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제16대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 | |||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마르쿠스 아일리우스 아우렐리우스 베루스 카이사르 Marcus Aelius Aurelius Verus Caesar | ||
출생 | 121년 4월 26일 | ||
로마 제국 로마 | |||
사망 | 180년 3월 17일 (향년 58세) | ||
로마 제국 빈도보나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
161년 3월 7일 ~ 180년 3월 17일 (19년 10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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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2] Marcus Aurelius Antoninus | |||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3] Imperator Caesar Marcus Aurelius Antoninus Augustus | |||
한자명 | 안돈(安敦)[4] | ||
가문 |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 ||
학파 | 스토아학파 | ||
종교 | 로마 다신교 | ||
부모 | 친부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양부 안토니누스 피우스[5] 모친 도미티아 루킬라 | ||
황후 | 소 파우스티나 (145년 결혼) | ||
자녀 | 콤모두스 외 13명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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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의 도시와 나의 조국은 안토니누스로서의 나에게는 로마이고, 인간으로서의 나에게는 세계이다.[6]
흔히 철인황제(哲人皇帝)로 많이 불리는,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다섯 번째 황제이자 로마 제국 제16대 황제다. 공동 황제로는 동생 루키우스 베루스, 외아들 콤모두스가 있었다. 오늘날에는 스토아 학파의 대표적인 철학자이자 《명상록》의 저자로도 유명하다.선정(善政)을 베푼 현제(賢帝)로서 동시대인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을 뿐 아니라 후세 역사가들에게까지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7], 베스파시아누스,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등과 더불어 공화정 말기와 제정 초기의 대표적인 명군으로 평가받는다. 뛰어난 역량과 업적뿐 아니라 제국을 위해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스스로를 소진시키듯 국정에 헌신한 것으로도 칭송받는 황제이다. 아들 콤모두스가 폭군으로 단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뒤를 이어 등장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예에서 드러나듯 후세 로마 황제들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통치를 자신의 롤 모델이자 스스로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많이 언급했다.
2. 생애
2.1. 출생과 본가
어린 시절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8] |
121년 로마 제국에서도 부유하고 명망높기로 유명한 귀족 가문에서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와 도미티아 루킬라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와 이름이 같은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였으며, 그의 부모는 모두 히스파니아 조상을 둔 히스파니아계 로마인이었다. 아울러 그는 할머니 루필리아 파우스티나를 통해 트라야누스 황제와 혈연적으로 친척이었는데, 트라야누스 황제는 마르쿠스의 할머니의 어머니의 외삼촌이었다. 다시 말하면, 마르쿠스의 할머니는 트라야누스의 누나 울피아 마르키아나가 낳은 살로니아 마티디아의 딸로 혈육이 많지 않은 트라야누스 황제의 몇 안 되는 친혈육 중 하나였다.[9]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안니우스 베루스 가문은 히스파니아에서 기원했다고 해도 좋을 가문이나, 현재의 이베리아 반도 원주민의 후손은 아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조상들은 이탈리아에서 이베리아 반도로 건너온 로마인이었고, 그의 출신 가문 역시 기원전 4~5세기경 이미 로마 시민권과 함께 원로원 의원을 다수 배출한 노빌레스(평민귀족) 집안 중 하나인 안니우스 가문이었다. 즉, 포에니 전쟁 이후 히스파니아로 건너간 오래된 이탈리아의 평민 귀족 집안으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장 전부터 본가의 위상은 속주 출신 로마인 가문들보다 높았다.
안니우스 베루스 가문은 공화정 후기부터 그 이름이 등장한 노빌레스에 속한 이들이었다. 이들은 로마가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하고 이 일대에 무수한 식민도시를 건설할 시점에 건너간 이탈리아인들이었는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직계 조상은 로마의 속주 중 하나인 오늘날의 스페인 코르노바 근처의 에스페호(Espejo)에 자리잡았다. 이곳은 히스파니아 바이티카 속주의 코르두바 근처로 우쿠비로 당시 불렸는데, 현재 에스페호에서도 그렇듯이 올리브 오일 생산이 유명했다. 이곳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직계 조상은 이탈리아와 이곳을 오고 가며 올리브 농장을 라티푼디움으로 경영하고, 농장마다 대규모 올리브유 생산 설비 시설을 갖춘 사업을 꾸렸다. 안니우스 베루스 가문은 공화정 말부터 올리브 오일 생산으로 두각을 나타냈고, 명망을 얻으면서 히스파니아에 거의 거주하며, 로마를 오고 갔다. 그러다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고조부 시절부터 중앙 정계와 원로원에 그 명부가 오르내리게 됐다. 공화정 말 ~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절이었는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고조부와 증조부는 모두 원로원 의원으로 활동했고, 증조부가 되는 대(大)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는 쿠르수스 호노룸으로 알려진 명예로운 경력 중 법무관까지 지내 그 이름을 알렸고, 대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는 파트리키로 신분이 상승했다. 그리고 그때 그는 가족 전체와 함께 이탈리아에 다시 재이주하는데, 그 아들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조부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는 가족들과 함께 직계조가 살았던 이탈리아로 귀국하며, 따로 재산 대리인을 히스파니아에 배치했다. 즉,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본가는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가 등장하기 전부터 재력과 사회적 위상이 상상 이상으로 대단한 로마 귀족 명망가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할아버지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는 97년, 121년, 126년 3번이나 집정관을 연임한 사람으로, 플라비우스 왕조 시절 당시 프라이펙투스 우르비를 지낸 경력까지 있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성품이 온화하고, 인내심이 대단했는데, 높은 덕망으로 유명했다. 대략 50~60년경에 태어났는데, 본인보다 띠동갑 정도 어린 하드리아누스 황제와 우정이 대단한 친구였고, 하드리아누스의 측근이며 인척이었다. 그는 플라비우스 왕조가 등장한 뒤,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가 감찰관에 올랐을 때 다시 파트리키로 인정받았으며, 138년 거의 90살이 다 될 때까지 살 정도로 장수했다. 그는 두 번 결혼했는데, 첫 아내는 90년경 결혼한 루필리아 파우스티나였고, 사별 후 두번째 결혼으로 맞이한 후처는 비텔리우스의 딸 비텔리아 갈레리아 파쿤디나였다. 이중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할머니는 루필리아 파우스티나인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어린 시절 당시부터 자신의 할머니를 기억하고 있으며, 할아버지의 후처 비텔리아 갈레리아 파쿤디나로 추정된 여인을 "여주인"으로 불렀고, 의붓할머니 손에서 자라거나 양육된 적이 없었다고 밝혔다. 즉,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비텔리우스는 혈연이나 양육상 어떤 관계가 없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할머니는 트라야누스의 외조카손녀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황후 비비아 사비나의 이부여동생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조모 루필리아 파우스티나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몇 없는 친혈육이기도 했지만, 이보다 로마 사회에서 주목받을 점은 그녀의 출신 가문이 대단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제1차 삼두 정치를 이끈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카이사르의 아내 칼푸르니아의 친조카 칼푸르니우스 피소 프루기의 직계 후손들이 상호 결혼, 입양으로 만든 집안 출신이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고모 대 파우스티나와 함께 자신들이 왕정, 초기 공화정 시절부터 내려온 로마 귀족의 아주 오래된 후손이라는 후광을 자랑스러워 했다.
마르쿠스의 아버지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는 안니우스 베루스와 루필리아 파우스티나 사이에서 태어난 3남매 중 둘째로, 이들 부부의 장남이었다. 그의 누이는 대 파우스티나, 동생은 마르쿠스 안니우스 리보였다. 그는 법무관 재임 중인 124년에 요절했는데 2세기 당시 전형적인 명문가 귀족 출신답게 원로원 의원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로마 근교에 벽돌공장을 가진 가문의 상속녀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그녀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어머니 도미티아 루킬라였다. 하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아, 자신이 할아버지, 어머니, 고모 대 파우스티나, 숙부 리보 등에게 그가 겸손했고 남자다웠다고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담담하게 그 기억을 적었다.
마르쿠스의 고모 대 파우스티나(안니아 갈레리아 파우스티나)는 부계는 갈리아지만 모계를 통해 이탈리아 귀족가문을 이은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풀부스 안토니누스라는 젊은 원로원 의원과 결혼했다. 그리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삼촌(숙부)인 마르쿠스 안니우스 리보(1세)는 자신의 형과 달리 아버지처럼 정규 집정관까지 지낸 거물급 인사였다. 마르쿠스의 사촌으로 안니우스 리보의 아들인 마르쿠스 안니우스 리보(2세)[10] 역시 161년에 집정관을 지냈다. 또 그는 친사촌 마르쿠스가 황제가 된 이후 루키우스 베루스를 중심으로 한 파르티아 전쟁 당시 수행단의 핵심인사 중 한 명이 되기도 했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루키우스 베루스의 신임을 받았다.
이런 그의 본가는 마르쿠스 안니우스 리보 2세의 아들 마르쿠스 안니우스 플라비우스 리보 시절에도 위세를 이어나갔는데, 마르쿠스의 5촌 조카가 되는 이 사람은 베루스 가문의 뿌리인 히스파니아에서 태어났지만 원로원 의원이었고, 204년 집정관을 지냈다.
1세기 중반부터 3세기 초까지 대단한 가문의 역사를 가진 안니우스 베루스 가문은 이탈리아에 터를 잡은 귀족가문임에도 히스파니아와 인연을 놓지 않았다. 그래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본가는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히스파니아 일대에 엄청난 규모의 올리브 농장과 올리브 기름 정제 시설을 가지고 있었던 부유한 집안이었고 그 영향력은 이 일대에서도 꾸준했다고 한다.
3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젊은 나이에 요절했는데, 이때 할아버지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는 할아버지가 어린 손자의 정치적, 법적 후견인이 되는 로마 귀족들의 관례에 따라 손자를 형식상 입양했다. 따라서 마르쿠스는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와 함께 하드리아누스를 알현하면서 황제로부터 그의 총명함과 진리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 명문가 귀족 자제다운 예의바름 등을 사랑받았다.
여러 번의 면담을 통해 당시 황제였던 하드리아누스는 어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상당히 높게 평가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친구의 손자를 안니우스 베리시무스(Annius Verissimus)[11]’라고 부르며 자신의 친손자처럼 예뻐했다. 그래서 황제는 그가 6살이 되었을 당시, 훗날 양자이자 후계자로 삼게 되는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에게 어린 마르쿠스를 양자로 삼으라고 강요했다.
2.2. 양자 입적
136년 하드리아누스가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를 자신의 양자이자 공식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때 마르쿠스는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의 딸 케이오니아 파비아와 약혼했다. 따라서 어린 마르쿠스는 이때부터 로마 정계의 전면에 차차기 황제 후보로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2년 뒤인 138년 예비 장인인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가 판노니아에서 폐결핵으로 요절했다. 따라서 하드리아누스는 명망높은 갈리아계 원로원 의원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를 자신의 양아들로 맞아들이고 후계자로 삼았다.하드리아누스의 새로운 후계자가 된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는 어린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의 고모부였는데, 그가 바로 로마 제국의 제15대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였다. 이때 하드리아누스의 명령에 따라 안토니누스는 자신의 처조카인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와 죽은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의 어린 아들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를 양아들로 입적했다. 따라서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는 오늘날 잘 알려진 이름인 마르쿠스 아일리우스 아우렐리우스 베루스로 개명했다.
하드리아누스가 사망하고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뒤를 이어 황제가 되자 그의 결정으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케이오니아 파비아의 약혼이 파기되었다[12]. 이때 안토니누스는 하드리아누스 생전부터 차차기 황제로 확정된 양자이자 처조카인 마르쿠스를 자신의 딸 안니아 갈레리아 파우스티나, 즉 소 파우스티나와 약혼시켰으며, 두 사람은 어린 파우스티나가 결혼 적령기에 접어든 직후 결혼했다.
2.3. 즉위와 고난의 연속
신격화된 피우스가 죽은 뒤 원로원에 의해 국정을 떠맡게 된 마르쿠스는 동생에게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베루스 콤모두스라는 이름을 주고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수여하여 제국의 공동 통치자로 삼았다. 그들은 동등한 위치에서 제국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제국을 다른 사람과 공동으로 통치하면서 로마 제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두 명의 황제를 갖게 되었다.
《로마 황제 열전》
유례 없는 23년 간의 평온한 통치기를 보낸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161년 3월 6일 로마 근교에서 사망하자, 그의 두 아들 중 장남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뒤를 이었다. 하지만 이때 40세에 접어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황제 즉위를 요청한 원로원에게 본인과 함께 동생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의 즉위도 요청했다. 따라서 원로원은 최초로 40세의 마르쿠스와 31세의 루키우스 형제에게 황제 취임을 요청했고, 두 형제는 관례대로 먼저 사양한 뒤 재요청을 받고 제위를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공동 황제에 올랐다.《로마 황제 열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즉위 전까지 훌륭한 교육을 받았고, 일찌감치 제왕 교육을 받아왔던 사람이었다. 또 그는 안토니누스 피우스 시대 동안 사실상 공동 황제로 있으면서, 엄청난 양의 서신을 손수 처리하고 행정 업무도 대행했다. 그래서 마르쿠스는 모든 로마인들에게 유능한 행정가이자 준비된 황제로 평가받았는데, 문제는
선제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친아들 두 명이 모두 자녀없이 요절했고, 장녀마저 결혼 직후 죽은 탓에 즉위 이전 양자로 맞이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루키우스 베루스를 자신의 친아들처럼 아끼고 사랑했다. 안토니누스는 하드리아누스와 양자 입적 전 약속을 했음에도, 일찍부터 마르쿠스 및 루키우스와 같이 살았다. 이때 그는 마르쿠스와 루키우스 모두에게 명예로운 공직 경험 코스를 밞도록 했고, 당대 최고의 명사들을 로마 황궁으로 초빙해 두 사람을 위한 제왕 교육을 진행했다. 아울러 안토니누스는 늘 자신의 여행지에 두 아들을 데리고 가 옆에 끼고 살 정도로 아들 사랑이 대단했다. 그 결과, 두 사람은 즉위 이전까지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만 생활했고, 모든 행정 경험도 로마와 이탈리아에 국한되었다. 즉,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루키우스 베루스 모두 로마 황제의 중요한 책무 중 하나로 여겨진 군무 경험이 현저히 부족했다. 물론 안토니누스의 목가적이고 가정적인 생활과 교육 방식은 원래부터 친형제 같았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루키우스 베루스의 형제간 우애를 돈독히 만들었고, 두 사람이 즉위 후 훌륭하게 내치를 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즉위 이전 준비된 황제라고 평가받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그의 동생 루키우스 베루스의 재위 첫 2년간은 제국 전역에서 위기로 가득했다. 수도 로마를 가로질러 흐르는 테베레 강에서는 대홍수가 났고, 시지쿠스 일대에서는 지진이, 갈라티아 일대에서는 가뭄이 발생했다. 또 브리타니아 속주에서는 반란이 일어났고, 국경 밖에서는 게르만족이 라인강을 건너온 뒤 제국의 국경을 위협했다. 이런 골치아픈 상황 속에서 잠잠하던 파르티아까지 그를 괴롭혔는데 젊고 야심많은 파르티아의 왕 볼로가세스 4세가 아르메니아와 시리아를 침공한 것이다. 따라서 마르쿠스는 내치를 사실상 전담하다시피하면서 파르티아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동생 루키우스를 동방으로 보낸 뒤, 자신은 더 골치아픈 서방 전선으로 직접 달려가야만 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마르쿠스는 즉위 당시 황제의 무거운 책임을 조금이라도 나누고 좀 더 효과적으로 광대한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 동생이자 하드리아누스의 첫 번째 후계자 케이오니우스의 친아들인 루키우스 베루스를 공동 황제로 삼았다. 두 사람은 친형제가 아니었지만 우애가 두터웠고, 성격도 판이하게 달랐지만[13] 처음으로 시도된 이 발상은 효과적이었다. 두 사람은 즉위 후 얼마 안 가 불어닥친 자연재해를 효과적으로 해결했고, 동시다발적으로 터지기 시작한 도나우 전선의 국방 문제를 슬기롭게 대처했다.
