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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1 15:22:36

십자군 전쟁/기타 십자군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십자군 전쟁
1. 개요2. 소년 십자군의 원정3. 알비 십자군4. 아라곤 십자군5. 국토회복운동 (레콩키스타)6. 동방 십자군7. 북방 십자군8. 보스니아 십자군9. 스미르나 십자군10. 알렉산드리아 십자군11. 바르바리 십자군12. 대오스만 제국 십자군13. 후스파 십자군

1. 개요

일반적으로 평가되는 십자군 전쟁 시기(1095 ~ 1291년)에 일어난 십자군의 원정이 아니거나, 십자군 전쟁 당시의 원정임에도 동방 지역(아나톨리아, 레반트, 마그레브, 이집트)에 도달하지 못했거나, 기타 정식 원정이 아닌 십자군, 중세 이후 십자군을 자처하여 군사를 움직인 사건 등을 통틀어 다룬다.

2. 소년 십자군의 원정

제4차 십자군 원정 이후 프랑스독일에서 소년 소녀들의 신앙의 힘으로 무슬림기독교로 개종시킨다는 목표로 유럽 각지 수만 명의 소년들이 십자군을 조직하였다. 성지 탈환의 기치를 걸고 출발하였으나 여정을 마치지도 못하고 중간에 해산되었다.

소년 십자군의 대표주자는 독일의 니콜라스와 프랑스의 에티엔이 있다. 이들은 모두 사적계시에 의한 십자군이라고 볼 수 있다. 프랑스의 에티엔은 자신을 십자군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메신저로서 어느날 예수가 자신에게 나타나 프랑스 왕에게 편지를 전하라고 한 메시지를 들었을 뿐이었다. 그에 따라 자신은 프랑스의 왕 필리프에게 편지를 전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하고 다니며 추종자들을 모았고, 이 추종자들과 함께 필리프에게 편지를 전해줬다. 그게 끝이다. 에티엔은 자신의 편지가 필리프에게 전해지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대부분의 추종자들은 해산되었으며 "이게 다야?" 하며 실망한 추종자들은 알비 십자군에 참전했다.[1]

독일의 니콜라스는 십자군 원정의 실패가 어른들의 영적 불결함에 있다고 보았고 성경의 계시대로 천국이 아이들에게 열려있듯이 성지도 아이들에게 열릴 것이라고 주장했다. 니콜라스는 또 다른 사적계시를 받아, 모세의 기적처럼 지중해가 갈려서 도보로 성지까지 갈 수 있을 거라 주장했다. 하지만 이들 무리는 이탈리아로 가던 도중에 대부분이 공중분해되었으며, 이탈리아에 도착했을 때는 교황의 명령에 의해 남은 무리는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갔다. 게다가 약속한 지중해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닷길은 갈리지 않았고, 이에 실망한 상당수의 무리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다.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니콜라스와 남은 극렬 빠돌이들이 배를 얻어타고 성지로 가려고 했으나, 그때 노예 상인의 떡밥에 물려서 노예가 되었다. 배를 모집한 상인들이 이들을 알렉산드리아노예로 팔아 넘긴 것이다. 물론 성지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이들 중 불과 수십 명만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후 니콜라스의 아버지는 자녀가 돌아오지 못하여 분노한 동네의 다른 부모들에게 구타당한 후 교수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심지어 양치기 소년으로 위장한 노예상의 부하가 프랑스 북부에서부터 마르세유까지 소년 소녀들을 낚아서 끌고 왔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온다.

