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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4 15:07:13

예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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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f0000,#7f0000><colcolor=gold,gold> 설립자 <colbgcolor=#fff,#1f2023><colcolor=#181818,#e5e5e5>이냐시오 데 로욜라 · 니콜라스 데 보바디야 · 디에고 라이네스 · 시망 호드리게스 · 알폰소 살메론 ·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 피에르 파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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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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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의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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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7세기 종교 개혁 주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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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내용
<colbgcolor=#F8F0C3,#191919> 95개조 반박문 마르틴 루터의 면벌부 판매 비판
사코 디 로마 교황권 위기의 상징
슈말칼덴 전쟁 가톨릭루터파 대립
기독교 강요 장 칼뱅의 이중예정설과 직업소명설 등장
수장령 헨리 8세와 잉글랜드의 교황청으로부터 독립
예수회 이냐시오 데 로욜라의 예수회 창립
트리엔트 공의회 가톨릭 교리 재확인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신성 로마 제국루터파 인정
위그노 전쟁 프랑스 가톨릭과 칼뱅파 간의 종교 전쟁
통일령 엘리자베스 1세잉글랜드 국교회 선포
낭트 칙령 앙리 4세의 칼뱅파 인정
30년 전쟁 친합스부르크 세력과 반합스부르크 세력의 충돌
베스트팔렌 조약 개인의 종교 자유 인정
← 중세 교황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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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Societas Iesu | Iesuitae
파일:예수회 상징.svg
<colbgcolor=#7f0000,#7f0000><colcolor=gold> 표어 <colbgcolor=#7f0000,#7f0000><colcolor=gold> 라틴어 {{{#7f0000,#gold 'Ad maiorem Dei gloriam'}}}
영어 For the Greater Glory of God
한국어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설립 시기 1540년 9월 27일 ([age(1540-09-27)]주년)
설립자 이냐시오 데 로욜라
니콜라스 데 보바디야
디에고 라이네스
시망 호드리게스
알폰소 살메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피에르 파브르
총장 초대 이냐시오 데 로욜라 S.J.
현재 아르투로 소사 S.J.
(Arturo Sosa)
규모 13,995명 (2024)
종교 가톨릭
소속 교황청
소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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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f0000,#7f0000><colcolor=gold> 총회 <colbgcolor=white,#1f2023>이탈리아 로마 예수회 총회
(Borgo Santo Spirito 4, 00195 Roma-Prati, IT)
본당 이탈리아 로마 제수 성당
(Piazza del Gesù, 00186 Roma RM,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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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별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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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f0000,#7f0000><colcolor=gold> 라틴어 <colbgcolor=white,#1f2023> Societas Iesu, Iesuitae
영어 Society of Jesus, Jesuits
스페인어 Compañía de Jesús, Jesuitas
프랑스어 Compagnie de Jésus, Jésuites
이탈리아어 Compagnia di Gesù, Gesuiti
포르투갈어 Companhia de Jesus, Jesuítas
독일어 Gesellschaft Jesu, Jesuiten
네덜란드어 Sociëteit van Jezus, Jezuïeten
폴란드어 Towarzystwo Jezusowe, Jezuici
러시아어 О́бщество Иису́са, Иезуи́ты
일본어 イエズス会
중국어 耶稣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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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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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f0000,#7f0000><colcolor=gold> 웹사이트 <colbgcolor=white,#1f2023>파일:예수회 상징.svg 홈페이지(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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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파일:la_civilta_cattolica_logo.png 라 치빌타 카톨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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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징3. 특징
3.1. 영신수련과 예수회의 교육
4. 역사 및 활동
4.1. 초창기4.2. 엘리트 교육4.3. 선교4.4. 근황
5. 예수회 성당의 예술6. 예수회 소속 인물
6.1. 총장6.2. 성인6.3. 기타
7. 관련 창작물8. 음모론 관련9. 기타10. 관련 문서11.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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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AD MAIOREM DEI GLORIAM[1]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이냐시오 데 로욜라가 지은 예수회의 표어
가톨릭의 남성 수도회. 가톨릭 내에 가장 많은 사제들을 보유한 수도회이며 '제수이트(Jesuits)'라는 이명으로도 알려져 있다. 예수회에 소속된 사람은 이름 뒤에 S.J.가 붙는다.

2. 상징

파일:예수회 상징.svg
▲ 예수회의 문장
예수회의 설립자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가 도입한 문장으로 로마 제국 시대부터 사용된 무적의 태양(Sol Invictus) 문양 안에 크리스토그램 IHS가 쓰여 있다. 해당 글자는 문자 그대로 예수를 뜻하는 그리스 문자 ΙΗΣΟΥΣ의 앞 세 글자 ΙΗΣ를 로마자로 치환한 것[2]이다. 참고로 ΙΗΣ는 '요타 에타 시그마'라고도 읽는다. 중앙 상단부에는 알파벳 H를 통과하는 십자가가 배치되어 있고, 하단부에는 예수가 십자가에 박혔을 때 쓰였던 세 개의 못이 그려져 있다.

3. 특징

예수회는 공식적으로 수도회로 통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재속 사제 생활 공동체에 가깝다. 즉, 이들은 세속과의 교류를 많이 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통념의 수도회처럼 폐쇄적인 집단은 아니다. 다만 예수회도 여느 수도회처럼 기본적으로 청빈, 정결, 순명의 서원을 발하고 엄격한 내부 규율이 존재하기 때문에 온전히 재속 종교 단체라고 취급할 수는 없다.

