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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사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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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Compendium maleficarum_1626_Francesco_Maria_Guazzo.png
Compendium maleficarum(마녀 전서), 1626년, Francesco Maria Guazzo[1]

1. 개요
1.1. 용어 정립
2. 시기별 마녀사냥
2.1. 근세 이전2.2. 절정
2.2.1. 번외: 스페인의 마녀사냥 담론2.2.2. 경제적 측면2.2.3. 또 다른 실체2.2.4. 희생자들
2.3. 종결
3. 마녀 감별 방법
3.1. 지역별 마녀사냥
4. 그 밖의 이야기5. 마녀사냥이 등장하는 창작물6. 비유적 의미에서의 마녀사냥
6.1. 마녀사냥이 묘사된 창작물
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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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2세기 무렵부터 유럽에서 기독교[2]가 대량으로 자행한 학살 행위. 이름처럼 마녀로 몰린 사람들이 대량으로 희생되었다. 남녀노소는 물론 신분고하를 따지지 않았지만, 희생된 대다수는 하층민 여성이었다. 대략 중세 무렵 출현하기 시작하여 18세기쯤 자취를 감춘 것으로 여겨진다.

1.1. 용어 정립

자고로 서양 역사에서 있었던 통칭 '마녀 재판\'은 사실 마녀 재판이란 번역이 적절하지 않으며 '특별 재판'이 더 적절하다. 흔히 이단 심판, 마녀 재판으로 번역하는 라틴어 'inquisitio'는 교회법으로 어떤 특정한 사항이 발생했을 때 임시로 개설하는 '비상설 특별 재판'이기 때문이다. 즉, 'inquisitio'는 꼭 마녀나 이단만을 다루던 재판이 아니다. 하지만 마녀 재판이란 단어가 워낙 한국어 언중에게 깊이 들어왔기 때문에 이 문서에서도 그대로 마녀 재판이라는 단어를 쓰도록 한다.

용어상의 구분뿐만이 아니라 해당 재판이 실제로 이단(혹은 이교) 혐의에 대한 재판이었는지(흔히 말하는 이단 심문), 혹은 마녀 혐의에 대한 재판이었는지(마녀 재판)도 엄밀한 구분이 필요하다. 후자는 넓은 의미의 전자에 포함되지만, 후자와 전자와 똑같은 의미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스페인의 이단심문은 콘베르소(Converso, 유대인 출신의 개종자)와 모리스코(Morisco, 무슬림 출신의 개종자)가 주된 대상이였으며, 스페인 종교재판소는 마녀들이 저지른다는 소행에 회의적이었다. 마녀 혐의로 인한 주된 희생자는 주로 가톨릭에서는 독일권, 개신교에서는 스코틀랜드에서 나왔다.

2. 시기별 마녀사냥

흔히 마녀사냥은 중세시대에 가장 많이 벌어졌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마녀사냥이 가장 극심하게 벌어진 시대는 근세로서, 대표적으로 30년 전쟁 기간 독일에서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마녀사냥이 벌어진 주요 원인이 종교개혁(가톨릭의 자체적 쇄신운동 포함)으로 교파화 사회가 도래하였기 때문이다.(자세한 원인은 후술.) 한 번 몰아치기 시작한 광풍이 그렇게 쉽게 가라앉을 리 없었다. 결국 근세에 정점을 찍은 뒤 가라앉기 시작했다.

2.1. 근세 이전

근세 이전에도 마녀사냥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중세시대 초중반까지는 마녀를 처벌하려면 피해자가 있어야 했다. 무슨 말인고 하니 12세기에 로마법에 대한 연구가 다시 시작되면서 그 전에 있었던 게르만족 풍습에 의한 살리카 법전의 사용빈도가 적어지고 새로운 로마법에 기초한 법전 체계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12세기 이전에는 게르만족 풍습에 의해서 피해자가 있어야만 고소가 가능했다. 즉, 마녀에게 피해를 받은 사람이 있어야만 마녀를 고소할 수 있었다. 물론 진짜로 마녀에게 피해를 받은 사람이 있었을 리 없으니 어차피 거짓 신고거나 착각이란 뜻인데, 결국 엉망진창인 건 마찬가지더라도 최소한 지나치게 손쉽게 고소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기독교의 마녀의 존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오히려 마녀사냥을 막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했다. 마녀와 마법의 존재와 효능을 부인하면서 마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무고한 사람을 마녀로 모는 마녀 사냥꾼이야말로 마녀를 인정하는 악인'이란 인식이 생긴 것이다. 한 예로 카롤루스 대제가 785년 발표한 파더보른 공의회(Council of Paderborn)에선 '악마에게 홀린 자, 그리고 이교의 믿음을 가진 자로서 사람을 마녀라고 믿고, 마녀라고 의심받은 사람을 불태워 죽이고 그 살점을 먹거나 남에게 먹인 사람은 사형에 처한다'는 내용(6항)이 있다.

그에 비하여 12세기 이후에는 피해자의 신고 없이도 마녀의 고소 색출이 가능했다. 소위 황제 시해 음모 이론에 따른 것인데 "황제를 시해하려는 음모만으로도 반역죄에 해당하며 이는 사형으로 다스린다"는 로마법 구절을 인용하여 누군가의 신고 없이도 바로 재판이 가능하게 되었다.[3]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에는 마녀라는 혐의로 처형당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중세 시대에 이단심문[4]의 장소는 거의가 남부 프랑스 및 북이탈리아로 한정되었고, 주된 대상은 마녀가 아닌 이단, 특히 알비파였다.[5] 마녀는 본래 '동네 무당'에 가까운 의미였고, 원칙적으로는 불허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사회의 구석에서 묵인되는 존재였다.

