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지상주의 | |||||
{{{#!wiki style="margin: 0 -1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0 -10px" | <colbgcolor=#fed105><colcolor=#000> 관련 주제 | 개인주의 · 고전적 자유주의 (경제적 자유주의) · 급진주의(역사적) · 문화적 자유주의 · 무장저항권 · 무기소지권 · 반권위주의 · 반국가주의 · 반군국주의 · 반제국주의 · 불개입주의 · 사유재산 (재산권) · 성해방 · 시장 근본주의 · 자유 (표현의 자유 · 양심의 자유) · 자유무역 · 자유시장 · 제한된 정부 · 해방 · 해적 정치 | |||
분파 | 우파 계열 | 객관주의 · 고자유지상주의 · 시카고학파 · 아나코 캐피탈리즘 (암호화폐 아나키즘) · 야경국가주의 · 오스트리아학파 · 융합주의 · 자유지상주의적 보수주의 (밀레이주의) | |||
중도 계열 | 녹색 자유지상주의 · 시민 자유지상주의 · 신고전적 자유주의 · 자유지상주의적 페미니즘 · 지공자유지상주의 | ||||
좌파 계열 | 사회적 자유지상주의 · 아나키즘 (개인주의적 아나키즘 · 녹색 아나키즘 · 사회적 아나키즘 · 자유시장 아나키즘) ·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 (신좌파 · 자유지상주의적 공산주의 (좌파공산주의) · 자유지상주의적 마르크스주의) | ||||
그 외 | 기술 자유지상주의 · 에고이즘 · 자유방임주의 | ||||
인물 | 게리 존슨 · 노자 · 놈 촘스키 · 랜드 폴 · 론 폴 · 루트비히 폰 미제스 · 막스 슈티르너 · 머리 로스바드 · 미하일 바쿠닌 · 밀턴 프리드먼 · 아인 랜드 · 에마뉘엘 마크롱 · 윌리엄 고드윈 · 털시 개버드 · 토머스 제퍼슨 ·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 하비에르 밀레이 · 한스-헤르만 호페 · 헨리 데이비드 소로 | ||||
단체 | Students for Liberty · 몽펠르랭 소사이어티 · 미제스 연구소 · 자유지상당 · 자유지상당 국제동맹 | ||||
나라별 현황 | 대한민국 · 미국 | }}}}}}}}} |
자유주의적 패권 | 어퍼머티브 액션 | 소수자 권리 | 자유시장 | 양심의 자유 |
자유주의(국제관계학) | 소셜 저스티스 워리어 | 폐지주의 | 모병제 | 객관주의 |
민권 운동 | 세계화 | 부르주아 정당 | 현대자유주의 | 자결권 |
친선택 | 해방 신학 | 무기소지권 | 사회자유 보수주의 | 세속주의 |
시니스트리슴 | ||||
관련 단체 | ||||
자유주의 인터내셔널 | 자유지상당 국제동맹※ | 나우만 재단 | 몽펠르랭 소사이어티 | 진보동맹※ |
독립협회 | ||||
주요 3대 이념의 분파 (사회주의 · 자유주의 · 보수주의) · 기타(내셔널리즘 · 생태주의 · 포퓰리즘) 자유주의와 관련된 다른 틀 (사회민주주의 · 신자유주의 · 자유지상주의 · 진보주의) ※ 넓은 의미의 자유주의 단체; 각각 자유지상주의, 진보주의에 속한다. |
1. 개요
個人主義 / Individualism경제 활동에서 개인의 자유 경쟁이 경제 발전에 가장 유효한 것이라 하여 국가의 간섭이나 통제를 배제하는 사고방식. 개인에 초점을 맞추어 사회현상 및 정책을 연구하는 사상이다.
전체주의 사상에서 집단의 이익으로 개인이 희생되는 것에 반발하여 발생한 사상이다. 집단의 질서와 이익을 가장 우선시했던 파시즘의 결말을 목격하고 유럽인들은 국가의 선전을 믿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국가와 같은 거대한 집단을 견제할 수 있었던 시민들의 정치적인 권리와 자발적인 감시를 중요시하게 되었다. 68운동으로 대표되는 수많은 반전사상, 표현의 자유, 또는 소수자들의 보호 같은 가치들은 개인주의를 토대로 해서 발달했다.
2. 오해
대한민국에는 "개인주의가 심하면 이기주의가 된다"라는 식의 사고방식이 흔하게 자리잡아 있고, 심지어 도덕이나 윤리 과목을 가르치는 교사들도 두 개념을 혼동하고는 한다. 개인주의 대 전체주의와 이기주의 대 이타주의는 논의의 영역 자체가 다르다. 그러나 개인주의가 '흑화되면' 개인 이기주의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사실 개인주의, 개인 이기주의, 집단 이기주의, 전체주의 등을 정확하게 알고 말해야 하는 측면이 있는 것이다.개인주의란 "권리와 의무는 어디에 귀속되는가?", "행위와 책임의 주체가 무엇인가?"의 질문에 대하여 "그 기본단위는 개인이다"라고 답하는 사고방식이다. 이는 인간의 본능과는 다소 상충되는 근대의 발명품이다.
예컨대 누군가가 친일파의 후손이라고 한다면 곧바로 좋지 못한 인상을 받게 될 것이다. 한국에서 반대파 정치인에 대한 공격수단으로 가장 애용되는 것 중 하나가 "아무개는 친일파의 후손이다"라는 주장이다. 그런 말을 들으면 대다수의 국민들이 그 아무개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가진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친일파가 지은 죄는 그 후손의 죄가 아니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독립운동가의 자손이라고 해도 본인은 쓰레기 같은 인물일 수도 있다. 독립운동가가 자손에게 '국가로부터 우대를 받을 이익'을 물려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업적 그 자체를 물려줄 수는 없다. 친일파가 자손들에게 '국가로부터 재산을 몰수당하는 불이익'을 물려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잘못 자체를 물려주는 것은 아니다. 개인의 행위는 개인이 책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생각이 바로 개인주의다.[1]
이처럼 인간은 본능적으로 타자를 집단화하여 판단한다. 부모의 잘잘못은 자식의 잘잘못이 되고, 공동체의 구성원이 잘못을 저지르면 소속 공동체 전체에 오명을 돌리는 것이 인간의 원초적 감정이다. 하지만 이런 사고방식은 수많은 전근대적 불합리의 근원이기도 하였다. 한 사람을 소속된 가문이나 지역에 따라 평가하고, 가문의 일원이나 동향 사람의 잘못에 대해 연대책임을 지게 하거나, 개인이 성취한 결실을 가문이나 지역 공동체에 귀속시키기에 개인은 스스로의 노력과 능력을 바탕으로 뜻을 펼칠 의욕을 상실하고 가문, 지역, 국가와 같은 공동체에 예속된 삶을 살게 된다. 나만 잘 산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친족과 이웃까지 살피고 감시해야 하고, 반대로 말하자면 모든 사람은 친족이나 이웃으로부터 감시와 간섭을 받게 된다. 이러한 집단 내지 공동체의 족쇄로부터 개인을 해방하여 각자의 능력과 창의를 마음껏 발현하도록 하자는 것이 개인주의의 이념이다.
상상해보자. 개인주의가 희박한 현 대한민국 사회에서 당신이 출세하기 위하여는 일단 조상님들의 행적이 깔끔해야 한다. 가깝게는 증조부나 고조부가 친일파가 아니어야 하고, 멀게는 조선중기의 원균 같은 폐급 조상이 없어야 신상에 이롭다. 당신의 자식 또한 그럴듯한 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에 다녀야 하며, 어릴 적에 사고를 친 적이 없어야 한다. 만약 당신이 평범한 사람이라 해도, 결혼하지 않거나 아이를 낳지 않으면 가문의 불명예가 되기 때문에 집안 어른들로부터 끝없는 압박과 닥달을 당할 것이다. 나아가 결혼할 상대방을 정하는 일, 아이가 진로를 정하는 일에 있어서도 간섭을 받는다. 그게 다 당신의 평판이자 공동체의 평판이 되기 때문이다. 당신 혼자서 성실하게 사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스스로의 힘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가족이나 회사 등 공동체로부터 재산을 착복당한 끝에 무일푼이 되었다는 뉴스가 심심찮게 보일 것이다.
한편 이기주의는 "나를 이롭게 하는 것을 타인을 이롭게 하는 것보다 우선시하는 것"으로, "타인을 이롭게 하는 것을 나를 이롭게 하는 것보다 우선시하는 것"을 의미하는 이타주의의 반대 개념이다.[2] 얼핏 보기에 이타주의가 이기주의보다 좋은 것으로 느껴질지는 모르지만, 둘은 모두 일종의 도덕적 차별주의(Moral Partialism)에 속하는 것으로 행위의 보편화가 불가능하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쉽게 말해 나의 이타주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이타주의적 목적 달성을 방해할 수밖에 없다는 딜레마가 있고[3], 이는 이기주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대부분의 도덕이론은 도덕적 평등주의(Moral Impartialism), 즉 타인과 나를 동등하게 대우할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즉, 이기주의와 이타주의 이외에 '평등주의'라는 선택지가 하나 더 있다. )
쉽게 구분하기 위해 바이러스가 퍼진 상황을 상정해보자. 눈앞에 백신 10개가 있는데 본인을 포함한 자국인이 10명, 외국인이 10명으로 총 20명이 백신을 원하고 있다.
1) 이기적 개인주의자라면 자기 백신 하나만 챙기고 나머지는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2) 이타적 개인주의자라면 백신을 타인에게 양보할 것인데,[4] 백신보다 사람이 많으므로 결국 백신을 챙기지 못할 것이다.
3) 이기적 집단주의자라면 백신 10개가 모두 자국인에게만 돌아가도록 힘쓸 것이다.
4) 이타적 집단주의자라면 백신 10개를 모두 외국인에게 양보하고자 힘쓸 것이다.
5) 도덕적 평등주의자인 개인주의자라면 20명 모두가 국적에 상관없이 제비뽑기를 해서 당첨된 10명이 백신을 갖자고 할 것이다.
6) 도덕적 평등주의자인 집단주의자라면 두 국가가 대표를 뽑아 제비뽑기를 하여 이긴 나라에 백신 10개를 몰아주자고 할 것이다.
그러나 아래에 서술된 문단들 중에도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혼동하는 것이 상당수 있으니 주의하여야 한다.