사실 소년 십자군과 이들의 최후를 다룬 당대의 기록은 그렇게 많지 않으며, 있다고 하더라도 대부분 민중 십자군 운동에 비판적이었던 수도자들의 기록인지라 자료로서 객관성이 부족하다. 이에 대해 에든버러 대학의 역사학 부교수인 개리 딕슨은 "때때로 이 수도사들은 부모들과 성직자들의 이성적인 충고를 무시한 이 가출 청소년들이 자업자득으로 겪은(또는 겪었을 것이라 여겨지는) 고통을 나열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논평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상인에게 속아서 노예로 팔려갔다는 식의 극적인 이야기들을 있는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중세의 허구와 사실: 어린이 십자군

3. 알비 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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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 후반부터 남프랑스의 도시 알비(Albi)를 중심으로 금욕주의와 청빈사상을 내세운 알비파(카타리파)가 창궐했다. 가톨릭 교회를 거부하는 그들은 이단으로 선언되었고,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알비파를 토벌하기 위해 십자군을 일으켰다. 주로 프랑스 북부의 기사들이 참가했으며, 남프랑스의 알비파 영주들이 대항해서 싸웠다. 십자군은 남프랑스를 깡그리 엎어서 알비파의 씨를 말려버렸다.

첫 공격 대상이 된 베지에(Béziers) 시[2]를 점령한 후, 병사 하나가 도시 안에 있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와 알비파를 어떻게 구별할지 물었다. 이때 교황 특사 아르노 아모리(Arnaud Amalric)[3]의 대답이 그야말로 걸작이었다.
Caedite eos. Novit enim Dominus qui sunt eius.
모두 죽여라. 주님께서는 누가 당신의 백성인지 아신다.[4]

이렇게 베지에 시의 학살로 2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하긴 했으나, 그 후의 알비 십자군은 교황과 교황 특사란 작자가 단단히 미친 놈이라는 것을 뒤늦게나마 깨닫고 무조건 학살이 아닌 항복 권유와 목에다 칼을 들이댄 채 개종을 권유했다. 물론 그래봤자 자기들도 미친 놈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개종을 거부하면 얄짤없이 화형에 처했다.(...)

카타리파는 당시 기준으로 보나 지금의 기준으로 보나, 정통 기독교보다 마니교에 가깝다. 그들은 구약의 성부육신을 만든 거짓 신으로 보았고 영혼을 중시한 신약의 예수를 진짜 신으로 보았다.[5] 그들이 금욕주의와 청빈사상에 지독하게 목매단 이유는 육체적 세계는 거짓이기에 육체를 즐겁게 하는 쾌락 역시 거짓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특히 여자는 육체라는 감옥을 만드는 공장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천시받았으며 성관계는 철저하게 금지당했다.(!) 항문을 통한 섹스를 뜻하는 은어 BUGGER도 알비파의 한 분파에서 나왔을 정도니... 다빈치 코드를 인용하여 알비파가 여자에게 글도 가르친 현대적인 계몽운동가라고 주장도 있지만, 알비파가 여자에게 글을 가르친 건 "니들이 왜 임신을 하면 안 되는지 알려줄게. 이 감옥 공장아!" 하며 여자들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함이었다.

카타리파는 남프랑스 지방에서 인기를 끌었고, 이후 알비파 영주들이 늘어나자 카타리파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성경을 엉터리로 번역 해석하기도 하여서[6], 후에 프랑스의 툴루즈에서 이와 관련된 지역주교회의(시노드)가 열렸다.

한편 스페인 바르셀로나 지방의 아라곤 왕국은 아이러니하게도 국토회복운동의 선봉이면서도 가톨릭에서 이단으로 찍힌 알비파의 툴루즈 백작 레몽 6세의 후원자였으며, 또한 툴루즈의 카타리파 영주들[7]을 자신의 보호령으로 두고 있었다. 그러나 레스터 백작이 아라곤 왕국의 보호령들을 이단이라는 이유로 차례차례 뺏어가자, 아라곤 왕국의 왕 하이메는 레몽과 동맹을 맺고 3만의 군사로 레스터 백작의 군대를 공격하였다. 이것이 바로 1213년의 뮈레 전투(Battle of Muret)다. 나머지 유럽사에서야 이런 일도 있었다 주석으로 넘기는 수준이지만, 스페인아라곤 연합 왕국, 그리고 카탈루냐의 역사에선 이 사건을 기점으로 아라곤의 왕들의 영향력이 피레네 산맥 이북으로 완전히 끊겨버리는 나름 중대한 사건이었다.[8]

