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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colbgcolor=#005098><colcolor=#fff> 포르투갈 왕국 보르고냐 왕조 제6대 국왕 디니스 Dinis I | |
이름 | 디니스 아폰수 Dinis Afonso |
출생 | 1261년 10월 9일 포르투갈 왕국 리스본 |
사망 | 1325년 1월 7일 (향년 63세) 포르투갈 왕국 산타렝 |
재위 | 포르투갈 왕국의 왕 |
1279년 2월 6일 ~ 1325년 1월 7일 | |
배우자 | 아라곤의 이사벨 (1288년 결혼) |
자녀 | 콘스탄사, 아폰수 4세 |
아버지 | 아폰수 3세 |
어머니 | 카스티야의 베아트리스 |
형제 | 브랑카, 아폰수, 산샤, 마리아, 비센테, 페르난두 |
종교 | 가톨릭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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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르투갈 왕국 보르고냐 왕조 제6대 국왕. 국가의 체계를 재정비하고 농업과 상업 등 산업을 대대적으로 육성했으며, 문화를 진흥하고 갈리시아어와 포르투갈어를 포르투갈 왕국의 공식 언어로 정하는 등 여러 업적을 세웠다. 별칭은 농민왕(O Lavrador) 혹은 음유시인왕(O Rei-Trovador)이다.2. 생애
1261년 10월 9일 포르투갈 왕국의 수도 리스본에서 포르투갈 국왕 아폰수 3세와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0세의 딸인 베아트리스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브랑카, 아폰수, 산샤, 마리아, 비센테, 페르난두가 있었다. 아폰수 3세는 베아트리스와 결혼하기 전에 볼로뉴 여백작 마틸다를 아내로 두었다가 1253년 카스티야 왕국과 결혼동맹을 맺기로 합의한 뒤 마틸다의 결혼을 무효로 처리하고 교황청의 허락을 얻으려 했다. 그러나 교황 알렉산데르 4세는 이를 거부하고 베아트리스와 헤어지라고 요구했고, 아폰수 3세가 이를 듣지 않자 아폰수와 베아트리스 사이에서 태어난 디니스를 사생아로 간주했다. 디니스는 1263년이 되어서야 다음 교황인 우르바노 4세에 의해 합법적인 아이로 인정받았다.그는 일찍부터 국정에 참여했고 17세 때인 1279년 2월 16일에 아버지가 사망한 뒤 왕위에 올랐다. 초창기엔 어머니 베아트리스가 주재하고 궁재 주앙 페레스 드 아보임 등이 참여한 섭정평의회가 통치를 대행했다. 그녀는 카스티야 왕국과의 우호관계를 굳건히 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디니스 1세는 얼마 안 가서 리스본에서 코르테스를 소집한 뒤 어머니의 간섭을 배제하고 친정을 시작하겠다고 선언했다. 베아트리스는 이에 반발했고, 카스티야 국왕이자 베아트리스의 아버지인 알폰소 10세도 그녀를 지지하면서 디니스 1세에게 바다호스에서 대면하자고 권고했다. 그러나 디니스 1세는 이를 거부하고 베아트리스를 카스티야 왕국으로 돌려보냈다. 이리하여 포르투갈과 카스티야 간의 관계가 악화되었지만, 1282년 카스티야 왕자 산초가 알폰소 10세를 상대로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키면서, 카스티야 왕국은 몇 년간 포르투갈 왕국에 별다른 간섭을 하지 못했다.
1281년, 동생 아폰수가 형의 즉위는 부당하다며 반기를 들었다. 그는 형이 교회로부터 사생아로 간주되었다가 1263년에서야 합법적인 아이로 인정받은 데 비해 자신은 처음부터 교회의 축복을 받았으니 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별다른 호응을 받지 못했고, 디니스 1세가 군대를 동원해 동생이 영주로 군림하던 라메구, 비제우, 세이야를 회수한 뒤 아폰수가 머물고 있던 비데로 진군하자 아폰수는 카스티야 왕국으로 달아났다.
디니스 1세는 카스티야 왕국과의 우호 관계를 단절한 뒤 아라곤 왕국과 결혼 동맹을 맺기로 하고, 아라곤 국왕 페드로 3세에게 그의 딸 이사벨과 결혼하고 싶다고 알렸다. 당시 페드로 3세는 시칠리아의 만종 사건을 이용해 카를루 1세를 밀어내고 시칠리아 왕국을 장악한 뒤 나폴리 왕국을 세운 카를루 1세, 그의 조카인 프랑스 왕국의 필리프 3세와 대규모 전쟁을 벌이고 있던 터라, 포르투갈 왕국의 이같은 제안에 반색했다.