3. 개인주의와 다른 관점의 관계
개인주의는 자유주의에 철학적 뿌리를 두고 있다. 무슨 소리냐면, 자유주의는 정부가 개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해선 안 된다는 사상이고, 이런 사상이 커지면서, "내 권리는 내가 지킨다."라는 개인주의로 연결된다.3.1. 공동체주의와 양립할 가능성
3.1.1. 가능하다는 의견
명목상 개인주의 지수가 높은 나라들도 실제로는 순수한 개인주의 사회를 추구하기보다는 이러한 반대론자들[5]의 의견을 어느 정도 수용하여 균형을 맞추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현대의 개인주의자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중요시하므로, 자신의 자유와 권리가 위협받는 경우에는 투쟁하기도 하지만,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하거나 묵인하는 평등주의를 배제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현대의 수정된 개인주의는 공동체주의와 대립하지 않는다. 즉, 적어도 현대에 흔히 언급되는 개인주의는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도 개인의 자유와 개성을 누릴 수 있고 개인의 완성은 공동체를 떠나서는 성립할 수 없다는 인식을 바탕에 두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의 개인주의는 공동체주의와 무조건 대립하는 사상이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 중 어느 것을 우선시하는지만 다를 뿐 상호 보완적인 관계가 될 수도 있다. 수정 개인주의는 공동체에 대한 맹목적인 희생과 체제의 극단성 지속을 강요하는 집단주의·전체주의를 혐오하지, 공동체에 대한 자발적인 헌신을 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북유럽의 사회민주주의 국가들은 모두 개인주의 지수가 높은 편이다.
3.1.2. 불가능하다는 의견
하지만 위의 문단은 지나치게 정치세력적인 근거로 개인주의를 해석한 것이기도 하다. 관점 설명의 한계이기도 하다. 아래의 자연법적인 권리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이는 종교, 공동체주의자들이 필연적으로 가져오는 집단의 권위를 무리하게 개인주의와 결합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이런 사회에서는 수 많은 공동체들이 한정된 부유한 사람들의 재산을 어떻게든 강제해서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하여, 공동체끼리 서로 경쟁하고 투쟁하고 규제한다. 그러나 과거와 다르게 되려 개인이 공동체를 선택 가능한 게 현대의 모습이다. 권리 이론으로서 존재하는 개인주의와 필연적으로 충돌하는 부분.
3.2. 개인주의의 이기성
3.2.1. 이기주의로 변질된 개인주의
가장 전형적인 비판은 이기주의로 변질되기 쉬운 것과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이 개인주의에서 나왔다는 비판이다.자유주의가 개인주의에 기초하는 점 때문에, 개인주의에 대한 비판은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과 함께 가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자유주의, 개인주의에 기초하는 점 때문에 사회주의자들에게서 까이기도 한다.
공동체주의자들이 개인주의를 비판하는 데에 존재해서 주요 논지는 개인의 파편화로 인해 사회보다 개인을 우선시하는 풍조가 지나치게 되는 경우는 사회의 공동 목적이 모호해지고, 공동선 추구를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다. 즉, '개인의 자유' 미명 아래에 개인의 이익 추구가 공공의 이익을 저해하는 경우에 개인주의는 그에 대응할 수 없다는 것.[7]
예를 들어, 매킨타이어의 경우는 도덕적 논쟁이 해결할 수 없게 된 원인으로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를 지목한다. 그에 따르면 현대 자아는 자신의 사회적·문화적 맥락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독립적인 이성적 판단자로 자신을 이해한다. 현대 자아가 중립적이며 특정한 이해관계를 갖지 않는다는 주장은 도덕적 논의를 어렵게 한다고 말한다. 쉽게 말해서, 개인주의의 팽배로 인해 어떤 일이 도덕적인지 평가할 수 있는 보편적인 윤리적 토대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3.2.1.1. 반론
개인주의자들은 이에 대해 '벌이나 개미와 같은 군체의식을 갖게 되어 순수한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면, 또 그렇게 한다면 위와 같은 문제는 사라질 수 있겠지만 그러기를 원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겠는가?'라고 되묻는다. 인간의 자유와 천부인권을 빼앗아버리지 않는 이상 위와 같은 문제는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다. 또한 개인주의의 입장에서 특정한 목적 달성을 위한 조직이나 단체 결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므로, 개인주의 아래에서도 위와 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개인주의에 대한 비판은 주로 자본주의와 연관이 있다. 당장 개인주의적인 원칙에 입각하지 않는 자본주의 사회는 상상하기 어렵다. 자본주의 사회 자체가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고 있다. 개인의 자유가 대두한 역사적 배경이라고 볼 수 있는 프랑스 대혁명 역시 배후에 자본가가 있었고, 자본주의 사회로 귀결되며 최종적으로 자본가 계급이 가장 이득을 보았다는 것이 이와 일맥상통한다. 결국 개인주의 없는 자본주의는 상정하기 어려우며, 개인주의에 대한 비판들 중 대부분은 사실상 자본주의에서 발견되는 문제점이다. 따라서 비판과 수정의 대상은 자본주의 체제라고 생각할 수 있다.
맥킨타이어가 제시한 비판은 사실상 다른 체제에도 적용할 수 있다. 민족이나 국가 같은 공동체 중심의 이념이 중심이 되었을 때도 상당히 많은 문제가 발생하였다. 세계 대전 역시 배후에 자본이 있었지만 표면적으로는 민족의 문제였다. 따라서 개인주의에 대한 비판이긴 하지만, 공동체가 우선시될 때 발생하는 도덕적 문제가 만만치 않음을 감안하면 현실적으로 수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8] 공동체주의가 흑화되면 공동체주의의 가장 큰 폐해인 집단 이기주의가 될 수 있다는 사실 역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이기주의 부분도, 집단주의를 강조하던 국가들에서 심각한 집단 이기주의를 보여준다. 다만 그 주체가 개인이 아니라 마을이나 사회 같은 집단인 것뿐이다. 거기에 이런 집단 이기주의는 개인 이기주의보다 영향력이 강해서 개인 이기주의의 폐해는 심해봤자 법으로 억제되어 사회의 양극화 정도로 나타나지만, 집단 이기주의는 심해진다면 조직적 행동에 의해 국가 전복 시도는 다반사요, 대학살이 펼쳐질 위험이 있다. 효 문화를 중시하는 동양이 노인을 공경할 거란 예상과 달리 서양이 개인주의로 오히려 노인에 대해 긍정적 태도를 불러 일으킨다.[9] 집단을 넘어서 개인에 집중하는 상위 문화가 개인주의로 볼 수 있다.[10]
당연히 개인 이기주의가 괜찮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문제가 있으나, 여러 면에서 참작하여 봐야 한다는 것. 이것이 문제가 없다면, 왜 20세기 중반부터 공동체의 붕괴와 양극화를 연결하는 학계 담론들이 나오겠는가. 더 잘 살기 위하는 것만으로 다른 사람을 시궁창에 쳐박고 비웃는 행위가 실현되면서 정당성도 갖추고 합리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면, 그건 인권과 세계 평화의 기본 논조인 자유와 인륜을 저버린 참극이요, 노예제의 부활과도 상통할 수 있을 만한 죄악이다.[11] 또한 격차가 계속 벌어진다면, 결국 어느 날부터는 강제에 가까운 요구 또는 남에게 예속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 만들어져 진정한 공리까지 넘어서 사람들이 휘둘리기 시작하며, 사람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사람까지 생길지도 모를 일이다. 신분제도가 다시 강화될 수도 있는 것이다. 공화주의 참고. 또한 개인도 결속하면 국가 전복 시도를 할 수 있다. 아나키즘 분파 중 요상하게도 경제적 압박과 차별의 존재를 무시하는 부류는 자본을 바탕으로 강경책을 실행해 국가 전복과 세금 제도 붕괴를 논하기도 한다. 이기주의와 엮인다면 의로운 뜻 같은 것도 없는데 들고 일어나서 나라를 뒤엎고 괴뢰정부를 만드는 일이 생길 지도 모른다.
부패인식지수를 보면 대체로 개인주의가 강한 나라일수록 상위권을 차지하고, 약한 국가일수록 하위권을 차지한다. 당장 민주집중제에 집단지도체제를 채택하는 사회주의국가 중국의 부패의 규모를 생각해보자. 단순히 개인에 충성한다고 이기주의, 조직에 더 충성한다고 이타주의로 보이는 인상으로 비춰보이기 쉬울 뿐. 하지만 심리를 깊게 따져보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충성과 아부의 경계가 모호하니 어느 간신이나 환관이 발호할 때도 나 아부꾼이요 하고 스스로 인정한 적이 없다. 그래서 집단주의라고 덜 이기적이란 법도 없고 그 정도가 같다쳐도 그게 투명하게 발산되느냐, 불투명하게 발산되느냐가 큰 차이다. 대놓고 이기적 행태를 하면 제재를 가하면 그만인데, 음흉하게 이타적인 체 위선을 떤다면 그게 더 큰 문제이다. 위선자가 자라나기 좋은 환경은 겉으로 이타성을 표방하는 배경에 있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공동체주의를 강령으로 표방하는 좌파정권에서 각종 성추문이나 비리가 덜 터지는 건 아니다. [12][13]
개인주의가 센 건 집단이 그만큼 불안하다는 뜻일 수도 있고, 집단주의가 센 건 개인이 그만큼 불안하다는 뜻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개인주의든 집단주의든 서로 공통적인 문제와 장점이 있다는 점이다. 건전한 개인주의와 건전한 공동체주의의 결합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3.2.2. 개인주의자는 매정하다?
이 역시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혼동한데서 나온 오해며, 개인주의자들 중에 남을 우선시하는 인성을 갖춘 사람은 무수히 많다. 개인주의자라고 해서 공감능력이나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며, 누군가가 개인주의자냐의 여부와 그 사람의 인격에 대한 논의는 별개로 말해져야 한다.실제로 오히려 중국처럼 집단주의적[14]인 성격이 강한 나라에서 위험에 빠진 타인을 그대로 방치하는 경우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아니, 집단주의가 되려 위험을 만들어 개인을 죽이는 일도 역사에는 비일비재했다. 당장 나치즘과 스탈린주의가 개인주의인지 집단주의인지 생각해보자. 즉, 어떤 사회에 사는 사람들이 타인에 대한 가지는 관심의 정도가 그 사회의 개인주의/집단주의적인 성격과는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부분은 이러한 사회의 성격보다는 오히려 그 사회가 얼마나 선진적인지, 사회 구성원의 시민 의식이 얼마나 높은가에 따라 좌지우지된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바우만(Zigmunt Bauman)의 ‘개인화된 사회’(Individualized Society)라는 개념이다. 개인주의에 대해서는 다양한 지적들이 있지만, 개인과 사회를 연결해 주는 정치사회적 수단들이 상실 또는 해체되는 과정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바우만의 관찰은 단연 돋보인다. 비이성적 시장경쟁의 도덕적 무관심, 정치적‧사회적 자유를 희생시키면서까지 향유되는 경제적 자유, 사회 안전망의 붕괴, 경제에 대한 집착에도 불구하고 오직 소수만이 향유하는 풍요가 개인화된 사회의 단면이다(Bauman 2001, 83-96). 특히 개개인의 상호관계에서의 변화와 정치적 영역의 축소를 연관시킨 부분이 인상적이다. 상대방을 즐거움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실용적 태도, 지속적인 관계보다 즉흥적인 만남을 선호하는 경향, 그리고 이러한 태도와 경향으로 형성되는 삶의 방식이 궁극적으로 정치의 몰락으로 귀결되고 있다는 것이다(Bauman 1999). 비록 서구사회에 국한된 관찰이라는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 한국 사회도 이러한 분절적 사회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곽준혁 교수, <왜 그리고 어떤 공화주의인가?>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곽준혁 교수, <왜 그리고 어떤 공화주의인가?>
아렌트(Hannah Arendt)와 포콕(John Pocock)은 바로 이 점을 강조한다. 그들은 인간이 사적 영역에서 자신의 이익과 취향만을 추구하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인 개인주의적 자유주의는 인간을 본질적으로 그러한 것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의 소유자로 규정함으로써 공적 영역의 황폐화를 초래했다. 그 결과 인간은 전체주의 체제의 야수적 지배도 경험했고, '경제인'(homo economicus)으로서 시장의 지배를 받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고 개탄한다. 그러나 서양의 민주주의적 공화국을 세운 것은 공적 영역에서 덕을 발휘한 '정치인'(homo civicus)이었다는 것이 그들의 지론이다.