당시 레스터 백작의 군대는 고작 870명의 병사(270명은 중기병)로 3만의 군대와 맞서 싸운다는 비교도 안 되는 숫적 열세에 처하였으나, 알비파와의 전쟁으로 단련된 그들의 정예 중기병들은 순식간에 아라곤 왕국군의 방어선을 뚫고 들어가서 아라곤 왕국의 왕, 하이메를 죽이고 겁을 먹고 도망치는 아라곤군을 신나게 썰어댄다. 결국 이 전투는 레스터 백작의 승리로 끝났다(레몽은 영국으로 도망쳤다). 알비주의 십자군의 리더였던 이 백작의 이름은 바로 시몽 드 몽포르 (Simon de Montfort).[9] 동명이인이자 영국의 왕 헨리 3세에 대항하여 남작전쟁을 일으킨 시몽 드 몽포르의 아버지이다.

베지에 시의 학살과 뮈레 전투의 여파로 1215년 즈음 십자군은 남부 프랑스를 거의 평정하지만, 알비파는 일시적으로 고개를 숙였을 뿐이었다. 전향한 척 했던 알비파는 레몽 백작의 아들(툴루즈의 레몽 7세) 지휘 아래 다시 봉기하여 툴루즈를 되찾았다. 이어 1218년엔 십자군의 리더 시몽 드 몽포르가 툴루즈 공성전에서 전사하고, 1226년에는 알비 십자군을 지원하던 프랑스 왕 루이 8세까지 병사하면서 카타리파는 반전의 기회를 잡는다. 하지만 카타리파 지역의 군주이기는 했으되, 결국 카타리파는 아니였던 레몽 7세가 결국 1229년 자신의 딸을 루이 9세의 동생[10]과 결혼시키고, 툴루즈 지역을 이 둘의 자손에게 넘기는 대신 프랑스 왕과 교황청의 사면을 받는 화의를 받아들였다. 공식적인 알비 십자군은 이때까지였으나, 이후로도 남부 프랑스는 지역 영주와 교황청 사제들에 의해 십수년간에 걸쳐 종교탄압과 민중봉기가 발생하며 악전고투가 벌어졌다. 결국 이들은 1245년에야 완전히 평정되었고 카타리파는 멸망했다. 그리고 사실상 독립국으로 한 때 프랑스왕보다 더한 권력을 누렸다고 평가되던 툴루즈 백작국이 왕실에 종속화되며 필리프 2세 - 루이 9세 시대의 프랑스 왕권 신장에도 큰 도움을 준 사건이었다.

4. 아라곤 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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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4년경의 시칠리아 왕국

이 전쟁은 크게 시칠리아의 만종 사건의 한 부분으로 다뤄진다. 7, 8, 9차 십자군에 참가한 시칠리아왕 샤를(앙주의 샤를)은 프랑스왕 루이 9세의 동생으로 원래 앙주프로방스의 백작이었다. 근데 시칠리아와 나폴리를 다스리던 신성 로마 제국호엔슈타우펜 왕조 계열이었던 섭정 만프레디[11]가 조카 콘라딘의 시칠리아 왕위를 강탈하고[12] 이탈리아 남부를 넘어서 기벨린파(황제파)[13]의 수장으로 중북부까지 세력을 뻗게 된다.

이에 크게 위협을 느낀 교황 우르바노 4세는 만프레디의 왕위를 인정하지 않고 그를 파문한다. 또 샤를에게 접근에 시칠리아 왕위를 제안했고[14], 샤를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형의 지원에 힘입어 시칠리아를 침공, 1266년 베네벤토 전투에서 만프레디를 패사시키고 왕권을 강탈하였다.

