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제44대 황제 막센티우스 MAXENTIVS | |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센티우스 (Marcus Aurelius Valerius Maxentius) |
출생 | 283년 |
로마 제국 로마 | |
사망 | 312년 10월 28일 (향년 29세) |
로마 제국 로마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306년 10월 28일[1] ~ 312년 10월 28일 (6년) | |
전임자 | 콘스탄티우스 1세 |
후임자 | 콘스탄티누스 1세 |
부모 | 아버지 : 막시미아누스 어머니 : 에우트로피아 |
배우자 | 발레리아 막시밀리아 |
자녀 | 발레리우스 로물루스 |
종교 | 로마 다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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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아들이자 갈레리우스 황제의 사위, 양자2. 생애
서기 306년 10월 28일, 공동황제 갈레리우스 황제와 발레리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정책에 불만을 품은 로마 시민들과 원로원[2] 그리고 근위대(프라이토리아니)[3]에 의해 황제로 추대된다.하지만 그냥 추대된 건 아니고, 본인의 야심과 나름 이유 있는 억울함이 이런 로마 시민들의 불만과 잘 맞물린 것이다. 적어도 막시미아누스는 은퇴했다곤 하지만(그것마저도 막시미아누스가 죽은 것도 아니었고, 자의로 물러나고 싶지도 않았는데,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물귀신마냥 같이 은퇴하자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내려간 것이었다.) 서방 정제로 286년 부터 305년까지 20년 가까이 제위에 앉아있었고 자기는 그 적자였음에도 부제 타이틀조차 얻지 못했는데, 콘스탄티우스는 그 20년 내내 아버지의 부하인 부제였고 정제는 꼴랑 1년 하고 죽었는데 그 아들인 콘스탄티누스는 그 1년 사이에 아버지 군대 안에서 뒷공작과 큰 그림을 그려 추대받아 먼저 정제로 흥정을 했고 결국 정제는 아니지만 부제 직위를 받아낸 것이라 빡치려면 빡칠 만 하다. 결국 사두정치에 내재된 근본적인 문제점을 이용한 꼼수로 자신보다 낮은 위치였던 콘스탄티누스가 먼저 부제직을 받아냈기에 충분히 억울할 만 했고 마침 혈통도 되다보니 황제로 추대 될 수 있었던 것이다.[4]
막센티우스는 과거에 맡은 공직이 기록되어 있지 않은데 이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친족 후계자 배제 정책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고, 그 역시 콘스탄티누스가 부제로 인정받기 전까지는 로마 내에서 조용히 살아가고 있었으나 콘스탄티누스가 정제를 칭한 후 갈레리우스가 부제직을 주자 막센티우스 역시 로마에서 세력을 이루어 갈레리우스에게 부제 또는 정제로 인정받으려 한 것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막센티우스의 정치적 감각이 보이는데, 본인 스스로 아우구스투스를 자칭하며 주변의 반발을 끌지 않고 '무적의 프린켑스'라는 명칭만 원로원으로부터 수여받은 후 정제 갈레리우스에게 인정받으려 한 것이다. 이때 갈레리우스는 콘스탄티누스는 인정했으나 막센티우스까지 인정하지는 않았는데, 이는 막센티우스에게 호의를 갖지 않은 개인적인 감정과 더불어 친족을 후계자로 최대한 배제하려는 정책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고 추정된다.
황제 자리에 추대된 막센티우스는 곧장 아버지인 막시미아누스를 불러와 같이 황위에 오르자 제안했고 이에 막시미아누스도 은퇴를 번복하고 로마에 입성해 다시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사두정의 내전)[5] 로마에서의 반란 소식을 듣고 서방 정제였던 발레리우스 세베루스가 공격해왔으나 막센티우스는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307년 2월 세베루스를 격파했으며 이후 라벤나로 퇴각한 세베루스를 동년 9월경에 포로로 붙잡아 처형한다. 그 동안에 갈레리우스가 가만히 있던 건 아니고 본인이 직접 이탈리아로 진압군을 이끌고 왔지만 그 진압군의 대부분이 막센티우스에게 전향하는 바람에 제대로 된 전투도 못 하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6]
이후 막센티우스는 아버지인 막시미아누스를 트리어로 보내 여동생인 파우스타를 콘스탄티누스와 결혼시키게 하고, 이를 통해 이탈리아의 지배를 묵인받는다. 하지만 막시미아누스는 막센티우스의 제안을 받고 제위에 올랐던 것이기에 막센티우스가 선임 황제였고 실제 원로원이 막시미아누스를 두 번째 황제로 선포하였기 때문에 막센티우스와의 지위 차이는 분명했다. 이에 질투를 느낀 막시미아누스가 막센티우스를 비방하는 연설을 하고 막센티우스의 자의를 찢어 퇴위를 시도한다. 그러나 군은 막센티우스의 편을 들었고 막시미아누스는 콘스탄티누스에게로 달아나 아들인 막센티우스를 비방한다.
