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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루 카에타누 | 페드루 누네스 | 안토니우 비에이라 | 플로르벨라 이스팡카 | 페르디난드 마젤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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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우 다마지우 |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 | 마누엘 1세 | 주제 사라마구 | 아라곤의 이사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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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리나 에우페미아 | 카를루스 파레지스 | 주제 소크라트스 |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 | 루이 드 카발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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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테스 지 알메이다 | 알베르투 주앙 자르딩 | 알마다 네그레이루스 | 바스쿠 곤살베스 | 알바루 시자 비에이라 | |||||
56위 | 57위 | 58위 | 59위 | 60위 | |||||
벨미로 데 아제비로 | 수사 마르틴스 | 마리아 두 카르모 세아브라 | 안토니우 안드라지 | 카를루스 1세 | |||||
61위 | 62위 | 63위 | 64위 | 65위 | |||||
마리자 | 비제우의 엘레노르 | 호자 모타 | 안토니우 테이셰이라 레벨루 | 아폰수 3세 | |||||
66위 | 67위 | 68위 | 69위 | 70위 | |||||
비토르 바이아 | 바르톨로메우 디아스 | 오텔루 사라이바 드 카르발류 |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 허만 호세 | |||||
71위 | 72위 | 73위 | 74위 | 75위 | |||||
마리아 2세 | 카를루스 로페스 | 아폰수 코스타 | 폰테스 페레이라 드 멜루 | 가구 코티뉴 | |||||
76위 | 77위 | 78위 | 79위 | 80위 | |||||
히카르두 아라우주 페레이라 | 마누엘 소브리뉴 시몽이스 | 마누에우 마리아 바르보자 드 보카주 | 헬리오 페스타나 | 조르주 삼파이우 | |||||
81위 | 82위 | 83위 | 84위 | 85위 | |||||
안토니우 샹팔리모 | 안토니우 로부 안투느스 | 질 비센트 | 마리아 헬레나 비에이라 다 실바 | 미겔 토르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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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위 | 92위 | 93위 | 94위 | 95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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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위 | 97위 | 98위 | 99위 | 100위 | |||||
알메이다 가헤트 | 안토니우 젠틸 마르틴스 | 안토니우 바리아슈에스 | 파울라 레고 | 마리아 조앙 피레스 | |||||
※ 출처 | |||||||||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colbgcolor=#005098><colcolor=#fff> 포르투갈 왕국 브라간사 왕조 초대 국왕 주앙 4세 João IV | |
출생 | 1604년 3월 19일 |
포르투갈 왕국 빌라 비소자의 빌라 비소자 후작 궁전 | |
사망 | 1656년 11월 6일 (향년 52세) |
포르투갈 왕국 리스본 히베이라 궁전 | |
재위 | 포르투갈 왕국의 국왕 |
1640년 12월 1일 ~ 1656년 11월 6일 | |
배우자 | 루이자 데 구스만 (1633년 결혼) |
자녀 | 테오도시우, 조아나, 카타리나, 아폰수 6세, 페드루 2세 등 |
아버지 | 브라간사 공작 테오도시우 2세 |
어머니 | 아나 데 벨라스코 이 히론 |
형제 | 두아르트, 카탈리나, 알렉산드레 |
종교 | 가톨릭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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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르투갈 왕국 브라간사 왕조 초대 국왕. 별칭은 복원왕(o Restaurador)이다.2. 생애
1604년 3월 19일 포르투갈의 빌라 비소자의 빌라비소자 후작 궁전에서 제7대 브라간사 공작 테오도시우 2세와 5대 프리아스 공작이자 7대 히론 백작 겸 카스티야 군사령관 후안 페르난데스 데 발레스코의 딸인 아나 데 벨라스코 이 히론의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로 두아르트[1], 카탈리나[2], 알렉산드레[3]가 있었다. 그는 포르투갈 국왕 마누엘 1세의 증손자였으며, 포르투갈 최고의 대귀족 집안으로 손꼽히는 브라간사 가문의 일원으로서 유복한 삶을 살았다. 1630년 아버지 테오도시우 2세가 정신병에 시달리다 사망하자 주앙 2세로서 제8대 브라간사 공작, 제5대 기마랑이스 공작, 제3대 바르셀루스 공작, 제7대 빌라 비소자 후작 등 아버지의 직위를 물려받았다.주앙은 음악에 깊은 애정을 품고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이탈리아의 작곡가 조반니 피에를루이지 다 팔레스트리나의 강력한 팬으로, 키릴로 프랑코 주교의 필라스트리나에 대한 비판을 반박하는 글을 출간했다. 그는 이 글에서 전통에 따르지 않는 것을 비판하는 주장에 "현대 음악은 오래된 음악과 같은 힘을 가지고 있으며, 전통을 벗어나는 것은 음악이나 작곡가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또한 성공회의 가톨릭 박해를 피해 포르투갈로 망명한 아일랜드 출신의 작곡가 로베르토 토르나르(Roberto Tornar)에게 6만 레이(réi)에 달하는 막대한 급료를 지불했다. 전임자의 급여는 10,000~20,000레이에 불과했던 것과 견주어보면 실로 융숭한 대접을 한 것이었다. 여기에 더해, 6곡의 음악 작품을 스스로 작곡하여 출간했다고 전해지나, <Anima mea turbata est valde(내 영혼이 심히 괴로워)>와 <Vivo ego dicit Dominus(삶을 두고 여호와께 맹세하노니)> 등 2편 만이 현재 전해지고 있다.
