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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5 05:57:01

예수회

파일:예수회 상징.svg
예수회의 문장

1. 개요2. 영신수련과 예수회의 교육3. 역사
3.1. 초창기3.2. 엘리트 교육
4. 선교
4.1. 남아메리카 선교4.2. 동아시아 선교
4.2.1. 중국에서4.2.2. 일본에서4.2.3. 베트남에서4.2.4. 한국에서
4.3. 근황
5. 예수회 성당의 예술6. 예수회 소속의 유명 수도자7. 관련 창작물8. 음모론 관련9. 기타10. 관련 문서11.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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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MAJOREM DEI GLORIAM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예수회의 공식 표어

1. 개요

가톨릭의 남자 수도회이다. 교황청 직속으로, 교구에 소속되지 않는다. 이 수도회 회원을 영어로는 제수이트(Jesuit)라고 하는데, 연원상 스페인인들이 중심이 되어 창설·발전시켰다.[1]

예수회는 회원들의 인격 완성과 이웃 봉사, 그리고 하느님에게 더 큰 영광을 드리는 일을 중요한 목표로 삼고 있으며 창립자인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의 기도와 영적체험을 체계적으로 서술한 저서 "영신수련(靈神修鍊,Spiritual Exercises)"이 이러한 목표를 위한 예수회원들의 수련과 기도훈련의 지침서이다.

역사적으로 예수회는 가톨릭종교개혁개신교의 도전에 부딪쳤을 때 그들을 돌파하는 선봉에 선 대항종교개혁의 상징과도 같은 단체였다.[2] 종교적 자기 반성과 엄격한 복종을 요구하는 조직을 강조하는 쇄신을 통해 가톨릭이 당면했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또한 근세에서 근대까지 아시아남미 지역에 대한 선교에 큰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도 특기할만하다.

2. 영신수련과 예수회의 교육

영신수련(靈神修鍊) 개념은, 이것을 통해 가난하고 겸손한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전적인 자기 헌신에서 나오는 영적이며 인간적인 태도를 말한다. 예수회의 기본정신은 창립자의 정신에 따라 회원 각자의 인격완성과 종교·교육·문화·사업을 통하여 높은 도덕심과 인내, 소명(召命)에 따르는 생활을 하도록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회원은 기도와 고행을 통하여 하느님의 능력을 받고 예수님처럼 봉사하며 살아가려고 노력하여야 한다.[3]

그렇기 때문에 다른 수도회와 달리 예수회는 초기에 일반 교육사업을 매우 강조했다. 1547년 최초의 예수회 대학을 설립한 이래 전세계 100여개 국가에 진출해 226개의 종합대학과 단과대학을 세웠다. 한국에는 서강대학교광주가톨릭대학교가 있고, 미국에는 보스턴 칼리지, 조지타운 대학교[4], 로욜라 대학교[5], 포덤 대학교[6], 세인트루이스 대학교, 시애틀 대학교 등이 있으며, 일본에는 사립 3대 명문인 소케이조치의 일원인 조치대학(소피아 대학교)이 예수회에 의해 설립됐다. 이것은 예수회가 선교활동을 하면서 신학·철학·문학 ·과학에 밝은 선교사들을 각지에 파견하며 교육사업에 힘썼기 때문이다.

예수회의 교육은 서양 지성사에 한 획을 그은 천재들을 배출해 낸 것으로 유명한데, 대표적인 예로는 예수회 계열 학교인 라 플레슈(La Flèche) 출신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르네 데카르트. 많은 학자들이 거론해 알다시피, 데카르트는 서양 지성사에 한 획을 긋다 못해 서양 지성의 방향 자체를 전환해버린 경이로운 천재다. 물론 데카르트는 라 플레슈에서 배웠던 것들을 상당부분 부정했지만, 그는 라 플레슈에서 배운 학문에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라 플레슈의 교사들이 당대 최고 수준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말은 실제로도 사실이었다.

예수회가 가톨릭 계열이라서 보수적이고 교조적인 단체였다고 보면 이는 상당 부분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예수회의 교육을 교조적이라고 평가하는 학자도 있지만, 그 반대로 예수회의 교육을 매우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학문의 장이었다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7] 두 의견 모두 무시할 수는 없지만, 단 하나 확실한 것은 예수회의 교사 양성 교육이 현대 학제의 사범대학만큼은 못하지만 거의 그에 준하는 정도의 체계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교육 '체계'라고는 찾아보기 힘들던 근세 당시에는 매우 획기적인 것이었고, 그 결과 예수회의 체계화된 교육은 근세에 한 획을 긋는 수많은 학자들을 배출할 수 있었다.

3. 역사

근세 유럽 지성사학자 휴 트레버-로퍼의 평에 따르자면 '근세 가톨릭 반격의 기동 타격대(Shock-troops of Counterreformation, 대항종교개혁 특공대)'. 기동성을 중시해 왔기에 '하느님해병대'라는 별명이 있다. 사실 창시자부터가 군인 출신이다.

3.1. 초창기

1534년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co Xavier) 등과 함께 파리에서 창설했던 가톨릭 모임이 그 기원으로, 1540년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정식으로 인가받으며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었다.

16세기 유럽에서는 그리스도교의 분열이 일어나 개신교가톨릭 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가톨릭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하면서 프로테스탄트들의 활동과 교세가 활발하게 번져갔으며 마르틴 루터장 칼뱅의 등장으로 가톨릭의 교세는 위축되기에 이르렀다. 예수회는 이러한 가톨릭의 위기를 배경으로 탄생하였다. 어찌보면 스페인이 종교개혁의 위기 속에 가톨릭을 잃지 않았던 건 이 예수회 운동 덕분이기도 하다. 루터와 칼뱅의 교리와 가톨릭의 허점을 노린 지적들이 파고들 틈을 막아버렸으니.

이냐시오는 군인으로 활동하다가 부상을 입어 치료하는 과정에서 깊은 신앙체험을 하고 가톨릭에 몰입하게 되었다. 군인의 엄격한 기풍에 걸맞게 회원들은 군대제도를 모방한 엄격한 규율을 중심으로 양성되었다. 이에 맞춰 예수회는 굳건한 결합력을 자랑했으며, 반 종교개혁 운동과 유럽 이외 지역의 선교에 앞장섰다. 이냐시오 본인을 비롯하여 2, 3대 총장 모두 스페인 출신이었고, 스페인 왕실의 비호를 적극적으로 받은 만큼 초기 예수회는 전투적이고 팽창적인 스페인 가톨릭 신앙의 영향력이 짙었다.

예수회는 초기부터 "교황이 원하시면 어디든지 간다."는 자체 최종서원의 모토 답게 아시아와 아메리카의 선교에서 눈부신 교두보의 역할을 담당했다. 스페인에서 시작하여 유럽 전역은 물론 아시아와 아메리카 현지에서 현지인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학교와 의료 및 봉사를 위한 병원 등을 적극적으로 운영하며 지역 현실과 문화를 알고 거기에 적응하며 선교를 펼쳐 지역현실 파악에 더딘 유럽교회나 교황청과 갈등이 생기기도 하였다.

예수회가 탄생한 역사적 배경 자체가, 마르틴 루터가 불 지핀 종교개혁의 불길에 안일하게 대응한 교황청과는 달리 스페인이나 북이탈리아, 플랑드르 지방의 지역 교회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가톨릭의 신앙적 혁신을 추구했던 것이다. 또한 예수회가 군대적 규율에 기반하여 교황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수직적인 형태를 가졌다고 하나, 이는 수도회의 행동적 특징일 뿐이다.

이냐시오 데 로욜라를 비롯한 예수회 초기의 신앙적 지도자들은 인문주의적 교육을 받으며 스페인이나 파리의 신비주의적 신앙관을 이어 받았기 때문에 개인의 양심을 중요시했다. 또한 미사뿐만 아니라 사적인 고행과 성찰, 명상을 통한 개인적인 신학적 체험에 중점을 두는 등 르네상스의 신학적 조류에 큰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교황청과의 노선 차이가 역사적으로 눈에 띄는 편이다. 애초에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의 대표 저서이자, 예수회 양성 과정의 핵심이자 꽃인 "영신수련"에서도 이냐시오 본인은 "이러한 (신앙적 각성) 과정은 이를 체험하는 각 개인의 성격, 배경, 심성, 성향에 맞추어 적용 해야 한다"고 말했을 만큼 이성적이고, 지성에 기반한 믿음을 중시하는 신앙관을 가지고 있다.

3.2. 엘리트 교육

이냐시오 데 로욜라 본인부터 귀족 가문의 인문주의적 교육을 받은 상당한 지적 엘리트였고, 예수회 내부에서도 교황청에서는 억압한 에라스무스의 인문주의 신학관의 영향력이 상당히 컸던 만큼 예수회는 교육 활동, 그것도 당대 유럽 귀족과 군주들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한 엘리트 교육에 집중하여 짦은 세월에 지리적으로는 개신교가 장악한 독일이나 동유럽의 영토 속에서 가톨릭 교회가 반격을 가할 수 있는 교두보 확보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심지어 엘리자베스 1세 시절 이후 철저하게 반가톨릭 정서가 뿌리 박은 영국에서도 여러 귀족 가문의 교육을 담당했으며, 적지 않은 수의 예수회 선교사들이 지역 가톨릭 귀족들과 음모를 꾸며 반 왕실 음모 계획에 가담하는 등, 근세 유럽에서 가톨릭교회가 개신교의 공세를 막아내고 플랑드르, 보헤미아, 폴란드 등의 영토를 수복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이 때문에 현재까지 영국에서는 예수회의 이미지가 그닥 좋지는 않다.

