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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4 13:34:18

이성(철학)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고,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이다
Was vernünftig ist, das ist wirklich; und was wirklich ist, das ist vernünftig.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양식(bon sens)은 이 세상에서 가장 공평하게 분배되어 있는 것이다[1]
르네 데카르트 - 방법서설 Discours de la méhode

1. 개요2. 철학에서의 理性
2.1. 연역적(기계적, 절차적) 이성과 직관적 이성
2.1.1. 순수 이성과 실천 이성
2.2. 객관적(절대적) 이성과 주관적 이성
3. 신경과학적 연구
3.1. 이성과 감성3.2. 이성적 사고의 어려움
4. 극단주의자들과 이성적 사고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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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성()

사물의 이치와 원리를 알아내는 힘, 논리적·개념적으로 생각하는 힘,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는 능력. 다른 말로는 '사물을 가리는 능력'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2] 또한 인간의 냉정함과도 관련이 있는데 이성을 잃어버린 경우 흔히 냉정함을 잃은 상태라고 말하며 정신마음이 나가버린 상태를 뜻한다. 창작물에서 나오는 "이성을 잃었다"라는 표현에서 이성이 가리키는 것도 이것이다. 르네 데카르트는 이러한 이성을 '자연(lumen naturale)'이라고 표현했다.

영어로는 reason이라고 한다. reason은 이유, 원인이라는 의미도 있는데, 이 역시 이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의미이다. 이성이 있어야 사람은 상황의 인과관계나 원인과 결과를 따질 수 있기 때문이다.

2. 철학에서의 理性

위의 문단에서 르네 데카르트가 이성을 가리켜 '자연의 빛'이라 했음이 인용되었는데, 이성은 굳이 데카르트 뿐만이 아니라 다른 수많은 철학자들에게 매우 핵심적인 문제였다. 이성을 어떻게 보는가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고 핵심적인 문제였고 지금도 그러한데, 사실 이성이라는 단어 안에는 수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고 각기 다르게 쓰인다.

사실 이성이 이렇게나 많은 의미를 갖는 것은, 이성이라는 단어 자체가 온전히 일대일로 대응시켜 번역할 수 없는 단어들을 번역할 때 쓰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본에 처음으로 서구적 의미의 학계가 생겨났을 때 그것들을 모조리 이성으로 번역해버렸고, 현대에 와서는 그 오역에 가까운 의역들을 다른 단어들로 바꾸어 번역하고 있다.

이성이라는 단어 안에 들어있는 수많은 의미들은 대중적으로 보았을 때는 감성이나 감정과 반대되는 개념이지만, 그렇게만 정의해서는 이성이 당최 뭔 개념인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이 문단에서는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인 이성이라는 단어에 들어 있는 몇 가지 뜻을 몇 가지 비교를 통해 설명한다.

2.1. 연역적(기계적, 절차적) 이성과 직관적 이성

위에서도 보았듯 르네 데카르트는 이성이 '자연의 빛'이라고 했는데, 다시 말해 이는 근대인이 이성을 자연이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부여한 본성, 능력, 방법 등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그 개념이 아직 체계화가 덜 되어 있었는데, 당장 데카르트가 <방법서설>, <정신 지도를 위한 규칙들>, <제일철학에 관한 성찰>등의 저서에서 이끌어가는 논리만 봐도 직관적 이성과 연역적 이성을 혼용한다. 현대에는 이 개념들이 분리되었다.

우선 연역적 이성이란 논리적인 절차(대표적인 예로 삼단논법)를 이용하는 능력 내지는 방법이다. 이러한 의미로서의 이성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좋은 예는, 당신이 쇼핑을 할 때 당신의 지갑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사고싶은 물건을 막 사제껴 빈털터리가 되었을 때 '비이성적 소비였다'고 여기고, 지갑 사정을 고려해 살 수 있는 만큼의 상품의 양과 질을 논리적으로 판단해 소비할 때 '이성적인 소비'였다고 여기는 것을 들면 알 수 있다.

