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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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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프랑스의 공영방송인 프랑스 2가 발표한 ‘가장 위대한 프랑스인’ 명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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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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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부르봉 왕조 제3대 국왕
루이 14세
Louis XIV
파일:루이 14세의 초상화.jpg
출생 1638년 9월 5일
프랑스 왕국 생제르맹앙레 궁전
사망 1715년 9월 1일 (향년 76세)
프랑스 왕국 베르사유 베르사유 궁전
재위기간 프랑스 국왕
1643년 5월 14일 ~ 1715년 9월 1일[1]
서명 파일:루이 14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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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fff><colcolor=#002395> 가문 부르봉 가문
이름 루이 디외도네 드 프랑스
(Louis Dieudonné de France)
아버지 루이 13세
어머니 오스트리아의 아나[2]
형제자매 필리프 1세
배우자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 (1660년 결혼 / 1683년 사망)
맹트농 후작부인 프랑수아즈 도비네 (1683년 결혼)
자녀 루이, 마리 테레즈, 필리프 샤를, 마리 안(사생아), 루이(사생아), 루이 오귀스트(사생아), 루이 세자르(사생아), 루이즈 프랑수아즈(사생아), 루이즈(사생아), 프랑수아즈 마리(사생아), 루이 알렉상드르(사생아)
종교 가톨릭
신체 165cm[3] }}}}}}}}}
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
3.1. 조상3.2. 적자녀3.3. 애첩들과 사생아들3.4. 여자 관계
4. 여담5. 대중매체에서6. 외부 링크

[clearfix]

1. 개요

루이 14세는 영웅 같은 자태에 위엄이 배어있어서, 그의 작은 몸짓조차도 오만함이 아닌 장중함으로 보였다. 그 완벽한 표정과 위엄서린 분위기는 조각가가 모델로 삼고 싶을 정도이고,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우아함과 매력을 지녔다.
생시몽 공작
이 나라의 백성들은 그들의 왕에 대해 이상하리만큼 존경을 가지고 있다.
영국의 시인이자 외교관 Matthew Prior
프랑스 왕국 부르봉 왕조의 제3대 국왕. 할아버지 앙리 4세와 함께 대왕(大王, le Grand) 칭호를 받았다. 별명으로 태양왕(Le Roi Soleil)이 있다.

2. 생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루이 14세/생애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3. 가족 관계

파일:Louis14-Family.jpg
그리스 신들로 묘사된 루이 14세와 가족들.
왼쪽부터 고모였던 앙리에트 마리[4], 동생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 조카 마리 루이즈, 제수 앙리에타 안, 어머니 스페인의 아나[5], 루이 14세[6]와 좌우로 있는 작은아버지 가스통의 네 딸, 우측 밑에 왕비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7], 왕비 주위에는 자녀였던 그랑 도팽 루이, 공주 마리테레즈, 왕자 필리프 샤를이 있다. 밑에 있는 액자에는 이미 죽은 두 딸 안나 엘리자베스와 마리아 안나가 있다.
장 노크레(Jean Nocret) 작, 1670년
가족관계가 워낙 복잡해서 아예 항목으로 분류해 서술한다.

3.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루이 14세
(Louis XIV)
<colbgcolor=#fff3e4,#331c00> 루이 13세
(Louis XIII)
<colbgcolor=#ffffe4,#323300> 앙리 4세
(Henri IV)
방돔 공작 앙투안
(Antoine de Bourbon, duc de Vendôme)
잔 달브레
(Jeanne d'Albret)
마리 드 메디시스
(Marie de Médicis)
토스카나 대공 프란체스코 1세
(Francesco I de' Medici, granduca di Toscana)
오스트리아의 요하나
(Johanna von Österreich)
오스트리아의 아나
(Ana de Austria)
펠리페 3세
(Felipe III)
펠리페 2세
(Felipe II)
오스트리아의 안나
(Anna von Österreich)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
(Margarete von Österreich)
내지오스트리아 대공 카를 2세
(Erzherzogs Karl II. von Österreich-Steiermark)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
(Maria Anna von Bayern)

3.2. 적자녀

파일:루이 14세와 가족들.jpg
부르봉 왕가의 4대가 모두 모인 단체 초상화.
왼쪽의 여인은 방타두르 공작부인, 루이 15세[8], 그랑 도팽 루이, 루이 14세, 프티 도팽 루이.
니콜라 드라르질리에르(Nicolas de Largillière) 작, 1710~1712년경[9][10][11]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남 루이 왕세자
(Louis, Grand Dauphin)
1661년 11월 1일 1711년 4월 14일 바이에른의 마리아 아나 빅토리아
슬하 3남[12]
마리 에밀리 드 졸리 드 슈엥
1녀 마담 루아얄 마리 테레즈
(Marie Thérèse, Madame Royal)
1667년 1월 2일 1672년 3월 1일
2남 앙주 공작 필리프 샤를
(Philippe Charles, Duke of Anjou)
1668년 8월 5일 1671년 7월 10일

적자녀들은 장남이자 외아들 그랑 도팽 루이를 제외하고는 모두 5세가 되기 전에 죽었다. 그래서 루이 14세의 공식 후손들은 그랑 도팽 루이의 후손들밖에 없다.