실제로 폴란드프랑스의 예수회는 당시 국왕들의 가정교사로 개신교 탄압을 부추겼고, 루이 14세의 퐁텐블로 칙령은 예수회 사제가 초안을 작성했다. 이후 위그노들이 영국네덜란드, 독일로 쫓겨나면서 예수회에 대한 적대감정을 가졌고 개신교가 우세한 북유럽 전체에 퍼져나가서 혐오감과 악명이 퍼졌다.

실제로 국교회로 갈아탄 잉글랜드와 그 잉글랜드의 지배 아래 있는 아일랜드에서 가톨릭의 영향력을 수복하기 위해 예수회 수사와 사제가 지속적으로 파견되었다.

명예혁명의 원인이 된 찰스 2세, 제임스 2세의 가톨릭 용인 정책 과정에서도 대륙에서 예수회 사제들이 많이 들어와서 영국국교회와 그보다 한층 더 반 가톨릭적인 청교도들에겐 공공의 적이었다. 청교도 혁명과 왕정 복고 과정에서 청교도들이 다시 신대륙으로 이주하고 나서 미국에서도 예수회에 대한 감정이 당연히 좋지 않았고, 지금까지 그러하다.

가톨릭 내부에서도 예수회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거나 질투를 한 역사가 있는데 일단 수도회 호칭을 예수회라 칭한 점으로 인해 다른 수도회에서 크게 이의를 제기했다고 한다.[8] 초창기 교황 바오로 3세가 창립에서부터 전례 없이 전폭 지지했으며, 무엇보다 내부에선 수직적 위계 구조로 이루어져 있고 교황이외의 다른 권위는 무시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예수회는 다른 가톨릭 조직 즉 교구 주교나 세속 왕국과도 충돌했고 결국 18세기 일시적으로 해산되고 포르투갈프랑스 같은 가톨릭 국가에서도 완전히 추방되기도 했다.

본고장인 스페인에서조차 배척받았는데, 예수회가 대항종교개혁의 선봉이었지만 정작 보수적인 스페인에서는 예수회가 지나치게 프로테스탄트적이며 지나치게 유대스럽다 또는 유대인에 온정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앞서 개신교들은 세속 가톨릭 왕국에 섬처럼 떠 있는 도시들이 많았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 교육에 대해 상당한 투자를 했는데, 예수회 역시 교육 특히 엘리트 교육에 열성적이었다.

4. 선교

예수회의 선교 판도에는 스페인에 의해 점령된 멕시코페루, 그리고 대항해시대에 발 맞춰 무역이 흥성하게 된 인도중국, 일본을 포함하고 있었다. 예수회의 선교는 매우 적극적이었으며, 그 활동 반경이 매우 넓었다.

4.1. 남아메리카 선교

페루에서는 잉카의 11대 왕 우아이나 카팍(Huayna Capac)의 궁전을 파괴하고 그 위에 예수회 성당인 <라 콤파냐 데 헤수스 성당(Iglesia de la Compañía de Jesús)>을 짓기도 하였다. 1668년에 완공된 이 성당에서는 성 이냐시오의 조카 마르틴 가르시아 오네즈 데 로욜라(Martín García Óñez de Loyola)와 잉카 제국의 마지막 왕이었던 투팍 아마루의 조카 베아트릭스 클라라 코야(Beatriz Clara Coya)의 결혼식이 열렸다.

4.2. 동아시아 선교

포르투갈아시아 지역으로 활발하게 진출하면서 예수회의 동양에서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예수회는 비록 엄격한 조직이기는 했지만 현지 사람들이나 전통문화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판이나 사원의 파괴·이단심문 등의 극단적인 수단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이는 16세기 살라망카 대학에서 비교적 유화적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교도 대전'을 해석했던 학풍을 이어받은 것으로, 이에 맞춰 예수회는 현지 적응주의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또한 신자의 자격에 대해서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같이 사도신경을 믿는 사람들이면 신자라고 생각하여, 철저하게 엄격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무작정 현지의 신앙을 탄압하기보다는 현지인들의 사상을 '그리스도교적으로' 만드는 것이 나은 길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 덕분에 당대 동아시아 선교활동 세력 중 예수회가 가장 많은 신자들을 만드는 공적을 세웠다.

4.2.1. 중국에서

이러한 사고는 예수회의 중국 선교에서 잘 드러난다. 유럽 못지 않게(어쩌면 그 이상으로) 고도의 체계를 갖추고 있던 중국의 정치와 학문 세계를 접한 예수회는, 단순한 ‘그저 천주교가 유교보다 좋으니 천주교 믿어야 된다’ 식의 그리스도교 우위의 전도만으로는 중국인들을 설득하기 어렵다는 점을 깨달았다. 특히 중국인들은 고도로 전문화된 유교를 중심으로 한 중화사상이 매우 굳건했기 때문에 유럽의 문명을 설파한다 한들 씨알도 안 먹혔다.

먼저 선교의 거점이 된 곳은 인도였는데, 포르투갈이 1513년 고아를 점령했기 때문에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등의 선교사들이 원활히 활동할 수 있었다. 하비에르는 일본 선교에 나서 크게 성공했고, 중국 진입을 노리기도 했으나 당시 명나라 정부의 해금령으로 실패했다.

이후 포르투갈령 마카오를 통해 진입한 마테오 리치와 미켈레 루지에리 등의 신부들에 의해 중국 선교가 시작되었는데, 미켈레 루지에리는 불교천주교를 비견하여 선교를 시도한 '천주실록'을 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마테오 리치가 유교적 관념을 천주교와 접목시켜 선교에 나서면서 천주실의는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 등지에도 전래되어 동아시아 사상계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이후 아담 샬이 명청 교체기에, 조아킴 부베와 페르디난트 페르비스트 등이 청나라 시대에 활동하면서 교세를 펼쳐나가게 된다.

명나라 때 처음 중국에 온 마테오 리치는 용어 문제 관련해서는 적당히 넘어갔고, 공자를 공경하고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문제에 대해서는 종교적 의미를 지니지 않는 민속 문화로 규정해 중국 가톨릭 신자는 이런 의식을 집전하거나 참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중국에서 단순한 종교를 넘어 정치, 사회적 철학으로써의 위상을 누리고 있는 유교의 가르침을 배워 그에 맞추어 기독교 교리를 설명하고 납득하게 하는 '현지화' 방식을 택했는데[9] 이러한 마테오 리치의 방침은 예수회의 중국에서의 기독교 전도에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마테오 리치 사후 예수회 중국지구 회장 직무를 계승한 롱고바르도(N. Longobardo)가 조상제사 허용 여부와 ‘Deus’에 대한 중국어 용어 사용 여부에 대해 수도회 내부에서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해, 1628년 1월 가정(嘉定) 회의를 개최했고, 두 가지 결론을 내렸다. 하나는 ‘Deus’에 대한 용어로 ‘천’(天), ‘상제’(上帝), ‘두사’(斗斯)[10]를 금지시키고, ‘천주’(天主)라는 용어로 통일할 것, 다른 하나는 부모와 조상, 위대한 스승에 대한 효도와 공경의 표현이라는 의미에서 조상 제사를 허용한다는 것이었다. [11]

예수회 선교사들은 황제의 관료로서 활동하며 황제의 시강을 맡는 한편, 중국의 지식인들과 밀접하게 교류하며 중국어유교 사상을 적극적으로 익혔다. 그들은 상류층의 관심을 끌기 위해 발달된 서구 문물을 소개하는 한편, 중국 전통 사상과 가톨릭의 공통점에 착안해 중국의 가톨릭화를 모색했는데, 이 과정에서 수많은 저술들이 쏟아져 나왔다. 일련의 성과는 천주교의 전통이 유교를 비롯한 중화권 전통과 상당 부분 동치라는 것을 보임으로써, 학술적 교류를 통해 종교적 교류의 초석을 다지는 역할을 하였다. 유교 자체가 주나라 시절부터 있던 중화권 전통을 이리저리 융합해 하나의 사상으로 정리해 놓은 것이었으므로, 예수회의 노력은 유학자들의 관심을 자연스럽게 받을 수 있었다. 이런 노력 때문에 천주교가 서학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린 것이다.