또한 원로원의 걱정[14]과 달리 동생 루키우스 베루스는 공동 황제로서 나름 내치와 외치를 효과적으로 수행했다. 하지만 루키우스는 공동 황제였음에도 즉위 직후부터 격무에 시달리는 형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짐을 크게 덜어주지는 못했다. 여기에 더해 본인보다 건강했던 루키우스가 일찍 요절해버리면서 오히려 재위 기간 동안 마르쿠스는 건강치 못한 몸 상태로 동분서주해야만 했다. 하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본인이 득본 건 크게 없었던 공동 황제 발상은 선례를 남겼다. 따라서 후기 로마 제국은 황제를 여럿 두는 공동황제 제도를 통해 산적한 난제에 유기적으로 대처하게 된다.
2.4. 루키우스 베루스와 파르티아 전쟁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동생인 공동 황제 루키우스 베루스는 이 당시 미혼인데다 금발머리와 파란눈을 가진 잘생긴 남성이어서 로마 여성들에게 인기가 상당히 많았다.[15] 하지만 원로원은 루키우스 베루스를 예의바르고 착한 사람으로 평가하면서도 즉위 전부터 낙천적이고 쾌활한 성격 탓에 지나치게 자기 탐닉이 강하고 싱글 생활을 즐기는 경박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는 형 마르쿠스를 대신해 동방으로 향한 이후, 연회를 즐기고 유람 여행에 치중하는 듯 보였다.그러나 이런 느긋하고 화려한 동방행에도 불구하고 루키우스 베루스는 현명하게도 자신에게 부여된 책무는 성실히 수행했다. 그는 자신을 보좌하는 장군들에게 시리아와 카파도키아에 주둔 중인 로마 군단이 훈련도 안 되어 있고, 기강도 해이해진 것을 지적하면서 기강을 잡고 철저한 훈련으로 군을 재편하도록 했다. 이때 마르쿠스는 동생 루키우스의 파견과 동시에 지시내린 강공책과 신속한 승리를 위한 전략을 수립했다. 그리고 공동 황제 신분인 루키우스는 형의 전략을 내팽겨치지 않고 잘 따랐다. 따라서 루키우스의 부관으로 임명된 스타티우스 프리스쿠스는 아르메니아를 침공해 수도 아르탁사타를 함락한 뒤 불태웠으며, 냉혈한이자 엄격한 훈련교관으로 유명한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는 황제의 명령을 수행해 기강이 해이해진 동방 속주 군단병들을 혹독한 훈련으로 조련시킨 뒤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해 순식간에 에데사, 셀레우키아 등을 연이어 함락시켰다.
이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루키우스 베루스는 나란히 개선식을 거행했다. 이때 파르티아 전쟁에서 돌아온 병사들은 전리품과 함께 셀레우키아에서 시작된 전염병도 가져왔는데 이 전염병은 불길처럼 번져 167년에는 주요 거주지인 로마가 전염병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따라서 로마군은 애써 점령한 셀레우키아를 포기하고 철수해야만 했다. 이러한 종류의 전염병은 몇 세기 만에 처음 발발한 것이었고, 콤모두스의 치세 중에도 빈번히 발생했으며, 10년 후까지도 창궐했다. 아우렐리우스 황제 역시 이 병으로 죽었다고 해서 안토니누스 역병이라고 불렸는데, 이 병의 정체는 천연두 혹은 홍역으로 추정되며, 총 사망자 수는 400만 명에 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부터 로마가 혼란에 빠지기 시작하면서 국방력이 약화된 주요 이유 중 하나로 이 '안토니누스의 역병'을 꼽는 사람들도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군에서 병사한 인원을 메꾸기 위해 노예, 검투사, 신분 세탁을 빌미로 강도나 산적까지 모집했고 시민들의 부담을 덜기 위해 장례 비용을 지원하고 거리의 시체를 치웠으며 농장 지대와 도시 인구는 이민자들로 채웠다. 해방된 노예의 아들들을 의회의 공석에 앉히기도 했다.
2.5. 게르만족의 이탈리아 침공과 동생의 요절
셀레우키아에서 시작된 전염병은 로마군의 셀레우키아 철수 당시, 소아시아를 시작으로 이집트, 그리스, 이탈리아까지 유행하더니 제국의 중요한 방어선인 게르마니아 일대의 라인강과 도나우 강 방어선까지 번졌다. 여기에다 도나우 전선의 경우, 파르티아 전쟁 당시 대규모 병력이 동방 전선으로 차출되면서 방어인원이 줄어든 상태에서 전염병까지 번져 군단병들의 컨디션을 떨어뜨리고 사망자까지 발생시켰다. 이런 로마의 위기 상황은 당연히 도나우강 일대의 게르만족들인 마르코만니족, 콰디족 등에게는 하늘이 내린 기회였다, 따라서 이들은 풍요롭고 날씨도 좋은 로마 제국을 대규모로 침공했다.(1차 마르코만니 전쟁)로마 제국을 침공한 게르만 군대들은 헐거워진 도나우 방어선을 뚫은 이후, 도나우 방어선의 보호를 받고 있었던 라이티아, 노리쿰, 판노니아 속주를 휩쓸면서 약탈과 살인을 자행했고, 알프스 지방을 넘어가더니 본국 이탈리아 북부 지방까지 쳐들어와 아드리아해의 머리 부분에 자리잡은 항구도시 아퀼레이아[16]를 포위했다. 아퀼레이아 포위전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로마인 모두에게 충격이었는데, 이런 국가적 위기는 마리우스 시대 때 게르만계 킴브리족과 테우토네스족의 이탈리아 침공, 즉 킴브리 전쟁 이후 처음으로 발생한 사건이었다. 따라서 로마에서 기근이 발생해 이 문제로도 골치를 썩고 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급히 원로원을 소집해 자신과 동생 루키우스를 이탈리아 북부 국경 지역으로 보내달라고 선언해야만 했다.
당시 로마 제국은 갓 끝난 파르티아 전쟁과 연이은 자연재해로 선제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남긴 막대한 유산과 그 국고가 바닥나고 있었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원로원에게 이 문제를 불평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 그는 세금 인상을 배제한 뒤,[17] 상징적인 의미로 자신이 솔선수범해 포로 로마노와 황궁 내 황금 식기들과 값비싼 고급 예술품, 값나가는 물품들을 내다 팔아 텅 비어버린 국고를 채웠다. 그리고 그 어떤 황제도 시도하지 않았던 대규모의 노예 해방을 지시해 해방된 노예, 검투사들까지 징집, 본국 방어를 위한 병력으로 충원했다.[18] 또 달마티아의 화적때들을 병사로 징병해서 그리스 도시들을 방어하도록 했다. 동시에 마르쿠스는 자신의 이름으로 이탈리아 북부 도시들에 전령을 보내 각 도시들을 요새화시켰으며, 알프스 산맥을 지나가는 통로들을 봉쇄시키고, 도나우 강 일대에서 건너온 침략자들의 후방을 교란시키기 위해 로마에 우호적인 게르만족들과 저 멀리 있던 스키타이족까지 용병으로 고용해 서둘러 아퀼레이아로 향했다.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아퀼레이아로 올라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위기에 처한 아퀼레이아를 탈환한 뒤, 계속 진격해 노리쿰과 판노니아까지 완벽하게 되찾았다. 이런 로마군의 반격에 당황한 적군은 급히 휴전을 요청했는데, 완벽히 침공자들을 박살내려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그 요청을 마지못해 수락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파르티아 전쟁 이후 지속적으로 로마군을 괴롭히던 전염병 탓에 아퀼레이아를 지키도록 편성된 수비대가 거의 전멸 직전에 처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마르쿠스는 개운치 못한 휴전 요청을 받아들이고 동생 루키우스와 함께 로마로 돌아갔다. 하지만 169년 로마 회군 도중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동생이자 장녀 루킬라의 남편인 공동 황제 루키우스 베루스가 뇌졸중으로 급사했다.[19] 당시 39세에 접어든 건강한 동생의 예기치 못한 죽음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충격이었고, 그는 평소 동생을 무척 사랑했기 때문에 절망했다. 그러나 이런 슬픔 속에서도 마르쿠스는 이제 유일한 황제였고, 로마 귀환 직후부터 산적한 국내외 문제들을 홀로 책임져야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169년 10월 10일 막내 아들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카이사르가 귀에 난 악성종양 제거 수술을 받은 직후, 수술합병증으로 7살의 나이에 급사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소 파우스티나 부부는 평소 막내 아들을 무척 아끼고 있었고, 콤모두스 역시 어린 동생을 무척 사랑했던 터라 황실 식구들은 매우 슬퍼했는데, 하필이면 콤모두스 남동생이 요절한 날이 로마 제국의 국가적 축제 기간 중 하나인 유피테르 신을 기리는 국가 축제 중이었다. 그래서 황제와 원로원은 어린 황태자의 장례식 기간을 국가적 애도기간조차 가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이런 속사정으로 주변에서는 (심지어 원로원 의원들과 민중들까지) 침울한 상태에서도 슬픔을 억제하며 국가축제를 주최하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에게 "상중인데 축제를 주관하시면 (저희들이 황제께) 민폐가 되니 주관행사를 중단해달라."고 요청한 일도 벌어졌다. 그럼에도 마르쿠스 황제는 평소부터 감정을 최대한 억제하면서, 국가적 축제를 개인적 일이라는 이유를 들어 중단은 없다며 거절했으며 끝까지 국가 행사를 모두 치른 다음에야 어린 막내아들의 죽음을 슬퍼했다고 한다.
2.6. 도나우 전선에서의 게르만족과의 전쟁
루키우스 베루스의 요절 직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홀로 모든 현안을 떠안은 채 도나우 강 일대를 위협하던 마르코만니, 콰디, 이아지게스족 뿐만 아니라 라인 강을 침공하기 시작한 카티족, 벨기에 일대를 침공해 약탈하기 시작한 카우치족을 모두 상대해야만 했다. 북아프리카에서도 마우레타니아 토착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평화롭던 히스파니아 속주까지 침공했다. 여기에 더해 황제령이던 이집트에서도 그 일대 유목민들이 나일강 삼각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다행인 건 마르쿠스의 명령을 받은 아비디우스 카시우스가 신속히 이집트 반란을 진압해줬다는 점이지만, 이 무렵 마르쿠스는 최대 걱정거리였던 도나우 강 일대의 게르만족들이 또 다시 위협을 가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다시금 전쟁터로 향해야 했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맏사위, 콤모두스의 매형, 루킬라의 남편 폼페이아누스 |
이런 상황에서 169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동생 루키우스 베루스 생전부터 형제의 황제 군사고문을 맡고 있던 132년생의 37살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를 홀로 된 장녀 루킬라의 새남편으로 낙점해 두 사람을 황제 명령으로 결혼시켰다. 폼페이아누스는 31살의 나이에 파르티아 전쟁에서 엄청난 군공을 세우고, 뛰어난 행정 능력, 병참 관리 능력, 외교술 등을 선보인 최고의 엘리트였기에 이는 건강이 안 좋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급사할 경우, 어린 콤모두스 안위에 있어서도 아주 중요한 정략혼이었다. 그래서 마르쿠스 황제는 결혼을 완강히 거부하면서, 자신과는 격이 맞지 않는다고 주장한 장녀 루킬라와 황후 소 파우스티나의 반대에도 결혼을 강행시켰다. 이 결혼 이후, 마르쿠스는 판노니아 인페리오르 총독이면서 판노니아 사령관을 맡고 있는 폼페이아누스에게 더 큰 힘을 실어주기 위해, 잠정 후계자를 뜻하는 '카이사르' 칭호를 부여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폼페이아누스는 루킬라와 결혼하면서 황족으로 많은 명예와 특권을 받은 것도 부담스러워 했을 정도로 겸손하고, 권좌에는 야심을 품은 적도 없어 이 조치가 어린 콤모두스 미래에 큰 위협이 될 것을 주장하면서 완곡히 거절했다. 하여 마르쿠스 황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맏사위가 콤모두스를 도울 수 있는데 필요한 여러 영예를 주고, 자신과 사위가 최일선에서 담당할 마르코만니 전쟁에 필요한 각종 지원을 해줬다.[20]
170년 갈리키아 지방 동부에 살고 있던 코스토보키족이 사르마티아족을 설득해 동맹을 맺고, 도나우 강 하류를 건너더니 모이시아 일대를 약탈한 후 발칸 반도로 남하해 그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며 그리스까지 쳐들어왔다. 이들은 부유한 그리스 일대를 휩쓸면서 남쪽의 아티카 반도까지 짓밞고, 쫓기듯 도망치기 전까지 엘레우시스의 신비의 신전까지 약탈했다. 따라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격무에 시달리면서 쉬지도 못하고 이 사태의 원인이기도 한 도나우 전선으로 직접 향해야 했다. 169년 가을 로마를 떠나 추운 도나우 전선에 도착한 황제는 오랜 방어에 지친 군단병들을 위로한 뒤, 도나우 국경 지대에 남아 가장 큰 위협인 마르코만니족, 콰디족, 이아지게스족들과의 전투를 치렀다. 이때 로마군은 마르쿠스와 그를 보좌하는 장군들의 계획에 따라 도나우 강 도강 후 먼저 콰디족을 치고, 마르코만니족을 공격한 뒤 마지막으로 이아지게스족을 박살냈다. 이때 황제는 이들의 본거지까지 공격해 그들이 잡아간 로마군 포로들과 로마 민간인 포로들을 되돌려 받았다. 동시에 전쟁 중에도 이민족들의 침입으로 폐허가 된 속주들을 복구했으며, 16km나 되는 도나우 강 북쪽 제방을 새로 보수하고 그 일대의 주민들을 소개시켜 도나우 강 일대를 안정화시키는 데 주력했다.