이듬해 호엔슈타우펜의 정통 계승자였던 콘라딘이 쳐들어왔지만 쉽게 격파하고 붙잡아 나폴리에서 공개처형해 버린다. 이때 사실상 호엔슈타우펜의 정통 계승자가 모두 사망하여 대공위시대가 열리는 계기가 된다.[15]

야심에 불타던 샤를은 시칠리아 왕위에도 만족하지 않고 형과 함께 십자군에 참가하고 헝가리, 제노바와 동맹을 맺은 뒤 아드리아해 건너편 동로마 제국의 제위에도 욕심을 내어, 이미 붕괴해버린 라틴 제국을 지원해 알바니아로 침공을 가하는 등 종횡무진 활약했다. 그러나 이를 우려한 동로마 제국의 황제 미하일 8세는 시칠리아 현지에 요원을 파견하여 밑작업을 해놓는 한편, 아라곤페드로 3세에게 군자금을 지원해주며 샤를을 치도록 종용했다.

한편 아라곤의 페드로 3세는 만프레디의 딸 쿠스탄차 2세와 결혼한 상태이므로 자신이 시칠리아의 적법한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 동로마 제국의 지원금까지 받자 샤를을 치고 시칠리아 왕위를 되찾을 계획을 확정하게 된다.

샤를은 계속된 원정을 하는 중이었는데 이 때문에 중과세의 세금을 물리고 시칠리아인들을 가혹하게 착취했다. 이에 시칠리아인들의 불만이 크게 고조된 상태였고 결국 반란을 배후조종하던 아라곤의 페드로 3세에게 시칠리아 왕위를 바치기로 하고 1282년 일제히 봉기하여 프랑스 군인들을 학살하였다(시칠리아 만종 사건). 샤를은 동로마 제국을 치려던 군대를 돌려 반란을 진압하려 했으나, 페드로 3세가 다른 명분으로 준비한 대군을 이끌고 시칠리아로 직접 쳐들어오자 대패하고 나폴리로 퇴각했다. 분노한 샤를은 교황과 프랑스 왕인 조카 필리프 3세와 동맹을 맺고 아라곤과 전쟁에 돌입했고 교황은 페드로 3세를 파문하고 샤를의 군대를 십자군으로 격상시켰다(1284년).

그러나 전쟁은 아라곤군의 강력한 공격에 샤를의 뜻대로 풀리지 않아 프랑스 함대가 아라곤 해군에 대패하고 나폴리를 봉쇄해 샤를의 아들 샤를 2세가 포로로 잡히는 등 악화일로에 빠졌다. 이에 마요르카의 왕이자 페드로 3세의 조카인 하이메 2세를 지원해 아라곤 내부 붕괴를 노리는 등 여러모로 노력했으나, 결국 육전에서도 프랑스-나폴리 연합군이 패퇴하여 샤를은 1285년 실의에 빠진 채 죽었다. 이후로도 분쟁은 계속되었으나 최종적으로 샤를 2세가 1291년 시칠리아 섬을 포기하고 나폴리 왕위만 차지하게 됨으로서 아라곤의 승리로 끝났다. 시칠리아 만종과 이로 인한 아라곤 십자군은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를 지배하던 시칠리아 왕국이 시칠리아 왕국과 나폴리 왕국으로 갈라지는 계기가 되었고 이 두 나라는 비록 동군연합 상태도 여러번 겪으나 공식적으로는 훨씬 후인 1816년에야 통일된다.

5. 국토회복운동 (레콩키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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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베리아 반도에서 기독교 왕국이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벌였던 수백 년간의 전쟁. 엘 시드 등이 활약했다. 아라곤, 카스티야-레온, 포르투갈, 나바라 등의 국가가 참가했으며 결국 아라곤과 카스티야-레온의 동군연합으로 설립된 스페인그라나다까지 쓸어버리고 국토회복운동을 완료한다. 보통 현대의 시점에서는 십자군에 포함하지 않지만 당시에는 국토회복운동에 종군하는 것도 십자군과 대등한 책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여겼다. 이때 산티아고 기사단이나 칼라트라바 기사단이 맹활약했다.