물론 교세라는 측면에서 볼 때 중국의 가톨릭은 그다지 번성하지 않았다. 서광계, 이지조 등의 유학자들이 가톨릭에 귀의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중국의 1억 인구 중에 마테오 리치 당대 천주교를 믿는 사람은 23만 명이었고, 명 왕조가 멸망하고 중국의 지배자가 된 청(淸) 왕조 강희(康熙) 원년(1662년) 시점에서 중국 안에서 천주교를 믿는 사람은 11만 명 수준이었다. 이는 센고쿠 시대 일본만큼의 수준도 아니었다. 명 왕조의 위기 시대에 적대감이 폭발한 남경교안, 아담 샬 때문에 천문 기관에서 밀린 양광선의 박해 시도 등이 외래 종교에 대한 거부감[12]도 터져 나왔다. 높으신 분들이 유교 전통과 천주교 전통이 닮았다고 하거나 말거나 평민들에게는 와닿지 않는 이야기였고, 중국 정부에서도 가톨릭 선교사들은 '유용한 기술자'로서 천문 관측, 기계 기술 등의 측면에서 뛰어났기 때문에 '천하를 지배하는 황제 폐하의 넓고도 크신 아량'으로 '이국에서 온 뭣도 모르는 야만스런 것들의 별 것 아닌 잡소리'까지도 통 크게 허용해 준다는 개념이었지 종교적으로 이들을 마냥 호의적으로 보지는 않았다. 언제까지나 '유교적' 관점으로 천주교 전통을 수용하며, 겸사겸사 서구권 기술을 흡수하는 것에 그쳤을 뿐이다. [13]

하지만 그들이 목표로 했던 '중국 복음화'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해도, 중국 지식인들의 세계관을 넓히는 데에 예수회가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중국인들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남긴 것들을 통해서 새로운 바깥의 지식들과 사상들을 습득했고, 거꾸로 공자, 맹자의 이름을 라틴어화하여 서양에 전할 수도 있었으며, 중국 유교의 가르침이 볼테르[14] 라이프니츠, 몽테스키외, 잠바티스타 비코 등 서구 유럽의 계몽주의자들의 철학에 영향을 주게 된 것도 예수회 선교사들을 통해 번역되어 전해진 중국의 유교 경전들에 힘입은 것이었다. 청 왕조와 제정 러시아 사이의 네르친스크 조약 체결 과정에서 라틴어 통역을 담당하는[15] 등의 많은 업적에 예수회 선교사들이 있었다. 주세페 카스틸리오네[16]의 경우 궁정 화가로서 중국의 화풍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예수회의 활동은 도미니코회, 프란치스코회, 아우구스티노회, 파리외방전교회 등 다른 가톨릭 수도회들의 시기를 받아 고발당했다. 논점이 된 것은 기독교의 유일신인 여호와(Deus)에 대한 마테오 리치의 유명한 한자 번역어 '천주(天主)' 그리고 '상제(上帝)'라는 용어의 적법성에 대한 것, 그리고 제사 허용 문제였다. 예수회와 예수회를 제외한 여러 수도회 간에 1634년부터 1742년까지 있었던 ‘Deus’의 용어 사용, 조상 제사 및 공자에 대한 석전례와 관련한 교리상 현지 적응주의 적용 여부와 기독교 신학적 차원에서의 논쟁을 중국의례논쟁(中國儀禮論爭, Controversia de ritibus)이라 한다.

현지 적응 중심의 예수회의 뒤를 이어 중국 선교에 동참한 원칙적[17]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가 예수회와 전례 문제로 대립한 것은 17세기 초반부터였다. 주로 도시의 상류층, 지식인과 접선하면서 '유교화'된 제사의 종교성보다는 문화성을 더 접한 예수회와 달리 시골 지역에서 활동하던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는 '유학'으로써의 제사의 면모보다는, 미신적인 요소가 더 강한, 기복적 조상 숭배로써의 제사들을 자주 목격했기에 이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18]

문제의 촉발은 도미니코회 선교사인 모랄레스(Juan Batista de Morales, 1597-1664)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1633년부터 중국에서 전도 활동을 하다 6년만인 1639년에 추방되는데, 복건성 복안에서 전교 선생이었던 중국인 왕다두(王達竇)를 통해 중국의 조상 제사라는 것을 접하고, 마테오 리치와는 달리 "이런 건 모두 미신적인 종교 의례"라 단정해 17개 조항의 문제점을 교황청에 제기했다. 이어 1643년 모랄레스 본인이 직접 로마로 건너가 당시 교황 우르바노 8세에게 예수회의 적응주의적 전교 방법의 가부를 결정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우르바노 8세는 결정을 내리기 전에 급서했고, 후임이 된 인노첸시오 10세는 1645년 9월 12일 종교재판소의 의견을 받아들여 '중국 안에서 가톨릭 신자들의 중국식 의례를 금지한다'는 훈령을 내렸다.

이에 예수회에서는 1651년 마르티니(Martino Martini, 1614~1661)를 로마로 보내서 중국에서의 공자와 조상에 대한 제사는 부모와 조상에 대한 공경의 표현이고 문화, 정치적 의례일 뿐이지 종교적 의미가 결코 없음을 강조했고, 이걸 금지시키게 되면 중국에서의 전도도 불가능해진다는 이유로 훈령을 해제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1656년에 교황 알렉산데르 7세가 다시 “중국의 신자들은 공자와 조상을 기리는 의식에 참여해도 좋다”는 훈령을 내렸다. 3년 뒤인 1659년 도미니코회 선교사 폴랑코(J. Polanco)가 다시 인노첸시오 10세의 훈령과 알렉산데르 7세의 훈령 중 어느 쪽을 따라야 하는지를 교황청에 질의, 10년 뒤인 1669년 교황 클레멘스 9세는 “모두 동일한 효력을 가지고 있으며, 각각 구체적 환경에 따라 적용돼야 한다”는 절충안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도미니코회는 여기서 물러나지 않고, 이번에는 모랄레스의 후임으로 도미니코회 중국 책임자 직책을 맡고 있었던 나바레테(Domingo Fernandez de Navarrete, 1610~1689)가 1674년 로마로 돌아가 정식으로 "예수회 저것들이 중국에서 전도하는 것에 대해 교황청에서 나서서 전면 재검토하라고 명령해야 합니다"라고 다시금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어서 1676년에는 예수회의 노선을 비판하는 저서를 출간했는데, 이 책은 예수회에 불만과 적대감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중국 의례 논쟁의 무대를 중국 내부에서 유럽 전역으로 확대시켰다.

이러는 사이에 중국에서는 왕조가 바뀌었고, 기존 명 왕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던 예수회 선교사들은 현명한 판단력을 발휘해 왕조교체기 중국에서 살아남아서 새로운 중국의 지배자가 된 만주족 왕조의 신임을 얻는데도 성공한다. [19]

서양에서도 포르투갈이 쇠퇴하면서 이전까지 주로 이탈리아, 에스파냐, 포르투갈의 남유럽 출신 선교사들이 주도하던 동방으로의 기독교 전도의 판이 새롭게 프랑스 출신 예수회 선교사들에게로 넘어갔다. 강희제의 치세에 해당하는 17세기 말에서 18세기에 걸쳐 중국에 파견된 프랑스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들은 마침 기존에 바티칸 교황으로부터 선교관할권을 인정받아 활동하던 포르투갈로부터 벗어난 독립적인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루이 14세1685년 중국으로 파견한 장 드 퐁타네(Jean de Fontaney, 1643~1710), 죠아생 부베(Joachim Bouvet), 장-프랑수아 제르비용(Jean-François Gerbillon, 1654~1707) 등 다섯 명의 프랑스 국적 예수회 선교사는 중국에서 ‘궁정 수학자’의 역할을 하였으며, 몽골 원정 중에 학질에 걸려 고생하던 강희제에게 약재를 구해 주어 강희제를 치료해 주고 그 신임을 얻어 황제에게 미적분을 가르치며 중국에서 전도 활동을 펴나갔다.

여기에는 포르투갈의 쇠퇴로 기존에 포르투갈이 교황으로부터 보장받고 있던 중국에서의 선교관할권을 차지해 동아시아에서의 기독교 전도의 '판'을 주도하고자 했던 프랑스 왕정의 의도도 담겨 있었다. [20] 어떻게 생각하면 프랑스 절대왕정과 로마 가톨릭 교회 사이의 대립이 중국에서 전례논쟁이라는 형태로 구현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셈이다.

이러한 전례 논쟁은 이후의 강희제[21] 시대 선교의 자유가 허가되면서 정점을 맞는가 했던 예수회의 선교는 이후 커진 전례 문제로 인해 완전히 무위로 돌아간다.

강희제 자신이 몸소 북경의 천주교당에 '경천(敬天)'[22]이라고 쓴 현판을 하사하는데, 이는 가톨릭의 천주(여호와)를 중국의 전통적인 천(天)과 동치시켜 판단하였으며[23] 또한 기독교의 전통이 동아시아권 전통에 비해 우월하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 동치되는 개념이니만큼 당연히 동아시아권의 전통인 조상 제사도 가톨릭의 예배와 마찬가지로 반드시 지켜야 할 의식이며 어느 한쪽을 버리거나 어느 한쪽만 택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공존할 수 있고 교류가 가능한 의례로 판단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 안 가서 다시금 전례 논쟁의 불이 붙었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으로 1684년 복건의 종좌대목(주교)에 임명된 샤를 매그로(Charles Maigrot, 1652~1730)로부터였다. 좋게 말하면 원칙주의자이고 나쁘게 말하면 꽉 막힌 꼴통이었던 메그로 주교는 1693년 3월 20일 그는 자신이 관장하는 교구 안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절대자를 표현하는 용어인 ‘데우스’를 지칭하는 용어로 ‘천’이나 ‘상제’를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못박고, 또한 조상 제사나 공자에 대한 석전례에 중국인 천주교 신자들이 참석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예전 도미니코회가 주장한 것과 거의 같은 것이었다.

이에 북경에 거주하던 예수회 소속 그리말디(P. Grimaldi), 토마스(A. Thomas), 페레이라(T. Pereira), 제르비용 등의 선교사들이 1700년 11월 30일, 직접 황제인 강희제에게 직소해 중국에서의 의례 문제에 대해 본인들이 잘못하고 고쳐야 할 부분을 지적해 달라는 청원서를 올렸다. 강희제의 대답은 “니들 고쳐야 할 거 아무 것도 없는데?”라는, 사실상 예수회의 편을 들어 주는 것이었다. 이를 기점으로 문제는 본격적으로 바티칸의 교황과 중국의 황제, 양자간의 정치 싸움으로까지 번지게 된다. 예수회가 자신들의 입장을 표명하기 위해서 강희제에게 청원한 것에 대해 교황은 교황대로 "니들 입장 지지를 왜 교회가 아니라 중국 황제한테 구하고 앉았냐? 니들이 예수님 따르는 성직자지, 황제 모시는 환관이야?"라고 불쾌해했고, 황제는 또 황제대로 중국 전통 문화에 대해 '우상숭배'라고 비방하고 부정하는 교황이나 선교사들을 두고 "종교 단체가 지금 어디서 자꾸 우리 전통 문화 가지고 이래라 저래라 시비를 걸어? 그리고 이미 얘기 다 끝난 걸 저것들은 왜 자꾸 들고 나오는 거야?"고 짜증날 수밖에 없었다.

