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제67대 황제 다비드 티베리오스 Δαυίδ Τιβέριος | |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다비드 티베리오스 Δαυίδ Τιβέριος[1] |
출생 | 630년 11월 7일 |
동로마 제국 | |
사망 | 미상 |
동로마 제국 로도스 섬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641년 9월/10월 ~ 641년 11월 (2개월) | |
전임자 | 이라클로나스 |
후임자 | 콘스탄스 2세 |
부모 | 아버지 : 이라클리오스 어머니 : 마르티나 |
종교 | 기독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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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67-3대 황제. 641년 9월 어머니 마르티나에 의해 형 이라클로나스와 함께 공동 황제가 되었지만 얼마 후 폐위되었다.2. 생애
초명은 다비드로, 이라클리오스와 마르티나의 막내아들이다. 참회자 테오파네스에 따르면, 그는 콘스탄스 2세와 같은 날인 630년 11월 7일에 출생했다. 역사가 케실 헤네시는 이라클리오스와 마르티나 사이에서 여러 자식이 태어났지만 대부분 어렸을 때 죽거나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사실을 거론하며, 이라클리오스가 막내 아들에게 성경의 영웅 다윗 왕의 이름을 막내아들에게 붙인 것은 오랜만에 건강하게 태어난 아들에게 강력한 상징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조카딸과 결혼했기 때문에 천벌받고 있다는 세간의 비난을 무색하게 만들려는 시도라고 주장했다.638년 7월 4일 이라클리오스에 의해 카이사르에 선임되었고, 형 이라클로나스는 이복형 콘스탄티노스 3세와 함께 이라클리오스의 공동 황제가 되었다. 의식은 다프네 궁전의 예배당에서 개최되었는데, 콘스탄티노스 7세가 기술한 데 케레모니스(De Ceremoniis: 궁전 의식에 관하여)에 따르면 다비드는 카멜라우키온(kamelaukion: 카이사르가 착용한 모자)를 썼다고 한다. 역사가 월터 에밀 카에기는 이 행사는 황실의 여러 분파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완화하고 후계 구도를 명확히 해 이슬람의 침략으로 제국의 동방 영토가 침탈당하는 상황에서 제국의 단합을 도모하려는 시도라고 주장했다.
641년 2월 11일 이라클리오스가 붕어했다. 이때 마르티나는 다 죽어가는 남편을 압박해서 콘스탄티노스 3세, 이라클로나스와 함께 자신을 공동 통치자로 지정하는 유언장을 작성하게 했다. 이라클리오스가 사망한 뒤, 마르티나는 곧바로 피루스 총대주교와 원로원, 그리고 다른 고위 관리들을 원형 경기장에 불러서 공식 집회를 조직하고 유언장을 발표하면서, 자신이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그러나 그 자리에 모인 군중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거부했다.
"당신은 황제의 어머니로서 영광을 누리게 되었지만, 그들은 우리의 황제이자 주인입니다. 여인이시여! 당신은 야만인이나 다른 외국 사절들을 궁궐에서 맞이하고 대화를 나눌 수 없습니다. 성모님께서 로마 제국이 그런 고비를 맞이하는 걸 막아주시길 바랍니다."
마르티나는 결국 황궁으로 물러갈 수밖에 없었다. 얼마 후 콘스탄티노스 3세가 병에 걸렸다. 그는 칼케돈 궁전으로 가서 요양하였으나, 즉위한 지 석 달이 지난 641년 5월 25일에 사망했다. 그가 오래도록 앓았던 폐병이 악화되었거나 결핵에 걸린 게 사망 원인이었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민중은 마르티나가 그를 독살했다고 의심했다. 여기에 마르티나와 밀접한 관계가 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피루스가 공범으로 지목되었다. 아무튼 콘스탄티노스 3세가 사망하면서, 15세의 이라클로나스가 단독 황제가 되었고, 마르티나는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641년 9월, 동부 총사령관인 아르메니아계 장군 발렌티노스 아르샤쿠니는 마르티나 타도를 외치며 군대를 일으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했다. 마르티나는 수도 수비를 강화하였지만, 발렌티노스는 칼케돈까지 진격하여 압박하였다. 여기에 콘스탄티노스의 아들들을 황제로 세우라는 시위가 연일 계속되었다. 결국 마르티나는 민중을 달래기 위해 콘스탄티노스 3세의 아들 콘스탄스 2세와 다비드를 공동 황제로 즉위시켰다. 이때 다비드는 티베리오스(Τιβέριος)라는 이름을 추가로 받았다.
그러나 시위는 계속 이어졌고, 641년 9월 28일 성난 시민들이 아야 소피아에 침입하여 피루스 총대주교를 공격했다. 니키포로스는 다음날인 9월 29일 총대주교를 사임하고 카르타고로 달아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지키던 군대마저 봉기하여 황궁을 삽시간에 장악했고, 원로원의 명령에 의해 마르티나와 이라클로나스가 체포되었다. 마르티나는 혀가 잘렸고, 이라클로나스와 다비드 티베리오스는 코가 베어졌다. 여기에 또다른 아들 마르티노스는 거세되었다. 그 후 마르티나와 자식들은 로도스 섬으로 유배되었고, 다시는 섬을 빠져나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