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별 명칭 | |
한국어 | 상비군 |
영어 | Standing Army |
일본어 | 常備軍 |
중국어 | 常备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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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상비군(常備軍)은 '국가 비상사태에 항상 대비할 수 있도록 편성된 군대, 또는 그런 군인'으로 전시와 평시 구분 없이 편제된 군과 군인을 지칭하는 말로 국가에 군사적 혹은 기타 위기가 닥쳤을 때 즉각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부대를 뜻한다.징병제와 모병제 등 병력을 공급하는 방식의 구분에 상관 없이 대부분의 현대 국가는 자주국방을 위하여 상비군을 가지고 있다. 그와 더불어 유사시를 대비하여 상비군 외에 예비군을 별도로 운용하는 것이 통상적이다. 그러나 인구수가 매우 적은 미니국가의 경우, 예외적으로 상비군이 없는 국가도 있다. 치안은 소규모 자경단 수준인 경찰이 유지하고 국방 문제는 인접한 국가에 편승하여 안보를 달성한다. 대표적인 예로 유럽 한복판에 있는 리히텐슈타인 공국이 있다.
2. 장점
오직 전쟁만 전문적으로 대비하는 군대이기에 전문성이 높다. 평시가 되어도 해산되지 않고 훈련을 하기 때문이다. 민간인을 병사를 징집할 경우 발생하는 생산력의 요동이 없고, 이미 준비되어있기에 빠르게 부대를 운용할 수 있다.또한, 항상 존재하므로 그 자체로 적국 혹은 가상적국이 의식하게 되어 전쟁억지력을 발생시킨다. 그리고 그에 따른 높은 치안이 사회경제의 발전에 도움을 준다.
이런 특징 덕분에 군인에게 요구되는 역량이 다양한 현대에는 거의 전 국가가 상비군 체제이다. 군대 미보유국이라 하더라도 공공부대나 경찰예비대 등 준군사조직이나마 준비된 상비 무력은 조금이나마 존재하며, 이조차 없더라도 최소한 외국의 상비군에게 국방을 맡긴다.
3. 단점
막대한 예산이 든다. 평시에도 상비군을 유지하는 것이 전쟁에서 유리하다는 것은 고대부터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시대와 장소를 떠나서 군대를 육성하고 유지하는 것은 많은 비용과 인력 등 자원이 필요했고, 이는 국가 체제를 유지하는 데 큰 부담이 되었으므로 상비군을 유지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생산력이 부족해서 국가 구성원 대부분이 생업에 종사하여야 국체가 유지되던 과거의 국가에게 오로지 군대 임무에만 종사하게 하는 상비군을 대량으로 확보하는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통치자들은 현실과 타협해서 상비군은 최소화하고 예비군으로 보완하거나 상비군에게 권력 분점을 감수하고 상비군의 자생을 위한 경제적 기반을 주었다.상비군을 최소화하고 예비군을 활용한 사례로는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이나 고대 로마 등이 있다. 로마의 경우 공화주의에 입각하여 공화정기까지는 시민에게 일정기간 병역 의무를 부과하여 군단 인원을 순환복무하게 하였고, 제정 수립 이후에는 상비군단(군단병 및 보조병)은 직업군인으로 채우되 이를 보조하고자 퇴역군인 들에게 각 식민시 일대의 자체방어를 분담시겼으며, 고대 후기에는 아예 이들에게 국경 방어를 맡기고 상비군은 기동대로 삼기도 하였다.