당시 막센티우스는 북아프리카와[7] 이탈리아 지역을 통치했는데, 콘스탄티누스 측의 악선전과는 달리 교양도 풍부했고, 사람을 이끄는 매력도 충분한 인물이었으며 군사적 지휘 능력도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바로 윗 문단의 갈레리우스 군의 전향[8]도 그의 회유, 선전술 등 정치적 능력을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내치에도 꽤 재주가 있었던 듯하며, 부친 밑에서 십수 년 넘게 근무했던 군인들을 불과 몇 년도 안 되는 사이에 자기 사람들로 만들 정도로 수완이 대단했다. 로마의 기독교인들이 대놓고 콘스탄티누스를 찬양하는 데도 그들을 처벌하지 않았고, 경제난으로 로마에서 자신을 비난하는 시위가 일어나는데도 무력 진압하지 않은 것을 보면, 막센티우스가 대단히 자제력이 뛰어나고 정치적인 감각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적어도 한국, 아니 동양 유교적 기준으론 진짜 임금감은 어떻게 봐도 콘스탄티누스가 아닌 막센티우스였던 상황.
하지만 막센티우스에겐 불행하게도 최대 라이벌이었던 콘스탄티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갈레리우스의 밑에서 많은 경험을 쌓은 상태였고 군사적 명성 또한 대단했다. 반면 막센티우스는 즉위 이전까지 별다른 경력이 없고 아버지가 오히려 콘스탄티누스편에 서서 온갖 악선전을 행했던지라 여론전에서도 뒤져 있었다.
게다가 막센티우스는 모두의 공적이 된 상황이었다. 당시 실권황제였던 갈레리우스와 선임황제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자신을 제외한 모든 황제를 모았던 회합 때 갈레리우스의 친구였던 리키니우스를 서방의 정제로 올리고 막센티우스를 공적으로 선포한 것이다. 막센티우스는 엄연한 정제 발레리우스 세베루스를 죽였다는 죄가 확실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이 회동이 낸 정신 나간 결론 하나는 누구든 부정할 수 없었다. 그저 갈레리우스의 술친구라는 점 외엔 별 장점도, 실적도 없었던 인간을 세베루스의 죽음으로 빈 서방정제로 지명하는 조치가 그것이었다. 세베루스는 그나마 갈레리우스 휘하에 있을 때 세운 군공이라도 있어서 군사적 재능이라도 인정받았지, 리니키우스는 그마저도 없는 사람이었다. 콘스탄티누스가 리키니우스를 무시하고 선임 황제로는 결코 인정해주지 않았던 건 다 이유가 있었다.
갈레리우스가 사망하자, 프린켑스를 칭하고 있던 막센티우스는 원로원의 추대 형식을 통해 정식으로 아우구스투스가 된다.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부제에서 동방 정제로 승급되었다고 하지만, 리키니우스가 슬금슬금 동방으로[9] 옮겨오려 하고 있어, 적의 적은 나의 친구[10]의 원리로 리키니우스와 콘스탄티누스가 혼인동맹을 맺게 되자 자연스럽게 자신은 막시미누스 다이아와 동맹을 맺게 된다.
이후 막센티우스는 본진인 이탈리아에서는 세수를 확충하기도 어렵고 (즉위 자체가 로마, 프라이토리아니 등 이탈리아 세력의 권리 보호가 명분이었으니) 커져 가는 내부 불만을 막고자 다른 영토를 점령할 필요를 느끼는데, 이탈리아와 인접한 영토를 점유하고 있는 콘스탄티누스와의 결전은 결국 필연이었다. 그러던 중 아버지인 막시미아누스가 콘스탄티누스에게 반란을 일으키고 다시 황제가 되려 하다가 오히려 진압당하고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막센티우스는 아버지의 복수를 명분으로 콘스탄티누스에게 선전포고한 후[11] 결전을 준비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무리하게 군대를 확충하면서 이탈리아와 아프리카에 중과세를 할 수밖에 없게 된다. 방탕과 폭정을 일삼았다는 기록은 악선전이지만, 그가 이탈리아와 아프리카에 무리하게 과세해서 인기가 급격히 떨어졌던 건 사실이며 기독교측의 악선전은 주로 여기에 근거를 둔다.
막센티우스 휘하의 루키우스 폼페이아누스는 대단히 유능한 지휘관으로 성을 방어하는 입장에서 끊임없는 인병출격으로 콘스탄티누스군에게 상당한 손실을 강요하고 끝내 포위망을 뚫어 지원군을 끌고오는 데 성공했지만, 베로나 전투의 지휘관은 다름아닌 콘스탄티누스였다. 콘스탄티누스는 그렇지 않아도 불리한 최악의 상황에서 군대를 반으로 갈라 지원군을 몰고 오는 폼페이아누스를 향해 스스로가 선두에 서서 필사적으로 돌격했고, 폼페이아누스가 결국 콘스탄티누스의 돌격대에게 격살당하는 것을 보고 공황에 빠진 베로나 성은 스스로 항복하고 만다.