예수회는 회원들의 인격 완성과 이웃 봉사, 그리고 하느님에게 더 큰 영광을 드리는 일을 중요한 목표로 삼고 있으며 창립자인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의 기도와 영적 체험을 체계적으로 서술한 저서 "영신수련(靈神修鍊, Exercitia Spiritualia)"이 이러한 목표를 위한 예수회원들의 수련과 기도훈련의 지침서이다.

교황에 대한 절대적인 신임과 복종을 기반으로 하는 군대식 정신도 특징인데, '마치 생명이 없는 몸처럼(perinde ac cadaver)' 세계 어디에 있든, 세계 어디로 가든 교황의 지시에 따라 행동하겠다는 신조를 지니고 있다.

역사적으로 예수회는 가톨릭종교개혁개신교의 도전에 부딪쳤을 때 그들을 돌파하는 선봉에 선 대항종교개혁의 상징과도 같은 단체였다.[3] 종교적 자기 반성과 엄격한 복종을 요구하는 조직을 강조하는 쇄신을 통해 가톨릭이 당면했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근세에서 근대까지 아시아남미 지역에 대한 선교에 큰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3.1. 영신수련과 예수회의 교육

영신수련(靈神修鍊) 개념은 이것을 통해 가난하고 겸손한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전적인 자기 헌신에서 나오는 영적이며 인간적인 태도를 말한다. 예수회의 기본정신은 창립자의 정신에 따라 회원 각자의 인격완성과 종교·교육·문화·사업을 통하여 높은 도덕심과 인내, 소명(召命)에 따르는 생활을 하도록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회원은 기도와 고행을 통하여 하느님의 능력을 받고 예수님처럼 봉사하며 살아가려고 노력하여야 한다.[4]

그렇기 때문에 다른 수도회와 달리 예수회는 초기에 일반 교육사업을 매우 강조했다. 1547년 최초의 예수회 대학을 설립한 이래 전세계 100여개 국가에 진출해 226개의 종합대학과 단과대학을 세웠다. 한국에는 서강대학교가 있고, 미국에는 보스턴 칼리지, 조지타운 대학교[5], 로욜라 대학교[6], 포덤 대학교[7], 세인트루이스 대학교, 시애틀 대학교 등이 있으며, 일본에는 사립 3대 명문인 소케이조치의 일원인 조치대학(소피아 대학교)이 예수회에 의해 설립됐다. 이것은 예수회가 선교활동을 하면서 신학·철학·문학·과학에 밝은 선교사들을 각지에 파견하며 교육사업에 힘썼기 때문이다.

예수회의 교육은 서양 지성사에 한 획을 그은 천재들을 배출해 낸 것으로 유명한데 대표적인 예로는 예수회 계열 학교인 라 플레슈(La Flèche) 출신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르네 데카르트가 있다. 많은 학자들이 거론해 알다시피, 데카르트는 서양 지성사에 한 획을 긋다 못해 서양 지성의 방향 자체를 전환해 버린 경이로운 천재다. 물론 데카르트는 라 플레슈에서 배웠던 것들을 상당부분 부정했지만 라 플레슈에서 배운 학문에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라 플레슈의 교사들이 당대 최고 수준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말은 실제로도 사실이었다.

예수회가 가톨릭 계열이라서 보수적이고 교조적인 단체였다고 보면 이는 상당 부분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예수회의 교육을 교조적이라고 평가하는 학자도 있지만, 반대로 예수회의 교육을 매우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학문의 장이었다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8] 두 의견 모두 무시할 수는 없지만, 단 하나 확실한 것은 예수회의 교사 양성 교육이 현대 학제의 사범대학만큼은 못하지만 거의 그에 준하는 정도의 체계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교육 '체계'라고는 찾아보기 힘들던 당시에는 매우 획기적인 것이었고, 그 결과 예수회의 체계화된 교육은 근대에 한 획을 긋는 수많은 학자들을 배출할 수 있었다.

4. 역사 및 활동


근세 유럽 지성사학자 휴 트레버-로퍼는 예수회에 대해 기동성을 중시해 온 특성에 따라 '근세 가톨릭 반격의 기동 타격대, 즉 대항종교개혁 특공대(Shock-troops of Counterreformation)'라고 평했다. 이와 연관된 의미로 '하느님병사들', 혹은 '하느님의 해병대'라는 별명도 있다. 사실 창시자인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부터가 군인 출신이다.

4.1. 초창기

1534년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등과 함께 파리에서 창설했던 가톨릭 모임이 그 기원으로, 1540년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정식으로 인가받으며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었다.

16세기 유럽에서는 그리스도교의 분열이 일어나 개신교가톨릭 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가톨릭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하면서 프로테스탄트들의 활동과 교세가 활발하게 번져갔으며 마르틴 루터장 칼뱅의 등장으로 가톨릭의 교세는 위축되기에 이르렀다. 예수회는 이러한 가톨릭의 위기를 배경으로 탄생하였다. 어찌보면 스페인이 종교개혁의 위기 속에 가톨릭을 잃지 않았던 건 예수회 운동 덕분이기도 하다. 루터와 칼뱅의 교리와 가톨릭의 허점을 노린 지적들이 파고들 틈을 막아버렸으니.