6. 동방 십자군

동유럽의 프로이센 일대에 잔존하고 있던 이교도를 상대로 한 토벌 겸 개척전쟁. 주로 튜튼 기사단이 싸웠다. 튜튼 기사단은 프로이센을 정복한 후 기사단령을 세웠고, 이후 전쟁, 영토 확장, 무역 등으로 부흥하였다. 14세기의 전성기 무렵에는 신성 로마 제국 내의 소규모 영지, 프로이센 전체, 리투아니아 일부, 라트비아에스토니아의 대부분을 점유한 발트 해의 강자로 거듭났다. 그러나 기사단을 경계한 폴란드 왕국리투아니아 대공국동군연합을 결성하였고, 이후 이들의 연합군에게 그룬발트 전투에서 무참히 박살나며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자세한 것은 튜튼 기사단국 참조.

7. 북방 십자군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작센, 튜튼 기사단, 리보니아 검우 기사단 등이 주축이 되어 스웨덴 북부의 사미족, 핀란드, 독일 북부와 엘베강 동부, 폴란드 서부와 북부,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등 발트해를 둘러싼 지역을 공격한 십자군을 말한다. 발트 십자군으로도 부르며 동방 십자군이 포함되기도 한다.

교황 첼레스티노 3세가 1193년 북방 지역의 이교도를 공격하라고 촉구한 것이 공식적인 시작이지만, 그 이전인 12세기 중반에도 이미 성전을 명분으로 한 공격이 꾸준히 계속되고 있었다. 엘베 강오데르 강 사이에 있던 슬라브족을 동방식민운동, 벤트 십자군 등의 이름으로 공격해 정복했고, 에스토니아는 1219년 덴마크 왕 발데마르 2세에게 정복당했으며, 핀란드에 살던 핀족들은 1154년에서 1249년 또는 1293년까지 거의 100년 동안 스웨덴의 공격을 받아 스웨덴 지배 하에 들어갔다. 튜튼 기사단은 1226년, 마조프셰 공작 콘라트 1세의 요청에 따라 폴란드 북부의 프루센을 공격하여 정복했고, 1230년에 튜튼 기사단국을 건국했다. 리보니아 검우 기사단은 1193년에서 1227년까지 리보니아인, 에스토니아인을 공격해 정복했고, 기사단령과 여러 주교령을 세웠다.

북방 십자군의 공격에서 유일하게 독립을 유지한 것이 리투아니아 대공국으로, 개종을 가지고 북방 십자군을 여러 차례 낚기도 했으나 폴란드와의 동군연합을 위해 결국은 완전한 가톨릭 국가로 스스로 개종했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개종하면서 궁지에 몰린 튜튼 기사단은 폴란드-리투아니아그룬발트 전투를 벌여 몰락하고 잇따른 전쟁으로 폴란드의 속국으로 전락했다. 이처럼 다른 북방십자군 원정이 13세기 말에는 종결된 것과 달리 리투아니아 십자군은 13세기 말이라는 늦은 시점에서 시작해 15세기 초까지 이어졌고, 그나마도 리투아니아의 승리로 끝났다.

러시아 정교회 국가들도 이 지역을 개종이란 명분으로 자주 침략하였다. 그 와중에 가톨릭 세력과 정교회 세력이 충돌하기도 하였다. 알렉산드르 넵스키 문서 참고.

오늘날 북유럽 하면 떠오르는 십자가 국기가 바로 이 시기에 정립된 것이다. 심지어 독일에서도 1919년과 1948년에 국기를 십자가로 바꾸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다.철십자

8. 보스니아 십자군

1235–1241년 까지 있었던 헝가리 왕국의 주도로 보스니아 독립교회를 토벌하기 위한 십자군이다. 보스니아 교회는 보고밀파 이단으로 취급 되었다.