그는 전임 황제인 안토니누스 피우스 시절에 태평성대가 지속됨에 따라 약해진 로마군의 체질도 다시 개선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본래의 인품과 성격답게 워낙 위기가 많았던 상황에서 내치에만 신경쓰지 않고, 로마군 최고 사령관으로서 앞장서 직접 도나우 전선으로 향했던 황제였다. 격무에 시달리던 황제가 최전선으로 많이 달려나갔고 직접 이민족들과 전쟁을 치르면서 체질 개선이 이루어졌는데, 마르쿠스의 이런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그의 실전 경험과 헌신으로 이뤄진 로마군의 개혁은 그가 죽고 난 뒤, 후일 부적격자로 판명된 아들 콤모두스가 즉위해서 나라를 개판 5분 전으로 만들었어도 국경선을 튼튼하게 만들었으며, 로마 제국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던 외적의 침입도 거의 없게끔 했다. 아울러 마르쿠스가 국경선 방어를 위해 배치한 장군들은 콤모두스가 나라를 내팽개친 상황에서도 반란을 일으키지 않고 다 제자리를 지켰다.[21] 실제로 중앙정부와 황제를 인정하지 않고 대규모 내란이 일어난 것이 콤모두스가 측근에게 암살당한 뒤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나름대로 자신의 사후를 대비한 황제이기도 했다.
2.7.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반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제국의 동방 방어와 안정화를 위해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를 시리아 속주 총독에 임명해 파르티아의 또 다른 도발과 동방 속주 내 소요를 통제케 했다. 신임 총독 가이우스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는 시리아의 오래된 헬레니즘 시대 도시 키루스 태생으로 대략 130년 무렵 태어났는데, 시오노 나나미의 주장과 달리 최소, 부친 헬리오도루스[22] 대에 이미 로마 고위 관료층에 편입된 기사계급 가문 출신이었다. 그의 어머니 율리아 카시아는 아우구스투스의 후손 중 한 명인 유니우스 실라누스의 딸 유니아 레피다의 후손이었으며, 장인 역시 안토니누스 피우스 시대 때 명성을 날린 변호사였다.가이우스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는 후일 사건의 영향으로 흔히 냉혈한이자 상당히 거친 사람으로 묘사되긴 하지만 동시대 인물로 원로원 의원, 속주 총독, 군단장을 두루 거친 디오 카시우스는 오히려 그를 매력있고 책임감이 뛰어난 인물로 묘사했다. 실제로 동방에서 반란을 일으키기 직전까지, 후대의 이야기와 달리 카시우스는 동방에서 냉혹하기보다는 꽤 인망이 있으면서도 엄격한 장군에 가까운 사람으로 평가됐다. 그리고 이런 세간의 평처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나 루키우스 베루스 역시 그를 바라봤는데, 두 황제에게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는 유능한 장군으로 그의 엄격함은 전형적인 군단장이자 유능한 훈련교관, 행정가로 인식됐다.
먼저 언급한 것처럼 카시우스는 젊은 시절 다른 속주 태생 현지인 군인들과 달리, 로마 최고위층 집안에서 태어나 최고 수준 교육을 받았으며 경력 역시 훌륭했다. 그는 대개의 귀족 자제들보다 앞서, 황제와 황실의 비호 아래 관직 생활을 한 아버지 곁에서 여러 경험을 쌓았다. 그래서 일찍부터 이집트와 여러 동방 속주들을 오가며 군대, 행정 업무를 통달했는데, 시리아 속주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고, 머리 회전이 뛰어나, 동방 일대의 정세 파악도 상당히 능숙했다. 따라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동생 루키우스 베루스를 돕는 장군 중 한명으로 파견돼, 동방 일대의 병사들을 훌륭히 조련시킨 다음 파르티아 전쟁을 진두지휘했다.
파르티아 전쟁 (161년 ~ 165년) 기간 동안, 카시우스는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공격해 에데사를 시작으로 니시비스, 체시폰, 셀레우키아까지 함락시켰으며 동방 속주 일대의 치안 문제까지 해결했다. 그래서 그는 두 황제의 신임 아래 동방 전선에서의 최고의 전문가로 명성을 날리게 된다. 이후에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를 크게 신임했고, 그를 시리아 총독에 임명해 사실상 동방에서의 최고 책임자로 대우했다. 따라서 마르쿠스의 이 인사 조치는 동방 속주를 안정화시켰는데, 새 시리아 총독이 워낙 유능하고 책임감이 강하며 현지를 잘 알던 사람인 만큼 시리아 속주에 주둔 중인 로마군의 기강 유지에도 큰 효과를 이끌어냈다. 아울러 이 장군은 게르만족과의 계속된 전쟁, 대전염병 등으로 정신없던 황제에게 협력한 만큼 동방 일대에서 소요가 발생할 경우, 마르쿠스의 명령에 따라 상당히 빠른 조치들을 취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수도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학문은 물론 군사와 행정과 정치에까지 두루두루 빼어나 진급가도를 달리고있었던, 오늘날로 치면 그야말로 엄친아의 표상이었던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는 그야말로 당대 로마군의 떠오르는 정치적 신성이자 슈퍼스타였다.
마르코만니 전쟁이 진행되고, 이아지게스인과 사르마티아인, 코스토보키아인과의 전쟁이 계속될 무렵인 169~175년 동안, 카시우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진심으로 아끼고 신뢰한 제국 내 속주 총독이 되었다. 그런데 콰디족과의 전쟁을 재개한 175년, 황제가 가장 믿었던 장군이었던 시리아 속주 총독 아비디우스 카시우스가 스스로 황제를 자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도나우 강 전선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갑작스럽게 붕어했다는 거짓 보고를 그대로 믿고 반기를 든 것인데, 동방 일대 군대에서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를 황제로 추대했다고 한다.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황제 선포는 대략 175년 5월 3일 전에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러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에 의하면, 이 당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건강은 심각할 정도로 악화된 상태였고 카시우스는 13살에 불과한 콤모두스를 보필할 몇 안 되는 이 중 한명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런 정황을 근거로 후세 호사가들은, 이 사건의 배후에는 콤모두스의 어머니인 황후 소 파우스티나가 있었다고 주장한다[25][26] . 이들이 전한 파우스티나 배후설은 두 가지 버전이 전해진다. 그중 첫번째 설에 의하면, 황후가 남편의 뒤를 이을 자를 낙점하면서 이를 시험하기 위해 거짓 정보를 흘려 카시우스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또 다른 설에 따르면, 소 파우스티나가 남편의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됐다는 말을 듣고, 첫째 사위 폼페이아누스와 함께 황실을 도울 수 있는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에게 "황제가 곧 붕어할 것 같고, 아들 콤모두스가 아직 어리므로 제위를 이어달라"고 거짓정보를 보내 이를 부추겼다고 한다. 여담으로 카시우스의 반란 소식을 들은 그의 스승 헤로데스 아티쿠스는 카시우스에게 미쳤느냐! 라는 단 한마디만 적힌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27]
무엇이 진실인지 몰라도, 호사가들의 주장처럼 소 파우스티나가 개입했는지 여부는 불명확하다. 하지만 그가 처음 황제를 선포할 당시 그 여파는 예상 외로 파급력이 상당했다. 카시우스는 이탈리아의 곡물을 제공한 이집트를 장악하기 위해 군대를 움직였는데, 당시 이집트 장관 칼비시우스 스타티아누스가 이에 호응해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에 옹호적인 선포문을 발표했다. 따라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정복 직전이던 콰디족, 이아지게스족과 서둘러 평화 조약을 체결한 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황후 소 파우스티나와 어린 아들 콤모두스를 발칸 반도에 위치한 시르미움(오늘날의 미트로비카)으로 부른 다음 동방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발했다. 그러나 황제 가족이 동방으로 출발하기 전, 이집트는 예상 외로 카시우스를 지지하지 않아 사태가 확산되지 않았으며, 원로원은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해 그를 반역자로 규정하면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대한 신임을 재확인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황제와 원로원은 카시우스에게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힌, 카파도키아 속주 총독 푸블리우스 마르티우스 베루스[28]를 진압군 사령관에 임명했다.
마르티우스 베루스가 군을 움직이기 시작하고, 카시우스에 대한 여론이 급격히 악화되면서[29] 동방 속주 내 정황도 불리해지자, 카시우스를 따르던 병사들 역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카시우스는 휘하 백인대장에게 살해됐는데, 이때 차남 아비디우스 마이키아누스도 살해됐다. 이후, 카시우스 부하들은 항복하면서 반란을 일으킨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머리를 가지고 찾아왔다. 이렇게 3개월 6일 만에 반란은 진압됐는데, 카시우스의 수급을 진상받은 마르쿠스는 침통해하더니 진짜가 맞는지 확인도 안하고 물리치고는 로마인에 걸맞은 정중한 장례를 치르고 묘를 만들어주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때 황제는 반란 관련자의 처벌도 낮추고 색출도 멈추는 등 더 이상 피를 보지 않는 방향으로 사후 처리 방침을 정했다. 따라서 시리아에 입성한 마르티우스 베루스는 카시우스가 주고 받은 모든 서한들을 불태웠으며, 반란에 합류한 이들에 대한 과도한 피의 보복 역시 황제의 명령에 따라 하지 않았다. 이는 카시우스의 자녀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됐다. 그래서 장남 아비디우스 헬리오도루스는 목숨을 건져 겨우 추방형에 처해졌으며, 카시우스의 딸 아비디아 알렉산드라 부부는 반란과 무관했던 그녀의 삼촌에게 보호받는 형태로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이 사건 후, 마르쿠스는 계획대로 동방 속주로 행차했다. 이는 카시우스의 반란이 자신이 붕어했다는 거짓 보고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동방 속주에 황제가 건재함을 알려서 정세를 안정시키고자 했기 때문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동방 속주로 향하면서 자신의 건재함을 보여주고 다시 한번 충성 서약을 받았으며, 불충하고 부패한 관리들을 색출했다. 이때 황제 가족과 수행원들은 그리스, 소아시아, 시리아, 이집트에서 모두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소아시아로 가는 동안 그가 30년 동안 유일하게 사랑한 여성인 황후 소 파우스티나를 잃었다. 가정적인 사람이었고 애처가였던[30][31]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동방 속주에서 백성들과 군단병들로부터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환호와 충성을 몸소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믿었던 장군과 가장 사랑했던 아내의 죽음으로 크게 울적해했고 고독에 빠졌다. 따라서 176년 황제는 슬픔에 빠진 채 로마로 귀환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로 돌아온 직후, 두 가지를 결정내렸다. 하나는 현지와의 유착을 방지하기 위해 속주 총독을 임명할 때 출생지인 속주는 절대 맡기지 않겠다는 결정이었고, 다른 하나는 혹시 모를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이때까지는 어떤 결점도 없었던 외아들 콤모두스를 상속자 겸 공식 후계자로 선정하는 결정이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 해에 게르마니아와 사르마티아에서 거둔 승리를 기념하는 개선식을 치렀다, 이때 밑에서 언급되는 청동기마상 제막식도 거행했다. 하지만 이런 기쁨도 잠시였는데, 황제는 또 다시 쉬지 못하고 178년 도나우 전선으로 향해야 했다. 왜냐하면 제3차 마르코만니 전쟁으로 잘 알려진 콰디족, 마르코만니족 연합군의 대규모 저항으로 시작된 충돌 때문이었다.
마르쿠스는 아테네에 와서 신비에 입문했을 때 그는 아테네인에게 명예를 부여했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이익을 위해 모든 지식 분야에 있어서 아테네에 교사들을 세웠고 이 교사들에게 연봉을 지급했다. 그리고 로마로 돌아와서 사람들에게 연설했는데 그가 다른 무엇보다도 여러 해를 부재했다고 말하는 동안 그들은 "8"이라고 외치고 이를 손으로 나타내기도 했는데 그들이 연회에 쓸 금 조각을 그만큼 받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는 웃으며 마찬가지로 8을 말했고 나중에 그는 그들에게 각각 800세스테르케(세스테르티우스)를 나누어주었는데 이는 그들이 전에 받은 것보다 많은 액수였다. 그는 이 일만 했을 뿐 아니라 하드리아누스의 15년을 제외하고 45년 동안 황제의 사금고나 공공금고에 진 모든 이의 빚을 탕감했다. 그리고 이 채무와 관련된 모든 문서를 포럼에서 불태우도록 명했다. 그는 또한 지진에 의한 끔찍한 파괴로 고통받은 스미르나를 포함한 많은 도시에 돈을 기증했으며 도시를 재건하는 임무를 근위병 계급의 의원에게 맡겼다. 그래서 나는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이 그가 개방적인 황자가 아니었다는 이유로 그를 비난하는 것을 듣고 놀랐다. 일반적으로 그는 실로 가장 경제적이었지만 내가 말했듯이 그는 아무에게도 부담금에 의한 짐을 지우지 않았고 일반적인 요건을 넘는 매우 큰 금액의 지불을 강요당했음을 알았음에도 한 번의 필요한 지출도 결코 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디오 카시우스, 72.31~32
디오 카시우스, 72.31~32
2.8. 제2차 마르코만니 전쟁과 사망
178년 다시 도나우 전선으로 달려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건강은 이미 심각할 정도로 악화된 상태였다.[32] 마르쿠스의 도나우 전선 복귀에 이어 아들 콤모두스도 뒤를 따라 도나우 전선으로 왔지만, 평소 책임감 강한 그는 젊은 아들에게 일을 맡기지 않았다. 황제는 자신을 괴롭히던 지병들을 참으면서 그를 진심으로 따르고 충성을 맹세하던 로마군을 이끌고 콰디족과 마르코만니족들의 거센 저항을 막아냈다. 황제는 이때 아픈 몸을 이끌고 바바리아(바이에른) 지방의 레겐스부르크 일대를 시찰한 뒤 새로운 병영 기지 카스트라 레기나를 건설했고, 훗날 벌어질 침공을 대비해 방어선을 정비하며 항구적인 방어를 위해 점령한 지역을 두 개로 나눠 각각 마르코만니아, 사르마티아 속주로 이름을 지어 신설할 계획이었다고 한다.아울러 그동안 전쟁으로 피폐해진 다키아, 모이시아, 라이티아, 판노니아, 달마티아, 갈리아 속주에 정복한 게르만인들과 포로들을 이주시켜 로마 주민으로 정착시키는 데 주력했다. 이 조치는 본국 이탈리아 북부에서도 이뤄졌다. 포로로 잡힌 게르만 부족들은 이전까지는 노예로 팔리거나 광산에서 강제노동을 해야 했기에 마르쿠스 시대 동안 벌어진 이런 시혜책들은 그들 입장에서도 이례적이었다. 자유를 얻는 조건으로 로마 영내로 향한 게르만인들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정책에 따라 제국 방어선 내 속주들과 이탈리아에 항구적으로 정착해 로마 시민으로 동화되어 완전히 편입되었다. 다만 이탈리아 반도로 옮겨진 게르만족들만은 후방에서의 농사꾼 생활에 전혀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다가 반란을 일으켜서 다시 진압해야 했다. 즉 이탈리아 반도에 정착시키려는 정책은 대실패로 끝나고 즉시 중단되었다.[33] 따라서 마르쿠스의 게르만족 대규모 영구 정착 정책은 부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이런 까닭에 그가 죽은 뒤 로마 제국은 그가 정착시킨 게르만계 로마인들을 지속적으로 로마군으로 충원시킬 수 있었고, 그 일대의 사회와 경제력을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물론 철인황제가 처음 시도한 것은 아니고 이전부터 여러 황제들이 시도한 정책을 계승한 것이었다.[34]
이런 결정들을 도맡았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180년 3월 17일 전염병에 걸려 자신이 설치한 병영 기지 빈도보나(오늘날의 오스트리아 빈)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붕어했다.
떠오르는 태양한테 가라. 내 태양은 지고 있다.