강희 43년인 1704년 11월 20일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기존 회칙에서 한 술 더 떠서 예수회의 중국에서의 Deus에 대한 번역어로 오직 ‘천주’만을 허락하고, 기존 중국의 전통인 공자에 대한 석전 및 조상 제사를 모조리 '우상숭배'로 간주하여 중국의 가톨릭 신자들이 그에 참석, 집전하는 것을 금지하였고, 아울러 조상 제사에 사용되는 신주를 세우지 못하도록 금지할 것을 회칙으로 선포하면서, 추기경이었던 샤를토마 마야르 드 투르농(Charles-Thomas Maillard de Tournon, 1668년 12월 21일 ~ 1710년 6월 10일)이라는 인물을 특사로 파견하여 "교황청의 관행에 정통하며 교황에게 신임 받는 인물을 대표로 삼아 중국 내의 수도자들을 관리해야 한다."고 강희제에게 요청했다. 문제는 그게 가톨릭 신자들에게나 당연한 말이었지 강희제나 다른 중국인들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는 거다. 강희제는 자신을 찾아온 교황의 특사 투르농에게 이렇게 반문했다고 한다.
"비록 중국에 온 선교사 집단이 모두 다른 나라 사람이지만 모두가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 나는 네가 말하는 '교왕[24]에게 신임받는 사람'이라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우리 대청(大淸)에서는 적임자를 고르는 데 그런 차별을 두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내가 앉아있는 용상과 가까이 있고, 어떤 자는 중간쯤에 있고, 어떤 자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충성심이 있으며 만일 충성심이 없다면 내가 어떤 일을 맡기겠는가? 그대들 중에 누가 감히 교왕을 속일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스도교에서는 거짓말하는 자는 하느님을 노엽게 한다면서 거짓말을 금하고 있지 않은가?"

쉽게 얘기하자면 “어차피 똑같이 천주 믿는 사람들끼리 누구는 신임하고 누구는 신임 못하고가 어디 있냐. 누구는 교왕이 신임하니까 믿어도 되고 누구는 교왕이 신임 안 하니까 믿으면 안 된다니, 그럼 교왕이 신임 안 하면 그 사람은 천주 믿는 사람 아니냐? 그러면 니네들은 여태껏 니들끼리도 서로 신임을 못할 사람(예수회)을 우리한테 보내서 천주 믿으라고 전도한 거네?”고 교황을 비난한 거다.

또한 특사가 말한 '교황에게 신임받는 인물을 대표로 삼아 중국 안의 수도자와 신자를 관리하게 해 달라'는 요청에 대해서 강희제는 “중국에 10년 이상 거주한 자로서 짐이 보기에 중국인의 생활과 언어, 풍습을 익히 아는 자가 임명되어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25] 중국 내의 기독교 신자들을 감독할 인물이라면 교황이 아니라 황제 자신이 임명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었다.

공자에 대해서도, 제사 허용 문제에 대해서도 강희제의 뜻은 강고했다.
공자는 중국인들의 위대한 스승이기에 존경받는 것이지, 행복이나 벼슬, 재물을 얻으려고 공자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기도하지 않는다. 조상 숭배는 사랑과 추모의 정을 기리기 위한 것이지 조상의 은덕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한낱 미물조차도 죽은 어미를 위해 여러 날을 슬퍼하는데, 돌아가신 어버이에 대해 무관심한 서양인들은 금수만도 못한 자들이다. 그런 자들이 어찌 중국인에 견줄 만 하겠는가? 우리가 조상의 위패를 모시지만, 그 안에 조상의 영혼이 거한다고 믿지 않는다. 우리가 공자를 존경하는 이유는 덕을 숭앙한 그의 원칙과 교육 체계, '윗사람과 조상을 공경하라' 하신 가르침 때문이다. 너희가 너희의 성인들을 존경하는 것도 그들의 고귀한 행위 때문이 아니더냐?

그런 와중에 교황이 파견한 특사 투르농마저 결정적으로 무사히 해결될 수 있었던 "오해"를 더 꼬아 놓고 말았다. 마테오 리치에 비하면 중국의 전통과 문화에 대한 이해도도, 전략적인 외교술로 협상을 해낼 판단력도 모자랐던 투르농은 1705년 12월 4일 북경에 도착해서 보니 분위기도 그렇고 강희제를 설득하기는 도저히 불가능하겠다는 판단이 들어 이듬해 본국으로 돌아가고자 했는데, 문제는 그러면서 앞서 교구 내의 중국식 제사 의례를 금지해 중국에서 전례 문제를 재촉발시킨 당사자이기도 했던 메그로를 '중국통'이랍시고 강희제에게 추천했다.

강희제는 교황의 특사가 '중국통'이랍시고 추천한 메그로에게 한자 몇 글자를 골라 짚어 주면서 읽어 보게 했고, '전임자'이자 같은 예수회 선교사인 마테오 리치가 한문으로 저술한 기독교 교리 개설서 천주실의를 읽어 보게 했지만, 메그로는 어느 것도 읽지 못했다. 강희제는 이런 한심한 꼴에 격노했다.
중국의 글자도 하나 읽을 줄 모르고, 중국어도 한 마디 하지 못해 대화할 때는 반드시 통역이 붙어 있어야만 하는, 이런 자들이 감히 중국 경서의 도리를 운운하다니, 마치 문밖에 서서 집에 들어와 본 적도 없는 놈이 그 집안의 일을 논하는 것마냥 그 하는 말이 조금도 근거가 없도다![26][27]

결국 투르농은 중국을 벗어나기도 전인 12월 17일 남경에서 강희제가 메그로를 쫓아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리고 1707년 1월 25일 ‘남경 명령’을 공포했다. 그 내용은 중국 의례 금지 명령과 황제가 기독교에 대해 묻는 것에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결국 강희제는 투르농 일행을 마카오로 추방함과 동시에 중국에서 전도 사역 활동을 희망하는 선교사들은 '영구히 서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등의 내용이 기재된 인표(印票)를 소지할 것, 인표를 발급받으려면 마테오 리치가 정한 규율을 따를 것을 선서하도록 했다.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1715년 3월 19일 기존 훈령보다도 더 강경한 어조로 중국 의례에 대한 금지 조치를 담은 칙서 '그날들(Ex illa die)'을 반포하였다. 그 내용은 ‘중국 의례에 대한 7개 조항’으로, ‘천주’ 이외의 용어 사용 금지, 중국 전통 조상 제사 및 공자에 대한 석전 금지[28]였다. 강희제 역시 한문으로 번역된 이 칙서를 접하고 "이것들이 한자도 모르는 주제에 감히 건방지게 중국의 도덕 체계가 잘못됐네 어쩌네 시비를 거네?"라며 제대로 격노해 1717년 4월 16일 금교령을 내리기에 이른다. 황제의 분노가 담긴 금교 조치로 각지에서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이 고조되었고 기독교 신자에 대한 체포 조치 등 탄압을 시작한 지방관들도 생겨났다.

유교식 제사에 대한 교황 클레멘스 11세의 우상숭배 규정 및 금지 회칙이나 이를 따라서 중국식 전통을 거부하는 선교사들에 대해서도 강희제는 “앞으로 서양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중국에 살 사람에게만 체류를 허가하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29] 물론 베이징 안의 천주당도 강희제 치세에는 그대로 유지되었고, 서양인 선교사들도 그곳에 상주할 수 있었다.

클레멘스 11세의 훈령을 가지고 두 번째 교황 특사로 중국에 파견된 카를로 암브로조 메차바르바(C. A. Mezzabarba, 1685~1741)[30]는 1720년 12월 25일 북경에 도착해, 강희제를 알현하고 중국에서의 기독교 전도 허용 및 중국 전통 의례 관련 금지령을 실시하게 해 달라고 했지만, 강희제는 “내가 중국에서 기독교 전도를 금지한 것은 너희 법왕이 낸 「그날들」(Ex illa die)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메차바르바는 고육지책으로 교황의 칙서를 변형시켜서라도[31] 강희제와 타협하려 했는데, 1721년 1월 14일 이른바 ‘준행8조’(准行八條)를 강희제에게 제시했지만 강희제는 자신의 생각에 변함이 없었다. 메차바르바는 강희제의 생각을 더 바꿀 수 없음을 깨닫고 그대로 중국을 떠났고, 이듬해 강희제는 붕어했다.

옹정제건륭제에 의해 이 조치는 고수 혹은 강화되어, 아편전쟁 이전까지 중국에는 그리스도교가 쉽게 발을 붙이지 못했다.[32] 강희제의 뒤를 이은 옹정제는 강희제보다 더욱 기독교에 대해 가혹한 인물이었는데[33] 1724년 흠천감에서 천문 분야에 종사하던 선교사들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중국 바깥으로 추방시키고 선교사들의 청나라 출입 자체를 전부 막아버렸으며, 중국인들이 기독교를 믿는 것도 금했다.

