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제46대 황제 율리아누스 IVLIANVS | |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율리아누스 (Flavius Claudius Iulianus) |
출생 | 331년 |
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 | |
사망 | 363년 6월 22일 (향년 31-32세) |
메소포타미아 사마라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361년 11월 3일 ~ 363년 6월 26일 (1년 266일) | |
전임자 | 콘스탄티우스 2세 |
후임자 | 요비아누스 |
부모 | 아버지: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 어머니: 바실리나 |
배우자 | 헬레나 |
종교 | 그리스도교 → 로마 다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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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 신들과 인간들의 어머니이시여. 위대한 제우스와 왕위를 공유하는 분이시여. ······ 오, 생명을 주시는 여신이시여. 지혜이자 섭리이자 우리 영혼의 창조자이시여. ······ 모든 인간에게 신들이 누리는 최고의 행복을 주시고, 로마인들이 스스로에게서 불경스러운 부분을 정화할 수 있도록 해 주소서.
-율리아누스, 대모신 키벨레에게 바치는 찬가-
-율리아누스, 대모신 키벨레에게 바치는 찬가-
그리스도교에서는 배교자 율리아누스(Iulianus Apostata, Julian the Apostate)라고 불리는 황제로,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로도 유명하다.
2. 생애
2.1. 황제 이전의 삶
2.1.1. 불행한 어린 시절
율리아누스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조카로, 331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외할아버지 율리우스 율리아누스에서 따온 이름이었다.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황제가 되자 콘스탄티누스 1세의 어머니 헬레나와 이혼하고 서방 정제 막시미아누스의 딸인 플라비아 막시미아나 테오도라와 재혼하여 그 사이에서 아들 둘을 보았는데, 두 아들 중 테오도라의 차남이 본 항목의 주인공 율리아누스의 부친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이복동생이 되는 율리아누스의 아버지는 일생 동안 2번 결혼했는데, 그가 첫 번째 아내 갈라에게서 본 첫째 아들이 콘스탄티우스 갈루스(이하 갈루스), 두번째 아내 바실리나에게서 얻은 아들이 율리아누스다. 따라서 갈루스와 율리아누스는 서로 이복형제였는데, 두 사람을 모두 지켜본 군인 출신의 당대 사가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에 따르면 키가 작은 율리아누스와 달리 갈루스는 상당히 매력적인 금발머리를 가진 키가 크고 준수한 미남이었다고 한다.
율리아누스는 외조부 율리우스 율리아누스가 그리스 혈통의 정치인으로 그리스인의 피를 이어받았던 대제의 조카였다. 반면 이복형 갈루스는 대제의 조카이면서도 어머니 갈라를 통해 세베루스 왕조의 후손이자 오래된 이탈리아 가문 풀비우스 일가의 후손이기도 했다. 외할아버지 네라티우스 유니우스 플라우티우스가 카라칼라의 처남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우스 오르텐시아누스의 후손으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외사촌인 악명높은 근위대장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의 후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율리아누스와 달리 갈루스는 모계를 통해 세베루스 왕조의 창건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먼 후손이기도 했다. 따라서 부계는 같았으면서도 이복형제라서 서로 달랐던 어머니 및 외가의 이력이 율리아누스와 갈루스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콘스탄티누스 1세에게는 조카가 넷이 있었는데, 그중에 나이가 어렸던 갈루스와 율리아누스를 제외한 두 사람을 자신의 세 아들과 함께 공동 후계자로 삼아 제국을 5등분하여 다스리게 할 예정이었다. 제국의 혼란기이니만큼 황제가 많으면 그만큼 방어에 유리하기도 하고, 두 조카가 두 황제의 후손이기 때문에 내란의 우려가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 1세가 죽은 후, 갑작스레 닥친 숙청(337년 콘스탄티누스 황족 학살 사건)[1]으로 수십여 명이 살해되었는데, 이때 차기 황제인 두 조카[2]와 콘스탄티누스 1세의 두 이복 동생[3]도 죽었다. 겨우 살아남은 율리아누스와 갈루스는 그 당시 나이가 고작 6세와 12세였다.
이렇게 고아가 되어버린 두 형제는 어린 시절 니코메디아에서 동방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감시를 받으며 지냈다. 콘스탄티우스가 아리우스파였기 때문에 유명한 아리우스파 성직자 에우세비오스에게 그리스도교 교육을 받으면서 세례까지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와 함께 스키타이 출신 고트족 거세 노예였던 마르도니우스에게서 고전 문학과 철학을 교육받았다. 당시에 받았던 교육은 율리아누스의 인격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끼쳐서 생애 전반에 걸쳐 그 영향이 드러난다.
