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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01 21:29:03

오귀스트 콩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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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귀스트 콩트
Auguste Com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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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출생 <colbgcolor=#ffffff,#191919>1798년 1월 19일
프랑스 알자스-로렌 몽펠리에
사망 1857년 9월 5일 (향년 59세)
프랑스 제국 파리
국적 프랑스 제2제국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신장 159cm
모교 몽펠리에 대학교
에콜 폴리테크니크

1. 개요2. 생애3. 사상
3.1. 사회학
4. 영향과 평가
4.1. 영향4.2. 평가
5. 여담6. 영향을 미친 사람7. 관련항목

[clearfix]

1. 개요

실증주의의 신성한 공식은 다음과 같다. 원리는 사랑이며, 기본은 질서이고, 목표는 진보이다.
La formule sacrée du positivisme : l'amour pour principe, l'ordre pour base, et le progrès pour but. [1]
최초의 사회학자. 사회학의 시조. 실증주의 철학자. 주저에 《실증철학》이 있다. 콩트는 자연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과학적 방법으로 파악하는 것처럼 "사회현상"을 객관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했고, 이러한 사회학적 통찰이 사회의 정치적 문제들의 해결을 용이하게 하는 새로운 사회 테크놀로지의 발전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2. 생애

몽펠리에의 가톨릭 왕당파 집안에서 세무직 공무원인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어려서부터 학문적으로 총명함을 보였다.

나폴레옹이 통령이 되고 프랑스 혁명이 끝을 맺은게 1799년이라, 오귀스트 콩트의 세대는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았다. 16살의 나이로 프랑스의 이공계 최고 명문인 에콜 폴리테크닉에 입학하였고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웅변 실력과 특유의 무표정 유머 때문에 큰 인기를 끌었다. 오귀스트 콩트를 포함한 학년 전체가 친혁명파 성향이 강했고, 왕당파 교수진과 마찰을 자주 빚었다. 결국 전 학년이 1815년에 퇴학당한다.

이후 금전적인 문제에 시달렸던 콩트는 수학 가정교사로 돈을 벌고 매춘부와 극장을 오가며 한량의 삶을 산다. 그러다 1817년에 파리에서 공상적 사회주의 시조인 생시몽의 서기로 들어가고, 신문을 통해 스승의 사상을 전파시킨다. 하지만 1824년에 저작권 문제와 사상의 차이로 생시몽과는 결별하고, 콩트는 독자적인 사상을 전개해 나간다. 콩트는 어려운 시기에 빈곤층과 사회적 문제들을 직접적으로 목격했고, 세상을 바꾸어야겠다는 결심을 내린다. 자신의 아파트에 수강생을 모아서 강연을 하고, 저술을 하는 식으로 학술활동을 해나갔다.

콩트는 1821년에 카롤린 매생[2]과 결혼하고 그녀가 버는 돈으로 어렵게 연명해 간다. 둘은 불행하고 불안정적인 관계를 가졌고, 매생의 상습적인 외도는 콩트로 하여금 1826년에 자살시도까지 하게 만든다. 결국 둘은 1842년에 이혼하지만 1844년까지 계속 편지로 플라토닉한 관계를 유지한다.

1830년 일어난 7월 혁명을 격렬히 지지했고, 혁명 전선에 나서기까지 했다. 같은 해 모교 에꼴 폴리테크닉의 교수직에 지원했지만 거절당하고, 꾸준히 1833년에는 콜레주 드 프랑스에, 1835년과 1836년에는 에꼴 폴리테크닉에 지원하지만 잇따라 교편을 잡는데 실패한다. 1832년부터 수학 조교직을 맡고 1836년에는 시험관직을 역임한다.

1844년에 콩트는 자신의 제자의 누나인 클로틸드 드보를 만난다. 폐결핵 환자인 드보는 남편과 이별해 살고 있었고, 15살의 나이차와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콩트와 사랑에 빠진다. 둘은 플라토닉한 관계는 1846년 드보가 사망하면서 끝난다.