1632년, 주앙은 제8대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 후안 마누엘 페레스 데 구스만의 딸인 루이사 데 구스만과 결혼했다. 그녀의 집안은 대대로 스페인 왕실의 중용을 받았으며, 할아버지 알폰소 페레스 데 구스만 이 소토마요르는 무적함대 사령관으로서 펠리페 2세의 잉글랜드 원정을 지휘했던 인물이었다. 당시 스페인 당국은 포르투갈을 완전히 흡수하기 위해 포르투갈 대귀족들을 잘 대접하면서 그들을 스페인 왕실 및 명문 귀족들과 혼인 관계를 맺게 해 스페인에 동화시키는 정책을 추진했다. 특히 주앙의 할아버지인 브라간사 6대 공작 주앙 1세는 1580년 스페인 국왕으로서 처음으로 포르투갈 국왕을 겸임한 펠리페 2세로부터 황금 양털 목걸이를 수여받고 영지 내에 치안판사를 임의로 선임하고 여행자들을 보호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등 갖가지 특혜를 받았으며, 아들들 역시 여러 요직과 특권을 부여받고 스페인의 귀족 여성들과 결혼했다. 주앙이 루이자와 결혼한 것 역시 그의 충성심을 보장받기 위한 스페인 당국의 회유책이었다.
주앙 역시 초기엔 스페인에 반기를 들 생각 따위 전혀 가지지 않았다. 1633년 8월 동생 알렉산드레와 함께 에보라에 있는 페레이라 후작을 찾아갔을 때, 시민들은 국왕을 맞이하는 것처럼 환영했다. 이에 그는 정색하며 호위병들을 시켜 시민들을 침묵시키게 했다. 1638년에는 스페인 당국의 요청에 따라 동생 두아르트를 네덜란드 독립 전쟁에 투입시켜서 스페인군을 위해 싸우게 했다. 이렇듯 그는 명백한 친 스페인 인사였으며, 광대한 영지를 경영하다가 시간이 날 때마다 음악을 즐기는 삶에 만족했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은 그가 귀족에서 만족하며 살아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포르투갈 대귀족들은 펠리페 2세 시절엔 무제한적인 자치를 향유하며 스페인의 막강한 군사력을 배경삼아 정치적, 경제적 이득을 향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등극한 펠리페 3세와 펠리페 4세가 포르투갈 귀족들의 특권을 하나둘씩 회수하며 스페인 당국의 통제하에 두려 하자 귀족들은 차츰 불만을 품었다. 특히 펠리페 4세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은 올리바레스 백작 가스파르 데 구스만이 카스티야 뿐만 아니라 아라곤, 이탈리아, 포르투갈 등 스페인이 다스리는 다른 영토에서도 직접세를 거두고 스페인 법률을 그대로 적용하는 정책을 실시하면서, 이러한 불만은 고조되었다.
여기에 1609년부터 재개된 네덜란드 독립 전쟁으로 인해 포르투갈 상선이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해군에 나포되고 포르투갈이 식민지배하고 있던 브라질, 앙골라, 상투메 등지가 공격당하는데도 스페인 당국이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하자, 식민지 경영을 통해 수익을 올리고 있던 상인 계급 역시 불만을 품었다. 게다가 네덜란드와의 전쟁에 이어 30년 전쟁까지 뛰어든 스페인이 모자라는 병력을 충당하기 위해 포르투갈 장정들을 강제로 끌고 가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지자, 스페인을 위해 희생당하고 싶지 않은 민중들의 독립 열기가 갈수록 뜨거워졌다.
