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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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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교황청 주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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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8F0C3,#191919> 카노사의 굴욕 파문을 통한 교황권의 강화
십자군 전쟁 교황권의 절정
아비뇽 유수 교황권 분열, 콘클라베 제도 정착
사코 디 로마 교황권의 몰락 }}}}}}}}}


1. 개요2. 십자군 국가3. 소속된 기사단4. 주요 인물5. 왜 벌어졌나?
5.1. 주동기5.2. 기타 동기
6. 본편7. 외전8. 영향
8.1. 교회의 권위상실8.2. 장원경제의 붕괴와 화폐 경제 발달8.3. 국가들의 정세
8.3.1. 러시아 공국들의 쇠퇴8.3.2. 이탈리아 공화국의 이득8.3.3. 이슬람권의 상당한 충격8.3.4. 동로마 제국: 몰락의 길8.3.5. 에티오피아
8.4. 몽골 제국의 영향8.5. 흑사병과 대항해시대의 서막8.6. 중세의 끝
9. 유대인 학살10. 평가
10.1. 미화10.2. 비판 및 격하10.3. 현대 역사학계의 평가
11. 영토 변천사12. 대중매체에서13. 기타14. 참고 자료

1. 개요

한자 十字軍戰爭
라틴어 Expeditio Sacra(성전)
영어 The Crusades
파일:55fbee2c7ed79776e93ebc6b341054265c63e153-1.jpg 파일:kneelingknight-58b9734c3df78c353cdc5144.jpg
민중 십자군의 출발 (1096년) 십자군 기사의 봉헌
파일:crusade_map.png 파일:cathares.jpg
1차~4차 십자군 전쟁 루트. 3차부터는 주로 해로를 이용 알비 십자군에게 쫓겨나는 카르카손 시민들

십자군 전쟁()은 1095년부터 1291년까지 간헐적으로 일어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레반트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일어난 전쟁이다.

1071년 동로마 제국황제 로마노스 4세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제국술탄 알프 아르슬란에게 대패한 뒤 근동 일대에 대격변의 시기가 찾아오고, 결과적으로 동로마 제국의 기존 핵심 지역이던 아나톨리아 대부분을 잃게 되었다. 1081년 신황제 알렉시오스 1세가 즉위하여 이를 수습하고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고자 했지만, 남이탈리아노르만족, 북방의 페체네그족, 그리고 아나톨리아의 셀주크 제국 등 사방에 적들이 너무 많아 약해진 제국의 힘만으로는 부족했다. 때문에 제국은 전쟁으로 인한 군비가 팽창하는 1040년대를 전후하여 꾸준히 해오던 지원 요청을 보다 다급하게 해오고 있었다.

그러한 요청의 일환으로 1095년 3월 피아젠차에서 열린 공의회에도 사절단을 파견했는데, 피아젠차에서 이들을 접견한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성스러운 교회를 수호할 수 있도록 이교도들에게 맞설 원군을 보내달라"정도의 내용의 요청을 듣고는 본격적으로 십자군을 위한 여론 조성에 나섰다. 그렇게 1095년 11월의 클레르몽 공의회를 기점으로 서유럽은 약 200년간 여러차례[1]에 걸쳐 십자군을 파견하게 된다.

2. 십자군 국가

파일:untitledhheh.png

Crusader states : 십자군 전쟁으로 세워진 나라들을 십자군 국가라고 부른다.
파일:external/www.zonu.com/Empire-of-Nicaea-Empire-of-Trebizond-and-the-Despotate-of-Epirus-1204.jpg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54px-Ordensland1410.png

3. 소속된 기사단

4. 주요 인물

가톨릭 세력

이슬람 세력

5. 왜 벌어졌나?

십자군 원정의 목적을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5.1. 주동기

5.2. 기타 동기

6. 본편

십자군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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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차 십자군 원정 제1차 십자군 원정 제2차 십자군 원정 제3차 십자군 원정 제4차 십자군 원정
제5차 십자군 원정 제6차 십자군 원정 제7차 십자군 원정 제8차 십자군 원정 제9차 십자군 원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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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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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영향

파일:Last_Crusader.jpg
마지막 십자군의 유럽 귀환

8.1. 교회의 권위상실

십자군 전쟁은 오래 지속되었지만 9차까지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성지인 예루살렘 탈환에 실패함으로써 유럽권이 패배한 전쟁이 되었다. 전쟁이 교황의 예상과 달리 실패했기 때문에 교황권의 몰락과 신앙의 약화를 가져와 결과적으로 교회의 권위가 떨어졌다. 신이 기독교를 버렸다고 여긴 일부는 무함마드를 숭배하기까지 하였다. 카타리파가 잔존했던 프랑스 남부에서 가끔 일어났던 일.

8.2. 장원경제의 붕괴와 화폐 경제 발달

한편으로 기사와 영지를 기반으로 한 장원경제의 붕괴가 찾아왔고, 중앙집권적인 근대국가의 탄생이 이루어졌다.

동방으로 향하는 무역로를 새롭게 개척할 수 있었기 때문에 도시경제와 화폐경제가 발달하게 되었다. 한편, 기존에 화폐 거래가 일반적이지 않던 서유럽이 동로마와 이슬람 권에서 화폐 거래를 채험하여 서유럽 세계가 자본주의와 시민 계급의 성장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었다는 평가도 있다.[19]

8.3. 국가들의 정세

십자군은 동방의 문물이 서방에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고 반대로 서방의 문물이 중동으로 전해지는 계기도 되었다. 서유럽과 중동 지역의 무역로가 뚫리면서 지중해 무역을 하는 이탈리아의 국가들의 경제적 이윤이 컸고 중동식 성곽 건축을 본 유럽의 제후들은 앞다투어 장점을 포용해 자신들의 성을 개량했다.