직관적 이성은 공리를 파악하는 능력으로 보면 이해하기 편한데, 대표적인 예로는 데카르트의 그 유명한 '코기토 논증'. 데카르트는 모든 지식이 하나의 토대 위에서 연역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는데, 그가 제시한 하나의 토대가 바로 코기토, 즉 '생각하는 나는 내가 생각하는 동안만 존재한다'.[3] 이 문장이 어떤 연역을 통해 나온다면 이미 모든 지식의 토대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연역하기 위해서는 선행하는 개념이 존재해야 하기 때문. 그래서 근거를 따질 필요 없이 참인 이 코기토 논증을 직관적 이성의 결과물로 보는 학자들이 있다. 물론 여기에 반대하면서 데카르트의 코기토 논증이 틀린 주장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2.1.1. 순수 이성과 실천 이성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을 정확히 구분한 것은 임마누엘 칸트인데, 사실 완전히 구분하지는 않더라도 둘을 구분하는 것에 근접하는 사고를 이미 과거의 사람들은 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들 수 있는데, 그는 잘 알고 있는 것과 잘 행동하는 것은 다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잘 하다', '탁월하다' 정도로 번역되는 arete는 예전에는 덕(德)이라고 번역했는데, 이것이 오역이라는 주장이 학자들 사이에 제기되었기에 이후 거의 대부분의 번역자들은 arete를 '탁월성' 내지는 '잘하다'로 번역하고 있다.

2.2. 객관적(절대적) 이성과 주관적 이성

객관적 이성에 대한 연구는 철학사 내내 가장 중요했었고 지금도 여전히 중요하다.

객관적 이성은 기본적으로(어디까지나 기본적으로) 고대 그리스인들이 사용하던 단어인 '로고스(logos)'를 가리키는데, 로고스란 세상을 다스리는 절대적 원리를 가리킨다. 즉 객관적 이성은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진리'라는 단어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 로고스에 접근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을 철학자로 규명한 대표적인 인물이 플라톤. 플라톤의 유명한 비유인 '동굴의 비유'는 이 로고스를 설명하기 위한 비유라고 봐도 무방하다.

주관적 이성은 단일한 원리가 아닌, 그 원리에 접근하는 정신(그리스어로 Nous, 독일어로 Geist)을 가리키는데, 예전에는 오성(悟性)이라는 단어로 번역했다가 지금은 그마저도 오역이라는 주장이 많아 지성(知性)으로 번역된다. 번역이 어찌됐건 이 정신이라는 개념을 열심히 판 사람이 독일의 철학자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물론 헤겔만 주관적 이성을 열심히 판 건 아니고, 데카르트도 연구하고 칸트도 연구하고 여러 이름있는 철학자들은 거의 다 한두번쯤은 주관적 이성이라는 개념을 건드려 봤다.

3. 신경과학적 연구

3.1. 이성과 감성

통상적으로 전두엽에서 감정의 통제와 논리적 사고를 관장하는 부위라고 연구되었으며, 이것이 손상되면 이성적인 사고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은 이미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시상하부는 기초적인 신체 대사의 유지와 감정을 담당한다고 연구되었으며, 이것이 손상되어도 역시 이성적인 사고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러한 신경과학 분야에서의 인간에 대한 연구결과 때문에, 인공지능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인간과 비슷한 수준의 강인공지능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강인공지능에게 인간과 같은 감정이나 의식을 부여되어야 한다는 이론이 나오기도 하였다. 근본적으로 인공지능의 개발은 인간의 뇌의 기능을 모사하고자 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고 특히 강인공지능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기 때문이었다.

대개 상반된 영역을 대립구도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 본질은 대립이 아니라 다름에 있다. 실제로 감정을 상실한 인간에 대한 연구에서는 감정이 결여된 인간이 능숙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당장 IQ가 곤두박질치는 것도 아니고, 판별능력을 상실하지도 않지만, 뇌의 감정적 능력이 극도로 약화된 사람들은 사회활동은 물론 이성적인 결정조차 내리지 못하게 되었다. 즉 해당 연구에 따르면, 합리적 사고를 위해서는 신체의 감정적 반응이 필요하다.[4]

따지고보면 옳다는 느낌도 감정의 일종이고, 틀렸다는 느낌도 감정의 일종이다. 뇌는 받아들이는 정보들 각각이 옳을 가능성과 틀릴 가능성을 아주 빠르게 계산해서 그 느낌을 판단에 활용한다. '이 정보가 옳을 가능성'과 '이 정보가 틀릴 가능성'이 머릿속 다른 감정들과 경쟁해서 그 중 가장 좋다고 판단된 것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메카니즘으로 사고 및 행동이 이뤄지기 때문에, 사람은 옳다 그르다 하는 그 느낌 없이는 애초에 논리적 사고 및 행동 자체가 불가능하다. 때문에 뇌의 입장에서는 이성적 사고라는 것은 여러 감정적 판단의 근거 중 하나일 뿐이라는 의견도 있다.