1634년 사보이아의 마르게리타[4]가 포르투갈의 여성 부왕으로 부임하고 포르투갈 출신이며 올리베리아 백작의 시종인 미겔 데 바스콘셀로스가 국무 장관으로 부임한뒤 올리베리아 백작의 지시에 따라 포르투갈 교회 자산을 조사한 뒤 일부를 몰수하기 시작하자, 스페인의 지배에 별다른 불만이 없던 성직자들까지 반발했다. 특히 오래 전부터 압스부르고 왕조와 마찰을 벌였던 예수회 수도자들은 민중을 선동해 스페인에 대한 반감을 증폭시켰다.
1637년 8월, 경제 위기와 가뭄으로 곤경에 처한 포르투갈 민중들은 포도주와 육류에 대한 새로운 세금이 부과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에보라에서 대규모 폭동을 일으켰다. 폭동은 순식간에 남부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예수회 수도자들은 반란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포르투갈 대귀족들 역시 자기 영지를 지키는 데 급급할 뿐 반란 진압에 지극히 소극적이었다. 이에 펠리페 4세는 토벌대를 파견해 폭동을 진압한 뒤 1638년 주앙을 비롯한 대다수 귀족들을 마드리드로 소환해 그들의 수동성을 질타했다. 이후 포르투갈의 통치 체제를 개혁하기 위한 코르테스가 마드리드에서 소집되었다. 그 결과 포르투갈 평의회는 미겔 드 바스콘셀루스 등 올리베리아 백작에게 충실한 포르투갈 비서들이 지배하는 리스본과 마드리드의 2개 위원회로 대체되었고, 카스티야인들이 포르투갈 정계에 관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스페인 당국의 간섭이 갈수록 강화되면서 자치권을 온전히 누리기 어려워지고, 잉글랜드와 네덜란드의 연이은 공격으로 인해 식민지 경영이 어려워지고, 민심이 갈수록 흉흉해져 자칫했다간 스페인의 앞잡이로 간주되어 처단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감돌자, 포르투갈 대귀족들은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고 국왕을 선출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주앙에게 왕이 되어달라고 설득했다. 주앙은 괜히 반란을 일으켰다가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고 네덜란드 전선에 가 있는 동생 두아르트가 해를 입을까 우려해 극구 사양했다. 그러나 대귀족들은 포르투갈의 이전 왕조인 아비스 왕조와 깊은 혈연 관계가 있는[5] 브라간사 가문만이 포르투갈 국왕이 될 수 있다며 계속 설득했다. 일설에 따르면, 주앙이 여전히 고민하고 있을 때 아내 루이자가 이렇게 말하며 왕이 되라고 권고했다고 한다.
"평생을 공작 부인으로 살다가 죽느니 단 하루라도 왕비가 되고 싶습니다."
루이자가 정말로 이런 발언을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녀와 그녀의 가문이 주앙 4세의 포르투갈 국왕 등극에 적극적으로 지지한 것은 분명하다. 스페인 당국이 그를 회유하기 위해 짝지어준 아내마저 이렇게 나오자, 주앙은 마침내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했다. 그는 비밀리에 추종자들을 리스본의 브라간사 공작 궁전에 불러들인 뒤 봉기를 일으킬 기회를 노렸다. 그러던 1640년, 포르투갈에 주둔하고 있던 스페인군 상당수가 카탈루냐의 반란 진압에 투입되었다. 이리하여 스페인의 포르투갈에 대한 통제가 느슨해지자, 주앙은 거사를 단행하기로 마음먹었다.
1640년 12월 1일, 포르투갈 독립 전쟁의 시작으로써 미겔 드 알메이다, 조르즈 드 멜루, 안톤 드 아르마다, 주앙 핀투 브룩 등이 이끄는 사병들이 잘 무장한 채 히베이라 궁전으로 쳐들어가서 포르투갈 국무장관 미겔 드 바스콘셀루스를 체포해 그 자리에서 살해한 뒤 히베리아 궁 창밖으로 집어던졌다. 이후 포르투갈의 여성 부왕으로 군림하던 마르게리타 디 사보이아를 체포하여 별채에 감금했고, 리스본에 주둔하고 있던 스페인군을 모조리 무장해제시켰다. 당시 빌라 비소자 궁전에서 거병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주앙은 12월 3일에 거사가 성공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즉시 리스본으로 향하면서 전국에 거사를 알리는 전령을 파견했다.
