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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칼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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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장 칼뱅
Jean Calvin
파일:John_Calvin_-_Young.jpg
본명 주앙 코뱅(Jehan Cauvin)[1]
출생 1509년 7월 10일
프랑스 왕국 피카르디 누아용
(現 프랑스 오드프랑스 우아즈 주 누아용)[2]
사망 1564년 5월 27일 (향년 54세)
스위스 제네바
국적
[[프랑스 왕국|]][[틀:국기|]][[틀:국기|]]
직업 신학자, 목사, 종교개혁가, 작가
학력 파리 대학교 신학 오를레앙 대학 법학대학
종교 개신교(칼뱅주의)
서명 파일:John_Calvin_signature.png

1. 개요2. 생애3. 인물 관계4. 칼뱅의 사상
4.1. 신학적 기여4.2. 아르미니우스주의와의 대립4.3. 비판
5. 후대에 미친 영향6. 일화7. 칼뱅에 얽힌 오해
7.1. 창조설의 옹호자?7.2. 천동설의 옹호자?7.3. 마녀사냥의 옹호자?
8. 기타
8.1. 예수회와의 관계
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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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Cor meum tibi offero, Domine, prompte et sincere."
오 주여, (당신께서 원하신다면) 제 심장이라도 지금 즉시, 그리고 진실한 마음으로 드리겠나이다.[3]
프랑스 출신의 개신교 사상가, 피난민. 개혁교회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한국 장로회 내에서는 영어식으로 존 칼빈(캘빈) 또는 한국어식으로 요한 칼빈이라고도 불린다.[4] 마르틴 루터와 더불어 초기 종교개혁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며 금욕에는 관대했던 마르틴 루터보다 더 금욕적이었다.

2. 생애

1509년 7월 10일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 지방 누아용(現 오드프랑스 우아즈 주 누아용)에서 해당 주교구 공무원이었던 제라르 코뱅(Gérard Cauvin)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고전 프랑스어식으로 주앙 코뱅(Jehan Cauvin)이며 교회 라틴어식으로는 요안네스 칼비누스(Ioannes Calvinus)로 표기한다. 칼뱅의 아버지 제라르는 당시 인텔리였는데 누아용 주교의 비서였고 군 재무관, 참사회 대리인, 가톨릭 교회법원의 법무관 등을 지낸 지식인이었기 때문에 칼뱅의 교육에 관심을 쏟았다. 게다가 주교의 친척인 드 앙제 집안의 도련님과 같은 교육을 받으며 가톨릭 교회에서 유망주로 뽑혀 성직록까지 받았다.

집안 배경 덕에 칼뱅은 처음에 신학교육을 받았지만 아버지의 권유로 오를레앙 대학의 법학대학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이 무렵 아버지가 누아용 주교에게 해고당한 영향이 있다고 추정한다. 칼뱅은 여러 과정을 거치며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배우는 등 인문주의 영향도 깊게 받는데 최초의 작품은 로마시대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의 저작에 대한 주석과 해석을 다룬 논문을 발표하여 학계에도 이름이 어느 정도 알려졌다고 한다. 그러나 법학 공부 중 당시 독일에서 성경중심의 복음주의를 주장하는 루터파의 이론들이 프랑스에도 들어왔고 칼뱅도 이를 접했다.

3. 인물 관계

파일:705px-GuillaumeFarel.jpg
명예도 부귀도 나를 교황으로부터 자유케 하지 못하고 도리어 나를 묶어 두었다. 세상의 어떤 통찰력과 학식들도 내 마음 속에 있는 교황주의의 미신을 제거하지 못했다. 오직 성경만이 나로 하여금 교황주의의 미신으로부터 빠져 나오게 만들었다.[5]

칼뱅의 동역자 중에서도 특히 친밀한 사람이었고 제네바 종교개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본래 가톨릭 집안에서 신실한 장남으로 자랐지만 공부를 하던 도중 스승의 추천으로 신약 성경을 읽다가 가톨릭의 교리적 문제를 발견하고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외에는 중보자가 없다며 부패한 교회에 대한 개혁의 목소리를 외쳤다. 곧 교황청의 탄압으로 설교를 금지당하고 추방당해 쫒기는 신세가 되어 이리저리 떠돌며 설교를 하다가 1532년, 제네바에 도착했다.

파렐은 베른의 강력한 보호 아래에 설교를 이어나갔으며 제네바 의회에서는 개신교적 원칙에 따라 미사가 폐지하고 성상과 성물들을 성당에서 제거했다. 1536년, 칼뱅이 제네바에 도착했음을 알고 파렐은 급히 칼뱅이 머물던 여관으로 달려갔다. 파렐은 칼뱅에게 종교개혁에 동참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칼뱅은 당시만 해도 학자로서 조용히 은거하며 지내고 싶었고 그래서 거절했다. 그러자 파렐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노니 하나님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한, 나는 하나님께서 그대의 휴식과 공부를 저주하시길 바라오!라고 불같이 소리쳤다. 공포에 떨며 식겁하던 칼뱅은 자신의 뜻을 거두고 종교개혁에 동참하게 되었다.

훗날 칼뱅은 이 때의 일을 두고
이때 나는 파렐의 무서운 엄명에 두려워 견디지 못해 몸이 떨렸다. 그의 음성이 마치 높은 보좌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과도 같았다.
라고 회고했다. 이후 파렐이 칼뱅보다 스무 살이나 많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파렐은 자기보다 어린 칼뱅을 배려하며 자신의 저작 서문에서 오히려 칼뱅의 기독교 강요를 추천했으며 칼뱅 역시 파렐을 '나의 사랑하는 동역자'라고 존경을 표했다.

둘의 우정이 깨진 것은 1558년, 파렐이 69세가 되던 해에 18세 가난한 처녀와 결혼하는 일 때문이었다. 칼뱅을 포함한 많은 종교개혁자들은 이 결혼을 반대했고 칼뱅은 결혼식에 참석도 안 했다. 그러나 파렐 역시 자신의 뜻은 절대 굽히지 않는 성격으로[6] 어린 처녀와 결혼을 해 자녀를 낳았다. 1565년, 메츠 지역 신교도들의 요청에 따라 메츠를 방문해 마지막 설교를 했고 그해 9월 눈을 감았다.
나는 그가 나를 악마라고 저주하더라도 영원한 존경을 보낼 것이다.
-칼뱅이 루터를 비판하는 사람에게 쓴 편지 내용 중
칼뱅의 신학에 매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종교개혁자이며 자세한 내용은 루터 항목 6번 참조. 루터 역시 칼뱅을 높이 평가했다.
파일:Bèze,_Théodore_de_(1519-1605)_-_1596_-_inc_Boissard,_J.J_Bibliotheca_chalcographica_-1652-69.png

칼뱅의 중요한 동료이자 그의 종교개혁 노선을 계속 이어나갔던 후임자이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베즈는 어린 시절 스승인 메히오르 볼마르 밑에서 가르침을 받았고 후에 베즈 자신의 두 번째 생일로 기억할 정도로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7] 아버지의 추천으로 시작한 법학 공부에도 별 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오히려 고전 읽기를 즐겼다. 파리에서 베즈는 문학동아리에서 명성을 쌓아 당대 최고의 라틴어 시인으로 손꼽힐 정도였다.

2년 동안 행복한 삶을 살다가 페스트로 추정되는 중병을 앓았다. 육체적인 고통 속에서 베즈는 종교적인 성향으로 기울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을 알고 확신하며 당시 종교개혁 운동이 한참이던 제네바로 향했다.

1548년 칼뱅은 제네바에 도착한 베즈를 환영했고[8] 곧 칼뱅의 주례로 베즈의 약혼자와 공식적으로 결혼했다. 하지만 가정을 꾸리게 된 베즈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았는데, 베른이 지배하는 로잔 아카데미가 유일한 자신의 일자리였다.[9] 도움을 요청하러 다시 자신의 옛스승 볼마르를 찾아가던 도중 피에르 비레를 만났다. 비레는 베즈의 탁월한 재능을 알아보고 로잔 아카데미의 헬라어 교수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이후 베즈는 종교개혁자들을 강력히 변호하는 활동에 앞장섰다. 특별히 발도파에 관심을 가지고 보호하기 위해 기욤 파렐과 스위스와 프랑스 지역을 돌아다니며 동행했다. 위그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독일 제후들을 중재해 파리로 특사로 파견하도록 성사시켰고 프랑스를 방문해 위그노들을 위해 설교한 뒤 박해 대응책과 저항을 기획했다.

