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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4 13:13:51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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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프로이센 제2대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Friedrich Wilhelm I
파일:Antoine_pesne_friedrich_wilhelm_I.jpg
출생 1688년 8월 14일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베를린
사망 1740년 5월 31일 (향년 51세)
프로이센 왕국 베를린
재위기간 프로이센 국왕브란덴부르크 선제후
1713년 2월 25일 ~ 1740년 5월 31일
서명
파일: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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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가문 호엔촐레른 가문
부모 아버지 프리드리히 1세
어머니 하노버의 조피 샤를로테
형제자매 루이즈 도로테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배우자 하노버의 조피 도로테아 (1706년 결혼)
자녀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빌헬미네, 프리드리히 빌헬름, 프리드리히 2세, 샤를로테, 프리데리케 루이제, 필리피네 샤를로테, 루트비히, 조피 도로테아, 루이제 울리케, 아우구스트 빌헬름, 안나 아말리아,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아우구스트 페르디난트
종교 칼뱅파 }}}}}}}}}

1. 개요2. 생애
2.1. 절약가혹행위 사이에서2.2. 가족들과의 관계2.3. 프로이센군 기반 양성
3. 가족관계
3.1. 자녀

[clearfix]

1. 개요

프로이센 왕국의 초대 국왕 프리드리히 1세의 차남[1]으로 프로이센 왕국의 2대 국왕이자 브란덴부르크 선제후.[2]

개인적으로 사치에 돈을 안쓰고 근검절약하면서, 지나치게 군대 욕성에 집착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폭력을 동반하여 가혹할 정도로 엄격하게 대하여 당대에 주변국가 귀족들에게 구설수에 오르거나 비웃음을 많이 사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재정, 행정 개혁으로 아낀 예산으로 막강한 군사력을 키웠고, 세계최초의 초등교육 의무화로 문맹을 퇴치하였다. 또한 그는 강력한 군대를 육성하였지만 허투른 군사 개입은 국력 낭비라 여겨 전쟁 개입에 매우 신중했고 그와중에 북방전쟁 등에 선별적으로 개입하여 실리를 챙겼다. 네덜란드 장인이나 탄압받은 잘츠부르크 개신교 난민 등을 적극적으로 포용하여 국력 증진에 보탬이 되도록하는 등 다방면에서 프로이센의 부국강병의 토대를 탄탄하게 다지는 업적을 남겼다.

2. 생애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손자이자 초대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이다. 학문과 예술을 사랑하며 그만큼 낭비벽도 있었던 선왕과는 달리, 일생동안 근검절약을 통해 재정을 건실하게 관리했으며 부국강병에 열심이었다. 성격은 솔직하면서도 무척 검소하였으며 신앙심이 깊었다. 또한 국왕으로서의 능력은 상당히 뛰어났고 재위기간 내에 업무를 절대 소홀히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부장적이면서도 성격은 매우 권위적이고 거칠었다. 상비군을 숭상하여 "군인왕(Soldatenkönig)"이라는 별명을 들었으나[3], 정작 치세 동안에는 전쟁은 거의 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치세 기간 일어난 몇몇 전쟁에서는 이겼고 전쟁을 거의 하지 않아서 나라가 대체로 평화로웠기에 확실하게 이득을 보았다. 그는 자신의 군대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흔한 일이던 다른 나라에 돈 받고 군대를 빌려주는 일도 거부했다고 한다. 아버지 프리드리히 1세가 군대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에게 빌려준 대가로 왕위에 오른 것과 대비된다.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 북쪽 발트해 인근에서는 스웨덴러시아가 한참 대북방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당시 스웨덴은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남긴 강군과 국왕 칼 12세의 뛰어난 전술적 능력 덕에 러시아군을 압도했으나, 잦은 전략적 오판 때문에 유리하게 전쟁을 끝낼 기회를 놓친 채 지지부진하게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반면 러시아의 표트르 1세는 러시아 전역의 성당 종중 1/3을 녹여 대포를 만들고, 상인과 성당에 세금을 물려 서유럽제 신형 머스킷 수만 정을 사들이는 등 철저히 복수를 준비해 결국 스웨덴에게서 승리를 거머쥐었다. 스웨덴은 결국 러시아에게 발트해 연안 영토와 핀란드까지 점령 당하고 반격 능력을 상실했는데, 이에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당시 내륙국이던 하노버를 북해와 연결하고 싶어했던 영국 - 하노버 왕국과 손잡고 독일 내 스웨덴령을 침공했다. 침공의 결과 프로이센은 슈테틴오데르강 하구의 스웨덴령 포메른 일부를, 하노버는 브레멘-페르덴을 얻었다.