1282년 2월 11일에 바르셀로나의 산타 아가타 예배당에서 디니스 1세의 대리인의 주재하에 결혼식이 거행되었고, 한 달 후에 결혼 조약이 비준되었다. 이에 따르면, 이사벨은 12개의 성과 3개의 별장, 토레스 베드라스 농장 등 여러 영지를 지참금으로 받을 것이었다. 이후 이사벨은 카스티야 왕국의 훼방을 피할 수 있는 적절한 때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1282년 6월 26일 포르투갈에 입국한 뒤 트란코수에서 디니스 1세와 만나 결혼식을 거행했다.
한편, 디니스 1세는 아버지가 치세 말기에 성직자들의 특권을 회수하고 교회에 돌아가는 수입 일부를 국고로 돌린 일 때문에 교황청과 심각한 갈등을 벌이다가 파문당하고 나라 전체에 성무 금지령이 내려진 상황을 수습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1288년에 즉위한 교황 니콜라오 4세에게 "포르투갈에 대한 교황과 교회의 이익을 보호하겠다"고 맹세했고, 교황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포르투갈 왕국에 대한 성무 금지령을 해제하고 아폰수 3세에게 내린 파문을 취소했다.
1291년, 디니스 1세는 카스티야 국왕 산초 4세와 대면해 자신의 딸 콘스탄사와 산초 4세의 아들 페르난도를 약혼시키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산초 4세는 1294년에 마음을 바꿔 포르투갈 왕국과의 약혼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프랑스 국왕 필리프 5세의 딸인 블랑슈와 아들의 결혼을 추진했다. 그러던 1295년 4월 산초 4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페르난도 왕자가 카스티야 국왕 페르난도 4세로 등극했다. 그해 여름, 페르난도 4세의 모친이며 섭정을 맡은 마리아 왕비는 시우다드 로드리구에서 디니스 1세와 대면해 콘스탄스와 페르난도의 결혼을 예정대로 집행하고 페르난도 4세의 누이인 베아트리스를 디니스 1세의 아들 아폰수와 결혼시키기로 합의했다.
1296년, 카스티야 왕자 후안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카스티야 왕국이 혼란에 빠졌다. 후안 왕자로부터 자신을 도와주면 상당한 영토를 넘겨주겠다는 제안을 받은 디니스 1세는 카스티야 왕국으로 쳐들어가 두에로 강을 따라 진군하며 각지를 약탈했다. 이에 마리아 왕비는 디니스 1세에게 알폰소 데 라 세르다와 후안 왕자에 대한 지원을 계속한다면 전년도에 맺은 협정을 파기하겠다고 경고했다. 디니스 1세는 더 이상 반군을 돕지 않기로 하고 지금까지 점령한 영토에 관료를 임명한 뒤 본국에 돌아갔다. 포르투갈군이 끝내 오지 않자, 후안 왕자는 레온으로 철수했고 알폰소 데 라 세르다는 아라곤 왕국으로 돌아갔다.
1297년 9월 12일, 디니스 1세는 알카니케스 마을에서 마리아 왕비와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캄푸마요르, 올리벤사, 오우겔라, 산 펠리시아스 데 로스 갈레고스 등 알폰소 10세가 탈취했던 포르투갈 영토를 돌려주고, 알메이다와 카스텔로 봄, 카스텔로 메호르, 케스텔로 로드리고, 몬포르테, 사부갈, 사스트레스 비야 마요르 일대도 포르투갈 국왕에게 넘겨주기로 했다. 그러면서 양국이 영토 분쟁을 벌이는 것을 그만두고, 두 왕국의 고위 귀족과 성직자들은 서로를 지원하고 자신들의 영지와 특권을 지키는 데 서로 협력하기로 합의했다. 이 협약은 두 왕국의 군주뿐만 아니라 카스티야 도시 길드, 카스티야와 레온 귀족들에 의해 비준되었다. 이렇게 정해진 양국의 국경은 현대까지 거의 변경되지 않았기에, 유럽 대륙에서 가장 오래 지속되는 국경 중 하나가 되었다. 이와 동시에, 페르난도 4세와 콘스탄사의 결혼이 다시 확인되었고, 포르투갈의 왕위 후계자 아폰수와 페르난도 4세의 누이인 베아트리스의 약혼도 확인되었다. 그리고 디니스 1세는 마리아 왕비를 돕기 위해 300명의 기사로 구성된 군대를 파견하기로 했다.