3.3. 애첩들과 사생아들


이 밖에도 수십 명의 내연녀 사이에서 수백 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신원이 확실하지 않다. 이들 역시 적자녀들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요절했다.

적자인 그랑 도팽 루이의 후손들과 서자들의 후손들,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의 후손들끼리 서로서로 통혼한 탓에 샹보르 백작 앙리 이후 단절된 구 부르봉 본가와 펠리페 5세의 후손들로 이어진 현 부르봉 본가(부르봉-앙주 왕가)는 당연한 것이고,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의 후손들인 부르봉-오를레앙 가문 역시 통혼으로 인해 루이 14세의 후손이 되었다. 상술하듯 부르봉-오를레앙 가문 출신 국왕 루이필리프 1세 역시 어머니가 루이 14세의 서증손녀인 데다 그 외에도 루이 14세의 서녀 프랑수아즈 마리가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와 결혼하여 국왕 루이필리프 1세의 고조할머니가 되었기에 국왕 루이필리프 1세는 혈통적으로도 루이 14세의 직계 후손이 맞다. 당연히 부르봉 본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3.4. 여자 관계

4. 여담

파일:external/www.thelatinlibrary.com/louisxiv.jpg
파일:Equestrian_portrait_louis_xiv_1692.jpg
9년 전쟁 중 나무르 공성전을 지휘하는 루이 14세.
피에르 미냐르(Pierre Mignard) 작, 1692년