이냐시오는 군인으로 활동하다가 부상을 입어 치료하는 과정에서 깊은 신앙체험을 하고 가톨릭에 몰입하게 되었다. 군인의 엄격한 기풍에 걸맞게 회원들은 군대제도를 모방한 엄격한 규율을 중심으로 양성되었다. 이에 맞춰 예수회는 굳건한 결합력을 자랑했으며, 반 종교개혁 운동과 유럽 이외 지역의 선교에 앞장섰다. 이냐시오 본인을 비롯하여 2, 3대 총장 모두 스페인 출신이었고, 스페인 왕실의 비호를 적극적으로 받은 만큼 초기 예수회는 전투적이고 팽창적인 스페인 가톨릭 신앙의 영향력이 짙었다.

예수회는 초기부터 "교황이 원하시면 어디든지 간다."는 자체 최종서원의 모토 답게 아시아와 아메리카의 선교에서 눈부신 교두보의 역할을 담당했다. 스페인에서 시작하여 유럽 전역은 물론 아시아와 아메리카 현지에서 현지인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학교와 의료 및 봉사를 위한 병원 등을 적극적으로 운영하며 지역 현실과 문화를 알고 거기에 적응하며 선교를 펼쳐 지역현실 파악에 더딘 유럽교회나 교황청과 갈등이 생기기도 하였다.

예수회가 탄생한 역사적 배경 자체가 마르틴 루터가 불 지핀 종교개혁의 불길에 안일하게 대응한 교황청과는 달리 스페인이나 북이탈리아, 플랑드르 지방의 지역 교회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가톨릭의 신앙적 혁신을 추구했던 것이다. 예수회가 군대적 규율에 기반하여 교황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수직적인 형태를 가졌다고 하지만 이는 수도회의 행동적 특징일 뿐이다.

이냐시오 데 로욜라를 비롯한 예수회 초기의 신앙적 지도자들은 인문주의적 교육을 받으며 스페인이나 파리의 신비주의적 신앙관을 이어 받았기 때문에 개인의 양심을 중요시했다. 미사뿐만 아니라 사적인 고행과 성찰, 명상을 통한 개인적인 신학적 체험에 중점을 두는 등 르네상스의 신학적 조류에 큰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교황청과의 노선 차이가 역사적으로 눈에 띄는 편이다. 애초에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의 대표 저서이자 예수회 양성 과정의 핵심이자 꽃인 "영신수련"에서도 이냐시오 본인은 "이러한 (신앙적 각성) 과정은 이를 체험하는 각 개인의 성격, 배경, 심성, 성향에 맞추어 적용해야 한다"고 말했을 만큼 이성적이고, 지성에 기반한 믿음을 중시하는 신앙관을 가지고 있다.

4.2. 엘리트 교육

이냐시오 데 로욜라 본인부터 귀족 가문의 인문주의적 교육을 받은 상당한 지적 엘리트였고, 예수회 내부에서도 교황청에서는 억압한 에라스무스의 인문주의 신학관의 영향력이 상당히 컸던 만큼 예수회는 교육 활동, 그것도 당대 유럽 귀족과 군주들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한 엘리트 교육에 집중하여 짦은 세월에 지리적으로는 개신교가 장악한 독일이나 동유럽의 영토 속에서 가톨릭 교회가 반격을 가할 수 있는 교두보 확보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심지어 엘리자베스 1세 시절 이후 철저하게 반가톨릭 정서가 뿌리박은 영국에서도 여러 귀족 가문의 교육을 담당했으며, 적지 않은 수의 예수회 선교사들이 담당 지역의 가톨릭 귀족들과 음모를 꾸며 반 왕실 음모 계획에 여러차례 가담했다.[9] 그외에도 근세 유럽에서 가톨릭교회가 개신교의 공세를 막아내고 플랑드르, 보헤미아, 폴란드 등의 영토를 수복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이 때문에 현재까지 영국에서는 예수회의 이미지가 그닥 좋지는 않다.

실제로 폴란드프랑스의 예수회는 당시 국왕들의 가정교사로 개신교 탄압을 부추겼고, 루이 14세의 퐁텐블로 칙령은 예수회 사제가 초안을 작성했다. 이후 위그노들이 영국네덜란드, 독일로 쫓겨나면서 예수회에 대한 적대감정을 가졌고 개신교가 우세한 북유럽 전체에 퍼져나가서 혐오감과 악명이 퍼졌다.

실제로 국교회로 갈아탄 잉글랜드와 그 잉글랜드의 지배 아래 있는 아일랜드에서 가톨릭의 영향력을 수복하기 위해 예수회 수사와 사제가 지속적으로 파견되었다.

명예혁명의 원인이 된 찰스 2세, 제임스 2세의 가톨릭 용인 정책 과정에서도 대륙에서 예수회 사제들이 많이 들어와서 영국 국교회와 그보다 한층 더 반 가톨릭적인 청교도들에겐 공공의 적이었다. 청교도 혁명과 왕정 복고 과정에서 청교도들이 다시 신대륙으로 이주하고 나서 미국에서도 예수회에 대한 감정이 당연히 좋지 않았고, 지금까지 그러하다.

