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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참된 이치'라는 뜻을 가진 단어.2. 신학에서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진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의 죽음을 포함한 모든 고통의 이유를 하느님과의 단절에서 찾는다. 이 단절의 원인은 물론 인간에게 있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그래서 죄를 짓고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다. 이것은 인간중에 가장 뛰어난 선한 사람이라도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근본적인 한계이다. 때문에 아무리 선한 사람이더라도 정도의 차이일 뿐 결국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죄인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전통적인 방법은 하느님께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유대인의 종교 전통에서 이것은 주로 가축을 베어서 피를 빼고 그 내장 또는 그 전부를 태우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이 방법은 일시적인 미봉책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인간이 죄를 짓는다는 그 성질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시 죄가 쌓이면 다시 제사를 지내서 하느님께 용서를 구해야하는 처지이다. 밑빠진 독에 물붓기에 불과한 것이다.
예수가 구세주, 그리스도가 되는 것도 이 맥락에서이다. 예수는 무고하게 십자가형을 당해 죽었는데, 이는 모두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속죄 제물로서 짐승이 아닌 자신의 외아들인 예수를, 제물로 바쳐지는 정결한 짐승인 어린 양으로서 택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의 처형식은 죄인의 처벌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이자 당신의 외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숭고한 희생으로, 모든 인간의 죄를 없애기 위하여 완전하게 시행된 제사라는 것이다.
그 결과 인간이 구원을 위해 해야 할 일은 단지 위와 같은 제사의 존재와 의미를 알고 믿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인간은 그것으로 하느님과 직접 관계를 회복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서 그 사람은 모든 죄에서 벗어나고,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다만 인간에게 본래 빛의 조각이 있고, 이를 바탕으로 '진리'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칭의라는 관념이 그리스 철학에 오염되어서 나온 발상이라는 비판도 꾸준히 있어 왔다. 플라톤의 '이성'과 '진리'를 그대로 차용한 것에 불과하다는 관점이다. 비슷한 이유로 '영혼'도 비판하는 의견도 있는데 주로 유대교에는 영혼이라는 개념이 발견이 안 되는 반면 고대 그리스에는 거의 같은 개념이 그리스도교보다 수백년 전부터 존재했다는 점에 근거한다. 또한 같은 이유로 당대 기독교는 진보된 고대 그리스의 철학을 흡수하며 성장했지만, 정작 그리스 철학과 기독교는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측면이 많았다. 예를 들어 플라톤의 신학은 데미우르고스라는 최고 선을 본뜬 신을 이야기하는데, 기독교 신학 입장에서는 신은 최고선, 절대선과 동일시 되었기 때문에 누군가를 본뜬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3. 서양철학에서
현대 한국인이 사용하는 진리(眞理)라는 말은 서양철학의 용어인 알레테이아(Aletheia)를 번역한 것이다. 동양철학에서도 거의 같은 단어가 있는데 도(道)가 그것이다. 18세기 중국인이나 일본인들이 서양 서적을 번역할 때도 진리(眞理)라고 번역하지 않고 도(道)라고 번역했었다.서양철학에서 전통적으로 진리란 '실재와의 일치'를 말한다. 주관성의 일치라고도 한다. 예를 들어서 눈앞에 사과가 있다고 했을 때, 내 머릿속의 사과 = 그 눈앞의 사과 인 상태를 의미한다.
서양철학에서는 소위 절대주의가 본래 기본관점이다. 서양철학의 전통에서 진리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은 내가 관찰만 한다고 해서 그 사과를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면 사과가 한 상자가 있다고 했을 때, 그 상자안의 사과들은 정확히 똑같은 사과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것은 상처가 있고, 어느것은 찌그러졌고, 어느것은 누르스름하고 등등. '특수성' 또는 개성이 있는 것이다.
