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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 국왕 · 양시칠리아 국왕 | }}}}}}}}} |
Costanza II | ||
가문 | 호엔슈타우펜 가문 | |
출생 | 1249년 | |
시칠리아 왕국 팔레르모 | ||
사망 | 1302년 4월 9일 (향년 52~53세) | |
아라곤 왕국 바르셀로나 | ||
재위 기간 | 아라곤 왕국 왕비 | 1276년 ~ 1285년 11월 |
시칠리아 왕국 국왕 | 1282년 ~ 1285년 11월 | |
아버지 | 만프레디 | |
어머니 | 사보이아의 베아트리체 | |
남편 | 페드로 3세 | |
자녀 | 알리폰소 3세, 차이메 2세, 이사벨, 프리드리히 3세, 비올란테, 페드로 | |
종교 | 로마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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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라곤 왕국의 왕비, 시칠리아 왕국의 제14대 여왕. 남편 페드로 3세와 함께 시칠리아의 공동 왕이 되어 나라를 현명하게 이끌었다. 남편이 사망한 후 아라곤으로 돌아가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말년에 수녀원에 들어가 여생을 보냈다. 시칠리아 왕국의 마지막 호엔슈타우펜 왕조 국왕이다.2. 생애
1249년경 시칠리아 국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시칠리아 국왕 프리드리히 2세의 사생아 만프레디와 사보이아 백작 아메데오 4세의 딸이자 살루초 변경백 만프레디 3세의 미망인인 사보이아의 베아트리체의 외동딸로 출생했다. 이복 형제로 베아트리체, 엔리코, 아졸리노, 프리드리히가 있었다. 1258년 시칠리아 왕위에 오른 뒤 교황청과 심각한 갈등을 벌이던 만프레디는 결혼 동맹을 맺어줄 상대를 물색한 끝에 아라곤 왕국의 후계자인 페드로를 점 찍고 사절단을 아라곤 왕국의 수도 바르셀로나로 파견했다. 아라곤 국왕 하이메 1세는 시칠리아 왕국과 손잡으면 지중해로의 진출에 큰 도움이 되고 아라곤 왕위를 위협하는 프랑스 왕국에 공동으로 대처할 수 있으리라 판단하고 만프레디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교황 우르바노 4세는 시칠리아와 아라곤의 동맹을 교황령에 대한 정치적 위협으로 여기고 하이메 1세에게 페드로와 쿠스탄차의 결혼을 금지한다고 통보했다. 하지만 하이메 1세는 이를 무시하고 1262년 봄 쿠스탄차를 아라곤 궁정으로 초대했다. 그녀는 가족과 작별 인사를 나눈 뒤 함선에 몸을 싣고 바다로 떠났고, 1263년 6월 13일 몽펠리에에서 페드로 왕자와 만나 결혼했다. 페드로는 지참금으로써 아내에게 제노아 시와 피레네 산맥에 있는 콜리우레의 고대 왕궁 등 여러 재산을 넘겼다. 부부는 곧 서로에게 깊은 애정을 품었다. 페드로는 용모가 뛰어나고 성격이 온화하고 총명한 아내를 깊이 사랑했고 정치적 문제가 있을 때마다 아내의 조언을 들었다. 쿠스탄차 역시 자상한 페드로를 소중하게 여겼다.
1263년, 교황 클레멘스 4세는 만프레디를 3번째로 파문한 뒤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의 남동생인 앙주의 샤를에게 만프레디를 토벌하면 시칠리아 왕으로 인정하겠다고 제안했다. 샤를은 이를 받아들이고 3만 대군을 소집한 뒤 이탈리아로 진군해 1266년 2월 26일 베네벤토 전투에서 시칠리아군을 격파하고 만프레디를 전사시켰다. 이후 시칠리아에 입성한 샤를은 카를루 1세로서 시칠리아 왕에 즉위했고, 만프레디의 유족을 지하감옥에 가두고 만프레디의 추종자들을 탄압했다. 쿠스탄차는 시칠리아에서 망명한 호엔슈타우펜 가문 구성원 및 지지자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 1268년 10월 29일 콘라딘이 카를루 1세에게 나폴리에서 공개 처형된 후, 그녀는 반 카를루 세력을 끌어들여서 장차 카를루 1세를 시칠리아에서 타도할 기회를 노렸다.
1276년 7월 27일 하이메 1세가 사망한 뒤, 페드로 왕자가 페드로 3세로서 왕위에 올랐고 쿠스탄차 역시 아라곤 왕비가 되었다. 페드로 3세는 왕비의 조언에 따라 시칠리아의 앙주 왕조에 대항하는 봉기를 지원했다. 여기에 카를루 1세가 베네치아 공화국과 손잡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도모하려 드는 것에 위협을 느낀 동로마 황제 미하일 8세도 아라곤 왕국에 군자금을 지원해 함대를 조직하게 하고, 시칠리아에 공작원들을 잠입시켜 반란을 부추겼다. 가뜩이나 군사 원정을 반복하면서 인적, 물적 수탈을 심하게 벌이는 카를루 1세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시칠리아인들은 봉기를 일으키기로 마음먹었다.