가톨릭 내부에서도 예수회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거나 질투한 역사가 있는데 일단 수도회 호칭을 예수회라고 칭한 점으로 인해 다른 수도회에서 크게 이의를 제기했다고 한다.[10] 초창기 교황 바오로 3세가 창립에서부터 전례 없이 전폭 지지했으며, 무엇보다 내부에선 수직적 위계 구조로 이루어져 있고 교황이외의 다른 권위는 무시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예수회는 다른 가톨릭 조직, 즉 교구 주교나 세속 왕국과도 충돌했고 결국 18세기에 일시적으로 해산되고 포르투갈프랑스 같은 가톨릭 국가에서도 완전히 추방되기도 했다.

본고장인 스페인에서조차 배척받았는데, 예수회가 대항종교개혁의 선봉이었지만 정작 보수적인 스페인에서는 예수회가 지나치게 프로테스탄트적이며 지나치게 유대스럽다 또는 유대인에 온정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개신교는 세속 가톨릭 왕국에 섬처럼 떠 있는 도시들이 많았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 교육에 대해 상당한 투자를 했는데, 예수회 역시 교육 특히 엘리트 교육에 열성적이었다.

4.3. 선교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예수회/선교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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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을
참고하십시오.

4.4. 근황

이렇게 동방 선교가 쇠할 때쯤 스페인포르투갈의 국력도 약해지면서 예수회는 본격적으로 다른 수도회들의 견제를 받기 시작했고, 스페인도 왕권 지상주의를 앞세운 개혁에 나서면서 18세기 후반에는 예수회가 아예 해산되기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예수회에 대한 압력은 아메리카에서 큰 권위를 누리던 예수회 세력의 반감을 불러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에 이르는 라틴아메리카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대표적인 것이 1810년 멕시코 독립운동에 나선 미셸 이달고 등의 신부였다.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오면서 예수회의 재건 운동이 시작된 한편,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 해방신학이 예수회 등에 의해 흥성하기도 하였다.

예수회는 현대에 들어서 근대만큼의 명성이 남아있지는 않다는 평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후로 예수회원들의 대거 환속이 있었고, 교황청에 의해서 이단 신학자로 경고를 받은 회원이 많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과거 예수회의 본래 영성이 쇠퇴하고 지나친 사회 참여로 이냐시오 영성이 훼손되고 있다는 비ml판이 있다.

2013년 3월,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 추기경프란치스코 교황으로 선출됨에 따라 마침내 예수회 출신 교황이 탄생했다. 문제는 예수회 장상들이 프란치스코 교황이 수도사제였을 때 쫓아내려고 안달이 나 있었다는 점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아르헨티나 관구장 당시 해방 신학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는데, 예수회 장상들은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고 탈퇴할 것을 종용했다. 그래서 지금도 교황은 탈퇴한다는 문서를 가지고 있는데, 안 그래도 탈퇴하려던 참에 갑자기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교구의 보좌주교가 되면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수사가 주교가 되면, 수도회원이라는 신분을 유지하되 수도원장이나 수도회 총장에게 순명해야 할 의무에서 공식적으로 벗어나기 때문이다.[11][12] 그래서 예수회 장상들의 속사정은 그리 좋지만은 않다는 후문이다. 탐탁지 않게 보던 사제가 주교가 되고, 추기경이 되고, 교황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다만 그렇다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예수회와 원수를 진 건 절대 아니다. 교황 취임 이후 예수회 총장과 전화 통화를 하였고, 교황 문장 안에 예수회 상징을 넣는다던가 2014년 방한 때는 예수회가 설립한 서강대학교를 깜짝 방문한다던가 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애초에 십수억이나 되는 초거대 집단의 수장이 이 정도로 진보적인 형태를 보이는 것도 그가 나고 자란 라틴 아메리카라는 공간적 배경과 예수회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13]

5. 예수회 성당의 예술

파일:Andrea_Pozzo_-_The_Triumph_of_St._Ignatius.jpg
성 이냐시오의 영광, 혹은 예수회의 선교 활동에 관한 알레고리
(Gloria di Sant'Ignazio / Allegoria dell'opera missionaria dei Gesuiti)
안드레아 포초 作, 산티냐치오 디 로욜라 인 캄포 마르치오 성당
근세의 개신교 예배당이 예술적으로 검소함을 보였음과 대비되게 예수회 계열의 성당들은 더욱 화려한 바로크적인 장식을 보여주어 천국의 모습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려고 하였다. 원래는 예수회 역시 성당의 내부를 단순하게 회반죽을 바르는 등 개신교와 비슷한 검소함을 보였지만, 곧 정반대의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예수회를 창설한 성 이냐시오에게 바쳐진 로마의 성당인 산티냐치오 디 로욜라 인 캄포 마르치오 성당이 대표적인 사례인데 예수회의 평수사, 화가, 그리고 건축가인 안드레아 포초가 1691년부터 1694년에 그린 거대한 천장화 ‘성 이냐시오의 영광(Gloria di Sant'Ignazio)’은 조각과 건축, 회화가 어우러져 입체적인 환각 효과를 보여주는 화려한 장식이다. 주로 바로크 예술에서 볼 수 있는 입체적인 환영을 통한 공간을 보여주는 이러한 것을 콰드라투라(Quadratura) 기법이라고 한다.

