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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3 09:12:10

아폰수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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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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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포르투갈의 공영방송국(RTP)이 포르투갈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포르투갈인 100명'을 선정. 단, 중복 투표가 포함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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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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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5098><colcolor=#fff> 포르투갈 왕국 보르고냐 왕조 제5대 국왕
아폰수 3세
Afonso III
파일:afonsoiii-01.jpg
출생 1210년 5월 5일
포르투갈 왕국 코임브라
사망 1279년 2월 16일 (향년 68세)
포르투갈 왕국 알코바사
재위 포르투갈 왕국의 국왕
1248년 1월 4일 ~ 1279년 2월 16일
배우자 불로뉴 여백작 마틸다 2세 (1238년 결혼 / 1253년 이혼)
카스티야의 베아트리스 (1253년 결혼)
자녀 마르팀 아폰수 시쇼로(사생아), 우라카 아폰수(사생아), 브랑카, 디니스 1세, 아폰수, 산샤
아버지 아폰수 2세
어머니 카스티야의 우라카
형제 산슈 2세, 레오노르, 페르난두
종교 가톨릭

1. 개요2. 생애
2.1. 재위2.2. 서거
3.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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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르투갈 왕국 보르고냐 왕조 5대 국왕.

2. 생애

1210년 5월 5일 포르투갈 왕국의 수도 코임브라에서 포르투갈 국왕 아폰수 2세카스티야 왕국의 국왕 알폰소 8세의 딸 우라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제로 산슈 2세, 레오노르, 페르난두가 있었다. 18살 때 프랑스 국왕 루이 8세와 결혼한 이모 블랑슈의 초빙을 받아 파리 궁정에서 지냈고, 루이 9세가 벌인 생트 공방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1238년 볼로뉴 여백작 마틸다와 결혼하여 볼로뉴 백작을 역임했다.

2.1. 재위

1245년 7월 24일과 8월 1일,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리옹 공의회에서 성직자들과 교회를 부당하게 대하고 그릇된 결혼을 감행한 산슈 2세를 폐위한다고 선언하고 아폰수 3세를 포르투갈의 새 국왕으로 세우겠다고 선포했다. 아폰수 3세는 교황의 뜻을 따르기로 마음먹고, 파리에서 포르투갈 귀족, 성직자 대표들과 접견한 뒤 그들의 특권과 관습을 보장하겠다고 맹세했다. 이후 자신의 영지를 프랑스 왕국에 반납하고 포르투갈로 진격해 1245년 연말에 리스본에 도착했다. 산타렝, 알렌케르, 토레스 노바스, 토마르, 알코바사, 레이리아 등은 아폰수 3세에게 충성을 서약했고, 산슈 2세는 오직 코임브라와 코빌량, 구아르다 등지에서만 통치를 행사할 수 있었다.

산슈 2세는 이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카스티야 왕국에 구원을 요청했고, 카스티야 국왕 페르난도 3세의 장남 알폰소가 1246년 초 포르투갈 왕국으로 진군해 레이리아 일대를 파괴하고 1247년 1월 13일 아폰수 3세와 레이리아 인근에서 맞붙어 승리했다. 하지만 산슈 2세의 입지는 갈수록 위축되었고, 급기야 멘시아 왕비가 라이문도 비에가스 데 포르토카레이루라는 귀족에게 납치되는 사태까지 벌어지자 전의를 상실해 1247년 12월 4일 알폰소 왕자가 이끄는 카스티야군의 호위를 받으며 카스티야 왕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그로부터 1달 만인 1248년 1월 4일 톨레도에서 사망했다.

이리하여 형을 꺾고 포르투갈 국왕이 된 아폰수 3세는 내치에 전념했다. 1254년 레이리아에서 코르테스를 소집해 특권층의 횡포로부터 중산층 상인과 중소 지주들을 보호하는 법안을 반포했으며, 교회에 많은 특권을 부여해 성직자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애썼다. 또한 내전으로 흐트러진 행정 체계를 빠르게 재조직하고 도시 개발 사업을 진두지휘했다. 특히 1255년 포르투갈 왕국의 수도를 코임브라에서 리스본으로 이전시켰다.