1282년 3월 30일, 시칠리아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 프랑스 병사와 민간인들이 학살당하고 시칠리아 전체가 한 달 만에 반란군의 수중에 넘어갔다.(시칠리아의 만종) 반란 세력은 카를루 1세의 보복을 막기 위해 페드로 3세에게 시칠리아 왕이 되어달라고 요청했다. 페드로 3세는 즉시 쿠스탄차의 친척인 안티오키아의 콘라드와 함께 시칠리아로 출발해 1282년 8월 28일에 상륙한 뒤 아내 쿠스탄차의 권리를 빌려 먼저 시칠리아 왕위에 올랐다. 카를루 1세는 잔여 세력을 이끌고 나폴리에서 시칠리아 왕을 자처하며 아라곤군과 전쟁을 벌였고, 교황 마르티노 4세는 페드로 3세를 파문하고 베네치아 공화국과 함께 카를루 1세와 연합했다. 하지만 페드로 3세는 카를루 1세-교황령-베네치아 연합군을 상대로 한치도 밀리지 않고 시칠리아를 사수했다.
한편, 쿠스탄차는 남편과 함께 시칠리아로 가지 않고 아라곤을 대리 통치했다. 그러다가 1283년 3월 남편으로부터 자녀들과 함께 시칠리아로 와달라는 전갈을 받자 바르셀로나 항구로 갔다. 그동안 자신들을 잘 다스려준 왕비를 존경한 수많은 귀족과 평민들이 항구로 몰려와서 왕비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며 신이 그녀를 보살펴 주기를 기원했다. 1283년 4월 팔레르모에 상륙한 쿠스탄차는 민중의 환대를 받고 얼마 후 시칠리아 여왕으로 즉위했다. 페드로 3세는 그녀를 시칠리아에 남겨둔 뒤 아라곤으로 돌아가서 본토를 침략할 준비에 착수하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3세를 저지했다.
쿠스탄차는 적극적인 대외 활동을 전개했다. 아풀리아, 캄파니아, 칼라브리아 등 시칠리아 왕국의 지배를 받던 남부 이탈리아 도시들을 최대한 포섭하려 노력했다. 칼라브리아의 몇몇 도시들이 카를루 1세의 폭정으로부터 구원해달라고 청하자 지체없이 군대를 파견해 이들의 독립을 도왔다. 또한 유능한 제독인 라우리아(Lauria)의 루지에로를 시칠리아 함대 총사령관으로 삼아 적 함대가 시칠리아에 접근하는 것을 막게 했다. 루지에로 제독은 나폴리 만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카를루 1세와 필리프 3세 휘하 프랑스 함대를 격멸하고 카를루 1세의 아들 카를로(훗날 카를로 2세)를 생포했다.
호엔슈타우펜 추종자들은 콘라딘을 처형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카를로를 처형하자고 주장했지만, 쿠스탄차는 거부했다. 그 대신, 그녀는 카를루 1세에게 "아들을 돌려받고 싶으면 나의 이복 누이인 베아트리체를 보내라"고 요구했고, 카를루 1세는 받아들였다. 쿠스탄차가 베아트리체 외의 다른 형제들을 돌려보내라고 요구하지 않은 까닭은 기록이 미비해 불확실하지만, 그들이 돌아오면 남편의 시칠리아 왕위를 위협할 수도 있다고 여겼기에 돌려보내라고 요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 베아트리체가 돌려보내졌지만, 카를로 왕자는 1285년 카를루 1세가 사망한 뒤 몸값이 지불되지 않았기에 옥고를 계속 치러야 했다.
1285년 11월 11일, 페드로 3세가 사망하고 장남 알폰소 3세가 왕위에 올랐다. 이 소식을 접한 쿠스탄차는 시칠리아 왕위에서 물러나 아라곤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녀는 아라곤으로 가기 전에 먼저 로마로 가서 새 교황 호노리오 4세를 만나 양자의 화해를 요청했다. 호노리오 4세는 그녀의 제의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이면서, 프랑스 왕국과 아라곤 왕국이 화평을 이룰 수 있도록 돕겠다고 약속했다. 그 후 바르셀로나 궁정에 돌아온 쿠스탄차는 1291년 알폰소 3세가 사망한 뒤 차남 하이메 2세가 왕위에 올랐을 때 대관식에 참석했다.
1296년, 하이메 2세는 교황청과 협상한 끝에 시칠리아 왕위를 나폴리 왕국에 돌려주기로 했다. 그러나 시칠리아인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몇 년간 시칠리아의 총독을 맡고 있던 쿠스탄차의 또다른 아들 페데리코를 시칠리아 왕으로 추대했다. 그는 증조부 프리드리히 2세와 자신과의 연관성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을 프리드리히 3세로 칭했다. 하이메 2세는 이 소식에 분노해 나폴리 왕국을 지원하여 시칠리아 왕국을 토벌하려 했다. 이에 자식들끼리 내전을 벌이는 것을 보다못한 쿠스탄차가 개입했다. 그녀는 1297년 전쟁을 끝내기 위해 자신의 딸인 비올란테를 훗날의 나폴리 왕 로베르토와 결혼시키기로 했다.
결혼이 성사되면서 나폴리와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의 갈등이 종식된 후, 쿠스탄차는 바르셀로나에 있는 성 프란체스코 수녀원으로 들어가 수녀로서 여생을 보내다가 1302년 4월 9일에 사망했다. 그녀의 유해는 수녀원 공동 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835년 수녀원이 철거된 후 바르셀로나 대성당의 주 제단 왼편에 이장되었다.
3. 가족 관계
- 페드로 3세(1239 ~ 1285): 아라곤 왕국의 10대 국왕, 시칠리아 왕국의 14대 국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