2.2. 절정

마녀를 가장 맹렬하게 박해한 1570~1630년은 신교 국가들과 가톨릭 국가들이 교파화되고 이데올로기 전쟁이 가장 격렬하게 벌어진 기간이기도 했다. (중략) 가톨릭교도들과 신교도들 중에 어느 쪽이 박해에 더 열을 올렸느냐는 것은 이견이 분분한 문제다. 박해자들 중에서도 최악은 대개 독일의 작은 영역을 통치한 가톨릭 주교들이었다. 일례로 뷔르츠부르크의 주교 율리우스 에히터 폰 메스펠브루니(Julius Echter von Mespelbrünn)은 가톨릭 개혁의 강경파로서 1616~1617년에 마녀를 300명 넘게 화형시켰다. 그러나 가톨릭 남유럽은 처형률이 가장 낮은 축에 들었고, 에스파냐 종교재판소는 로마 종교재판소와 마찬가지로 마녀들이 저지른다는 소행에 회의적이었다. 칼뱅의 제네바에서는 화형당한 마녀가 거의 없었고, 신교권 네덜란드와 칼뱅파 팔츠에서는 사실상 마녀 재판이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스코틀랜드를 비롯한 다른 칼뱅파 지역들은 1660년대까지 계속하여 마녀를 가장 혹독하게 박해했다. 17세기 중반부터 전반적으로 마녀 재판이 줄어들었지만, 잉글랜드 이스트앵글리아에서 내전 막바지에, 루터파 스웨덴에서 1668~1676년에, 그리고 유명한 사례로서 미국으로 건너가 메사추세츠 주 세일럼에 정착한 청교도 공동체에서 1692년에 추악한 마녀 재판이 발생했다. 마녀 재판을 종식하는 데는 다수 요인들이 함께 작용했다. 다양한 법률 체계들이 도입된 더욱 엄격한 증거 기준, 고문 제한, 과학적 회의주의, 비열한 마을 주민이 광분해서 제기하는 고발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를 꺼리는 엘리트주의적 태도 등이 그런 요인들이었다. 그러나 더 넓게 보면 이 이야기의 중요한 부분들은 종교 전쟁의 종결과, 다원주의를 향해 절뚝거리며 나아간 발걸음이었다. 유럽 사회들이 실제 "타자들"을 마지못해 받아들이고 통합함에 따라 상상 속 타자들은 더이상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게 되었다. 이것은 종교개혁이 엄밀하게 균일한 기독교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데 실패하고 다른 무언가를 우연히 낳아주는 데 성공했음을 말해주는 또 다른 증거다.
「종교개혁」, Peter Marshall[6]
가톨릭교와 신교는 과격한 종교적 수사법을 곧잘 구사하면서도 좀처럼 서로를 마녀술 혐의로 고발하지 않았다. 마녀들의 주된 죄목과 종교개혁의 주요 논쟁 사이에 직접적 연관성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예전부터 마을 주민들은 반사회적인 늙은 여자들이 주술을 걸고 고약한 저주를 내린다고 항상 의심했지만, 공식 박해에 시동을 건 동력은 마녀들이 악마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악마의 명령에 따라 기독교 사회와 전쟁을 벌이는 대규모 배교자 군단이라는 의심을 굳혀간 신학자들의 확신이었다.
「종교개혁」, Peter Marshall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들은 마녀에 대한 박해와 화형에 있어서 조금도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서로 격려하였다. 왜냐하면 어느 편에서도 상상된 악마를 박해하는 데 있어서 상대방을 능가하려 하였기 때문이다.
-August Franzen & Remigius Bäumer 씀 최석우 옮김, "세계 교회사" 368쪽

1484년 도미니코회 수도자 하인리히 크라머, 야코프 슈프렝거가 인노첸시오 8세로부터 마녀재판의 권한에 해당하는 권력을 수여받았다. 그런데 2년 후 말레우스 말레피카룸(마녀의 망치)이라는 책을 출간하여 마녀사냥에 대한 여러 지침(?)을 전파했는데 이 책은 곧 교황청에 의해 출판 금지를 받았고 저자 크라머는 교황에게서 단죄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녀의 망치는 1517년 종교개혁 이전까지 20쇄 이상이 인쇄되어 상당히 광범위하게 퍼지게 된다.

1532년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르네상스와 인문주의 영향으로 카를 5세의 카롤리나 법전이 공포되어 실질적인 위해를 가한 것으로 인정될 때만 기소되며 의심만으로는 처벌하지 못하게 규정했지만 역시나 이 시기에는 종교적 갈등 때문에 별로 준수되지 못했다. 오히려 이 시기부터 종교갈등이 성행하여 마녀재판이 성행하게 된다.

16세기부터 마녀사냥은 기존의 방식과 달리 종교재판의 형식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마녀사냥은 가톨릭권에서는 남독일, 개신교권에서는 스코틀랜드에서[7] 가장 심했다. 프랑슈콩테에서도 마녀사냥이 많이 이루어졌다. 독일의 개신교 지역에서도 남독일보다는 덜 하지만 마녀사냥 풍속이 남아있었고[8] 청교도들이 이주한 북아메리카에서도 한때 마녀사냥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개신교 중 영국 국교회(성공회)가 정착한 잉글랜드와 루터주의가 자리잡은 북독일에서는 상대적으로 마녀사냥이 성행하지 않았고[9] 가톨릭에서는 이베리아 반도와 이탈리아 반도에서 마녀사냥이 성행하지 않았다.[10]

마녀사냥과는 별개로 가톨릭권의 스페인, 개신교권의 잉글랜드에서는 상대종파 신자에 대한 박해가 있었고, 네덜란드에서는 가톨릭과 개신교 양쪽 모두가 상대방을 박해했다. 특히나 합스부르크가의 펠리페 2세는 종교재판으로도 악명이 높았지만 마녀나 마법에도 관심이 많아 마법은 인류의 골치거리라는 선언으로 저지대에서의 마녀사냥이 대폭 강화되었다. 그런데 정작 스페인 본토는 마녀재판이 적었다.