언드라시 2세의 둘째 아들인 갈리치아의 칼만이 이끄는 헝가리군은 헝가리령이었으나 사실상 반독립 상태였던 보스니아 자치주를 공략하여 상당부분을 점령하고 이단자들을 화형에 처했다. 그렇게 전쟁에서 거의 이길 뻔 했으나 하필이면 그때 몽골군이 쳐들어오는 바람에 칼만은 급히 철수하고 보스니아 교회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모히 전투에서 칼만과 벨러 4세의 연합군은 몽골에 대패하고 헝가리 왕국은 붕괴 직전까지 몰렸다. 이후 보스니아는 정치적-종교적으로 상당한 독립과 자유를 누렸다.

9. 스미르나 십자군

후기 십자군 전쟁의 하나로 1343년~1351년 교황 클레멘스 6세 에 의해 제창된 두 차례 열린 십자군 원정의 총칭이다.

대상이 된 국가는 소아시아에서 번성한 튀르크계 국가 아이든 에미리트였다. 이 국가의 주요 해안도시인 스미르나를 목표로 했다. 당시 에게 해를 장악하고 있던 튀르크 계열 해적들의 토벌이 목적이었다.

1차 스미르나 십자군은 목표로 한 스미르나를 훌륭하게 공략했지만 도시 중심부의 적병이 모두 없어진 줄 알고 성급히 십자군 지도자들이 들어가서 의식을 치를려고 하던 와중에 숨어있던 아이딘 군병들의 기습을 받아 대거 전사하고 만다.

그러나 이 비보를 들은 교황은 새로운 원정단을 파견하고 다시 스미르나를 점령했다. 스미르나를 점령한 십자군은 밖으로 진출하지 않고 그냥 스미르나에서 웅거하면서 간간히 오는 적의 습격을 격퇴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그러던 중 1351년 교황 클레멘스 6세는 스미르나에 대한 관심을 끊었다. 그렇게 50 년 정도가 경과한 1402년 티무르 제국에 의해 스미르나는 포위되어 함락되고 만다.

10. 알렉산드리아 십자군

키프로스 왕국의 국왕 피에르가 주도한 1365년 10월에 있었던 십자군으로 정치적-종교적 목적보다는 경제적 목적의 약탈원정이었다. 키프로스 국왕 피에르 1세는 165척의 배에 다수의 키프로스 병력과 베네치아 용병, 성 요한 기사단을 대동하고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를 습격하여 도시를 함락시키고 3일간 닥치는 대로 약탈을 했다. 이때 죽은 사람만 2만명이 넘고 5000명이 노예로 붙잡혀 갔다고 한다.

물론 이 같은 공격은 맘루크 왕조에서 계속 키프로스를 위협하고 있었고 공격을 한다는 정보를 먼저 입수하고 선제 공격을 할려는 목적도 있었다. 또 알렉산드리아를 파괴하면 무역거점이 키프로스로 옮겨올 것이라는 계산도 있었다고 한다.

사실 피에르 1세는 좀 더 알렉산드리아를 오래 점령해서 이집트 공략의 근거지로 삼고자 했으나 맘루크의 지원군이 각지에서 몰려오고 가신들은 철수를 주장했기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가장 늦게 알렉산드리아에서 철수했다. 유럽의 군주들은 피에르 1세만이 진정한 십자군이었다고 칭송했다.

11. 바르바리 십자군

바르바리 해적 토벌은 중세 십자군 전쟁 이후에도 계속 있었기 때문에 이후의 싸움도 십자군 취급을 받았지만 보통 중세의 바르바리 해적 십자군은 1390년 7월 1일에서 10월 1일까지 세달간 있었던 프랑스와 제노아 연합 함대의 마흐디아 공략을 말한다.