이렇게 6년을 지내다가 342년, 이들은 카파도키아의 마르켈룸에 유폐되었다. 콘스탄티우스 2세의 감시가 워낙에 철저했던 탓에, 이들은 바깥 세계와 격리되다시피 한 생활을 해야 했다. 거의 감금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형제들의 선생이었던 마르도니우스도 오지 못하게 했기에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했고, 물론 친구도 노예의 자식 정도밖에 없었던 삶이었다고 한다.
2.1.2. 비극의 부제 갈루스
이러한 삶은 마그넨티우스가 로마의 두 황제 중 한 명인 콘스탄스를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끝나게 된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한창 전쟁 중이던 사산조 페르시아와 강화를 맺고 반란 진압에 나섰으며, 그때 자기를 대신해서 동방을 맡아줄 부제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 부제의 자리에는 자신이 오랫동안 유폐했던 두 사촌 중 형이었던 갈루스가 임명되었다. 그와 함께 율리아누스도 자유를 얻어 소아시아에서 철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자신이 바라던 삶을 지낼 수 있게 되었다.율리아누스는 자유를 얻었지만, 형 갈루스는 그렇지 못했다. 그는 콘스탄티우스 2세의 누이동생이었던 플라비아 발레리아 콘스탄티나와 결혼하여 안티오크를 수도로 삼아 동방 황제로서 통치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살해당해 반강제로 인생의 절반을 콘스탄티우스 2세 때문에 억압받으며 살아왔던, 갈루스는 여전히 완벽한 자유를 보장받지 못한 현실 등으로 분노가 상당했다. 게다가 그의 아내가 된 콘스탄티나 또한 오빠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분노가 컸다. 콘스탄티나는 원래 아르메니아 왕국의 황제가 되기로 했던 한니발리아누스[4]의 아내로 황후가 될 예정이었으나, 그는 숙청으로 살해당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그녀는 한창 반란 중인 마그넨티우스에게 접근해서 그와 결혼하려고 한 적도 있었다.
이렇게 자기를 싫어하는 둘을 뭉쳐놨으니 콘스탄티우스 2세도 당연히 갈루스를 열심히 견제해댔고, 이에 두 황제 사이의 갈등은 커져만 가며 동방은 갈수록 혼란에 빠진다. 시리아 속주 총독이 살해될 정도로 사태가 심각했던 안티오크의 대규모 식량 부족 사태가 벌어지고, 유대인들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항복한 도시 하나를 몰살시켜 살아남은 주민을 노예로 팔았으며, 정제가 보낸 두 고관을 살해해서 오론테스강에 시체를 던졌다. 즉 그대로 내버려뒀다가는 갈루스만 욕먹는 걸로 끝나지 않고, 콘스탄티우스 2세 자신의 통치 자체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카라칼라 황제가 212년 내린 안토니우스 칙령 때문에 제국의 모든 백성이 로마 시민권자가 되었으므로 더욱 그랬다.
이 때문에 마그넨티우스의 반란이 진압된 후 콘스탄티우스 2세는 갈루스를 제거하기로 마음 먹었고, 354년 갈루스를 밀라노로 불러들인 다음 긴급히 체포하여 반란죄 명목으로 처형했다. 갈루스는 그 전에 자기 아내를 밀라노로 보냈었지만, 여행 중에 병이 들어 죽었다고 한다.
2.2. 황제
2.2.1. 부제 율리아누스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갈루스의 동생이었던 율리아누스도 의심을 받아 밀라노로 불려왔다. 하지만 황후 플라비아 에우세비아의 도움으로 황제와 직접 대면하여 자신을 변호함으로써 살아남아 그리스로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반년 후 사산조 페르시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게 되고, 그렇다고 마그넨티우스의 반란 때문에 커다란 공백이 생긴 서방을 비워둘 수도 없었던 콘스탄티우스 2세는 결국 그에게 남은 유일한 남자 혈육 율리아누스를 부제로 삼았다.서방 부제가 된 율리아누스는 정제의 또 다른 여동생 헬레나와 결혼했지만, 제대로 된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갈리아 지역에 있었던 콘스탄티우스의 휘하장수들인 마르켈루스, 세베루스, 바르바티오 등등은 하나같이 율리아누스에게협조하기에는 미온적이었다. 율리아누스와 콘스탄티우스 2세가 비록 혈연으로는 사촌이지만, 율리아누스의 가계를 포함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방계 친척들을 싹 숙청해버렸기 때문에 생판 남보다 못한 친척이었기 때문이었을 터이다.
