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7세기 종교 개혁 주요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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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통일령(統一令, Act of Uniformity)[1]은, 잉글랜드 왕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1세가 선포한 법령으로, 잉글랜드 왕국 내의 국교회의 의식과 전례를 통일시킨 법령이다. 여러번의 통일령이 존재했지만 보통 통일령이라 하면 1559년의 통일령을 가리킨다.[2]2. 상세
엘리자베스 1세 여왕과, 전임 여왕인 메리 1세의 아버지인 헨리 8세 국왕은 이혼 문제로 인하여 영국 교회의 독립을 선포하고, 영국 국왕이 영국 국교회의 수장이라는 내용의 수장령(首長令, Acts of Supremacy)을 발령했다. 하지만 영국 국교회는 루터교나 기타 개신교와는 달리, 신학 관련 이견 때문이 아니라 그저 국왕의 이혼 문제 때문에 교회의 독립을 선포했을 뿐인지라 기도나 의식, 전례 등은 기존 가톨릭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3][4]이후 헨리 8세가 붕어하자 메리 1세 여왕이 즉위했다. 하지만 메리 1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남편은 가톨릭인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였다. 이러한 점 때문에 메리 1세는 가톨릭 복귀정책을 폈으며, 선대 국왕 헨리 8세의 영국 국교회 독립을 취소했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의 민심은 나빠졌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프랑스 왕국과의 전쟁에서도 패배하여, 급속히 건강이 악화하여 붕어하고 만다.
이제 잉글랜드 왕국의 왕위는, 여동생인 엘리자베스 1세에게로 넘어갔다. 엘리자베스 1세는 정치적으로 개신교도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캐서린과 헨리 8세의 결혼이 유효하다면 앤 불린과 헨리 8세 사이의 소생인 엘리자베스 1세는 사생아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합법적인 왕위 계승자일 수 없었다. 엘리자베스 1세가 합법적인 왕위 계승자이기 위해서는 그녀의 어머니 앤 불린과 헨리 8세의 결혼이 합법적이어야 했다.[5] 그렇기에 엘리자베스 1세는 다시금 영국 교회의 독립을 선언한다. 이에 따라 부왕 헨리 8세 치세부터 가톨릭과 개신교의 의식과 전례, 기도가 뒤섞여, 엉망이었던 영국 국교회의 의식과 전례, 기도를 통일시키는 법령인 통일령(統一令, Act of Uniformity)을 선포한다.
3. 역대 통일령
- 1549년 통일령: 제1기도서의 사용을 의무화한 법령.
- 1552년 통일령: 제2기도서의 사용을 의무화한 법령.
- 1559년 통일령: 본 문서의 통일령.
- 1662년 통일령: 왕정복고에 의해 폐지된 기도서 사용을 회복한 통일령으로, 비국교도 추방도 명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