베즈는 칼뱅과 자신의 역할을 번갈아가며 총회와 회의에 참석해 칼뱅을 포함한 종교개혁자들을 옹호하는 활동을 계속했으며 칼뱅이 죽은 뒤 베즈는 그의 후임자가 되어 제네바가 칼뱅의 종교개혁 노선을 계속 이어나가도록 했다. 칼뱅이 세운 제네바 대학교를 이끌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사건 때 피난민들을 제네바로 받아들이는데 힘을 썼으며 만년에 프랑수아 드 살(François de Sales) 신부가 베즈를 방문해 세 차례 개종을 위한 설득을 했지만 베즈는 단호히 거절했다.

1602년, 가톨릭에 속한 사보이아 공국이 제네바를 공격했지만 제네바는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했고 베즈도 무사했다. 1605년, 베즈는 자기 집에서 숨을 거두었고 사보이아 공국은 베즈의 시신을 강탈하겠다고 협박한 상황이었다. 이에 대비한 당국의 지시에 따라 베즈의 시신은 생피에르 교회당에 묻혔다.
여성의 설교를 인정했던 칼뱅이었으나, 그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설교를 행하던 여성 신학자였던 마리 당티에르와 갈등했다고 한다.

4. 칼뱅의 사상

여러 엄격함에도 불구하고 칼뱅파는 근대 여명기 프랑스, 영국, 북유럽의 대중들과 상인 계층에게 환영받았는데, 일반적으로는 이런 호응이 부자가 천국에 가기 힘들다고 말하며 무소유의 미덕을 주장하던 종래의 가톨릭과 달리, 열심히 일하고 검소하게 생활하여 부자가 된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청부(淸富)의 교리를 내세웠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는 막스 베버의 저서《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비롯된 학설이며 이것이 상인 계층에 환영받은 이유는 되겠지만 더욱 많은 대중에게 전파된 원인까지 나간다면 사실 꼭 이런 이유에서만은 아니었다.

당시 종교개혁이 이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당대의 가톨릭이 여러모로 부패하고 변질된 데 반해,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진리의 근원을 성경에서 찾는다는 기독교 근본주의 복음교리로 돌아가 대중의 종교적 갈망을 성취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기 때문이다. 16세기 중반 유럽의 신앙 세계는 흑사병, 백년전쟁, 이탈리아 전쟁, 독일 농민전쟁, 오스만 제국의 팽창과 이슬람의 위협 등 수많은 역사적 격변 속에 시달린 민초들의 구원에 대한 열망과 종교적 열의가 굉장히 뜨거웠던 시대였다. 이 와중에 기존의 가톨릭 교회는 이러한 민중의 뜨거운 갈망에 부응하지 못했다.[10] 반대로 칼뱅보다 한 세대 앞서 종교 개혁의 횃불을 당긴 마르틴 루터의 성공 또한 이러한 대중적 열망+선제후의 입맛에 부합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터는 스스로를 언제까지나 '하나님의 참된 말씀을 전하는 신학자'로만 생각하였지, 시대적 여건상 종교의 문제와 필수적으로 결부될 수밖에 없었던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는 입장을 표하지 않거나 되려 보수적인 모습을 보였다. 루터의 이러한 비세속적, 보수적인 모습은 교황청과 황제의 권위에 짓눌리기 싫으면서도, 농민전쟁 와중 떠오른 기존의 사회적 질서의 요동은 절대적으로 피하고 싶었던 신성 로마 제국의 영주들에게는 안성맞춤인 주장이었지만, 가톨릭 교회와 결부된 기존의 구시대적 사회질서 자체에 질린 이들에게는 여전히 지나치게 보수적인 태도였다.

이에 따라 1) 예정설의 교리를 통해 가톨릭 교회뿐만 아니라 가톨릭 교회의 신앙관에 따른 계급 사회와 봉건적 질서 자체를 송두리째 부정하고, 2) 하나님 아래 인간은 신분의 차이와 상관 없이 모두 비참한 죄인일 뿐이며, 3) 구원 역시 현세에서 아무리 존귀하든 비천하든 하나님이 미리 정해 놓은 언약에 따라 이루어질 뿐이라고 주장한 칼뱅의 과격한 신앙관은 수많은 민중, 특히 중세 후기부터 지속적으로 진행된 도시의 자치권을 위협하는 영주 권력의 팽창에 심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던 도시민들에게 많은 열광을 받았다.

간단히 말해 수백 년째 사람 위에 사람이 있고, 사람 밑에 사람이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이를 하나님의 뜻에 따른 섭리로 받아들여 좌절하던 이들에게 칼뱅은 난데없이 '당신들이 지금은 비천할지언정 구원의 날이 오면 당신들이 천국에 가고 저 위세가 하늘을 찌르는 영주들은 지옥에 가 있을 것이다.'라고 가르쳐 전근대 유럽에 그 폭풍 같은 확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11] 16세기~17세기 유럽을 휩쓴 종교 대립의 시대에 루터파 vs 가톨릭의 대립은 정치적, 영토적인 문제에 결부되어 따라간 면이 크며, 그나마도 루터의 종교 개혁 이후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까지, 그리고 30년전쟁 중반에 국한된 반면,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네덜란드 독립전쟁, 영국 내전 등 종교적 열망이 그 핵심에 있었던 진짜 알짜배기 종교 갈등은 칼뱅파 vs 가톨릭의 구도였다.

어릴 적부터 독실한 가톨릭의 신자였으나 대학 시절 성경을 공부하며 가톨릭 교회의 권위에 대해 의심하게 되었다는 젊은 시절의 칼뱅의 일화와 수도자가 되었음에도 내면의 죄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여 번민하다가 스승의 권유로 성경을 공부하게 되었다는 마르틴 루터의 일화, 칼뱅의 친구가 대학 학장 취임식에서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하는 마태복음 구절에 근거하여 취임식 연설을 하다 프랑스 정부에 잡혀간 일화는 역설적으로 당시의 가톨릭 교회와 중세사회가 민중의 종교적 갈망을 충족시키지 못했음을 설명해준다.

칼뱅은 젊은 시절부터 프랑스 정부와 가톨릭의 박해를 피해 스위스 제네바로 망명, 제네바의 일반 시민에게도 엄격한 신앙생활을 요구하여, 신정정치적 체제를 수립하였다. 제네바는 그 후 종교개혁파의 중심지로서 전 유럽에 영향을 끼쳤다.

칼뱅은 고향 프랑스도 잊지 않고 제네바에서 프랑스로 다수의 선교사를 파견해서, 이전까지 루터교회가 다수를 차지하던 프랑스 개신교(위그노)는 스위스의 영향을 받아 개혁교회가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프랑스 개신교 공동체는 결국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소수세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4.1. 신학적 기여

칼뱅의 신학을 정리하자면, 종교의 권위는 성경에 있으며 로마 교황청에 있지 않음을 주장했다. 이는 루터와 마찬가지로, 신자가 구원을 받는 기준이 가톨릭 교회가 말하는(혹은 인간적인 의미에서의) 선행의 기준에 맞추어 살았는가보다[12] 얼마나 성경에 부합되고 믿음으로 살았는가에 있음을 말한 것이다. 주된 사상의 예로 예정설과 전적 은혜설 등을 들 수 있다.