아폰수 3세는 왕국을 안정시키는 데 성공한 뒤 레콩키스타를 재개해 1249년 파루를 공략하고 알가르브 일대를 왕국에 편입했다. 그러나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0세가 알가르브 일대의 주권이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면서 전쟁이 촉발되었다. 1253년, 알폰소 10세는 포르투갈 왕국으로 친정해 알가르베 일대를 공략했다. 압도적인 전력을 갖춘 카스티야 왕국군을 상대로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아폰수 3세는 알폰소 10세와 협상한 끝에 알폰소 10세의 딸 베아트리스와 결혼하고 알가르베를 베아트리스에게 줄 지참금으로 삼겠다는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그 후 마틸다와의 결혼을 무효로 처리하고 교황청의 허락을 받으려 했지만, 교황 알렉산데르 4세는 이를 거부하고 베아트리스와 헤어지라고 요구했다. 아폰수 3세는 이에 불복해 교황청과 첨예한 갈등을 벌였다. 1259년 마틸다가 사망하면서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소되었지만, 베아트리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디니스 1세는 1263년까지 합법적인 자식으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다음 교황인 우르바노 4세에 의해 합법성을 인정받았다.

1267년, 아폰수 3세는 알폰소 10세와 바다호스에서 만나서 새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카스티야 왕국은 알가르베 일대를 포르투갈에 돌려주고 포르투갈과 상호 방위 협약을 맺는 데가로 아라세나, 모우라, 세르파, 아로체 등 과디아나 강 동쪽의 포르투갈 영토를 가지기로 했다. 이 협약은 카스티야 왕국과 포르투갈 왕국의 경계를 최초로 정한 것이기도 했다.

1268년, 브라가 대주교, 코임브라 대주교, 포르투 대주교를 비롯한 성직자들이 아폰수 3세가 십일조 금지, 사원 건축을 위한 자금을 유용, 성벽 공사에 성직자들을 동원한 것, 주교의 승인 없이 성직자를 투옥 및 처형한 것, 대주교와 주교에 대한 살인 위협을 가한 것, 유대인을 고위직에 임명시킨 것 등 43가지의 죄목을 저질렀다고 교황청에 고발했다. 교황 클레멘스 4세는 죄질이 중하다고 보고 아폰수 3세를 파문했다. 포르투갈 성직자들이 힘을 합쳐 왕을 고발한 것은 아폰수 3세가 초기와는 달리 성직자들을 통제하려 든 것에 불만을 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탁발 수도회,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등 외국에서 온 수도자들을 우대한 것에 깊은 반감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아폰수 3세는 이에 맞서 코르테스를 소집해 자신의 정당성을 인정해달라고 요청했고, 성, 궁전, 성벽, 해자 및 기타 군사 시설의 건설, 수리에 무상으로 일할 의무를 폐지한 것에 호감을 품고 있었던 평민들은 왕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1274년 1월, 산타렘에서 왕에 대한 비난을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가 소집되어 몇 달간의 조사 기간을 거친 끝에 왕의 정당성을 공인했다. 그러나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위원회의 결의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아폰수 3세에 대한 파문을 재차 선고했다.

2.2. 서거

1279년 2월 16일, 아폰수 3세가 알코바사에서 사망했다. 그는 죽기 직전에 교회에 대한 순종을 맹세하고 자신에게 영지를 빼앗긴 성직자들에게 사과하고 영지를 되돌려주겠다고 밝혔다. 이에 알카코사 수도원장은 파문을 해제하고 그를 그곳에 안장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사후 아들 디니스 1세가 포르투갈 왕국의 새 국왕에 등극했다.

3. 가족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