서유럽 국가들의 중무장한 기사에 크게 패배한 초창기 중동의 이슬람 군주들은 서유럽식 중장기병과 갑옷,장비를 받아들이기도 했다.

한편 이 전쟁 와중에 이슬람과 기독교는 종파와 이해관계로 사분오열되어 서로서로 싸우는 일이 빈번했다. 이슬람의 영웅이라던 살라흐 앗 딘조차도 다른 종파에서 고용한 자객들에게 죽을 뻔했다. 십자군이 헝가리로 쳐들어갔다가 되려 깨져버린 일이나, 알비주의 십자군처럼 내부의 충돌도 끊임없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와 이슬람이 서로 손을 잡고 적을 공격하는 일도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

8.3.1. 러시아 공국들의 쇠퇴

그 외에 자세히 언급되지는 않지만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러시아의 공국들은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키예프 공국 같은 러시아 공국들이 부흥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슬람 제국이 북아프리카를 장악하고 사라센 해적들이 판을 쳐 지중해 무역이 불가능하자 아예 흑해러시아 공국들을 지나 발트해로 가는 무역이 성행하였기 때문이다. 십자군 전쟁으로 이탈리아 상인들이 새로운 무역로를 개척하고 상권을 장악해 러시아를 지나는 물류의 양이 급감해버리자, 대부분의 수익을 교역에 의지하는 러시아 공국들은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다.[20] 4차 십자군 직후 몽골이 침공해오자 노브고로드 공화국을 제외한 모든 러시아 공국들은 멸망당하거나 칸국의 봉신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8.3.2. 이탈리아 공화국의 이득

반면에 이탈리아의 공화국들, 특히 베네치아 공화국제노바 공화국은 십자군을 통해 많은 이득을 얻었다. 베네치아는 직접 그리스의 상당 부분을 식민지로 만들었고, 제노바 역시 그에 못지않은 힘을 얻게 되었다. 이들의 경쟁 관계는 키오자 전쟁이 베네치아의 승리로 끝나기 전까지 지속된다.

8.3.3. 이슬람권의 상당한 충격

하지만 이슬람권에서는 분열된 상황에서 갑자기 유럽이 쳐들어와 개박살을 냈기 때문에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몰아낸 유럽제국주의 시대에 다시 돌아와서 중동을 공격해 식민지로 만들고 유럽인들이 자신들을 제2의 십자군이라고 자화자찬하자, 이슬람은 십자군을 사악한 악의 화신이라고 여기게 된다. 이러한 분위기가 현대 중동의 시대정서를 형성하는 데 이바지하였고 지금도 이슬람은 이스라엘미국을 제2의 십자군으로 여기게 되어 증오와 폭력을 더욱 증폭시키는 효과를 낳고 있다.

그렇지만 동시대 정반대 방향에서 닥쳐온 몽골 제국과 바그다드 아바스조 칼리파의 멸망이란 거대한 충격에 비하면 서방발 십자군은 임팩트가 비교적 적었다. 기본적으로 어찌보면 사실 레반트 일대를 둘러싼 이슬람 국가들에게 큰 문제였지 이미 중앙아시아, 인도 등으로 멀리 퍼진 이슬람 세계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몽골의 침략과 바그다드 파괴가 정신적, 종교적인 관점에서나 물리적인 파괴력에서나 파급력이 더 컸다. 어쨋든 이 시대 서쪽으론 십자군, 동쪽으론 몽골이란 이슬람교 창시 이래 실제 권력은 어쨋든간에 명목상이나마 전세계 무슬림들의 지도자인 칼리파제 자체가 소멸할 위기를 겪은 이슬람 세계는 십자군, 몽골계 칸국들을 극복하며 새로운 종교문화와 함께 강력한 이슬람 제국을 복원시킨 오스만, 사파비 등 근세 화약제국의 시대가 들어서면서야 안정을 찾게된다.

8.3.4. 동로마 제국: 몰락의 길

동로마 제국의 경우에는 초반에는 룸 술탄국에 빼앗겼던 아나톨리아 동부 해안 등을 대거 수복하는 등 어느 정도 이익을 보았지만, 십자군 깽판으로 경제적, 안보적 피해 역시 많이 입었고 무엇보다도 제4차 십자군 원정으로 수도가 털리면서 결국 강대국 대열에서 영원히 탈락하였으며 이후 이백 수십 년간의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8.3.5. 에티오피아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에티오피아 제국도 십자군 전쟁에 영향을 받았다. 이슬람권에 포위된 유일한 기독교 국가였던 에티오피아는 십자군 국가들과 연합하여 이슬람 국가들에 대항하려고 했고 실제로 소규모의 지원병을 보내기도 하였다.[21] 한편 살라딘이 예루살렘 왕국을 멸망시키고 예루살렘에 상주하고 있던 에티오피아 정교회 사제들을 초청해 회담을 나누고 순례세금을 면제시켜주기도 했다.

이 시기 에티오피아는 랄리벨라라는 곳에 제2의 예루살렘을 건설한다고 여러 건축물을 건설하기도 하였다. 14세기에 이르러서는 웨뎀 아라드 황제가 교황에 사절을 보내 로마, 아비뇽, 스페인, 포르투갈을 둘러보고 프랑스와 같이 이집트를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지만 이미 십자군 전쟁이 거의 끝을 보는 상황이었고, 또 대립교황과 교황이 서로 반목을 하는 등 유럽 교회도 혼란이 극심한 상황이었던지라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8.4. 몽골 제국의 영향

한편 몽골 제국이 1200년대 후반에 이슬람권을 공격하면서 유럽에 프레스터 존의 전설이 퍼졌다. 십자군 국가들은 일 칸국과 연합하여 이슬람 국가들에 대항을 꾀했고 네스토리우스파를 믿었던 몇몇 몽골 군주와 그 아내의 영향으로 교황 및 프랑스왕과 서로 사신을 주고 받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나 후기에 이르러 일 칸국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맘루크 왕조의 맹활약으로 몽골이 발리자 그 연합도 점차 쇠퇴하게 된다.