이러한 주장은 20세기 후반 정치철학에서는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논의되었다. 공동체주의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인간을 공동체적 존재로서 공동체의 공동선 혹은 공익을 추구해야 하는 존재로 규정한다. 인간은 개인주의적 자유주의가 규정하듯이 '무연고적 존재'(unencumbered self)가 아니다. 따라서 오늘날 필요한 민주주의는 사익을 추구하는 원자화된 개인들이 공적인 일은 단순히 국가의 행정적·법적 제반 절차에 맡기는 '절차적'(procedural) 민주주의가 아니라 공동체적 존재로서 시민들이 참여하고 심의해야 하는 참여 민주주의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논의에 대해 자유주의는 과연 인간이라면 추구해야 할 공동의 가치가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즉 공동체는 구성원들에게 인간이라면 추구해야 할 좋은 삶을 살도록 요구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공화주의와 공동체주의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참여적 삶을 인간이 추구해야 할 좋은 삶이라고 주장한다. 즉 덕을 실천하는 삶이 좋은 삶이다. 공화국의 호출에 시(공)민으로 응하지 않는 인간들은 지배와 예속의 사슬에 얽매일 수밖에 없고 그것은 인간적 삶이 아니다.[15]
조승래, <공화국을 위하여>
이러한 주장은 20세기 후반 정치철학에서는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논의되었다. 공동체주의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인간을 공동체적 존재로서 공동체의 공동선 혹은 공익을 추구해야 하는 존재로 규정한다. 인간은 개인주의적 자유주의가 규정하듯이 '무연고적 존재'(unencumbered self)가 아니다. 따라서 오늘날 필요한 민주주의는 사익을 추구하는 원자화된 개인들이 공적인 일은 단순히 국가의 행정적·법적 제반 절차에 맡기는 '절차적'(procedural) 민주주의가 아니라 공동체적 존재로서 시민들이 참여하고 심의해야 하는 참여 민주주의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논의에 대해 자유주의는 과연 인간이라면 추구해야 할 공동의 가치가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즉 공동체는 구성원들에게 인간이라면 추구해야 할 좋은 삶을 살도록 요구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공화주의와 공동체주의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참여적 삶을 인간이 추구해야 할 좋은 삶이라고 주장한다. 즉 덕을 실천하는 삶이 좋은 삶이다. 공화국의 호출에 시(공)민으로 응하지 않는 인간들은 지배와 예속의 사슬에 얽매일 수밖에 없고 그것은 인간적 삶이 아니다.[15]
조승래, <공화국을 위하여>
개인주의를 변호하면서 가장 쉽게 저질러지는 오류는, 개인주의에 대한 공격이 일괄적으로 '집단주의'로 취급되면서, "그러면 집단주의는?"이라는 식으로 되물어버리고, 집단주의의 폐해를 논하면서 개인주의에 대한 비판을 덮어버리는 데 있다. 그러나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자면, 개인주의가 가져온(혹은 가져왔다고 여겨지는) 폐해를 논하는 것이 단지 집단주의자들만의 사악한(?) 음해는 아니다. 개인주의에 대해서 여러 논쟁들이 따를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개인주의에 대한 비판자들이 집단주의를 옹호한다고 잠정적으로 가정하는 것 만큼은 지양해야 한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개인주의를 변호할 수 있는 것은, 개인주의가 인간 본연의 이타심을 말살하는 사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개인주의 사회에서의 의로운 개인들은 '개인주의는 이타심을 요구한다'라는 설명에는 근거로 부적절하지만, '개인주의가 이타심을 말살하지는 않는다'라는 설명에는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있다.
경제학적으로 본다면, '선행을 함으로써 발생하는 자기만족'이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하는 효용함수를 지닌 개인주의자는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타인을 도우려 할 것이다.
개인주의가 만연하다고 해서 서양에서는 부모와 자식간의 사이는 차갑고 냉정하다고 편견이 존재하는데 이건 개인주의와 집단주의를 떠나서 그냥 개개인의 가족마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이다. 한국, 일본, 중국 등 아시아에서도 매정하거나 비정한 부모, 자식, 형제, 자매들도 존재하고 서양에서도 우애깊고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를 위하는 부모, 자식, 형제, 자매들도 존재한다. 개인주의, 집단주의와 가족의 우애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영미권의 작품에서도 개인주의적으로도 '친밀한 타인'으로써 충분히 자식을 사랑하는 모습이 묘사되며, 반대로도 자식을 자신처럼 여기며 귀중히 다룰 수도 있고 자식을 부모의 소유물로 여겨서 우애가 깊지 못할 수 있다.
3.2.3. 개인주의 사회는 눈치보기나 부조리, 집단괴롭힘 등이 없는가?
이론적으로 공동체주의나 집단주의 자체를 배제한 순수한 개인주의 사회라면 성립하기 힘들다. 서구조차도 개인주의자들로 이루어진 사회가 아니며, 공동체주의적, 집단주의적 요소들이 섞여 있다. 공동체주의, 집단주의적인 요소가 전혀 없이 성립되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건 인간만의 특징이 아니라 무리지어 사는 생물들의 특징이다.흔히 학교, 군대, 직장에서 일어나는 부조리는 큰 테두리 안에서 다른 하나의 작은 사회가 형성 되어서 그 안을 이루는 구성원들의 개인적 인성과 개인의 방향성에 의해 집단적으로 발생한다.
어떤 집단을 이루는 개개인들 중 집단을 이끌어가는 무리에 의해 이기주의로 바뀌고 그 집단 안에서 발생하는 부조리 혹은 따돌림이 존재할 수도 있다. 자유주의, 개인주의가 강한 미국에서도 왕따가 존재하고 부조리가 있다.
흔히들 특정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국가나 특정 사건들을 보고 '외국도 저렇게 하는데 뭘' 라고 개인주의 오류라고 판단하기 쉬우나, 엄밀히 따지자면, 이것은 개인주의와 관계가 없다. 자신의 가치관과 권리를 존중받기 원하는 만큼 상대방의 가치관을 존중해야하는 개인주의를 벗어난 이기주의 혹은 집단주의, 전체주의 차원에서는 발생할 수 있다.
개개인이 개인주의를 추구할지라도, 개인주의자들이 모여 어떠한 집단을 이뤘을 때 발생시키려는 유대감이 변질되어 집단 이기주의로 바뀌는 경우가 많다.
흔히 범하는 논리적 오류들로 "미국" 이나 서양권 국가를 예로 들어 개인주의를 비난하는데 미국이나 많은 서양권 국가들에서도 개인주의와 집단주의가 공존하며 민족주의를 외치는 경향이 강한 국가일수록 개인주의와는 멀다는 점을 유의해주기 바란다.
특정 국가를 두고 개인주의다 아니다로 판단 할 수 없다. 개인주의는 말 그대로 개개인을 두고 판단해야 한다.
3.3. 서양은 개인주의이고 동양은 공동체주의인가?
개인주의 지수를 나타낸 지도. 빨간색일수록 개인주의 지수가 더 강하다. |
흔히 서구인들은 모두 개인주의적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들도 문화적인 배경과 사회적인 발전 정도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같은 서구권에서도 남유럽, 동유럽, 중남미는 공동체주의 성향이 더 짙고 반면에 서구 중에서도 북미, 호주, 뉴질랜드, 서유럽, 북유럽은 개인주의 지수가 가장 높은 편에 속한다.[16] 보통 농업 사회일수록 공동체주의 지수가 강하다. 일본의 개인주의 지수가 동아시아에서 타국가보다 좀 더 높은 것은 가장 빠르게 근대화와 산업화에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다만 같은 농업사회라도 밀, 보리, 옥수수 농사가 주류인 나라는 벼농사가 주류인 나라보다 개인주의로 이행하기 쉽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위의 개인주의 지수가 높은 나라들은 모두 다 맥류나 옥수수를 주식으로 하는 나라들이다. 또한 종교의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다. 개인주의 지수가 꼴찌로 나온 인도네시아는 1990년대 후반까지도 독재정권이 집권했고 극단적으로 집단주의적인 이슬람교의 영향력이 막강했기 때문에 국가주의와 종교적 배타주의가 결합한 형태로 극단적인 집단주의 사회가 정착한 것이다. 항상 그런것은 결코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선진국, 무종교, IT, 고학력 사회, 도시로 갈수록 개인주의가 높은 편이고, 반대로 개발도상국, 종교, 농경, 저학력 사회, 시골로 갈수록 공동체주의가 더 높다. 대한민국의 경우 이미 선진국, IT, 고학력 사회의 단계에 진입했고, 무종교인의 비중이 높은 편이지만, 다른 선진국들에 비하면 경제발전도 늦었고 민주화가 이루어진지는 겨우 30여년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도 사회에 군국주의, 농경사회, 봉건적 문화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어서 집단주의 성향이 높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빠른 경제발전을 한 대한민국의 특성상 세대별로 차이가 심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젊은세대에서 더 집단주의 의식이 높은 경우도 존재하고 잉글하트-벨젤의 연구에 따르면 한국보다 경제발전이 뒤쳐진 베트남이 한국보다 더 개인주의 성향이 높다고도 나와 단순히 경제발전으로 인한 세대차로 일반화 하기도 곤란하다.
그리고 미국과 유럽의 개인주의에 대한 대체적인 인식을 비교하자면 유럽인들은 시민 사회 보호를 우선시하며 이를 지키기 위한 정치적 권리 행사와 정부의 개입을 선호한다. 물론 모든 유럽인들이 좌파라는 건 아니고 단지 우선 순위가 다를 뿐이다. 반면 미국인들은 국가의 개입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개인의 가능성을 중시한다.