1298년, 후안 왕자와의 전쟁이 장기전으로 치닫는 것을 우려한 마리아 왕비는 토로에서 디니스 1세와 재차 만나서 후안 왕자와의 전쟁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디니스 1세는 이를 거절하고 페르난도 4세와 후안 왕자의 화해를 중재하겠다고 제안했다. 후안 왕자는 점령한 영토에서 주권을 행사할 수 있지만, 그가 사망한 후에는 그의 영토가 페르난도 4세에게 귀속되기로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야돌리드에 모인 카스티야 코르테스는 마리아 왕비로부터 뇌물을 받고 디니스 1세의 제안을 거부하기로 결의했다. 1300년 3월, 마리아 왕비는 시우다드 로드리고에서 디니스 1세와 다시 만났다. 그녀는 이 자리에서 페르난도 4세와 콘스탄사의 결혼을 수행하기 위해 교황을 매수할 상당한 자금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디니스 1세는 그 말에 따르기로 하고 상당량의 자금을 보내줬다.
1303년 초, 디니스 1세는 포르투갈의 왕위 후계자 아폰수 4세와 페르난도 4세의 누이인 베아트리스의 결혼을 진행시키는 것을 논의하기 위해 카스티야 국왕 페르난도 4세와 바다호스에서 만났다. 이때 페르난도 4세는 디니스 1세가 일전에 가져간 영토 일부를 되돌려주기를 희망했지만, 디니스 1세가 단지 "그대가 위급한 상황이 되면 도와주겠다"고 할 뿐 영토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자 매우 실망했다. 그래도 결혼 계약은 예정대로 진행하기로 하고, 1309년 아폰수 4세와 베아트리스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이리하여 포르투갈 왕국은 카스티야 왕국과의 결혼 동맹을 재개했다.
1307년,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가 교황청을 강하게 압박한 끝에 성전 기사단을 이단으로 간주한다는 선고를 얻어내고 그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이후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에 존재하던 수백 개의 성전 기사단 지부들도 프랑스 본부의 뒤를 따라 각국의 군주들에 의해 해체되었지만, 디니스 1세는 성전 기사단을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1312년에 명칭을 그리스도 기사단(Ordem Militar de Cristo)으로 바꿔서 무슬림과의 전쟁에서 계속 활약하게 했다.
디니스 1세는 카스티야 왕국과 일시적으로 전쟁을 벌이거나 무슬림과의 소규모 전쟁을 치른 것 외에는 내치에 전념했다. 그는 하층 계급을 귀족들의 횡포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일련의 법을 반포했다. 이 법들은 훗날 아폰수 5세가 정리한 <아폰수 법전(Code Afonsino)>의 일부가 되었다. 또한 리스본을 왕궁이 영구적으로 머물 장소로 확정하고 포르투갈의 경제 및 상업 중심지로 키우고자 적극적으로 개발했다.
디니스 1세가 가장 힘을 기울인 사안은 바로 귀족과 성직자들의 과도한 권력을 억누르는 것이었다. 1283년, 그는 어린 나이 때 자신의 이름으로 이뤄진 모든 기부를 "미숙함으로 인해 잘 생각하지 못하고 실행했으니 취소한다"고 선언하고 여러 수도원에 바쳤던 기부금을 회수했으며, 이사벨 왕비 등 가족들이 바친 기부금 역시 자신의 허락을 받지 않고 행했으니 무효라며 회수했다. 이듬해인 1284년에는 귀족들이 받은 특권의 정당성을 확인하기 위한 조사를 대대적으로 실시한 뒤 많은 귀족이 정당하지 않은 방식으로 특권을 누리며 백성들을 억압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주장하며 부당하게 취득한 것으로 간주된 특권들을 도로 회수했다.