2.1. 절약가혹행위 사이에서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국가 예산의 무려 8할을 군에 쏟아부었다. 사실 이는 영국의 재정지원으로부터 프로이센의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당시 영국은 하노버를 보호하고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서 국가재정이 부유하지 않던 프로이센에 재정지원을 했는데, 이에 그치지 않고 이를 무기로 내정간섭을 하려드는 등 문제가 많았다.[4] 이 때문에 이를 위한 재원 확보를 위해 그는 평소에도 솔선수범해 근검절약하며 살았고, 특히 부왕 프리드리히 1세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혐오해 그가 루이 14세를 흉내내 지은 방만 700개나 되는 호화스러운 왕궁에 살면서도 개인적으로 단 5개의 방을 사용하고 2명의 시종만 뒀다. 그외에도 부왕이 수집한 각종 사치품도 시원하게 팔아치워 국가 예산으로 썼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랐는지 왕이란 작자가 서민이나 피는 싸구려 담배를 피거나[5], 식사도 병사용 전투 식량으로 배를 채우고[6], 로코코 풍의 옷은 비싸다고[7] 군복만 입고 다니고[8], 심지어는 귀족들 파티에 난입해서 무전취식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병사들을 "내 새끼들"이라고 칭할 정도로 군대에 대한 사랑이 유별나서 종종 '국왕이 직접 사랑의 매를 들고 점호에 나서서 병사들을 두들겨 팼다.'고 한다. 이런 일화 때문에 당시 유럽 상류층들에게 비웃음 받으며 한참 모자란 사람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당시 유럽에서 군대나 병사는 왕실 소유로 하인, 종이나 다름없었고, 전열보병 시절에는 군기 유지를 위해서라며 구타를 일상다반사처럼 행했지만 어디까지나 장교들은 고참병이나 부사관이 행하는 것을 감독할 뿐 직접 나사서 군기를 잡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그나마도 고위급 장교들은 병사들이랑 만날 일도 거의 없는 게 당연하다시피한 일인 시절에 일개 장교도 장군도 아닌 왕이 직접 밀덕질에 심취했다는 것은 전 유럽적인 비웃음거리였다.

다만 프리드리히가 오롯이 밀덕질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미래의 병사들이 될 신민들을 위해 초등교육을 무상으로 실시하였고, 이에 따라 웬만한 시골 촌부들이나 빈민층도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되어[9] 프로이센의 군사력이 오스트리아를 앞서게 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특히 자녀들에게 농사일을 시킨다고 초등학교에 안 보낼까봐 초등교육을 의무화하기도 했는데, 적국인 오스트리아는 훗날 7년 전쟁의 실패를 맛 보고 나서야 마리아 테레지아가 프로이센의 정책을 모방하여 초등교육을 의무화했다. 공무원들의 기강을 잡는데도 앞장서면서 메뉴얼도 만들었고, 군대에 빠질려는 중산층들에게 국방세를 받으면서 그 돈으로 병원과 학교를 만드는 일에 열성이었고, 프로이센에 산적해있던 습지들을 개간하는 사업에도 열을 올려 농업생산력을 높이는 데에도 열심이었다.

돈에 인색하여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평생 남에게 돈을 준 건 딱 세 번이었는데 이 세 번 모두 베를린 도서관에 대한 기부였다. 교육에 돈을 쓰긴 했지만 후술할 거인 연대에 뽑으려고 찍어둔 장정 한 명 스카웃 비용보다 적은 푼돈을 내서 왕국 신민들은 물론 타국에서도 크게 비웃음을 당했다.

군인왕이라는 별명답게 통치방식도 군대식이라 휘하 사람들을 거칠게 단련하여 군기를 잡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근본적인 성격부터가 교양이나 자비와는 굉장히 거리가 먼 무척 난폭한 성격의 소유자여서, 시종과 시녀들은 물론 왕비까지도 때렸고 특히 아들인 왕자들을 쥐잡듯이 잡았다고 한다.[10] 아들들 중에서도 왕세자이자 후계자였던 훗날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잘 때린 수준이 아니라 허구한 날 두들겨 패는 지경이었다. 한번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신하들과 함께 한 산책 중에 갑자기 몽둥이로 왕세자 프리드리히를 두들겨 패는 일이 발생했는데, 이를 목도한 신하들은 왕세자의 편을 들어 감히 왕을 말릴 수도 없고 왕이 왕세자를 묵사발내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도 없는 상황에 아예 미친 척을 했다고 한다.

또 심심할 때에는 수도 베를린을 산책하며 돌아다녔는데[11], 사람들이 놀거나 게으른 모습을 보면 절대 용납하지 않아[12] 바로 붙잡아서 개 패듯이 패버렸다.[13] 빠따왕 그래서 길거리에서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나타났다고 하면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멀리 도망가버렸다. 취미가 베를린 산책인 만큼 이런 일은 자주 있었으며, 희생자가 젊은 남자일 경우 패고 나서 '너 군대 갈래, 아니면 일 할래?'를 꼭 물어봤다고 한다. 속아서 입대했다간 군대 가서 또 맞는다

2.2. 가족들과의 관계

왕비는 외삼촌 조지 1세의 딸로 외사촌인 하노버의 조피 도로테아이며 그녀와의 사이에서 7남 7녀를 낳았고 그 중 10명이 성인까지 생존했다. 왕세자 프리드리히 대왕을 제외한 다른 자식들에게는 무관심했다. 그나마 관심을 가진 왕세자 프리드리히 대왕도 "맞으면 맞을수록 강해진다."라는 말도 안되는 이유를 대며 매일같이 폭행했다. 이런 괴상한 행동의 원인으로 정신질환이 의심된다는 설도 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외할머니 팔츠의 조피를 통해 제임스 1세스튜어트 왕조와 이어지는데(하노버의 조피 샤를로테 - 팔츠의 조피 -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 제임스 1세 - 메리 스튜어트), 이러한 혈통으로 볼 때 친척인 조지 3세처럼 포피리아일 확률도 있다고.