3. 평가
3.1. 황제로서
당대부터 현재까지 역대 로마 황제 중에서 가장 고결한 황제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실천하는 스토아 철학자이기도 했다. 따라서 당대 사람들도 인정했듯이 그는 위기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을 하얗게 불태우면서 나라를 위해 헌신했던 명군으로 추앙받았다.유례없는 태평성대를 보낸 선제와 달리 그는 재위기간 동안 군사령관이자 황제로서 힘든 삶을 보내야 했다. 어린 시절부터 철학을 논하고 사색에 잠기는 것을 좋아하던 사람이 재위기간 내내 이민족과의 전쟁에 시달렸고, 황제가 된 이후 계속해서 전쟁터에 나가야 했다. 당시 로마 제국에는 유행병이 퍼져서 제국은 혼돈으로 빠지고 있었다. 따라서 로마군 최고사령관이었던 마르쿠스는 가장 치열한 전장이었던 도나우 강 방어선에서 고된 국방 문제까지 앞장서서 해결했다. 이런 격무들은 본래부터 건강치 않았던 그를 악화시켰으며, 끝내 로마 황제 최초로 전장에서 황제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다 도나우 전선의 빈도보나 병영에서 삶을 마감하게 만들었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헌신과 노력은 위기에 빠진 제국의 상황을 최악으로 떨어지지 않게끔 했다.
그렇지만 이런 공로보다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동시대, 후대 로마인과 오늘날 현대 서구권 사람들에게 황제로서 최고의 지도자, 명군으로 찬사받은 이유는 또 있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치세기부터 벌어진 문제를 인식해 후대 황제들에게 청사진을 그려준 황제였기 때문이다. 내치와 국방이 갈수록 복잡하고 점증된 군국화 속에서도 대내외적인 군사적 양상 속에서 문제가 심화될 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방법을 쓰면서 문제 해결책을 모두 내놓았다는 극찬을 받고 있다.
자신이 즉위하기 전까지, 본인조차 제국의 모든 문제를 고시, 법령, 칙답을 늘리는 상황이 일상화되고 원로원은 황제가 책임은 지고 자신들은 재가만 하고 비난만 하면 된다는 모양새로 나오는 현실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현명하고 단호한 황제였다. 그는 항상 법안을 원로원에 제출하여 재가를 받은 뒤 시행하면서도 단 한 번의 수정 없이 원로원과 군부 모두를 따르게 할 정도로 뛰어난 내치 능력과 정치력을 발휘했다. 이는 황제와 관료들의 중앙 권력이 강화되고 원로원이 무능함에도 과거보다 더 폐쇄적으로 귀족화되는 현실에서, 기존의 프린키파투스(원수정)가 가진 한계를 후임 황제들이 어떻게 개편하면 좋은가에 관한 해답과 청사진을 마련해줬다.
군대 장악에 있어서도, 그는 본인과 후계자, 본인의 가문 이름과 존재만으로 군대를 효과적으로 장악하는 능력을 발휘했다.[35]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사색을 좋아하고 학문을 사랑하는 학자 타입이었고, 부모와 가문 모두 로마 귀족의 전형인 황제였다. 그럼에도 그는 인재 기용에 있어서, 과거의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1세, 베스파시아누스처럼 부하를 대할 때 능력을 중시하면서도 성실함과 노력을 더 높이 평한 황제였다. 심지어 후방에서 명령을 내리는 일을 당연시하지 않고, 전선에 나갈 때마다 추위에 덜덜 떨며 쿨럭거리면서도 최전선에 항상 나가서 전쟁을 진두지휘하고, 속주 곳곳을 손수 보면서 전후 복구 사업에서도 모든 것을 꼼꼼하게 챙기고 확인까지 한 완벽주의자였다. 그럼에도 그는 틈틈이 로마로 돌아와서 국정을 돌보고, 전장에서도 사무처리를 하는 등 성실하면서도 근면한 태도를 유지한 황제였다.
마르쿠스는 로마 제국 안에서 혈통보다 능력이 더 존중받는 로마군 안에서 샌님, 타고난 귀족 그 자체로 보였음에도 큰 존경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몸소 헌신해 메꿨고, 주변 장군과 하위 지휘관들의 충언도 흘러듣지 않고 받아주는 유연함을 한결같이 보였다. 군에서 헌신한 이들을 기억했다가, 이들을 신참자로 추천해 원로원 의석을 줄 정도로 또래 원로원 귀족 출신들과는 그 결이 달랐던 황제였다. 마르쿠스는 젊은 시절부터 군무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에 전술 지휘 능력은 없고, 즉위 전까지는 로마와 이탈리아 밖으로 나간 적이 없었음에도, 의외로 전략적 식견으로는 군사 분야에서조차 유능했다.
따라서 젊은 시절부터 격무에 시달려 건강이 악화된 황제가 힘든 전선 활동과 숙영지 생활을 군소리없이 견뎌낸 사람임을 모를 리 없는 그의 장군들과 직업군인들, 군단병들은 전력을 다해 그와 그의 가문에 진심으로 헌신했다. 그래서 그가 죽기 직전의 로마군은 도나우 강을 건너서 보헤미아 지역을 평정하고 있을 정도였고, 뒤를 이은 아들 콤모두스가 부적격자로 판정받았음에도 제국을 뒤흔든 내전이 벌어지지 않게끔 해줬다. 또한 전쟁 중 그가 취한 서방 속주 일대의 재건 사업과 게르만족 포로들과 그들 가족들에 대한 시혜책들은 이후 로마 제국이 위기 상황에서 버틸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3.2. 후계자 문제
자질 있는 자를 양자로 삼아 자리를 물려준 선대의 네 황제들과는 달리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무능력하고 불초한 친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다는 점이 자주 비판받고 있다. 이는 단순한 비판이 아니라 “다 잘했는데 이건 유일한 실책이자 최대 실수”라고 비난받고, 본인과 아내 심지어 동생 루키우스 베루스까지 싸잡아 비난받는 상황이 연출되었다.[36]그리하여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결과론적으로 아우렐리우스 치세를 끝으로 오현제 시대가 막을 내리고 그의 아들인 콤모두스 시대부터 로마가 쇠락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한 이유 중 하나로 그의 잘못된 후계자 결정을 거론한다. 하지만 다른 황제들은 친아들이 없었기에 양자에게 물려준 것이지 일부러 다른 의도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리고 양자 선택도 친아들이 아니었을 뿐이지 복잡한 혈연관계로 뭉친 이익집단 내에서의 결정이었다. 당장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오현제들은 네르바를 제외하곤 모두 트라야누스 조부의 두 자녀, 즉 트라야누스의 아버지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 파테르와 고모 울피아에서 갈라져 나온 일가 내 친인척 간에 상호 입양으로 이뤄진 제위 계승이었다.
아울러 공개석상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다 잘했는데 그것만 못했다'는 식으로 씹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도 즉위 이후 자신의 사돈관계인 친구가 장남 카라칼라 손에 그 일가가 몰살되는 비극을 겪었음에도, 결국 제위는 친아들들인 카라칼라와 게타에게 물려줬다[37]. 사실 후세 사람들에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이런 이유로 비난받는 건 뒤를 이은 콤모두스가 대단히 책임감이 박약하고 무능했던 황제여서였고, 이러한 문제는 세습을 통해 정국을 안정시킨다는 제정(帝政), 그리고 전제군주제라는 시스템 그 자체에서 기인한다.
마르쿠스 생전에 공동 황제에 오른 콤모두스는 별다른 결격 사유가 없었던 10대 소년이었고, 재위 2년째 벌어진 콜로세움 암살 미수 사건 전까지는 황제로서 무척 책임감이 강했으며, 꼼꼼한 아버지에게 한 개인으로서도 문제거리도 잡히지 않은 '결점 없는' 후계자였다. 콤모두스는 정통성에서 법적, 혈연적으로 문제가 없었고, 이 당시 성격적인 결함이나 무절제한 사치 행각, 잔인성과 폭력성, 무책임함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되레 그는 문민 행정가인 아버지와 달리, 군대와 장군 모두 오랜만에 나온 혈통 좋은 군 사령관 황제감으로 불릴 정도로 마르코만니 전쟁 후반부 동안 평균 이상의 점수를 받은 후계자였다.
콤모두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죽을 당시 불과 만 19세에 불과했다. 당시만 해도 큰 말썽은 피우지 않고 단지 또래들과 어울려 놀기 좋아하는 청년이고, 마음이 여린 문제를 제외하곤 콤모두스는 훌륭한 주변인들이 보필만 해주면 엇나갈 가능성은 없는 공동황제였다. 실제 모습 역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원로원, 장군들에게 흠이 잡혀, 혼이 났다는 이야기는 없고, 로마에서 빈까지 이동해 군사 훈련을 받고 전략 회의에서는 나이답지 않은 듬직함까지 보인 후계자였다. 따라서 별 다른 문제가 없는 멀쩡한 후계자 콤모두스가 아버지가 죽고 나서 그렇게까지 막장을 달릴 거라고, 상식적으로 상상하기는 힘들었다. 이는 원로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원로원은 마르쿠스가 콤모두스에게 후계자 지위를 계속 부여할 때 콤모두스의 자질에 대해 의심하거나 이에 대해 비판하는 대신 마르쿠스 못지 않게 적극적인 후원을 해줬다. 왜냐하면 행정 실무 교육, 군사교육, 예법 등을 가르친 원로원 의원들이 엄하게 평가함에도 그 결함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 때문에 콤모두스가 망가진 상황에서도 로마 원로원 인사들은 콤모두스의 과거를 생각하면서 갱생이 가능하다고 끝까지 믿었다. 물론, 192년 콜로세움에서 로마의 헤라클레스를 자처하면서 11일간 검투사로 데뷔하기 전까지의 일이지만.
즉, 마르쿠스와 이 당시 원로원 모두의 눈에 10대의 콤모두스는 황제 부적격자가 아니었다. 실제로 콤모두스가 본격적으로 일탈하기 시작한 때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죽고 단독 황제가 된 지 2년 후인 182년에 친누나 루킬라의 야심으로 벌어진 그녀 주도의 암살 위협을 두 차례나 겪고나서부터였다. 루킬라에 의한 암살 미수 사건 이후 콤모두스는 충격에 빠져나오지 못한 상태에서 연이은 암살 음모를 두차례 더 겪으면서 완전히 정신적으로 망가지고, 페렌니스가 권력을 쥐고자 그를 의도적으로 사치와 향략에 빠지게끔 유도한 끝에 무절제한 막장황제가 됐다. 그래서 콤모두스가 멀쩡한 시절과 망가진 시절 모두를 두 눈으로 보고, 실제 면담을 하면서 이를 확인한 디오 카시우스는 이런 부분에 있어 그 아쉬움을 넌지시 표현했다.
어린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내는 극소수의 인물(알렉산더 대왕 등)을 제외하면 어떤 인물의 19세까지의 시절만 보고 이 인물이 위대해질지, 형편없어지는 걸 감별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오히려 어린 시절에는 막장이었다가 뒤늦게 정신차려서 재능을 꽃피운 인물도 역사에서는 아주 흔하게 찾을 수 있다[38]. 따라서 콤모두스의 실체를 알지 못했다고 아버지를 탓하는 건 지나치게 가혹한 기준이다. 게다가 걸핏하면 전선에서 골골대던 아버지와 달리, 콤모두스는 체격이 건장하고 건강했으며 활동적인 소년이었다. 여기에 더해 아버지 생전까지는 사생활면에서 절제할 줄도 알았고, 검술, 창술 등 무기를 다루는 능력 또한 뛰어났기 때문에 어쩌면 아버지보다 더 군무에 적합한 인물로 보였을 수도 있었다. 문제는 암살 위협을 겪고 난 이후부터 모든 정사를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고 가지고 있던 재능으로 검투사 짓이나 했다는 거지만, 그것까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파악하리라고 기대하는 건 지나치다.
게다가 백번 양보해서 '자식의 부족함을 꿰뚫어봤다'고 쳐도, 이미 친자식이 있다는 점에서 아우렐리우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멀쩡한 자식을 놔두고 다른 사람에게 제위를 양보한다? 그날부터 그 자식은 다른 야심가들의 유용한 쿠데타 도구와 명분이 될 것이었다.[39] 거기다 설령 다른 유능한 인재를 고른다고 해도 정통성에서 훨씬 앞서는 친자식이 있는 마당에 과연 제대로 황제 노릇을 할 수 있었을까? 군주제 국가에서 친자식이 있는데, 그를 제치고 다른 사람을 제위에 앉히려면, 그리고 그것을 만인에게 인정받으려면 딱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아우구스투스가 티베리우스 양자 입적 당시 그랬듯이 유능하지만 어린 자식이 장성할 때까지 적합한 대체자를 징검다리 역할로 선포해버리는 것, 둘째는 아우구스투스처럼 생전에 부적합한 후계자로 인식된 자식를 죽여 없애는 것이다.[40] 아우렐리우스는 당시 그런 선택을 할 상황도 아니었고, 콤모두스는 태생적으로 결함을 드러낸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극약 처방을 택할 이유 자체가 없었다.
다시 말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생전의 정세를 봤을 때 정국 안정을 위한 친자 세습은 불가피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특히 영화 글래디에이터처럼 유능하고 충성스러운 장군에게 승계하는 형태는 실제로는 불가능했다. 정복 전쟁은 해야 하는데 명목상 최고 사령관인 황제가 전장에 직접 못 나가면 결국 전술 지휘를 대행하는 장군들의 영향력이 커질 수밖에 없다. 신망있는 장군일수록 당시 유권자 즉 로마 시민이기도 했던 휘하 군단병들의 지지도 모이고, 당시 로마군에 이런 장군들이 한둘이 아니었던 만큼 장군들 중 누구 하나가 후계자로 지목된다고 해서 나머지 장군들과 군단병들이 그대로 승복하리라는 보장도 없었다는 것은 로마 제국의 내전사, 특히 삼황제 시대만 봐도 증명이 된다. 완벽한 정통성을 갖추고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통치를 펴나간 명군 마르쿠스 본인조차도 아바디우스 카시우스의 반란을 겪었을 정도로, 야심 많은 총독들을 억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실제로 콤모두스가 아무리 폭군이고 무능했다 해도 그 훌륭하고 존경받아 마땅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친아들이 제위에 오른 것만으로도 장군들의 준동을 억제할 수 있었던 걸 보면 콤모두스에게 제위를 세습시킨 자체는 제국의 평화를 어느 정도 연장하는 효과는 있었다고 봐야 하는 것이다.
콤모두스와 동년배의 원로원 의원인 디오 카시우스는 후계자 시절부터 콤모두스의 나약하거나 단순한 성격의 단초를 마르쿠스가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지만, 이 때문에 최고의 원로원 의원들을 가려뽑아 그 보좌로 앉혀주는 등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안배를 다 해놓고 죽었다고 증언한다. 젊은 콤모두스가 그들의 충고나 조언을 한 귀로 흘려들은 게 문제기는 하지만, 마르쿠스로서는 가장 최선의 선택과 조치를 다했던 것이다. 만약 콤모두스가 황제로서는 부적합했다고 판단했다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맏사위 폼페이아누스를 후계자로 낙점해 콤모두스와 공동 황제가 되게 만드는 것 뿐이었다. 그렇게 되면 다시 황후가 된 맏딸 루킬라도 만족했을 것이고, 폼페이아누스는 콤모두스가 암살되는 순간까지 그를 지지하고 그 뒤에도 어떤 종류의 야심도 보이지 않은 만큼(후일 수차례 황제 자리를 제의받았고, 심지어 황제가 되겠다고 말만 해주면 황제로 만들어 주겠다거나 제발 황제가 되어달라는 제의도 받았다. 콤모두스가 암살된 뒤에도 황제 자리를 제의받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 즉위를 꾸준히 거부했다.) 콤모두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3.2.1. 실패한 자식농사?