그렇게 율리아누스는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한 채로 한겨울에 알프스를 지나 갈리아로 갔지만, 다른 이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자신이 맡은 바를 잘해내었다. 제대로 지원도 받지 못하고 병력도 부족한 상황에서 갈리아의 군무장관 살루스티우스에게 도움을 받아, 그 적은 병력을 긁어모아 적극적으로 군사활동을 펼치며 견실하게 운영했다. 그리하여 5년 동안 원정을 4번이나 성공적으로 이끌어 담당구역인 갈리아와 라인강 방어선의 게르만족들을 격퇴하였고,[5] 적극적인 감세 정책과 농경 활성화 정책으로 갈리아 부흥을 꾀했다.
2.2.2. 정제로 추대되다
부제 율리아누스가 기대 이상의 성과를 올리는 동안, 정제 콘스탄티우스 2세는 도나우강 방어선을 지키면서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 페르시아 측이 국경지대에 있던 도시인 아미다를 점령하면서 국경선에 구멍이 나고, 이로 인해 큰 손실을 보면서 정제는 부제 율리아누스에게 지원병을 요청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율리아누스를 경계하고 견제하고 방해했던 이 정제는 이를 빌미로 크게 한방 먹일 생각이었고, 하필 이때 콘스탄티우스 2세의 방해를 막아주던 부제의 황후 헬레나와 정제의 황후 에우세비아가 죽고 말았다.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콘스탄티우스 2세는 부제 율리아누스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요구[6]를 하게 된다. 하지만 정작 이 차출의 대상이 된 병사들이 동방으로 가는 걸 거부했다. 오히려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이들 앞에 나선 율리아누스를 큰 방패에 태워 자기들 머리 위로 번쩍 들어올려 정제로 추대해버렸다! 그리고 율리아누스는 이들의 정제 추대를 받아들이고 콘스탄티우스 2세와 맞서기로 함으로써 다시금 내전이 발발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율리아누스는 정제에게 끊임없이 편지를 보내 해명하려 했고, 라인강 너머의 야만족들과 싸우면서 1년을 보내었다. 그리고 콘스탄티우스 2세가 페르시아와 강화를 맺고 기어이 자기를 치러 오자 재빨리 군사를 이끌고 시르미움에 도달하여 평화롭게 도나우강 방어선을 손에 넣는다. 그렇게 로마 제국의 양대 정예를 손에 넣은 율리아누스는 정제와 한판 붙기 위해 군사를 편성해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하는데...
콘스탄티우스 2세가 덜컥 죽어버렸다. 갑작스레 병에 걸려 죽어가면서 콘스탄티우스 2세는 자신을 치러 오는 부제 율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목했다. 어쨌든 유일한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남자 친척이었던 만큼. 그는 자기 후계자를 얻기 위해 결혼을 세 번이나 하였으나, 그가 죽고 난 뒤에서나 태어난 유일한 아이는 딸이었다고 한다. 이 여아의 이름은 플라비아 막시마 콘스탄티아로, 이후 그라티아누스 황제 대에 황후가 되었다.