지적인 할아버지의 기질과 우아한 영국 공주인 어머니의 기질도 물려받은 아들 프리드리히 대왕과 갈등이 심했지만, 사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어린 시절 큰 누나 빌헬미네에게 꽃은 싫고 큰 북을 치며 노는 게 좋다고 해서 아버지를 흐뭇하게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대왕은 아버지처럼 군에만 집중하기 보다는 "군대 외에 다른 것도 좀 하자"고 주장해 다투었다. 이 부분을 오해해서 (특히 세계사를 다룬 어린이용 학습만화들) 마치 프리드리히 대왕이 즉위 전에는 아버지와는 달리 군사보다 예술을 사랑하는 나약한 왕자였다가, 국왕에 즉위한 직후에 갑자기 전쟁을 선호하는 군국주의자로 돌변한 것처럼 생각하기도 하는데 사실이 아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죽자 큰딸 빌헬미네는 아버지의 사망 후 국상 기간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이를 기념하는 연회를 벌였다. 일반적이라면 저런 연회를 벌였단것만으로 엄청난 패륜짓이라며 비난할법도 한데 당시 언론사들은 이런 빌헬미네의 기행을 이해해주는 기사를 쓸 정도였다. 자식들은 물론이고 신하들과 백성들도 그를 싫어했던 터라 그의 장례식에는 공식 후계자인 프리드리히 대왕과 장례를 주관한 장의사를 제외한 그 누구도 참여하지 않으려고 했을 정도였다. 심지어 프리드리히 대왕도 후계자라는 체면 때문에 참여 한 거지 실은 본인도 장례식에 참여하고 싶지 않았고, 아버지이자 선왕만 아니라면 장례도 치르지 말라고 하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고 한다. 훗날 정확한 판단력과 자신의 실패도 인정할 줄 아는 이성인이라고 평가받은 프리드리히 대왕조차 이런 말을 할 정도였으니 그가 얼마나 막장 부모인지 알 수 있다. 오죽하면 큰딸인 빌헬미네 공주는 자신의 일기에 동생인 프리드리히 대왕이 아버지한테 맨날 얻어터지는 게 가장 가슴 아프며, 포악한 아버지가 항상 죽기를 기도했다고 아버지를 까는 수기를 남기기도 했다.

왕비 조피 도로테아는 성격부터가 극과 극이었다. 태생이 군인이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와는 정반대로 조피 도로테아는 평소 사교적이고 학문과 예술을 좋아했으며 남에게 할말은 해야 하는 성격이었다. 당연히 프리드리히 빌헬름과는 걸핏하면 싸우고 폭행을 당했다. 여기에다 남편이 아들을 2명이나 반 고의로 죽게 한 것도 모자라서, 셋째 아들 프리드리히 대왕과 다른 자녀들까지 걸핏하면 두들겨 패는 꼴을 보고 항상 피눈물을 흘리며 증오했다. 영문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아내인 도로테아가 남편을 싫어했고 둘의 결혼 생활이 행복하지 않았다고 서술되어 있지만,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아내에게 충실하고 사랑했다고 서술되어 있다.

딸 빌헬미네도 남동생 프리드리히 대왕 못지않게 아버지에게 심각한 폭행을 당하며 자랐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왕세자였던 프리드리히 대왕이 한스 헤르만 폰 카테와 도주했다가 붙잡히자 사건을 조사하게 되면서, 빌헬미네가 남동생을 도와줬다는 사실을 알게되고 격분하여 빌헬미네를 찾아와 동생의 도주를 눈감아줬다고 화를 내고는 고함을 치면서 딸을 때리기 시작했다. 이런 막무가내인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다 못한 빌헬미네는 비명을 지르며 정신을 잃기까지 했다. 심지어 이때 프로이센의 궁정을 방문한 영국과 프랑스 대사가 보는 앞에서도 딸을 때려 그들이 경악했을 정도였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빌헬미네가 쓰러지자 폭행을 멈추기는커녕 발로 걷어차려고까지 했으나, 그 자리에 있던 시녀가 몸으로 막아서고 가족들과 신하들도 와서 말리는 통에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그만하고 돌아가면서 빌헬미네는 겨우 목숨을 건졌다. 이후 깨어난 빌헬미네는 아버지한테 맞은 상처로 얼굴이 멍과 상처로 가득했는데, 얼마나 서러웠는지 자신을 구해준 사람들에게 고마워하기는 커녕 '왜 날 구해줬느냐. 저런 인간의 자식으로 사느니 차라리 맞아 죽는 게 낫다'라며 원망했다. 당시의 상황이 상황인지라 주위 사람들도 빌헬미네를 이해하며 동정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어느날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플루트를 좋아하는 프리드리히 대왕이 플루트 연주회에서 엘리자베스 리터라는 아가씨와 다정한 관계로 발전하자, 이를 알게 되고 두 사람이 성관계를 가졌다면 아들을 홀린 죄로 처형시키겠다고 말하며 의사를 보내 리터의 처녀성을 검사하게 했다. 의사가 그녀는 처녀가 맞다고 보고했음에도,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리터를 용서하지 않고 발가벗겨 조리돌림하게 만든 뒤 채찍질을 당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이 엘리자베스 리터는 일반 평민도 아니고 무려 포츠담 음악대학 학장의 딸이었다. 이후 그녀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슈판다우 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나중에 풀려난다.