2.2.1. 번외: 스페인의 마녀사냥 담론

현대에는 당대 스페인에서 행해진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이 굉장히 유명한데, 얼마나 유명한지 '스페인 이단심문관'이나 '스페인 종교재판소'라는 단어가 하나의 고유어로 쓰일 정도로 마녀사냥과 이단심판의 대표적인 본고장으로 알려져있다. 심지어 스페인에서 행해진 마녀사냥의 피해자가 30만 명이라거나, 심지어 200만 명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며, 일부 사학자들은 스페인이 스페인 제국 시절 누렸던 황금기가 끝나고 끝없는 쇠퇴와 내리막길을 걸은 원인이 바로 스페인의 가혹한 종교재판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가령 한국에 정발되어 있는 스페인 내전 서적인 앤터니 비버의 스페인 내전을 읽어보면 스페인의 종교재판과 이단심판으로 인해 교회의 권위가 꺾이지 않았고, 교회가 극단적인 청빈사상과 반자본주의 논리를 가르치는 바람에 스페인이 17세기 이후로 끝없는 내리막길을 걸었다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현대 사학자들은 이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다. 스페인은 마녀사냥의 숫자 자체도 알려진 것보다 적었을 뿐더러, 이단심문 역시도 알려진 것보다는 덜 광폭했다. Helen Rawlings의 통계(저서인 The Spanish Inquisition에서 인용)에 의하면 사형이 집행된 희생자 숫자는 최대한도로 올려잡아서 1480년부터 1530년까지 약 2,000명이며 이마저도 1540년대부터는 콘베르소에 대한 의심이 줄어들고, 재판에 체계가 잡혀가면서 1700년까지 스페인 이단심문의 모든 관할권을 합쳐 총 826명만이 처형되었다. 롤링스의 통계를 토대로 최대한도로 잡는다면 가장 참혹했던 1480년부터 1530년까지 연간 40명이 처형된 것인데, 이는 끔찍한 희생이기는 하지만 유럽의 타국가들보다 스페인이 더 잔혹했다고 말하기엔 힘든 숫자이다. 유대인 역사학자 Henry Kamen의 저서 The Spanish Inquisition에 의하면 스페인 이단심문에서는 100명이 사형선고를 받았을 경우 한두명만 사형이 집행되었고 나머지는 인형을 처형했는데, 이것이 사형 집행자 숫자가 터무니없이 오해되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특히 스페인 이단심문에서 40만이 처형되었다는 황당한 정보도 많이 돌아다니므로 주의. John Vidmar의 저서 「십자군과 이단심문 Q&A 101」에 의하면 17세기 스페인 톨레도 법정의 경우 151건의 마녀재판을 다루었는데, 이는 연간 약 1.5건이다. 이들 전체가 처형된 것도 아니다.[11]

그 이전에 스페인이 17세기부터 끝없는 내리막길을 걸었다는 명제 자체를 현대 역사학계는 부정한다. 흔히 엘리자베스 1세 시절의 칼레 해전으로 인해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몰락하면서 재해권을 영국에게 빼앗겼고 신대륙에서 온 금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으로 경제가 박살나는 등의 이유로 인해 스페인이 지속적인 몰락의 길을 걸었다고들 설명하는데, 이후에 스페인 해군의 전력이 약해진 것은 사실이나 이 전투가 스페인 무적함대의 괴멸이라느니, 영국 재해권 차지의 시발점이라느니, 심지어 스페인 몰락의 시작으로 잡는 이론은 이제는 아예 없다. 스페인 함대가 칼레 해전에서 잃은 함대는 불과 세 척뿐이었으며, 81척의 함대는 전투가 아니라 귀환 중에 가혹한 바다환경으로 인해 침몰한 것이다. 거기다 그 함대가 스페인의 전 함대도 아니고 지중해 함대가 멀쩡히 남아있었으며, 잉글랜드는 이후로도 스페인과 해전에서 정면충돌할 경우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웠다.[12] 인플레이션은 교과서에도 서술되어 있을 정도로 널리 퍼진 이론이지만 2023년 기준으로는 부정되고 있다. 최근 연구들은 하나같이 신대륙에서 온 금이 인플레이션을 유발하기는 했으나 실제 경제에 미친 영향은 극히 미미했다고 보고 있으며, 하물며 그게 스페인의 경제를 박살낼 정도는 당연히 아니었다. 물론 스페인이 그렇다고 꽃길만 걸은건 당연히 아니고 중간중간 허덕댔던 시기도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불황-호황이 반복되는 전형적인 평범한 경제패턴을 따라갔다. 대서양 재해권은 여전히 스페인이 쥐고 있었고, 식민지는 여전히 부를 가져다주었다. 식민지 의존도가 높았다는 주장은 사실이기는 한데, 이 시점까지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스페인이 본격적으로 몰락한 것은 바로 다름아닌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서이다. 나폴레옹 전쟁 결과로 스페인 전 국토가 초토화되었고, 국내의 갈등도 촉발되었으며, 전쟁 중에 멕시코를 비롯해 식민지가 연달아 독립하는 걸 막지 못하면서 경제가 완전히 붕괴되었다. 한편 자유주의자들이 정계에 출현하면서 보수 세력과 갈등을 빚었으며, 산업화는 지지부진한 반면 지주들과 귀족들의 특권은 여전했다. 거기에 결정적으로, 1830년대를 휩쓴 카를로스파 전쟁은 스페인을 유럽 내 후진국으로 뒤떨어지게 만들었다.[13]

이런 식으로 비단 스페인뿐 아니라 이탈리아와 같이 가톨릭 국가들이 마녀사냥을 많이 했고 개신교는 깨끗했다는 식의 시관은 30년 전쟁 전후 개신교 측의 프로파간다이며, 매우 충실한 반가톨릭주의자들이었던 초기 미국인들에게도 전래되었다. 그것을 근대의 계몽주의자들이 약간 비틀어 중세를 까기 위해 마녀사냥이 중세에 이루어졌다고 올려친 뒤 가톨릭=마녀사냥 프레임을 이용해 중세=가톨릭=마녀사냥이라는 등식을 완성시킨 것이고, 유럽 가톨릭의 대표주자로써 스페인이 지목된 것이다.

2.2.2. 경제적 측면

사실 이것은 마녀사냥이 아니라 마녀사이었다. 즉 종교의 이름을 팔아 부정한 재산 축적과 정적 제거, 당시 사회에 퍼져 있던 다양한 재앙들로 인한 피지배층의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공포조장을 통한 사회통제강화, 개인적인 원한이나 경쟁자 제거 등을 합법화한 사업이었다. 심리학에서는 집단 히스테리의 산물로 보고 있다.

마녀 혐의로 기소된 사람들이 무죄가 되는 경우가 거의 없었던 이유는, 마녀라고 자백만 하면 규정에 따라 그 사람의 재산을 몰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죽기 직전까지 고문을 해서라도 자백을 받아내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처형된 마녀의 재산은 몰수되어 영주·주교·이단심문관 등이 배분하였기 때문에 ‘마녀사냥’은 수지 맞는 장사였다. 뿐만 아니라 체포되어 처형되기까지의 모든 비용도 수감자와 그 집안의 부담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마녀를 감별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마녀 감별사들이 돌아다녔다.

마녀 혐의자를 체포하고 마녀재판에 회부한 뒤 재판을 통해 고문을 가해서 자백을 얻어낸 후 화형에 처한다. 그리고 마녀 용의자가 사망하면 최후에는 전재산 몰수형에 처한다.

