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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3 21:22:59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마케르

이름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마케르
(라틴어: Gaius Licinius Macer)
출생 미상
사망 기원전 66년
직위 법무관

1. 개요2. 행적3.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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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군인, 정치인, 역사가.

2. 행적

파일:기원전 84년 로마 동전.jpg
기원전 84년 마케르가 주조한 로마 동전.

저명한 평민 귀족 집안인 리키니우스 씨족의 일원으로, 기원전 84년 재무관을 역임하면서 화폐를 주조했다. 기원전 73년 호민관을 맡아 전 독재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호르텐시우스법[1]을 폐지한 것을 취소하는 등 술라의 정책을 폐지하는 데 힘을 기울였으며, 빈민들에게 토지를 나눠줄 것을 촉구했다. 기원전 70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호민관을 역임한 자가 다른 공직을 맡지 못하게 한 술라의 법을 페지한 덕분에 기원전 68년 법무관에 선임되었다.

기원전 66년, 그는 알려지지 않은 속주에서 총독을 맡은 후 로마로 돌아오자마자 속주민 착취 혐의로 고발당했다. 혐의를 입증할 증거가 미약했기에 무죄 판결이 유력했지만, 현직 법무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화려한 웅변으로 배심원들을 설득해 유죄를 선고하게 했다. 이는 마케르가 호민관 시절에 토지 개혁을 시도하고 인민의 권리를 옹호한 것에 반감을 품은 옵티마테스들을 만족시키기 위한 술책이었다. 키케로는 친구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에게 아래의 서신을 보내 자신의 이같은 생각을 밝혔다.
마케르 소송을 취급해 사람들에게서 놀라울 정도의 지지를 얻었소. 그에게 나쁜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무죄를 선고해 마케르에게 감사를 받는 것보다 유죄를 선고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었소.

그는 무죄를 호소했지만 끝내 유죄 판결을 받게 되자 가족에게 불명예가 가해지고 재산이 몰수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자살했다. 아들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마케르 칼부스는 기원전 1세기에 웅변가이자 시인으로서 이름을 날렸다.

3. 저서

그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역사서를 집필했다. 원본은 현존하지 않지만,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 등 후대 역사가들과 문법학자들이 인용한 25개의 단편이 전해진다. 그는 에트루리아에서 작성된 로마 행정관 목록 등 공공 기록에 의존했지만, 이전 역사가들의 기록을 거의 참고하지 않았다. 키케로는 그가 고대 그리스어로 기록된 출처를 무시했다고 주장했다.

그의 작품은 로마 건국과 관련된 신화적 사건부터 기원전 299년의 사건까지 전한다. 이후에도 집필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기록이 미비해서 분명하지 않다. 그는 신화를 합리적으로 해석하고자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아기 시절에 들판에 버려졌을 때 암컷 늑대가 젖을 먹였다는 것에 대해, 그는 'lupa'라는 단어의 이중적 의미에 주목하여 암늑대가 아니라 창녀가 거둬들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1] 민회에서 의결된 법안은 원로원의 승인이 필요하지 않도록 정한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