이런 광폭한 성격 때문에 아들 2명이 죽었고 대가 끊길 뻔한 적도 있었다. 삼남 프리드리히 대왕이 태어나기 이전에 낳은 장남 프리드리히 루트비히는 세례식에서 미래의 군주인 맏아들에게 굳이 왕관을 씌워줘야 된다면서, 모두가 말리는데도 바득바득 우겨서 강제로 머리에 왕관을 씌우려고 꼭 눌러 끼우다가 머리에 생채기가 나서 감염으로 병들어 죽었다. 차남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갓난아기 시절에 강하게 키워야 된다는 지론에 따라 군대 사열식을 데려가서는, 어릴 적부터 대포 소리에 익숙해져야 된다고 또 우겨대서 갓난 아이 옆에서 대포를 쏜 결과 경기를 일으키는 바람에 죽었다. 이렇게 손윗형제 두 명이 모두 어릴 때 아버지의 잘못으로 죽은 탓에, 프리드리히 대왕은 셋째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의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었다.

후계자인 프리드리히 대왕에 대해서도 예외는 없어서 어릴 적부터 군인 행렬을 관람하게 하고, 6세 때부터는 아침 알람을 대포 소리로 대신하며 스케줄을 빈틈없이 짜서 완전히 군대식으로 키웠다. 덕분에 왕세자 시절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미 10살이 되기 전에 군사 교본을 달달 외울 정도였다. 사실 달달 외우지 못하면 아버지한테 실컷 얻어맞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덜 맞으려고 열심히 외운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아버지가 아들이 잘 해도 똥군기를 잡고 트집잡으며, 계속 두들겨 패니 프리드리히 대왕 입장에선 죽을 맛이었다. 게다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프리드리히 대왕을 가르치는 가정교사에게도 폭력을 쓰는 한이 있더라도 엄격하게 가르치라는 엄명을 내렸다. 이 가정교사도 처음에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명령대로 행동했지만 나중에 가서는 해도해도 너무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는지, 폭력을 조금만 쓰거나 아예 쓰지도 않았고 프리드리히 대왕이 읽고 싶어하는 책을 몰래 구해다 주며 배려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 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에게 들켜버리면서, 프리드리히 대왕과 교사는 채찍으로 폭행을 당하고 교사는 메멜로 유배되는 벌을 받았다. 이후 프리드리히 대왕이 즉위한 뒤 곧바로 교사를 유배에서 풀어주고 베를린으로 다시 불러들였다고.

프리드리히 대왕은 영국의 공주인 어머니를 닮아 감수성이 예민했기 때문에, 결국 아버지의 학대를 피하기 위해 외국으로의 탈출을 기도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도주 시도는 실패했고 격분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아예 왕세자 프리드리히를 죽이려고까지 했다.[14] 그러나 프리드리히 2세는 장성한 왕위 계승권자였기 때문에, 죽인다고 으름장만 늘어놓았을 뿐 실제로 실행하지는 못했다. 꽉꽉 짜맞추어 놓은 스케쥴은 둘째 치더라도, 아들을 강하게 키운다는 명목으로 이해하기 힘든 온갖 가혹행위를 가하였다. 아들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꼬투리를 잡아서 그 자리에서 두들겨 패기도 했는데, 거칠게 반항하면 만족하고 그만두었으나 벙찌거나 겁을 먹어서 꼼짝도 하지 않으면 오히려 더 성을 냈다고 한다. 나중엔 식사 자리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은 같은 식탁을 쓰지 못하게 하고, 식탁의 가장 아랫자리에서 식사하게 했다. 이외에도 프리드리히 대왕이 똑바로 하더라도 자기 눈에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들거나, 작은 실수라도 하면 사람들 보는 앞에서도 욕하고 구타하는 게 다반사였다.[15] 아래에 서술되어 있는 함께 탈출을 기도한 친구인 장교 한스 폰 카테부터, 주변 인물들 전부가 모질게 학대받는 프리드리히 대왕을 동정하고 있었다고 한다.

나중에 프리드리히 대왕이 동성 연인인 한스 폰 카테와 탈출하려다 실패하자 폰 카테를 참수형에 처했고, 프리드리히 대왕까지 죽이겠다고 하기도 했다. 당시 재판을 맡은 재판관들은 카테에겐 본래 '탈영죄' 명목으로 징역 2년형이란 비교적 가벼운 형벌을 선고했다.[16] 그런데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이를 번복하고 사형 명령을 내린 것은 물론이고, 반역자에게나 행할 법한 불에 달군 쇠집게로 사지를 찢어내고 교수대에 목을 내거는 중형을 내린 것. 그나마 이것도 재판관들이 너무 잔혹하다고 반대하고 설득해서 단순한 참수형으로 타협하였다.