결국 애꿎은 사람을 마녀로 몰아서 돈 뜯어내려고 살인을 한 것이다. 그래서 마녀사냥이 마녀사인 것이다. 당연히 주 타겟은 부잣집 과부였다. 가족은 없고 가진 것이라고는 엄청나게 많은 돈밖에 없는 나이 많은 여자들이 희생자의 대부분을 차지했다.[14] 다른 경우로는 의사와 성직자가 라이벌 관계였던 산파나 약초 관련 지식을 알고 있던 자들을 제거하여 수입을 늘리고자 고발하는 경우도 있었다.[15]

바늘로 찌르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자 가운데는 '찌르면 바늘 끝이 뒤로 밀려나게 하는 장치'를 만들어 사용함으로서[16] 많은 마녀를 억지로 만들어 고액의 수입을 올리는 자도 있었다고 한다.

또 한편으로는 마녀사냥은 사람들의 오락물이었다. 인권 의식이 없고 대중의 교육 수준이 낮으며 오락거리도 적었던 전근대에, 공개고문 및 처형은 재미있는 구경거리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중세 유럽의 도시국가에서는 시민들에게 오락물로서 제공하기 위해 돈을 주고 노상강도를 사 들여 오는 것이 관행이었고, 집행인이 미숙하게 목을 자르거나 고문 중 지나치게 빨리 죽여 버리면 밑의 시민들이 쌍욕하고 물건을 집어던지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콜로세움에서 검투사들이 서로 죽이거나 맹수의 밥이 되는 것을 환호한 고대 로마처럼 사람들은 고문으로 인한 희생자의 고통과 잔인한 처형을 낄낄거리면서 즐기고 환호하는 잔인함을 보여주었다.[17]

2.2.3. 또 다른 실체

단순히 종교적 광기로 보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이걸 종교적 광기로만 볼 수 없다고 한다. 다양한 이해관계에 종교가 대표되어 벌어진 사건인데 종교만 기억에 남는 십자군 전쟁과 비슷하다. 현재의 통념과 달리 당시 지식인이었던 종교인과 정치가, 행정가, 판사들이 뭉쳐서 굉장히 체계적으로(...) 일을 처리했다.[18]

원인으로 지목할 것이 많아 무엇이 정확한 원인이라고 하기에는 굉장히 애매하다.[19] 지역이 방대하다 보니 원인들 중에 지역에 따라 적용되는 것과 안되는 것도 나뉜다. 먼저,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히는 것은 대기근과 흑사병 문제이다. 당시 16세기에서 17세기 소빙기[20]였다는 점(17세기 위기론), 그로 인한 대기근, 대기근으로 인한 경제와 식량 사정 악화, 그 전부터 맹위를 떨치던 흑사병과 가축들의 전염병[21], 개신교 등장으로 인한 다양한 종파등장과 사회적 불안, 개신교 등장과 30년 전쟁 이후 약해지기 시작한 교황의 세속 권력, 지방권력의 약화 시작[22], 30년 전쟁(1618∼1648)과 가톨릭 국가들의 패배와 가톨릭으로부터 해방된 개신교 국가들, 각종 반란이 당시에 일어났고 사람들은 연속된 불행에 대한 납득할 만한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특히 1970년대 이래 흔히 학계에서 '교파화(confessionalization)'라고 부르는 용어를 유의해야 한다. 종교개혁과 가톨릭의 자체적 쇄신운동은 최종적으로는 사회의 세속화라는(당사자들마저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불러왔으나, 당사자들이 개혁하고자 한 것은 개개인의 신앙뿐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신앙이었다. 이 시기의 성직자들과 목회자들은 대체로 세속권력에 호의적이였으며[23] 군주들은 자신의 왕국과 교회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해서 생각하지 않았고, 군주이든 교황이든 점점 더 '중앙집권화된' 교회조직을 원했다. 가톨릭은 근대적 의미의 신학교를 통해 성직자 양성시스템을 혁신했고, 이들은 마치 근대국가의 '사관학교'처럼 국가를 중앙집권화시켰다.[24] 개신교에서도 '애국자'와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둘이 아니라 하나였으며, 칼뱅주의자들이 극찬하던 도시국가인 제네바에서도 교회와 국가는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지지 않았다. 종교개혁 시대의 유럽인들에게 국가란 결코 각자의 생각에 따라 따로따로 살아가는 개인들의 집단이 아니었다. 종교개혁의 대상은 사회 전체였다. 다양한 종파의 등장으로 인한 기본질서의 혼란, 계속된 사회 혼란(기근, 흑사병, 전쟁, 흑사병으로 인한 장원의 약화) 등등 사회는 각 부분에서 혼란이었고 그 혼란을 직격으로 맞는 것은 대중들일 수밖에 없었다. 초기에는 버티려고 노력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분노는 커질 수밖에 없었고 결과적으로 대중들의 분노는 한계를 넘어가기 시작했다. 각 사회의 수장들 역시 이 사회의 혼동을 묵인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유럽인들은 혼란스러운 사회를 쇄신하기 위하여 불순분자들을 걸러낼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처음으로 후보에 오른 것은 오랜 종교적 전통상 '악마'였지만(그 실체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겠지만) 사람 눈에 보이는 존재도 아니었으니 이에 대한 처벌을 할 수 없었다. 즉 군중들이 '사회 쇄신'의 거름으로 삼고 박해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친숙하고, 물리적으로 폭행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찾아낸 것이 더 실체가 명확한 마법사와 마녀였다. 마법사와 마녀는 악마의 하수인으로 인정받았고, 결국 마녀사냥으로 마녀와 마법사를 죽여 혼란의 원인을 차단했으니 우린 이제 안전하다는 안정감과 사회를 하나로 통합하는 역할을 해 주었다.