2.2.3. 정제 율리아누스
제위 찬탈자로 나섰다가 졸지에 정통 황제가 되어버린 율리아누스는 자신의 확고한 지위를 이용하여 로마 제국을 개혁하기 시작한다. 그 첫번째는 황궁의 입을 줄이는 것. 재정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그 때 당시 황궁의 사치가 장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발사를 불렀더니 고관 대작의 행렬로 보이는 화려한 행차를 할 정도였다. 그래서 쓸데없이 많은 고용인을 모조리 쳐내고, 특히 환관들은 모조리 쫓아냈다. 물론 쓸모없는 인원을 쳐내면서 인건비를 절약할 수 있었다.또한 갈리아에서 했듯이 재정 지출을 대폭 감소하고 정리한 후 세금 감면책을 펼치고 복잡한 세금 체계를 간소화하는 등 세제를 개혁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전임자 콘스탄티우스 2세의 전제적이었던 통치와 의심이 많았던 성격을 혐오하여 도미나투스 이전 프린키파투스(원수정) 시절의 프린켑스처럼 백성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늘리고 권위를 다소 줄였다고 한다. 그러나 3세기 군인 황제 시대 이래 전제적인 통치에 이미 익숙해진 사람들 중 일부는 황제라면 황제답게 권위 있고 으리으리한 모습이 있어야지 뭐 저러냐고 반응했다.[7]
2.2.4. 배교자 율리아누스
하지만 무엇보다도 율리아누스를 유명하게 만든 개혁은, 바로 배교자 율리아누스라는 별명이 붙게 한 종교 정책 덕분이다. 예전 황제들의 박해처럼 대놓고 사람을 잡아다 죽이는 식은 아니었지만, 한창 진행 중이던 로마 제국의 그리스도교화를 정면에서 거스르는 방향으로 정책을 펼쳤다. 어쩌면 이 때문에 율리아누스가 죽었다고 봐도 될 정도로 큰 반발에 부딪혔다. 율리아누스가 만약 좀 더 오랫동안 통치했다면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우선 율리아누스는 모든 종교를 공인하는 칙령을 내렸다. 이는 밀라노 칙령 이후로 한창 성장하는 그리스도교에 밀리던 다른 종교들의 숨통을 트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제1차 니케아 공의회 이후로 이단으로 몰리던 그리스도교 내 다른 종파들에게도 믿음의 자유를 주었다. 그리스도교 내부로는 종파 간 다툼을 부추기고, 외부로는 다른 종교들의 재기를 노린 조치였다.
게다가 밀라노 칙령 이후로 사실상 면세였던 교회의 재산에도 세금을 매겼다. 밀라노 칙령 이후로 세금감면을 받기 위해 교회에 재산을 바치거나 성직자가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러한 사례들을 끊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기존의 방치된 다른 종교들의 신전과 도중에 중단되었지만, 오래 전에 불타버린 유대교의 예루살렘 성전을 복구하고 지원하여 다른 종교들의 제례를 부활시키고자 하였다.[8] 그리고 옛 종교들의 성지에 들어선 교회에 원 종교의 상들을 세우고 그리스도교의 성유물을 치웠다. 콘스탄티우스 2세가 폐쇄했던 원로원 내의 승리의 제단(Ara Victoriae)도 다시 복원했다.[9]
단순히 그리스도교와 다른 종교 간의 균형을 맞춘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선에서 그리스도교를 열심히 억압하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그리스도교 교사들이 교재로 그리스 고전을 사용하기를 금지하는 법률. 그리스도교도면서 어떻게 이교도의 신들을 다룬 책으로 교육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인데, 이런 대놓고 벌이는 차별에 오히려 이교도들이 반대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그리스도교도들을 공직에서 내쫓고, 황제 자신이 옛 로마 방식대로 희생제를 지냈으며, 교회가 불타고 주교가 추방되는 일도 빈번히 일어났다고 한다. 이미 제국 내에서 상당한 기반을 구축한 그리스도교 세력은 당연히 이러한 종교 정책에 거세게 반발했다. 그래서 로마가 그리스도교 국가로 변했음을 부정적으로 보았던 에드워드 기번은 율리아누스가 좀 더 오래 살았다면 로마는 대규모 종교 내전에 직면했을 것이라고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주장했다.[10]
한편 그리스-로마 전통 종교 교인이 많은 도시에는 혜택을, 그리스도인이 많은 도시에는 주어지던 면세혜택 등 우대를 줄이는 방식도 취했다고 한다. 예전 디오클레티아누스나 그 이전 황제들처럼 대놓고 폭력으로 다스리지는 않았는데, 그리스도교는 박해받았거나 박해까지는 아니라도 최소한 사회 주류가 아니었던 300년 세월을 버텨왔기에, 힘으로 다스려 봤자 순교자로 기리는 등 버티면서 내부적으로 더 단단해지는 기제가 이미 탄탄하여 소용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11]
종교정책에서 가장 얄궂은 부분은 율리아누스가 전문 성직자와 교리를 갖추도록 로마 종교를 재조직했다는 사실이다. 이런 데서 그리스도교의 영향이 보이기 때문에 얄궂다는 것. 율리아누스는 이교를 그리스도교라는 혐오스러운 대적의 본을 따서 재조직해야만 그 공격에 맞설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재조직의 방향이 저 모양이 되어버렸다. 거기에 황제 자신이 매우 금욕적인 사람이었고, 이런 까탈스러운 삶을 전통 종교의 전문 성직자들에게 강요했다. 그런데 그리스와 로마의 전통 종교는 전혀 금욕적인 분위기가 아니었다는 게 문제였다.[12]
12세기 동로마 제국 역사가 게오르기오스 케드레노스(Γεώργιος Κεδρηνός)에 따르면, 율리아누스가 362년에 개인 주치의이자 친구였던 오리바시우스(Oribasius)를 델포이로 보내어 신탁을 받았는데. 이것이 델포이의 '마지막 신탁'이었다고 한다.
