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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말칼덴 전쟁 Schmalkaldischer Krieg | |
| |
전쟁에 나서는 카를 5세. | |
날짜 | |
넓게 1531년 ~ 1552년 좁게 1546년 ~ 1547년 | |
장소 | |
신성 로마 제국 | |
원인 | |
구교와 신교의 싸움 | |
교전 국가 및 세력 | |
[[틀:깃발| | ]][[틀:깃발| ]][[신성 로마 제국|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작센 선제후국| ]] └ 헤센 방백국 | ]][[틀:깃발| ]][[신성 로마 제국| ]]
지원국 |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 |
지휘관 | |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 카를 5세 | [[틀:깃발| 필리프 1세 | ]][[틀:깃발| ]][[요한 프리드리히 1세| ]]
전력 | |
52,000명 | 불명 |
결과 | |
구교군(황제군)의 승리 | |
영향 | |
카를 5세, 아우크스부르크 잠정화의 체결, '피의 칙령' 발표 신교 연합, <파사우 조약>,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체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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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6세기 중반 신성 로마 제국에서 벌어진 종교전쟁. 좁게는 1546년에서 1547년 사이에 벌어진 전쟁을 뜻하기도 하고, 넓게는 슈말칼덴 동맹이 결성된 1531년부터 1552년 파사우 조약까지를 포함하기도 한다.2. 내용
2.1. 슈말칼덴 동맹 결성과 전쟁
1531년 신성 로마 제국에서 루터교회를 지지하는 영주(제후)와 자치도시들이 구교의 윤리를 내세워 신교도를 박해하고 폭정을 하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에게 반발하여 군사 동맹 성격의 슈말칼덴 동맹을 맺었다. 1529년 제2차 슈파이어 제국회의에서 카를 5세가 3년 전에 개신교를 인정했던 약속을 모두 뒤엎고, 신교도를 관용없이 탄압하겠다고 선언한데 따른 것이었다. 이로써 신성 로마 제국은 신교파와 구교파로 분열되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의 침공 등으로 해외 정세가 어지러웠기 때문에 슈말칼덴 동맹 체결 직후 당장은 전쟁이 발발하지 않았고, 한동안 소강상태가 지속되었다. 그러나 1540년대에 이르자 양측 제후들은 군사적 무력 충돌을 벌이기 시작했다. 해외에서 발생한 전쟁이 모두 끝나자 1546년 카를 5세는 개신교를 완전히 박멸할 목적으로 52,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신성 로마 제국으로 진주했다. 그러나 신교도측 제후들은 서로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신교도 연합군의 지휘 체계와 규율은 매우 어수선했다.그래서 신교군은 한번에 연합된 군대를 편성하지 못했고, 카를 5세는 각 제후국들을 하나하나 쳐들어가 각개격파하는 방식으로 손쉽게 승리를 쟁취해갔다. 대부분의 개신교 제후들을 제압한 카를 5세는 개신교파 최대 제후이자 구심점인 요한 프리드리히 1세의 작센 선제후국으로 쳐들어갔고 마침내 1547년 4월 24일 작센 선제후국의 수도 비텐베르크 근처에 있는 뮐베르크에서 최후의 결전이 벌어졌다. 뮐베르크 전투에서 제국군이 승리하면서 개신교 세력은 완전히 궤멸되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카를 5세는 1548년 <아우크스부르크 잠정화의>(Interim)를 통해 개신교와 가톨릭을 통일하여 제정한 교리를 따르도록 명을 내렸는데, 내용적으로 사실상 가톨릭을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2.2. 후속전