사회를 혼란스럽게 한 다양한 원인들이 있었고 그 원인들이 통합적으로 작용했다. 그 해결과정에서 각 계층은 순수하지 못했고 자신들만의 손익계산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국민들은 자신들의 억울함과 고통에 대한 원인과 호소의 대상이 필요하였고, 각 종파는 혼란스러운 사회 현상 속에서 쇄신된 신앙을 바탕으로 사회를 개혁하려고 했고, 국가는 이 신앙들을 바탕으로 지방권력을 누르고 중앙권력을 강화하려 했으며, 왕의 입지를 강화해보고자 하였고, 사회의 불안정으로 인해 혼란이 지속되고, 결정적으로 교회와 국가는 이분법적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현대에 들어서 가장 유사한 사례를 꼽자면 바로 냉전시대의 환경일 것이다. 실제로 냉전시대이든 종교개혁 시대이든, 당사자들은 자신들이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경건한', 혹은 '애국적인' 모두를 위한 행동을 한다고 진심으로 믿었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하지만 마녀사냥의 혼란스러움과 상황통제의 어려움이 오히려 병폐로 지적되기 시작했고, 재판 과정도 너무 막나가는 거 아니냐는 이의제기가 있었다. 마녀재판이 너무 심해지면서 도리어 지역 공동체가 극도로 분열, 나중에는 마녀재판 그 자체가 악마의 농간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가 되기도 했다. 미국 세일럼 마녀 재판이 그 대표적인 예로, 이 정도쯤 되면 이단심판관들에게 마을 사람들이 공공연히 적대감을 보일 정도였다. 그리하여 각 나라들은 사법개혁을 통해 마녀사냥을 금지하기 시작했고 끝내 마녀사냥은 자취를 서서히 감추게 된다.

2.2.4. 희생자들

고위인사도 드물게 기소되었지만 대다수는 하류층이었다. 주요 타깃은 지위가 낮은 여성이었으며, 여성은 남성보다 우둔하고 변덕스러우며 성적으로 방종하다는 성차별적 사회풍조도 한 몫을 했다. 통계에 의하면 프랑스, 독일 등 서유럽 지역은 희생자의 80%가 여성이었다. 여자만이 아니라 남자들도 사탄의 제자 혹은 하수인, 마귀 등으로 불리며 희생된 경우도 적잖게 있었다. 아이슬란드에서는 피고인의 92%가 남성이었고, 에스토니아에서는 60%, 모스크바에서는 피고인의 3분의 2가 남성이었다. 그러므로 번역어인 마녀(魔女)는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어떤 책에서는 여성 마녀, 남성 마귀로 번역하였다.

일단 명목은 마녀사냥이지만 실제 마녀사냥에 희생당한 사람들은 주로 권력싸움에서 밀려난 자들이나 종교에서 아무런 득을 입지 못하고 민간 신앙에 기댔을 뿐인 못 먹고 못 살던 하층민들이었다. 심지어 유명한 천문학자 케플러의 모친도 마녀로 몰렸다.[25]

특히 재산이 많은 과부들이 타겟이 되기도 하였는데, 가족과 남편이 없으니 '악마와 간통했다' 는 식으로 덮어씌우기 편했던 데다 무엇보다도 당시 독일법상 마녀재판으로 몰수된 재산의 일부는 마녀로 누군가를 지목한 사람의 몫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독일에서는 마녀의 재산을 가지지 못하게 했더니 신고율이 급감했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아름다운' 과부는 어떻게 뜻대로 해보려다 거절당해 앙심을 품은 남성들이나 질투한 여성들이 신고하는 사례가 많았다고 한다.

의학적 지식을 가진 산파나 민간요법에 통달한 자들도 주술을 부린다는 명목으로 희생되었다. 의사들이 이들을 경쟁자로 여겨 고의로 고발하기도 했다고 한다. 평소에 원한을 가지고 있던 자를 제거하기 위해 살인사건이나 질병의 원인으로 고발하기도 했다.

나이가 많은 여성일수록 마녀로 몰려 죽는 경향이 심했다. 젊은 가임기 여성은 인구 수, 즉 세수를 늘리기 위해 필요했으므로 무죄방면한 사례가 있다. 소위 마녀라고 하면 떠올리는 '심술궂게 생긴 노파'의 이미지를 여기서 찾는 경우도 많다.

한편 어머니가 마녀인 경우 아이들까지 악마의 자식으로 몰려 함께 처형당하기도 했다. 기록에 의하면 어린아이도 마녀라면 죽여야 하며, 나이를 감안해 목 졸라 죽인 후[26] 불에 태우라는 내용이 있다.

동성애자양성애자성소수자들도 함께 몰이당해 처형되기도 했는데, 보통 마녀사냥에서의 화형은 잘 알려진 대로 희생자를 장작 위에 새운 말뚝에다가 묶고 불로 태우는 방법인 데 반해, 동성애자들은 아예 사람 취급을 안 해 말뚝에 묶이는 것도 아깝다고 여겨 다른 장작들과 같이 묶어서 그냥 불에 던져졌다고 한다. 영어 욕설 중 남자 동성애자를 비하하는 말로 "Faggot"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단어는 원래 묶어놓은 장작 더미를 일컫는 말이었다가 게이를 향한 욕설로 쓰이게 된 것은 여기에서 출발했다는 가설이 있다.

개신교도들도 마녀사냥의 피해자이다. 당시, 마녀사냥은 마녀로 지목된 여성뿐 아니라 이단자들을 포함하고 있었고, 종교개혁 당시 개신교도들은 이단자로 취급받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개신교도들도 마녀사냥을 하여 무고한 피해자를 양성하였다.

마녀사냥으로 인해 기독교 전파 이전의 토착 민속 신앙은 말 그대로 박살나 버리고 일부 기록으로만 남게 되었으며, 마찬가지로 민간에서 전승해 오던 전통 약초학도 일부 기록만 남긴 채 사실상 소멸했다. 실제로 현대 의사들과 약사들은 이 사실을 많이 안타까워하고 있다.

아래 표는 1450~1750년 기간 동안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마녀재판과 처형에 대한 대략적인 통계이다.[27]
<rowcolor=#fff> 지역 재판횟수 처형횟수
영국 ≈5,000 ≈1,500–2,000
신성 로마 제국 (독일, 네덜란드, 스위스, 로렌, 오스트리아, 체코) ≈50,000 ≈25,000–30,000
프랑스 ≈3,000 ≈1,000
스칸디나비아 ≈5,000 ≈1,700–2,000
중부 및 동부 유럽 (폴란드-리투아니아, 헝가리 및 러시아) ≈7,000 ≈2,000
남부 유럽 (스페인, 포르투갈 및 이탈리아) ≈10,000 ≈1,000
총계 ≈80,000 ≈35,000

학자들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총 희생자 수는 대체로 약 4~6만 명 정도로 여겨진다.247페이지

2.3. 종결

일련의 광기는 17세기 들어서 회의론이 점차 싹트기 시작한다. 르네 데카르트를 기점으로 근대적인 철학 사상과 과학이 본격적으로 발전되어 종교를 향한 의존도가 서서히 감축하며 이성적 사고가 자리잡게 되고, 정치상도 지긋지긋한 종교 갈등이 일단락되었으며[28] 왕권 확장에 걸림돌이 되는 종교가 왕정과 대립하기 시작하면서 지방 독자적인 판결에 제동이 걸리기 시작한 것이다. 왕권의 상징이었던 루이 14세 또한 칙령으로 사법 개혁을 단행하여 직접 마녀사냥을 옥죄기 이르렀고 지방의 독자적인 재판 감시를 강화시키면서 무고한 판결을 몸소 척결해나가기 시작했다.