예수회의 본당이라고 할 수 있는 제수 성당파사드는 16세기의 이탈리아 건축가 자코모 델라 포르타가 설계하였으며, 이는 예수회 성당들의 정면 디자인의 모범이 될 정도로 당대에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 특징 중 하나는 기둥의 튀어나온 정도를 다르게 하여 입구를 강조한다는 점이다. 제수 성당의 바깥 기둥은 얕고, 점점 가운데 기둥에 가까워질 수록 튀어나오며, 입구 주변의 원 기둥은 벽에서 독립되어 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입구를 강조하고 있다. 제수 성당의 내부는 회반죽이 발려 검소한 모양이었지만 후대에 화려한 바로크적 장식이 덧붙여졌다.

한편 제수 성당의 정면과 유사하게 지어진 산 수산나 성당의 건축가 카를로 마데르노는 이 덕분에 성 베드로 대성당의 정면과 신랑을 설계했지만, 워낙 대성당 정면의 너비가 길어 비례가 다르고, 크기에 차이가 있어 작은 성당인 제수 성당의 정면이 가졌던 특유의 미적 효과가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는 다소 떨어진다는 평을 받는다.[14]

6. 예수회 소속 인물

6.1.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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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냐시오 데 로욜라 디에고 라이네스 프란시스코 데 보르자
<rowcolor=#fff>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클라우디오 아쿠아비바 무치오 비텔레스키 빈첸초 카라파 프란체스코 피콜로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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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산드로 고티프레디 고스빈 니켈 조반니 파올로 올리바 샤를 드 누아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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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르소 곤살레스 데 산타야 미켈란젤로 탐부리니 프란츠 레츠 이냐치오 비스콘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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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지 첸투리오네 로렌초 리치 스타니슬라프 체르니에비츠 가브리엘 렌키에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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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셰크 카레우 가브리엘 그루버 타데우슈 브죠조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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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지 포르티스 얀 로탄 피터르 얀 벡스 안톤 안덜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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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마르틴 프란츠 크사버 베른츠 브워지미어슈 레도호프스키 장바티스트 얀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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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로 아루페 페테르 한스 콜벤바흐 아돌포 니콜라스 아르투로 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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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순서 성명 임기
1대 이냐시오 데 로욜라 1541년~1556년
2대 디에고 라이네스 1558년~1565년
3대 프란시스코 데 보르하 1565년~1572년
4대 에브라르 메르퀴리앙 1573년~1580년
5대 클라우디오 아쿠아비바 1581년~1615년
6대 무치오 비텔레스키 1615년~1645년
7대 빈첸초 카라파 1646년~1649년
8대 프란체스코 피콜로미니 1649년~1651년
9대 알레산드로 고티프레디 1652년~1652년
10대 고스빈 니켈 1652년~1664년
11대 조반니 파올로 올리바 1664년~1681년
12대 샤를 드 누아옐 1682년~1686년
13대 티르소 곤살레스 데 산타야 1687년~1705년
14대 미켈란젤로 탐부리니 1706년~1730년
15대 프란츠 레츠 1730년~1750년
16대 이냐치오 비스콘티 1751년~1755년
17대 루이지 첸투리오네 1755년~1757년
18대 로렌초 리치 1758년~1775년
총대리[15] 스타니슬라프 체르니에비츠 1782년~1785년
가브리엘 렌키에비츠 1785년~1798년
프란치셰크 카레우 1799년~1802년
가브리엘 그루버 1802년~1805년
타데우슈 브죠조프스키 1805년~1814년
19대 타데우슈 브죠조프스키 1814년~1820년
20대 루이지 포르티스 1820년~1829년
21대 얀 로탄 1829년~1853년
22대 피터르 얀 벡스 1853년~1887년
23대 안톤 안덜레디 1887년~1892년
24대 루이스 마르틴 1892년~1906년
25대 프란츠 크사버 베른츠 1906년~1914년
26대 브워지미어슈 레도호프스키 1915년~1942년
27대 장바티스트 얀센스 1946년~1964년
28대 페드로 아루페 1965년~1983년
29대 페테르 한스 콜벤바흐 1983년~2008년
30대 아돌포 니콜라스 2008년~2016년
31대 아르투로 소사 2016년~

6.2. 성인

6.3. 기타

7. 관련 창작물

8. 음모론 관련

음모론의 단골 등장 조직이다. 연원을 살펴보면 과거 16세기 창설시부터 앞장서서 대항종교개혁의 최전선에 섰기 때문에 종교개혁 세력과 적대한 탓이 크며, 이 때문에 개신교 진영에서는 악마화되어 묘사되기 시작했다.[29] 여기에 19세기엔 유대인 음모론과 결합하여 프리메이슨-국제유대인 조직(국제 금융자본)-예수회 삼각 음모론이 매우 흥했다. 이들 조직들의 공통점은 국제적 네트워크를 가졌다는 점이다. 얼핏 보면 허무맹랑해 보이지만 이걸 진지하게 믿은 게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의 독일이었다. 나치 독일이 이런 대중들의 음모론 감정을 이용하여 유대인과 국제적 요소가 있는 조직을 대거 탄압하는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알고보면 예수회 역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는 강경한 반유대주의 성향을 드러냈기 때문에 유대인 음모론과 예수회를 엮는 것은 명백한 허구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으로도 유명한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자신의 저서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예수회가 발행하는 잡지인 라 치빌타 카톨리카(La Civiltà Cattolica)가 "수십년동안 가장 공개적으로 반유대주의적이었다"고 비난할 정도였다. 물론 인종상의 이유에 근거한 것은 아니었지만 심지어 히틀러까지도 이 잡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을 정도이다. 나아가 1946년까지는 인종상으로 유대인이면서 증조부, 조부, 부친과 본인에 걸쳐 4대가 가톨릭 신자인 것이 확실하지 않은 경우 후보자의 예수회 입회를 금지하기까지 하였다.[30]#