고모 파우스티나의 딸로 고종사촌관계인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막내딸 소 파우스티나와 결혼해, 30년간 14명의 자녀를 낳았다. 이중 남녀 이란성 쌍둥이, 남자 일란성 쌍둥이가 각각 있었는데, 자녀 중 그보다 오래 생존한 이는 딸 4명과 아들 1명이었으며 딸 1명과 아들 1명은 쌍둥이 중 각각 생존한 루킬라와 콤모두스다.첫째 도미티아 파우스티나는 147년생으로 스물여섯의 나이에 처음 얻은 아이인데, 151년 요절했고 장남 티투스 아일리우스 안토니누스는 149년에 태어났지만 이해 죽었다. 이후 남녀쌍둥이가 태어났는데 차남 티투스 아일리우스 아우렐리우스는 영아기에 요절, 그 쌍둥이 여동생은 성인 이후에도 생존했다. 이 아이가 바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사실상 장녀 루킬라다.
이후 차녀 파딜라, 삼녀 안니아 갈레이아 파우스티나가 태어났는데 이들은 모두 생존했고 각각 루키우스 베루스의 친조카인 로마 귀족 출신 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 그리스 혈통의 옛 클라우디우스 가문 클리엔테스 후손으로 갈라티아 출신인 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와 결혼했다. 두 사위는 마르쿠스 황제 부부가 상당히 아낀 이들로 인품이 대단했지만, 풀라우티우스 퀸틸루스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명령으로 자결을 선고받고 죽었고[41],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는 그 조부와 부친처럼 뛰어난 스토아 철학자임에도, 정치쪽과는 거의 담 쌓은 인사인 척 하면서 제 잇속만 챙긴 까닭에 콤모두스가 망가진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해가 갈까 두려워 비겁하게 수수방관했다고 비난받았다.[42]
콤모두스 위로는 넷째딸 코르니피키아를 뒀는데, 그녀는 푸닉 출신의 원로원 의원이자 집정관 마르쿠스 페트로니우스 수라 마메르티누스와 결혼했다. 이들 사이에는 아들을 한명 있었는데, 사이가 대단히 나빴다. 그렇지만 마메르티누스는 콤모두스와 친구였고, 집정관까지 올랐다. 허나 그는 루킬라가 주도한 콤모두스 콜로세움 암살미수사건에 가담해 신임을 잃었고, 아내와는 별거했다가 192년경 콤모두스 암살 미수를 기획했던 것이 밝혀져 처형됐다. 다행히 코르니피키아는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고, 182년 이후부터는 별거한 터라 큰 문제가 없었다. 따라서 코르니피키아는 190~192년 사이 로마귀족 루키우스 디디우스 마리누스와 재혼했고, 사이에서 또 다른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코르니피키아는 212년 카라칼라에게 누명을 뒤집어 쓰고 살해됐다.
14명 자녀 중 막내는 딸 비비아 아우렐리아 사비나인데, 그녀는 여러 자녀 중 로마 혹은 이탈리아가 아닌 판노니아 병영에서 태어나 자랐다. 비비아는 푸닉 출신의 명문 귀족 루키우스 안티스티우스 부루스의 후처로 낙점돼 결혼했고, 일찍부터 아프리카 속주와 로마를 오가며 생활했다. 헌데 그녀의 남편인 마르쿠스 황제의 막내 사위 안티스티우스 부루스는 181년 콤모두스의 호의로 집정관이 됐음에도, 콤모두스가 루킬라가 벌인 암살 미수 사건 이후 힘들어함을 이용해 188년 제위를 노리고 암살을 계획했다. 이는 실제 결행 전에 발각됐고, 그는 188년 붙잡혀 처형됐다. 그리고 이 사건의 여파로 비비아 아우렐리아 사비나는 오빠 콤모두스에게 괴씸죄로 시댁이 있는 북아프리카에서만 한동안 살도록 조치가 취해져, 티빌리스에서 머물게 됐다. 이후 비비아 아우렐리아 사비나는 아버지의 해방노예 출신 그리스인 아가클리투스의 아들로 세금징수원, 근위대 장교를 거쳐 원로원 의원까지 오르게 될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아가클리투스와 결혼했고, 콤모두스는 그녀의 재혼 이후 여동생에 대한 처벌을 해제했다. 그래서 그녀는 이탈리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옛 시댁인 아프리카 속주를 오가며 생활했으며, 대부분의 삶은 이탈리아보다는 오늘날 알제리 북부의 도시 티빌리스에서 살았다고 한다. 이때 그녀는 자신이 힘든 시절 머문 북아프리카 일대에 막대한 돈을 후원했다고 한다.
성인 이후에도 생존한 5남매 중 파딜라와 안니아 갈레이아 파우스티나 외의 아이들과, 사위들, 외손주들에 대한 평판이 좋지 않았다. 하여 당대부터 실패한 자식농사의 대명사로 대차게 까였다. 물론 끝까지 황궁에 남아 동생 콤모두스를 돌보고, 막장정치를 조장한 클레안데르를 견제한 파딜라[43]와 그 남편 퀸틸루스, 루킬라의 남편으로 제정 시대 충신으로 유명한 폼페이아누스는 그 평가가 좋았고, 사위들 중 신분이 좋지 않아 까인 막내딸의 두번째 남편 아우렐리우스 아가클리투스에 대한 비판은 이 사람의 인격이나 소양 문제가 아니라서 이를 감안해야 한다.
장녀 루킬라, 사실상 외아들 콤모두스는 워낙 유명해 공개석상에서도 까였고, 이들의 잘못된 행적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부부와 이들의 숙부이자 루킬라의 첫 남편 루키우스 베루스에 대한 무분별한 비난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이는 사녀 코르니피키아와 막내딸 비비아 아우렐리아 사비나 역시 마찬가지라서, 당대 로마인들에게 이 부분은 마르쿠스의 자식농사가 실패한 이유로 계속 거론됐다.
다만, 마르쿠스의 자녀 중 코르니피키아, 비비아 아우렐리아 사비나는 인격적으로 거만하고 권력욕이 심한 루킬라, 재위 2년만에 루킬라의 음모로 완전히 정신건강이 피폐해져 막장암군이 된 콤모두스와 달리 큰 비난을 듣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 로마귀족 사회 기준으로도 심각히 문제 있지 않고, 그들 생활 수준으로는 지극히 평범하게 사치스러웠기 때문이다. 허나 이들의 행동은 분명 사생활 부분에서 문제가 있거나, 두 번의 결혼으로 맞이한 남편들 때문에 모든 부분이 완벽하다고 찬사 받은 아버지와 비교돼 비난받는 이유가 됐다. 사녀 코르니피키아는 카라칼라에게 누명을 뒤집어 쓰고 자살방식으로 살해돼, 순교자 이미지가 있으나 남자편력이 있었고 여러 애인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중 가장 유명하고 오랫동안 연인 사이였던 유명인사가 바로 페르티낙스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불륜관계를 맺었던 사이였고, 그 관계가 페르티낙스가 피살될때까지 지속됐다.
막내 비비아는 로마 황녀 중 귀천상혼을 하면서도, 두번째 남편으로 아버지의 옛 해방노예 아들을 직접 선정한 다음 맞이해 이 부분에서 "부모의 명성과 가문의 지위에 먹칠을 한다"고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이는 그녀의 시아버지가 되는, 아가클리투스와 시어머니 푼디니아의 결혼 스토리, 그리고 남편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아가클리투스의 출생 배경이 상당한 몫이 된 듯 하다. 공주의 시아버지가 되는, 아가클리투스의 결혼은 로마사회에서 매우 희귀한 '해방노예와 남편과 사별한 귀부인과의 결혼'. 그것도 현역 황제 형제의 친구이자 능력 있는 젊은 그리스 해방노예가 방계황족 안니우스 리보의 미망인 푼디니아의 새남편으로 결혼한 케이스라서, "부모와 가문에게 먹칠을 했다"고 손가락질 받은 것은 당시 기준으로 비난사유가 충분했다고 평가받는다. 고대기록에 따르면, 아가클리투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 형제와 친구였고 그들의 삶과 제위 등극에 좋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음에도 푼디니아와의 결혼은 환영받지 못했다. 그래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와 그 동생 루키우스 베루스 황제는 아가클리투스가 자신들의 젊고 유능한 그리스인 해방노예이며 안토니누스 가문의 믿을만한 가신이라고 해도, 로마 역사상 거의 없는 결혼이라서 강하게 불만을 드러냈다. 따라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아예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는데, 두 황제와 황실의 우려대로 로마 귀족들 사이에서 온갖 구린 소문이 끊임없이 터져나와 황실을 곤욕스럽게 만들었다고 한다.[44]. 그래서 이는 이후에도 회자됐는데, 비비아 아우렐리아 사비나가 이 결혼에서 태어난 아가클리투스와 푼디니아의 아들과 결혼했으니 이후 상황은 어땠는지 충분히 짐작갈 것이다. 하지만 공주의 남편이 된 아우렐리우스 아가클리투스는 어머니 푼디니아를 통해 원로원 귀족 가문의 후손이며, 실제 계급도 "로마시민권자+ 상류층 기사계급 자제"라서 엄밀히 말하면 또 귀천상혼까진 아니었던 모양. 더군다나 이런 비난에도 아우렐리우스 아가클리투스는 이런 스토리 외에는 큰 비난거리 없는 인물이고 구린 구석 없는 멀쩡한 사람이라서, 더 이상 나쁜 소문은 없었고 이들의 결혼 생활이나 후손들의 삶도 평탄했다고 한다[45]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외손주로는 안니아 갈레리아 파우스티나의 아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프로쿨루스, 루킬라와 폼페이아누스의 아들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 파딜라와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의 아들 퀸틸루스와 딸 플라우티아 세르빌리아 등이 있다. 이들은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가 끝난 이후에도 모두 원로원 의원 내지 귀부인으로 살았는데, 그들의 평판도 평균 정도이거나,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부모 모두를 통해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훌륭한 혈통을 타고 났다고 평가받은 파딜라와 퀸틸루스의 자녀는 일찍부터 부모를 따라 상당히 조용한 삶을 살면서, 일정부분 중앙정계와 거리를 둔 처세술로 세베루스 왕조 아래에서 화를 면했다. 하여 두 외사촌과 달리 크게 잘 나가거나, 못 나가는 일도 없었다. 반면 세베루스 프로쿨루스와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는 그 능력이 지나치게 무능력하거나 평범해, 관심을 못 받거나, "훌륭한 혈통 외엔 돋보이는 것은 없었다."는 굴욕적인 평을 받았다. 그래서 두 사람 모두 외삼촌 콤모두스 사후 차기황제로 거론되지 못하는 굴욕을 겪었다고 한다.
루킬라의 아들로, 제정 시대의 명장 중 한명이자 인성이 뛰어난 아버지 폼페이아누스를 둔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는 "위대한 조상을 가지고 있다."는 평과 "훌륭한 혈통 외엔 돋보이는 것은 없었다."는 평을 동시에 들었다. 그는 카라칼라에게 누명을 쓰고 처형됐지만, 성품은 성실했고 본인과 두 아들 모두 로마인, 이탈리아인, 안토니누스 가문의 적통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해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았다고 평가받았다. 그렇지만 그 능력은 평범했고, 혈통에 따른 후광 외엔 앞세울 공적이 부족했다. 그래서 능력이 평범했음에도 무능하다고 비난받진 않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211년 말, 212년 초 그를 죽인 카라칼라는 큰 비난을 받을 것을 두려워 하면서, "도적들에게 살해됐다."는 식으로 얼버부리면서 책임을 회피했다고 한다.
하지만 마르쿠스 황제의 외손자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프로쿨루스는 지나치게 평범했던 루키우스 폼페이아누스와 달리, 여러 외손자 중 정계활동을 가장 열심히 했어도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그는 스토아 철학에 심취해 정치와 담을 쌓은 아버지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와 달리, 본인 안위만 생각한데다 지극히 무능했다고 한다. 외사촌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는 평범했어도, 이탈리아 귀족이라는 인식과 외조부의 이름에 누를 끼치지 않고자 스스로 군복무를 하면서 주변에게 악평을 듣지 않았는데, 이 사람은 매우 귀족적이었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외손자라는 자랑에도 그리스인이라는 자부심이 더 강했다고 평가받았다.
따라서 외삼촌 콤모두스가 멀쩡할 때부터 외삼촌과 원로원 인사들에게 일찌감치 "무능하고 존재감도 없다"고 결론났다고 하며, 이후에도 콤모두스와 원로원에게 똑같은 평가를 받아 제 능력을 뽐내진 못했다. 이는 외사촌 루키우스 폼페이아누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와는 다른 평이었고, 콤모두스는 막장이 된 상황에서도 제 조카가 무능하다는 이유로 대놓고 무시했다. 그래서 콤모두스가 암살된 직후, 다른 사촌들과 달리 안토니누스 일가 남자황족 중 유일하게 투명인간처럼 거의 무시받았다[46]. 그럼에도 어쨌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외손자인 까닭에 당대 명문가와 두루 인척관계를 맺는 기회를 얻어, 당대 원로원 유력귀족인 폼페이우스 가문, 비리우스 가문 등과 통혼했다고 한다. 이 결과, 이 사람의 후손들은 4, 5세기까지 승승장구했고, 세베루스 왕조의 미치광이 황제 엘라가발루스는 자신의 부인 중 한명으로 이 사람의 손녀 안니아 파우스티나를 잠깐동안 아우구스타로 맞이했다고 한다. 다행히 안니아 파우스티나는 엘라가발루스가 암살될 때, 버림받지 않고 살아남았는데, 그녀의 아들은 3세기 군인 황제 시대동안 활약한 온건하고 양심적인 원로원 의원 폼포니우스 바수스이고 사위는 3세기 군인 황제 시대 내내 더 큰 내란을 막은 고결한 로마 원로원 의원 플라비우스 안티오키아누스다.
3.3. 이중적 면모
상술했다시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어려서부터 그리스, 특히 학문 분야에 빠져 있었다. 그는 유모의 보살핌을 받는 나이가 지나자마자 뛰어난 교사들에게 보내져 그리스 철학을 터득했다고 한다. 참고로 그의 저작이자 훌륭한 철학서라고 인정받는 《명상록》은 사실 전쟁터에서 그리스어로 쓴 것으로, 현대에 와서 이 《명상록》은 자기계발서적인 명언집으로 잘 팔려 나간다.그리스에 가서, 이왕이면 아테네나 로도스 섬에서 서늘한 지중해 여름 밤바람을 쐬며 동무들과 철학적 담론을 나누거나 그리스 비극을 감상하기만 바라는 사람이, 현실에선 맨날 비가 주룩주룩 오는 게르마니아 야만족 깡촌의 최전선에서 전쟁하느라 추위와 감기에 시달리며 칼 맞아 죽어 진창 위에서 썩어가는 야만족 시체 냄새나 맡고 살아야 했으니 짜증이 안 날 턱이 없다. 《명상록》에 "당신은 잘려 나간 사람의 팔과 다리를 본 적이 있는가?"라는 식으로 암시되어 있는 내용이 있다.