칼뱅의 성경관은 기본적으로 성서무오설을 바탕으로 한 자증적 권위와 완전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성경의 권위는 성경 밖에서 찾을 수 없으며, 성경은 인간의 구원 문제를 다루는 데 이미 완전성을 갖추고 있으므로[13] 그 어떤 부가적 해석이나 별도의 계시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 의외로 많은 비개신교인들이 오해하는 것인데, 바로 이 때문에 칼뱅의 노선을 착실히 따르는 보수적 신학계에서는 신비체험이나 은사주의를 사실상 거의 인정하지 않는다.[14] 꿈에서 하나님께 별도의 계시를 받았다거나, 어떤 예언을 한다거나 하는 것은, 결국 성경의 역할과 위상을 크게 훼손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칼빈주의 노선에 가장 철저한 양대 교단인 예장고신과 예장합신 두 교단은 신사도 운동 같은 것들을 철저하게 이단시하며 교단 차원에서 뿌리를 뽑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15][16]

칼뱅 사상의 특징 중 하나로 다섯 솔라(Five Solas) 역시 들 수 있다. 다섯 솔라 칼뱅의 독자적인 내용은 아니며 루터의 세가지 솔라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을 받아들였고 츠빙글리의 오직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이에 더 추가하여 개신교 교리의 핵심을 이루는 부분. 정확히 말하면 다섯 솔라는 원래 루터가 주장한 것을 칼뱅이 받아들인 것이라 튤립 교리와는 달리 다른 개신교 교파들도 동의한다. 바흐헨델이 악보 맨 밑에 서명과 함께 S.D.G.라고 적었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각각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또 언급할 만한 것은 칼뱅주의 5대 강령으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도르트 신조[17][18]를 통하여 채택한 기본 원리이다. 내용의 전개되는 방식상 그 일부만 수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전체를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전체를 거부하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 칼뱅주의 5대 강령은 앞 글자를 따서 흔히 튤립(TULIP) 교리라고도 불린다.[19]

여기서도 확인되지만 칼뱅은 이중예정설선택유기설을 지지하였으며[20] 이로 인해 만인속죄설을 주창했던 아르미니우스주의와 원수지간이 되었고 그게 지금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또한 성만찬 또는 성찬에 대하여 화체설을 비판하면서도 동료였던 츠빙글리의 기념설도 함께 비판하면서 자신만의 관점을 확립하였다. 현대 신학에서 성찬에 대한 칼뱅의 관점은 보통 영적 임재설[21]이라고 불린다.

4.2. 아르미니우스주의와의 대립

아르미니우스주의와의 대립에 앞서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칼뱅의 사상과 비교할 때 독자적이고 대등한 신학은 아니며 칼뱅주의 신학에서 예정설, 은혜론에 과격한 부분을 수정한 사상이다.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는 애당초 칼뱅 사상 자체를 대적할 생각은 당연히 없었다.

구원의 문제는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Sovereignty)에 달렸는가, 인간의 자유 의지(Free Will)에 달렸는가? 양쪽 모두 성경에서 근거구절을 들고 있으며, 양쪽 모두 일정 부분 합당한 면이 있으면서도, 상대방을 인정할 경우 교리상 치명적 결함이 발생하게 되기 때문에 기독교 내 에서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22]

칼뱅주의의 핵심 키워드라고 할 수 있는 '주권'을 인정하면, 하나님의 주권이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이 세상에 도대체 왜 악이 존재하며 사후에는 무슨 명목으로 지옥에 보내느냐는 질문에 답하기가 곤란해진다. [23] 그렇다고 악으로부터 하나님께 면책을 주기 위해 자유의지를 인정하자니, 개신교 신학에서 인간의 위상이 지나치게 상승하여[24] 거꾸로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이 손상되는 것.[25]

물론 칼뱅이 자유의지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며, 『기독교 강요』에서 나름대로의 설명을 펼치고 있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자유선택과 노예의지 교리.[26]

아르미니우스주의 자체는 과거 펠라기우스주의와도 닮은 점이 있으나, 인간의 선행에 대해 상당한 시각차를 보임으로써 그들과는 거리를 두둔다.

존 웨슬리에 의해 창시된 감리회를 아르미니우스주의의 후사로 보는 시각이 팽배하고 학부용 조직신학 교과서에도 이러한 시각으로 기술된 경우가 잦으니 매우 주의해야 한다.[27] 이는 감리회의 선행은총 이론에서 비롯된 것인데, 하나님의 은총뿐 아니라 인간의 자유의지가 함께 협력해서 구원으로 이어진다는 신인협력설을 오해한 결과이다. 감리회에서 강조하는 것은 선행이 틀림없지만 엄연히 이들도 배후에 하나님의 은총이 있어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강조한다. 즉 이들은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이 고수하였던 전적 타락론에 반기를 든 것일 뿐 어설프게 펠라기우스나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따르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감리회의 교리화 과정에서 그것에 영향을 받았을 뿐이다.[28]
자연을 통해서 신을 인식할 수 있는가? 자연인은 자연을 보고 관찰하고 인식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자연을 하나님의 피조물로 인식한다. 그리스도인은 믿음과 가르침을 통해서 자연을 하나님의 창조물이라고 하는 새로운 실제를 지각하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초자연적인 확실한 증거, 곧 믿음으로 알 수 있다.
- 존 웨슬리의 어록 中 -

현재 이야기되는 논의들을 간단히 언급하자면, 감리회 신학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자유의지도 하나님의 은총에 기반한 유비(analogy)에 기초한다.[29][30] 유비이론 자체는 초대교회 교부시대 때 여럿 교부들이 언급했다. 대표적인 사람이 오리게네스[31], 닛사의 그레고리,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이다. 즉 감리회도 프로테스탄트에 속한 교파로서 이신칭의를 강조한다.


의외로 다른 기독교 교파 교리의 측면에서에서 시간의 의미도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시간 역시 피조된 것으로, 신 앞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의미가 없다는 것이 가톨릭과 칼케돈파 정교회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한 인간의 삶의 끝을 신이 모를 수는 없다.

성경에서 동일한 묘사를 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 신학에서는 구원문제와 칭의 사건을 종종 법정에서의 재판에 빗대어 설명한다. 이를테면 기독교의 구원은 영원한 사망과 영원한 생명을 판결하는 심판 법정과 같으며 하나님은 법정의 재판장이며 인간은 피고인석에 앉은 죄인으로 묘사한다.

웨슬리안과 칼빈주의의 구원론을 각각 이 묘사에 대입하여 차이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웨슬리안과 칼빈주의 모두 구원의 필요충분조건이자 핵심요소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런데 둘의 구원론에서 예수의 역할은 다르다. 웨슬리안의 구원론에서는 사탄이 검사로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인간의 죄악을 재판장에게 고발한다. 그러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고 주인으로 영접한 신자는 예수가 이 피고인에 대한 변호를 해서 인간은 변호인의 방어에 의하여 법정에서 무죄판결을 받아낸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사탄의 논고를 이길 수 없기 때문에 불신자는 사형을 피할 수 없다.

칼빈주의의 구원론에서 검사는 하나님의 율법이다. 하나님의 율법이 자신의 기준에 미달한 인간을 하나님의 법정에서 인간의 죄악을 재판장에게 고발한다. 이 재판에서 변호인은 없다. 자기변호만 가능할 뿐이다. 그러나 인간이 율법을 완전히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형이 선고되고 재판장은 이를 확정한다. 그런데 이 형벌의 집행장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고 주인으로 영접한 신자의 경우에는 예수가 흑기사로 나선다. 그리고 재판장이 집행을 선언하면 죄인에 대한 처형이 집행되고 예수가 자신의 생명으로써 사형수의 죄값을 대신 치른다. 그러면 그 형벌이 집행되었기 때문에 일사부재리 원칙에 따라 피고인의 죄악은 더이상 피고인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다.

4.3.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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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후대에 미친 영향

칼뱅은 본업이 법학과 고전문학을 전공한 학자라 평생 동안 기독교 강요와 같은 신학 저서의 정립과, 아가를 제외한 모든 성경(개신교 기준-외경, 위경 제외)의 주석을 달고, 매일 아침 7시마다 제네바 교회에서 성경을 가지고 강의, 설교를 하는 학자의 삶을 살았다. 제네바 대학교 역시 칼뱅과 그 지지자들이 세운 학교이다.