1640년 12월 7일, 주앙은 리스본에 도착한 뒤 외국에 포르투갈 왕국이 복원되었음을 알리는 사절들과 국경과 항구를 수호할 장군들을 잇따라 임명하고 군대를 모집했다. 이후 12월 15일에 리스본의 히베이라 궁전 옆의 대형 극장에서 수많은 시민의 환호를 받으며 포르투갈 국왕 주앙 4세로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그는 거사를 성사시킨 동지들을 요직에 선임하고 귀족, 성직자 및 상인들의 전통적 권리, 자유 및 특권을 보장하겠으며, 포르투갈의 주권을 사수하기 위해 사력을 다해 싸우겠다고 맹세했다. 이후 주앙은 마르게리타 디 사보이아를 추방하고 군사를 이끌어본 경험이 있는 10명의 귀족들로 구성된 전쟁위원회를 설립해 스페인의 침공에 대비하게 했다.
스페인 정부는 주앙이 반란을 일으킨 뒤 스스로 포르투갈 국왕을 칭했다는 소식을 듣고 격분했다. 펠리페 4세는 주앙 4세와 그를 추대한 일당을 반역자로 선포하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3세에게 주앙의 동생이며 네덜란드 전선에 있는 두아르트를 당장 체포해달라고 요청했다. 두아르트는 형이 거사를 단행했다는 소식을 듣고 포르투갈에 돌아가려 했다가 피사우 요새에서 체포된 뒤 오스트리아 남부의 그라츠로 이송되었다. 주앙은 동생의 석방을 위해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에게 중재를 요청하는 등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결국 두아르트는 밀라노로 이송된 뒤 스포르시스코 성에 갇혀 지내다가 1649년 9월 3일에 옥사했다.
그러나 스페인 정부는 네덜란드 독립 전쟁과 30년 전쟁, 카탈루냐의 반란 진압을 위해 사방에 군대를 파견했던 터라 토벌군을 조기에 파견하지 못했다. 단지 7,800명 가량의 병력만 국경지대에 배치하고 반란군이 스페인 영내로 침입하는 것을 저지하기만 했다. 1641년 7월 리스본에서 주앙 4세를 암살하고 마르게리타를 복위시키려는 음모가 친 스페인 성향의 귀족, 성직자들에 의해 기획되었지만, 그해 8월 29일에 음모자 몇 명이 주앙 4세에게 밀고하면서 들통났다. 이후 음모를 꾸민 자들을 모조리 처형했고, 음모를 알고도 고발하지 않은 자들 역시 음모에 가담한 것으로 간주하고 숙청했다.
주앙은 스페인이 포르투갈에 별다른 공세를 취하지 못하는 틈을 타 스페인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프랑스, 네덜란드에 접근했다. 프랑스 재상 리슐리외 추기경은 1641년 6월 1일 파리에서 포르투갈 사절과 협의한 끝에 포르투갈이 스페인의 영토와 함대를 공격하는 대가로 그들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협약을 파리에서 체결했다. 여기에 네덜란드도 1641년 6월 앞으로는 포르투갈의 영토를 공격하지 않고 무역을 재개하며, 스페인에 대항하는 포르투갈을 지원하겠다는 내용의 헤이그 협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포르투갈 식민지에 대한 네덜란드의 공격은 이후에도 꾸준히 이어졌다. 한편 포르투갈의 전통적인 우호국인 잉글랜드는 당시 잉글랜드 내전에 휘말렸지만, 찰스 1세는 1642년 1월 말에 포르투갈과 휴전 협약을 맺고 그들이 잉글랜드 상선을 고용하여 보급품을 확보하는 것을 용인했다.
1642년, 포르투갈군은 시에라 데 가타를 침공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이에 스페인군이 반격에 나서 국경 너머의 포르투갈 마을 몇 개를 약탈했다. 1643~1644년에 포르투갈인들이 카세레스를 공격해 약탈을 자행한 뒤 바다호스를 공격했으나 공략에 실패했으며, 갈리시아를 습격해 살바티에라 데 미뇨 요새를 점령했다. 국경을 수비해야 할 스페인군은 재정난에 시달리는 정부로부터 별다른 봉급을 받지 못해 기강이 해이해질 대로 해이해져 적을 막으려 하기는 커녕 국경 지대의 백성들을 수탈하기만 했다. 이에 스페인 민간인들이 자발적으로 자경대를 결성해 포르투갈군에 맞서 싸웠다.