차라리 역시 열렬한 그리스 추종자였던 네로처럼 시원하게 한판 했으면 또 모르겠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일단 그런 건 모조리 뒤로 제쳐두고 황제로서 해야 하는 일부터 모두 철저하게 했다. 국가 재정이 부족하면 황실 창고를 열어서 재정을 보강했고 몸이 건강한 편이 아니었음에도 필요하다면 게르마니아까지 가서 전쟁을 진두지휘했으며 심지어 전장에서 건강이 악화되어 죽었다. 특히나 그 바쁜 와중에도 최고 재판장으로서 제국 시민들의 민사/형사 최종 재판도 심리하여 이런저런 현명한 판결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더군다나 스토아 철학에서는 '공동체의 선'(스토아 철학은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의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으므로 공공에 대한 개인의 헌신을 강조하지는 않았다.)을 중시하였으며 이는 로마의 지도층을 이끌어가며 로마 제국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을 지탱해 온 철학이라고 할 수 있었다. 《명상록》의 주된 내용 또한 다른 사람들과의 갈등에서 오는 짜증,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극복과 같은 개인적인 내용도 있지만 공공에 대한 헌신 또한 굉장히 중요한 주제로 등장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이상적인 황제로 여겨지고 후세에도 유명하며 당대에도 많은 황제들이 그의 정치를 이어 받겠다고 한 것도 그가 로마 제국을 지탱해온 '스토아 철학'의 완벽한 구현자로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 자신은 철학적인 두뇌에 허약한 육체를 타고났음에도 자신에게 맡겨진 황제라는 직책에 맞게 공공을 위해 허약한 몸을 이끌고 전장에 나가 수많은 전투를 지휘했으니까.
이런 건 "단순한 이미지 관리"가 아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당대에도 덕(德)으로 유명했고, 심지어 그에게 반란을 선포한 자도 그가 덕이 있는 황제라는 것은 부인하지 못했으며, 고작 내세운 명분이 그가 눈이 어두워 간신을 써서 나라가 혼란에 빠졌다라고 할 정도였다. 일반 백성들의 이미지도 산사태처럼 쏟아진 위기를 연약한 몸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의지로 다 해결하고 하얗게 다 타서 쓰러진 황제일 정도였으니... 후대의 군인 황제들이 즉위할 때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통치를 본받겠다"고 선언할 정도로 이상적인 황제상으로 여겨졌다.
플라톤이 국가론에서 제시한 '철인왕(philosopher king)'이 실제 역사에서 구현된 사례로 꼽히기도 한다.
다만 능력은 출중했지만 인간성은 최악이었던 스승 헤로데스 아티쿠스가 저지른 범죄를 지나치게 봐준 점은 비판받을 만하다. 160년 말대답을 했다는 이유로 아내 안니아 레길리아를 노예와 함께 쳐 죽였을 때 살인죄로 고소되었지만, 노예만 처벌했을 뿐 스승에게는 어떠한 처벌도 하지 않았다. 174년 아테네에서 세 명의 동료와 함께 음모를 꾸민 혐의로 고소받았을 때, 증거가 많았고 소 파우스티나 황후가 강력하게 규탄했지만[47] 역시 스승이라는 이유로 1년 추방형으로 그쳤으며, "끝까지 봐드리지 못해서 죄송하다"라는 내용의 서신까지 보냈다. 물론 아티쿠스도 죽을 때 까지 "저 '음탕한' 여자(소 파우스티나) 때문에 내가 핍박당하고 억울하게 추방 당했다."며 소 파우스티나 하면 이를 갈았다. 그리고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제자들에게 소 파우스티나가 음탕한 여자라고 중상모략 및 험담을 했고, 이는 먼 훗날의 황제 카라칼라가 마르쿠스의 넷째 딸 코르니피키아를 "죽은 게타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트집을 잡아서 죽이는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자세한 것은 헤로데스 아티쿠스 참고.
4. 그리스도교 박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당대와 후대 모두 명군으로 추앙받았지만, 콘스탄티누스 1세의 밀라노 칙령 반포 이전 로마 제국의 박해에 시달렸던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그를 "네로 황제 이후 데키우스 황제 이전까지 역대 황제들 중 가장 심한 박해를 가한 황제"라고 인식했다.[48]마르쿠스는 테베레 강의 범람, 파르티아 전쟁, 안토니누스 역병, 마르코만니 전쟁 등 수많은 악재가 터져나오는 상황에서 동요하는 민심을 수습하고 제국의 단합을 이끌기 위해 올림포스 12신에 대한 숭배 의식을 거행하라는 포고령을 반포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포고령에 불응하자, 여러 지역에서 반 그리스도교 정서가 폭발하면서 많은 그리스도인이 신성모독 또는 '세상을 혐오한 혐의'로 처형되었다.
페르가몬에서는 로마 신에 제물을 바치라는 명령을 거부한 카르푸스라는 인물이 체포되어 총독 앞으로 끌려갔다. 그는 로마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라는 명령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로마 신들을 악마라고 불렀다. 그리고는 올림포스 신들의 상은 단순히 인간이 만든 인공물이며 진정한 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밝혔다. 총독은 그 말을 철회하고 로마 신들에게 제물을 바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었지만, 카르푸스는 끝내 거부하고 고기 걸이에 걸린 뒤 죽을 때까지 채찍으로 얻어맞는 형벌을 받았다. 뒤이어 체포된 파필루스는 자신은 로마 시민이며 모든 속주와 도시에 '주님' 안에서 키워지는 자식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카르푸스처럼 제물을 바치길 거부했다가 카르푸스와 똑같은 처벌을 받았다. 아카토니케라는 여인 역시 체포된 뒤 희생제를 거부하다가 화형에 처해졌다.
165년, 당대의 그리스도교 신학자이자 후대에 교부로 추대된 유스티누스가 체포되어 프라이펙투스 우르비이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철학 스승이었던 퀸투스 유니우스 루스티쿠스의 심문을 받았다. 에우세비우스의 '교회사'에 따르면, 두 사람간에 오간 대화는 아래와 같았다고 한다.
루스티쿠스: 그대는 어떤 삶을 영위하는가?
유스티누스: 모든 사람으로부터 비난이나 책망받지 않을만한 삶이 제가 영위하는 삶입니다.
루스티쿠스: 그대는 어떤 교리를 실천하는가?
유스티누스: 나는 모든 교리를 배우려고 노력했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교리에 나 자신을 바쳤습니다. 그게 거짓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기쁘게 하지 않는다고 해도 말입니다.
루스티쿠스: 그렇다면 그것이 그대를 기쁘게 하는 교리인가?
유스티누스: 네. 믿음을 갖고 그 교리를 따른 뒤부터 그랬습니다.
루스티쿠스: 어떤 믿음을 말하는가?
유스티누스: 우리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의 하느님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태초에 홀로 모든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며,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또한 예언자들이 구원의 사자이자 선한 지식의 교사로서 인류에게 내려오리라고 예언했던 분입니다. 하지만 내 생각에, 내 말들은 그의 신성에 비하자면 하찮은 것이지요. 내가 지금 말했듯이 하느님의 아들인 그에 관해 선포되어 있던 것을 생각하면 예언의 힘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에 예언자들이 사람들 가운데서 그가 출현하리라 예언했던 것을 당신도 알고 있을 겁니다.
루스티쿠스: 그대들은 어디서 만나는가?
유스티누스: 각각이 원하거나 혹은 가능한 곳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우리가 모두 한 곳에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루스티쿠스: 어디서 만나는지 말하라. 어떤 곳인가?
유스티누스: 나는 로마에 온 이후로 줄곧 미르티누스 목욕탕 근처에 살고 있습니다. 이번이 두 번째로 로마에 온 것입니다. 나는 그곳 말고는 다른 어떤 만남의 장소도 알지 못합니다. 누군가 나에게 온다면, 나는 그와 진리의 말을 나눌 것입니다.
루스티쿠스: 그렇다면 그대는 그리스도인인가?
유스티누스: 네.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중략)
루스티쿠스: 그대가 매질을 당한 뒤 참수된다면 하늘로 올라갈 것이라고 믿는가?
유스티누스: 확고부동하게 신앙을 지킨다면 그러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선한 삶을 산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찾아왔을 때라도 신의 선물이 기다리고 있을 것임을 압니다.
루스티쿠스: 그렇다면 그대는 하늘로 오르리라고 짐작하는 것이군.
유스티누스: 나는 짐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것입니다.
루스티쿠스: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그대는 형벌을 받을 것이다.
유스티누스: 우리는 형벌을 받으면 구원되리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루스티쿠스: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고 싶어하지 않는 자들은 법률에 따라 매질을 당하고 처형당할 것이다.
유스티누스: 모든 사람으로부터 비난이나 책망받지 않을만한 삶이 제가 영위하는 삶입니다.
루스티쿠스: 그대는 어떤 교리를 실천하는가?
유스티누스: 나는 모든 교리를 배우려고 노력했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교리에 나 자신을 바쳤습니다. 그게 거짓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기쁘게 하지 않는다고 해도 말입니다.
루스티쿠스: 그렇다면 그것이 그대를 기쁘게 하는 교리인가?
유스티누스: 네. 믿음을 갖고 그 교리를 따른 뒤부터 그랬습니다.
루스티쿠스: 어떤 믿음을 말하는가?
유스티누스: 우리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의 하느님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태초에 홀로 모든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며,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또한 예언자들이 구원의 사자이자 선한 지식의 교사로서 인류에게 내려오리라고 예언했던 분입니다. 하지만 내 생각에, 내 말들은 그의 신성에 비하자면 하찮은 것이지요. 내가 지금 말했듯이 하느님의 아들인 그에 관해 선포되어 있던 것을 생각하면 예언의 힘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에 예언자들이 사람들 가운데서 그가 출현하리라 예언했던 것을 당신도 알고 있을 겁니다.
루스티쿠스: 그대들은 어디서 만나는가?
유스티누스: 각각이 원하거나 혹은 가능한 곳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우리가 모두 한 곳에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루스티쿠스: 어디서 만나는지 말하라. 어떤 곳인가?
유스티누스: 나는 로마에 온 이후로 줄곧 미르티누스 목욕탕 근처에 살고 있습니다. 이번이 두 번째로 로마에 온 것입니다. 나는 그곳 말고는 다른 어떤 만남의 장소도 알지 못합니다. 누군가 나에게 온다면, 나는 그와 진리의 말을 나눌 것입니다.
루스티쿠스: 그렇다면 그대는 그리스도인인가?
유스티누스: 네.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중략)
루스티쿠스: 그대가 매질을 당한 뒤 참수된다면 하늘로 올라갈 것이라고 믿는가?
유스티누스: 확고부동하게 신앙을 지킨다면 그러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선한 삶을 산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찾아왔을 때라도 신의 선물이 기다리고 있을 것임을 압니다.
루스티쿠스: 그렇다면 그대는 하늘로 오르리라고 짐작하는 것이군.
유스티누스: 나는 짐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것입니다.
루스티쿠스: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그대는 형벌을 받을 것이다.
유스티누스: 우리는 형벌을 받으면 구원되리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루스티쿠스: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고 싶어하지 않는 자들은 법률에 따라 매질을 당하고 처형당할 것이다.
그 후 유스티누스 외 다섯 명의 그리스도인 동료들은 채찍질을 당한 뒤 참수되었다. 이렇듯 마르쿠스 시대에 이전보다 부쩍 늘어난 그리스도교 박해는 177년 리옹에서 절정에 치달았다. 리옹에 살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49] 자경단에게 붙들려 도시의 포룸으로 끌려갔다. 그리스도인들은 그곳에서 속주 총독이 도착할 때까지 행정관과 경찰에게 억류되었다. 이후 열린 공청회에서, 군중은 총독에게 그리스도인들을 처단하라고 강하게 요구했다. 베티우스 에가파투스라는 지역 유지가 피고발자들을 대신하여 중재하려 하자, 군중은 그의 목숨도 요구했다. 총독은 에가파투스에게 "당신도 그리스도인인가?"라고 물었고, 그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역시 체포했다.
리옹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된 혐의는 식인, 근친상간, 오이디푸스식 결혼이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고용되었던 이교도 노예들의 증언이 별다른 검증 없이 체택되었고, 군중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죄의 "증거"가 낭독되자 극도로 흥분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을 처형하기 전에 먼저 자신들에게 넘겨 정의가 어떤 것인지 보여줄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총독은 군중의 압박에 밀려 순순히 응했고, 그리스도인들은 고문을 당하고 두들겨 맞았다. 이때 90세였던 주교 폰티누스는 형벌을 받기 전에 맞아서 숨을 거두었다. 팔다리가 부러지고 유혈이 낭자한 그리스도인들은 경기장으로 끌려가 짐승에게 잡아먹혔다.
<짐승들에게 둘러싸인 성 블란디나>, 에밀 바야르 작.(1875년)
경기장에서 끔찍한 최후를 맞이한 그리스도인들 중 블란디나라는 이름의 여성은 나무 기둥에 묶여 수많은 짐승들에 둘러싸였다. 하지만 그녀를 잡아먹으라고 풀어준 짐승들은 그녀에게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이에 시민들은 그녀를 나무 기둥에서 끌어내 감옥으로 돌려보냈고, 다음날 다시 경기장으로 끌어낸 뒤 황소를 끌고 와서 그녀를 짓밟아 죽이게 했다. 총독은 희생자들의 유해를 개떼에게 던져 준 후 6일 뒤 불태워 재를 론 강에 뿌리게 했다. 시민들은 그리스도교의 신이 잿더미를 살아 있는 육신으로 부활시킨다면 자못 흥미로울 거라며, "이제 거기서 나와 보시지"라고 외쳤다.
마르쿠스의 통치 마지막 해인 180년 7월, 12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시칠리아 속주 총독 비겔리우스 사투르니누스 앞으로 불려왔다. 사투르니누스는 이들에게 죽음을 피할 기회를 주려 했다. 그는 피고인들에게 "우리 역시 종교인이다. 우리의 종교는 단순하다. 우리는 우리 황제 폐하의 수호신에게 맹세하고, 그의 행복을 위해 기도한다. 그대들 또한 그래야 한다."라며 로마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면 구명해주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들의 대표를 자처한 스페라투스는 단호히 답했다.
"제 말을 차분히 들어주신다면 단순함의 신비에 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중략) 저는 이 세상의 제국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저는 대신 아무도 보지 않고 이런 눈으로는 볼 수도 없는 하느님을 섬깁니다. 저는 도둑질을 한 적이 없습니다. 물건을 살 경우에는 늘 세금을 냈습니다. 나의 주, 왕 중의 왕, 모든 민족의 황제를 받들기 때문입니다. (중략) 살인을 옹호하거나 거짓 증언을 하는 것은 악입니다."