칼뱅의 제자 존 녹스(John Knox)가 스코틀랜드로 건너가[32] 세운 것이 장로회이다. 그리고 영국의 청교도(퓨리턴)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이 청교도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간 후로 미국의 개신교 세력은 거의 칼뱅파의 영향을 받았다. 미국의 몇몇 교회에서 볼 수 있는 보수적이고 금욕적인 행동의 유래를 찾아보면 대부분 칼뱅파에 그 기원을 발견할 수 있다. 더불어 한국 개신교 중 70% 이상이 장로회 계열이다.

칼뱅주의 교파는 유럽에 3천만, 미국에 4500만 가량이 있고, 기타 영향을 받은 복음주의 분파가 4천만 정도 더 있다고 볼 수 있다. 관련 문서. 이는 감리회(1억)와 거의 비슷한 인구를 자랑하는 것이다.

다른 개신교 교파들처럼 유럽에서는 쇠퇴하는 중이다. 장로회의 원산지인 스코틀랜드도 사람들이 교회에 이름은 등록되어 있지만 평생 예배 한번 안 보는 사람들이 대다수가 되었다. 유럽 대륙에서는 스위스, 네덜란드 정도에서나 대세였는데 이 두 나라도 세월이 흐르면서 정통 칼뱅주의가 아닌 신정통주의로 신학적 흐름이 바뀌었고, 특히 네덜란드는 2차대전 이후 개신교 인구가 빠르게 감소하여 인구대비 10%밖에 되지 않는다.

6. 일화

인간적으로 칼뱅은 상당히 불우한 삶을 살았는데, 젊은 시절부터 가톨릭과 여러 정치적 세력들의 박해를 받아 피해다닌 것을 들 수 있다. 비단 가톨릭 교회와 프랑스 정부뿐 아니라, 칼뱅의 복음주의적인 입장을 달가워하지 않은 제네바의 민주화 세력과도 갈등이 있어 그들로 인해 목숨을 위협받고 7년간 제네바에서 추방당한 적도 있었다. 가족사 측면에서도 상당히 불우하여, 칼뱅의 자식들은 거의 대부분 어린 나이에 병마로 숨지고, 아내 역시 병으로 잃고 만다. 칼뱅 자신도 매일 공부만 하느라 건강에 신경 쓰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33][34]

종교개혁 경력상 약간 선배인 루터가 1525년 전직 수녀인 카타리나 폰 보라[35]와 결혼할 때만 하더라도 이론적으론 루터가 성직자 비혼 문제로 가톨릭 교리를 공격하는 것에 동의하던 지지자들도 막상 전직 수도자가 당당하게 전직 수녀와 결혼한다는 행위 자체를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측근들이 꽤 있었다. 그러나 막상 루터가 첫 테이프를 끊고, 결혼생활도 성공적으로 꾸리자 곧 일부러 성직자 비혼주의를 공격하고 결혼을 하는게 초기 종교개혁자들 사이에 일반적인 관습이 되었다. 칼뱅도 이런 유행을 따라 신학적으론 가톨릭 교회의 성직 독신주의를 공격했는데 막상 본인 성격은 연애나 이성엔 너무나도 관심 없는 전형적인 내성적인 공부벌레 타입이라 주변의 적극 권유에도 불구하고 결혼하지 않고, 주변의 강권으로 잡은 중매결혼도 결혼식 파토내는 등 도통 흥미를 안보였다. 결국 1540년, 플랑드르의 하급 귀족 가문의 딸이었던 이델레트 드 뷔르와 결혼했다. 결혼 당시 칼뱅은 31살의 당시 기준에선 심각한 노총각이고, 이델레트는 아예 40살의 이미 결혼 한번 했고 애도 둘이나 봤는데 전남편이 병사한 미망인이었다.

안그래도 각종 병마와 위생 문제가 심각했던 시대였는데 당시 기준으론 중년과 노년 사이를 바라보는 나이에 재혼한 이후 출산이 건강에 심각한 무리를 끼쳤는지 둘 사이의 자식들은 전부 다 어린 나이에 병사했고, 부인 이델레트 또한 결혼생활 10년도 못가 1549년 병사했다.[36] 아이들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부부관계는 원만했고 칼뱅 본인도 막상 결혼 해보고 나니 공부에만 집중하게 해줄 수 있는 부인의 존재에 감사하며 이델레트가 사망한 이후 크게 슬퍼했다. 칼뱅이 동료에게 쓴 편지에 따르면 부인이 임종을 맞이할 때 칼뱅은 슬퍼하며 부인의 전 남편 사이에서 생긴 자식들도 책임지겠다고 했으나 죽어가는 부인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그 아이들은 이미 하느님에게 맡겼으니 당신은 하던대로 하느님의 일에만 집중하라고 책망했다고 할 만큼 이델레트 칼뱅은 남편 못지 않게 종교적으로 열정적이고 남편하는 일을 몸과 마음으로 백프로 지지한 여인이었다.

또한 칼뱅이 추구한 제네바 사회는 극도로 원리 원칙적으로, 싸움이나 예배 결석이 허용되지 않는 수준을 넘어 가벼운 도박이나 길가에서 노래 부르는 것, 필요 이상으로 맛이 있는 음식을 먹는 것 따위를 금지하는 등 칼뱅 본인에게 적용되는 금욕적인 기준을 모두에게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밀어붙이는 사회였다. 그리고 이런 사항들의 위반에 대해서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최소 구류나 최대 사형이나 추방 등의 무거운 형벌[37]이 일괄적으로 부과되었다. 또한 도둑질한 자는 산채로 끓는 기름에 집어넣어 죽이는 잔인한 형벌을 시행하는 등 성경에서 중요시 하는 용서와 관용에 역행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심지어 칼뱅식 예배에 2번 빠졌다고 하여 사형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카드 놀이까지 사형시켰다는 부분은 과장된 측면이 있다. 가벼운 수준의 카드 놀이나 주사위 놀이 정도는 허용되던 시기였다. 물론 판돈이 걸리는 도박이 되거나 간통, 폭리를 취하는 것 등은 법으로 금지되었는데 실제 이 법이 시행되던 제네바의 분위기는 다른 유럽 지역에 비하면 상당히 자유로운 편이었다. 거기다 이 법령이 시행된 시기는 칼뱅이 제네바에 온 1503년 이전에 이미 제정되어 온 것이었다.[38]

본인이 젊은 시절 종교적 의견의 자유를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식으로 승인한 교리와 다른 해석이나 입장은 철저하게 공격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특히 삼위일체설을 부정했던 세르베투스가 제네바에서 화형되는 과정을 주도했다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칼뱅 본인이나 옹호자들은 '화형을 자비로운 교수형으로 바꾸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라는 말로 칼뱅의 주도적 개입을 부정한다. 칼뱅이 정말 세르베투스를 용서할 마음이 있었다면 교수형을 받아내는 것 뿐만 아니라 목숨을 붙여 해외로 내보내는 일까지 얼마든지 가능했을 정도로 제네바에서 칼뱅의 입지는 탄탄했다고 반론도 있지만, 칼뱅이 제네바 시민권조차 없던 시기라 사실상의 정치참여가 불가능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단, 이 사실이 칼뱅의 책임을 경감시킬 수는 있으나 과오를 없앤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실 당시는 반칼뱅주의자와의 싸움이 결정적일 때였다.[39] 그래서 세르베투스의 화형 결정은 칼뱅이 아니라 제네바 동맹 도시, 특히 강대했던 개신교 도시 베른[40]의 권고가 결정적[41]이었다는 설도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칼뱅이 비난받아야 하는 부분이라면 자신의 입지가 탄탄하든 아니었든, 세르베투스를 화형은 아니더라도 사형받도록 하기 위해 탄핵하고, 공박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즉 본인이 주장했던 종교적 자유에 대한 신념을 깨고, 세르베투스를 용인하지 못했다는 점이 최대의 과오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후술한 장로회 신학자들의 비석에도 이러한 불관용성을 과오로서 지적하고 사과하는 데에 분량을 가장 많이 할애하고 있다.