그러나 전쟁 승리 이후 카를 5세는 1550년 <피의 칙령>을 내려 개신교도들을 더욱 가혹하게 탄압했고 신교도들의 불만은 나날이 높아졌다. 게다가 카를 5세의 독선적인 통치 방식으로 구교 제후들의 민심까지 이반되었다. 또한 카를 5세가 1531년 차기 황제인 독일왕으로 선출된 동생 오스트리아 대공 겸 보헤미아 국왕 페르디난트 1세를 내치고 자신의 장남인 펠리페 왕자를 차기 황제로 앉히려 하자 페르디난트 1세를 따르던 가톨릭 제후들의 민심까지 이반되기 시작했다. 특히나 장인인 헤센 방백 필리프에 대한 가혹한 처우에 분개한 작센 선제후 모리츠는 개신교 제후들을 재결집한 후 비밀리에 프랑스 국왕 앙리 2세와 샹보르 조약을 체결하여 동맹을 맺었다. 1552년 1월 마침내 반합스부르크 연합은 군사를 일으켜 남부 독일 일대를 장악했다. 5월 모리츠가 이끄는 신교도군은 오스트리아 대공국 인스브루크에 머물던 황제를 공격했고, 카를 5세는 간신히 도망쳐 직접 알프스산맥을 횡단하며 탈출했다. 카를 5세는 알프스 산맥 남쪽에 있는 오스트리아 최남단의 필라흐에 머물면서 설욕전을 치르기 위해 다시 군대를 모았으나, 구교파 최대 제후국인 바이에른 공국 뿐만 아니라 동생 페르디난트 1세까지 형의 명령을 거부하여 황제의 복수전은 무산되었다.2.3. 결과와 영향
페르디난트 1세는 황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구교 제후들의 의견을 모아 1552년 모리츠가 이끄는 신교도 제후들과 파사우 조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제국 내 신교와 구교간에 평화가 이루어졌다. 이어 신교와 구교 양측은 종교적 평화를 영구화하기 위한 추가적인 조치에 대해 공감대를 형성했고 이에 파사우 조약의 합의 내용을 보완하여 1555년 역사적인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체결되었다. 이에 개신교 루터교회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았고, 독일 내에서 종교 전쟁은 잠정적으로 종결되었다.한편 고향인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에 은거해 있던 카를 5세는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체결을 절대적으로 반대했지만, 결국 조약이 체결되자 충격을 받아 이듬해 퇴위를 선언하고 스페인의 유스테 수도원에서 은둔한 채 여생을 보냈다.
한편 앙리 2세는 이 전쟁에서 모리츠가 이끄는 개신교 제후들을 지원한 대가로 로렌에 있는 세 개의 주교령인 비르텐, 메스, 툴 주교령을 프랑스 왕국에 병합했다. 비르텐은 프랑스어로 읽으면 베르됭인데 옛날 그 베르됭 조약의 장소이자 후대 베르됭 전투가 벌어진 장소로 이로서 프랑크 왕국이 분열된 870년 메르센 조약 이래 거의 내내 독일어권 국가의 영토였던 알자스-로렌에 프랑스가 처음 발을 내딛게 되었다.
3. 기타
현대 유럽의 루터교회에서 성상이 상당수 남은 것이 이 전쟁과 <아우크스부르크 잠정화의>로 인한 결과라 보기도 하는데, 실제로 마르틴 루터는 생전에도 성상을 아디아포라의 영역으로 보았고,[1] 개혁파나 츠비카우파 마냥 폭력적으로 깨부수는 것은 '연약한 신자'들을 실족시킬 수 있으니 자제하라고 한 적도 있어서 꼭 슈말칼덴 전쟁의 영향이라고만 볼 수도 없다.한편 슈말칼덴 전쟁에서 작센 지역의 농민들이 대거 슈말칼덴 동맹의 군대에 참가하였다. 이들은 놀랍게도 카를 5세의 군대에 참가한 헝가리 기병대의 첫 번째 공격을 격퇴하는데 성공했지만, 황제군의 양 측면에 배치된 기병들의 압박에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사실 작센 지역의 농민들은 옛날부터 사납고 용감한 기질을 지녀서 슈말칼덴 전쟁으로부터 약 500여 년 이전인 랑엔잘자 전투(1075년)에서도 작센 공국 편을 들어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하인리히 4세의 황제군에 맞섰다가 패배한 일이 있었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