대신 프리드리히 대왕을 퀴스트린 요새에 감금해서 폰 카테가 처형당하는 모습을 그대로 지켜보게 만들고, 폰 카테의 잘린 목을 프리드리히 대왕이 갇힌 방을 바라보도록 내걸기까지 했다. 이 때문에 프리드리히 대왕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기절하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이를 보고 아들을 약해빠진 놈이라며 당장 죽여야 한다고 노발대발했다. 이 역시 왕비, 신하, 왕족들이 놀라서 뜯어 말렸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6세까지 개입하여 '왕족에 대한 재판은 제국의회만이 할 수 있다.'라는 근거를 제시하며 만류했다.[17] 덕분에 프리드리히 대왕은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대신 수년 동안 퀴스트린 요새에서 감금 생활을 해야 했다. 이런 구사일생의 고비를 넘긴데다 연인인 한스의 처형을 두눈뜨고 보게한 탓에 프리드리히는 이때의 일을 기점으로 프리드리히 빌헬름과는 사적으로 말을 섞지 않게 된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부자 관계는 오히려 이전보다 개선되기 시작했다. 부자는 표면적인 화해를 했다. 이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선택한 배필과 결혼도 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 결혼을 싫어했지만 당시 왕족들이 으레 그렇게 결혼했으므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이를 계기로 아들이 음악, 문학에 탐닉하는 것을 여전히 탐탁해 하지는 않았지만 더이상 화를 내거나 간섭하지 않고 아들이 원하는 것을 하고 살도록 내버려 두었다. 또 농장이나 영지를 아들에게 선물로 주기도 했다.

유년 시절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와 프리드리히 대왕간의 부자 관계는 명백히 적대적이었지만,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사망할 시점 아들이자 후계자였던 프리드리히 대왕과의 관계는 최소한 합리적인 부자관계였다.[18] 그리고 프리드리히 대왕은 아버지에 대해 "프로이센의 위대한 목표와 최선의 이익을 위해 나라안의 어떠한 각료나 장군들보다도 뛰어난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비망록에 적었다.

이런 개인적 면모와는 별개로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프로이센에 끼친 영향은 실로 지대했다. 독일어권의 수 많은 봉국 중 하나에 불과했던 프로이센에 근검절약해 모은 재정과 심혈을 기울여 양성한 군대를 남겨 후일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대왕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발돋음할 기반을 마련했다.

비만과 합병증으로 앓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죽기 전 아들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아래의 내용을 유언으로 남겼다.
나는 평생동안 근검절약하여 너에게 넉넉한 재산과 8만 명의 정예병을 남긴다. 절대 군대를 함부로 줄이지 마라. 또한 유럽의 군주 그 누구도 믿지 말아라. 나는 왕세자가 함부로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을 믿는다. 왜냐하면 신께서 그러한 전쟁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신민들에게 전쟁에 대해 반드시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아들인 프리드리히 대왕은 유언의 앞 부분은 충실히 지켰다. 프리드리히 대왕 자신도 아버지처럼 근검절약한 삶을 습관화한데다가, 군대를 중시하여 오히려 수를 2배가 넘는 19만 명까지 늘렸고 유럽의 군주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유언의 뒷 부분은 지켜지지 않았다. 물론 그 덕에 프리드리히 대왕 생전에 프로이센 왕국은 2배 이상 커졌고 명실상부 유럽의 강대국으로 올라서기는 했지만, 그 대가로 7년 전쟁에서 나라뿐만 아니라 자신까지도 파멸할 뻔한다.

마지막도 참 그 답다면 그 다운 최후였는데, 임종예배에서 목사가 관례에 따라 "사람은 벌거숭이로 태어나서 벌거숭이로 세상을 떠난다"고 설교하자, 침대에 누워있던 국왕은 갑자기 몸을 일으켜 "내 어찌 벌거숭이로 세상을 떠날 수 있단 말인가! 어서 가서 내 제복을 가져와라"라고 시종에게 명령했다. 그러나 시종이 제복을 가져왔을 때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숨을 거둔 뒤였다. 국왕은 후계자에게 자신의 장례식을 간단히 거행하라고 요구했고 실제로 그의 시신이 안치된 관에는 아무런 치장도 없었다.

2.3. 프로이센군 기반 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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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키는 약 160cm로[19] 키가 큰 병사들을 모아 척탄근위연대를 창설했는데, 신장이 6피트(약 182cm) 이상인 사람만 뽑았다고 한다. 그렇게 모은 연대는 "포츠담의 거인들"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하며, 당시 인구가 이백만 정도 되는 프로이센에서는 충분한 수를 모집하지 못해 유럽 전역에서[20] 고용했고, 가끔은 주변 국가의 왕들이 선물해주는 일도 있었다.[21] 프리드리히 2세도 왕세자 시절 아버지 선물로 영국에서 키가 198cm인 청년을 고용해 왔는데, 이때 지불한 금액이 군마 20마리어치의 값이었다고 전해진다. 비약이 있지만 비교하자면 소형전술차량 20대를 도입할 돈으로 키 큰 청년 하나를 데려온 격이다.