당대에 이 일로 칼뱅을 비난했던 카스텔리오[42]와 같은 학자들, 그리고 카스텔리오의 전기를 집필한 슈테판 츠바이크[43] 또한 이 점을 명확히 지적하고 있다. 20세기 초에 장로회 신학자들이 제네바에 칼뱅이 독단적이고 공격적인 태도를 취해 카스텔리오 등의 학자들을 핍박한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비석을 세움으로써 이 논란의 사실 여부는 어느 정도 결정났다고 할 수 있다.

1903년 제네바와 프랑스의 종교개혁 교회의 대표자들로 구성된 위원회가 350년 전인 1553년 10월 27일, 미셀 세르베투스를 화형에 처하는 장작더미가 쌓였던 샹펠(Champel)의 자리에 세운 속죄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위대한 종교개혁자 칼빈을 깊이 존경하고 감사하는 후예로서 종교개혁의 참된 원리와 복음에 따르는 양심의 자유에 확고히 서서, 그 시대의 실수이기도 한 그의 잘못을 인정하며 이 속죄비를 세운다. 1903년 10월 27일.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이전에 이미 세르베투스는 정통 기독교 신학을 거부하고 이단 사상[44]을 주장하다가 '스페인'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파리로 도피하던 중에 칼뱅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였던 것이다. 이에 칼뱅은 세르베투스에게 기독교강요를 보내어 자신의 입장에서 바른 신앙으로 이끌고자 하였지만, 세르베투스는 그 기독교강요의 여백에 칼뱅을 경멸하는 낙서를 가득 써서 돌려보냈다는 것.

이후 세르베투스는 '기독교 재건'이라는 책을 칼뱅 몰래 출판하여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밝혀 이번에는 빈에서 다시 이단으로 단죄되어 사형집행 전에 제네바로 도망가게 된다. 세르베투스는 칼뱅의 반대파를 이용하여 자신에게 내려진 이단판결을 물리치려고 제네바에 왔고 칼뱅은 세르베투스에게 제네바로 오지말라고 간곡하게 부탁하였지만, 결국 1553년에 체포되어 화형을 언도받게 된다. 체포후 재판과정에서도, 세르베투스는 칼뱅이 제네바에서 추방당하면, 칼뱅의 모든 재산을 자신이 가질 것이라면서 주제 넘게 이야기하기도 할 정도로 재판과정에서 자신만만해했으나 결국 제네바 시의회는 만장일치로 화형에 처할 것을 결의했다. 하지만 칼뱅은 이에도 좀 더 인간적인 방법으로 참수할 것을 요청하지만 시의회는 칼뱅에게 적대적이었기에 칼뱅의 요청을 무시하고 화형을 집행해버린 것이다. 실제로 1555년 이전까지의 제네바 시의회와 칼뱅은 그렇게 협조적인 관계가 아니었다. 제네바 시의회는 설교를 길게 하는 목사를 규제하였으나 칼뱅은 설교를 길게 하였고 1553년에는 칼뱅의 교회에서 출교당했던 베르텔리에가 성찬을 받을 수 있도록 시의회에 요청하자 시의회에서는 그 요청을 받아들임으로 칼뱅과 대립각을 세우기도 한 적도 있었다. 이외에도 타지에 나갔던 목사들이 암살당한 배후로 의회 민주파가 꼽히기도 했다.

무엇보다 세르베투스가 제네바에 다시 오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 장담하던 칼뱅은 자신이 참여한 예배에 대놓고 와서 잡힌 세르베투스의 처분을 놓고 스위스의 모든 개혁파 교회에 의견을 묻는 과정을 선택했다. 결과는 만장일치로 화형. 당시 삼위일체 교리의 부정은 가톨릭과 개혁파 모두 살려둘 수 없던 죄였고,[45] 최종 처분은 제네바의 의회의 집행에 넘겨졌다. 애초에 칼뱅의 결정을 의회가 받아들일 의무도 없었건만 당시 사회의 분위기로는 화형이 당연했다.

요약하자면 칼뱅에게 과도한 책임을 묻는 것은 정황상 과도하다는 것이 최근 제네바 컨시스토리의 중세 프랑스어 문헌을 연구하며 나오는 칼뱅 연구자들의 최근 주장이다. 대표적으로는 칼뱅 연구자인 장신대 박경수 교수 등의 연구가 있다. 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의 카스텔리오를 비롯한 인문주의자들은 종교적 신념을 처형이나 화형으로 처벌하는 것에 대해 반대 입장이었고 그런 맥락에서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은 칼뱅이 그런 관행에 적극적으로 항의하지 않고 이를 수용한 것 자체가 비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

최근에는 이러한 입장에 변화가 생겼다. 당시 제네바 시의회의 회의자료와 칼뱅이 직접 작성한 서신 등의 자료들이 공개되고 추가로 연구되면서 칼뱅이 억울하게 비난을 받았다는 것이 알려지게 된 것이다. 자료에 따르면, 당시 칼뱅은 자신이 시의회를 움직일 권한 자체가 없었으며, 세르베투스의 화형은 시의회가 강하게 밀어붙인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흔히 칼뱅을 종교적 권력을 바탕으로 제네바의 정치권력까지 휘두른 철의 개혁가 정도로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수시로 의회의 견제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칼뱅을 비난하는데 결정적인 자료가 된 책은 유명한 전기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글인데, 이 책은 2023년 현재 기준으로 적어도 100년 전에 집필되었으며, 사료조사 등이 깊지 않다. 시의회 회의록이 공개되고 연구자료로 활용된 것은 21세기에 들어서인데, 그전까지 칼뱅은 계속 세르베투스를 죽인 모략가의 이미지를 뒤집어쓴 것이다.

한국에서의 실제 칼뱅의 삶에 대한 자료는 장로회쪽의 연구자료가 상당히 많은데 당연히 장로회의 기원이 바로 이 칼뱅주의이기 때문이다. 이쪽 자료도 한번 참고해보자. #

확실한 것은 평생 맥주를 퍼마시며 입을 열 때마다 교황은 내 똥방귀나 처먹어라!라는 식으로 수 없이 말했고, 결혼 생활도 열정적이었던 루터에 비하면 칼뱅은 좀 너무 담백해서 드라마틱한 맛은 덜한 편이다(...). 사실 신학적, 역사적으로는 여러 면에서 루터보다 더욱 더 독창적이고 체계적이었던 칼뱅이 인물사적 측면에서는 덜 알려진 것도 업적은 둘째 치고 일단 인간으로서 여러 모로 다이내믹하게 요리조리 펑펑 튀며 동시대인들이나 후대인들에게나 빅 재미를 안겨준 루터와 달리 수수하고 소박한 사람이었던 점도 크다.

7. 칼뱅에 얽힌 오해

7.1. 창조설의 옹호자?

칼뱅은 창세기 주석에서 "창세기는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형태로 쓴 것", "어리석은 자도 알 수 있는 쉬운 말로 적은 것"이라고 언급함으로써, 성경의 어떤 내용은 비유적인 표현임을 인정했다. 그래서 칼뱅을 반드시 현대의 창조설과 같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가 주장한 성서무오설은 유기적 영감설에 기반하였다. 성서의 가르침은 오류(Error)가 없으나, 하느님이 성서 기자들의 지혜를 통해 당신의 말씀을 계시하셨다는 뜻이다. 성서의 무오성은 계시론적, 신앙적인 의미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보았다.

7.2. 천동설의 옹호자?

칼뱅은 루터와 마찬가지로 코페르니쿠스지동설을 비판하였다고 욕을 먹는데, 근거가 전혀 없다. 출처가 전무한 완전 조작인 것이다. 칼뱅의 지동설 부인글은 공격적 무신론자인 버트런드 러셀이 쓴 《서양 철학사》에서 처음 등장한다. 러셀은 칼뱅이 "세계는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시편 93편 1절) 이라는 구절로 코페르니쿠스를 파괴했다고 주장했고, "누가 감히 코페르니쿠스의 권위를 성령의 권위보다 위에 두려 하는가?"라고 일갈했었다며 조소했다.