건륭제 때에 '대교안'이라고 해서 선교사들이 조정의 금령을 어기고 중국 내륙으로 들어가 전도하다 발각되어, 11개 성(省)에서 천주교도 400여 명, 선교사 18명이 체포돼 심문을 받았다. 다만 이들 가운데 옥중에서 병사한 사람을 빼면 사형을 언도받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34] 중국인 신자들은 장형 및 변방 유배라는 꽤 가혹한 처벌을 받은 반면 선교사들은 종신금고형에 처했다가 1년도 안 되어 사면하고 풀어 주는데[35] 표면적으로는 ‘법외시은(法外施恩)’ 내지 ‘법외지인(法外之仁)’이라고 해서 중국 사정을 잘 모르고 국법에 어두운 외국인들(법외)이니 특별히 은혜를 베풀어 풀어 준다는 것이 이유였고, 가톨릭이 기존 청 왕조의 지배 체제를 완전히 부인하지는 않은데다 천문, 역법 관장이나 의료 같은 서양 기물로 황제가 '봉사'를 받은 게 있다 보니 그런 천주교에 대해서 갑자기 "너네 앞으로 믿지 마라"라고 해 버리면 그동안 황제가 해 온 행위, 도덕적 정당성에 손상이 갈 수밖에 없었던 것. #

이후 1742년 7월 11일 교황 베네딕토 14세는 칙서 「경우에 따라서」(Ex quo singulari)를 선포해 1715년의 칙서 준수[36]와 함께 더 이상 의례에 대한 논란을 금지시킴으로써 의례논쟁을 종식시켰고, 1773년 7월 21일에 교황 클레멘스 14세는 예수회 수도회를 해산시켰다. 이후 만주국(滿洲國)의 공자 숭배에 대해 교황 비오 11세1935년에 천주교인의 공자공경 예식 참여를 허용했고, 1936년에는 일본의 신사참배(神社參拜)를 허용했으며, 1939년 12월 8일 교황 비오 12세가 「중국 의례에 관한 훈령」을 선포해 공자에 대한 석전례, 조상에 대한 제사 거행 및 참여가 허용되게 되었다. #

4.2.2. 일본에서

일본센코쿠 시대 유력 다이묘들이 천주교 신자가 되는 등 교세가 크게 흥성했다. 유교보다 불교, 특히 타력구원 성향의 정토종 계열이 흥성했던 일본에서는 내세관을 갖춘 그리스도교에 훨씬 개방적이었고, 예수회도 극단적인 선악관을 가진 신란의 정토진종에 대해 '마르틴 루터의 무리가 이미 일본에 있다'고 발언하는 등의 해프닝을 겪기도 했다. 어찌되었든 이러한 유사점은 천주교 전도에 큰 도움이 되어, 중국과는 달리 일본의 그리스도교는 민간종교적인 성격을 띠기도 했다.

남만사(南蠻寺)[37]와 선교사 양성지, 그리고 화승총과 직물을 비롯한 활발한 무역으로 흥성하던 천주교는 오다 노부나가의 정권 말기부터 서서히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일본인 노예가 판매되는 것을 알게 된 일본의 반감, 엔랴쿠지 등 불교 세력을 압도하면서 견제구로서의 의미가 줄어든 천주교의 전파, 그리고 화승총 무역 등으로 지방 정권의 군사력이 뒷받침되던 점 등이 통일 정권을 향해가던 일본 집권자의 압력을 부르게 된 것이다. 예수회가 후원해 교황까지 만나고 온 일본인 덴쇼 소년사절단도 유명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박해를 거쳐, 에도 막부로 진입하면서 일본은 본격적인 쇄국 단계에 들어서고 선교사들을 몰아내기 시작한다. 선교 없는 교역만을 조건으로 네덜란드만이 흔적을 남긴 채 서양 세력은 완전히 추방되어 예수회 선교도 사실상 종결되고, 시마바라의 난으로 남은 그리스도교의 기반은 완전히 무너진다.

4.2.3. 베트남에서

이후 예수회 등의 선교 세력이 향한 곳은 베트남이었다. 프란체스코 부소미 등의 신부는 당시 남북[38]이 갈려 격하게 대립 중이던 베트남에 진입해 집권자들과 교역을 트고 선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두 정권이 전쟁보다 내부 안정을 우선시하면서 교역을 통한 무기 확보에 열의가 줄어들고,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 흔히 나타나는, 전통 관습과 배치된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기 시작하면서 예수회 선교도 쇠퇴하기 시작한다.

이후 베트남에는 예수회 대신에 조선에도 선교사를 파견했던 파리 외방전교회가 선교를 담당하게 된다.

4.2.4. 한국에서

서양 과학기술 및 천주교 관련 책들이 조선의 연행사(사신)들에 의하여 국내에 소개되어 실학 사상이 싹트는 계기가 되기도 했으나, 국내의 의견은 18세기 이전까지 대개 비판적이었다. 한때 서광계가 조선 사신으로 파견되어 실질적으로 천주교 선교를 노리기도 했으나 무위로 돌아갔고, 소현세자아담 샬 신부와 교류했다는 아담 샬의 일방적인 주장만이[39] 조선 내 예수회 선교의 흔적으로 남았다. 즉 천주실의 몇 권과 연행사가 선교사들과 만난 게 다였다.

하지만 이렇게 조선 선교에 가장 힘을 쓰지 않았음에도, 아니 아예 신경을 껐음에도 불구하고 전근대, 근현대에 천주교를 책을 통해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스스로 교회조직을 만들고 사제를 요청하며 결국 많은 순교자들이 피를 흘리게 된 곳은 한반도였다. 만약 예수회 선교사들이 한반도에 아예 자리잡고 중국에서처럼 활동했다면, 한국은 구한말 이전 본격적으로 서구와 교류했을지도 모른다. 이양선을 대한 것과는 다르게 했을 테니까. 물론 이는 다소 낭만적인 추측이기는 하다.

한국 천주교 교구들이 대부분 파리외방전교회에 의해 창설되어 파리외방전교회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여 오늘에 이르렀다는 점, 예수회 스스로가 교구의 교육 과정과 사상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사제 양성을 고수한다는 점 등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예수회는 무엇보다도 한국에 늦게 진출하였기 때문에 초창기에는 교구와의 관계가 어려운 점도 있었다고 한다.

이미 파리 외방전교회가 교황의 명에 의해 박해시대의 한국에 파견되어 한국 선교를 위해 큰 공을 들이며 순교자들이 생겼다. [40][41] 이렇듯 파리 외방전교회는 회원대비 많은 순교자를 내면서 한국 선교를 위해 헌신하고,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에는 한국에 교계제도의 기틀을 잡고, 방인 사제를 육성하고, 교세를 확장하는 등 한국 교회를 사실상 만들다시피 했다.

박해시대가 끝나고 베네딕토회와 메리놀 외방 전교회 등이 한국에 진출하고, 그에 앞서 1888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42]가 한국으로 진출하여 전교와 교육을 담당하였다. 예수회는 해방 후에야 미국의 예수회 위스콘신 관구에서[43] 한국에서 선교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그 당시엔 한국 천주교파리외방전교회와 매우 가깝고, 한국 천주교에서 가장 활성화된 수도회베네딕토회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등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예수회가 동아시아 선교에서 중국과 일본 선교에는 긴 세월 동안 큰 공을 들였지만 한국 진출에는 상당히 늦었기 때문에, 현대 한국 가톨릭에서 타 수도회와 선교회들처럼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약간 겉도는 신세가 되었었지만 현재 한국에서 수도사제를 가장 많이 배출한 수도회는 바로 예수회다. 참고로 2위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3위는 살레시오 수도회이다.

4.3. 근황

이렇게 동방 선교가 쇠할 때쯤 스페인포르투갈의 국력도 약해지면서 예수회는 본격적으로 다른 수도회들의 견제를 받기 시작했고, 스페인도 왕권 지상주의를 앞세운 개혁에 나서면서 18세기 후반에는 예수회가 아예 해산되기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예수회에 대한 압력은 아메리카에서 큰 권위를 누리던 예수회 세력의 반감을 불러,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에 이르는 라틴아메리카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대표적인 것이 1810년 멕시코 독립운동에 나선 미셸 이달고 등의 신부였다.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오면서 예수회의 재건 운동이 시작된 한편,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 해방신학이 예수회 등에 의해 흥성하기도 하였다.

예수회는 현대에 들어서 중세나 근대만큼의 명성이 남아있지는 않다는 평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후로 예수회원들의 대거 환속이 있었고, 교황청에 의해서 이단 신학자로 경고를 받은 회원이 많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과거 예수회의 본래 영성이 쇠퇴하고 지나친 사회 참여로 이냐시오 영성이 훼손되고 있다는 비판이 있다.