외국인들을 고용해 오거나 선물 받아온 것으로도 부족하자, 심지어 납치까지 벌였다.[22] 아일랜드 출신의 제임스 커클랜드(James Kirkland)라는 청년은 키가 213cm였는데, 어느 날 런던에서 프로이센 대사인 보크에게 하인 고용 제의를 받았다. 하지만 이것이 함정으로 그는 포츠머스에서 프로이센 배에 탔다가 그대로 프로이센까지 끌려갔다. 이 납치극에 쓴 돈이 대략 1천 파운드라고. 그래도 커클랜드는 거인 연대에서도 키가 손꼽히게 컸다고 하니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만족했을 것이다.[23] 또 오스트리아 외교관 한 명도 키가 크다는 이유로 공공 마차를 타던 중 하노버에서 프로이센까지 끌려왔다가 외교관임을 밝히고 풀려나기도 했다. 이 외교관은 이 피랍 경험담을 평생 동안 이야기거리로 잘 써먹었다고 전해진다. 물론 이런 납치극은 피해자가 속한 국가들의 불만을 샀다. 아예 전담 모집관까지 둬서 일부는 프로이센을 돌아다니며 키 큰 청년들을 찾아 징집하고, 일부는 외국을 돌아다니며 키 큰 청년들을 납치해 왔다고. 거기다 프로이센 내에서 신생아때부터 찍었던 건지, 신생아가 평균치보다 조금이라도 더 크면 붉은 스카프로 표시해 뒀다고 한다. 물론 부모들은 아이가 평균보다 조금이라도 큰 것 같으면 숨기느라 난리였다.

이걸로도 부족해 스스로 만들어낼 생각까지 품었는지 거인병들을 키가 큰 여자들과 결혼시켜 아이를 낳게 했는데, 이 방법은 너무 느렸고 종종 평범한 키의 아이들도 태어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를 실망시켰다고 한다. 이 사례는 찰스 다윈이 자신의 저서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에서 가축 말고 사람을 특정한 특징을 뽑아내기 위해서 강제로 교배시키는 사례는 그 유명한 포츠담의 거인들 말고는 없다라는 식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모은 숫자는 대략 2천 5백~3천여 명 정도였다. 그런데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막상 만들고 나니 함부로 쓰기 아까웠는지, 창설 이래 단 한번도 실전에 투입시키지 않았다. 특히 이들은 전투 대신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보고 싶을 때나 외국 사절 같은 손님들이 왔을 때 열리는 사열식이나 퍼레이드 같은 의전에만 사용되는 등 사실상 의장대였다. 그외에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기분이 안좋으면 2~3백 명 정도를 모아서 북치고 장구치고 나팔을 불게 하면서 함성을 내지르는 등의 간략한 퍼레이드를 벌이게 했다고 한다. 프랑스 대사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은 나한테 아무 의미도 없지만, 키 큰 병사들이야 말로 나의 약점이오."라는 말도 했다고 하며, 1740년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신하들이 거인 연대 병사 수백 명을 데려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병실 앞에서 퍼레이드를 벌이게 하자 다 죽어가는 몸으로도 크게 즐거워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아끼는 거인 연대도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폭력으로부터 예외는 아니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이들에게 다른 병사들에 비해 더 좋은 장비와 음식, 숙소를 지급했으나, 본인이 직접 나서서 가혹한 훈련과 체벌을 주도한 탓에 자살 및 탈영 비율이 타 부대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좋은 숙소에 살게 하고 밥과 장비를 제대로 챙겨준들 매일같이 고된 훈련과 폭력에 시달리고, 심지어 일부는 뭣도 모르고 강제로 끌려온 상황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사후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해 인원이 지속적으로 타 부대로 차출되면서 연대는 점진적 해체 수순을 밟았고 1806년 완전히 해체되었다고 한다.

실전용 보다는 피규어 수집의 성격이 더 강했던 거인 연대와는 별개로 우월한 교환비 탓에 인간 믹서기로 묘사되는 프로이센 군의 기틀을 잡은 것도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였다. 그의 치세에 많은 군제 개혁이 시작되었는데 그중에는 징병제 실시, 쇠 꼬질대 도입[24], 분당 6회 사격[25], 거위걸음으로 대표되는 구보 도입으로 인한 기동력 상승 등 군의 질을 고루 향상시키는 개혁들이었다.

3. 가족관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Queen_Sophie_Dorothea_of_Prussia.jpg
왕비 하노버의 조피 도로테아
외삼촌 조지 1세의 딸로 사촌 지간인 조피 도로테아와 1706년에 결혼했다. 슬하 7남 7녀를 두었으며 손자녀는 38명이다.