5. 대중매체에서


6. 외부 링크


[1] 유럽 역사상 가장 오래 재위한 군주이다. 참고로 두 번째로 오래 재위한 군주는 영국 군주였던 엘리자베스 2세이다.[2] 프랑스어로는 안 도트리슈라고 불린다. 다만 합스부르크 가문이라 '오스트리아(도트리슈)'라고 부르는 것이지 아나는 압스부르고 왕조 스페인 국왕 펠리페 3세의 장녀로 스페인 출신이었다. 이는 루이 14세의 왕비인 마리아 테레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왕비와 프랑스 국왕이 결혼한 사례는 프랑수아 1세의 왕비인 엘레오노르나 명목상 국왕 앙리 5세였던 샹보르 백작 앙리의 부인인 마리아 테레사 등이 있지만, 그 중 오스트리아 출신과 프랑스 국왕이 결혼한 사례로는 샤를 9세의 왕비인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루이 16세의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유이하다.[3] 프랑스사 학자인 윌리엄 도일은 5피트 5인치, 즉 165cm로 보고 있다.[4] 포세이돈의 아내인 암피트리테로 묘사되었으며 잉글랜드 국왕 찰스 1세의 아내다.[5] 키빌레로 묘사[6] 아폴론으로 묘사됨[7] 헤라로 묘사됨[8] 루이 15세가 아니라 루이 15세의 형이자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와 같이 요절한 부르타뉴 공작 루이(1707 ~ 1712)라는 얘기도 있다.[9] 가장 왼쪽의 여인은 방타두르 공작부인으로, 당시 왕가 아이들의 가정교사였다. 훗날에 루이 15세의 사혈치료를 반대하여 살려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들 뒤에 있는 두 동상들은 앙리 4세루이 13세다. 이들까지 포함하면 무려 6대가 한 자리에 모인 셈.[10] 불행하게도 저 그림에 보이는 아들 그랑 도팽 루이와 장손 프티 도팽 루이 모두 루이 14세보다 일찍 죽어버렸고, 아기인 증손자 루이 15세만이 살아남아 루이 14세의 후계자가 된다.[11] 어린 루이 15세가 여자 옷을 입고 있는 것이 의아하게 보일 수 있는데, 본래 당시 유럽의 왕족과 귀족들은 어린 아이들은 남녀 가리지 않고 여자 옷을 입히는 관습이 있었다. 유아 사망률이 높았던 과거에는 이렇게 하면 아이가 튼튼히 자란다는 미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그 나잇대 아기들은 스스로 배변을 조절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에 편리성을 위해 저렇게 입힌 경우가 20세기 초까지 존재한다. 또한 루이 15세 등 뒤의 끈은 '리지에르'라고 하는데 아기가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 매두는 끈으로 아이가 동물처럼 기어다니는 것을 좋지 않게 여겼던 당시의 풍조에서 비롯됐다.[12] 부르고뉴 공작 루이, 펠리페 5세[13] 루이 14세의 증조부 안토니오 1세의 남동생 콩데 공작 루이 1세(1530 ~ 1569)의 고손자.[14] 루이 14세의 증조부 안토니오 1세의 남동생 콩데 공작 루이 1세(1530 ~ 1569)의 5대손녀.[15] 멘 공작. 두 아들이 전부 미혼으로 사망하여 1775년 겨우 2대 만에 후사가 끊겨서 나중에 아래의 루이 알랙상드르의 툴루즈 백작가에 합병되었다가 이쪽도 오를레앙 공작가에 합병이 되었다.[16] 콩데 공비. 참고로 콩데 가는 분가인 콩티 가의 당주가 1814년 에스파냐에서 후사 없이 죽어 콩티의 재산을 합병하지만 1804년에 공세손인 루이 앙투안 드 콩데(앙기앵 공작-나폴레옹에게 처형된 그 사람이다.)가 죽고 앙투안의 어머니가 오를레앙 가 출신이었기에 앙기앵의 아버지 루이 앙리는 후계자로 루이 필리프의 넷째 아들을 지명한다. 이후 1830년에 Aumale 공작가와 오를레앙 가에 합병이 된다.[17] 남편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의 아들이자, 루이 15세의 섭정으로 프랑수아즈 마리와는 친사촌 지간이다. 참고로 고손자가 루이필리프 1세이다. 여담이지만 필리프 2세의 어머니 팔츠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트는 프랑수아즈의 어머니인 사돈 몽테스팡 후작부인을 싫어했는데, 며느리인 프랑수아즈도 정말 싫어해서 꽤나 집요하게 괴롭혔다고 한다. 루이 14세의 강권으로 이뤄진 결혼인지라 필리프 2세도 아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18] 참고로 이 가문도 2대 만에 아들 없이 끊어지는데 이 사람의 손녀가 루이 필리프의 어머니 마리 아델라이드(1753 ~ 1821)이기 때문에 오를레앙 가에 합병이 된다. 더불어 이 사람의 손자며느리가 그 유명한 랑발 부인이다. 랑발 부인의 남편 루이 알렉상드르(1747 ~ 1768)가 3대로 이어져야 했는데 후사도 없이 아버지보다 먼저 요절했기 때문에 그대로 2대에서 끊긴 것이다.[19] 본래 루이 14세와 몽테스팡 후작부인 사이의 소생들을 돌보는 가정교사로 있다가 루이 14세의 눈에 들어 정부가 되었고, 다른 정부들과 달리 1684년에 파리 대주교의 주재로 루이 14세와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결혼식이 정식으로 공표되거나 프랑스 왕비로 인정된 적은 없어 일단 정부 항목에 둔다.[20] 참고로 마리아 테레사는 루이 14세의 고모(이자 외숙모)인 프랑스의 엘리자베트와 루이 14세의 외숙부(이자 고모부)인 펠리페 4세의 딸이다. 따라서 루이 14세와는 내외종 사촌 지간이였다.[21] 루이 15세의 계통인 직계는 1883년에 남계가 끊어져서 오늘날 부르봉 왕가의 남계는 펠리페 5세의 계통인 스페인 보르본 왕조와 그 분가들, 그리고 루이 14세의 남동생 필리프의 후손인 오를레앙 가문과 그 분파만 남아있다. 다만 보르본 왕조의 분가에 해당하는 보르보네파르마 가문의 시조 필리포 1세(펠리페 5세의 7남)가 루이 15세의 사위이므로, 루이 15세의 자손 역시 여계로는 현재까지 이어진다.