훗날의 엄청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생전에는 가난에 찌든 불우한 인생을 살았고, 거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의 업적이 인정받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자국인 프랑스보다는 영국으로서, 서신으로 교류하던 존 스튜어트 밀에 의해 영국학계에 큰 자극을 줌으로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3. 사상

3.1. 사회학

과학으로부터 예측이, 예측으로부터 행동이 나온다.
Savoir pour prevoir et prevoir pour pouvoir.
〈실증철학〉 중

콩트에 의하면 인간의 지적 발전은 3단계를 거쳐왔다. 1 신학적 단계 2 형이상학적 단계 3 실증적 단계. 신학적 단계는 그저 믿는 단계이고, 형이상학적 단계는 그저 머리속 생각의 논리적 정합성만 따지는 단계이며, 마지막 단계인 실증적 단계란 신학적, 형이상학적 사유에서 벗어나 실제로 증거를 가지고 생각을 하는 단계로서 실험을 통해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수학', '과학'과 '물리학', '생물학' 등을 말한다. 콩트는 그가 살던 시대가 이미 실증적 단계에 들어섰다고 보았다. 하지만 인간을 연구 대상으로 하는 학문들은 여전히 신학적, 형이상학적 사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콩트는 생각했다. 그래서 콩트는 '인간을 연구 대상으로 하는 학문'도 실증적, 과학적 단계로 발전시키고자 마음먹었다. 그는 이 관점에서 실증적 사회과학을 옹호했고, 그것은 그에 의해 "사회학"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3]

실증적(positive)이란 말은 다분히 신학적, 형이상학적 사변을 저격한 용어이다. 실증적 학문은 경험적이고 객관적이며 반-사변적이다. 그래서 실증적 학문은 지각 가능한 현상들과 경험적 연구를 통해 확정될 수 있는 법칙적 연관 관계에 집중한다. 인간을 연구 대상으로 하는 '사회학'도 사회에 관한 자연과학이 되어야 하며, 가능한 한 물리학을 모델로 구축되어야 한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체계적이고 가르치기 좋다는 의미에서도 '실증적'이다.[4]

그는 사회 구조(질서)와 사회 변동(진보)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자신의 연구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를 두고 각각 사회 정학(social statics)과 사회 동학(social dynamics)이라 일컫기도 한다. 사회 정학은, 사회의 전체와 부분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부분만 관찰해서는 안되고 그 부분들 사이의 관계적 질서를 연구한다. 사회 동학은, 사회는 여러 부분들이 균형을 이루고 있으면서 역사의 움직임에 따라서 하나의 균형에서 다른 균형으로 이행하기 때문에 이런 균형 상태의 계열적 변화를 지배하는 법칙을 연구한다.

콩트는 당시 새로운 풍조로 떠오르던 개인주의가 사회를 분열시킨다고 보아서 심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종교개혁과 계몽주의는 "서구 세계의 질병"인 개인주의를 퍼뜨려서 도덕적 위기를 초래했다. 이 "질병"의 주요 증상은 인민주권, 평등, 개인의 자유와 같은 이념들과, 이와 병행하여 나타나는 가족, 종교, 교회 및 공동체에 대한 부정적 견해들이었다. 이 개인주의는 또한 홉스에서 칸트로 이어지는 전통에서, '분리된 개인'을 바탕으로 한 사회계약론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러나 콩트는 '선이 점들로 분해될 수 없는 것'처럼, 사회가 분리된 개인들로 분해될 수 없다고 보았다. 사회는 오직 집단과 공동체로 분해될 수 있을 뿐이다.[5] 그렇지만 개인주의가 나쁘다고해서, 기존에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이념이었던 가톨릭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콩트는 그의 실증주의적 '사회학'이 새로운 사회의 준종교적 통합 원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견해는 콩트의 후기 저술에서 더욱 뚜렷하게 부각되는데, 이 시기 콩트의 실증주의는 마치 복고주의적 가톨릭 교리가 새로운 세속적 언어로 표현되어 나온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더욱이 말년에 "인류교"를 창시했는데, 많은 지지자들을 얻었고 프랑스와 영국 그리고 미국에 "교회들"이 설립되기도 했다. 이는 바로 그 자신이 초기에 비판했던 '신학적 단계'로 다시 되돌아가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기존에 그를 따랐던 소수의 학자들에게는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렇다면 콩트는 보수적 복고주의 사상가인가? 콩트는 두 가지 점에서 보수적 복고주의 사상가들과 구분된다. 첫째, 그는 사회 통합적 힘으로서 로마가톨릭교회의 사상을 거부했다. 보수주의 철학자들은 가톨릭적인 원칙들로 복귀하기를 원했지만, 콩트에게 이러한 원칙들은 인간의 지적 발전 단계 중 과거 시기에 속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실증주의적 원칙들에 의해 대체되어야만 할 것들이었다. 둘째, 콩트는 자연과학과 근대적 테크놀로지에 대하여 복고주의 사상가들보다 훨씬 열린 태도를 취했다. 사회에 대한 자연과학으로서 사회학은 새롭고 효율적인 사회 테크놀로지의 토대를 형성해야 한다. 사회학은 사회가 다시 질서 있고 잘 통합된 방식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사회를 이끄는 도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4. 영향과 평가