Είπατε τω βασιλεί χαμαί πέσε δαίδαλος αυλά. Ουκέτι Φοίβος έχει καλύβην, ου μάντιδα δάφνιν, ου παγάν λαλέουσαν, απέσβετο και λάλον ύδωρ.
다이달로스 궁전이 땅으로 추락하였다고 황제에게 전하라. 포이보스(아폴론의 별칭)는 더 이상 자기 방도, 점술의 월계수도, 예언의 샘(카스탈리아 샘)도 없노라. 재잘거리는 물 또한 이미 조용해졌느니라.
케드레노스는 율리아누스 황제로부터 거의 700년 뒤 사람이므로, 율리아누스가 (케드레노스가 기록한 바대로) 정말로 델포이에서 저런 내용으로 신탁을 받았는지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로마 제국에서 떠오르는 신흥종교 그리스도교가 델포이 신전, 더 나아가서는 그리스-로마의 전통 종교에 맞서 강한 긴장상태에 있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다이달로스 궁전이 땅으로 추락하였다고 황제에게 전하라. 포이보스(아폴론의 별칭)는 더 이상 자기 방도, 점술의 월계수도, 예언의 샘(카스탈리아 샘)도 없노라. 재잘거리는 물 또한 이미 조용해졌느니라.
율리아누스가 안티오크에서 머무르던 당시 저술한 <카이사르>에서 콘스탄티누스 1세는 모든 신들에게 거부당한 뒤 예수 앞에 달려가고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을 미혹하는 자, 살인하는 자, 신성을 모독하는 자, 파렴치한 자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까이 오라! 이 물로 그를 씻어 즉시 정화시키리라. 같은 죄악을 두 번 저지른다 해도 가슴을 한 번 치고 머리를 한 번 때리면 다시 정화시켜 주리라. |
골육상쟁의 피해자로서의 쓰라린 상처가 묻어나는 대목이다. 율리아누스의 입장에서 무릇 신이라면 과거에 악행을 저지른 자를 단순히 회개했다고 용서해서는 안 되고 진실로 고결한 사람에게만 포상을 내려야 했다. 율리아누스가 그리스도교와 관련하여 가장 혐오했던 점은 바로 이렇게 아무런 자격요건 없이 '모두에게 구원을 약속한다.'는 것이었다.[13] 그러나 율리아누스의 이러한 관점은 대중에게 크게 어필하지 못했고 결국 그의 반그리스도교 정책은 그의 죽음과 함께 실패로 돌아갔다.
2.3. 동방 원정 그리고 전사 혹은 암살
363년 율리아누스는 전임 황제인 콘스탄티우스 2세가 준비하다가 끝내 이루지 못한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원정을 떠났다.[14] 안티오키아에서 병력 9만 명을 모아 그중 3만 명을 프로코피우스[15]에게 주어 아르메니아로 보내고 거기서 아르메니아 동맹군과 합세해 북쪽에서 사산 제국의 수도로 진격하게 했다. 율리아누스 자신은 직접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사산제국의 영토로 쳐들어가 몇 번 전투에서 승리하고 사산의 수많은 도시들을 함락시키고 진군하였으며 트라야누스 황제가 250년 전에 만든 운하까지 이용하였다. 그러나 수도 크테시폰에서 사산조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였다. 게다가 프로코피우스의 제2군은 갈라진 지 50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율리아누스는 퇴각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퇴각 행군 중이던 6월 23일 사산군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율리아누스는 갑옷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전위와 후위를 돌아다니며 용맹하게 싸우다가 적의 창에 복부를 깊숙이 찔렸다.[16][17] 율리아누스의 개인 주치의이자 친구였던 오리바시우스가 모든 조치를 다 취했으나 결국 부상을 치료할 수 없었고, 율리아누스는 31세로 세상을 떠났다.