2013년 3월,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 추기경프란치스코 교황으로 선출됨에 따라 마침내 예수회 출신 교황이 탄생했다. 문제는 예수회 장상들이 프란치스코 교황이 수도사제였을 때 쫓아내려고 안달이 나 있었다는 점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아르헨티나 관구장 당시에 해방신학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는데, 예수회 장상들은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고, 탈퇴할 것을 종용했다. 그래서 지금도 교황은 탈퇴한다는 문서를 가지고 있는데, 안 그래도 탈퇴하려던 참에 갑자기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교구의 보좌주교가 되면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수사가 주교가 되면, 수도회원이라는 신분을 유지하되 수도원장이나 수도회 총장에게 순명해야 할 의무에서 공식적으로 벗어나기 때문이다.[44][45] 그래서 예수회 장상들의 속사정은 그리 좋지만은 않다는 후문이다. 탐탁지 않게 보던 사제가 주교가 되고, 추기경이 되고, 교황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다만 그렇다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예수회와 원수를 진 건 절대 아니다. 교황 취임 이후 예수회 총장과 전화 통화를 하였고, 교황 문장 안에 예수회 상징을 넣는다던가 2014년 방한 때는 예수회가 설립한 서강대학교를 깜짝 방문한다던가 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애초에 십수억이나 되는 초거대 집단의 수장이 이 정도로 진보적인 형태를 보이는 것도 그가 나고 자란 라틴 아메리카라는 공간적 배경과 예수회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46]

5. 예수회 성당의 예술

근세의 개신교 예배당이 예술적으로 검소함을 보였음과 대비되게 예수회 계열의 성당들은 더욱 화려한 바로크적인 장식을 보여주어 천국의 모습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려고 하였다. 원래는 예수회 역시 성당의 내부를 단순하게 회반죽을 바르는 등 개신교와 비슷한 검소함을 보였지만, 곧 정반대의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예수회를 창설한 성 이냐시오(Sant' Ignazio)에게 바쳐진 로마의 성당인 <성 이냐시오 성당(Chiesa di Sant' Ignazio di Loyola)>이 대표적인 사례인데, 안드레아 포초(Andrea Pozzo)가 1691년부터 1694년에 그린 거대한 천장화 ‘성 이냐시오의 영광(Gloria di Sant'Ignazio)’는 조각과 건축, 회화가 어우러져 입체적인 환각 효과를 보여주는 화려한 장식이다. 주로 바로크 예술에서 볼 수 있는, 입체적인 환영을 통한 공간을 보여주는 이러한 것을 콰드라투라(Quadratura) 기법이라고 한다.

예수회 성당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제수 성당(Chiesa del Gesù)>의 정면(facade)은 16세기의 이탈리아 건축가 자코모 델라 포르타가 설계하였으며, 이는 예수회 성당들의 정면 디자인의 모범이 될 정도로 당대에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 특징 중 하나는 기둥의 튀어나온 정도를 다르게 하여 입구를 강조한다는 점이다. 제수 성당의 바깥 기둥은 얕고, 점점 가운데 기둥에 가까워질 수록 튀어나오며, 입구 주변의 원 기둥은 벽에서 독립되어 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입구를 강조하고 있다. 제수 성당의 내부는 회반죽이 발려 검소한 모양이었지만 후대에 화려한 바로크적 장식이 덧붙여졌다.

한편 제수 성당의 정면과 유사하게 지어진 산 수산나 성당의 건축가 카를로 마데르노는 이 덕분에 성 베드로 대성당의 정면과 신랑을 설계했지만, 워낙 대성당 정면의 너비가 길어 비례가 다르고, 크기 차이 있어 작은 성당인 제수 성당의 정면이 가졌던 특유의 미적 효과가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는 다소 떨어진다는 평을 받는다.[47]

6. 예수회 소속의 유명 수도자


* 루이스 데 알메이다

7. 관련 창작물

8. 음모론 관련

음모론의 단골 등장 조직이다. 연원을 살펴보면 과거 16세기 창설시부터 앞장서서 대항종교개혁의 최전선에 섰기 때문에 종교개혁 세력과 적대한 탓이 크며, 이 때문에 개신교 진영에서는 악마화되어 묘사되기 시작했다.[48] 여기에 19세기엔 유대인 음모론과 결합하여 프리메이슨-국제유대인 조직(국제 금융자본)-예수회 삼각 음모론이 매우 흥했다. 이들 조직들 공통점은 국제적 네트워크를 가졌다는 점이다. 얼핏 보면 허무맹랑해 보이지만, 이걸 진지하게 믿은게 2차대전 이전까지 독일이었다. 나치 독일이 이런 대중들의 음모론 감정을 이용하여 유대인과 국제적 요소가 있는 조직을 대거 탄압하는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알고보면 예수회 역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는 강경한 반유대주의 성향을 드러냈기 때문에 유대인 음모론과 예수회를 엮는 것은 명백한 허구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으로도 유명한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자신의 저서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예수회가 발행하는 잡지인 라 치빌타 카톨리카(La Civiltà Cattolica)가 "수십년동안 가장 공개적으로 반유대주의적이었다"고 비난할 정도였다. 물론 인종상의 이유에 근거한 것은 아니었지만, 심지어 히틀러까지도 이 잡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을 정도이다. 나아가 1946년까지는 인종상으로 유대인이면서 증조부, 조부, 부친과 본인에 걸쳐 4대가 가톨릭 신자인 것이 확실하지 않은 경우, 후보자의 예수회 입회를 금지하기까지 하였다[49].#

아이러니컬하게도 개신교와 전혀 상관 없는 동유럽 정교회 문화권에서도 예수회에 대한 음모론이 흥했다. 프리메이슨과 한 패라는 식의 음모론도 있고 러시아 제국에서는 동방 가톨릭 교회를 내세워서 동유럽에 침투하는 예수회 조직들에 대해 매우 적대적이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거장 도스토옙스키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을 읽어 보면 주인공 중 하나인 알료샤가 예수회를 무슨 죽음을 먹는 자를 언급하듯이 자주 언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형 이반의 극단적인 주장을 듣고 '그런 건 예수회나 할 법한 사악한 생각이에요!'라고 외쳤다.[50]

동유럽 문학사에서 시간, 공간적 배경으로서 큰 위상을 가진 현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지방에서 역사적으로 가톨릭을 믿는 폴란드계와 폴란드화 된 리투아니아계 귀족, 지주 계층이 주로 예수회 교육을 받으며 정교회 신자가 다수였던 농민들을 핍박, 괄시하고, 원래 정교회를 믿던 토착 엘리트들도 그 양질의 교육 과정과 나머지 서유럽 세계와의 접촉을 미끼로 가톨릭 쪽으로 낚아채 버린 전례가 상당히 많다 보니 이런 음모나 꾸미는 음험한 이미지로 각인된 듯하다.

엉뚱하게 일본에서도 (특히 서브컬처계 쪽에서) 예수회를 '일본을 정복하고 식민지로 삼으려고 했었던 악의 비밀결사'라고 보는 이미지가 강하다. 갖가지 음모론이 회자되는데 대표적인 걸로 꼽아보면 혼노지의 변의 배후였다느니, 다케다 신겐을 죽인 게 사실 예수회라느니,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아타미 은산을 탐냈고 종국에는 일본을 정복하려 했다느니, 가라샤를 죽였다느니 하는 설 등이 있다. 물론 단편적인 일부 사실의 편린만 가지고 부풀린 허무맹랑한 이야기라는 게 일반적인 시각. 일본에서 예수회 음모론이 흥한 건, 예수회가 일본에 가톨릭을 전파한 이후 한때 일본 무역을 독점했기 때문이다. 과거 남미의 경우 스페인포르투갈의 경우 세속국왕이 임명한 주교만 포교하겠다는 주장을 했지만, 교황청에선 프란치스코회도미니코회의 동시 진출을 허용한 까닭에 무역 이권을 두고 수도회끼리 서로 경쟁하고 원주민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전투까지 벌이는 막장짓을 하였고, 예수회에선 이 모습을 보고 포교의 전속 권한과 더불어 무역 독점을 요구해 확보하였다. 이에 당연히 무역이권을 탐내는 일본 내부 세력과 타 수도회에서 예수회에 갖가지 누명를 씌워 고소하는 사례가 많았다. 이후 도쿠가와 막부가 정권을 잡은 다음 가톨릭을 좋게 보지 않았던 영국인 사무라이 윌리엄 애덤스가 일본의 서양 무역권을 관장하면서 철저히 탄압 당하게 되었고, 뒷배였던 포르투갈과 스페인 또한 영국, 네덜란드같은 신교를 믿는 신흥 제국주의 국가에 밀려 몰락하면서 일본 내 가톨릭 세력도 사실상 소멸하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더불어 현대까지 일본 사회 전반의 가톨릭 교회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탓까지 겹쳐 일본에서 예수회 음모론이 살아남은 원인이 되었다.

영미권 개신교 음모론에서는 일루미나티와 엮이기도 하는데, 과거 예수회 독일 관구 본원이 바이에른 잉골슈타트[51]에 있었기 때문이다.

드루킹 등에서 문재인 정부를 제수이트 정부라고 했으나, 실제로는 재수회를 예수회로 착각한 것으로, 개신교 근본주의 음모론의 재탕에 불과하다. 이와 별개로, 한국에서 예수회를 '제수이트'라는 영문 명칭의 한글 발음으로 표기하는 경우 대부분 음모론자들이 그렇게 부르는 경우이다.

가뜩이나 음모론의 주 떡밥인데, 예수회 출신의 프란치스코 교황이 즉위한 이후로는 더더욱 공격을 많이 받는다. 특히 프란치스코 교황이 해방신학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보수파의 눈으로 볼 때 상당히 진보적인 성향의 교황인지라 국내 보수 개신교 진영에서는 가톨릭 신자인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제수이트 음모론과 엮여 예수회 = 좌파로 몰아가는 경향이 있다.