18세기가 되어서는 절대 왕정의 시대도 저물기 시작했지만, 리스본 대지진프랑스 혁명을 계기로 계몽주의 철학이 대세로 자리잡아 기성 교회가 궤멸적인 타격을 입으며 본격적으로 척결되기 시작한다. 사법체계도 점차 성숙을 거듭하며 죄형법정주의와 입증주의가 토양으로 깔리게되고 사적 제재작은 사회의 독자적인 판결에 환멸감이 퍼지면서[29] 마녀사냥은 사실상 종식을 맞는다.

마녀사냥의 몰락에 쐐기를 박은 트리거로선 1751년 발생한 '오스본 사건'의 판례가 결정적이었다고 거론된다. 콜리라는 한 시민이 평화롭게 지내던 오스본 부부를 젊어보인다는 이유로 마녀로 지목하고선 갖은 물고문 끝에 부인이 익사당하는 사건이 발생 했던 것이다. 이렇게 마녀라는 누명은 죽음으로 벗겨졌지만, 죽은 자는 살려낼 수 없었고 본래 관행대로였다면 아님 말고 식으로 넘어갈 수도 있을 사안이었다. 하지만 당시는 근대적인 사법 체계가 이미 뿌리내리던 시절이었다. 결국 콜리는 기소되었고, 마녀라는 확실한 물증을 입증하질 못해 입증주의에 의거 살인죄가 인정되면서 사형이 판결되었으며 그렇게 콜리는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이는 입증주의의 귀감이 되는 최초 판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고, 입증주의란 모르쇠였던 마녀사냥은 법치라는 이름 아래 사멸하게 된 것이다.

2003년 요한 바오로 2세가 마녀사냥을 교회의 잘못으로 인정하면서 크리스트를 대변하며 사과를 표했고 종교 내부에서도 반성점으로 여기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3. 마녀 감별 방법

마녀를 찾아내는 데에는 전술한 마녀의 망치라는 책이 사용되었는데, 이 책은 그 이전까지 마녀에 대해 떠돌던 온갖 전설과 민간신앙을 정리하고 집대성한 매뉴얼이다.[30]

이 책은 비록 가톨릭 수도자들이 썼지만 그 이전까지 전해오던 모든 이미지를 종합한 것이기 때문에 개신교권에서도 참고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자기들이 보기에도 친숙한 이야기들만 나오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영국에서는 그 영향력이 크지 않았다. 영국은 섬나라라 대륙의 전통을 집대성한 마녀의 망치가 이질적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보통 마녀임이 인정되면 즉시 화형당할 것을 알기 때문에 희생자는 극렬하게 자신이 마녀임을 부정하는데, 생살이 갈리는 고문을 받고 나면 결국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없는 말을 지어내 거짓 자백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한 가톨릭 신부가 이걸 우연히 보고나서 충격으로 시름시름 앓았다고 한다. 결국 일단 한 번 마녀 혐의로 기소된 사람의 최후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고, 다만 얼마나 빠르게 마녀임을 인정하느냐에 따라서 얼마나 고통을 당하고 죽을 것인지가 정해지는 셈이었다.

때때로 마녀사냥에서 기적적으로 풀려나는 경우도 있었는데, 자진해서 재산을 헌납하거나, 권력층에 연줄이 있는 경우거나, 지역에 따라서는 '가임기 여성'인 경우에 방면되는 경우도 있었다. 대개 마녀 행위의 주도자를 많이 밀고한 사람이 방면되기도 했는데, 이 경우는 '마녀들의 집회에 참석한 다른 마녀를 대라.'는 질문에 살기 위해 자기가 아는 사람 이름을 줄줄이 읊는 것이다.

실제로 한 할머니가 길을 잃고 인근 숲을 헤매다가 마녀로 찍혀 고문을 받던 중 '또 다른 마녀'로 한 남자를 지목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할머니가 길을 잃고 헤매다가 우연히 지나친 무고한 시골 총각이었다.[31] 영문도 모르고 마녀로 지목당해 끌려가는 총각이 억울해하자 할머니 왈,
"나도 자네가 마녀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네. 자네가 나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인 것도 알고 있지. 나를 용서하게. 그러나 만약 또 그 고문을 받게 된다면 난 또 다시 자네의 이름을 댈 수 밖에 없을 걸세."

이 사례만 들어봐도 마녀사냥의 희생자가 어떻게 나왔는지 안 봐도 뻔하다. 동시에 마녀사냥이 피해자에게 얼마나 끔찍한 일이었는지 알 수 있다.

3.1. 지역별 마녀사냥

마녀사냥은 사실 유럽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기록을 보면 상당수의 고대 사회에서 소위 '마법사'들이 탄압받으며 죽는 이야기가 나오고[32] 이와 같은 악습아프리카인도, 파푸아뉴기니의 오지에서는 아직까지 일어나고 있다. 당장 구글신에서 검색만 좀 돌려봐도 마을 주민들에게 몇몇 사람들이 마법사라고 구타받는 비디오가 나돌 정도니...

마녀사냥이 이처럼 시대를 초월하는 글로벌한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인류학자들은 마녀사냥이 단순히 유럽에서만 일어난 종교적, 역사적인 이벤트이기보다는 인간의 집단 폭력성을 배출하는 방식 중 하나라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현대에도 중국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처럼 자신이 위협을 느끼는 대상에게 극도로 잔인한 행태를 보인 바 있다. 단지 전근대 사회에서는 이와 같은 집단 광기가 종교적인 이유로 배출되었던 것이고 현대 사회에서는 이념적인 이유로 배출되는 것이라는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유럽사에서의 마녀재판은 지역마다 워낙 양상이 다양해서 연구자들이 머리칼을 쥐어뜯는 주제 중 하나다.