8.5. 흑사병과 대항해시대의 서막

결국 이러한 십자군 전쟁의 여파는 그 당시 창궐하던 흑사병과 맞물려서 유럽 인구를 급격하게 줄이는 결과를 초래했고, 이는 자연적으로 농노들의 가치가 올라가는 결과를 낳았다.[22] 또한 예루살렘을 기점으로한 실크로드를 결과적으로 확보하지 못함으로써, 향료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던 유럽인들은 실크로드를 대체하는 다른 길을 찾게 되었으며, 이는 대항해시대의 서막이 되었다.

8.6. 중세의 끝

이와 같은 여파는 십자군 전쟁으로 실추된 교황권에 맞물려서 유럽 구성원의 머릿속에 '개인의 욕구, 권리' 등에 대한 인식들을 크게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르네상스의 발판이 되어 결과적으로 중세가 끝나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고대시대 수준의 풀무를 사용하던 서양에 동양의 최신식 풀무가 십자군 전쟁 혹은 몽골의 정복전쟁으로 서양으로 건너가게 되었고, 강철의 대부분을 무역으로 충당하던 서양은 자체적으로 생산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수력 풀무질 까지 발명하면서 르네상스 시대에 이탈리아, 독일 등지는 강철제품으로 경제적으로 부유해지게 된다. 그런데 풀무만 넘어가고 강철의 대량생산에 필요한 초강법은 넘어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23]

9. 유대인 학살

파일:Burning-Jews.jpg
'내부 정화'의 일환으로 화형에 처해지는 유대인들?

십자군 전쟁은 당시 유럽 각지에 살고 있던 수십만 명의 유대인들에게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종교적 광기로 이성을 상실한 병사들, 민중들이 게토로 쳐들어가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일은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 이후 12세기와 13세기 초까지 빈번히 일아났다.

민중 십자군 때에는 주로 독일 (쾰른, 마인츠 등지)에서 학살이 집중되었고 2차 십자군 때에는 프랑스와 독일, 3차 십자군 시에는 사자심왕 리처드 1세의 대관식이 겹친 잉글랜드요크, 런던 등지에서 수백명이 화형당하였다. 유대인들은 무기를 들고 저항하기도 하였지만 결국 집단 자살로 소멸하는 경우가 많았다.[24] 13세기 초, 제5차와 6차 십자군 때에 재차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에서 유대인 학살이 자행되었지만 이번에는 그 주모자들이 처형당하는 벌을 받았다. 신성로마제국 황실은 기본적으로 유대인을 제국의 신민으로서 존중해 주었다. 그러나 몇백년이 지난 후...

이렇다보니, 현대 이스라엘이나 유태인들에게도 십자군이라는 이름은 달가운 이름이 아니다. 그래서, 조지 워커 부시가 크루세이더라고 미군을 십자군인양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파병한 것을 이야기하자, 부시 측근 유태인 정치인들도 그런 명칭은 좀 삼가달라고 충고하며 미국 내 유태인들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이름이라고 우려했을 정도였다.

10. 평가

10.1. 미화

전쟁이 끝난 후 기독교 세계에서는 기사도적인 일화로 인해 영웅서사시처럼 미화되어 낭만적인 영웅담으로 전해졌다. 성전에 참가한 사람은 크게 존경 받았고 성지순례는 모든 기독교인들의 꿈이었으므로 기독교 세계가 이 전쟁을 완전히 잊어버린것은 아니다. 또 오스만 제국과의 계속된 전쟁으로 인해 이슬람 세력과의 투쟁은 유럽국가들에게 보편적이었으므로 십자군 전쟁은 중세 이후로도 계속 유럽인들의 기억에 남아있었다. 실제로 포르투갈의 국왕 세바스티앙 1세는 십자군을 동경해 북아프리카 원정을 감행하기도 했고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신성동맹을 이끌고 오스만 제국에 대한 십자군을 계획하기도 했다.

한편 19세기 전까지는 이슬람권에선 이 전쟁에 큰 관심이 없었다. 무슬림들은 일단 자신들이 승리한 전쟁이고, 곧이어 터진 몽골 제국의 침략이 더 관심을 기울일 만한 큰 사건이었다. 근대 계몽주의 학자들은 십자군 전쟁을 중세의 암울한 역사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19세기 이후 십자군 전쟁은 재조명받게 된다. 오스만 제국을 이긴 유럽 국가들이 중동 지역을 침략하기 시작하면서, 위에 '영향' 항목에 나온 대로 명분을 위해 자신들을 제2의 십자군이라 자화자찬한 것이다. 서구 국가들이 이렇게 중동 침략을 십자군 전쟁의 이미지로 차용하자 이슬람 측에서도 그에 맞서기 위해 살라흐 앗 딘 등 영웅을 재발굴해 대대적으로 홍보했고 십자군 전쟁은 순식간에 역사의 화두로 떠올랐다.