다만 음모론 수준에 해당하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라도, 가톨릭 교회 내에서도 국내와 해외를 막론하고 현재의 예수회를 전통주의를 배격하는 좌경화된 단체로 보는 시각은 흔한 편이다. 그러나 일반화하기는 어려운 것이, 예수회 출신 인물 중에서는 박홍 루카 신부이한택 요셉 주교와 같이 정치적으로 매우 보수적인 경우도 있다. 반면 이 신부들에게 배운 제자들이 진보 시민단체나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활동을 하는 경우도 많다. 이처럼 예수회 내부에는 정치적으로 다양한 목소리가 있기 때문에 예수회라는 세계적인 수도회의 정치적 성향을 '좌파' 라는 단어 하나로 규정하는 것은 다소 성급한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9. 기타

스위스에서는 무려 연방헌법(1848년 제정)으로 예수회의 활동을 금지했는데 이는 1973년에서야 개정되었다. 그 이유는 존더분트 전쟁 참고.

예수회와 이름이 비슷한 예수수도회(Congregatio Jesu)라는 수도회도 있는데, 이 수도회는 여자 수도회(수녀회)이다(옛날에는 "동정성모회"라고도 불렸다). 1609년 설립된 최초의 활동 수녀회로, 설립자인 영국인 여성 메리 워드(Mary Ward, 1585-1645)는 이냐시오 데 로욜라 성인의 영성에서 깊은 감명을 받아 예수회의 회헌에 기반하여 수녀회를 창립했다. 예수수도회는 로마에 본부를 두고 전 세계에서 여성교육 등 여러 사도직 활동을 하고 있으며, 한국에는 1964년에 진출하여 대전광역시 중구 대흥동에 본원을 두고 있다. 예수수도회 한국관구는 대전성모초등학교대전성모여자고등학교[52]를 운영하고 있으며, 학교 외에도 선교, 복지, 이주노동자 돌봄 등 여러 활동을 하고 있다.

유튜브예수회 회원 양성과정에 대한 동영상이 올라와 있다. 입회와 양성과정에 대한 설명을 담고 있다.
https://youtu.be/aPJvGKZxl4I?si=Mm-xbOqnG-PFy4vp