동아시아, 특히 중국이나 한국의 경우 시대별로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정규군을 두고 병농일치 징병제를 실시하여 백성들이 일정 기간은 군역을 수행해야 했다. 이는 중화식 관료제에 의한 강력한 중앙집권으로써 이루어졌다. 그 결과 친위대(금군)와는 별개로 나라의 군대인 관군이 조직되었다.[1]
반면, 동서를 막론하고 생계수단을 따로 마련해주면서 군역을 특정 집단이나 계급에게 전담케 하기도 했는데, 예컨대 중세 유럽에서는 각 유력자(영주)가 자기 가신들을 무장시켜 군대를 조직하고 군주가 이러한 유력자에게 영지를 주어 봉신으로 삼는 식으로, 평시 각 지방을 알아서 지키면서 전쟁이 나면 언제든 동원할 수 있는 전문적인 상비전력을 유지하였다.[2] 동아시아에서는 특히 전란이 잦은 시기에는 세병제나 둔전제를 취하는 예가 많았고, 종종 그 정도가 심하여 중앙정권이 유명무실해졌을 때에는 이들 지방군이 그대로 반독립적 군벌이나 반군으로 변신했고, 혹은 따로 가별초와 같은 사병이 조직되어 사실상 반독립적인 토호들의 상비전력 노릇을 하고는 했다.
그리고 동아시아에서나 유럽에서나 그밖의 여러 지역에서나 상비군에 해당할만한 제도를 도입하더라도 대부분 전쟁이 날 때마다 따로 농민을 징집하는 등 예비전력을 급조하고는 했다. 그래서 중세시기까지도 전쟁에 대한 기록을 보면 전쟁을 하다가 농번기가 되면 서로서로 군대를 해체해서 농사 추수하러 보냈다가 다시 징집해서 전쟁을 이어서 하는 식으로의 묘사들이 있다.[3] 물론 간략하게 개별 전투만을 다루거나 그냥 몇년 동안 전쟁을 했다는 식으로 묘사하는 방식으로는 잘 안나와서 사람들이 잘 모르지만...
이렇듯 상비군과 예비군을 유지하려면 다음의 무언가 중 하나 이상을 감수하는 것이 불가피했다.
- 권력의 분할: 특정 계급이나 집단이 독자적으로 경제력과 정치력을 보유하도록 용인해야 함.
- 생산성의 희생: 동원하거나 상시 유지하는 규모가 크고 오래 갈수록 경제적 손해가 커짐.
- 유지비 상한선에 따른 병력 규모 제한: 경제적 손해를 최소화하려면 무력 수요에 비해 보유 무력이 빈약해지기 쉬움.
이런 문제로 고대에서 상비군 체제를 선택한 국가는 그만큼 아랫 계층을 착취하거나, 거대한 영역에서 나오는 많은 인구와 잉여생산물이 있는 대제국이었다.
따라서 중세, 특히 크고 작은 전쟁이 빈발하면서도 큰 세력을 이루지는 못하였던 서양의 군주와 제후들은 이러한 동원제도를 방어전으로 한정하는 대신 용병을 활용하는 것을 선호하였다. 소집하거나 전투에서 죽어도 노동력이 감소하지 않고, 농민 징집병에 비해 경험이 많으며, 평화시에도 알아서 단련하므로 월등한 전투력이 보장되었기 때문이다.[4]
공통적으로 근위대 정도는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평상시에도 상비군 형식으로 유지되는 군종이었다. 아무리 군비를 최소화하여도 오늘날 대통령경호처 같은 경호나 경비상의 전력은 필요하기 때문이다.
4. 역사
기록상 최초로 상비군을 보유했다고 알려진 것은 아시리아이며, 신아시리아 시기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가 군대를 재정비하고 상비군의 규모를 크게 늘렸다.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인 스파르타이다. 다른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시민들이 전쟁 때마다 소집하는 방식을 주로 취했지만, 스파르타는 노예들인 헤일로타이들이 경제활동을 맡았고 지배자인 스파르타인들은 이들 노예를 무자비하게 착취하는 병영국가였던 까닭에 상시 전쟁에 대비하는 전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후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2세도 상비군을 창설한 바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 상비군으로 이루어진 군대를 유지한 첫번째 국가는 로마 제국이다. 기원전 1세기 이전까지 로마군은 전쟁이 있을 때마다 소집되던 시민병이었으나, 마리우스의 군제개혁 이후 차츰 임금을 받는 직업군인들로 변모했으며,[5] 아우구스투스의 재편 이후 로마군은 군단병 20년, 보조병 25년의 의무복무기간을 지니며 국가로부터 급여를 받는 직업군인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평시에도 농사 등의 생산활동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오직 군복무에만 전념했다. 약 30만 명으로 이루어진 이들 로마군이 상시 로마 제국의 방위를 담당하였다.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중세 서유럽에서는 대규모 상비군을 둘 여력을 지닌 나라가 없어 그 규모가 축소되었고, 한동안 상비군의 규모가 매우 적거나 아예 없는 경우가 있었다. 반면 동로마 제국에서는 국력이 쇠퇴하기 전까지는 상당한 규모의 상비군을 유지했지만, 상비군만으로 군대를 조직하지는 않고 둔전병이라고 할 수 있는 테마 제도와 병행해서 운용되었다.