3.1.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남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왕자
(Prince Frederick Louis)
1707년 11월 23일 1708년 5월 13일
1녀 브란덴부르크바이로이트 변경백비 빌헬미네
(Wilhelmine, Margravine of Brandenburg-Bayreuth)
1709년 7월 3일 1758년 10월 14일 브란덴부르크바이로이트 변경백 프리드리히
슬하 1녀
2남 프리드리히 빌헬름 왕자
(Prince Frederick William)
1710년 8월 16일 1711년 7월 21일
3남 프리드리히 2세
(Frederick II)
1712년 1월 24일 1786년 8월 17일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베베른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공녀
2녀 샤를로테 공주
(Princess Charlotte)
1713년 5월 5일 1714년 6월 10일
3녀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변경백비 프리데리케 루이제
(Frederica Louise, Margravine of Brandenburg-Ansbach)
1714년 8월 29일 1784년 2월 4일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변경백 카를 빌헬름 프리드리히
슬하 2남
4녀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부인 필리피네 샤를로테
(Philippine Charlotte, Duchess of Brunswick-Wolfenbüttel)
1716년 3월 13일 1801년 2월 17일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 카를 1세
슬하 7남 6녀[26]
4남 루트비히 왕자
(Prince Louis)
1717년 5월 2일 1719년 8월 31일
5녀 브란덴부르크슈베트 변경백비 조피 도로테아[27]
(Sophia Dorothea, Margravine of Brandenburg-Schwedt)
1719년 1월 25일 1765년 11월 13일 브란덴부르크슈베트 변경백 프리드리히 빌헬름
슬하 3남 2녀
6녀 스웨덴의 왕비 로비사 울리카
(Louisa Ulrika, Queen of Sweden)
1720년 7월 24일 1782년 7월 16일 아돌프 프레드리크
슬하 3남 1녀[28]
5남 아우구스트 빌헬름 왕자
(Prince Augustus William)
1722년 8월 9일 1758년 6월 12일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루이제
슬하 3남 1녀[29]
7녀 크베들린부르크의 수녀원장 안나 아말리 공주
(Princess Anna Amalia, Abbess of Quedlinburg)
1723년 11월 9일 1787년 3월 30일
6남 하인리히 왕자
(Prince Henry)
1726년 1월 18일 1802년 8월 3일 헤센카셀의 빌헬미네 공녀
7남 아우구스트 페르디난트 왕자
(Prince Augustus Ferdinand)
1730년 5월 23일 1813년 5월 2일 브란덴부르크슈베트의 엘리자베트 루이제[30]
슬하 5남 2녀