3.2. 이성적 사고의 어려움

이성적 사고는 정확한 논리적 법칙을 따라야 하기 때문에 매우 힘든 일이다. 그래서 논리적 사고는 창의성 발휘나 자기통제처럼 상당한 에너지를 소모한다.[5][6] 이 또한 이성적 사고를 관장하는 기관인 전두엽에 문제가 있을 경우, 자연히 합리적 판단에 어려움이 발생하게 된다.[7]
뇌과학적으로도, 이성과 사고를 관장하는 전두엽(신피질)이 발달할수록 이성적인 사고를 잘하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본능ㆍ감정을 담당하는 번연체가 발달해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을 단련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연습이 필요하지만, 비이성적이기는 쉽다. 실제로도 '열받는다' 라는 표현에 있듯 화가나면 번연체가 뜨거워진다.
이성적인 사고가 매우 힘들기는 하지만, 최대한 냉정하고 합리적으로 사고하려고 노력하면 감정적인 부분의 작용은 그만큼 줄어든다.

4. 극단주의자들과 이성적 사고

극단주의자들이라고 하면 대개 탈레반과 같이 대놓고 분노, 혐오 등과 같은 맹목적인 감정에만 휘둘리며 이성을 거부하는 모습만을 떠올리기 쉽지만,[8] 대다수의 극단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철저하게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있다고 믿는다. 극단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논리나 이성에 대해 전혀 의심을 하지 않아 자신들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거의 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극단적인 사고나 행동에 더욱 매몰되는 것이며, 자신들이 지지하는 사상•이론 등과 조금이라도 맞지 않는 사실•상식 등은 무작정 비이성적인 선동이나 감성팔이 등으로 몰아가는 경우가 잦다.

특히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전세계적으로 보급된 이후 SNS, 유튜브, 그리고 각종 커뮤니티 사이트 등을 통해 가짜 뉴스, 정치•사회적 선동, 유사과학, 역사왜곡, 음모론 등에 빠져드는 사람들의 수 역시 급속도로 증가하였는데[9], 이러한 사이비 정보들에 현혹된 사람들은 자신들이 다른 대중들은 멍청해서 알지 못하거나 혹은 나약해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진짜 현실을 알고 있다고 굳게 믿으며, 그것을 논리•이성•합리주의불편한 진실 등으로 포장하고 이에 반대 의견을 내거나 무관심을 표하는 다른 개인•집단을 달콤한 거짓으로부터 빠져나오지 않으려 하는 비이성적인 무리로 간주하고 공격해대기 때문에 문제가 되고 있다.

5. 관련 문서


[1] 데카르트의 저작에서 양식, 자연의 빛, 좋은 정신, 이성은 대체적으로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2] 일부 자유지상주의를 교조적으로 숭상하는 사람들은 이성을 '이해득실을 따지는 능력'으로만 한정짓고 이 과정에서 옳고 그름의 문제는 교묘하게 배제하는 태도를 취하는데, 이성은 기본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이다.[3] 데카르트는 '나'라는 개념을 생각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즉 앞의 문장의 더 정확한 뜻은 말 그대로 코기토(생각한다) 하나 뿐이다.[4] Descartes' Error: Emotion, Reason, and the Human Brain[5] Gailliot, M. T., Baumeister, R. F., DeWall, C. N., Maner, J. K., Plant, E. A., Tice, D. M., ... & Schmeichel, B. J. (2007). Self-control relies on glucose as a limited energy source: willpower is more than a metaphor.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92(2), 325[6] 사실 이성을 써서 피곤해지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운전이다. 순간의 돌발상황 등을 예측하고 행동해야하기 때문에 이 행동을 하고나면 피로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7] 정확하게는 하단에도 서술되어있지만, 뇌의 한부분인 번연체의 작동으로 신피질(전두엽)의 작동이 정지되기 때문이다.[8] #[9] 이는 남녀노소뿐만 아니라 빈부격차학력도 가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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