두 사회의 차이는 각각 일장일단이 있다. 우선 유럽은 사회 안정을 위한 분배에 신경을 쓴다. 서민들의 삶의 수준은 더 좋지만 미래의 성장 가능성을 훼손하는 단점이 있다. 영국병이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미국은 사회가 역동적이고 팽창적이지만 사회 통합에서 문제점이 있고[17] 현대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가장 고스란히 보여주는 국가이기도 하다. 어떤 경우에는 다수 한국인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정책 시스템[18]에 관해서 한국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당연하지만 미국에서는 개인정보보호의 이유로 신분증 만들 때 지문을 등록하는 것도 국가가 개인의 가장 중요한 생체 정보인 지문을 무슨 권리로, 왜 수집하느냐 라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 시기에 마스크를 쓰는 것조차 "내가 마스크를 쓰든 말든 내 맘대로 하는거지 정부가 왜 쓰라마라 하느냐"라며 마스크 거부 운동까지 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미국의 코로나 방역에 큰 문제가 되기도 했다. 미국에서는 이러한 '나는 선택할 권리가 있다.'식의 주장이 많은 공감을 얻는데, 그런 주장이 기업가 정신이나 개척 정신, 아메리칸 드림과 같이 미국을 성장시킨 이념과 뿌리와 같다는 것을 생각하면 또 애매해진다. 거꾸로 말하면 정부든 뭐든 그 누구의 간섭없이 안정적으로 나만의 사업을 꾸릴 수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19]
밀 농사와 쌀 농사가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의 차이를 낳았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미국 버지니아 대학교 사이언스 지의 발표에 따르면 쌀 농사는 농경지에 물을 대주는 관개 시설을 필요로 하는데 이는 대규모의 토목 공사가 이루어지고 이렇게 얻은 수자원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협조가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관개시설을 구축하기 위해 공동의 노동력이 필요하고, 관개시설 주변에 많은 인구가 모여 살게 되기 때문에 자연스레 공동체주의의 문화로 발전했다고 한다. 반면 밀은 맨땅에서 자라는 작물로 그런 관개 시설이 필요 없으므로 공동체주의의 형성이 더뎠고 개인주의적인 생활 양식이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한다.[20]
물론 공동체주의는 서구권에서도 주류였으며, 단지 개인주의가 반세기 일찍 보급되었을 뿐이라는 관점도 있다. 사실 이 관점이 정설에 가깝다. 근대 이후 서유럽의 경제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이루어졌다는 것.
이 곳에서 서구에 대한 서술은 영미권 외의 유럽의 기준에 쓰인 것에 가까우니 주의.
서양은 원래 개인주의, 동양은 공동체주의라고 많이 오해를 한다. 사실 과거 중국의 전국시대에도 개인주의적 주장이 존재하였다. 양주 문서 참고.[21] 게다가 한국에서는 집단주의가 곧 공동체주의라고 오해되기 쉬워서 이 문제를 더욱 키운다. 공동체주의 항목 참조.
그러나 20세기 68운동 전에는 서구에서도 공동체주의가 주류였고, 아무리 올려 잡아도 종교개혁 쯤은 되어야 일부 지역 한정으로 개인주의가 맹아 수준으로 나타났을 뿐이다.
고대 그리스를 보더라도 노동은 ‘사적 영역’에 국한된 활동이었다. 그리스의 자유 시민은 자신이 해야 할 노동을 노예에게 시켜 대신 하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하여 그리스 시민들은 생물학적 종속성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다. 대신 이들은 남는 시간에 아고라에서 폴리스 내의 정치적 현안을 논의했다. 그리스 시민들은 ‘공적 영역’에서 ‘행위의 자유’를 펼치는 것은 권리인 동시에 의무라고 생각했다. 고대 그리스에서 웅변술이 발전한 것은 이 때문이었고, 시민 공동체에 공적으로 활동하는 것이 개별 생명의 무상성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대로, 인간은 '정치적 동물'로[22] 여겨지던 게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였다. 더군다나 고대 그리스는 자연권 개념이 없었다. 즉 개인의 권리 역시도, 천부적으로 타고 나는 것이 아니라 시민 공동체에 기반한 권리였다. 이는 공동체주의적 권리관에 가깝다.
고대 로마 공화국의 경우로 넘어가더라도, 시민들은 공공의 재산(res publica), 곧 공화국(republica)을 기반으로 개인의 권리를 이해했다. 로마인들의 영웅이란, 개인의 굴욕을 견디고 공동체에 오롯이 헌신하여, 마침내 그 공동체를 영광스럽게 한 아이네아스임을 생각해보자.[23] 또한 개인의 영광을 위해 달려든 아킬레우스에 대한 평가를 낮추고,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미친 듯이 구른 헥토르에게 열광한 게 로마인들이었다.[24] 물론 그리스인들 역시도 아킬레우스의 오만을 경계했지만, 로마인들은 개인의 영광을 위해 달려든 행동 자체에 "영문을 모르겠어."라고 반응했다.
그나마 철학사적 관점에서 볼 경우 개인주의로 볼 건덕지가 있는 것은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 정도이다. 그러나 스토아 학파의 경우 공공선을 강조했고, 공공선은 개인에게도 혜택이 돌아간다고 여겼다. "전체에 이로운 것이라면 부분에게도 해롭지 않다. 전체는 그에게 이롭지 않은 것을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그런 전체의 부분이라는 점을 기억하는 한, 나는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크게 만족할 것이다."라는 <명상록>의 구절이 여기서 기인한다. 이는 전형적인 공동체주의적 공공선 개념이다. 또한 에피쿠로스 학파가 국가라는 기관도 결국 개인의 행복을 위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후일 개인주의자들에게 힌트가 되었을 순 있지만, 이 것을 개인주의로 확대 해석하기에는 분명 무리가 있다. 왜냐 하면 애초에 공동체주의에서도 공동체를 그렇게 이해했으니까.[25]
또한 로마 공화국의 시민들에게도, 후일의 중세 이탈리아의 여러 공화국들의 시민들에게도, 자유란 '공동체의 간섭'이 부재한다는 개념이 아니었다. 그들은 개인이 개인에게 예속(隸屬)되는 것의 부재를 자유로 이해했으며, 이는 개인주의적 자유관과는 큰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해, 로마 시민들과 제노바 시민들, 베네치아의 시민들에게 '개인의 의지'에 예속되는 것은 자유에 대한 중대한 침해가 맞았지만, 공동체의 법에 복종하는 것은 자유의 침해가 아니었다. 설령 침해라고 하더라도 매우 부차적인 침해로 여겼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자유란, 오직 자유시민들로 이루어진 공화국에서만 누릴 수 있는 것으로, '법의 간섭'은 자유의 침해가 아니라 자유의 친구라는 게 이들의 생각이였다.[26] 제노바와 같은 공화국을 벗어나, 프랑스나 영국, 신성 로마 제국 등으로 넘어간다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나마 서구에 본격적 의미의 개인주의가 나타났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종교개혁 이후이다. 하지만 정작 종교개혁의 시작인 마르틴 루터는 개인주의와는 거리가 있는 사람인데, 1520년에 이미 루터는 보편 사제직에 대한 자신의 학설을 토대로 개혁을 그리스도교 귀족과 제국 도시 당국의 수중에 맡겼다. 즉 인민이 아니라 귀족에게 보내는 호소였고, 1526년 슈파이어Speyer 제국 의회에서는 영주들이 개혁을 떠맡았다. 결국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 평화 회의에서는 영주가 믿는 종교가 그 지역의 종교가 된다(cuius regio, eius religio)는 원칙이 제국 법률이 되었다. 가톨릭을 선택할지 루터교를 선택할지는 인민 개개인이 아닌 영주들의 자유였다. 따라서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짠하고 개인주의가 나타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철학사적 의미에서 개인주의는 이후 칼뱅 등 후속 개신교인들에 의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간혹 네덜란드의 독립을 개인주의와 연결시키기도 하는데, 네덜란드에서는 가톨릭 신자에게 종교의 자유가 없었다. 만약 있었다면 남부지방 상당수가 다른 나라로 떨어져나가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지역에 따라서 가톨릭에 관용적인 지역은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관용 차원이였지 공식적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가톨릭뿐 아니라 알미니우스파, 루터파 등의 다른 개신교파들도 자유를 누리지 못했으며 개혁교회조차 국왕의 눈 밖에 나면 바로 탄압당하는 일이 많았다.[27] 근대적 의미의 종교적 자유가 네덜란드 헌법에 명시된 건 1848년이 되어서고, 가톨릭이 금지에서 풀린 건 1853년 부터이다. 그 이후로 20세기 초까지도 네덜란드 사회에서 '관용'이란 어디까지나 같은 종교 혹은 이념을 공유하는 공동체 간의 관용을 의미했으며[28] 개개인의 취향을 완전히 관용하게 된 것은 나머지 서유럽처럼 1970년대에 들어서였다.
프랑스 혁명 역시도 그 기반은 공화주의적 혁명이였고, 가톨릭 사제들에게 교황이 아닌 파리의 중앙정부에 순명할 것을 강요했다. 그리고 이 강요에 응하지 않은 사제들은 '공동체의 적'으로 판명하고 탄압했으며, 같은 원리로 방데의 인민들을 '공동체의 적'으로 규정하여 학살했다. 그나마 개인주의적 경향이 국민 개개인에게 일찍 보급된 건 칼뱅등의 청교도적인 사상을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던 미국 정도.
결국 개인주의가 단순히 철학자들 사이에서 논의되는 수준을 넘어, '서구인'들에게 보편적으로 보급된 건 68운동 이후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 개인주의적 낌새를 보이는 사상들이야 철학사에서 있어왔지만, 그것이 '서구인'이라는 집단의 개인주의적 경향을 대변한다면, 같은 원리로 양주 등의 사례를 들어, 고대 중국인들에게도 개인주의가 보급되어 있었다는 이상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단지 이분법적으로 서양은 개인주의, 동양은 공동체주의로 이해하기보다는, 인류 보편적으로 공동체주의가 두루두루 대세였다가 20세기 중반 서구에서 (특히 전체주의에 대한 반성으로) 개인주의가 보급되었다고 보는 게 알맞을 것이다. '개인주의 vs 집단주의'는 지나친 이분법이라는 의견이 있다.
오늘날 영장류들 사이에도 오랑우탄을 빼면 집단으로 살아가지 않는 종이 있던가? 인간도 선사시대 시절부터 초원에서 다른 개체들과 함께 집단 공동체를 이루었으며, 단 한 번도 홀로 살아간 적이 없다. 다만 진화심리학자들 가운데에는 온대기후에 속해 전염병이 많이 일어나는 지방에는 타인의 불필요한 행위를 감시하는 문화가 집단주의로 발달했다고도 한다.