바르바리 해적은 유럽국가들을 대상으로 계속 약탈과 해적질을 해왔기 때문에 전유럽의 어그로를 한몸에 사고 있었다. 이때 제노바 함대가 참다못해 십자군에 참가하겠다는 의사를 교황과 프랑스에 보냈고 샤를 6세는 왕족인 부르봉 공작 루이 2세를 지휘관으로 삼아 6000명의 병력을 보내 제노아 함대와 같이 튀니지 마흐디아를 공략하라고 하였다.

마흐디아를 포위 공격한 십자군은 하프스 왕조의 술탄 아부 알 아바스 아흐마드 2세와 전투를 벌였다. 도시를 포위 중인 십자군에게 바르바리측에서 왜 공격을 하냐고 묻자 프랑스-제노바군은 "신의 아들 예수를 죽인 불신자 이단자들을 처벌하려는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바르바리측은 그건 우리가 아니라 유대인들 짓이라며 웃었다.

십자군은 용맹하게 싸워 많은 무슬림 병력을 죽였으나 도시는 함락될 기미가 안보였고 질병이 돌아 보급이 어려워젔다. 결국 양측은 휴전을 하기로 하고 10년간의 휴전조약에 서명 한뒤 철수하여 십자군은 별다른 성과없이 종료되었다.

12. 대오스만 제국 십자군

오스만 제국이 성장하여 팽창함에 따라 그들을 막기 위한 전쟁도 십자군 취급을 받았다. 술탄 바예지드 1세가 1396년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기독교 연합군을 격파하기도 했는데, 이는 니코폴리스 십자군으로 불린다. 이후 1444년에 있었던 바르나 전투의 바르나 십자군, 1481년 오스만 제국이 남이탈리아를 침공한 오트란토 전투도 십자군에 포함된다. 물론 그 후의 계속된 오스만 제국의 팽창을 막기 위한 크고 작은 전투들도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당대에는 십자군과 동등하게 여겨졌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제2차 빈 공방전를 계기로 결성된 신성동맹이 벌인 '대 튀르크 전쟁(1683~1699)' 까지도 십자군으로 보기도 한다.

13. 후스파 십자군

얀 후스의 사상을 따르는 보헤미아의 후스파를 토벌하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 지기스문트 황제와 교황 마르티노 5세가 5차례에 걸쳐(1420∼1431) 보낸 십자군. 후스 전쟁이라는 이름이 더 알려져 있다. 황제와 교황은 후스파를 몰아내고 헝가리까지 아울러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에 당한 패배를 설욕하는 야망을 품었던 모양이지만, 얀 지슈카가 이끄는 후스파에게 십자군은 처참하게 털렸고 후스파는 보헤미아를 완전히 장악했으며 모라비아 등지까지 진격하게 된다. 얀 지슈카의 사망 이후에야 전장이 교착 상태에 빠졌고, 1436년 프라하 조약에서 보헤미아에서 후스파를 인정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교황과 황제와 기사들의 십자군이, 조잡한 화약 무기와 농기구를 사용하는 농민군에게 완벽하게 패배한 것은 중세의 종말을 알리는 사건 중 하나였다.


