 하나가 되었으며, 빈 회의에서 작센 왕국의 북부 지역과 베스트팔렌·라인란트 등의 새 영토를 얻었다.
19세기에는 프로이센에서도 산업 혁명이 진행되기 시작하면서 독일 연방에서 북독일 관세동맹을 체결하고 철광석과 석탄이 풍부한 라인란트와 베스트팔렌, 슐레지엔을 중심으로 산업화가 급속도로 진전되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뒤쳐진 점이 많았기에 자유주의 세력은 개혁을 꿈꾸었다. 1848년 3월 전 독일을 뒤흔드는 자유주의/민족주의 대혁명이 일어나 의회가 설치되는 등의 진전이 있었으나, 결국 국왕의 외면과 보수파의 진압으로 실패했다. 귀족이 아닌 민족, 다시 말해 국민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려던 자유주의는 프로이센뿐만 아니라 전 유럽의 지배 계층인 귀족들에게서 격렬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으며,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비교적 자유주의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입헌군주제에 기반한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의 독일 황제 추대를 거부하였다(1849).
이후 나타난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의회를 정치력으로 무력화시키고서는 아예 수족으로 부려가면서 통일을 위한 대업을 실시,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1864),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1866)과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에서 승리하여 1871년 연방 형식으로 독일 통일을 완수, 독일 제국을 수립하였다.
프로이센 왕국은 통일 과정 중 슐레스비히홀슈타인, 하노버 왕국, 헤센 선제후국, 나사우 공국 등을 병합하며 세력을 크게 불렸으며 이 세력을 바탕으로 독일 제국이 수립된 이후에도 제국의 면적의 66%, 인구의 60% 정도를 차지하며 실질적으로 제국을 지배하였다. 이와 같은 독일·프로이센의 이중 구조는 제국이 멸망하고 세워진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도 '프로이센 자유주'로 존속하였다.
최초의 중앙집권적 근대 통일 국가를 건설한 국가로서 프로이센은 독일이 가지는 정체성의 뿌리가 되는 나라지만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의 결과 현재의 독일은 옛 프로이센 왕국의 영토 중 절반 이상을 폴란드와 러시아에 할양한 상태이다. 왕국으로 승격될 당시의 영토로만 한정할 경우 베를린과 현 브란덴부르크 주 정도만 제외하면[9] 현 독일에 남아있는 영토가 거의 없다. 다만 앞서 말했듯 프로이센의 본체는 브란덴부르크였고, 호엔촐레른 가문의 유산도 베를린과 포츠담에 모여있기 때문에 문화적인 상실은 거의 없는 편이다.
현대 독일에 있어 프로이센은 자국사의 일부로 자신들과 연결되어 있는 국가로 여겨지지만, 동시에 단절과 극복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사실상 현재의 독일을 만들었다고 여겨지는 독일연방공화국의 세 총리들(콘라트 아데나워,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빌리 브란트)부터가 반프로이센 성향이 강한 인물들이었다보니 서독에서는 프로이센 물이 많이 빠졌다.
3.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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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란덴부르크 | 포메른 | 슐레지엔 | |
포젠 | 작센 | 하노버 | |
헤센나사우 | 베스트팔렌 | 라인란트 | |
슐레스비히홀슈타인 | 호엔촐레른 | }}}}}}}}} |
자세한 내용은 프로이센/행정구역 문서 참고하십시오.
4. 군사
자세한 내용은 프로이센 왕국군 문서 참고하십시오.5. 역대 국왕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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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
프리드리히 1세 |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 프리드리히 2세 |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 |
<rowcolor=#fff> 제5대 | 제6대 | 제7대 | 제8대 | |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 빌헬름 1세 | 프리드리히 3세 | |
<rowcolor=#fff> 제9대 | ||||
빌헬름 2세 |
대수 | 이름 | 생몰년 | 재위기간 | 비고 |
1 | 프리드리히 1세 | 1657년 7월 11일 ~ 1713년 2월 25일 향년 55세 | 1701년 1월 18일 ~ 1713년 2월 25일 | 1688년부터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겸 프로이센 공작이었음 |
2 |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 1688년 8월 14일 ~ 1740년 5월 31일 향년 51세 | 1713년 2월 25일 ~ 1740년 5월 31일 | |
3 | 프리드리히 2세 | 1712년 1월 24일 ~ 1786년 8월 17일 향년 74세 | 1740년 5월 31일 ~ 1786년 8월 17일 | |
4 |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 1744년 9월 25일 ~ 1797년 11월 16일 향년 53세 | 1786년 8월 17일 ~ 1797년 11월 16일 | |
5 |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 1770년 7월 3일 ~ 1840년 6월 7일 향년 69세 | 1797년 11월 16일 ~ 1840년 6월 7일 | 마지막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