사투르니누스는 다른 사람들에게 스페라투스에게 속아 옳은 길에서 벗어나지 말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저버릴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답했다. 사투르니누스는 30일의 유예 기간을 제시했지만 그들이 끝내 신앙을 저버리지 않자 결국 12명 전원을 참수했다. 이후 그들은 시칠리아의 순교자들로서 후대 교회의 추앙을 받았다.
한편, 여러 그리스도인들이 마르쿠스 황제에게 '변증'을 보내 그리스도교를 옹호했다. 그 중에는 히에라폴리스의 아폴리나리스 주교, 사르디스 주교 멜리토, 아테나고라스도 있었다. 멜리토는 로마 신상에 대한 숭배를 강요하는 포고령이 황제의 개인적 명령인지 아닌지를 물은 뒤 하드리아누스와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관용적 선례를 상기시켰다. 그는 로마 제국의 시조 아우구스투스의 치세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시조가 출생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는 그리스도교가 제국의 유기적 측면에 속하며 제국 발전에 불가결한 종교임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교를 박해한 네로, 도미티아누스는 악한 황제였으니 그들의 뒤를 따르지 말아달라고 요구했다. 아테나고라스는 176년 아테네에서 마르쿠스 황제 앞에서 그리스도교를 옹호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마르쿠스는 그리스도인들의 호소를 무시했다. 그리스도교 박해를 명시한 칙령을 내린 적은 없었지만, 총독들이 여론에 떠밀려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것에 이렇다할 제지를 하지 않았으며, 그리스도인들에게 사적 재재를 가한 이들에게 별다른 처벌을 내리지 않았다. 그가 그리스도인에 대한 적대적인 인식을 가졌다는 것은 저서 명상록에서 드러난다. 그는 이 저서에서 스토아 학파의 영웅적 자살과 그리스도인들의 순교를 비교했다.
영혼은 얼마나 단호한가! 소멸되든 흩어지든 지속되든 언제라도 육체로부터 이탈할 자세가 되어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일은 그리스도인들과 같은 생각없는 반사작용이 아니라 자발적인 결정으로 이뤄져야 한다. 이 일은 숙고 후에 품위있고 어떤 연기도 없이 남을 납득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일어나야 한다.
5. 기마상을 남긴 황제
그의 생전 모습을 묘사한 작품으로는 마르코만니 전쟁을 기둥에 묘사한 부조화[50]와 청동 기마상이 남아있는데, 이교도 문화 척결로 수많은 황제들의 청동상이 파괴되는 와중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기마상은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마상이라고 오인받아서(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수염을 기르지 않았기 때문에 왜 이렇게 착각했는지는 의문이지만) 라테라노 대성당 바로 옆에 있었음에도 녹이지 않고 내버려두었다고 한다. 이로써 그리스도교를 박해하고도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동상이 살아남은 황제라는 진기록을 가지게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로마 캄피돌리오 언덕을 정비할 때 아우렐리우스의 기마상을 캄피돌리오 광장 가운데에 갖다 놓았고, 그 후로 수백 년 동안 광장을 지키던 기마상은 현대의 대기오염으로 인한 부식을 피하기 위해 진품은 인근의 카피톨리니 박물관으로 옮기고 복제품으로 교체했다.
6. 기타
- 2011년 지방직 9급 국어 문제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게르만족 중 하나인 마르코만니인들과 싸우기 위해 군대를 파견할 때, 자신의 사자들을 동반시켰다고 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사자들이 적진을 향해 달려갈 때, 사자를 몰랐던 마르코만니인들은 지휘관에게 "저것이 무슨 짐승이냐?"고 묻자 지휘관은 "저것은 로마의 개(...)"라고 외쳤다. 결국 마르코만니인들은 미친개를 잡듯이 사자를 두들겨 패버려(...) 전투에서 이겼다고 한다.
- 한나라 측 기록에 의하면 당시 한나라와 실크로드를 통해 교류를 시도했다고 한다. 대진왕 안돈(안토니누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 카이사르 시절, 가정폭력으로 만삭의 아내를 폭행하고 살해한 스승 헤로데스 아티쿠스의 거짓말에 속아, 유죄가 명확히 확정날 헤로데스 아티쿠스가 결정적으로 무죄를 받고 방면되고, 본래 가문인 안니우스 가문이 무고로 고소당한 일의 원인을 제공해, 즉위 전 이 문제로 큰 위기를 겪을 뻔 했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친척 안니아 레길리아 살인 사건이 있던 160년의 일이었다. 이때 스승의 현란한 거짓말과 스승이 치안판사, 배심원을 모두 뇌물, 협박으로 매수 후 벌인 상황 보고 때문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꼼짝없이 속을 수 밖에 없었다. 이 당시, 헤로데스 아티쿠스는 자신과 본인의 해방노예 비서가 완벽히 무죄로 방면될 수 있게 제자인 마르쿠스에게 독대를 청하고, 자신이 죽인 아내를 기념하는 행사 등을 여는 등의 잔혹함, 비열함을 보였다. 따라서 꼼꼼하기로 유명한 마르쿠스는 무죄를 선고한 재판에 개입할 수 없게 됐다. 이런 이유로 남은 희망 속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현명한 판단만 기대하던, 안니아 레길리아의 오빠인 친척 아피우스 안니우스 아틸리우스 브라두아는 여동생이 헤로데스 아티쿠스에게 살해되고, 여동생이 살아생전 아낀 아티쿠스 브라두아가 헤로데스 아티쿠스에게 학대를 넘어 아버지 손에 살해될 위기까지 가게 되자, 현직 집정관임에도 이례적으로 카이사르 신분인 마르쿠스 앞에서 격분해, 이를 따지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크게 실망했다고 밝혔다.[51] 다행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역시 상황을 파악해 이를 알고, 유가족에게 용서를 구하고,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에게 도움을 청해, 사태가 확산되는 것을 막았다. 이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이사르는 자신의 과오를 해결코자 간접적으로 힘을 써서, 아버지의 학대 속에서 온갖 누명을 쓰고 결국 가문 추방이라는 위기를 겪은 아티쿠스 브라두아가 죽은 어머니의 유산을 모두 상속받고 따로 파트리키 지위를 회복시킬 수 있게 했다.
- 아우구스투스가 일명 제2차 조정헌법으로 불린 개헌 후, 제2차 조정 체제로 제정이 제대로 시작된 이래, 로마 황제는 집정관 취임시 관례상 1년 중 반절 또는 3/4를 채우고 물러나는 일이 많았다. 이는 쿠르수스 호노룸의 꽃으로 불린 집정관 경력이 다음 단계의 성공인 원로원 안에서 이런 일은 한정적인 자리를 떠올리면, 황제가 어느 정도 양보하고, 원로원을 존중한다는 의미였다.[52] 따라서 대다수의 로마 황제들은 현군 소리를 듣더라도, 재임 기간 중 집정관 자리를 거의 대부분 1회 이상 셀프 추천식으로 오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프린켑스 세나투스 직을 맡고 있는 로마 황제가 집정관을 지내지 않는 것은 원로원을 제대로 존중한다는 뜻이었고, 실천하기 진짜 어려운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생애 동안 총 3번 집정관에 올랐음에도, 제위 등극을 한 이래, 단 1번도 스스로 집정관에 입후보하거나, 측근이나 형제에게 추천을 받는 양 행동해 집정관 자리를 차지하지 않았다. 물론 제위에 오른 재위시작년도(161년)의 집정관을 동생이자 공동황제 루키우스 베루스와 함께 지내긴 했다. 하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 당시 카이사르 신분이었던데다, 이마저도 당시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차남 루키우스 베루스의 정치적 입지를 드높이고자 한 목적이 컸다. 더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 황제 중 매우 드물게도, 제위 등극 직후 동생 루키우스와 함께 통상적인 황제들의 집정관 재임 기간을 채우지 않고, 등극 직후 물러난 다음, 총 4명의 보결 집정관을 자유롭게 원로원 합의로 뽑게 하는 등 원로원을 최대한 배려했다. 따라서 원로원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추천을 받겠다고 하거나, 콤모두스가 공동황제 칭호를 부여받은 순간에 이를 추천해주거나, 마르쿠스의 사위들이 집정관에 올라야 되지 않냐며 먼저 권유를 원로원 입에서 나오게 한 진풍경이 재위 기간 내내 계속됐다.[53]
7. 미디어 믹스
영화에서 의외로 자주 등장했던 황제이다. 주연급으로 등장하는 영화는 안소니 만 감독의 1964년작 《로마 제국의 멸망》이다. 여기서는 명배우 알렉 기네스 경이 맡았다. 그야말로 조각상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외모에다 철인 황제의 모습을 대단히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여담으로 명배우가 많이 나오는 영화인데, 콤모두스 황제의 역할로 사운드 오브 뮤직의 폰 트랩 대령인 크리스토퍼 플러머가 출연하고,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딸인 루킬라[54] 역으로 소피아 로렌이 출연한다. 할리우드의 호황기 시절 작품답게 훌륭한 고증과 볼거리가 많은 영화이나, 연극식 연출[55]로 요즘은 조금 구시대적으로 보일 수 있다. 1990년대, KBS에서 더빙판으로 방영된 적이 있다.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등장하는 늙은 로마 황제가 바로 이 인물이다. 해리포터 시리즈의 초대 알버스 덤블도어를 맡았던 리처드 해리스가 노현자 같은 이미지의 황제를 열연했다. 로마 공화정의 전통 부활을 논하는 인물로 나오는데,《명상록》에서 그의 공화주의적인 성향이 일부 드러나기는 하지만 공화정 부활을 꾀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영화의 설정이다. 제정 시기에도 공공연히 공화정 복고를 주장하는 회고주의자들은 꽤 있었지만 시대 착오적이고, 현실 감각이 없는 바보들 취급을 면하지 못 했기 때문에 건전한 상식을 가진 철인 황제가 그런 황당하고 반동적인 주장에 전면 동의했을 개연성은 매우 희박하다. 영화에서는 오늘날의 민주주의 국가의 관객들이 제정이 가진 독재적 요소에 대해 부정적 감정을 가지고 있음을 이용해 제정을 악의 체제로 설정해 놓은 것 뿐, 실제 역사에서 제정을 그런 이분법적인 시각으로 볼 수는 없다. 당연한 얘기지만 영화에서 콤모두스가 사망한 후에 로마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유언대로 과거 좋았던 시절의 공화정으로 되돌아간 것도 실제 역사가 아니다. 사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다른 역사 영화들에서도 과거 인물의 관점에서 현대 민주주의를 찬양하는 듯한 묘사가 많다. 로빈 후드라든가, 킹덤 오브 헤븐 등등.
만화 《테르마이 로마이》에서는 소년 시절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도 인정할 정도로 매우 현명한 인재로 등장하며, 본래는 황제 자리를 물려줄 생각까지 했으나 아직 나이가 어려서 세습은 포기하고 대신 중신으로 기용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 물론 실제로는 황제 자리까지 올라가지만. 만화에선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즉위하는 장면까지 나오는 관계로 그 이상은 나오지 않는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팩츄얼 드라마 《ROMAN EMPIRE - Commodus: Reign of Blood》에서 등장. 아들을 다들 보는데 앞에서 훈련 시키고, 정치적 문제로 아내를 죽이는 냉혈한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전염병으로 죽는다.
네이버 웹툰 《무사만리행》에서 잠깐 등장한다.