이러한 기류는 현대에도 이어져와서, 걸프 전쟁으로 시작해서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 등의 전쟁에 서방세계의 다국적군이 중동으로 들어와 활동하기 시작하자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서양인들이 십자군 전쟁을 또 벌이고 있다!"라고 호도하며 언플을 시도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십자군 전쟁에 대한 밑의 이해타산적 재평가와 맞물려서 '테러와의 전쟁'은 핑계고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이 실제로는 석유를 노리고 중동을 침략하는 거라는 음모론 내지 선입견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더불어 이라크 전쟁을 두고 조지 워커 부시가 십자군을 가리키는 크루세이더라는 이름을 쓰던 것도 문제였다. 결국 결과도 십자군 전쟁 꼬락서니가 났지만. 미국에서도 이 말에 유태계 정치가들이 매우 언짢아했는데 십자군은 십자군 전쟁 당시, 종파가 다른 그리스도인이나 유태인들도 마구 학살하고 약탈했기 때문이다. 민중 십자군 항목을 봐도 십자군이 억울한 유태인을 죽여놓고 되려 적반하장으로 유태인이 그리스도인 죽였다고 소문내며 유럽 각지에서 유태인 집단 학살을 일으키게 했다. 동로마와 중동에 살던 정교회의 기독교인들 역시 이단이라며 십자군한테 학살당했다. 그러다보니 정교회는 "이슬람보다 더 악랄한 놈들"이라며 십자군을 증오할 정도. 이렇게 서구권은 십자군 전쟁을 잘난 듯이 종교 드립을 쓰거나 이렇게 멋지듯이 썼다.

10.2. 비판 및 격하

식민지 시대가 저문 이후, 십자군 전쟁은 유럽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드러낸 대표적인 전쟁이며 하느님의 뜻이란 이름하에 벌어진 종교적 광기의 전쟁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2000년 3월 5일 교황청은 <회상과 화해: 교회의 과거범죄>라는 문건에서 십자군을 "교회가 저지른 범죄"라고 공식 인증했다. 또한 같은 해 3월 12일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집전된 미사에서 십자군 전쟁을 교회의 잘못으로 거론하며 용서를 구했다. 1년 후 2001년, 교황은 그리스를 방문하여 십자군의 침략과 약탈과 학살 등에 대해 정식으로 사과했다. 9.11 테러가 터진 이후엔 미국과 서방에서 "무슬림들이 어째서 우리를 이렇게 적대하는가?"라는 의문이 던져졌고 이에 서방-이슬람 관계의 역사에 대한 전체적인 고찰이 이루어졌는데 십자군 전쟁이 서방-이슬람 관계 악화의 첫 타자로 지목되어 많은 비판을 받게 되었고 이러한 기류에 편승한 것이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류의 저서와 "관대한 이슬람" 떡밥이다.[25]

한국에서도 기독교 쪽이라고 종종 편들어버리는 경우도 있지만 아무래도 가톨릭이 벌여놓은 전쟁이라 가톨릭의 학살극이라고 비난하는 개신교 측 의견도 많다. 기독교 죄악사란 책을 쓴 한 목사는 십자군 전쟁을 "예수님 얼굴에 똥칠한, 기독교 최악의 광란"이라고 분노 어리게 비난하기도 했다. 다만 알아둘 점은, 가톨릭만 깐 게 아니라 이 책자에서 근현대 필리핀에서 벌인 필리핀인 학살을 두고 종교적 이념으로 정당화한 미국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를 현대판 십자군으로서 역시 개신교도 예수님 이름을 더럽힌 학살을 저질렀기에 이를 옹호하면 안 된다고 다같이 까고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십자군을 고등스러운 해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깠다.

10.3. 현대 역사학계의 평가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원인과 내용에 대한 다른 해석들이 나오고 있는데, 십자군 전쟁을 이해타산[26]으로 일어난 것으로 봤으면 봤지 단순히 종교적 광기로 일으킨 전쟁이라 말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계속 나오고 있다. 사실 마르크스주의 쪽에서는 특유의 사적 유물론 탓에, 처음부터 대부분 경제적인 원인으로 설명해왔다.

왜 이런 주장이 나오는가 하면, 우선 십자군의 종교적 광기 운운하는데 맨 처음으로 성전 드립을 쳤던 것은 서유럽도 이슬람도 아닌 동로마의 헤라클리우스 황제가 로마를 침공해 멸망 일보 직전까지 몰아넣은 사산 왕조 페르시아를 털어먹고 성십자가를 가져온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에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이슬람교가 신흥세력으로 일어났고, '종교적 동기'에 의해 사산 왕조 페르시아, 소아시아, 시리아, 팔레스티나를 털어먹고 이베리아 반도까지 차지한다. 그리고 서유럽의 가톨릭 신자들은 이베리아 반도를 넘어서 프랑스로 몰려오는 무슬림들을 막기 위해 '종교적 동기'로 전쟁을 해야 했다. 여기서 십자군만 똑 떼어내어서 '종교적 동기로 전쟁을 일으켰으니 미친짓이네'라고 할 이유가 없다.

십자군 전쟁은 단순한 '기독교 vs 이슬람' 전쟁이 아니었고 조금만 파고들면 기독교인끼리도, 무슬림끼리도 죽어라 싸운 전쟁이다. 예를 들면 정교회 나라인 동로마 제국에선 같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칭하는 십자군을 사람으로 생각하느니 차라리 이단자인 이슬람인들이 더 사람이고 십자군은 짐승이라고 증오하는 기록까지 가득 남겼을 정도. 하지만 십자군들도 동로마가 자신들을 야만인 취급하고 투르크와 협상으로 뒤통수 친 일 때문에 이를 갈고 있었다. 알렉시오스 황제는 같은 황제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도 자신에게 충성을 강요하기도 하여 십자군이 펄쩍 뛰기도 했다.[27] 그 유명한 민중십자군의 헝가리 공격이나 4차 십자군의 자라와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 서로가 서로를 엿먹였다는 얘기이다.