1644년 나폴리에서 포르투갈 전선으로 파견된 토레쿠사 후작 카를로 안드레아 카라치올로는 새로 모집한 용병대에 기존 병력을 규합하여 6,000~7,000명의 보병과 2,100~2,5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스페인 바다호스 지방의 몬티주로 쳐들어온 포르투갈 지휘관 마티아스 드 알부케르크의 7,000 포르투갈군과 맞붙었다. 처음에는 스페인 기병대가 포르투갈 측면을 성공적으로 요격하면서 포르투갈군이 밀리는 듯했지만, 마티아스는 군대를 성공적으로 수습한 뒤 승리감에 빠져 방심하고 있는 스페인군에게 역습을 가해 강 건너편으로 패주시켰다. 이날 포르투갈군은 900명의 사상자를 낸 반면에 스페인군은 3,000명의 사상자를 입었다. 하지만 마티아스는 스페인 정부가 대대적인 반격을 가할 것을 우려해 본국으로 철수했다.
스페인 당국은 마티아스의 예상대로 패전에 격노해 군대를 대대적으로 집결해 포르투갈 침공을 준비했다. 1644년 11월 토레쿠사 후작은 보병 12,000명, 기병 2,600명, 포병 20문, 박격포 2문을 이끌고 바다호스에서 국경을 넘어 과디아나 강을 건너 캄포마이오르로 진격했다. 그들은 엘바스에 도착한 뒤 8일 동안 포위 공격을 감행했지만 수비대의 강력한 저항으로 큰 손실만 입고 본국으로 퇴각했다. 1645년엔 포르투갈군이 발렌시아 데 알칸타라를 공략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살바토라 두 익스트리모를 공략하려는 스페인군의 시도 역시 실패했다. 1648년 포르투갈인들이 스페인군의 만연한 기강 해이를 이용해 엑스트레마두라를 잇따라 공격해 심각한 약탈을 자행했고, 스페인 자경대가 이에 맞서 포르투갈 영내로 쳐들어가 잔학행위를 벌였다. 포르투갈군은 1649년과 1650년에 재차 스페인 영내를 습격해 스페인군과의 접전에서 여러 차례 승리했다.
한편, 포르투갈 식민지에 대한 네덜란드의 침략 행위로 골머리를 앓았다. 그는 네덜란드와 손잡고 스페인을 협공하기를 희망했기에 네덜란드와 휴전 협약을 맺고 가급적 우호 관계를 맺고 싶었지만, 네덜란드는 포르투갈령 브라질과 앙골라 상당수를 강점하는 등 적대행위를 이어갔다. 게다가 주앙 페르난데스 비에이라 등 현지에서 식민지를 다스리던 포르투갈 유지들은 그동안 네덜란드가 빼앗아간 요새, 노예 등을 반환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격분해 자체적으로 군대를 일으켜 네덜란드 총독부를 무너뜨리고 네덜란드군에 맞서 싸웠다. 주앙은 한동안 반란을 은밀히 지원하면서도 네덜란드 정부가 이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면서 30년 전쟁이 종식되었다. 이후 사절을 회담장에 보내 포르투갈의 독립을 인정받으려 했지만, 스페인의 거센 반발과 포르투갈이 전쟁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여긴 프랑스와 네덜란드 측의 무관심으로 인해 무산되었다. 또한 주앙은 네덜란드의 지원을 얻는 대가로 배상금을 지불하고 네덜란드가 상실한 브라질과 앙골라 영토를 돌려준다는 내용의 헤이그 협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주앙 페르난데스 비에이라는 헤이그 협약을 무시하고 네덜란드와의 전쟁을 이어갔다.
주앙은 식민지 개척자들이 정부의 통제에 따라주지 않아서 생긴 문제라고 변명하며 브라질을 네덜란드에 판매할 뜻을 내비쳤지만, 네덜란드는 이를 묵살하고 포르투갈 대사를 추방했다. 이에 주앙은 프랑스 당국에 포르투갈 본토를 오를레앙 공작 가스통 장 바티스트의 섭정에 맡기고 자신은 브라질과 아조레스 제도에서 왕으로 군림하며, 오를레앙 공작과 자신의 딸간의 결혼을 거행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지만, 쥘 마자랭은 오를레앙 공작의 권세가 지나치게 강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거부했다.