[1] 먼저 태어난 형이 있어서 차남이기는 하나 영아기에 사망해 사실상의 장남이다.[2] 다만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로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다.[3] 군인왕이라니 칭찬같지만 실상은 조롱이다. 실제 그를 지칭한 별명은 "einfaltiger soldatenkönig", 즉 "무지한 병사왕"으로 대놓고 비웃는 의도가 명백했다. 당시에는 대부분의 평민 병사들은 부사관이나 하급 장교가 관리하여 귀족 출신 고급 장교들과는 유리되는 일이 대부분인데 왕이라는 작자가 직접 군복을 입고 현장을 누비며 점호를 하고 다니며 수틀리면 병사들을 때리니 이를 본 사람들이 좋게 볼수가 없어 멸시와 비웃음을 받게 된 것이다. 게다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이렇다 할 큰 전쟁에 참전하거나 군대를 훌륭히 지휘한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즉 의역하자면 ‘밀덕왕’ 정도라고 보면 되겠다. 공교롭게도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문약하다며 아주 가혹하게 교육했던 아들 프리드리히는 인류 역사에 손꼽히는 천재형 지휘관 중 하나로 꼽히니, 자기 아들의 그릇을 못 알아본 셈이다.[4] 이 문제는 이후 계속 악화되어 왕실 결혼 약속이 파기되더니, 아들대에 와서는 양국간의 사이가 꽤 서먹해졌다.[5] 싸구려 담배로 인해 입냄새가 아주 고약했다고 한다. 돈이 아까워서 싸구려 담배를 피우면서도 또 나름대로 애연가라서 타박콜레기움(Tabakskollegium)이라는 흡연 클럽 겸 끝장 토론회를 상설화 했는데 담배 재떨이를 올려놓고 하루종일 담배를 피우면서 신하나 학자들과 노가리를 까면서 통치에 대한 진지한 문제도 토론했다. 이 행사는 훗날 흡연을 싫어하고 신하들을 불신했던 아들 프리드리히 2세가 없애버렸다.[6] 예나 지금이나 전투식량은 격한 활동을 하여 칼로리 소모가 심한 군인들을 위해 고열량으로 유명한데 삼시세끼를 전투 식량으로 대체하고 술담배를 많이 한 결과 비만과 건강 악화로 인한 병치레가 잦았다. (특히 통풍과 위장병(복통)을 심하게 앓았다.) 결국 이것이 이른 나이인 52세에 사망하는 계기가 된다.[7] 실제로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는 로코코 풍의 옷이 당시에는 고가의 고급 의류였다.[8] 실제로 당시 작센 선제후이자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국왕인 아우구스트 2세가 1728년에 프로이센을 방문하여 회담을 한 그림을 보면 아우구스트 2세는 화려한 로코코 풍의 정장을 입었는데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갑옷을 갖춘 군복을 입고 있다.[9] 당시 유럽에서는 글을 읽고 쓸 줄도 모르는 문맹이 많았다.[10] 이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왕자들에게 정치와 군대를 동시에 가르치며, 군인으로서도 활동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엄격한 군사 훈련을 시키기 위한 군기를 잡는다는 빌미로 때린 것이다. 하지만 아래에 후술된 빌헬미네 공주의 일화를 보면 딸이라고 해서 안 때린 것도 아니었다.[11] 그 이유도 무려 돈이 안 들었기(...) 때문이다.[12] 실제로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굉장히 부지런한 성격으로 업무를 소홀히 하는 일이 없었다.[13] 일례로 우체국장이 격무로 인해 사무실에서 졸고 있었는데 이를 창문 너머로 산책을 하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한테 들키는 바람에 그는 근위병들에게 끌려나와 길 한복판에서 먼지나게 두들겨 맞았다.[14] 특히 프리드리히 대왕의 남동생인 아우구스트 빌헬름이 군인으로서 뛰어난 능력을 보이자, 이를 마음에 들어하며 그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실제로 아우구스트 빌헬름은 형 프리드리히 대왕이 즉위했을 때 장군이 되어, 7년 전쟁에도 참전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을 정도로 명장이었다. 정작 아우구스트 빌헬름은 형 프리드리히 대왕과 사이가 좋았을 뿐더러, 본인도 아버지한테 자주 얻어맞았기 때문에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를 매우 싫어했다.[15] 일례로 프리드리히 대왕을 머릿털이 뜯길 정도로 두들겨 팬 뒤, 그 모습 그대로 열병식장까지 걸어가라고 시켰고 주변 사람들이 보게 하는 망신을 주었다. 당연히 이렇게 조리돌림당하는 프리드리히 대왕을 보는 사람들은 조롱보다는 측은함만 느꼈다고 한다.[16] 프리드리히 대왕은 왕세자라서 재판 자체가 불가능했다.[17] 이는 왕비 조피 도로테아가 당시 오스트리아 대사인 제켄도르프한테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대공 겸 보헤미아 국왕인 카를 6세에게 이 사실을 알려 처형을 말려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특히 제켄도르프는 왕비랑 왕세자와도 좋은 관계였기에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아들을 처형한다는것을 듣고는 경악하며 바로 카를 6세한테 처형을 중지시켜 달라고 보고했다. 또한 카를 6세도 젊을 때 표트르 1세의 아들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황태자가 아버지의 학대를 피해 오스트리아로 도망쳐오자 그를 받아들여 줬다가, 결국 표트르 1세가 보낸 사람들에게 러시아로 끌려간 알렉세이가 학대 속에서 사망하는 걸 지켜봐야 했던 개인적인 경험이 있었다. 더불어 30년 전쟁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경험도 한몫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30년 전쟁으로 독일의 분열을 전유럽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데다, 스페인의 사례로 후계 단절이 국가 분열에 얼마나 큰 치명타가 되는지 직접 겪어봤기 때문에 또 한번 이런 대참사를 막기 위해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광기를 수습해야 했다. 당시 프로이센 왕국도 프로이센 공국을 제외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포메른 공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였기 때문에, 합스부르크 왕가의 의지를 완전히 무시하기는 어려웠다. 호엔촐레른 왕가가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향력에서 실질적으로 벗어나는 것은 7년 전쟁이 끝난 후였다. 다만 이 때에도 프로이센 왕국은 형식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구성원 중 하나였으며,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고 난 후 독일 연방이 구성된 후에도 서열은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전까지 오스트리아에게 밀렸다.[18] 출처 - 영문 위키피디아.[19] 삼시세끼를 전부 고칼로리인 전투 식량으로 먹고, 술도 좋아해서 매일 마신 탓에 체형은 무려 100kg가 넘었다고 한다. 실제로 위의 초상화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45세인 1733년에 그린 건데, 초상화를 잘 살펴보면 갑옷으로도 감춰지지 않는 심한 비만이라는 걸 알 수 있다.[20] 거인 연대의 국적 비중에서 가장 높았던 국가는 스웨덴이었다고 한다.[21] 러시아 제국표트르 대제가 주기적으로 보내줬다고 하며, 오스만 제국에서도 보내줬었다고 한다.[22] 납치하다가 죽은 사람도 있었는데 이유가 부하들이 납치하면서 가두는 상자에다가 숨구멍을 뚫는것을 잊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부하들은 제대로 화가 난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한테 전부 태형을 선고받아 두들겨맞았지만.[23] 하지만 거인 연대에서 가장 키가 큰 병사는 따로 있었으니, 노르웨이 출신의 요나스 에릭손으로 무려 268cm의 초거구였다! 출처: 도감 무기 갑옷 투구/ 이치카와 사다하루 저/ 남지연 역/ AK(에이케이 커뮤니케이션즈)/ 363쪽[24] 덕분에 프로이센 병사들은 장전 중에 꼬질대가 부러지는 일이 매우 드물었다.[25] 실제로 분당 6회 사격이 가능했다기 보다는 그정도로 열심히 훈련을 시켰다 정도로 받아들이면 된다. 여담으로 당시 타국에서는 분당 3회 발사가 표준이었다.[26]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 카를 2세, 프로이센의 왕세자비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27] 이 사람의 외손녀가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 공녀다.[28] 구스타브 3세, 칼 13세[29]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30] 누나인 브란덴부르크슈베트 변경백비 조피 도로테아의 딸로 본인의 조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