한편 이슬람 세계에서는 기독교 세계가 내분하는 것 보고 열심히 자극받아 자기들도 시아파, 수니파, 아랍계, 페르시아계, 튀르크계, 나중에는 몽골계로 막 나누어져 서로 잘 싸웠다(...) 특히 이슬람 내부의 민족, 종파 간의 분쟁은 기독교의 분쟁보다 더 심했다.[28]. 기독교 측에서 십자군 전쟁을 일으킨 정치적 계기가 동로마 제국의 지원 요청이었다면, 이슬람 쪽에서는 아바스조 치하든, 우마이야조 치하든 예전의 안정된 통합 칼리파 제국 시절에는 이슬람 내부적인 '성서의 백성' 전통에 따라 적당히 돈만 받고 성지 인근의 기독교인, 유대인들을 알아서 살게 내비두던 걸 중동 세계가 시아파 파티마조와 튀르크계 수니파인 셀주크 제국으로 양분되면서 각기 다른 성향의 군벌들이 예루살렘을 번갈아가며 지배하면서 기존의 기독교도, 유대인들과 유지하던 첨예한 관계가 깨져 유럽의 귀에 들어갈 만큼 무슬림 군주들 사이의 갈등이 심했다. 자기들끼리 싸워댔고 배신과 뒷치기도 흔했으며 시리아에선 아예 영주들이 반대 세력 없애겠다고 줄줄이 예루살렘 왕국에 동맹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걸 단지 기독교-이슬람 전쟁이라고 가볍게 여기는 거 자체가 이치에 맞지 않고 십자군 전쟁을 아주 잘못 본 것이다. 십자군 전쟁은 훨씬 더 복잡, 다양한 뒷배경과 양상을 보인다.

그리고 중세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듯이 이 또한 다른 시각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 나오고 있다. 토머스 매든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십자군 전쟁은 이슬람 세계의 기독교 침공에 따른 반작용이라고 한다. 무어인들의 이베리아 반도 점령과 투르크군에 의해서 동방 정교회의 영역이 점령당해, 기독교 세계는 동서 할 것 없이 샌드위치식 압박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증거들의 발굴과 이분법적 시각의 분쇄로, 매든은 저런 낡은 사관은 이제 학계에서 이미 박살났다고 단언하는 입장까지 취하고 있다.

그동안 십자군 전쟁의 야만성 운운하면서 십자군의 안티오키아 학살, 예루살렘 학살, 마라트 안 누만 식인 사태 등이 거론되었지만 이런 행위를 십자군만 하지도 않았고 십자군 역시 관용을 베푼 사례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게다가 십자군이 정복한 아르메니아, 에데사 지역이 무슬림 영토였나면 그것도 아니고 거긴 정교도들이 사는 곳이다. 또한 이슬람 군대 역시 장기바이바르스는 다른 이슬람 종파들을 대상으로 허구한 날 학살과 약탈을 벌여 같은 무슬림들에게 악당으로 증오받았다.[29] 이런 건 무시하는 것을 악질적 취사선택과 허수아비 찌르기라고 한다. 까놓고 말해서 십자군 전쟁은 그냥 규모가 크고 전장이 달랐을 뿐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전쟁이다. 십자군의 광기로 지목되는 성전 드립, 학살과 약탈은 이슬람이고 동로마고 십자군이고 가리지 않고 지난 수천 년간 당연하게 행해온 일이며 그 이후에도 행해진 일인데 마치 십자군만 특별했던 것처럼 비난할 수는 없다.

이는 십자군 전쟁을 중세사회라는 역사적 맥락 안에서 보자는 주장이다. 과거에는 십자군 전쟁을 19세기 제국주의를 보는 시각으로 해석하거나 20세기의 종교적 감수성에서 해석하는 시대착오적 해석이 난무하고 있었으며, 그 결과 그 시기와 그 이전 시기의 일반적인 전쟁과 크게 다를것도 없던 십자군 전쟁만이 유독 (다른 전쟁들과 구분되는) 광신으로 빚어진 참극으로 주목받아왔다. 이러한 부분을 지적하고 보다 동시대 다른 전쟁들과 비교연구를 통해 보다 객관적인 해석을 시도하는 것일 뿐이다.

십자군 전쟁은 영토 확장과 그에 따른 전쟁이 빈번했던 중세 유럽사의 많은 전쟁들과 규모는 다를지언정 비슷한 양상을 보였으며, 실은 복합적인 배경이 있었음을 인식하는 것이 십자군 전쟁을 보다 명확하게 파악하는 방법일 것이다. 정리하자면 십자군 전쟁에 대한 평가는 사실 모든 역사적 사건의 평가와 마찬가지로 관련 역사학자, 문필가, 대중매체들이 속한 시대와 사회의 가치관, 고민, 세계관에 따라 해석 되었다. 서유럽 세계 전반에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기존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한 회의주의가 몰아 칠 때는 비이성적인 광신으로 인하여 조상들이 저지른 삽질로 평가했고, 그 이후 제국주의뽕을 쫙 빨아먹고 다른 문명과 인종을 노골적인 백인우월주의로 깔아뭉갤 때는 다시 긍정적인 평가를 받다가, 현대 사회에 들어 서구중심주의가 강력하게 도전받고, 이에 대한 대항마로 옥시덴탈리즘적 관점이 유행할 때는 다시 악랄한 유럽 제국주의의 시초로 보았다. 그러다가 현대에 들어서 기존의 서구중심주의의 대항마로 부상했던 옥시덴탈리즘적 관점도 이제 혁파 돼야할 낡은 관점이 되어버리고, 실증주의적 관점과 더불어 이슬람권 내부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면서 기독교 vs 이슬람 같은 듣기에는 빠방하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거대한 단순화와 이분법적 관점 자체를 거부하고, 덤덤하게 후대의 관점에서 실제로 그 시대에 뛰며 먹고 살았던 개개인의 역사적 주체들의 (historical actors) 자발성을 (agency) 강조하는 현대의 시각이 부상한 것이다. 전공 분야에 대한 세분화가 깊게 진행되고, 역사적 사실 관계를 뭉떵그려 단순화하는 거대한 프레임 자체에 회의적인 현대 학계의 관점에서는 사실 11세기 부터 일러도 14세기, 관점에 따라 15세기, 16세기까지, 매번 이름만 '십자군'이란 상표를 걸었을 뿐이지 실제로 발생 동기, 목적, 관련 세력, 진행 방향 모두 판이하게 달랐던 300~400년에 걸쳐 터졌다가 수그러지기를 반복했던 현상을 '십자군 전쟁'이라는 하나의 관념으로만 뭉떵거리고 이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내린다는 것 자체를 무리수로 본다.