1285년 포르투갈의 대표적인 대귀족이었던 곤살루 가르시아 드 소자가 사망했다. 곤살루는 사망 당시 아내 레오노르 아폰수와 조카 콘스탄사 멘드스에게 막대한 유산을 남겼다. 그러나 다른 귀족들이 이에 개입해 혈연 또는 지연 관계를 들먹이며 자신들도 유산 일부를 물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로렌코 수아르스 드 발라다레스는 콘스탄차의 여동생인 마리아 멘데스 2세 데 소사와 결혼하여 딸 하나를 얻은 것을 빌미삼아 상당한 유산을 넘기라고 요구했다.
이로 인해 발생한 상속 분쟁이 조속히 해결되지 않자, 그들은 디니스 1세에게 분쟁을 중재해 달라고 요청했다. 디니스 1세는 1286년 곤살루 가르시아의 재산에 대한 조사를 명령한 뒤 1288년 기마랑이스에서 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코르테스를 소집해 좀더 면밀한 조사를 벌이자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곤살루 가르시아 백작의 재산에 대한 조사는 1291년까지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백작이 불법적으로 취득한 재산 상당수가 국고로 회수되었다. 디니스 1세는 이후에도 1301년, 1303 ~ 1304년, 1307 ~ 1311년에 귀족들의 특권과 재산에 대한 조사를 실시해 그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했다. 이와 더불어 교회와 수도회가 토지를 매입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제정했으며, 나중에는 성직자들이 사적인 이익을 챙기기 위해 재산을 취득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디니스 1세는 국가 산업을 진흥하는 데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농업을 장려하고 토지를 재분배했으며, 여러 농촌 공동체를 설립해 가능한 한 많은 농민들이 안정된 기반을 갖고 농사에 전념할 수 있게 했다. 특히 경작되지 않은 땅을 소유한 땅이 없던 20 ~ 30쌍의 농민 부부들에게 나눠줬다. 이 부부들은 왕, 지방의 영주 또는 토지 기증자에게 매년 수확량의 일부를 납부하는 조건으로 경작할 수 있었다. 또한 해안 모래의 침입으로부터 농경지를 보호하고자 피냘 드 레이리아(Pinhal de Leiria: 레이리아 소나무숲)를 조성하고 이 나무들을 벌채하는 것을 금지했다.
디니스 1세의 농업 장려 정책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포르투갈은 국내 소비량을 충분히 커버하고 막대한 잉여 생산물을 축적했다. 디니스 1세는 카탈루냐, 브르타뉴, 플랑드르, 영국의 여러 항구 도시들과 상업 관계를 수립하고 이 잉여 생산물을 팔아서 막대한 재보를 확보했다. 당시 포르투갈 왕국의 주요 수출품은 곡물 외에도 와인, 올리브 오일, 소금, 생선, 말린 과일 등이 있었다. 또한 구리, 은, 주석, 및 철 광산 개발이 활발하게 이뤄졌으며, 포르투갈 상인들은 잉글랜드, 프랑스 등지에서 특권을 수여받고 무역 활동을 자유롭게 이어갔다. 또한 상품을 효과적으로 운송하기 위해 조선소를 건립하고 우수한 선박 기술자들을 초빙해 선박들을 건조하게 했으며, 해적으로부터 해안선과 선박들을 보호하기 위한 해군도 창설되었다. 초대 해군 제독은 제노바 출신의 마누엘 페사냐였다.
디니스 1세는 문화 진흥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수백 곡에 달하는 노래를 작곡해 '음유시인 왕(O Rei-Trovador)'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는데, 그중 137곡이 현재까지 전해진다. 1290년에는 갈리시아어와 포르투갈어를 포르투갈 왕국의 공식 언어로 정하고 작가들에게 해당 언어로 문학 작품을 쓰도록 장려했으며, 문학과 과학 분야의 작품들을 포르투갈어로 번역하게 했다. 그리고 <Scientiae thesaurus mirabilis(놀라운 지식의 보물)>을 반포해 대학 설립과 주교구들의 대학 후원을 장려했다. 이에 따라 여러 대학이 설립되었는데, 그 중 레이리아 시에 설립된 대학이 1308년 코임브라로 이전한 후 현재의 '코임브라 대학교'로 이어졌다.
디니스 1세는 이렇듯 많은 업적을 세웠지만, 남편과 아버지로서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이사벨 왕비와 자식들을 홀대했고, 여러 정부와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들을 편애했다. 특히 알돈카 드 소자라는 정부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폰수 산체스를 매우 총애해, 왕궁에서 함께 살게 하고 알부케르크 영주로 삼았으며, 1312년 궁재에 선임했다. 일찌감치 왕위 계승자로 지명되었던 아폰수 4세는 이러다 아버지가 아폰수 산체스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할까 두려워했다.