그런데 칼뱅은 이런 말을 쓴 적이 없다. 러셀의 책이 나온 후 이 말이 여러 군데에서 인용되었지만, 학자들은 이 말이 사실인지 검토하지 않았고, 비판적으로 조사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용은 완전히 조작이다. 러셀의 인용문은 앤드류 딕슨 화이트가 1896년 발표한 《기독교 세계에서 과학과 신학이 벌인 전쟁의 역사》에서 인용했는데, A.D.화이트는 드레이퍼 등과 함께 "과학과 종교는 서로 절대로 양립 불가능하다" 는 소리를 근거 없이 해서 고금의 수많은 지식인을 낚았다면서 과학사와 종교사학계에서 악평이 자자한 인물이다.[46] 그리고 그나마 이 책에서도 최초 출처에 대해선 전혀 언급이 없었다. 사실 코페르니쿠스는 독일계 폴란드 가톨릭 사제였고, 현재에는 아이작 뉴턴의 경우와 함께 과학과 종교가 충돌하지 않는다는 주장의 근거 예시로 사용되는 것을 보면 아이러니하다.

천동설에 관한 비판은 명백한 오해다. 장 칼뱅은 16세기 사람으로, 갈릴레이가 태어난 해에 사망했으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칼뱅이 활동할 당시에 논쟁적인 주제였다. 아울러 당시에 기독교의 창조관보다 더 설득력 있는 학설이 있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다음 사항을 기억하면 판단에 도움이 될 것이다. 아이작 뉴턴은 17세기 사람이고 다윈은 19세기 사람이다. 심지어 기계론적 세계관의 효시로 일컬어지는 르네 데카르트조차 칼뱅 사후 태어났다.

7.3. 마녀사냥의 옹호자?

칼뱅은 마르틴 루터와 엮여서 "마녀사냥을 적극 지지했다" 는 누명을 썼는데 역시 비슷하게 별 근거 없는 비방이다. 칼뱅의 경우 성경중심 신앙을 강조했고 루터나 칼뱅이나 인문주의의 사조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성경을 엄격하게 해석한 사람들이라 마녀고문해서 무슨 털이 나오는지 전혀 관심이 없었다. 특히나 칼뱅의 경우 마녀사냥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었다. 루터나 칼뱅은 마녀에 대한 언급이 아예 없지는 않지만, 악마나 사탄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마녀의 마술보다는 주로 이단에 대한 언급을 했다.[47]

자세한 내용은 텍사스 대학교 교수 브라이언 P. 르박(Brian P. Levack)著 《유럽의 마녀사냥》 참고하면 좋다. 이 기고문은 《과학과 종교는 적인가 동지인가》 에 실려 있으며, 한국에도 번역되어 들어와 있다.

8. 기타

8.1. 예수회와의 관계

1559년 신학교 목적으로서 스위스 제네바에 제네바 대학을 세웠으며, 제네바 대학은 예수회 대학이다. 칼뱅은 이전에 예수회 창시자인 이냐시오 데 로욜라가 다녔던 프랑스 파리의 몽테귀 대학에서 4년 동안 가톨릭 신학을 배운 바도 있다. 칼뱅 스스로 남긴 몽테귀 대학에 대한 평가는 학생들에게 채찍질을 하고, 고기를 먹지 못 하게 하면서 많은 학생들이 병으로 죽어가는 비정상적인 곳이었다. 장 칼뱅 배출한 파리 몽태규 대학

파일:Geneva_wall.jpg

스위스 제네바 대학에 세워진 종교개혁의 벽(Reformation Wall)에는 기욤 파렐, 장 칼뱅, 테오도르 드 베즈, 존 녹스 4명이 순서대로 새겨져 있다. 종교개혁의 벽 하단에는 예수회 심볼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Soli Deo Gloria)'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장 칼뱅 스스로 남긴 저서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곧 '광휘(aplendor)'라고 일컬으며 로욜라가 위대한 조명(illumination)이라고 일컫는 신비주의와 맥이 상통한다. 또한, 이러한 개념은 성경적인 가치관과는 매우 다르다. 칼뱅이 우주에 대해서 표현한 개념은 '하나님의 영광의 장관(God's visible glory)'라면서 '일종의 거울'이자 '눈에 보이는 전시장'이라는 것을 통해서 로욜라가 시각적으로 '장엄함'과 '더욱 큰(magis)', '보다 큰(majorem)'이 영광(gloriam)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과 비슷한 맥락을 갖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본래의 영광 자체보다 다른 것들을 영광보다 우위에 두는 예수회적인 특성을 갖춘 것이다. 로욜라가 말한 '보다 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Ad Majorem Dei Gloriam)'은 칼뱅이 말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과 궁극적으로 같은 의미이다. 또한 하나님과 영광에 대한 서술 역시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독창적인 것인데, 로욜라의 영적 식별(신비주의 체험)의 영역을 이론화하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근본적으로 칼뱅의 주장은 로욜라의 것과 같다. 따라서, 아래의 첨부한 칼뱅과 로욜라에 대한 비교 연구 외에도 생각보다 상당히 많은 연구 자료에서 유사점을 지적하고 있다. 칼뱅과 로욜라의 비교 연구