아이러니컬하게도 개신교와 전혀 상관 없는 동유럽 정교회 문화권에서도 예수회에 대한 음모론이 흥했다. 프리메이슨과 한 패라는 식의 음모론도 있고 러시아 제국에서는 동방 가톨릭 교회를 내세워서 동유럽에 침투하는 예수회 조직들에 대해 매우 적대적이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거장 도스토옙스키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을 읽어 보면 주인공 중 하나인 알료샤가 예수회를 무슨 죽음을 먹는 자를 언급하듯이 자주 언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형 이반의 극단적인 주장을 듣고 '그런 건 예수회나 할 법한 사악한 생각이에요!'라고 외쳤다.[31]

동유럽 문학사에서 시간, 공간적 배경으로서 큰 위상을 가진 현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지방에서 역사적으로 가톨릭을 믿는 폴란드계와 폴란드화된 리투아니아계 귀족, 지주 계층이 주로 예수회 교육을 받으며 정교회 신자가 다수였던 농민들을 핍박, 괄시하고 원래 정교회를 믿던 토착 엘리트들도 그 양질의 교육 과정과 나머지 서유럽 세계와의 접촉을 미끼로 가톨릭 쪽으로 낚아채 버린 전례가 상당히 많다 보니 이런 음모나 꾸미는 음험한 이미지로 각인된 듯하다.

엉뚱하게 일본에서도 (특히 서브컬처계 쪽에서) 예수회를 '일본을 정복하고 식민지로 삼으려고 했었던 악의 비밀결사'라고 보는 이미지가 강하다. 갖가지 음모론이 회자되는데 대표적인 걸로 꼽아보면 혼노지의 변의 배후였다느니, 다케다 신겐을 죽인 게 사실 예수회라느니,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아타미 은산을 탐냈고 종국에는 일본을 정복하려 했다느니, 가라샤를 죽였다느니, 심지어 임진왜란을 일으키게 배후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자극해서 조선을 거쳐 명나라로 진출하려 했다는 설 등이 있다. 물론 단편적인 일부 사실의 편린만 가지고 부풀린 허무맹랑한 이야기라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일본에서 예수회 음모론이 흥한 건 예수회가 일본에 가톨릭을 전파한 이후 한때 일본 무역을 독점했기 때문이다. 과거 남미, 스페인, 포르투갈의 경우 세속국왕이 임명한 주교만 포교하겠다는 주장을 했지만 교황청에선 프란치스코회도미니코회의 동시 진출을 허용한 까닭에 무역 이권을 두고 수도회끼리 서로 경쟁하고 원주민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전투까지 벌이는 막장짓을 하였고, 예수회에선 이 모습을 보고 포교의 전속 권한과 더불어 무역 독점을 요구해 확보하였다. 이에 당연히 무역이권을 탐내는 일본 내부 세력과 타 수도회에서 예수회에 갖가지 누명을 씌워 고소하는 사례가 많았다. 이후 도쿠가와 막부가 정권을 잡은 다음 가톨릭을 좋게 보지 않았던 영국인 사무라이 윌리엄 애덤스가 일본의 서양 무역권을 관장하면서 철저히 탄압당하게 되었고, 뒷배였던 포르투갈과 스페인 또한 영국, 네덜란드같은 신교를 믿는 신흥 제국주의 국가에 밀려 몰락하면서 일본 내 가톨릭 세력도 사실상 소멸하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더불어 현대까지 일본 사회 전반의 가톨릭 교회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탓까지 겹쳐 일본에서 예수회 음모론이 살아남은 원인이 되었다.

영미권 개신교 음모론에서는 일루미나티와 엮이기도 하는데, 과거 예수회 독일 관구 본원이 바이에른 잉골슈타트[32]에 있었기 때문이다.

드루킹 등에서 문재인 정부를 제수이트 정부라고 했으나 실제로는 재수회를 예수회로 착각한 것으로, 개신교 근본주의 음모론의 재탕에 불과하다. 이와 별개로 한국에서 예수회를 '제수이트'라는 영문 명칭의 한글 발음으로 표기하는 경우믄 대부분 음모론자들이 부르는 경우인데, 한국에서 예수회 음모론이 주로 영미권으로부터 수입된 탓이다.

가뜩이나 음모론의 주 떡밥인데, 예수회 출신의 프란치스코 교황이 즉위한 이후로는 더더욱 공격을 많이 받는다. 특히 프란치스코 교황이 해방 신학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보수파의 눈으로 볼 때 상당히 진보적인 성향의 교황인지라 국내 보수 개신교 진영에서는 가톨릭 신자인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제수이트 음모론과 엮여 예수회 = 좌파로 몰아가는 경향이 있다.