중세의 상비군은 국왕을 호위하고 궁궐을 지키는 친위대로 활약하거나 국경지역의 경비, 도성과 중요 도시의 치안을 담당했다. 이런 군인들은 전문 용병 부대를 고용하거나, 그 군역이 대대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고 그것이 곧 신분이 되었다. 한국사에서 고려의 전시과를 배우다보면 나오는 군인전 역시 군인들에게 세습하게 하던 땅이었고, 조선은 무과로 급제된 무신 관료들과 상류계층의 자제들이 주로 복무한 갑사, 훈련도감으로 본격적인 직업군인을 평시에도 대규모로 운영했다. 중세 서양의 기사, 일본의 사무라이 등도 군역을 세습하다가 아예 군사귀족으로 신분화되어 우대된 경우다. 하지만 이들은 그 수는 많지 않아서 수만~수십만의 대규모 부대단위를 이루지 못하고 지휘관이나 장교 또는 소규모~중간규모의 정예부대를 구성하였다.
서양에서 본격적인 상비군이 다시 등장한 것은 중세가 끝나고 근대로 접어드는 절대왕정 시기였다. 사병을 가진 지방분권적 귀족들에게 눌려지내며 동아시아보다 왕권이 한참 열세였던 서양의 왕들이 귀족들을 누르기 위한 무력으로 상비군을 운영한 것이다. 그리고 그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상업을 적극 지원하는 중상주의가 중요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시민 혁명을 통한 국민 의식, 여기에 산업 혁명으로 국가 단위의 경제가 크게 성장하고, 국가주의가 발달하면서 모든 국민이 징병의 의무를 지는 징병제를 도입하며 이를 통해서 대규모의 상비군을 유지하는 체제가 확립된다. 더군다나 서양국가들의 경우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같은 각종 왕조 전쟁들과 제국주의가 도래하면서 침략에 필요한 전문적인 군대가 늘 있어야 했으므로 상비군의 중요성은 더 커졌다.
반면, 대체로 동아시아는 서양과는 상비군의 발전과정이 달랐다. 중동에서 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의 전제 왕권은 막강한 편이었고 신하들이 국왕을 물리적으로 위협할 사병 같은 요소는 중앙에 집중된 권력을 동원해서 억눌렀다. 그 덕분에 중앙집권화가 완료된 국가에서는 사병을 찾기 힘들었고, 따라서 간혹 반란이 일어나도 반란군에 제대로 된 병사가 없거나 그 수가 적은 경우 도성 방위와 궁궐 호위를 맡은 중앙군만 잘 통솔해도 진압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으로 끝났다. 설령 지방군 중 한 지역을 지키는 부대 전체가 반란을 일으켜서 중앙군만으로 감당하기 어렵더라도, 전체적인 국가체계와 사회·경제가 안정되어 있다면 다른 지역의 지방군이 중앙군과 합류해서 격퇴하는 게 가능했다. 성공한 반란은 모두 총체적 문제로 파탄국가 수준이 되자 군대 대부분이 배신하여 반란에 가담한 경우이다. 게다가 동아시아의 경우 붕괴 후 혼란기를 제외하면 국제질서가 대체로 안정적인 시대가 많았다. 예컨대 조선은 나선정벌 이후로 이양선이 오기 전까지 외적을 상대로 군대를 동원할 일이 거의 없었고, 동시기 일본도 에도 막부가 전국시대를 끝내고 쇄국정책을 시행해서 상대적으로 국내외에 평화적인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중국은 청나라가 그나마 정벌을 활발히 하여 몽골제국을 제외하면 중국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가지게 되었지만, 정복이 멈추자 자연스레 군비축소가 이루어졌고, 왕조의 말년에 접어들수록 정예부대인 팔기군마저 녹슬대로 녹슬어 버렸다. 즉 동아시아는 근대에 가까워질수록 지역 정세와 나라가 안정됨에 따라 서양보다는 전쟁과 상비군 강화에 신경을 덜 쓴 셈이다.