[1] 출처는 토머스 매든의 저서 <십자군> 238페이지.[2] 프랑스 남부 랑그도그루시옹(Languedoc-Roussillon)지역의 상업도시[3] 시토 수도회 출신 수도원장으로 나중에는 대주교까지 올라갔다.[4] 베지에 학살에서 20년 후에 독일 시토회 수도자가 적은 책에 나오는 말이다. 영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모두 죽여라. 주님께서 가려 내실 것이다(Kill them all. Let God sort them out.)"라고 번역되기도 하였으며, 오히려 이쪽의 번역이 더 잘 알려져 있다. 다만 두 문장 모두 결국 뜻은 같다. 누가 이단인지는 주님께서 알고 계실 테니, 일단 다 죽여서 하느님께서 심판하게 하라는 것.[5] 비슷한 주장을 한 정교회의 이단 교파가 9세기의 바오로파 및 카타리파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보고밀파다.[6] 교회로서는 중대한 사항이다. 교리의 자의적인 해석은 교회의 일체성을 훼손하기 때문. 그러니까 주류교회에서 "자의적으로" 해석한 건 문제 없지만, 카타리파가 해석한 건 문제 있다는 것이다. 교회가 시전한 자의적 해석은 제1차 니케아 공의회제2차 니케아 공의회, 그 후에도 수십 차례 시전한 공의회시리즈(...)를 참고하라.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교회가 집단으로 한 해석은 자의적이지 않고, 남프랑스와 알프스 산맥 서쪽 끝자락 지역민들이 한 해석은 자의적이니 죽어야 한다는거냐, 내로남불 아니냐 따질 수 있지만 이런 관점을 들이밀면 역사적 평가, 역사학이란 학문 자체가 의미가 없어진다.[7] 이들이 정말로 카타리파를 믿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레몽 6세도 그렇고, 오히려 이해관계로 인해 가톨릭으로부터 일방적으로 파문당한 뒤 카타리파에게 연대감을 느낀 영주들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8] 현대 프랑스-스페인 국경은 이 뮈레/뮤렛 (카탈루냐어) 전투 이후 큰 틀이 정해진 이후 머어어어나먼 훗날 16세기 루이 14세의 전쟁으로 북 세르다냐 (불어: 세르다뉴), 로세요(루시용)를 정복한 이후 현대까지 변함없이 이어졌다[9] 저 위에 4차 십자군에서 같은 기독교 왕국인 헝가리령 자라 공성 밑 약탈 이후 "더러워서 이런 막장 드라마 더 못 보겠다!"하고 때려친 인물이다. 우트르메르에서 6년간 싸우고 부친의 사망에 따라 몽포르로 돌아와 몽포르 백작이 되어 있었다.[10] 푸아티에 백작 알퐁스. 유아기에 죽은 형제들을 제외하면 4형제 중 셋째인데, 둘째형은 7차 십자군에서 전사, 본인과 큰형 루이 9세는 8차 십자군에서 병사, 동생 샤를은 다음 항목인 아라곤 십자군의 주인공이 된다. 한마디로 십자군 가족. 하지만 알비 십자군을 제외하면 결과적으로 모두 패전.[11]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서자로 정식 계승권이 없었다.[12] 슈바벤의 공작이었던 콘라딘은 아직 어렸기 때문에 독일에 있었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만프레디가 왕위에 올랐는데, 후에 오보인 것이 밝혀졌으나 왕위를 양도하지 않고 그대로 강탈했다.[13] 호엔슈타우펜 왕조는 만프레디 이전부터 신성로마제국 황위와 시칠리아 왕위를 확보한 후 이탈리아 전역 평정을 호시탐탐 노려왔다. 이에 대항한 세력이 교황을 중심으로 한 교황파(구엘프).[14] 처음엔 잉글랜드 왕 헨리 3세의 차남 에드먼드에게 제의했으나 최종적으론 샤를이 선택되었다.[15] 프리드리히 2세의 장남 하인리히는 아버지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폐위된 뒤 비참히 죽었고, 차남 콘라트 4세는 1250년 아버지가 죽자 독일왕으로서 신성 로마 제국 제위를 놓고 대립 황제들과 싸우다 4년 만에 급사했다. 콘라딘이 바로 콘라트 4세의 아들이다. 프리드리히 2세는 서자가 많았는데 만프레디와 더불어 또 다른 서자였던 엔조는 롬바르디아 동맹과의 전쟁 와중에 볼로냐에서 포로로 잡혀 감옥에서 대우는 받았지만 끝내 풀려나지 못하고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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