종합하자면 개인주의 문화라는 것은 인류 사회에 등장한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이며, 과거 모든 문화권은 집단주의 혹은 공동체주의 문화에 가까웠다. 전근대에 문명을 이룬 인류의 삶을 크게 농경과 유목으로 나눈다면, 이 두 문화적 요소가 원활하게 지속되기 위해서는 집단(공동체)을 지향하는 것이 가장 수월했기 때문이다. 다만 시대가 지나고 수많은 역사적 사건을 겪으며 공동체와 집단보다는 개인을 중시하는 기조가 강해졌고, 가장 먼저 근대화·산업화에 진입한 서유럽이 개인주의 문화가 광범위하고 뿌리깊게 자리잡은 것이다. 실제로 현대 대한민국도 산업화·민주화 이후 개인주의 기조가 점점 강해지고 있으며, 이로 인해 발생하는 기존 사회와 개인 간의 갈등이 많은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3.4. 대한민국에서의 개인주의에 대한 오해
한국에서는 개인주의 자체를 이기주의로 취급하는 등 부정적인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당장 인터넷만 검색해봐도 멋 모르고 개인주의를 이기주의와 동일시하며 폄하하는 이런 잘못된 시각을 쉽게 접할 수 있으며, 특히 농경사회, 또는 농경사회에서 산업화 사회로 변화하는 시기에 성장한 중장년층과 노년층에서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동일시하는 태도를 많이 보인다.[29] 반대로 이기주의적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오히려 자신이 개인주의라고 혼동하는 경우도 많다.[30] 이러한 시각이 형성된 원인으로는 20세기 초까지 존속했던 왕조 체제, 성리학적 세계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지배, 박정희의 민족국가 지상주의적 사고방식, 1980년대 말까지 이어진 군사독재정권 등을 꼽을 수 있다.
한편 대한민국을 포함한 아시아에서는 서구의 Individualism에 해당하는 정확한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리처드 니스벳의 저서 생각의 지도에 따르면, 동양에는 서양에서 말하는 정확한 의미의 Individualism이 존재하지 않고, 이를 가장 가깝게 번역한 단어인 개인주의 역시 어쩔 수 없이 이기주의를 내포한다고 한다. 리처드 니스벳이 생각하는 본래의 서양적 Individualism이 이기주의가 완전히 배제되어 있는 개념이라면, 대한민국 그리고 아시아의 개인주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즉, 개인주의가 내포하는 이기주의를 인정하면서 그것이 Individualism과는 다르다는 견해이다.
러시아 출신 한국학자 박노자는 박정희의 국가주의적 사고방식한겨레신문 기사, 제국주의에 대한 패배의식, 개인주의에 대한 비틀린 인식 등 때문에 개인주의가 부정적인 것처럼 묘사되었다고 주장했다. 박노자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제국주의에 대한 패배의식은 더 큰 문제를 몰고 왔다. 초기 개화파들 가운데 일부는 인권과 자유와 평등 등을 근대화의 지표로 받아들였지만, 이들의 관심은 곧바로 국가와 국민 같은 ‘집단’으로 기울었다. 제국의 힘에 대항하려면 국가의 힘을 키우고 국민을 훈육하는 ‘부국강병’의 길밖에 없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따라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국민의 썩은 정신을 뜯어고치지 않고는 독립도 자주도 없다는 이광수 류의 민족개조론, 그러니까 끝내는 광적인 친일로 빠져들 지적 사생아가 태어났다. 국가와 민족을 들먹이며 근대화 기수로 나섰던 박정희의 국가주의적 사고방식이 여기에 닿아 있음은 물론이다."
박노자는 또한 좌파든 우파든 개인주의를 비정상적인 것처럼 몰고 왔다고도 지적했다. 박노자는 "우파든 좌파든 영향력 있는 주요 논객들은 개인주의를 비사회적이거나 반사회적인 현상으로 보는 것이 훨씬 더 일반적인 분위기였다. 가령, 초기 마르크스 주의자였던 박영희는 좌익적 잡지였던 <개벽>의 1924년 7월호에 쓴 글에서 개인주의를 극단적 이기주의, 반사회적 자기중심주의와 동일시했다. 그에게 남편과 아이를 버리고 집을 나간 <인형의 집>의 노라는 ‘패륜’의 대명사일 뿐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박노자는 한국 사회의 대표적인 개인주의자로 윤치호를 지목했는데, "일상생활에서 개인주의를 존중했던 윤치호 같은 개화파 지식인들도 정치적 자유를 위한 싸움에는 무감각했고, 결국엔 매판 지식인으로 전락했다. 그 결과, 진정한 개인주의는 유행을 좇고 안일을 옹호하는 사이비 개인주의에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라고 말했다.
6차 교육과정의 사회 교과서 같은 경우에는 개인을 중시하지만, 남에게 피해는 주지 않는 것이라며 이기주의와 구별해서 서술하기도 했다. 이건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이원복이 설명한 것과 매우 비슷한 관점이다. 그래서 6차 교육과정 교과서로 배운 세대는 이기주의와 다른 개념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도덕, 윤리과목 계통 교과서는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의 탈을 쓴 집단주의)를 대칭적으로 설명하며 잘 구분하고 있다.[31] 다만 개인주의(자유주의)는 그나마 고등교육이나 언론, 서적 등을 통해서 접할 기회라도 많은데, 공동체주의(공화주의)에 대한 진지한 담론은 오히려 한국에서 보기 힘들어졌다는 게 아이러니. 단지 집단주의에 대한 (말만 번지르르하게 포장했을 뿐인)유혹이나 강요만 생겨나고 있을 뿐, 정작 정치적 담론으로 진지하게 논의되는 경우는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32] 다만 영미권에서는 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공화주의(공동체주의)가 많이 연구되고 있다.
물론 한국 내에서도 이러한 한국의 인식과 교육 체계를 비판하는 의견이 많다. 한국의 개인주의자들이 개인주의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려 노력해 왔으며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는 거 같기도 했다.[33][34][35]
하지만 2020년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됨에 따라, 개인주의 문화가 강한 서구권에서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수/비율의 많은 확진자가 나오는 것을 두고 개인주의를 그야말로 이기주의의 극치 취급하는 의견이 많아졌다. 특히 집단주의 성향이 강한 중장년층, 노년층이 이러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일부는 요즘 젊은 것들의 알량한 개인주의라는 말을 써가며 세대 갈등을 조장하기도 한다. 다만 개인의 자유만을 이유로 선택하지 않는게 아니라, 신체적 이유(질병, 부작용 등)로 접종할 수 없는 이들이 많았던 코로나 백신을 사회고립, 미디어를 통한 표적몰이 등으로 마녀사냥 타겟으로 설정하여 반쯤 억지로 접종하도록 했던 백신패스 정책은 개인주의의 폐해는 커녕 집단주의의 폐해, 심하게는 나치식 정책을 연상시킨다는 비판을 받았고, 미접종자들의 소송이 승소하여 중단되었다. 그리고 2차 접종 87%, 3차 접종 65%에 달하는 접종률에도 불과하고 델타변이에도 잘만 감염되었으며, 오미크론 변이 및 BA5에 국민 과반 이상이 감염되었다. 다만, 2022년에 접어들며 상황이 달라지기도 했는데, 중국의 제로 코로나 정책으로 상하이 봉쇄 등의 사건이 벌어지며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으며, 되려 K-방역 운운하던 한국은 수많은 확진자들을 쏟아내던 상황이 되었다.
애초에 개인주의가 일시적으로 쇠퇴했을지언정 민주화를 기점으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한국의 사회에 느리지만 계속해서 뿌리를 내리고 있고, 여기에서 기인하는 변화들이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집단주의의 폐해 또한 그에 비례하게 쇠퇴하고 있다. 개인주의는 대학을 중심으로 나타나는데,[36] 연세대학교와 아주대학교, 한국외국어대학교와 같은 개인주의를 주류로 하는 학풍의 대학이 늘어남과 동시에 국내 대학들의 세계적 평가가 점점 올라가고 있기도 하다.[37][38]
또한 201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관행과 불문율, 사회생활로 여겨졌던 회식 문화나 술 강요, 신고식 등이[39][40] 악습과 갑질이라는 의견이 많아지면서 점점 쇠퇴하고 있다. 그리고 혼밥에 대한 인식이 나아지는 등 개인주의의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또한 위에서 서술되었던 것처럼 당연시되었던 집단주의의 폐해가 점차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주로 젊은 층 사이에서 이에 반감을 가지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41] 집단주의와 그로 인한 폐해들을 그저 관행과 문화적 차이일 뿐이라고 부르짖는 기성세대들이 세대교체가 일어나면서 쇠퇴함에 따라 이러한 문제는 시간이 오래 걸릴지언정 언젠가는 해결될 것이다.
개인주의의 특징을 본다면 현 세대가 긍정적으로 볼 것들만 있다. 예를 들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최소한의 선을 지키며 눈치 보는 삶과 멀어지려고 한다, 남들에게 예의를 지킨다, 사적 모임을 최소화한다, 자신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다. 타인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나에게 주어진 일만 하되, 남한테 피해가 없도록 완벽하게 처리한다 등등. 그리고 이러한 특징들은 2010년대에 접어들며 점점 확산되고 있는 것들이다.
결론적으로, 개인주의는 한국의 사회에 알게 모르게 지속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을 뿐더러 한국인의 개인주의에 대한 반감은 그저 개인주의와 이기주의 간의 혼동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한국과 같이 개인주의가 필요한 사회에서 갖추어야 할 자세는 그저 개인주의를 오개념 없이 이해하고, 이를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3.5. 갈등에 대한 해결 방안
누구를 바꾸거나, 오지랖, 설득하려는 것은 인간관계상 대립유발요인이다.[42] 그것이 옳은 것이건 옳지 않은 것이건, 다른 사람과의 충돌과 대립, 대결, 적대관계가 발생하는 것은 바로 자신이 알고 있는 것 또는 어떤 진리를 상대방에게 강요하려 들기 때문이다. 그러한 강요와 오지랖이 사라지면 서로 충돌하거나 대립할 일이 없다. 사람의 가치관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먼저 상대방을 설득하려 들거나, 상대방을 바꾸려고 하는 것부터가 고집이자 일종의 고정관념이다. 자신이 상대방의 입장, 가치관처럼 바꿀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개인주의가 갈등과 대립을 완화시킬 수 있는 점에서 알아야 할 것은, 개인주의의 근간은 상대방과 자신이 다름을 서로 인정한다는 것에 있다. 쉽게 말해서 '나도 남들과는 다른 개인이니 너도 누구와는 다른 너만의 특징을 가진 개인이겠지.' 일단 개인주의는 나와 남이 서로 다른 존재임을 전제로 깔고 있다. 상대방이 나와 다른 생각, 취향을 가진 인간인 점을 인정하면 굳이 남을 설득하려 들지도 않고 남을 바꾸려 들지도 않을 것이며, 오지랖도 줄어들 것이다. 그 과정에서 충돌과 대립은 당연히 줄어드는 것이다. 또한 개인주의에서의 '공동체'는 특정한 정체성, 기호, 성향을 통하는 공통적 연대에만 의해서 생겨난다. 너는 나와 같은 한국인이니까 공동체가 아니고, '너는 나와 같은 기호 혹은 성향을 갖고 있으니까 나와 그 부분만큼은 공동체가 될 수 있을 거야'라는 논리다. 그래서 개인주의자들은 '우리'의 정의가 정적이 아니니 \'우리나라'라는 표현도 쓰기 싫어한다. 친했던 누구는 국적을 바꿀 수도 있고, 자신이 국적을 바꿀 수도 있으니까. 복합적이지만 이 대전제는 개인주의에서 말하는 공동체에 항상 성립한다.