율리아누스가 갑작스레 죽음으로써 로마의 사산 제국 원정은 실패했고, 로마 군단은 후임으로 율리아누스의 근위대장 출신이자 그리스도교도인 요비아누스를 황제로 세웠다. 결과적으로 율리아누스의 페르시아 원정은 제국에 재앙적인 타격을 입혔다. 최소 6만 5천 명에서 9만 명을 동원했는데 병력 대부분이 원정에서 죽어서 제국의 군사력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18] 요비아누스와 그 뒤를 이은 발렌티니아누스 1세, 발렌스의 치세에 율리아누스의 모든 종교 정책은 폐기되었고, 다신교적인 로마 제국의 역사는 율리아누스를 끝으로 완전히 막을 내렸다. 실제로 30년도 안 되어 테오도시우스 1세 때 그리스도교는 국교가 되었다.
3. 평가
율리아누스의 삶은 실로 파란만장한 고난의 연속이었다. 어릴 때 부터 피바람이 얼룩진 정치 숙청에 휘말려서 고아가 됐고, 최고 권력자들의 끝 없는 집요한 견제에 시달렸고, 전쟁 초짜에서 제국의 전선을 유지해는 군사령관으로 활약해야만 했던 등 산전수전을 다 겪은 인물이다. 고려 현종과 매우 비슷한 성장기였고 그나마 현종은 끝까지 생존해서 성군으로 이름을 남겼지만 율리아누스는 사촌형이자 일가의 원수이기도 했던 정제 콘스탄티우스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콘스탄티우스가 병으로 죽자 어쨌든 반란자라도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유일한 남성 일가붙이의 자격으로 상속받았던 애매한 방식으로 황제자리에 올라서 겨우 20개월 만에 전사(혹은 암살)을 당하니 변화무쌍한 율리아누스의 일대기를 보면 삶이 허무하다는 느낌까지 든다.음험한 사촌 형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의 숙청으로 율리아누스의 거의 모든 혈육을 죽었고 율리아누스와 그의 이복 형 갈루스는 어려서 비록 죽이지는 않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감금시켰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제국을 혼자 다스리기가 너무 광범하다고 느껴서[19] 부제로 맡길 수 있었던 친족들을 다 숙청시킨 원수가 친척인 율리아누스의 이복 형(갈루스)을 부제로 삼다가 갈루스가 기어오른다는 핑계로 또 숙청했다.
그런 원수가 다시 제국을 혼자 다스리기는 너무 힘드니 이번엔 마지막으로 남은 혈육인 율리아누스를 부제로 삼고 그것도 제국에서 가장 위험한 전선으로 꼽을 만한 갈리아-라인 전선으로 보냈는데 칼도 제대로 휘둘러 보지 못한 전쟁초짜인 율리아누스는 거의 떠맡기듯이 군사령관이 됐다. 워낙 그간 해봤던 짓들이 마음에 걸리는지 콘스탄티우스 2세는 율리아누스를 지원하기는커녕, 끊임없이 견제하며 대립구도를 형성했다. 이쯤이면 율리아누스의 입장에서는 콘스탄티우스 2세는 만악의 근원이라고 여겨도 콘스탄티우스는 할 말이 없을 정도. [20]
보통 쉽게 "위기는 기회다."라고 말을 하는 버릇이 있는데 말만 쉽지 현실은 이와 같은 엄청난 위기를 맞으면 대부분 무너지고 성공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율리아누스는 위기가 있을 때마다 급성장하는 성향이었다. 1. 굳은 의지와 긍정적인 마인드 2. 현장에서 빨리 필요한 스킬을 습득하는 뛰어난 적응성 3. 장기적인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주도면밀한 틀을 세우는 등의 강점으로 인해 위기를 역이용할 역량을 엿볼 수 있다. 아마도 워낙 평생 생사가 걸리는 환경에서 자라왔고 갈루스라는 반면교사가 있어서 그런듯.
실제로 군사적인 방면에서, 그것도 실시간 상황에서 뛰어난 습득력을 보여줬는데 당시 서방은 마그넨티우스의 반란으로 서방 전선이 텅 비어있었고 전쟁 초짜인 율리아누스에게 정제 콘스탄티우스는 지원조차 주는 것도 꺼리니 이러한 열약한 상황에서도 의지가 꺾이지 않고 차분하게 아직 남아 있는 장수들과 함께 전략전술을 구사하고 게르만족들을 연속으로 격파해서 국경을 사수하는 등 기염을 토했다.