급기야 1321년, 아폰수 4세는 아버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고, 자신들의 특권의 정당성을 지속적으로 조사하는 디니스 1세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대다수 귀족들의 호응을 얻어냈다. 반란군은 포르투갈 북부를 장악하고 코임브라를 거점으로 삼았다. 이사벨 왕비는 코임브라로 가서 아들에게 아버지와 화해하라고 권고했지만 거부당했다. 이후 디니스 1세가 군대를 이끌고 코임브라로 진군해 아폰수 4세와 몬데로 강 다리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자, 이사벨 왕비는 나귀를 탄 채 다리를 오가며 양 진영에 찾아가 골육상쟁을 벌이지 말아달라고 간곡히 호소했다. 이사벨의 간곡한 호소에 마음이 움직인 디니스 1세와 아폰수 4세는 1322년 5월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다.
그 후 경미한 심장마비 또는 뇌졸중으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어 리스본에서 요양 생활을 하던 디니스 1세는 1323년 카스티야의 왕비 마리아로부터 펠리페 왕자의 반란을 진압해달라는 요청을 받자 아폰수 4세에게 리스본의 주둔한 정예병을 맡기고 카스티야로 출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폰수 4세는 즉각 국경으로 진격했고, 바다호스를 포위 공격하고 있던 펠리페는 포위를 풀고 세비야로 철수했다. 그 후 아폰수 4세는 "이 참에 지금 가지고 있는 군대를 이끌고 리스본으로 가서 왕이 되시라"는 측근들의 권유에 넘어가 군대를 돌려 리스본으로 진군하면서, 자신을 왕위 후계자로 확정하고 아폰수 산체스를 추방하기 위한 코르테스를 소집하지 않으면 전쟁을 재개할 수밖에 없다고 협박하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디니스 1세는 아들의 요청에 따라 1323년 10월 리스본에서 코르테스를 소집하고 결론이 날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아들의 바람과는 달리 일반적인 주제를 놓고 논의하게 하면서 시간을 끌다가 막판에 아폰수 왕자가 왕위를 차지하려 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코르테스는 왕자의 요구는 부당하며 왕은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결의했다. 당시 산타렝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아폰수 4세는 이 소식을 듣고 분개해 군대를 이끌고 리스본으로의 행군을 재개했다.
아들이 쳐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디니스 1세 역시 군대를 이끌고 출진했다. 양자는 리스본 교외의 알바라데 평원에서 대치했다. 이제 아버지와 아들의 전투가 임박했을 때, 이사벨 왕비가 노새를 타고 수도사와 함께 나타나 평원 한 가운데에 서서 골육상쟁을 벌이는 것을 다시 한 번 만류했다. 이에 모든 전사가 싸울 생각을 버리고 국왕과 왕자에게 화해를 강력하게 권고했고, 두 사람은 전쟁을 강행할 도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화해하기로 했다. 그 후 디니스 1세와 아폰수 4세는 1324년에 평화 협약을 맺고 내전을 종식했다.
1325년 1월 7일, 디니스 1세는 산타렝에서 사망했다. 사후 오디벨라스[1]의 성 디니스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이후 아폰수 4세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포르투갈 왕위에 올랐다.
3. 가족 관계
- 아라곤의 이사벨(1271 ~ 1336): 아라곤 국왕 페드로 3세의 딸.
- 사생아
- 페드루 아폰수(1287 ~ 1354): 바르셀로나 백작
- 아폰수 산체스(1289 ~ 1329): 알부케르크 영주, 아폰수 4세와 왕위를 놓고 내전을 여러차례 벌임.
- 마리아 아폰수(1290 또는 1301 ~ 1319 또는 1340 이후): 히브랄레온 영주.
- 주앙 아폰수(1280 또는 1295 ~ 1325): 로우사의 영주.
- 페르난도 산체스(1289/1290 ~ 1325): 빌라 노바 드 미란다 두 코르보의 영주.
- 마리아 아폰수(1302 ~ 1320): 성 디니스 수도원의 수녀.
[1] 리스본 근교의 위성도시. 리스본 지하철 황색선의 종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