3.6. 해결 방안과 반론에 대한 반론
개인주의가 확산되는 건 개인들이 현재로선 불필요하다고 느끼는 부분에서만 확산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과거 공동체주의가 성행한 건 그것이 개인과 집단을 결속시키고 또한 개인에게 그만큼의 이득이 주어졌기 때문이고 그런 환경에서도 개인은 자기 나름대로의 사적이익을 추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공동체에 충성한 것이다. 현대의 개인주의의 확산은 집단에 충성하지 않는다고 해도 자신의 최소한의 욕구 충족이나 주변 환경에서의 위협에 보호받을 수 있다는 안정감이 과거에 비해 획기적으로 일신되며 변화한 것이지 개인주의가 추구하는 진정한 개인주의를 가진 사람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개인주의자들이 아무리 선의로서 자신과 타인을 구분하려 해도 인간은 생물체의 본능으로서 자기와 다른 것 그리고 자신의 욕구충족의 잠재적 위협이 될 것이라 생각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는 마음을 늘 가지고 있으며 산업혁명 이후 인간이 필요로 하는 최소한의 욕구가 쉽게 충족되면서 안주하길 원하는 개인들이 유의미하게 늘어나고 사회와 정부가 이를 보호함으로써 명목상의 개인주의자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 힘쓰게 된 것이다. 이것은 결국 인간이 집단을 이루거나 홀로 동떨어지는 것은 대단한 이유가 아니라 자신의 만족감을 충족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며. 전쟁과 약육강식의 투쟁 속에서 이러한 개인주의자들이 살아남는 것은 매우 힘겨운 일이기에 평화와 안정이 필요하지만, 평화조차도 인간의 필요와 유무형의 이권 다툼 속에서 얻어진 것이기에 불안한 살얼음 위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인간이 행복을 느끼고 이득을 느끼는 것은 사람마다 시기마다 그리고 살아온 환경마다 다를 수밖에 없기에 서로 대립할 수밖에 없으며 개인주의가 이기주의와 불가분의 관계일 수밖에 없고 공동체주의가 전체주의와 불가분의 관계인 것은 각 개인과 집단이 그럴 듯한 미사여구를 표방하든 표방하지 않든 각각의 절대적 선은 그걸 지지하는 개인의 행복에 있기 때문이다. 즉슨 개인주의가 더 이상 개인의 행복을 보장하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아주 쉽게 개인주의를 버릴 수 있고 또한 개인주의는 그 사상의 방향 상 사회의 보장과 안정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사상이라는 것이다.[43]인간 역사에서 드러나듯 전체주의든 이타주의든 공동체주의든 개인주의든 활동 동력은 각 개인이 본인의 행복에 대한 욕구에 달려 있는 것이고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전부 이기주의와 통하는 면이 존재한다. 단지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와 비슷하게 가장 작은 구성원에서 모든 걸 바라보고자 하는 사상이란 점에서 다른 사상보다 매우 유사하여 온건적 이기주의라고 볼 수 있지 이기주의와 다른 사상이라 선을 긋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대놓고 용인되진 않을지언정 이기주의보다야 지금 사회의 속해 있는 개인들의 도덕적 만족감을 충족하고 속해 있는 사회에 대한 지위를 위해서, 그리고 자신들의 이권을 위해서라도 허울뿐인 지지를 받을 수밖에 없는 사상이기도 하다.[44]때문에 비관적으로는 공동체주의와 개인주의가 영원히 충돌하리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절대선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으며 사람은 이상을 추구하기 전에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므로 이런 갈등이 쉽사리 해결되는 것은 힘들며, 종교나 문화, 도덕, 법 등으로 간신히 땜질만 할 수 있을 뿐이다.
3.7. 관련 사상
4. 개인 권리 이론
4.1. 개요
“I swear, by my life and my love of it, that I will never live for the sake of another man, nor ask another man to live for mine.”
“내 삶에, 그리고 삶에 대한 사랑에 걸고 서약하노니 나는 결코 타인을 위해 살지 않을 것이며, 타인에게 나를 위해 살 것을 요구하지도 않을 것이다.”[45]
― 움츠린 아틀라스 中, 저자 아인 랜드[46]
“내 삶에, 그리고 삶에 대한 사랑에 걸고 서약하노니 나는 결코 타인을 위해 살지 않을 것이며, 타인에게 나를 위해 살 것을 요구하지도 않을 것이다.”[45]
― 움츠린 아틀라스 中, 저자 아인 랜드[46]
윤리·정치적 개념으로 개인주의는 개인들의 주권을, 말하자면 사람이 다른 사람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닌, 그 자체가 목적단위라는 원칙에서의 주장이다. 윤리·심리학적 개념으로는 사람의 지성의 주권을 가장 소중한 것으로 평가하면서 사람은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해야 한다는 이론이다.
인간의 생명을 인간의 가치 기준으로 보는 윤리 규범에는 개인주의가 암시되어 있고, 또 개인주의가 필요하다. 그런 것으로 개인주의를 옹호하는 것은 68운동 등으로 인한 새로운 일이 아니다. 새로운 것은 개인주의를 실천할 일괄된 방법에 대해 정의가 내려졌다는 것이다.
앞서 서술된 개인주의는 모두 관점의 이론에서 서술했기에 상대성, 심지어 정치구도에 비추어 서술된 경향이 크다. 이와 다르게 아인 랜드의 객관주의철학파는 개인주의를 권리에 대한 이론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상대성에 비추어 설명된 개인주의는 권리적 측면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모순이 많은 채 설명된다. 권리로써의 개인주의와 관점으로써의 개인주의에서 큰 차이는, 개인주의를 모순이 없는 기본 권리로 설명하려는 것이다. 가장 차이가 큰 근거는 도덕과 윤리에 있어 개인 단위의 부산물인 이기심을 어떤 원리로 보냐는 것. 권리로 설명되는 개인주의는 이 부분을 크게 근거로 한다. 자세한 서적으로는 아인 랜드의 <<이기심의 미덕, Virtue of Selfishness>> 등이 있다
4.2. '가짜 개인주의'에 대한 비판
앞선 설명에서 비판 항목처럼, 개인주의는 흔히 다른 이들의 권리를 무시하며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곤 한다.이러한 개인주의자가 이기적이라는 주장은 대부분 대중이나 집단을 향해 인용된다. 대중이나 집단을 유지하려는 이유이다. "집단 내에서, 자신이 희생당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려는 경향을 보인다"고 설득해야한다. 그래야 대중과 집단, 이 종속적인 틀을 지배하는 기득권이 깨지지 않는다.
그런 해석에 대한 반박은 명확하다. 개인주의가 윤리적 원칙으로 존속하는 합리적인 바탕에 대한 대답이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 인간 존재로 생존하는데 바로 필요한 '권리'"이다.
어느 사람도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범할 도덕적 권리를 절대로 주장하지 못한다. 다른 이의 침범 불가능한 권리를 인정 않는다면, 본인도 그런 권리를 박탈 당하는 것은 자동적이다. 나의 권리가 중요하니 다른 사람도 나랑 같은 중요한 권리를 가지고 있고, 따라서 나는 나의 권리를 요구하는 것처럼 상대의 권리를 해칠 권한이 없는 것이다. 개인주의자라면 말이다. 이런 논리가 가능한 이유는 권리의 바탕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모순되는 것에 대해 도덕적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
개인주의자는 거래자로서 사람들을 다루지, 약탈자로서 사람들을 다루지 않는다. 개인주의자는 생산자로서 사람들을 다루지, 히틀러나 아틸라 같은 침략자로서 사람을 다루지 않는다.
집단과 대중의 역할을 강요하길 바라는 기득권들은 사람들이 마치 주인을 섬기는 노예의 사고처럼 잊길 바라는 것이 있다. 바로 거래자/약탈자, 생산자/침략자의 존재를 구분하는 힘이다.
여전히 개인주의는 변질된 공산주의자, 권위가 섞인 종교의 근본주의, 전체주의자에 의해 권리의 조건으로 희박하게 받아들여질수록 오독되고 잘못쓰이는 경향이 크다. 게다가 아무래도 한국이라는 환경상 당연히 나라의 국민성인 전체주의보단 개인주의에 비난이 가해진다.
하지만 개인주의의 극대화라는 뜻은 사회가 더욱 복잡해지고 더욱 많은 사람들이 뭉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다.[47] 오히려 개인주의가 태동한 이후부터 더욱 복잡하고 많은 공동체가 태어나고 있다. 공동체가 존재한다는 뜻이 공동체주의가 아닌 만큼, 인간 권리와 행동의 단위를 단체가 아닌 개인으로 보는 것이 개인주의임을 알 필요가 있다.
또한 개인주의란 너는 너 나는 나 여기서 끝이 아니라 올바른 합리적인 관점에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 남과 자신의 자유를 모두 존중하고 타인에게 함부로 무언가를 요구받지도, 하지도 않는 것을 얘기한다.
즉, 개인주의란 겉으로 보기에만 너는 너 나는 나 식으로 자기 하고싶은대로만 하고 하고싶은 말만하고 그런다고 개인주의가 아니라는 얘기다. 대다수 자칭 개인주의자들은 이런점에서 가짜 개인주의자이다. 남에게 대하여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요구받지 않으며 최소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남들과 자신의 자유 모두를 존중하는 것이 그것이며, 절대로 집단의 편견과 잣대로 판단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젊은층이라 해도 뿌리깊은 집단주의는 변함이 없다. 단지 그 정도가 아주 조금 약할 뿐이다. 여전히 젊은층도 집단의 잣대로 어느 하나의 개인이나 가치를 평가하고 따돌리는 등 그 폐해는 심각하다.
4.3. 관련 인물
- 아인 랜드: 위 인용문이자 급진 개인주의 사상의 정수를 담고 있는 발언인 “내 삶에, 그리고 삶에 대한 사랑에 걸고 서약하노니 나는 결코 타인을 위해 살지 않을 것이며, 타인에게 나를 위해 살 것을 요구하지도 않을 것이다.”을 자신의 소설 움츠린 아틀라스의 인물 존 갈트를 내세워 말했다.
- 양주: 위 인용문의 원조격인 발언(내 터럭 하나를 뽑아 천하에 이익이 되더라도 하지 않겠다)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4.4. 갈등에 대한 해결방안
"합리적인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해 관계의 충돌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명제는 이해되기 어려울 수 있다. 이는 욕망과 가치라는 두 개념이 개인주의에서 자주 부적절하게 서로 섞어 사용하고 이해했기 때문이다.먼저 "개인주의를 관점"으로 보았을 때는, 개인주의가 필연적으로 타인과 갈등을 일으키며, 이로 인해 발생하는 충돌과 대립은 필연적이지만 발생하는 갈등을 최소화는 태도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권리라는 것이 타인과 갈등을 일으키며, 타인과 나의 같은 권리가 충돌하고 대립한다는 것은 권리라는 뜻 자체에서 성립되지 않는다. 법학자들의 해석에 따르면, 권리의 충돌은 "하나의 객체"위에 "여러 권리"가 충돌하는 경우를 지칭하므로, 개인 간의 권리 충돌은 인정되지 않는다[48].