9. 관련 문서



[1] '칼뱅'은 본래 칼뱅의 성씨였던 '코뱅(Cauvin)'을, 칼뱅 스스로 라틴어식인 '칼비누스(Calvinus)'로 갈음한 것에서 유래하며, 현대 프랑스어로는 비모음화된 Calvin([kalvɛ̃\])으로 표기하고, 한글로는 현대 프랑스어 표기법에 따라 '장 칼뱅'으로 쓴다. 종종 한국 개신교 번역서적들을 보면 장 칼뱅이 프랑스인임에도 불구하고 영어식 표기인 '존 칼빈'으로 표기하는 신학자들도 보인다. (예장합동, 예장고신 등 보수적인 장로회 교단들은 '요한 칼빈'이라는 표기를 주로 사용한다.)[2] 2016년에 노르파드칼레 레지옹과 피카르디 레지옹이 통합하면서 오드프랑스 레지옹이 출범했다.[3] 칼뱅의 좌우명으로 칼뱅의 서신에서 쓰인 "cor meum velut mactatum Domino in sacrificium offero."('제 심장을 도려내어 희생 제물로 주님께 바칩니다.')에서 유래한다. 이는 칼뱅의 개인 문장에도 반영되어 있으며(심장을 쥐고 있는 손 양 옆으로 IC라는 이니셜이 적혀있다.) 한국에서는 SFC에서 상징으로 쓰고 있다. 다만 시각적 상징 사용을 자제하는 개혁주의 특성상, 루터의 개인 문장에 비하면 인지도가 낮다.[4] 일제강점기 외래어의 한글 표기 관습에 영향을 받은 것이며,(즉 영어에서 존이라고 불리듯 한국어식으로 요한이라 하는 것) 특히 예장고신 등 보수 성향 교단에서 '요한 칼빈'이라는 표기를 많이 선호한다. 여러 분파로 나뉜 한국 장로회 교단들의 연합기구 중 '요한 칼빈 탄생 500주년 기념 사업회'라는 곳이 있을 정도. 실제로 구글에서 따옴표를 붙여 검색해보면 "존 칼빈"은 약 81,800건, "요한 칼빈"도 약 43,100건으로 정확한 표기인 "장 칼뱅"의 약 39,300건보다 많다. 물론 칼뱅은 프랑스계이며 고유명사(인명)인 만큼 '장 칼뱅'이 타당한 표기이다. 세속 분야에서는 장 칼뱅을 선호하고 있다.[5] 출처 : 아이굿뉴스(http://www.igoodnews.net)[6] 이러한 성격 때문에 종교개혁을 계속 이끌어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7] 칼뱅 또한 볼마르 밑에서 수학했다.[8] 볼마르의 제자들로서 서로 면식 있는 사이었다.[9] 유일하게 프랑스어로 강의하는 개혁파 아카데미였다.[10] 물론 예수회 등의 변화가 있기는 했지만 가톨릭 예수회의 본토인 스페인과 선교사를 파견했던 아시아, 남미 일부에 그쳤다. 실제로 가톨릭은 단기간에 당대의 개신교와 종교개혁가들만큼 많은 변화를 일으키지는 못했고, 보통 가톨릭의 개혁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까지 이어졌다고 본다.[11] 리처든 던, 존 엘리엇 등 역사학자들은 이를 보고 "16세기의 볼셰비키"라고 표현하기까지 했다![12] 사실 가톨릭 교회도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믿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가르쳐왔고 이 명제 자체를 부정한 적은 없었다. 다만 교회의 특성상 끊임없이 거기다 사족을 덧붙여왔고 면벌부 판매와 교리의 형식화로 인해 행위구원론을 주장한다고 오해받기 딱 좋은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가톨릭 교회가 선행을 중시하기는 하지만 선행을 하는 것 자체가 구원받는 방법이라고 가르친 적은 없었다. 저 주장은 동서교회가 분리되기도 한참 전에 이미 이단 취급당한 펠라기우스의 주장이었다, 물론 가톨릭 교회의 구원관이 펠라기우스의 행위구원론도 아니며, 반(半)펠라기우스주의도 아니지만 루터의 이신칭의론이나 칼뱅의 이중예정설을 인정하지는 않았다.[13] 그래서 현대 장로회 신학자들은 기본적으로 성경에 과학적 사실이 반영될 수는 있지만, 성경의 언어는 과학과 다르기 때문에 성경을 통해 과학적 사실을 찾는다면 무의미하다고 한다. 성경에서 주로 찾을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구원받는 법과 구원받은 인간의 생활 방식이라는 것. 즉 여기서 말하는 성서의 무오성은 역사나 과학 혹은 그 당시의 사회, 문화적 논의들의 무오성이 아닌 신앙의 지침으로서의 무오성을 말한다고 볼 수도 있다.[14] 바로 이 때문에 소위 근본주의라는 교파에서도 "오 예수여 예수 만세 알를를를르" 하면서 구르고 눈 뒤집고 기절하고(…) 이러면 칭찬해주거나 좋아하기는커녕 오히려 "저놈 미친 놈이네"(…)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신사도 운동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 단체들의 집회(기도회, 교회 수련회 등)에서는 사람을 쓰러뜨리는 일이 빈번하게 나타나는데, 이는 한국 개신교회에서 이단을 판정하는 기준으로 쓰이고 있다. 다시 말해, 이런 교리적 이유 때문에 저렇게 사람 쓰러뜨리고 구르거나 소위 예언사역, 직통계시를 한다면 그 행위 자체가 이단인증이 된다는 뜻이다. 종파상으로 분명 이단이 아닌 상당수 대형교회에서도 저런 진상짓이 빈번하게 일어난다고 하나 이는 분명 칼뱅 사상과 대치되는 것으로, 그런 교회들 자체가 신사도 운동의 영향을 간접적으로 받은 사실상의 이단적 상태인 것이다.[15] 그런데 아르미니우스주의 쪽에서도 기본적으로 인간의 이성을 중시하기 때문에 신비주의를 지양하기는 마찬가지.[16]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사이에 신사도 운동 노선을 따르던 단체들이 대거 이단으로 결의된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칼뱅주의에 충실한 교단들도 기적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기적도 성경이라는 잣대로 검증해야 한다는 것이 공식적인 교리이기 때문다. 즉 칼뱅이건 아르미니우스건 웨슬리이건 전통적 신교 교리를 기준으로 하면 근거없는 신비체험은 일부 이단이 맞다.[17]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및 요리문답서, 하이델부르크 요리문답서, 벨직 신앙고백서 등과 함께 현대 장로회 신학의 기틀을 이루는 교리서 중 하나다. 그런데 정작 개신교인들은 이런 것들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다.[18] 여기서 말하는 도르트는 지금의 네덜란드 도르드레흐트로 개신교 신자가 아니라도 축빠라면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19] 이 교리는 현대 개신교의 전체 교파가 동의하지 못했다. 아래에도 다시 따로 서술되겠지만 이 내용은 장로회, 성공회, 비타협파 침례회를 비롯한 몇몇 교파에서만 유효하다. 루터회, 감리회, 침례회, 성결교회 등 다른 교파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20] 이는 하나님이 구원받을 자들과 구원받지 못할 자들을 예정해 두셨으며,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냥 구원하는 것을 그만두셨다는 뜻이다. 구원받지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행동한다는 뜻은 아니다. 물론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결과적으로 그게 그것일테지만, 이는 하나님의 책임 문제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신학에서 이렇게 정교한 설명이 필요하다[21] 빵과 잔은 상징일 뿐이지만, 성찬을 통하여 신자는 예수와 실제로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게 된다. 성찬에 임재하는 것은 예수의 실제적 살과 피가 아니라, 무소부재한 신성을 가진 예수의 영이며, 성찬을 통해 예수와 영적으로 연합한다는 학설이다.[22] 왜 그러냐 하면 밑에 후술하는 것과 같이 자유의지 이론도 은총론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이다. 헷갈리지 않게 정의하자면 아르미니우스주의에서 이야기하는 자유의지는 펠라기우스의 자유의지와 다르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의지만으로 구원에 다다를 수 있다는 주장이고, 아르미니우스주의는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인간이 자신 스스로 돌이켜 하나님과 함께 구원의 역사를 쓴다는 주장이다. 이 두 가지 문제, 자유의지 이론과 은총론을 동시적으로 연구한 신학자는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동로마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을 율법과 같이 도그마, 권위를 부여하여 부패한 것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바울의 이신칭의를 강조한 루터와 종교개혁자들은 정치적으로 가톨릭에 반대하기 위해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을 부정하고자 한 것이다.[23] 여기에는 보통 그릇이 토기장이를 탓할 수 없다는 식의 설명이 이어지곤 한다. 어쨌든 전지전능한 존재가 알아서 완벽하게 공의롭게 판단할 것이니 우리가 뭐라 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24] 칼뱅주의에서는 '구원받는다.'고 하지만, 아르미니우스주의에서는 '구원을 수용하며 동참한다.'고 본다.[25] 토마스 아퀴나스가 밑에서 후술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주권, 그리고 인간의 성화에 균형을 잘 잡은 편이었다. 