거기에 위험을 느낀 정제 콘스탄티우스 2세는 율리아누스의 정예병 절반을 페르시아 전쟁 핑계로 압수하려고 했지만 율리아누스의 병사들은 황제가 본인의 상관을 너무 심하게 갈구고 있다고 생각해서 의분이 터졌던데다가 대부분이 서방 출신이라 고향과 지나치게 먼 페르시아와의 동방전선으로 가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여기서 나아가 율리아누스를 방패 위에 올려서 정제로 추대해버렸다. 이는 율리아누스가 국경 안정이란 '작은' 성과에 매달리지 않고 큰 그림을 그려 덕장답게 공을 너그럽게 장졸들에게 돌리니 군의 충성심을 확보했고 더 나아가 숙적인 콘스탄티우스 2세의 숙청 칼부림에 자연스럽게 방패를 만들었다.
또한 매우 주도면밀하게 전략을 수행했다. 정제에게 '휘하 군사들이 강제로 추대하여 하릴없이 이런 상황에 놓였다.'고 해명하는 제스쳐를 취하여 '반역자'라는 오명을 최소화해서 명분을 챙겼다. 분노한 콘스탄티우스 2세가 적국인 페르시아와 강화까지 맺고 기어이 서방으로 밀려오려고 하니 그 기회를 기다렸듯이 재빨리 정예군을 이끌고 도나우강 방어선까지 손에 넣어서 명분, 전략, 전술, 기동력의 우위를 놓치는 법이 없었다.
정략도 군략과 마찬가지로 매우 주도면밀했다. '배교자'란 별명과 달리 예전 황제들처럼 대놓고 박해를 하지 않았고 로마의 전통적인 '믿음의 자유' 즉, 모든 종교를 공인한다는 명분을 기대어 떠오르는 그리스도교를 견제했다. 율리아누스의 선택이 좋다 나쁘다 또는 시대의 흐름을 어긴다는 관점을 떠나서, 나름 명분을 세우고 본인의 뜻을 주도면밀하게 관철시키려는 점에서 큰 그림을 그리는 능력을 보여준다. '믿음의 자유'라는 명분을 들어 그리스도교 내 다른 종파들에게도 믿음의 자유를 줘서 내부적으로 다툼을 부추기고, 교회의 재산에도 세금을 매겨서 컨트롤 하려는 등 율리아누스 특유의 집요함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페르시아 원정에서 재위 20개월 만에 전사(암살)를 당하고 무려 로마군단 6만 5천~9만 명 대부분이 원정으로 죽어 제국 군사력에 큰 피해를 입혔다. 이 후폭풍은 후임 황제들이 감당해야만 했다. 그의 장기적인 계획이 시작하자마자 무로 돌아갔지만 이 역시 시대의 풍운아다운 끝이었다. 다만 그래도 이것이 그냥 헛수고는 아니었다. 율리아누스가 로마군을 상당 부분 사산조 페르시아에 꼴아박긴 하였으나, 로마군 또한 그 과정에서 사산조 페르시아의 꿀땅 거의 전체를 파괴했고, 사산조 페르시아의 대단히 많은 장병 또한 살상되었다. 이 때문에 사산조 또한 발렌티니아누스 형제가 게르만족 때문에 고생할 때 잠자코 있었다.[21]
[1] 기록으로 남은 정확한 이유는 없지만, 콘스탄티우스 2세가 손을 쓴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받는다. 하필 숙청이 있었을 때 그가 콘스탄티노플에 남아있었다는 이유도 있고, 황제의 혈육과 고관 대작이 죽은 커다란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처리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2] 한니발리아누스, 달마티우스: 둘 다 테오도라의 장남인 플라비우스 달마티우스의 아들들. 둘은 서로 동복.[3] 테오도라의 장남 플라비우스 달마티우스, 차남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 이 항목 율리아누스의 아버지[4] 콘스탄티누스 1세의 조카로서, 사촌 되는 그의 아들들에게 죽었다.[5] 특히 아르겐토라툼 전투에서 2배 이상의 전력차를 극복하고 기적적인 대승을 거두었다.[6] 이 당시 율리아누스의 병력이 2만가량인데, 그중에서 부대(1천 명)당 정예 300명을 차출하고 야만족 용병 4개 부대와 부제의 근위대에서도 인원을 차출해서 보내라고 요구했다. 그러니까 정예로 병력 반을 내놓으라고 했다.[7] 역사 유튜브 Kings and Generals의 'How Julian Became Known as Apostate' 영상을 참고했다.[8] 근본주의나 시오니즘 입장에서는 다신교를 숭상하던 고대 로마를 악의 제국으로 묘사하지만, 로마 제국의 그리스도교화 이후 이들의 권리 보호에 제일 앞장섰던 사람들은 얄궂게도 율리아누스처럼 이교 부흥을 노력하던 성향 황제들이나, 아일리아 에우도키아(테오도시우스 2세의 부인) 같은 이교 철학자 출신들이었다.[9] 하지만 얼마 안 가 그라티아누스가 다시 폐쇄하였다.[10] 사실 기번이 크게 틀렸다고 보기도 어렵다. 