4. 그 밖의 이야기

5. 마녀사냥이 등장하는 창작물

6. 비유적 의미에서의 마녀사냥

Witch hunt / public shaming[35]

인터넷 또는 언론 등지에서 마녀사냥이란 말이 나온다면 보통 이것을 뜻한다. 사회 안의 불특정 다수가 한 사람 혹은 소수를 거세게 몰아붙이는 것을 말하며, 마녀재판이라고도 한다. 개인정보 유포죄와는 엄연히 다른 개념으로, 개인정보 유포죄가 상대방의 사생활 등의 개인정보를 외부로 유포하는 행위에만 국한된다면, 마녀사냥은 허위사실을 퍼트리거나 혹은 사소한 잘못을 크게 부각시켜 소수의 집단이나 개인을 궁지로 몰아넣는 행위로, (허위) 개인정보 유포 외에도 명예훼손이나 모욕죄에 걸리는 행위도 마녀사냥의 범주에 들어간다. 유의어로 인민재판이 있다.[36]

한때 신상털이로 유명했던 코갤일베저장소는 마녀사냥의 온상으로 꼽힌다. 특히 코갤 등 신상털이를 자주 하는 곳은 실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라고 얼굴이나 전화번호 등의 신상까지 까고 보니 전혀 다른 무고한 사람이었던 사례도 꽤 있다. 당연하지만 잘못한 사람이라고 해서 무작정 신상부터 까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일베가 망한 뒤로 신상털이 악습은 다른 일베의 악습들과 함께 디시인사이드 전체로 퍼졌다.

소위 말하는 '~~녀'들의 신상 중 이런 사례가 많았다. 웬만한 루머도 여기서 생산되거나 커지고 아니라는 게 완전히 밝혀져도 계속 깔 정도니 말 다했다. 해당 문서로. 여성시대메갈리안 등이 이러한 사례에 해당한다.

특정 사이트뿐만 아니라 페이스북, 디시인사이드같은 SNS에서는 하루가 머다하고 마녀사냥이 일어나고 있다. 사실상 지금 일어나는 마녀사냥의 대부분은 이런 SNS가 주도하고 있다고 봐도 된다.

특성상 사이버 불링과도 연관되는데, 잘못이 없거나 있더라도 사소한 수준인 상대를 몰아붙이고 공격하는 식으로 일어나곤 한다.

특히 SNS에서는 일부 사람들한테 소위 여왕벌로 통하는 여성들 중에 자기 맘에 안드는 유형인 사람들을 조리돌림하고, 추종자들이 동조하는 식의 일들이 많은데, 이것이 때때로 마녀사냥 대상을 잘못 건드려서 마녀사냥 대상이 된 사람이 돌아버려서 동참자들의 신상을 털어버리거나, 현피를 저지르는 경우도 있다.

굳이 신상털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잘못을 저지른 것에 대해 비판을 하다가 그게 선을 넘어서 상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듯한 공격적인 언행을 저지를 때도 있다. 판단은 각자의 몫이나, 너무 앞뒤 가리지 않고 맹렬하게 비난하거나 인신공격, 신상털이 등의 행동을 하는 것은 우선 자신을 위해서 삼가야 한다.

상대가 명백히 죄를 저질렀거나,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경우 이를 근거로 비판을 하는 것은 합당하다. 하지만 그것이 도가 지나쳐 욕설을 퍼붓거나 나쁜 년놈들로 매도하는 등 상대에게 정신적 상처를 주는 행위는 실제 마녀사냥을 하는 사람과 다를 바 없는 공격적인 언행이 된다. 그러니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며 비판하고자 하는 점만 정중하게 비판을 해야 마녀사냥이라는 지적을 피할 수 있다.

냉전 이후 현대사회의 체계와 법적 이론, 윤리관들은 시민 저항권 외에 사적 권력의 행사를 엄중하게 경계하고 있다. 긴급피난이나 정당행위의 성립요건이 까다로운 것이 그 일례이다. 집단적 광기에 편승해 공격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삼가는 것이 좋다.

하지만 사회의 통념에 반하고 인권, 자유 같이 현재의 보편적인 권리와 상식에 반하고 남에게 피해를 입히는 일을 해서 마땅한 비난과 처벌을 받는 자를 옹호하기 위해서 마녀사냥을 당한다는 의미로 소위 물타기를 시전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자신이 사회의 통념에 반하는 짓을 하고 이에 대한 비난을 받고서는 이를 사적제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데 이건 용어를 잘못 이용한 것이다. 사적제재는 죄에 대한 처벌을 국가 대신에 개인이 하는 것을 뜻하지 죄를 저지른 개인에 대한 비난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비난은 표현의 자유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죄형법정주의를 들이대며 자신이 행한 비윤리적 행동이 처벌 받을 이유가 없다며 비난하지 말라는 식으로 나오는 경우도 있는데 이 역시 용어를 잘못 사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죄형법정주의는 법으로 규정한 범죄만 처벌하자는 국가의 원칙이지 범죄가 아니니 비윤리적 행동에 대한 비난을 하지 마라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뜻을 바꾸고 나면 그건 걷잡을 수가 없다. 확률이란 말도 그렇게 된지 오래고

간혹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고도 상대방한테 공격을 받자 되려 상대방에 대해 무고한 사람을 마녀사냥 한다며 매도하는 이들도 있다.