대신 "개인주의를 권리"로 이해하는 자가 "합리적"이라면, 이해 관계의 충돌은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이해 관계를 1. 현실 2. 맥락 3. 책임 4. 노력으로 이루어진다고 가정하면, 개인과 타인의 인지에 의해 그려진(=주관적인) 4가지 고려사항은 이해 관계 그 자체이며, 서로 다른 가치관으로 타협을 찾을 수 있다. 다만, 이런 가치들은 산술적, 법적, 도덕적으로 판단하기 힘들기 때문에, 대체로 타협을 하게 되는 것이 합리적이다. 따라서, 타협을 하지 못하고 있다면 대체로 본인이나 타인의 권리를 침해 중인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관점에서 설명한 개인주의"에서는 권리간의 충돌이라는 표현을 부정하면서, 현실에서는 곧잘 "충돌"한다고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바로 욕망이 인지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보통 "개인의 욕망이 좌절될 때마다 이해관계가 희생된다"는 표현이 주로 지적되는데, 이는 "사람(타인)의 가치와 이해관계"에 대해 "욕망"이라는 주관적인 관점을 갖는 것이다. 예를 들면, 타인에겐 그렇지 않음에도, 본인의 욕망이 정당하다고 믿는 상태가 바로 "타인의 권리를 침해했다고 착각하는 개인주의"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어떤 사람이 케이크를 먹는 즐거움과 간직하는 즐거움을 동시에 누릴 수 없다고 주장한다고 가정해보자. 이런 사례는 이념화된 사회에선 특정 부류를 특별나게 더 위하는 곳이 아니면 고려사항으로부터 제외하기가 쉽다.[49]
5. 혼자만의 시간을 선호하는 성향
1~4번에서의 의미와 다르게 사람들과 많이 접촉하지 않고 혼자 보내는 시간을 선호하는 성향을 뜻하기도 한다. 사실 기성세대를 중심으로 대중들이 인식하는 "개인주의"란 사실은 이런 것으로, 사상으로서의 개인주의가 아닌 생활상으로서의 개인주의를 의미하는 경향이 크다.- 대부분 내향적이다.
- 사교활동을 즐기지 않는다.
- 퍼스널 스페이스에 민감하다.
- 사생활 침해, 오지랖, 간섭을 매우 싫어한다.
-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는 것보다는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을 선호한다.
- 남의 시선을 잘 신경쓰지 않는다.
시대가 흐르면서 인간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는 성향이 강해지고, 혼자 즐길 수 있는 취미(게임, 애니메이션, 인터넷 커뮤니티 등)가 발달하면서 개인주의자가 급속도로 증가하는 추세다. 그래서 나홀로족, 자발적 아싸, 비연애, 비혼, 비출산 등의 표현이 등장했으며, 특히 2020년대 들어 코로나19의 유행으로 개인주의 성향이 더욱 강해졌다.[50][51]
젊은층(청소년~청년)과 기성세대(중년~노인) 간의 세대 차, 세대 갈등을 유발하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다. 젊은층은 기성세대에 비해 집단성이 덜하다. 하지만 기성세대는 공동체주의 생활에 더 익숙하므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충돌하는 것이다. 특히 명절에 친척들이 모였을 때 친척 어르신들의 과도한 관심에 불편을 느끼는 젊은이들이 많다.
북유럽 국가들은 특유의 내향적인 국민정서가 있으므로 전 세계에서 가장 개인주의적이다. 반면 대한민국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선호하는 좋게 말하면 공동체주의, 나쁘게 말하면 집단주의 성향이 강하다.
6. 관련 문서
[1] 이러한 이슈에 비추어 볼 때 한국 사회는 개인주의적 사고가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면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개인주의가 자리를 잡을까 말까 할 때쯤 서구 사회는 이미 수 세기 전에 개인주의를 정착시켰고 이를 넘어 그 비판과 반성을 논하고 있었다. 반면 한국은 집단주의의 잔재가 만연한 와중에, 서구로부터 개인주의와 개인주의에 대한 비판을 함께 수입한 것이다.[2] "나와 타인을 동등하게 이롭게 하는 것"은 도덕적 평등주의라 한다.[3] 의좋은 형제 이야기를 생각해보자[4] 이때 타인의 국적은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5] 공동체주의자, 종교인 등.[6] 당장 복지에 대한 관점에서도 서로 대립한다. 공화주의에서는 부자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요구하여 복지를 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개인주의 또는 자유주의에서는 부자들의 자발적 자선을 더 강조하는 편이다. 실제로 공화주의적 전통이 상대적으로 많이 남아 있는 유럽의 경우 자선보다는 세금을 더 강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반대로 자유주의적 전통이 많이 남아 있는 미국의 경우 자선을 더 강조한다.[7] 하지만 이건 어불성설이다. 개인주의의 이익추구가 이기주의로 변질된다면, 한국ㆍ중국 등 집단성이 매우 강한 나라에서는 이기주의가 나올 수가 없다. 집단성을 강조하면서도 자기 자신이나 자기 집단 외의 다른 이에게 피해를 끼치는 집단 이기주의의 예시가 있듯이 개인주의가 이기주의로 변질된다고 모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집단주의일수록 동질감과 소속감에 취해 타인과 타 단체의 피해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으며 적대적으로 변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한국식 회사 경쟁문화를 보라. 타 부서나 타사, 타 단체를 뛰어넘기 위해서 온갖 이기적인 행동을 하고 환경 오염 등을 일으키기도 하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8] 논리학에서 중요시하는 논리의 구성에만 따지면 개인주의의 문제가 맞은데, 개인주의만의 문제로 보기는 어렵고, 종교나 민족, 국가 같은 특정한 주의가 대두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드러나는 현상이다. 따라서 현실적으로는 대부분의 사상, 이념 및 체제에 관한 맹목적인 도입과 문제점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태도가 가진 문제점으로 볼 수 있다. 현 시대에도 사람들이 신경을 못 쓰고 몰라서 그렇지, 극단적 추구로 인한 갈등과 다툼의 세기 자체는 국지적 분쟁의 원인이 쉽게 될 만큼 격렬하다.[9] North & Fiske (2015) “Modern Attitudes Toward Older Adults in the Aging World:A Cross-Cultural Meta-Analysis.” Psychological Bulletin 141(5):993–1021[10] 개인주의가 극단적으로 변한다고 개인주의=개인 이기주의가 무조건 되지는 않는다. 개인이 과도하게 강조되어 집단에서 통용되는 윤리도덕을 침해한다고 판단될 때 그렇게 되는 것이다. 집단주의 문화에서도 집단 이기주의'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소속된 개인들 간에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른 이기주의 또한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집단에도 집단성을 중요시하는 '개인'들이 엄연히 존재하며 그로 인한 이기주의들은 얼마든지 발생될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물론 이 경우는 그래서 그 집단이 건전성을 잃어버렸다고 할 수 있게 되는 때다.[11] 어디까지나 이건 개인주의라고 보긴 어렵다. 자신이나 자신들만 챙기는 집단주의 국가에서 극심하게 나오는 문제이기도 하다. 아무리 극단적이라도 개인주의는 남에대한 '공감 그 자체'를 안할 수는 있더라도 '남을 짓밟지는' 않는다.[12] 게다가 나쁜 면에서만 별 차이가 없는 것도 아니다. 애초에 집단주의라고 하면 그냥 단순하게 '모든 인간이 무조건 평등해야 한다'라거나 '항상 윗사람에게 복종하라'라는 뜻이 아니라 바로 질서를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것이다.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는 위계가 생기건 말건 그건 딱히 집단주의의 관심분야가 아니다. 또한 그런 질서를 통해 선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 반대로 행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결국 절대적인 정의를 믿으며, 그 정의가 평화로운 방법으로 행해졌을 때만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면 간단하게 개인주의와 집단주의가 완벽하게 통일된다. 이게 아니라면 집단주의자들은 질서를 지키기 위해 다른 도덕이나 법등도 무시하고 또 오히려 인간 뿐만 아니라 정의나, 도덕, 법조차도 자칫하면 질서를 파괴할 위험이 있다고 늘 경계만 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개인주의자들은 보통 선을 통해 질서를 추구하지(무법자나 무정부주의자가 아닌이상) 질서 자체가 필요없다고 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충분히 절충이 되는 것을 볼 수 있다.[13] 다만 무조건 개인주의가 강할 수록 상위권에 유리하다는 인식을 하면 안되는데, 개인주의가 강한 나라도 망하는 경우도 있다. 위에 언급했던 개인주의가 강한 수준을 가진 상위권들은 대다수가 과거에 튼실한 경제와 안정적인 사회를 제대로 차려서 유지해온 나라들이다. 당장 일본같은 나라를 봐도 정치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고, 거기에 부정부패가 사라지지 않았고 이기적인 집단이 생기는 경우도 생기고 있다. 90년대이전의 일본엔 집단주의 강했던 시절에도 자유와 개인간의 가치관에 대한 존중하는 보장을 했었다. 영국과 한국같은 나라들도 역시 집단주의가 강했는데도 개인/공동체간의 존중과 자유보장을 했었고 민주주의를 잃지 않도록 부정부패 막아내는 법과 국민의 힘에 인해 부정부패 발생하는 일이 적어들었던 일도 있었고 개인주의 확장된 상황에도 부정부패가 발생하는 일도 있었다. 미국경우 지리적 위치와 우연히 두차례의 세계대전에서 돈벌어 큰호황과 큰 위기를 벗어난 적 있었기에 거대한 나라로 성장했었고 민주주의와 선을 지키고자하는 마음을 지닌 사람들 등에 인해 기업간의 횡포와 부정부패, 마피아의 확장 등을 억제시킨 사례들이 있었기에 긍정적인 방향을 돌릴 수 있었다. 만약에 이러한 상황들이 없었다면 개인주의가 오히려 극단적인 성향으로 변모되면서 독이 되고 산업혁명때나 경제대공황시절에 순식간에 작살 수준으로 갔을 수도 있었다. 