아닌 게 아니라 율리아누스의 사망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나지도 않아 테오도시우스와 에우게니우스 사이에서 대규모 종교 내전이 터졌기 때문이다. 이 내전이 결과적으로 서로마 제국군을 1차적으로 붕괴시켜서 서로마의 멸망에까지 간접적인 원인을 제공하는 등, 그 여파는 절대로 작다고 볼 수 없었다.[11] 역사 유튜브 Kings and Generals의 'How Julian Became Known as Apostate' 영상을 참고했다.[12] 원래 다신교인 그리스-로마 종교는 축제가 종교의식에 포함되었다. 디오니소스 축제, 아르테미스 축제는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도 축제 장면이 많이 나온다. 이집트 다신교 또한 마찬가지였고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힌두교 또한 축제(홀리 축제, 두르가 푸자 등)로 유명하다.[13] 사실 근본적으로 회개 교리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나, 율리아누스가 겪은 심적 갈등은 현대사회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근안이 가장 대표적인 예. 폭압적 권력이 사람과 종교에 주는 악영향이 2천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음에도 비슷하다는 것이 소름끼치는 대목이다.[14] 사산조 페르시아가 메소포타미아 서부, 북부와 아르메니아를 되찾으려고 로마를 지속적으로 공격하고 도발했던것도 있다.[15] 겉으로는 충실한 관료이자 뒷담까는 역사책을 써서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학자인 프로코피우스와는 동명이인이다. 그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 밑에서 봉직했기에 당연히 그와 동시대인이다.[16] 그리스도교도 병사에 의해 프래깅을 당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율리아누스의 근위병은 갈리아에서 데려온 심복들이었기 때문에 확실치는 않지만, 당시 황제 근위대 가운데에는 그리스도교도도 상당히 많았다. 율리아누스가 갈리아에서 지휘하던 병력은 상술하였든 2만이었지만 이때는 9만이었고, 심복들만 황제 근위대에 넣었다는 보장도 없다.[17] 그런데 장병들의 민심을 얻어내는 데 매우 탁월한 재능이 있던 율리아누스를 바로 옆에서 수행하던 병력이라면 전부는 아닐지라도 대다수는 그에게 엄청난 충성심을 가진 이들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한데, 만약 아군 병사가 찌른 것이 명백한 상황이었다면 의도든 실수든 나머지 병사들이 그것에 어떻게 반응했을지는 생각하기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런 정황을 암시하는 기록은 전혀 없다. 애초에 심각한 난전 상황이라면 율리아누스를 찌른 이가 누구였는지는 둘째치고 의도성이 있었는지 없었는지조차 증명할 방법이 없기에, 이런 음모론은 결국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는다.[18] 저 정도 병사를 모집하기도 어려울뿐더러 정예병은 더 키우기 어렵다.[19]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스 삼형제가 제국을 분할해서 군림하려고 했지만 삼형제가 서로 티격태격하며 싸워서 결과적으로 콘스탄티우스 2세 혼자만 남았다.[20] 훗날 율리아누스-콘스탄티우스 2세 내전에서 서로 군사충돌이 있기 전에 공교롭게 콘스탄티우스가 급사했는데, 유언에 정적인 율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인정했다. 물론 이는 대를 이을 직계 후계자가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 그간의 끝없는 숙청으로 율리아누스를 괴롭힌 죄책감을 덜기 위함이 아닌가 하는 분석이 있다.[21] 단, 니시비스 지역을 사산조에게 넘겨주었음은 큰 손실이었다. 아미다는 그후 얼마 못 가 수복했고, 이슬람한테 잃었어도 9~10세기 대반격기에 제국이 되찾았지만, 니시비스만은 제국이 망할 때까지 끝내 다시 얻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