10.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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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후술되는 내용을 봐도 알 수 있듯이, 후에 헤수이트 운동을 주도한 것도 스페인 가톨릭이다.[2] 이 때문에 근본주의 개신교 진영에서는 종종 악마화되어 묘사된다.음모론과 결부된 일부 극단적 개신교인들은 예수회가 이슬람창설을 도모했느니, 프리메이슨과 연관되어 있느니 하는 소리를 하는데, 당연히 말같지도 않은 소리다.[3] 이렇게 자기 자신의 영성을 단련하는 것과 인격완성을 강조한다는 면이 부각되기 때문에 인간의 구원에 있어, 하느님의 은총 자체를 중요시하는 가톨릭의 일반적인 가르침과 충돌하는 면이 있을 수도 있다.[4] 미국워싱턴 DC 소재의 명문 대학으로 정치 외교학, 행정학, 법학은 전미 탑 스쿨 중 하나이며 미국 최초의 가톨릭계 대학이기도 하다. 미 대학농구의 간판격 대학이기도 하며, 패트릭 유잉, 앨런 아이버슨, 알론조 모닝 등이 본교 농구팀 출신이다. 영화 엑소시스트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5] 창시자인 이냐시오 데 로욜라 성인의 이름을 붙인 대학.[6] 미국 뉴욕시 브롱스 및 맨하튼 소재.[7] 실제로 데카르트는 늦잠을 자는 버릇이 심했는데, 라 플레슈에서는 이 버릇을 강제로 교정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데카르트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특별 대우해주었다. 사실 데카르트 정도면 보수성 상관 없이 특별 대우하지 않았을까[8] 창설자 이름을 본 딴 도미니코회, 베네딕토회, 프란치스코회 등과 달리 이냐시오회가 아닌 예수회로 이름을 지은 것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 창립자 이냐시오 데 로욜라는 "내 이름은 시간이 흐르면 잊혀야 할 이름이기에 내세울 것이 없지만 그 분(예수)의 이름은 영원히 기억되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답하였다.[9] 당장 마테오 리치 본인도 선교사로써의 사제복이 아니라 중국의 유학자들이 입는 유건에 도포를 입고 스스로를 유학자라고 자처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10] Deus의 중국어 음역이다.[11] 아이러니하게도, 예수회 이전 동방 가톨릭 교회 등장은 아무도 딴지걸지 않았다. 물론 그때에는 이미 동방 가톨릭 교회, 당대에 '경교'라는 이름으로 전래된 기독교는 가톨릭에서 보면 '이단'이고 또 천 년도 전의 일이었으니.[12] 사실 '외래 종교에 대한 거부감'은 꼭 기독교에 대해서만 그런 것도 아니고, 불교도 후한 명제 때에 처음 전래되고 천 년 동안 삼무일종법난이라 불리는 대대적인 종교 탄압을 겪어 침체한 시절도 있었다.[13] 만주족 왕조인 청에서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가 철저히 중국화를 추진하면서도 선교사들을 남겨두었던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14] 여담으로 볼테르는 중국에서 전례 문제 즉 제사 허용이나 '천주' 칭호를 두고 예수회와 도미니코회 사이에 치고 받던 모습, 나아가 교황의 해당 문제에 대한 금령이나 이로 인해 중국에서 황제의 격노를 사서 예수회 선교사들이 추방된 것을 두고 자신의 저서 <관용론(Traité sur la tolérance, 1763년)> 제19장 「중국에서 벌어졌던 논쟁에 대한 보고(Relation d'une dispute de controverse à la Chine)」에서 "예수회나 도미니코회나, 꼴 같지도 않은 것들이 신 팔아서 아주 놀고 앉았네. 자업자득이지"라고 비웃었으며, 이들을 비꼬는 작품도 몇 편 썼다. 볼테르의 <관용론> 집필 동기부터가 ‘장 칼라스 사건(L'affaire Jean Calas)’이라는 가톨릭에 의해 자행된 개신교 탄압 사건을 비판하려 한 것으로, 실제로 볼테르는 이 저서의 집필을 통해 해당 사건의 부당함을 사회에 고발, 재심에서 무죄 선고를 이끌어 내기에 이른다. 강희제가 중국에서 가톨릭에 대한 관용 칙령을 반포(1692년)하기 7년 전에 프랑스에서는 루이 14세가 낭트 칙령을 폐지(1685년)하고 가톨릭 세력에 의한 위그노 박해가 본격적으로 가시화되었고, 프로이센에서는 1721년 할레 대학 부총장이었던 크리스티안 볼프(Christian Wolff)가 퇴임 기념 강연에서 공자와 유교의 가르침을 들며 "신에 대한 개념 없이도 인간은 충분히 윤리적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중국인들이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니까요?"라는 내용의 “중국인의 실천철학에 대한 연설”을 행했다가 소위 '경건주의' 신학자들에게 무신론자로 고발당하고 1723년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명으로 프러시아에서 추방되는 등, '중국인들이 가톨릭을 탄압하고 박해한다'고 징징거리기에는 당장 유럽 안에서 가톨릭-개신교 간에 자기네들 종교 교파가 아니라고 서로 욕하고 박해하고 탄압하고 있으니, 그걸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지켜 보는 볼테르 입장에서는 "지금 누가 누구더러 뭐라는 거야?"라고 기가 찼던 것이다. 볼테르의 관용론이나 볼프의 중국인의 실천철학에 대한 연설은 모두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있으니 관심있는 사람은 일독을 권한다.[15] 네르친스크 조약의 원문은 라틴어로 작성되었다.[16] 중국 이름은 낭세녕(郎世寧)이다.[17] 좋게 말하면 원칙주의이고, 나쁘게 말하면 근본주의다.[18] 냉소적으로 보면 예수회나 도미니코회/프란치스코회나 모두 자신들이 접한 일면을 가지고 그게 전부이자 본질이라고 믿고 내세운 셈이었다.[19] 청 왕조에 의해 북경을 잃고 남쪽으로 밀려난 남명 정권의 경우 마지막 황제인 영력제가 청 왕조의 지속된 공세로 궁지 끝에 몰린 가운데 앞서 가톨릭에 귀의한 태후 왕씨(세례명 안나)의 청을 받아들여 '명나라 재건을 도와 준다면 황제인 내가 책임지고 솔선해서 중국에 가톨릭 신앙을 퍼뜨리겠다'는 파격적인 조건까지 내걸며 바티칸의 로마 교황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당시 교황 알렉산데르 7세부터 미온적인 반응이었고, 그때 바티칸의 로마 교회라고 지구 반대편인 중국에 뭘 지원해 주고 말고 할 여력도 없었다. 청 왕조의 순치제의 경우에는 천연두에 걸려 사경을 헤맬 때 아담 샬에게 만일 자신이 살아난다면 그리스도인이 될 것을 약속할 정도였다. 그러나 끝내 그는 살아나지 못했다. 바티칸이 영력제의 요청을 수락해 중국을 지원하여 반청복명에 일조했다면, 그리고 순치제가 아담 샬에게 했던 말마따나 기적적으로 회복했다면 중국의 역사, 나아가 세계의 역사는 다른 길을 가게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이제 와서는 부질없는 소리일 뿐이다. 애초에 급박한 상황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면 뭐든지 말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기도 하고.[20] 프랑스 국적의 선교사들은 포르투갈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바티칸에 대해 독립적인 노선을 유지할 수 있었고, 중국에서 의례논쟁이 심화해 가면서 기존 예수회의 '적응주의' 선교 방침이 유럽에서 큰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을 때조차도 프랑스 국적의 선교사들은 오히려 중국의 유교 경전과 역사서를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등 한학(漢學) 연구에 박차를 가하면서 더욱 적극적으로 유가 사상과 크리스트교 사이의 접점을 강조하는 노선을 주도하였다. 이러한 프랑스 국적 예수회 선교사들의 전도 노선을 ‘색은주의(Figurism)’라고 해서, 기존 마테오 리치가 세웠던 중국 예수회의 적응주의를 한 층 더 심화시킨 것이었다.[21] 입관 전부터 불교를 믿었고 입관한 뒤에는 중국식 선불교에 더해 티베트 불교도 수용했던 만주족 왕조에서, 강희제는 가톨릭의 교리에 관심도 없었고 배우려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종교를 탄압하지도 않아서 가톨릭 전도를 허락하고 가톨릭 교회에 대한 조정의 박해를 금지하는 칙령을 내리기도 한다.[22] 따져 보면 기독교적으로도 매우 의미심장한 문구인 게 잠언에서는 "지혜의 근본을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하고, 과거 제사장들은 "야훼께 성결"이라는 문구가 적힌 머리띠를 하였다.[23] 이는 어느 정도 마테오 리치가 의도한 것이기도 했다.[24] 강희제는 교황을 교왕으로 불렀다고 한다. 사실 교황을 법왕 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25] 조너선 스펜서 ‘강희제’[26] 쑹녠선 저 <동아시아를 발견하다 ,임진왜란으로 시작된 한중일의 현대,> 역사비평사, 2020년.[27] 강희제 본인은 다른 선교사들조차도 "이제 기독교만 믿으면 완전무결한 철인군주다"라며 혀를 내두를 정도로 서양 문물에 많은 관심을 갖고 라틴어까지 공부할 정도의 인물이었는데, 교황의 특사라고 찾아온 인간이 이런 인간을 '중국통'이랍시고 자신에게 내세우니 강희제로써는 "이것들이 지금 날 뭘로 보는 거야?" 식으로 더욱 빡칠 수밖에. 현대 기준에서 보아도 명백하게 상대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 존중, 예의 하나 없는 결례였다. 덧붙여 기독교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교리에 대해서도 강희제는 자신이 옆에 두고 있던 예수회 선교사 페르비스트에게 "서양인들은 예수가 전한애제 시기에 태어났고 인간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했다고 하며, 노예와 주인이, 남자와 여자가 함께 모여 신성한 물질을 마신다고 하는데, 어째서 신은 꼭 자기 아들을 죽이지 않고서는 아들과 인류를 용서할 수가 없었던 거냐?"라고 물었는데, 페르비스트는 이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고 한다.[28] 다만 망자의 이름 위에 반드시 ‘천주교효경부모지도리’(天主敎孝敬父母之道理)라고 쓰면 위패 사용이 허락됐다.[29] 강희제의 이러한 태도는 현대 중국이 바티칸 교황의 특권 가운데 하나인 주교 서임권을 부정하고 중국 정부가 주교 서임권을 행사하는 현재의 중국 정책과도 비슷하다.[30] 교황에 의해 명목상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로 서품되었다.[31] 소 요시토시가 임진왜란 이후 조선으로부터 용서를 받아내고 조선-일본간 국교를 재개시키려고 하면서 벌인 국서 위조와 비슷했다.[32] 이 와중에 다소 엉뚱하게도 누르하치의 숙청당한 큰아들 추옝의 장자의 장손의 장손으로 이어지는 누르하치 종갓집(!)이 일가족째로 세례를 받고 입교했다가 옹정제 즉위 후 황8자당 숙청작업에서 잘못 찍히고 이 신앙까지 문제시되어 일가가 내몽골로 유배되는 난리가 벌어져 수많은 일가족이 순교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아무리 예수쟁이라 한들 누르하치의 종가로서 존중받아야할 이들을 몰살하는건 황실의 체면에도 안 좋다 여겼는지 옹정제가 결국 적당한 선에서 못 이긴 척 천자에 대한 충성과 양립하는 신앙의 자유를 눈감아주며 이들을 유배에서 풀어줬다.[33] 기독교를 전도하는 선교사들에게 "나도 그럼 티베트 불교 스님들 몇 명 너네 나라에 보내서 불교 전도하게 해 볼까? 니들 그 사람들한테 무슨 말 하고 어떻게 접대할래?"라고 따져 물었다. 볼테르의 「중국인과의 회담(Entretiens chinois)」에도 해당 발언이 등장한다.[34] 대교안과 관련해서 사형을 언도받은 사람이 없다는 거지 건륭제 시절에 처형당한 사람도 분명 있었다. 조선처럼 대대적으로 박해를 안 했을 뿐.[35] 쉽게 말해 ‘선교사 니들 각자의 종교의 자유는 허용할 거고 중국에 오는 것도 막지 않겠지만 (우리가 허가한 사람이 아닌 한) 다른 사람한테 전도하는 건 절대 안 된다’ 비슷한 처분이었다. 현재 중국 당국이 가톨릭을 대하는 태도와 비슷하다.[36] 중국에 있는 모든 선교사들은 중국 전통 의례 금지 사안을 숙지하고 준수하겠다고 서약해야만 전도 활동을 할 수 있었다.[37] 당시 천주교 교회(=성당)을 일컫던 일본의 용어.[38] 북쪽의 찐氏, 남쪽의 응우옌氏[39] 아담 샬소현세자 두 사람의 행적을 비교하고 주고받았다는 서신 내용을 하나하나 따져보면, 거짓이 아니라도 서신 교환 정도에 그쳤을 가능성이 높다.[40] 파리 외방전교회는 예나 지금이나 소속 주교와 신부의 숫자가 매우 적다. 이 때문에 선교지에 주교를 파견하여 방인 사제를 양성하는 전략으로 선교를 해온 것. 한국에서 순교한 파리 외방전교회원 숫자(13명)는, 파리 외방전교회의 규모를 감안하면 매우 큰 피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처음 교황청이 파리외방전교회에 조선 선교를 위탁했을 때, 파리외방전교회는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회원이 불과 10명이었다![41] 해방 이후 6.25 전쟁을 거치면서 살해당한 파리외방전교회원 숫자까지 포함하면 한국에서 24명의 파리외방전교회원들이 살해되었다.[42] 한국 가톨릭 최초의 수도회.[43] 유럽의 예수회 관구가 아닌 미국의 예수회 관구가 해방 이후에 한국에 지부를 설치했다는 것에 주목할 것.[44] 정확히 말하자면 수사 시절의 종신서원 때문에 수사 신분은 그대로 유지되지만 수도회원으로서의 신분에서는 자유로워진다. 수도회마다 케바케인데, 예수회의 경우에는 예수회원이 주교로 임명되어 주교품을 받으면 예수회에서는 탈퇴하게 된다. 그러나 교구장 주교가 되어도 수사로서의 종신서원 때문에, 주교가 되어 예수회를 떠나도 평생 수도사제로 살게 된다. (ex: 이한택 요셉 주교)[45] 즉, 교황으로서 바티칸 시국 국가 원수이면서 사제로서는 로마 교구 교구장인 프란치스코 교황수도자이다. 예수회에 입회하여 수사로서 수련 과정을 마친 후 종신수도서원을 했기 때문이다.[46] 물론 일부에서 의혹을 제기하는 것마냥 프란치스코 교황공산주의자는 아니다. 애초에 가톨릭은 성격상 결코 공산주의와 친해질 수 없다.[47] 성 베드로 대성당도 제수 성당과 같은 원리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효과가 다소 밋밋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우선 성당 정면의 좌우 너비가 워낙 넓다보니 각 기둥의 거리가 먼데, 더 많아진 기둥들 간의 입체감 차이는 상대적으로 적어져 입체감이 달라지는게 생각보다 잘 눈에 안띈다. 또한 정면의 크기에 비해 입구들이 작은 편인데 중앙으로 가면서 그 크기도 커졌다 작아졌다가 반복되며, 2층의 발코니 때문에 중앙의 입구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다. 그런 작은 입구를 강조해야 하니 밋밋해보이는 것.[48] 따지고 보면 아메리카 등지에서 강제개종의 일선에서 나선 흑역사가 있기도 하다.[49] 더 정확히는 1593년에서 1594년에 걸쳐 진행된 총회에서는 부모가 유대인이거나 무슬림인 경우에만 입회를 금지하였으며, 이는 5차 총회까지도 연장되었다. 이는 창립자 이냐시오 데 로욜라 성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유대인이나 무슬림 출신 개종자들과 (몇대에 개종했는지와는 상관없이) 그 자손들의 입회를 막으려는 조치로 해석된다. 이후 무슬림에 대한 제한은 사라졌으나, 1923년 27차 총회에서 증조부, 조부, 부친, 본인의 4대에 걸쳐 가톨릭 신자가 아닌 유대인의 입회를 금지하였다. 1946년 29회 총회에서 이러한 금지가 해제된 이후에도 "유전적인 배경"과 관련된 의심이 있는 후보자에 대해 주의할 것을 주문했다.# 물론 현재는 본인이 스스로 개종하여 예수회 신부로 아무런 제약없이 활동하는 경우도 있다.예시[50] 정작 예수회 출신으로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부이기도 했던 앙리 드 뤼박 추기경은 저서 무신론적 인본주의의 드라마(Le drame de l'humanisme athée)에서 포이어바흐마르크스의 유물론, 니체체의 니힐리즘과 콩트실증주의 무신론을 비판한 후, 도스토예프스키만이 근대 무신론을 제대로 지적했다며 〈악령〉을 굉장히 높게 평가했다.[51] 일루미나티가 이곳에 존재했다.[52] 부산성모여자고등학교천주교 부산교구에서 운영하고 있다. 예수수도회와 부산교구 모두 성모여자중학교도 운영하고 있었으나, 부산 성모여중과 대전 성모여중 모두 폐교된 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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