임용한도 토크멘터리 전쟁사에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하기도 했다.
십자군 전쟁은 어마어마한 논란을 낳았는데, 세 가지는 말씀 드리고 가야 할 것 같아요.

첫째, 종교전쟁이라 불리는 것, 정의의 전쟁이라 불린 것, 십자군이라는 명칭이 붙은 것은 (한참 뒤의 주장이고) 그 뒤에 악용해 먹으면서 더 큰 문제가 생겼어요.
둘째, 문명의 충돌이라는 말. 우리가 앞으로 토크멘터리 전쟁사를 하겠지만, 앞으로 나올 전쟁사의 절반은 중동이 끼어있어요. 중동은 위치상 세계문명의 교차로라구요. 끊임없이 전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고, 십자군 전쟁 이후에도 십자군 전쟁의 패러다임이 계속 사용 되는 거에요. 한쪽은 성전으로, 한쪽은 우리가 당했는데 또 당한다는 식으로. 그러니 분노는 재생산되고, 여기에 대한 악용과 반감도 같이 커지고. (중략)
그리고 중세로 돌아와보면 좀 더 복합적인 일이 얽혀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거에요. 속죄한다고 성지 탈환한다고 (그 먼 거리까지) 가는 게 말이 되냐. 그래서 표면 그대로를 해석하는 사람들은 "침략 전쟁이었다." 또는 "종교적 광신에 의해 이교도들을 다 죽이라 그랬다."고 말하는데, 나중에 말씀드리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인들이 이슬람인들을) 짐승으로 보고 그러지 않았어요.
그리고 셋째, 돈 때문에 일어났다? 돈 때문에 간 사람도 많아요. 왜냐면 중세 사회는요, 30~40%가 극빈층이었어요. 그래서 어디에서 뭐가 났다고 하면 다 몰려가게 되어 있어요. (하지만) 기사들도 돈을 벌러 갔느냐? (그건 아닌 게) 자기 전 재산을 팔고간 기사들도 수두룩해요. 70년대까지 만해도 가장 유력한 가설이 상속을 못 받은 차자(次子)들이 봉건제는 장자에게만 세습이 되니까 상습 못 받은 사람들이 돈 벌러 갔다 이랬는데, 후에 자료를 확인해 보니까 상속 못 받으면 둘째는 거지가 되냐고. 둘째라도 어쨌든 귀족인데. 형네 얹혀서 살면 되지 왜 거기까지 가느냐고. 그리고 당시에는 거기까지 가는 데 2년 정도 생계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에 엄청난 돈이 필요합니다. 자기 땅 팔고 가고, 요즘 말로 하면 대부 받아서 평생을 갚아요. 물론 돈을 벌러 간 사람들도 꽤 있었지만, 그 하나만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라고 말씀 드리고 싶네요.)
임용한. 토크멘터리 전쟁사 37부 십자군 원정 1부.영상 13분 11초부터.

11. 영토 변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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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2년: 1차 십자군 직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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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5년: 십자군 국가의 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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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0년경, 십자군의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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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4년: 2차 십자군 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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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5년: 에데사 백국의 멸망과 2차 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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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0년: 하틴 전투와 예루살렘 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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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2년: 리처드 2세의 3차 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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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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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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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1년: 프리드리히 2세의 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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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0년: 예루살렘 상실과 몽골의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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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1년: 알레포 상실과 9차 십자군

12. 대중매체에서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십자군 전쟁/대중매체 문서
번째 문단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13. 기타

14. 참고 자료


그 외에는 W. B. 바틀릿의 <십자군 전쟁 그것은 신의 뜻이었다!>와 시공사가 내놓은 조르주 타트의 <십자군 전쟁 성지탈환의 시나리오>가 있다. 바틀릿의 책은 절판이라 구하기 힘든 건 둘째치고 비전공자의 한계가 많이 드러난다는 의견이 있다.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시오노 나나미가 쓴 십자군 이야기도 있는데, 둘 다 그다지 전문적인 지식을 얻을 만한 서적은 되지 못한다.