플라톤이 보기에 현실에서 사과는 이렇듯 항상 불완전하다. 오히려 완벽한 것은 내 머릿속의 사과이다. 완전무결한 사과를 나는 머릿속에 그릴 수 있다. 완전한 모양, 색깔, 향기, 맛을 갖춘 이상적인 사과를 말이다.하지만 이 완벽한 사과를 머릿속에 떠올린 나라는 인간은 불완전하다. 모든 인간은 불완전하다. 불완전한 것이 완전한 것을 만드는 것이 가능할리가 없다. 그러므로 내 머릿속의 사과는 내가 생각해낸 상상물이 아니라, 발견된 것이다. 어떻게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한 것을 발견했을까?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인간이 본래 알고 있던 것을 망각했다가 깨닫는 것이라고 여겼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인간에게 '이성'이라는 '빛' 또는 특별한 능력이 있기 때문이란 것이다. 이때 이성이란 구분의 기준을 찾아내는 능력이다. 기준이 있으면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 구분을 할 수있다. 이성은 인간이 동물과 차별되게 갖춘 능력이다. 따라서 이성이 덜 훈련된 인간은 플라톤이 보기에는 덜 인간적인, 자연적이고 짐승적인 존재다.
'동굴의 비유'라는 것도 위와 같은 맥락에서 등장한다. 플라톤이 보기에 우리가 오감으로 느끼는 감각되는 개별적인 것들은 개성, 특수성에 오염되어있다. 반면 진리란 '보편성', '일반성'을 갖춘 것이다. 둘 중에 어느것을 추구해야 하는지는 플라톤이 보기엔 자명하다. 특수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것,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것,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추구해야한다. 그리고 진리 또한 '일반성', '보편성', '영원함'을 갖춘 것이어야 한다. 우리의 오감과 그를 통해 받아들이는 정보는 이러한 성질을 전혀 갖추고 있지 않다. 왜냐면 감각되는 것은 진리의 '그림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빛이 번져서 그림자가 희미하듯, 개성이라는 것은 불완전하게 원본이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현명한 자라면 감각된 정보에 현혹되지 않고, 개성에 현혹되지 않고, 일시적인 것에 현혹되지 않고 그 너머의 것을 알아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을 플라톤은 동굴속에 묶여서 빛의 그림자를 멀뚱히 바라보는 사람들의 처지에 비유한다. 현명한 사람이란 그림자(=감각)가 가짜란 것을 알고 동굴 밖의 태양(=진리)을 향해서 뛰쳐나가는 사람이다. 이데아 문서 참조.
서양의 과학자, 지식인들은 모두 플라톤의 저러한 생각을 기본적으로 배경에 깔고 학문을 했다. 때문에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현대 한국인의 사유는 그러한 서양인의 사유를 이식한 것이 대부분이다.
물론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의견에 의문을 품고 여기서 벗어나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상대주의, 불가지론도 서양철학사에서는 2천년동안 잊혀졌다가 18세기부터 나타난 생각이다. 하지만 그것은 철학자들만의 이야기이고, 철학이란 학문만 벗어나면 아직도 서양인 태반과 현대 한국인들은 18세기 이전의 서양철학의 시각을 가지고 세상을 이해한다. 그래서 우리가 여전히 플라톤의 진리관을 염두에 두고 책들을 읽어야 하는 것이다.