그리고 근대에 들어서면서 동서양이 맞붙게 되고 식민지 쟁탈전과 세계 대전들, 냉전을 거치며 전쟁양상이 이전과는 비교가 안 될만큼 거대하고 험악해졌다. 그러한 까닭에, 현대국가에서 징병제로 인한 상비군은 한동안 당연하고 필수적인 것으로 굳어졌다. 베트남전 이후로 냉전 체제가 서서히 붕괴하면서 군축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과거의 전훈으로 말미암아 여전히 상비군제는 유지되고 있다. 유럽은 NATO로 안보가 보장되는 데다가 유럽연합이 탄생하는 등 정치적으로 안정되면서 각국이 대대적으로 군축에 들어가 소수정예로 변모하고, 미국은 모병제로 상비군을 유지하며, 중국 역시 인구가 넘쳐나다보니 모병제로 바뀌는 등 나라 사정에 따라서 상비군을 다르게 운영하게 되었다.
5. 기타
- 상비군이 많은 나라로는 중국 인민해방군, 인도군, 미군, 조선인민군, 러시아군, 터키군, 대한민국 국군, 베트남군, 이집트군 등이 있다. 세계 각국 군대의 자세한 수량은 병력 문서를 참고하자.
- 민간에서는 상비군이란 용어가 다른 개념으로 쓰이곤 하는데, 가장 친숙한 분야가 스포츠계의 "국가대표 상비군"이다. 여기서의 상비군이란 국가대표 후보 또는 준국가대표를 말하는 것으로, 정식으로 선발된 국가대표 선수 가운데 부상 등으로 공백이 발생하면 이 상비군 내에서 대체 선수를 뽑거나, 국내외 국제대회 일정이 겹칠 때 지명도가 낮은 대회는 이들을 중심으로 참여시킨다. 군에 비유하면 예비군에 가까운 개념이다. 일부 협회는 유망한 인재의 발굴과 두터운 선수층의 유지를 위해 국가 대표단과 함께 유능한 상비군 선수를 합숙 훈련시키며 육성하는데, 협회별로 상비군 규정에 따라 국가대표에 준하는 혜택을 주기도 한다.
6. 관련 문서
[1] 동아시아에서는 이미 고대부터 총력전이 벌어졌고, 패망하는 경우 종주권을 인정하고 조공국이나 속국이 되기도 하였으나 그대로 나라나 민족이 절멸하기도 했다.[2] 이들은 단순히 자기 동네만 지키는 게 아니라 법령에 따라 정기적으로 요새수비를 위한 주둔군으로 소집되기도 하였고, 종종 따로 이 의무만을 조건으로 하는 봉신계약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3] 예컨대 앵글로색슨 잉글랜드 왕국에서는 자유농민을 소집하여 편성하는 군대인 "fyrd"를 운용할 때 이러한 문제로 곤란을 겪었다.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도 당장 왜군을 막을 때는 병력을 대규모로 동원하였으나, 명나라군이 지원오면서 한시름을 덜자 정유재란부터는 상당한 병력을 소집해제하여 전시생산 및 복구에 힘썼다.[4] 다만, 이들 용병의 구성원은 대개 어딘가의 말단 봉신이나 가신, 그리고 이들의 자식으로서 떠돌이가 된 자들이었다. 특히 용병대의 대장 등 수뇌부는 귀족출신인 경우가 많았다.[5] 다만, 정규군이기는 해도 엄밀히 말해 이 시기는 공화정의 군대라기보다는 각 장군이 거느리는 사병으로서의 성격이 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