사실 이 신학의 문제는 서방 기독교의 고질적인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서방 기독교는 인간의 죄 → 하나님의 구속→ 인간의 성화에서 끝나지만 동방정교회는 인간의 죄 → 하나님의 구속 → 인간의 성화 → 인간의 신화(theosis, theopoiesis)까지 나아간다. 즉 정교회는 하나님이 인간을 구속하시며 인간과 끊임없이 소통하면서 인간 스스로 노력하도록 놔두지 않고 끝까지 견인해가시며 끝에는 인간마저도 하나님의 나라로 참여하도록 이끈다고 신학적인 장치를 마련해놓았다.[26] 자유의지로 선택할 권리는 주어지나, 타락한 본성으로 인해 하나님을 찾으려 하지 않는 쪽으로만 선택하게 되어, 인간의 의지는 구원에 일체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교리.[27] 감리회와 대립하는 장로회 학자 중 이런 실수를 하는 사람이 많다. 대표적으로 웨인 그루뎀의 조직신학 교과서.[28] 진짜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따르는 교회가 네덜란드에 '항변파 교회(Remonstrantse Kerk)'라는 이름으로 있으나 감리회와 달리 미미한 존재이며, 그나마 세계적으로 선교도 안 되어서 교세가 위축되어가는 형편이다.[29] 유비이론을 정말 간단히 정의하자면 "인류는 자기기만으로 인한 죄에 의해 하나님과 극렬하게 대립하고,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은총, 곧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의 드라마를 통해서 드러난 그의 영광의 형태(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를 믿음으로 만물 안에 내재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라고 할 수 있다. 즉 여기서의 '자유의지'는 펠라기우스의 주장과 아르미니우스주의와는 전혀 다른 정통 기독교 사상에 속한 것이다.[30] 사실 가톨릭의 교리에서 말하는 자유의지도 펠라기우스의 설명보단 감리회의 설명과 훨씬 비슷하다. 다만 개신교 측에서는 그 자유의지 하나를 설명하려고 교회의 역할과 성사, 선행 등을 개신교에 비해 많이 강조하는 가톨릭의 교리를 반(半)펠라기우스주의로 오해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31] 오리게네스의 연구 중에 교회에 수용되지 못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만유구원론이다.[32] 원래 스코틀랜드의 가톨릭 사제였다가 제네바에서 칼뱅에게 신학을 배우고 다시 스코틀랜드에 돌아가 종교개혁을 호소하였다.[33] 칼뱅은 희대의 공부벌레였으며, 제네바에서 목사 직분을 받기를 거부한 이유도 목사 사역이 자기 공부를 방해할 것을 걱정해서였다. 물론 칼뱅이 사역을 거부하자마자 칼뱅의 선배이자 동료 목사가 되는 기욤 파렐이 저주까지 해가면서 칼뱅을 강제로 제네바의 목사로 만들었다.[34]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했고 제대로 앉아있는 것도 힘들 정도로 건강이 안 좋았다 한다.[35] 이름이 보여주듯 하급귀족 태생이다.[36] 이런 비극적인 가정사를 두고 당시 칼뱅을 적대한 가톨릭 교회쪽 사람들은 이단 수괴에게 하느님이 내린 천벌이라고 욕하고 씹었다[37] 보통은 구류 정도였지만 사형이나 추방 등의 무거운 형벌이 생기게 된 이유는 칼뱅의 엄격한 통치에 불만을 품은 반대파들이 칼뱅을 몰아내기 위해서 암살이나 폭동 등의 시도를 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칼뱅의 동료 목사 중 한 명은 제네바에서는 아니지만 어쨌든 독살당했으며, 칼뱅은 제네바에서 목사로 2번 임직되었는데, 첫번째로 쫓겨났을 때의 이유는 칼빈과 시의회의 마찰로 인한 것이었다. 2번째 임직 이후에도 쫓겨날 상황에 간 적이 많았지만, 동맹 도시들에 대하여 정치적, 종교적 우위를 지닐 수 있는 칼뱅의 가치 때문에 시의회는 그가 싫어도 번번이 칼뱅을 다시 내쫓기를 주저했고, 칼뱅은 정치적 이유로 죽을 때까지 제네바에 남을 수 있었다. 당시 신정체제 하에서 시의회가 목사를 인준했고, 의회가 인준한 목사에게 무슨 이유에서건 의회의 동의 없이 위해를 가하는 것은 의회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면에서 반역죄로 처단되는 것이 당시 자치 도시들의 관습이었다. 물론 개인의 신앙에 대한 내용을 국가권력이 형벌을 통해서 규율한다는 것 자체가 칼뱅을 따르는 현대 칼뱅주의자의 관점에서조차 언행불일치로 보일 수도 있다. 칼뱅은 기독교 강요에서는 정교분리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시대적 한계로 보자.[38] 칼뱅이 제네바에서 신정정치를 했다는 것에 대한 반론은 이쪽 링크를 참조하자. 단, 장로회 측 입장이므로 필터링은 알아서 하자.[39] 칼뱅은 말년에야 제네바 시민권을 받는데, 이는 시의회가 칼뱅의 정치적 가치는 인정하면서도 칼뱅과의 긴장 관계에 있는 의원들이 많아 번번이 시민권 부여안이 부결되었기 때문이다.[40] 베른은 칼뱅이 살아있을 때 루터교회였으며, 제네바에 루터회의 의식을 도입하는 압력을 많이 넣기도 했다. 루터가 생전에 가톨릭 전례를 많이 혁파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정치적 압력으로 이를 진행했다는 점에서 칼뱅이나 제네바 시 모두 반발했다. 제네바와 베른, 장로회와 루터회의 싸움에서 칼뱅이 있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제네바의 독립성이 강화되고, 제네바는 장로회, 혹은 개혁교회의 원산지(?)가 된다.[41] 세르베투스는 베른에서의 권고가 오기 전까지는 칼뱅을 맞고소하며 표 대결에서 우위를 자신했다. 당시 종교적 문제는 시의회가 판결했기 때문이다.[42] 단 카스텔리오는 칼뱅과 키배를 떴던 경험이 있어서 칼뱅에 대한 원한이 있었다. 물론 칼뱅이 카스텔리오에게 보여준 태도 때문에 세르베투스 화형 사건에서 더 크게 비판받는 경향이 있는데, 세르베투스 때와는 달리 칼뱅과 그 동료들은 카스텔리오는 제네바에서 추방하면서도 다른 대학에 추천서를 써줬기 때문이다. 카스텔리오에게는 관용을 베풀면서도 세르베투스는 칼뱅까지 나서서 사형을 주장했다는 점(칼뱅이 세베르투스에게 베푼 유일한 관용은 화형을 참수형으로 감형해달라고 한 것 뿐이다.)에서 세르베투스는 언행불일치 혹은 이중잣대의 희생자가 된 것이다. 단, 세르베투스는 이전에 이미 스페인과 빈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어 사형판결을 받은 상태였고, 당시 이단으로 정죄되는 것은 살인죄와 동급이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43] 단 이 주장은 슈테판 츠바이크의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에서 나온 것으로 이 내용은 처형당한 세르베투스의 추종자들의 주장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44] 세르베투스의 사상은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사상이었다. 이는 현재까지도 가톨릭이건 루터파건 칼뱅파건 어느쪽에서도 용인될 수 없는 주장이다. 실제 로마제국 테오도시우스 황제때부터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이단들은 사형을 받았다.[45] 이러한 이단자들을 받아줄 곳은 프로이센과 네덜란드가 포함된 저지대 일부에 불과했다. 투르크로 가서 무슬림이 되거나 종교세를 낼 것이 아니라면...[46] 앨리스터 맥그래스는 《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에서 화이트가 졸저라고 깠다.(p.611-612) 안 좋은 쪽으로 유명해서 그렇지 사실 듣보잡은 아니다.[47] 당초 칼뱅이 제네바에서 독재를 펼쳤다는 주장 역시 제기되는데, 이 역시 사실과 다르다. 애초에 칼뱅은 제네바에 목사 중 하나로 초빙받아서 온 입장이었고, 알려진 바와 같이 폭정을 휘두를 만한 권력이 없었다.[48] 주로 가톨릭이나 아르미니우스주의에 대한 반박이 추가돼 그렇다.[49] 칼뱅주의는 일견 신학적으로 비관적 논지를 전개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이는 근본적으로 칼뱅주의 자체가 유럽이 르네상스의 호황이 끝나고 종교 전쟁과 장기 침체, 인구 과잉 등으로 본격 헬게이트가 열리기 시작했던 말세적 분위기에 태생 자체가 전투적인 사상이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그런데 저렇게 이중예정설의 억압적이고 안 좋은 면만 쏙 배워먹은 언약신학 근본주의자들은 세상에 맞추어 저렇게 각박한 신학관을 바꾸어 가는게 아니라, 저런 각박하고 극단적인 신앙관에 맞추어 세상을 전투적이고 극단적으로 보려고 하기만 한다.[50] 덧붙여 말하자면 침례회 자체는 대체로 특정한 신학관에 엮이는 것을 거부하고 성경에 나온 대로 예정설과 자유의지 구원을 둘 다 인정한다.[51] 홉스는 영국의 철학자 토머스 홉스.[52] 이는 당연하게도 기존의 개신교를 자신들을 탄압하는 사탄의 세력이라고 폄하하기 위해서이다. 신천지와 같은 사이비종교는 기존의 자신들의 기반이되는 종교를 부정하며 자신들만이 참된 종교라고 주장한다.[53] 심지어 실제로 회개가 필요없다고 주장하는 사이비 집단이 존재하기에 그런 집단들을 칼뱅의 교리와 동일시켜 폄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