결국 십자군 전쟁에 대해 최근 20여 년간 역사학계가 내놓은 새롭고 풍부한 연구성과를 접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영어를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국내에 아직 번역되지 않은 영어 서적 중 유명한 책으로는 Thomas Asbridge의 <The Crusades: The Authoritative History of the War for the Holy Land> 등이 있다. 정말 전문적으로 공부하려면 라틴어나 중세 아랍어 등 당시의 언어들은 기본으로 공부해야겠지만.
[1] 작은 규모로는 7차~8차로 계산하는 경우도 있으며, 또는 9차까지 정의하는 경우도 있으나, 8차와 9차를 묶어 8차까지라 보는 경우도 있다.[2] 참고로, 튜튼 기사단은 (대부분의 기사단이 그랬던 것처럼) 가톨릭 기사수도회였는데, 개신교 신자들이 유럽에서 종교개혁이라는 명목으로 들고 일어났을 당시 마르틴 루터를 직접 만나고 그에게 감동을 받은 튜튼 기사단장 알브레히트 공은 그의 기사단령을 세속적인 공작령으로 변경하고 국교를 개신교로 선포하였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프로이센의 기원이다.[3] Adhemar de Monteil, ? ~ 1098. 1차 십자군의 지도자 중 한 명. 교황 특사였으며, 1차 십자군의 정신적 지도자였다. 안티오키아 공방전 이후 티푸스에 걸려 사망했다.[4] 2차 십자군을 주도한 성직자.[5] Sigurd I, 1090 ~ 1130. 노르웨이의 왕. 1차 십자군 직후 군대를 이끌고 성지로 향했다. 시구르드와 그의 십자군의 행적은 '노르웨이 십자군'에 자세히 서술되어있다.[6] Raymond de Saint-Gilles(Raymond IV de Toulouse), 1052 ~ 1105. 프로방스영주. 1차 십자군의 지도자 중 한명으로, 그들 중 가장 나이가 많고, 가장 돈이 많고, 가장 유명했다고 한다. 오만하고 고압적인 성격으로 인해 인기가 없었고, 그 때문에 예루살렘 왕국 초대 국왕의 가장 유력한 후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부용의 고드프루아에게 빼았긴다. 그런데 놀랍게도, 생질의 레몽은 알렉시오스 1세에게 충성서약을 했던 여러 십자군 영주들 중 유일하게 서약을 준수했던 영주이다. 트리폴리 백국의 초대 백작이다.[7] Bonifacio del Monferrato, 1150 ~ 1207. 4차 십자군의 지도자 중 한 명. 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이후 라틴 제국의 초대 황제 후보로 물망에 올랐다. 그러나 4차 십자군의 실질적인 최고 지도자인 엔리코 단돌로가 다른 후보(플랑드르의 보두앵)를 밀었고, 결국 황제 즉위에 실패했다. 보니파치오는 제노바 공화국과 연결고리가 있었고 영지가 비교적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8] Geoffroi de Villehardouin, 1160 ~ 1212. 4차 십자군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4차 십자군에 대한 기록을 남긴 연대기 작가이다. 하층 귀족 출신의 기사로, 4차 십자군에 참가하기 전에는 프랑스 상파뉴의 군사령관이었다. 당시 상파뉴의 영주는 백작 티보 3세였는데, 티보가 1199년에 주최한 마상 시합에서 조프루아는 십자군에 참가하였다. 티보 3세가 4차 십자군의 초기 지도자였으므로, 조프루아도 그를 따라서 십자군에 참가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는 4차 십자군과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갔으며 라틴 제국이 건국된 후 라틴 제국의 군사령관을 지냈다. 황제 보두앵 1세(플랑드르의 보두앵)가 불가리아에게 포로로 잡힌 아드리아노플에서 뛰어난 지휘와 전략, 전술로 아군을 큰 피해없이 퇴각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1207년부터 4차 십자군의 원정 전 과정을 담은 프랑스어 연대기를 저술하였다. 연대기의 제목은 '콘스탄티노플 정복(Conquete de Constantinople)'으로, 그 문체와 형식은 중세 프랑스 역사 기록의 선구로 여겨진다. 조프루아가 모델로 삼아 모방할 만한 프랑스어 저작이 그 이전에는 없었으므로 그의 업적은 높이 평가받는다. 조프루아는 진정한 의미에서 최초의 프랑스어 산문역사를 쓴 연대기 작가였다. 조프루아는 1209년에 모레아의 아카이아 공작이 되었고, 얼마 후 죽었다. 조프루아의 자식들은 1218년에 그를 기리는 기념비를 건립하였다.[9] I. Kılıç Arslan, 1080 ~ 1107. 룸 술탄국술탄. 민중 십자군을 몰살시킨 인물이다.[10] Imād al-Dīn Zankī, 1085 ~ 1146. 셀주크 제국장군. 모술알레포총독이며, 장기 왕조의 창시자이다. 십자군에 조직적이고 지속적으로 맞선 최초의 이슬람 무장이다. 그는 1144년에 에데사 백국을 점령하였고, 이는 제2차 십자군 원정의 계기가 되었다.[11] نور الدين(Noradinus), 1118 ~ 1174. 이마드 앗딘 장기의 아들. 장기 왕조의 2대 술탄이다.[12] 말리크 알 카밀 나시르 앗딘 알 말리 무함마드(al-Malik al-Kamel Naser al-Din Abu al-Ma'ali Muhammed), 1180 ~ 1238. 아이유브 왕조의 5대 술탄으로, 살라딘의 동생인 알아딜의 장남이다. 아버지 알아딜이 1218년에 아이유브군이 다마에타에서 5차 십자군에게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심장 발작을 일으켜 얼마 후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술탄에 즉위하였다. 이후 총력을 기울여 5차 십자군에 대항하였고, 끝내 적들을 격파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알레포다마스커스의 반란으로 제국은 분열되었고, 때마침 1228년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6차 십자군이 침공해왔다. 6차 십자군과 싸울 여유가 없던 알카밀과 이런저런 사정이 있는 프리드리히 2세는 서로 싸바싸바(...)하여 성지 예루살렘을 팔고 샀다. 