이렇듯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지원을 받기 힘들어지고 영국은 내전으로 인해 포르투갈을 도울 여력이 없자, 스페인의 예상되는 대대적인 공세로부터 나라를 지킬 가망이 없다고 여기고 테르세이라 섬으로 수도를 이전하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다행히도 프랑스와 스페인간의 전쟁이 발발하면서 스페인의 관심이 피레네 산맥 쪽으로 쏠린 덕분에 당분간 안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후 1649년 2월 19일 과라라페스 전투에서 주앙 페르난드스 비에이라가 이끄는 브라질 현지 포르투갈군이 네덜란드군을 격파하고 브라질을 완전히 탈환했다.
1649년, 예수회 수도자이자 외교관인 안토니우 비에이라가 네덜란드의 서인도 회사를 본뜬 브라질상업일반회사(Companhia Geral do Comércio do Brasil)를 설립하여 상인들의 무역 거래를 통제하고 네덜란드의 지속적인 침략으로부터 식민지를 지켜내자고 주장했다. 그동안 정부의 간섭 없이 자유롭게 무역 활동을 수행하던 상인과 식민지 포르투갈인들은 반발했고 성무성에서도 반대 입장을 밝혔지만,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회사 설립을 명령했다. 이후 1649년 10월 14일 회사에 소속된 첫번째 연대가 리스본을 출항해 히우지자네이루에 상륙한 후 브라질의 경비와 치안을 담당했으며, 회사에 소속된 36척의 함대가 해상 무역로 경비를 담당했다.
1654년, 영국-네덜란드 전쟁을 벌이고 있던 잉글랜드 정부와 접촉했다. 당시 잉글랜드의 독재자 올리버 크롬웰은 스튜어트 왕실을 일부 수용한 포르투갈에게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했지만, 포르투갈 역시 네덜란드를 적대하는 것을 보고 그들과 연합할 필요성을 인식했다. 포르투갈 역시 네덜란드 함대에 대적할 거대 함선을 제작하려면 영국의 협조가 필요했다. 그 결과 양자는 상호 방위 및 무역 협정을 체결했다. 이 소식을 접한 네덜란드는 적도선 이북을 항해하는 모든 포르투갈 함선을 격침시키겠다는 분노에 찬 서한을 발송했고, 포르투갈 내부에서는 언젠가 대대적인 네덜란드의 침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하지만 포르투갈에겐 다행히도, 네덜란드는 잉글랜드와 평화 협약을 체결한 뒤에도 발트해에서 스웨덴과의 해상 분쟁에 신경쓰느라 수년간 포르투갈에 큰 위협을 가하지 못했다.
당초 왕위에 오른 뒤 장남 테오도시우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테오도시우가 1653년 19세의 나이에 요절해버리자, 리스본에서 코르테스를 소집한 뒤 3남 아폰수 6세를 왕위 후계자로 지명했다. 하지만 아폰수는 정신병에 걸려 있었고, 그는 아들과 왕국의 미래를 근심하다가 1656년 11월 6일 통풍 및 결석병에 시달리다 히베이라 궁전에서 5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리하여 아폰수 6세가 왕위에 올랐고, 루이자 왕비가 아들을 대신해 국정을 이끌었다. 그러나 1668년 4남 페드루 2세가 정변을 일으켜 형을 유폐시킨 뒤 섭정을 맡았고, 1683년 형의 뒤를 이어 국왕이 되었다.
3. 가족
- 구즈만의 루이자(1613 ~ 1666): 스페인 귀족 후안 마누엘 페레즈 데 구즈만(1579 ~ 1636)의 딸
- 테오도시우(1634 ~ 1653): 왕세자
- 안나(1635)
- 주아나(1635 ~ 1653)
- 브라간사의 카타리나(1638 ~ 1705): 영국 찰스 2세의 왕비, 자녀 없음
- 마누엘(1640)
- 아폰수 6세(1643 ~ 1683): 왕위 승계
- 페드루 2세(1648 ~ 1706): 왕위 승계
- 사생아
- 브라간사의 마리아(1644 ~ 16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