6 |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 1795년 10월 15일 ~ 1861년 1월 2일 향년 65세 | 1840년 6월 7일 ~ 1861년 1월 2일 | |
7 | 빌헬름 1세 | 1797년 3월 22일 ~ 1888년 3월 9일 향년 90세 | 1861년 1월 2일 ~ 1888년 3월 9일 | 1871년부터 독일 황제 겸임 |
8 | 프리드리히 3세 | 1831년 10월 18일 ~ 1888년 6월 15일 향년 56세 | 1888년 3월 9일 ~ 1888년 6월 15일 | |
9 | 빌헬름 2세 | 1859년 1월 27일 ~ 1941년 6월 4일 향년 82세 | 1888년 6월 15일 ~ 1918년 11월 9일 |
6. 역대 국기
1701년~1750년 | 1750년~1801년 | 1801년~1803년 |
1803년~1892년 | 1892년~1918년[10] |
7. 같이 보기
[1] 진한 초록은 1866년 이후 프로이센 왕국의 최대 영토이고, 연한 초록은 북독일 연방의 구성국이다. 북독일 연방은 프로이센 왕국의 주도로 결성되었고 그 외의 구성국들은 사실상 프로이센의 위성국이었다. 북독일 연방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후 독일 제국으로 계승된다.[2] 절대다수가 루터파와 칼뱅파였으며 둘은 1817년 프로이센 연합 교회로 통합되었다.[3] 말로만 입헌군주제이지 국왕의 권한이 강대하여 전제군주제나 마찬가지였다. 이를 외견적 입헌군주제라고 한다. 오늘날 이슬람 입헌군주제 국가들과 비슷하다. 제1차 세계 대전 말기인 1918년 재상에 취임한 막시밀리안 폰 바덴이 영국식 입헌군주제로 개혁하려 하였으나 11월 혁명이 터지는 바람에 실패로 끝났다. 한국도 대한제국을 선포할 때 영국식 입헌군주제와 독일식 입헌군주제 사이에서 고민하였으나 전제군주제를 선포해야 한다는 조언을 들은 고종은 전제군주제 국가인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아울러 일본 제국을 만든 유신 지사들이 모범으로 삼은 나라도 이 프로이센 왕국이었는데, 전제군주제인 천황절대주의를 추구하던 유신 지사들한테는 전제군주제 국가였던 프로이센이 모든 면에서 안성맞춤이었다. 그래서 일본 제국의 헌법이나 일본 제국 육군은 다분히 프로이센의 헌법과 육군을 모방하여 만들어졌다.[4] 프로이센 왕국 국왕은 1806년 신성 로마 제국 해체 전까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를 겸했으며 나중에는 북독일 연방 의장과 독일 제국 황제를 겸했다.[5] 비슷한 예로, 이탈리아를 통일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전신인 사보이아 공국이 있다. 과거에는 영어식 표기인 사보이 공국이 주로 사용되었으나 최근에는 원어인 이탈리아어 표기 사보이아 공국(Ducato di Savoia)으로 정착되고 있다.[6] 프로이센 공국의 수도 쾨니히스베르크가 아닌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의 수도 베를린에서 호엔촐레른 가문의 군주들이 머물렀던 사실 하나로도 확인 가능하다. 프로이센 왕국 선포 이후에도 쾨니히스베르크는 중요한 도시였지만 대관식 개최지와 왕실의 피난처 정도의 역할에 머물렀고, 그나마 대관식을 올린 국왕도 딱 2명이었다. 심지어 독일 통일의 주역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현재는 작센안할트인 옛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의 알트마르크(Altmark) 지역을 가리켜 프로이센의 요람(Wiege Preußens)이라고 말했다.[7] 신성 로마 제국에는 독일왕, 이탈리아 국왕, 부르군트 국왕, 보헤미아 국왕 4개의 왕이 있었는데 독일왕과 이탈리아 국왕은 황제의 겸직이었고 부르군트 왕국은 14세기 말에 소멸했다. 보헤미아 국왕은 1526년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후보자를 배출하여 사실상 준세습화되었다. 나중에 이탈리아를 통일하는 사르데냐 왕국도 왕국의 중심지는 피에몬테와 사보이아였으나 사보이아 공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라인강 상류 관구(Oberrheinischer Reichskreis), 피에몬테는 이탈리아 왕국에 속하여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봉신이었기 때문에 신성 로마 제국과 관련이 없는 사르데냐 왕국으로 칭하다가 1815년 빈 회의 이후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으로 개칭하였다.[8] 이로 인해 군주를 부르는 명칭도 제1차 폴란드 분할 이전까지는 '프로이센에서의 왕(König in Preußen)' 이었다. 유럽식 외왕내제로 볼 수 있는데 프로이센 영지 안에서만 왕이지, 밖에서는 왕이 아닌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에 불과했다는 의미이다. 노르만 정복 이후의 잉글랜드 국왕도 비슷한 사례인데 이들은 잉글랜드에서만 왕이었지, 프랑스 영토인 노르망디에서는 봉신에 불과했다. 프로이센 군주가 '프로이센 국왕(König von Preußen)'이라고 국제 사회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은 7년 전쟁 이후였고, 이후 제1차 폴란드 분할으로 서프로이센으로 알려진 왕령 프루시 지역을 획득하면서 확인사살했다. 하지만 대외적으로 완전히 프로이센이라 칭하기 시작한 것은 1806년 신성 로마 제국 해체 이후였고, 그 전까지 공식적인 대외 명칭은 브란덴부르크였다.[9] 1701년 당시 프로이센 공국이었던 동프로이센 지역은 물론, 당시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중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인 노이마르크 지역(왕국 승격 당시 브란덴부르크 본토의 약 1/3)과 힌터포메른까지 상실했다.[10] 사실 가장 유명한 깃발이 이것이다보니 독일 제국 이전의 프로이센에 이 국기를 인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독일 제국 이후에 만든 거라 해당 목적대로라면 쓸 일이 별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