이후 내부 분열을 수습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예루살렘을 팔아치운 것 때문에 무슬림들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13] Kürboğa. 1차 십자군 당시 모술의 영주였다.[14] Yağısıyan ? ~ 1098. 1차 십자군 당시 안티오키아의 총독.[15] 다만 한 가지 명심해야 할 점은 무슬림 해적이 가장 극성이던 시대는 오히려 십자군 시대 (12~13세기) 이후였다는 것. 바르바리 해적 문서 참고. 다만 9세기 이후 이탈리아 일대에 안정이 찾아오며 아말피, 피사, 제노바, 베네치아 등의 도시 공화국들이 해군을 육성하여 이슬람 해군을 격파하고 현재 튀니지 일대를 약탈, 점거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십자군 전쟁을 통해 거대 무역 세력으로 성장, 지중해 무역을 장악하게 된다.[16] 서유럽 가톨릭의 어그로가 이 일로 엄청나게 올라버렸다. 거의 100년이 지난 후인 1차 십자군 원정 때도 십자군 지휘관들이 파티마의 사신들에게 이 일을 끄집어내 격렬히 항의할 정도로 두고두고 씹혔다.[17] 여담이지만, 현재 IS 등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들이 자신들의 끔찍한 악행에 대한 변명으로 흔히 내세우는 "예전에 십자군이 우리에게 저질렀던 짓에 대한 보복이다''라는 논리가, 오히려 그들이 그리도 싫어하는 십자군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복은 또 다른 보복을 낳을 뿐,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역사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18] 예외로 마누일 1세는 독자적으로 십자군을 외치며 영향권 내의 기독교국과 연합 원정에 나섰으나, 미리오케팔론 전투에서 패하면서 그 시도가 좌절되었다.[19] 단국대학교 서양사학부의 김현수 교수의 평가[20] 이러한 상권 이동과 함께 폴로브치인들의 침입과 내전으로 타격을 입어 쇠퇴하고 말았다.[21]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의 흑인 기사는 이걸 의식한 듯하다. 다만 유럽 국가들과 공식적인 외교 관계나 교류는 크지 않았다고 보여진다.[22] 당연하게도 100의 영지를 10명이 농노가 경작하던 기존과 달리, 7~6명의 농노가 경작을 하게 되면, 자연히 생산물이 증대되고, 이러한 잉여생산물은 농노들이 더 많은 부를 얻고자 하는 욕구로써 영주가 의도하는 방식과는 다른 방향으로 발현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주들이 흑사병/십자군 전쟁을 기점으로 이전과 같은 요구를 할 수 없게 됨은 자명한 사실이었다.[23] 동양은 이미 중국 한나라 시대부터 사용하던 기술이였는데, 서양은 산업혁명 시기에야 발견하게 되는데, 이도 식민지인 인도가 사용하던 것을 보고 깨달았다고 한다.[24] 이때 광경들을 묘사한 기록들을 보면 굉장히 참혹한데, 부모가 먼저 자녀들을 칼로 찔러 죽인 다음 서로를 칼로 찔러 죽이는 식으로 끝났다(...)[25] 서구 미디어물의 영향으로 이슬람교가 마치 무작정 폭력을 숭상하는 종교인 것처럼 왜곡된 것은 맞으나, 여전히 이슬람교 자체가 굉장히 경직된 율법 위주로 돌아가는 종교인 것도 반박하기 힘든 사실이다. 특히 이슬람 극단주의의 추태로 갈수록 이슬람이 원래의 좋은 점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26] 사실상 대부분의 전쟁은 이해관계의 충돌로 일어났다.[27] 서열상 알렉시오스가 위고 동로마가 신성 로마 제국을 황제 책봉을 해준 일이 있기에 명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동양 조공 책봉처럼 절대적이지 않았다.[28] 지금도 이슬람 세계의 민족, 종파간의 분쟁은 다른 종교들보다 극심하다.[29] 다만 이슬람 측에서 관대함을 대표하는 건 살라흐 앗 딘이었지, 장기나 바이바르스는 이슬람 다른 종파에게도 악랄하기로 악명이 자자하였고 십자군을 까고 십자군 전쟁을 종교적인 미친 전쟁이라고 미치도록 비난하던 근현대 서구 역사가들도 살라흐 앗 딘을 '관대한 이슬람 대왕'이라고 찬양하던 것과 달리 이 둘은 '십자군과 종교가 다르다 뿐 똑같은 학살자'라고 비난했었다는 걸 알아두자. 이들이라고 무조건 '이슬람은 죄다 관대하다능~ 기독교는 악마색히'라고 한 게 아니다.[30] 프랑스에서 거주 중[31] 다만 비난도 했지만 서문에서는 다양한 종교 장점을 넣으며 노력한 점을 높게 평가[32] 국내에도 정발됨[33] 개신교의 종류는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 성공회 등이 있다.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르게 만드는 말.[34] 사실 로마는 그 웅대한 규모에 비해 과학적 발전이나 철학적 발전은 생각보다 적은 편이다. 하지만 법률과 건축, 그리고 군사 면에서는 엄청난 발전을 이루어냈다. 법률의 경우 대륙과 영미권, 제3세계, 심지어 사회주의권까지 모두 로마법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35] 그래서 '지금 내가 서구 유럽인이고 가톨릭, 개신교인인데, 과거에 십자군이 없었다면 나는 유라비아에 사는 이슬람교도였겠지? 그건 안 되지!'라는 인과관계가 거꾸로된 논리로 십자군을 지지하는 경우가 있다. 현재 자기의 종교나 민족정체성으로 과거를 재단하는 일은 한국을 포함하여 어디서나 흔한 일인데,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신앙적인 감성에 가깝다. 정작 과거사가 바뀌었으면 지금 자신의 민족, 종교 정체성도 바뀌었을 것이기에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 못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탐라국이 독립국으로 남은 세상이 있다면, 지금처럼 한반도에 복속된 역사를 상상하면서 그러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제주도민은 농담이 아닌 이상 독립투쟁을 벌이지 않는다.[36] 매든의 입장은 자학사관 비판론의 일종이라고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