다만 음모론 수준 정도까지는 아니라도 가톨릭 교회 내에서도 국가를 막론하고 현재의 예수회를 전통주의를 배격하는 좌경화된 단체로 보는 시각은 흔한 편이다. 그러나 일반화하기는 어려운 것이, 예수회 출신 인물 중에서는 박홍 루카 신부이한택 요셉 주교와 같이 정치적으로 매우 보수적인 경우도 있다. 반면 이 신부들에게 배운 제자들이 진보 시민단체나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활동을 하는 경우도 많다. 이처럼 예수회 내부에는 정치적으로 다양한 목소리가 있기 때문에 예수회라는 세계적인 수도회의 정치적 성향을 '좌파' 라는 단어 하나로 규정하는 것은 다소 성급한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9. 기타

10. 관련 문서

11. 둘러보기

파일:예수회 상징.svg 문서가 있는 예수회 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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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라틴어. MAIOREM이라는 단어를 MAJOREM으로 쓰기도 하며 AMDG이라는 약칭으로도 표기한다. 본래 문장은 '하느님의 더 큰 영광과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Ad maiorem Dei gloriam inque hominum salutem)'로 예수회의 표어뿐만 아니라 30년 전쟁 시절 군인들이 전장에서 외치는 구호로도 사용되었다.[2] 특히 IHS의 S는 단어 끝의 시그마(Σ)의 발음을 옛 그리스 문자 스티그마(ϛ)로 옮겨 적는 관습에서 유래하였다.[3] 이 때문에 근본주의 개신교 진영에서는 종종 악마화되어 묘사된다. 음모론과 결부된 일부 극단적 개신교인들은 예수회가 이슬람 창설을 도모했느니, 프리메이슨과 연관되어 있느니 하는 소리를 하는데 당연히 말 같지도 않은 소리다.[4] 이렇게 자기 자신의 영성을 단련하는 것과 인격완성을 강조한다는 면이 부각되기 때문에 인간의 구원에 있어, 하느님의 은총 자체를 중요시하는 가톨릭의 일반적인 가르침과 충돌하는 면이 있을 수도 있다.[5] 미국워싱턴 D.C. 소재의 명문 대학으로 정치 외교학, 행정학, 법학은 전미 탑 스쿨 중 하나이며 미국 최초의 가톨릭계 대학이기도 하다. 미 대학농구의 간판격 대학이기도 하며, 패트릭 유잉, 앨런 아이버슨, 알론조 모닝 등이 본교 농구팀 출신이다. 영화 엑소시스트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6] 창시자인 이냐시오 데 로욜라 성인의 이름을 붙인 대학.[7] 미국 뉴욕시 브롱스 및 맨하튼 소재.[8] 실제로 데카르트는 늦잠을 자는 버릇이 심했는데, 라 플레슈에서는 이 버릇을 강제로 교정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데카르트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특별 대우해주었다. 사실 데카르트 정도면 보수성 상관 없이 특별 대우하지 않았을까[9] 가이 포크스를 비롯한 가톨릭 극단주의자들이 벌였던 제임스 1세 암살 미수 사건인 화약 음모 사건에도 예수회 사제들이 대거 연루되었다.[10] 창설자 이름을 본 딴 도미니코회, 베네딕토회, 프란치스코회 등과 달리 이냐시오회가 아닌 예수회로 이름을 지은 것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 창립자 이냐시오 데 로욜라는 "내 이름은 시간이 흐르면 잊혀야 할 이름이기에 내세울 것이 없지만 그 분(예수)의 이름은 영원히 기억되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답하였다.[11] 정확히 말하자면 수사 시절의 종신서원 때문에 수사 신분은 그대로 유지되지만 수도회원으로서의 신분에서는 자유로워진다. 수도회마다 케바케인데 예수회원이 주교로 임명되어 주교품을 받으면 예수회에서는 탈퇴하게 된다. 그러나 교구장 주교가 되어도 수사로서의 종신서원 때문에 주교가 되어 예수회를 떠나도 평생 수도사제로 살게 된다. (ex: 정순택 베드로 주교)[12] 즉, 교황으로서 바티칸 시국 국가 원수이면서 사제로서는 로마 교구 교구장인 프란치스코 교황수도자이다. 예수회에 입회하여 수사로서 수련 과정을 마친 후 종신수도서원을 했기 때문이다.[13] 물론 일부에서 의혹을 제기하는 것마냥 프란치스코 교황공산주의자는 아니다. 애초에 가톨릭은 성격상 결코 공산주의와 친해질 수 없다.[14] 성 베드로 대성당도 제수 성당과 같은 원리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효과가 다소 밋밋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우선 성당 정면의 좌우 너비가 워낙 넓다보니 각 기둥의 거리가 먼데, 더 많아진 기둥들 간의 입체감 차이는 상대적으로 적어져 입체감이 달라지는게 생각보다 잘 눈에 안띈다. 또한 정면의 크기에 비해 입구들이 작은 편인데 중앙으로 가면서 그 크기도 커졌다 작아졌다가 반복되며, 2층의 발코니 때문에 중앙의 입구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다. 그런 작은 입구를 강조해야 하니 밋밋해보이는 것.[15] 교황청의 예수회 탄압으로 총장직이 총대리직으로 격하되었다.[16] 프랑스 출신의 예수회 사제로 현재의 캐나다 퀘벡주 일대에 해당하는 당시 프랑스의 식민지 누벨프랑스에서 그곳의 원주민 이로쿼이족에게 선교 활동을 하다가 순교했다.