6.1. 마녀사냥이 묘사된 창작물

7. 관련 문서


[1] 마녀가 악마에게 세례를 받는다고 묘사되어 있다. 당대 유럽인들은 마녀들이 '조직적'이고 '의례적'인 반교회라고 상상하곤 했다. 이 그림에서 보듯이 마녀사냥의 배경에는 음모론적 공포도 있음을 알 수 있다.[2] 서방 교회. 즉, 로마 가톨릭개신교[3] 그런데 사실 이 로마법도 고대에는 이런 식으로 해석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석했어도 아무 때나 들먹이지는 않았다. 애초에 황제 시해 음모가 아무 때나 들먹여진다는 것 자체가 그 황제의 통치가 막장이라는 이야기일 테니...[4] 종교재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종교재판은 이단심문을 포함하는 의미이지만, 이단심문 외에도 혼인 문제 등 주민과 밀접한 문제도 다루었다.[5] 존 비드마(Jojn Vidmar), 「십자군과 이단심문 Q&A 101」(번역: 이영욱)[6] 영국 워릭 대학 역사학과 교수[7] 1590년부터 1680년까지 약 4,400명이 연루된 것으로 추정된다. 비슷한 시기 잉글랜드에서 200년간 교수형으로 처형한 일반 범죄자가 1천 명에 불과한 것에 비하면 꽤나 많은 숫자이다.[8] 마르틴 루터가 살던 비텐부르크에도 1540년 마녀사냥이 처음 있었다고 한다.[9] 출처: 폴 존슨 「기독교의 역사」[10] 출처: Peter Marshall, 「종교개혁」[11] 이 문서에 자주 인용된 Peter Marshall에 의하면 15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전반까지 유럽 전체에서 약 10만 명이 고발당해 4만 명이 사망했다고 한다.[12] 부연설명하자면, 스페인 해군은 칼레에서 영국과 정면으로 맞붙지조차 않았다. 한국에는 스페인 배가 큰 대신 느린 반면 영국 배는 작은 대신 빠르고 대포 사정거리도 길어서 유리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글쎄... 스페인 배와 영국 배가 정면으로 싸우면 영국이 탈탈 털렸을 거라는 게 통설이다.[13] 카를로스파에 직접적으로 가담한 지역은 그리 많지 않으나,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심정적 동조자들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나라가 둘로 쪼개졌고, 거기에 어렵게 즉위시킨 이사벨 2세의 삽질이 나라를 망쳤다. 이사벨 여왕이 삽질을 해대면서 그녀를 지지한 자유주의자들의 입지가 심각하게 약화되었기 때문이다.[14] 그나마 이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전재산을 교회에 기부하고 수녀가 되는 것이지만 문제는 마녀사냥에서 수녀도 고발되어 죽는 경우도 있었다.[15] 이 과정에서 전통사회를 지탱하던 (경험에 기반한) 많은 구전 의료 지식 등이 소실되며 사회를 더욱 암흑으로 몰아넣었다. 분명히 중세시대에는 치료할 수 있었던 병이 지금은 아무도 치료법을 모르는 등 의료-의약계에서 안타까워하는 부분이기도 하다.[16] 아래에서 쓰여있지만 마녀감별법 중 바늘로 찔러보는 방법이 있었다. 아파하지 않거나 피를 흘리지 않으면 마녀로 간주했다.[17] 아이러니하게도 공인되기 이전의 기독교도들도 고대 로마에 의해 이러한 잔혹한 탄압을 받은 적 있다. 정확히 말하면 공인된 지 1000년은 더 된 시점이니 그 시절 기독교인과 동일시할 순 없지만...[18] 그래서 실제 당시 재판 사료들이 많이 남아있다.[19] 전통적으로는 교황권이 약해지면서 발악한 거라는 견해가 많았으나, 교황권이 종교개혁 시기를 기점으로 과연 약해졌다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여러 반론의 등장(특히 트리엔트 공의회), 개신교 지역에서도 가톨릭 못지 않게 마녀 사냥이 많았다는 점 등으로 인해, 20세기 중반 이후로는 '교파화'라는 현상에서 주로 일컬어진다. 자세한 건 후술.[20] 이 시기 일본에서는 텐메이 대기근이, 조선에는 경신대기근 등이 일어났다.[21] 대부분의 마녀들이 기소당할 당시에 질병을 일으켰다는 죄목으로 기소를 당했다.[22] 당시에는 중앙권력보다 각 장원의 지방 권력이 더욱 강했다. 영주는 그 땅에 오랫동안 군림하는 왕 수준이었기 때문에 중앙의 왕이라 해도 함부로 어떻게 하지는 못했다. 다만 흑사병 이후 인구가 줄어들어 농노들이 강해졌고 이들 중에 자영농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농노들 중에 일부가 반기를 들기도 했다.[23] 다만 사회적으로 탄압받는 소수종파들 사이에서는 '폭군살해론', 다시 말해서 폭군을 살해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인식이 퍼져갔다. 지역적으로는 잉글랜드 치하 아일랜드의 가톨릭 신자들과, 스코틀랜드의 칼뱅주의자들을 예시로 들 수 있다.[24] 네덜란드가 독립해버린 이유 중 하나는, 펠리페 2세가 이 지역에 근대적 신학교를 짓고 성직자 양성 시스템을 쇄신하려고 하면서 네덜란드의 도시들이 이를 중앙의 과도한 간섭이라고 받아들인 탓이다. 자세한 것은 네덜란드/역사 문서로. 교황은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속권은 약해졌으나, 교권은 상승했다. 다시 말해, 종교적 분야에서 전세계의 사제들에게 행할 수 있는 통제력이 커졌다.[25] 케플러가 자기 엄마는 외계인과 결혼한 마녀라는 내용의 소설을 썼는데 그걸 진짜로 믿은 사람이 있었다. 케플러가 변론을 잘 해서 마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했기 때문에 사형까지는 안 가고 어찌저찌 풀려났지만 후유증으로 다음해에 사망한다. 그래도 이 사건 덕분에 그 지역에서 마녀사냥이 주춤해지는 효과가 있기도 했다.[26] 즉, 살아있는 채로 태우지는 않는 것.[27] William Monter: Witch trials in Continental Europe, (in:) Witchcraft and magic in Europe, ed. Bengst Ankarloo & Stuart Clark,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Philadelphia 2002, pp 12 ff. ISBN 0-8122-1787-X; and Levack, Brian P. The witch hunt in early modern Europe, Third Edition. London and New York: Longman, 2006.[28] 30년 전쟁의 종결과 베스트팔렌 조약이 등장한 근대사의 변곡점으로 거론되는 시점이다.[29] 이 마녀사냥의 끔찍한 경험 때문에 현대의 유럽 지역에서는 '작은 사회'에 대해 의외로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 더불어 교회에 대한 반발감도 심해져 현대 서구사회에서 무신론이나 반신론, 신이교주의가 생기는 원인이 되었다.[30]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책이기 때문에 라틴어-영어 대역판이 미국에서 출판되기도 했다. 더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으로.[31] 심지어 이 시골 총각은 처음에 길 잃은 할머니를 도와주려 했었다고 한다.[32] 함무라비 법전에서도 마술 행위로 사람을 고발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조항이 있었다.[33] 유명한 <큰 바위 얼굴>, <주홍글씨>의 저자이다.[34] 이 현상을 주석페스트라고 한다.[35] 공개적 모욕.[36] 하지만 둘은 엄연히 다른데 마녀사냥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마녀로 멀쩡한 사람을 몰듯이 잘못이 없는 멀쩡한 사람을 몰아가는 걸 많이 이야기하고, 인민재판은 (보통) 잘못이 있지만 사소한 수준인 걸 공개적으로 조리돌림한다는 차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