[1] 태어났을 때 받은 첫 이름[2] 양자로 입적된 후의 이름.[3] 황제로 즉위한 후의 이름.[4] 후한 환제 재위기였던 서기 166년에 ''서방 대진국 왕 안돈이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라는 기록이 있다. 단 로마 쪽에서는 중국에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은커녕 중국에 로마와 맞먹는 한나라라는 대국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던 정황이 많다. 따라서 로마 상인이 교역을 요청한 것을 한나라에서 조공 사신으로 이해한 것이라는 주장이 유력하다.[5] 아버지의 누나인 대 파우스티나의 남편이기도 하다. 즉,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고모부.[6] 저서 명상록 6.44에서[7] 당대에는 인기가 없었다. 예를 들어 타키투스와 수에토니우스 등은 냉소적인 위선자라고 부르며 맹렬히 비난했다.[8] 그리스 철학자처럼 헌옷을 입고 마룻바닥에서 잠을 자는 것을 좋아해서 어머니 도미티아 루킬라의 골머리를 썩혔는데, 그리스 문화 애호가로 유명한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오히려 좋아했다고 한다.[9] 따라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할머니와 아버지를 통해 자연스레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와 친척이었고, 고모부는 안토니누스 피우스였기 때문에 남남끼리 양자 입적으로 제위계승을 뜬금없이 한 케이스가 전혀 아니었다.[10]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작은아버지와 이름이 똑같았다.[11] 라틴어로 '진리를 좋아하는 안니우스'라는 뜻으로, '베리시무스(Verissimus)'라는 단어는 '진실한', '진지한'이라는 뜻의 'verus'의 최상급이었다.[12] 당연한 이야기인데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이 약혼을 파기하면서 케이오니아 파비아의 혼처를 신경쓴 뒤 구해 루키우스 티티우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라는 집정관을 배출한 명문가 자제와 결혼시켰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을 159년도 집정관에 오를 수 있도록 후원했다. 아울러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자신의 딸 안니아 아우렐리아 파딜라를 전 약혼녀의 아들인 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와 결혼시켜 사위로 삼고 적극 밀어줬다. 그런데 이 사람은 콤모두스 암살 후 다섯 황제의 해 당시 자신이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제위에 욕심을 내지 않으며 은퇴해 시골 별장에서 살고 있었다. 그렇지만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어거지로 이 사람에게 205년 사형을 언도하고 잔인하게 죽였다고 한다.[13] 진중하고 사색적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달리 루키우스 베루스는 낙천적이고 멋쟁이로 유명한데다 행동 역시 자유분방했다. 하지만 이런 성격 차이에도 루키우스는 형 마르쿠스를 진심으로 의지하고 사랑했으며 잘 따랐다.[14]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원로원에게 동생 루키우스 베루스의 공동 황제 즉위를 요청할 당시, 원로원은 젊고 잘생긴 미남이지만 낙천적이고 멋쟁이로 유명한 루키우스 베루스가 자유분방한 행동거지 탓에 황제가 된 뒤 마르쿠스조차도 컨트롤하기 힘들지 않을까 해서 걱정했다고 한다.[15] 하드리아누스의 양자이자 첫번째 후계자였던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는 당시 로마에서 미남의 조건 중 하나로 불리는 금발머리와 파란 눈을 가지고 있었는데, 루키우스 베루스는 친아버지의 금발머리와 파란눈을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한다.[16] 지금은 베네치아 근처에 있는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 국경에 인접한 작은 소도시이다. 하지만 로마 제국 시대 당시 이 도시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카르타고 다음으로 큰 대도시이자 서방 북쪽의 판노니아와 달마티아로 빠져나가는 핵심 항구도시였다. 즉, 오늘날 이탈리아의 밀라노급 위상을 가졌던 본국 이탈리아의 두번째 대도시가 바로 아퀼레이아였다.[17] 물론 가장 쉬운 방법인 은화 함유량을 줄였다.[18] 다음 노예 해방은 서로마 분할 직후의 플라비우스 스틸리코 장군이 병력을 증강하기 위해 시행한 고육지책이었다.[19] 루키우스 베루스의 불규칙한 생활 습관과 과로가 사망의 주된 이유였다고 한다.[20] 40살도 안 된 폼페이아누스를 지원하기 위해 경험 많은 장군들이 여럿 참모로 선정됐는데, 그중 폼페이아누스를 지근자리에서 보좌할 부관격 장군이 된 이가, 반대파에게 누명을 쓰고 일시해임됐던 파르티아 전쟁의 용장 페르티낙스다.[2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통치 기간 동안 지겹게도 게르만족과 싸운 탓에 게르만족 또한 전력 소모가 심하긴 했다.[22]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 황실 서기관을 비롯해, 황제 직할령인 이집트에서도 오랜 기간 동안 고위관료를 지냈다고 한다.[23] 아테네 태생의 웅변가이자 대정치가다. 폭발적인 웅변솜씨와 유창한 언변, 화려한 쇼맨쉽으로 아테네와 제국 동부를 중심으로 탄탄한 팬 층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인성적으로 훌륭한 프론토와 달리, 매우 폭력적이고 잔혹한 인간말종으로도 유명했다. 어느 정도로 인간말종인지, 임신 8개월 중인 아내를 하인을 시켜 팬 다음 죽인 뒤 인맥과 뇌물을 이용해 무죄로 풀려날 정도로 비열한 구석도 많았다. 그는 남들보다 글을 깨우치는 속도가 느린 친아들 아티쿠스 브라두아가 정신지체 장애를 앓고 있다고 모함하며, 친아들을 짐승취급하면서 폭행하고, 이를 자랑하면서 대중들 앞에서 희화화할 정도로 인간성이 최악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인데, 노예와 해방노예들을 짐승 다루듯 대해, 24명의 소년 노예를 사들여 지어준 이름도 알파벳 이름이었고, 이마저도 쓸모없어지자 폐기처분하듯 학대하고 괴롭혔다. 제자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루키우스 베루스를 제외한 제자들에게 화를 내면서 목에 면도칼을 들이대며 죽이겠다고 위협해 문제를 여러 번 일으켰고, 가정교사 직위를 이용해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두 아들에게도 손찌검을 매일 같이 했다. 어느 정도로 심한지 자신이 오늘 기분이 좋지 않다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마르쿠스의 미래 아내 소 파우스티나가 보는 앞에서 발로 복부와 가슴을 차고 뺨을 마구 때려 이를 본 소 파우스티나가 큰 충격을 받고 이를 평생토록 증오할 정도였다.[24] 동시대의 소피스트 중 한명인 필로스트라토스가 평가했듯이, 프론토와 헤로데스 아티쿠스는 천문학적인 돈을 주면서 배우겠다고 하더라도, 가문과 사회적 지위가 끗발을 날려야 그나마 배움의 기회가 있을 정도로, 제자를 함부로 받아주지 않는 전형적인 당대 교육자들이었다. 물론, 인간성이 훌륭하고 인격적인 프론토는 제자를 재력, 지위 등을 놓고 평하지 않았다.[25] 이 주장의 첫 출처는 소 파우스티나에게 단단히 화가 난 아티쿠스가 1년 추방형을 마친 뒤 퍼트린 소문에 기반한다. 아티쿠스는 노예 3명과 반역죄를 공모했다가 들통나, 처벌받았는데 온갖 생쑈를 벌여 제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에게 무죄로 석방되기 직전이었다. 헌데 시르미움 법정에서 이를 지켜보던 소 파우스티나가 남편에게 증거가 명확함에도 왜 무죄를 내리냐며 따져 1년 추방에 처해지고 자기 노예 3명이 모두 처형됐다. 그래서 그는 풀려난 뒤, 자기 제자들과 함께 파우스티나가 일찍 죽은 것은 막장이라서 벌어진 일이며, 아비디우스 카시우스 반란에 그녀가 개입됐다는 내용의 찌라시를 유포했다.[26] 소 파우스티나는 악행을 저지르거나, 사생활이 문란한 황후가 아니었지만, 로마인들이 말하는 '모범적인' 황후도 결단코 아니었다고 한다.(물론 이 주장은 아티쿠스와 그 제자들의 입을 시작으로 퍼진 주장이다!) 따라서 후대 황제 율리아누스는 이런 점을 고려해 그녀가 고결해도 마냥 모범적이라고 할 수 없을 수 있다고 평가해줬다. 실제 그녀는 후대의 주장과 달리 남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금슬이 좋았으며, 그냥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그저그런 평범한 황후였다. 그럼에도 1세기의 황후 리비아 드루실라와 마찬가지로 소 파우스티나는 로마인들에게 그 이미지가 뒤에서 뭔가를 꾸미는 느낌의 황후로 낙인 찍혔고, 오늘날에도 이미지가 좋지 않다. 왜냐하면 아들 콤모두스가 막장황제로 공인된데다, 장녀 루킬라가 그녀 생전부터 벌인 황실 내 파벌 구축 등의 이유로 후세 로마인들에게 그 이미지가 나락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27] 아티쿠스가 이런 편지를 보냈다는 주장은 그와 그 제자들이 아티쿠스의 도덕성이 대단하다고 주장하면서 만든 스토리들에 기반하기 때문에, 거짓일 확률이 높다고 평가받는다. 아티쿠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소 파우스티나 부부가 모두 죽고, 콤모두스 재위 직후 사망했는데, 그는 1년 추방형에서 풀려난 뒤 직계제자들과 함께 마르쿠스, 파우스티나 부부를 가루 빻듯 씹어대고 파우스티나가 음탕한 여인이며 주제 넘는 짓을 한다는 소문을 만들어 가르치는 상류층 제자들에게 "인격적으로 훌륭한 아티쿠스께서 핍박당했다"는 식으로 철저히 가르쳤다. 그래서 아티쿠스 직계제자의 직계제자에게 교육받은 카라칼라는 스승 말이 모두 사실이라고 생각해 파우스티나를 증오하다가, 게타라는 제어장치가 사라지자마자 파우스티나 곁에서 울면서 아티쿠스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 딸아이가 유일하게 살아있는 이들 부부의 딸 코르니피키아라고 생각해(사실은 이 당시 죽고 없던 막내딸 비비아 아우렐리아 사비나 공주였다.), "게타가 죽자 우는 것이 걸렸다"는 죄목을 씌워 죽였다.[28]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와 함께 상당히 신임한 장군이자 행정가였다.[29] 결과적으로 최전선에서 군대끌고 뼈빠지게 전쟁하는 황제의 뒤통수를 친 격이 되어 버려서 지지율이 급락했다. 비록 팔방미인으로 유능한 카시우스에 비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허약하고 전술지휘를 전혀 못하긴 했지만 전쟁에 나가있는 아군에 대한 배신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전술적 무능보다 더 큰 거부감을 불러 일으켜서 서방에서 반란에 동참한 군단이나 속주는 단 하나도 없었다.[30] 부인 이외에 다른 애인도 없었고, 결혼 생활 동안 14명의 자녀를 낳은 점을 보면 성생활도 매우 왕성했던 듯.[3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저서인 《명상록》에서도 아내인 소 파우스티나에 대한 감사와 사랑을 담은 찬사를 적은 바가 있다.[32] 마르쿠스는 그의 주치의가 미량의 아편을 넣고 만든 진통제 없이는 더이상 고통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 상태였다.[33] 당시 게르만족들 중에서는 전사로서의 안정적인 생활에 매료되어서 로마군에 보조병으로 자원 입대하는 이들이 꽤나 많았다. 이런 까닭에 이때 포로로 잡힌 게르만족 병사들과 그들의 가족들에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이런 조치는 의외로 매력적인 시혜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들은 갈리아에 정착해 완벽히 로마인이 되었고, 오늘날까지 이 일대 유럽의 민족 구성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고 평가받는다.[34] 아우구스투스 치세때부터 게르만족을 제국내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펼쳐 왔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특별하게 시행한 정책이 절대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우비족) 다만 철인황제 시대의 결정은 로마 제국이 타의 반 자의 반으로 결정했기에 게르만족과의 힘의 균형이 예전과 다르다는 것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35] 이런 이유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그 후계자들인 세베루스 왕조 황제들은 스스로의 정통성을 올리고 원로원과 군대 모두의 지지를 얻기 위해 제호에 안토니누스를 넣고 스스로를 안토니누스 가문이라고 자처했다. 물론, 이는 4세기 이후 로마 황제들의 제호로 널리 쓰인 플라비우스처럼 로마인들의 눈엔 정치적 상징성이 명확한 까닭에, 여전히 세베루스 가문 혹은 셉티미우스 가문으로 불리는 일이 많았고 심할 경우 이들은 시리아인이라고 불렸다. 왜냐하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혹은 콤모두스와 어떤 인척 관계도 없고, 로마 귀족 사회 안에서 세베루스와 그 후계자들이 40년여 간 존속하면서 보여준 모습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연상될 만큼의 모습은 전혀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36] 콤모두스 사후 이 비난은 작심비판 수준이 아닐 정도였다. 마르쿠스의 경우에는 지나친 아들 사랑으로 불행을 자초했다고 까였고, 소 파우스티나는 방탕하고 음란한 황후로 검투사와 불륜을 저지른 막장 황후라는 소문이 돌았다. 또 루키우스 베루스는 조카 콤모두스의 순한 맛 버전이라고 후대 로마인들에게 묘사되었고, 조카가 벌인 일들이 본인도 한 일로 기록되면서 억울하게 까이는 상황이 벌어졌다.[37] 제위를 물려받지 못한 친아들의 존재가 로마의 정치 구조를 어디까지 파탄으로 몰고갈 수 있는 지는 다름아닌 디오클레티아누스 은퇴 후의 일이 증명한다.사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은퇴때에도 황실관료들과 니코메디아 시민들은 콘스탄티누스 1세와 막센티우스가 차기 황제로 지명될 것이라 생각했기에 황제의 의외의 지명에 다들 놀라워했다.[38] 당장 일본인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오다 노부나가의 별명이 오와리의 멍청이였다. 거기에 마르쿠스 이전까지의 로마 황제만 하더라도, 정작 황제로서의 치세는 매우 짧았지만 오토의 예가 있다.[39] 게다가 본인도 양자계승이긴 하나 전임 황제의 유일한 사위였다.[40] 아그리파 포스투무스의 사례. 궁예도 이 신세가 될 뻔 했다.[41] 장인의 유지 때문에 콤모두스가 망가진 상황에서도 아내 파딜라와 함께 끝까지 콤모두스 갱생을 위해 노력하고, 원로원을 설득해 국가를 돌아가게 했다. 그러다가 폼페이아누스가 고령을 이유로 은퇴해버리고, 콤모두스가 암살됐다고 하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그는 끝까지 로마를 생각해 자기 욕심을 내지 않아 큰 존경을 받았다. 하지만 믿었던 페르티낙스가 피살되고 근위대가 돈으로 제위를 팔고, 세베루스가 로마로 군대를 이끌고 진군하는 등 국가가 막장으로 치닫는 것이 1년 사이에 모두 터지자, 완전히 의욕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따라서 사실상 정계은퇴를 선언한 뒤 시골로 은거하는데, 권력을 쥔 세베루스는 그가 로마진군을 가리켜 "설령 선의로 했다고 해도, 국가를 생각하면 국법상 잘못된 일을 한거다"라고 한 발언을 꼬투리잡아 그에게 자결을 명했다고 한다.[42]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그 철학적 재능을 무척 아꼈던 사위라서, 함께 스토아 철학과 관련해 토론도 벌이고 후원도 해줬다. 따라서 마르쿠스 황제는 그에게도 살아생전 콤모두스 미래를 부탁했는데, 그는 폼페이아누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와 달리 보좌 및 고문역할을 사실상 회피했다고 한다.[43] 동생 콤모두스에게 여러 번에 걸쳐 "지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클레안데르를 너무 키워주는 것 아니냐"며 장차 그가 큰 문제가 될 것을 경고했다고 한다.[44] 소문 수준이 단순히 "주인집 젊은 마님과 젊은 해방노예의 결혼이 안니우스 리보가 죽기 전부터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수준이 아니라, "마르쿠스 황제의 아내 소 파우스티나가 뚜쟁이 역할을 했다", "소 파우스티나가 자신의 젊은 애인을 미망인이 된 사촌 처제에게 보냈다", "두 황제가 홀로 된 사촌처제에게 자기 해방노예를 소개했다"는 둥의 막장스토리 완결판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르쿠스 황제 형제와 소 파우스티나가 손가락질 받는 상황까지 연출됐다고. 이런 이유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루키우스 베루스는 이 소문이 나오자, 이례적으로 "사실이 아니다. 이런 거짓말은 그만해라"고 강력하게 맞대응했다고 한다.[45] 오히려 마르쿠스 막내딸 입장에선 더 좋은 결혼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왜냐하면 비비아 아우렐리아 사비나의 첫 남편은 그저 권력을 잡기 위해, 루킬라와 공모해 반역죄로 처형됐고 정략혼의 목적에서 실패로 끝났기 때문에 어떤 면에선 이 결혼이 황실의 분란과 암투을 차단하는 면에선 나았다는 주장.[46] 원로원에서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맏사위 폼페이아누스나 루키우스 베루스의 친조카로 본래부터 가문이 좋았던 파딜라의 남편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를 차기 황제로 고려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과 아이들 모두 제위에 생각이 없다며 이를 거절했다.[47]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예비신랑 시절에 (소 파우스티나가 보는 앞에서), 별 이유도 없이 단지 아티쿠스 자신의 기분이 수틀린다는 이유로 아우렐리우스를 폭언하고 조롱하고 뺨을 때리는 것을 보고, 소 파우스티나는 큰 충격을 먹고 아티쿠스를 인간말종으로 여겨 혐오하게 되었다.[48] 다만 그의 이름과 그리스도교를 구글링해 보면 영어 위키피디아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위시한 투고 글 상당수에서 그의 통치기간 동안 박해가 증가한 것은 맞아도 테르툴리아누스가 그를 그리스도교의 수호자라고 칭했다거나 명상록에서 그들의 순교나 금욕적인 성향에 일종의 감탄을 표했다는 등 마르쿠스 본인에 대해서는 현대 학계에서는 박해자가 아니라고 본다고 변론하는 건이 많다.[49] 대부분이 소아시아 출신 이주민이었다고 한다.[50]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기둥. 현재는 키지 궁전 앞 콜론나 광장에 위치.[51] 이런 그의 행동에 헤로데스 아티쿠스는 되레 안니우스 브라두아를 협박하고, 이를 명분삼아 그를 고발했다.[52] 계속된 암살 미수 문제로 어쩔 수 없이 매년 집정관 자리를 움켜쥔 칼리굴라, 툭하면 집정관 셀프 추천 후 취임 또는 측근들에게 집정관 자리를 추천하면서 실질적인 집정관으로 군림한 도미티아누스나 갈리에누스, 온갖 편법으로 본인을 넘어 아들, 조카, 친구들에게 선물처럼 추천을 남발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이런 점에서 평가가 대단히 나빴다.[53] 이런 모습은 칼리굴라, 도미티아누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로 대표된 황제들이 본인의 지위를 드높여 원로원, 파트리키, 노빌레스들에게 우월성을 내보인 태도와 명확히 대비된 모습이었다.[54] 영화에서는 영어식인 "루실라"로 발음한다.[55] 독백이 꽤 많이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