[17] 일본의 예수회 사제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기독교 탄압으로 인해 순교한 일본 26위 성인 중 한 명이다.[18] 스페인 출신의 예수회 신부. 당시 노예매매 중심지이던 스페인 제국령 콜롬비아 카르타헤나로 넘어가 알폰소 데 산도발(Alfonso de Sandoval) 신부와 함께 콜롬비아 원주민들의 상황을 개선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항구에 입항하는 흑인 노예들에 대한 의료와 생필품지원, 처우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1654년 선종할 때까지 40년간 30만명의 노예에게 세례성사를 주고, 동등한 인간으로서 인도적인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한 공로를 인정받아 아프리카인의 사도와 인권의 옹호자로 시성되었다. 콜롬비아 선교의 수호성인이기도 해서, 콜롬비아에서 그와 관련된 지명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19] 폴란드 출신의 예수회 수련 수사. 17세라는 어린 나이에 예수회에 입회한 이래로 미사 중에 자주 유체 이탈 경험하는 등 신비한 삶을 살다가 당시 유행하던 말라리아에 걸려 입회한 지 10개월 정도 지낸 1568년 8월 14일에 자신이 예언한 대로 성모 승천 대축일에 세상을 떠났다.[20]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사제로 로마에 전염병이 나돌던 당시 병에 걸린 환자들을 성심성의껏 보살피다가 결국 자신도 병에 걸려 순교하였으며, 가톨릭 관련 건물에서 그와 관련된 명칭을 쉽게 찾을 수 있다.[21] 일본의 예수회 사제로 디에고 키사이라고도 불린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기독교 탄압으로 인해 순교한 일본 26위 성인 중 한 명이다.[22] 영국의 예수회 사제로 당시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가톨릭 신자 박해가 만연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회 선교자로 활동했다. 1581년 여왕 폐위 음모 사건의 주동자로 누명이 씌워져 순교했다.[23] 예수회의 중시조격 인물로, 30년간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19세기 초 유럽 대륙에서 밀려난 예수회를 재건했다.[24] 1553년, 브라질에 도착해 상파울루리우데자네이루를 건설한 이주민들과 함께 선교에 힘쓴 공로로 '브라질의 사도'로 시성되었다.[25] 벨기에의 예수회 대학을 다니던 학생. 안트베르펜에 예수회 대학이 세워졌을 때 그곳의 첫 번째 학생으로 철학을 공부했으며, 이후 로마인 대학으로 옮겨 학업을 이어 나갔다. 비록 22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병환으로 요절을 했으나, 평소 그의 성덕과 근면함이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경을 받게 되었다.[26] 단, 치지와 미겔은 제외.[27] 포르투갈 출신 예수회 사제로 일본에서 선교 활동을 했다.[28] 한국명은 길로연. 서강대학교 초대 학장. 서강대를 설립하고 기반을 닦는 데 매우 큰 역할을 했다. 서강대 재직 중에 만난 26년 연하의 제자 조안 리와 사랑에 빠져 환속하고 결혼하여 두 딸을 낳았다. 자세한 이야기는 케네스 에드워드 킬로렌, 조안 리 항목 참조.[29] 따지고 보면 아메리카 등지에서 강제개종의 일선에서 나선 흑역사가 있기도 하다.[30] 더 정확히는 1593년에서 1594년에 걸쳐 진행된 총회에서는 부모가 유대인이거나 무슬림인 경우에만 입회를 금지하였으며, 이는 5차 총회까지도 연장되었다. 이는 창립자 이냐시오 데 로욜라 성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유대인이나 무슬림 출신 개종자들과 (몇대에 개종했는지와는 상관없이) 그 자손들의 입회를 막으려는 조치로 해석된다. 이후 무슬림에 대한 제한은 사라졌으나, 1923년 27차 총회에서 증조부, 조부, 부친, 본인의 4대에 걸쳐 가톨릭 신자가 아닌 유대인의 입회를 금지하였다. 1946년 29회 총회에서 이러한 금지가 해제된 이후에도 "유전적인 배경"과 관련된 의심이 있는 후보자에 대해 주의할 것을 주문했다.# 물론 현재는 본인이 스스로 개종하여 예수회 신부로 아무런 제약 없이 활동하는 경우도 있다.예시[31] 정작 예수회 출신으로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부이기도 했던 앙리 드 뤼박 추기경은 저서 무신론적 인본주의의 드라마(Le drame de l'humanisme athée)에서 포이어바흐마르크스의 유물론, 니체체의 니힐리즘과 콩트실증주의 무신론을 비판한 후, 도스토예프스키만이 근대 무신론을 제대로 지적했다며 〈악령〉을 굉장히 높게 평가했다.[32] 일루미나티가 이곳에 존재했다.[33] 옛날에는 "동정성모회"라고도 불렸다.[34] 부산성모여자고등학교천주교 부산교구에서 운영하고 있다. 예수수도회와 부산교구 모두 성모여자중학교도 운영하고 있었으나, 부산 성모여중과 대전 성모여중 모두 폐교된 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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