서양철학은 기본적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학문이며, 자연과학과 종교도 진리와 큰 연관이 있다. 좁은 의미의 진리를 보는 관점으로 크게 세 관점이 나뉜다:
3.1. 절대성의 문제
서양철학 관점에서 볼 때는 진리라는 것 자체가 좀 논란이 있는 관념이다. 서양에서 진리는 전통적으로 '절대적', 그러니까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서 일반적으로 존재하는 원리이다. 그런데 흄과 칸트의 18세기 서양철학이 지적하는 것은 인간 인식의 지평선 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직접 문제가 되는 것은 과학은 인간의 '감각적 경험'에 기반한다는 점이다. 다시말해서 인간의 오감, 더 나아가 실험 기기를 통해서 감각하지는 것으로 한계지어진다. 인식의 지평선이 존재하는 것이다. 게다가 시간적으로도 관찰자의 생이 얼마나 지속되느냐에 의해서 한계가 지어진다. 시간과 공간 모두에서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하는 것이다. 때문에 완전한 진리에 도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이미 확정 지어져 있다. 그런데도 절대적 진리를 추구한다는 것은 인간의 망상스러운 욕심일 수 있다.19세기 서양철학이 지적한 문제는, 굳이 우리가 왜 '절대적'인 것을 추구하느냐는 것이다. 니체, 하이데거, 카뮈의 의견은 인간이 자신의 주변을 이해를 하지 못하면 생리적으로 불안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낯선 환경에 놓인 짐승이 불안감에 울부짓는 것과 다를게 없는 것이다. 이 불안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주변 세계의 이해를 구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동물적 본능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이해를 했을 때에는 강렬한 생리적 기쁨을 느낀다고 보았다. 이 기쁨은 자신이 이 세계에 더 잘 적응할 수 있다는 확신, 자신의 생존 가능성이 올라갔다는 인식에서 느끼는 기쁨이다. 그리고 그 기쁨에 빠져서 계속 끊임없게 느끼고 싶은 욕구가 곧 절대적인 지식을 추구하게 한다는 것이다. 학자의 기쁨이 늑대가 사냥터를 바라보며 느끼는 기쁨과 정도의 차이일 뿐 크게 다를게 없다는 것이다.
20세기 서양철학이 위와 이어서 지적한 문제는, 우리가 인간적인 편견에 오염된 전제들을 기반으로 연구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서양철학이 여기에 확신을 하는 이유는 이미 자신들이 1930년대에 무결한 논리적 기반을 찾으려는 노력을 독일 영국의 분석철학, 프랑스 독일의 현상학에서 시도했다가 끊임없이 나오는 숨겨진 전제에서 비롯된 반례들로 인해서 실패를 맛보았기 때문이다. 서양철학이 이 과정에서 거의 확신을 얻은 것은, 편견을 우리 스스로 깨닫는 것이 불가능 하다는 것이다. 오로지 대척하는 반대 이항을 '마주칠 때'만 비로서 여태까지 당연하다 여겼던 확고한 전제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의견에 따르면 현재 우리가 가진 지식의 태반은 우리가 처음으로 외계 지적존재와 교류하는 순간 박살날 운명에 있다.
철학사적으로 봐도 '절대적 진리'는 종교적 동기에 다분히 오염된 관념이다. 절대적 진리는 플라톤 계열의 주류 철학자들에 의해서 처음 추구되었는데, 이들은 고대 그리스 기성 종교와 경쟁하고 반박하는 구도속에서 학문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경쟁자들과 반대되는 선택을 여럿해야만 했다. 가령 저들이 상대주의이니까 우리는 절대주의이어야 하고, 저들이 우연을 중시하면 우리는 불변을 중시해야하고, 저들이 감각을 중시하면 우리는 초월을 중시하고 하는 식이다. 여기에 이집트 학문과 사제들의 의견을 동원한 것은 덤이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 때문에 절대적 진리를 특정 문화권의 특수한 미신으로 취급하는 학자도 적지않다. 불변하는 진리라는 개념이 다른 문화권에서는 비교적 생소한 면도 있다. 가령 동양인의 진리에 해당하는 '도道'는 시시각각 변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4. 언어별 명칭
【언어별 명칭】 | |
<colbgcolor=#cccccc,#1f2023>한국어 | 진리, 참 |
한자 | 眞理 |
일본어 | [ruby(真理, ruby=しんり)] |
중국어 | 真理[zhēnlǐ] |
라틴어 | veritas |
영어 | truth |
프랑스어 | vérité |
독일어 | Wahrheit |
러시아어 | правда |
그리스어 | αλήθεια[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