4.1. 영향

콩트는 프랑스 제3공화국 사회주의자들의 사상의 기반이 되었다. 샤를 모라스 같은 극우파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국수주의 왕당파이던 모라스는 콩트에서 사회들이 변화하는 패턴을 찾으려 했다.

4.2. 평가

그가 주장했던 여러 주장들은 여러 학문으로 세분화 되었고 그가 썼던 단어들은 낡은 인상을 주는 것으로서 잊혀져가는 경향이 다분하다. 더군다나 말년의 종교적 행보에 이르러서는, 그의 초기 추종자였던 존 스튜어트 밀허버트 스펜서 등이 등을 돌리거나 무시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콩트를 잊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그가 처음으로 사회학을 하나의 학문으로 바라보고, 과학적 방법론으로 인간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사회학은 비로소 협의의 인문학과 분리된, '인간 사회에 대한 학문'으로서 독자적인 자리매김을 하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뒤르켐, 베버 등을 거치며 사회학은 사회과학으로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계속되는, '사회과학이 과학인지' 그리고 '과학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장구한 과학철학 논쟁과 경제학, 심리학, 물리학 등 인접학문들끼리의 영역 다툼, 그리고 사회학 제국주의 논쟁에 이르기까지, 근대 이후 전개되어온 사회학 관련 논쟁들을 볼 때, 사회학은 물론이거니와 지성계 전체가 콩트에게 나름의 빚을 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5. 여담

6. 영향을 미친 사람

7. 관련항목


[1] 이 구절에서 브라질 국기의 모토인, '질서와 진보'(ordem e progresso)가 나왔다.[2] 콩트는 그녀를 매춘부라 매도했는데, 이것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매생은 콩트의 작업에 큰 관심을 보였고, 둘이 주고받은 서신을 보면 그녀가 상당히 지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3] "사회학"이란 용어는 그가 그전에 사용했던 사회물리학physique sociale이란 말 대신 사용하기 위하여 『실증철학강의』에서 도입한 용어이다.[4] 다만, 알아두어야 할 것은 콩트가 말하는 '실증주의'의 개념은 현재의 실증주의 개념과는 차이가 있다. 콩트가 스스로 정의하기에 자신의 실증주의적 태도란 '공상주의와 반대되는 의미에서 실제적인 것', '맞닥뜨린 환경을 지속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건전한 성찰에 필요한 진정한 목적'을 의미한다. 오늘날 사회학자들이 실증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사회적 사실을 다루는 데 있어 자신의 가치판단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며 경험과학적으로 엄격하게 사실과 관찰을 중시'한다는 의미이다. 이 당시 콩트가 실증주의라고 부른 것은 사회학을 과학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오늘날 쓰이는 의미에서의 실증주의는 콩트의 사회학 전통이 아닌 막스 베버의 전통을 따르는 것이다. 다만 사변적이고 철학적인 것과 구분이 모호하던 초기 사회학의 발생에서 콩트가 과학적인 태도를 주장하였기에 사회학이 독립 분과로 나타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5] 콩트에 따르면, 이 집단 중 가장 근본적인 집단은 '개인'이 아니라 '가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