[22] 잉글랜드찰스 1세와 루이 14세의 고모 앙리에트 마리의 딸이다. 루이 14세와는 내외종간.[23] 루이 14세의 남동생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의 두번째 부인.[24] 엘리자베트 샤를로테의 남편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를 가리킨다.[25] 팔츠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테는 남편이 돈을 너무 많이 쓴다고 투덜거릴 정도로 검소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그녀의 다른 기록들을 보면 자신은 파리 사람들이 자랑하는 온갖 진미나 커피, 차, 초콜릿과 같은 사치품보다는 베이컨이 든 양배추 수프나 맥주 수프를 더 좋아한다거나, 자기 생각에는 왕이라면 모름지기 자우어크라프트와 훈제 소시지로 식사하며 근검절약하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주장했을 정도. 즉, 그녀가 루이 14세와 필리프의 식탐에 대해 남긴 기록은 "왜 자기 식욕을 자제하지 못하고 저렇게 먹어댈까?"와 같은 경멸의 의미가 담겨 있을 가능성이 높다.[26] 원래 유럽 왕실에서 왕비의 출산은 공개적 행사였다. 혹여 사산된 태아를 남의 살아있는 아기로, 딸을 낳았다가 남의 아들로 바꿔치기 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대부분은 귀족 부인들만 참여하는 조용한 분위기로 치러졌다.[27] 진통이 길면 하루 이틀이 넘어가는데 그동안 앉는다면 다리와 척추에 압력이 가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혈전이 생겨 죽는 일도 있다. 그리고 해당 자세는 분만 동안 의료적 처치를 하기 좋다는 장점도 있다.[28] 당장 루이 16세와 혼인 동맹을 위해 결혼한 마리 앙투아네트만 보더라도 프랑스인들 사이에서 "오스트리아년"이라는 모욕적인 별명으로 불렸음을 생각해보자.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라이벌 구도는 그만큼 극명했던 것.[29] 이는 당시 부르봉 왕조의 상황과도 관련이 있었는데, 이미 대제국을 건설한 압스부르고 왕조와는 다르게 상대적으로 신생 왕조였던 부르봉 왕조는 왕조의 정당성과 우월함을 직접 백성들에게 어필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 루이 14세의 아버지인 루이 13세도 아들만큼은 아니지만 이런 행사에서 백성들 앞에서 춤을 췄다.[30] 이를 도유식 혹은 기름 부음이라고 한다. 이 이야기는 제법 유명해서, 세계사 교과서 등에서도 절대주의 시대 국왕의 권력을 상징하는 일화로 소개되기도 한다.[31] 프랑스 혁명 전 프랑스 정부의 장부를 보면 그 당시 수입이 5억 프랑에 세출이 6억 2천만 프랑으로 적자율이 무려 20%였다. 현대 대한민국 정부에 대응하자면 무려 70조원 정도의 막대한 적자가 나온 것, 그리고 이 세출 중 절반을 빚의 이자를 갚는 데 썼다. 다시 말하겠지만 빚이 아니라 빚의 이자를 갚는데 세출의 반을 쓴 것이다.[32] 더러운 물로 인한 질병이나 전염병에 몇 번 데이고선, 물이 질병의 전파원이라고 여겼다. 근세 유럽에서 물로 목욕을 하는 것은 의사의 처방에 따라 가끔 이루어지는 의료 행위였고, 일상에서는 최대한 기피되었다. 이 때문에 근세 유럽의 청결 수준은 중세 유럽보다도 이전으로 퇴보했다.[33] 그 예로 독일의 제후 고트프리트 4세는 볼일을 보던 중 들이닥친 반란군의 습격으로 중요부위를 찔려 급사했다는 얘기가 있다.[34] 실제로 1800년대에도 웬만한 병은 다 관장으로 치료했다. 자연과학의 발전이 의학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였다.[35] 차라리 베르사유 때문이 아니라 당시 유럽의 통행로가 지저분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더 신빙성이 있으며, 그마저도 후대의 조사 결과 사실이 아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실제로 킬힐은 원래 기병용 군화에서 시작된 신발이었다. 발을 등자에 고정시키기 위해서 굽이 그런 모양이었을 뿐이다.[36] 나중에 루이 14세가 사망하고 나서 의사들이 부검을 해보니, 과식으로 인해 위와 장이 일반인보다 3배나 부풀어 있었다.[37] 그가 앓았던 병만 해도 당뇨, 괴저병, 말라리아와 말라리아로 인한 탈모, 임질, 중풍, 치질, 원인모를 발열과 피부염, 천연두, 충치, 류머티즘, 과식으로 인한 두통과 장염, 소화불량 등 어마어마하다. 게다가 죽기 30년 전부터 이미 윗니가 하나밖에 남아있지 않았다고 한다. 삶은 계란을 좋아했을 만하다.[38] 실제로 맨 위에 항목에 나와있는 초상화는 그의 나이 60세가 넘어간 시점에서 그려진 것이다.[39] 이러한 그의 정력적인 면은 증손자인 루이 15세에게 이어졌다.[40] 이는 당시 왕을 그리는 작화법을 따랐다는 설도 있다. 당시에는 어진을 그릴 때 지혜를 상징하는 머리는 노년의 지혜를 상징할 수 있게 중후하게 그리고, 다리는 현실의 통치체계 위에 굳건하게 토대를 둠을 암시하는 청년의 다리를 그려넣었다. 이를 <왕권 이체설>이라고도 한다. 실제로 루이 14세의 그림 역시 다리가 유난히 젊게 그려져 있다.[41] 교양만두발레의 역사를 소개한 동영상에서 루이 14세를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무용수"라고 평했다.[42] 이는 당시에 유행하던 두꺼운 화장으로 커버가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43] 강희제는 트라야누스와 자주 비교된다.[44] 저자 알렉상드르 뒤마[45] 배우 제라르 드파르디유가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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