소련같은 공산주의 국가경우, 불안정한 공산체계와 극단적인 집단주의, 독재에 빠지기 쉬운 구조에 인해 얼마 안가 무너져버린게 주 원인이며, 자본주의에 대해 제대로 알아냈을 뿐더러 개인간과 공동체간의 존중과 민주주의랑 섞인 체계에다 올바른 방향에 갔었으면 짧게 막을 내리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14] 홉스테드의 문화 차원 이론으로 따지면 집단주의, 즉 Collectivism은 개인주의, Individualism과 대비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15] 즉 참여가 결여되어버린다면 결국 폭정에 의해서 시민들의 자유는 박살나버린다는 뜻이다. 물론 공화국 자체가 이미 폭정의 사슬로 묶여있을 때, 독재자의 호출에 오냐오냐 응하라는 의미는 아니다.[16] 또한 종교적으로도 북미와 북유럽은 탈종교화와 세속화가 극도로 이루어진 사회이며, 종교의 영향력이 약해지지 않거나 되려 강해지는 추세를 보이는 국가들은 집단주의 성향 역시 강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17] 유럽에 비해 상대적으로 이질적인 정치·사회·문화·종교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뭉쳐서 각각의 개인주의를 지칭하다보니 개인주의자들이라 할지라도 지키는 선을 분간하기가 어렵다.[18] 대표적으로 의료보험, 총기규제 같은 것. 총기규제는 특히나 서부시대의 원주민을 쫓아낼 때와 야수의 영향이 크긴 하다. 결국 이것도 개인주의와 연관되었던 문제지만.[19] 이러한 개인주의가 미국이 전세계 패권을 쥐어잡고 있는 점에 크게 영향을 준다. 옆 나라인 캐나다와 멕시코만 봐도 NAFTA 등으로 타국인 미국에 많이 의존하고 있는데, 미국인들의 개인주의로 인해 미국을 공격하지 않는 이상 미국은 절대로 움직이지 않을 것이란 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미국이 먼저 자국주의를 운운하며 먼저 공격해온다해도 삼권분립과 4년 대통령제 등의 장치로 미국 내에서 정리되기도 하고...[20] 금교영, “쌀농사는 집단주의, 밀농사는 개인주의 낳았다.”. 이코노믹 리뷰, 2014년 7월 4일 작성됨, www.econovill.com/news/articleView.html?idxno=199415.[21] 참고로 성과 이름 표기 순서에도 서양은 개인을 중시해서 이름을 앞에 쓰고 동양은 집단을 중시해서 성을 앞에 쓴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근거 없는 낭설일 뿐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서양 성씨는 자신의 소속을 나타나는 데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자신이 속한 집단이나 뿌리를 나타내는 성씨가 뒤로 간 것이다. 애초에 그렇게 개인을 중요시했다면 톰슨이나 잭슨 같은 성씨가 생겨서 계속 이어져 올 리가 없다.[22] '사회적 동물'로 흔히 알려져 있지만, 이는 로마인들의 미묘한 번역 때문이다. '정치적 동물'이 본래 의미에 부합한다.[23] 아이네아스가 언제부터 로마의 건국자로 여겨졌는지는 논란이 있다. 다만 아무리 늦게 잡아도 공화정 말기에는 아이네아스가 로물루스와 함께 시조로 대접 받았다.[24] 물론 일리아스에서도 헥토르는 결코 쩌리가 아니라 주인공급 위치이지만, 로마인들은 여기서 더 더욱 평가를 높였다.[25] 읽어보면서 느끼겠지만, '고대 그리스에 개인주의적 씨앗이 있었다.'라는 이야기를 넘어, '개인주의가 있었다.'라는 이야기로 확대 해석하는 것은, '권리'라는 개념을 순수하게 개인주의적 개념으로 오해하거나, 공동체주의와 집단주의를 혼동하는 데서 일어난다.[26] 다만 공화국 바깥에서는, 법의 간섭이 자유를 침해한다고 여겼다. 왜냐하면 그런 곳에서 법이란, 군주 개인의 의지가 지배하기 때문이다.[27] 먼나라 이웃나라 네덜란드편에서도 짤막하게 언급된 바 있지만, 성경 해석이나 신앙고백서 개정 논란으로 인해 1834년에는 '분리'(afscheiding)운동이 촉발되었는데 이 분리파 개혁교회들도 초기에는 불법적으로 집회를 열었다 하여 꽤나 핍박을 받았었다.[28] 그래서 기둥화라 불렸다. 개혁주의 개신교, 가톨릭, 우파 세속주의, 사회주의가 네덜란드란 나라를 지지하는 기둥에 비유되었기 때문이다.[29] 일례로 국내 코미디 프로그램인 "코미디빅리그"에서 진행하는 코너 중 하나인 "개인주의"의 경우가 그렇다. 실제로 이 코너는 재미가 있냐 없냐와는 상관없이 제목 하나 때문에 욕을 들었다.[30] 이기주의와 개인주의의 개념 혼동은 옹호와 반박에 상관없이 자주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고, 또는 그 개념을 제대로 파악하려는 시도조차 안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31] 그런데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를 절충한답시고 내놓는 것이 '진짜 공동체주의'와 다를 바 없어서 문제다.[32] 엄밀한 의미의 공동체주의는 베네치아와 피렌체 등 중세 이탈리아 도시국가들과, 아테네 등 고대 헬라스의 폴리스 시민들이 가졌던 시민적 덕성에 더 가깝다.[33] 집단주의 성향이 비교적 약한 젊은 세대에서 많은 호응을 얻었다.[34] 어디까지나 젊은이들의 집단성은 나이든 이들의 그것에 비해 '비교적'으로 약하다는 거지, 젊다고 집단성이 없거나 미미한 건 아니다. 연예인 등에 대한 사생팬ㆍ팬덤문화의 예를 들어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35] 특정 정치인에 대한 맹목적 지지로 인한 결집도 마찬가지.[36] 대표적인 개인주의의 예시로는 '선배', '후배' 호칭 대신 'XX님' 사용 등이 있다.[37] 개인주의 하에서는 개인의 개성이 발휘될 수 있으므로 연구 성과 또한 자연스레 늘어나는 것이다.[38] 집단주의적 학풍이 강하기로 유명했던 고려대학교도 예전에 비하면 개인주의화된 편이다. 물론 그 특유의 공동체주의적인 모습도 여전히 남아있긴 하지만.[39] 하나 신고식은 예전에 비해서는 많이 없어졌긴 하지만 군대와 같은 폐쇄적인 사회에서는 아직까지도 만연해있다. 다만 군대도 최근에는 많이 줄었다.[40] 변질된 유교적 전통과 명절증후군은 해결되었는지 아직까지 미지수나 청년층이 두 악습을 지긋지긋해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주의를 바라고 있다.[41] 물론 집단주의에 찬동하는 젊은 층 등 예외의 부류들도 상당 수 존재하나, 대다수의 젊은 층 사이에서는 부정적인 의견이 거의 압도적이다. 당장 인터넷 커뮤니티 중 아무데나 뒤져봐도 그들이 관련 이슈에 어떻게 반응하고 생각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42] 나중에 내 마음을 알아줄 것이다, 나중에 가서 깨달을 것이라고 흔히들 말하지만 실제로 나중에 회심한다는 근거도 희박하다. 애초에 전문가가 아닌 이상은 수박 겉 핥기 식 어설픈 평가가 될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고, 심하면 별로 좋지 않은 온갖 취급 당할 수도 있다. 오랜 세월을 함께 지낸 가족과 친구들끼리도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음을 명심하고 제발 타인을 섣불리 판단하지 말자.[43] 개인주의의 문제 중 가장 큰 문제는 다름 아닌 인간관계다. 서로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개인주의의 사상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집단주의에 비해 인간관계 수준이 낮다는 인식이 나오곤 한다. 하지만 실제로 개인주의 사회에서는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인간 사회 자체가 무리 생활이기 때문에, 대체로 혼자는 있을 수 있어도 사회 생활은 반드시 해야 하며 인간관계는 이득이 되거나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맺고 사는 사회로 이루어져 있다. 스스로를 개인주의자라 부르는 사람들이 '설득과 대화를 통해 바꿀 수 있는 문제를 가진 사람에 대해서도 신뢰와 존중이 없는 반면, 여러 문제가 있어도 권력 있는 사람이나 잘 나가는 사람에게 신뢰하거나 붙어먹는 경우'가 많다. 왜냐면 그것이 그들에겐 이득이기 때문이다.[44] 만약 집단주의와 섞지 않았거나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는 철저히 다른 사상이 맞더라도 개인주의사상에는 서로의 차이 등에 인해 오히려 주제를 더 알아야하는 또 다른 차별과 변절된 집단주의 등장 등이 생기고 개인 이기주의로 변질 되기 쉬운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기에, 무조건 개인주의를 옹호하기가 힘들다. 다시말해 개인주의 사상이 이기주의와 차별 등에 오히려 부추게 만드는 점이 있다. 그래서 개인주의에 대한 비판이 존재하고 줄어들지 않는 이유이기도 한다. 당장 현재의 미국이나 한국, 일본, 몇몇 유럽 사회정서를 봐도 대강 알 수 있다.[45] 움츠린 아틀라스 소설의 인물 존 갈트가 한 말이다.[46] 급진 개인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로 그의 사상이 담긴 구절이다.[47] 더욱 복잡해지고 뭉치지 못한다는 얘기는 극단적인 상황일때 얘기다.[48] 예를 들면 한때 이슈가 됐었던 거리 흡연의 경우, 기본권을 가진 '흡연자'와 '혐연자'가 서로 맞붙는 것이 아니라, 기본권 주체가 국가권력을 상대로 각자의 기본권을 주장한다는 형식으로 이해하면 권리의 충돌/대립이 성립하지 못한다는 위 표현을 이해하기 편할 것이다.[49] 쉽게 얘기해서, 자기 욕망과 남의 욕망의 충돌이라는 측면으로 바라보면 흔히들 얘기하는 개인주의=이기주의 관점이 되고, 자유를 자신의 내재적인 가치라고 인정하면 권리로서의 개인주의자라고 보면 된다. 일반적인 개인주의자들은 개인주의는 권리로서 인식하지, 관점으로 보지 않는다.[50] 물론 개인주의 '비슷한' 성향이 되었을 뿐 절대로 개인주의는 아니다. 다시 말해두지만 젊은층 역시 사생팬이라던지 게임같은 것에서(특히 인터넷 커뮤니티) 한가지 좋아하는 것들이 있으면 그에 대해 반론만 제기해도 매장시켜버리는 등 개인주의라 하기엔 한참 모자라다. 단지 노년ㆍ중, 장년층에 비해서 그렇다는 얘기고 개인주의는 절대 아니다.[51] 생각해보라. 회사같은 곳에 가면 겉으로는 자기 일만 하는 것 같이 보이고 남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특히 젊은층일 수록 도드라진다. 허나 어느 한사람이 자기들이 생각하는 '통념'적인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을 보인다(이를테면, 비이성ㆍ비합리적인 모습을 지적하며 합리적으로 뭔가를 해달라 하든가)면, 그사람을 소위 '싸가지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고 그사람의 진면모를 바라볼 생각은 못한 채 너도나도 편견을 지니고 싫어한다. 그것은 젊은 층이라고 해도 다를 바가 없다. 이것이 과연 '개인주의'라고 볼 수있는가? 젊은층은 사상적인 면에서 개인주의라고 보기 어렵다. 집단주의적인 모습이 '중ㆍ장년 및 노년층에 비해' 좀 덜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