하지만 막센티우스에게는 아직 여력이 있었다. 그 다음 벌어지는 로마 근교에서의 전투에서 그가 전장으로 선택한[12] 밀비우스 다리는 콘스탄티누스가 어떻게 해도 전술적인 묘수를 부릴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결국, 알아도 대비하기 어려운 콘스탄티누스측의 전투력 탓에 결과는 앞서와 마찬가지로 콘스탄티누스측의 대승으로 나타나고 만다.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인들을 비롯한 당대 로마인들이 몹시 기이하게 생각한 돌격대장형의 지휘관이었다. 로마사를 보면 유명한 장군들이 일기토 등으로 일신의 무용을 뽐내는 장면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카이사르를 예로 들면, 그에 대한 여러 저술에서 전쟁/전투에 관한 것은 병참, 보급, 공성, 전투대형, 전술 등이 대부분이다. 스키피오, 폼페이우스, 마리우스, 술라도 마찬가지. 그런데 콘스탄티누스의 지휘 스타일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항우와 매우 비슷했다고 보면 된다. 최정예 기병대를 이끌고 가장 선두에 서서 적 전열의 가장 강한 지점부터 목숨을 돌보지 않고 돌격해 들어가는 오자병법식 전술을 즐겨 썼는데[13], 이건 막센티우스가 아무리 머리를 써도 해결이 어려운 부분이었다. 이런 오자병법식 전술은 우선 이겨놓고 싸우는 방식을 최우선시하는 손자가 극히 꺼리는 방식이긴 하였으나, 목숨을 건 정예 특공대가 있을 경우 수적으로 불리한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음은 오자가 이론과 실전 모두에서 증명한 바 있다. 콘스탄티누스가 시공간 자체가 현격히 다른 오자를 알았을 리 없으나 이런 정예 특공대를 통한 오자병법식 전술[14]은 거의 목숨을 내던지다시피 용맹하고도 무력이 강한 군인들의 존재가 선결 조건이었으니, 얼마나 콘스탄티누스와 그가 조련한 정예 기병들이 무시무시한 전투력을 지녔을지는 짐작이 어렵지 않다.
콘스탄티누스는 언제나 그랬듯 목숨을 돌보지 않는 무모한 돌격으로 막센티우스측의 최정예 보병 라인을 뭉갰고, 그 순간 막센티우스의 모든 대책은 수포로 돌아갔다. 결국 막센티우스는 밀비우스 다리에서 테베레 강으로 떨어져 익사하고 만다.[15] 여기서 더 나가서, 막센티우스는 죽은 뒤에도 콘스탄티누스의 로마 입성 행진에서 시신이 창에 꿰어졌고 또 그게 경고의 의미로 북아프리카로 보내지는 등 험한 꼴을 당했다.
부친이 좀 더 상식적인 인물이었다면, 통치술을 디오클레티아누스 밑에서 배웠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지 못해 결국 사후에서까지 기독교측의 악선전으로 이미지가 크게 망가진 안타까운 인물.
[1] 로마 시에서의 추대와 즉위 기준. 사두정치의 네 명과는 상관없는 것이라 엄밀히 말하면 참칭자 내지는 찬탈자(Usurper)라서 정제냐 부제냐의 구분은 의미 없다. 하지만 그러고도 6년을 버텼기 때문에 통상 그냥 황제로 인정한다.[2] 원로원 의원들에게는, 정제 및 부제위를 장군, 총독들끼리만 주거니 받거니 하니까. 시민들에게는, 디오클레티아누스 문서에 써 있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탈리아를 본국의 위치에서 격하시켜 일반 속주와 동등하게 했고, 면제되던 세금도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기서도 로마 시는 예외라 계속 면세의 특권이 남아 있었는데, 갑자기 정부(발레리우스 세베루스)가 로마 시에서마저도 특권을 폐지해 세금을 걷으려는 소문이 났다고 한다.[3] 프라이토리아니의 로마 시내 주둔기지를 정리하는 작업도 디오클레티아누스 이래로 계속 차근차근 시행되고 있었다.[4]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막센티우스와 막시미아누스 부자만 주장했던 논리로서, 막시미아누스는 이른바 아우구스투스 세니오레스, 즉 대표 황제 노릇은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콘스탄티우스는 정제 승격 전에 부제 시절에도 카이사르 요비우스로서 부제로서는 갈레리우스보다 선임자였고, 때문에 정제 승격 당시에는 당당한 대표 황제가 되었다. 즉 2차 4두 정치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지위를 승계한 건 갈레리우스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콘스탄티누스의 아버지 콘스탄티우스였던 것이다. 다만 나서기 좋아했고 권력욕도 강했던 갈레리우스와는 달리 콘스탄티우스가 이런 쪽에서 욕심 부리고 갈등을 빚어 제국에 피해를 주지 않으려 했던 탓에, 갈레리우스에게 주도권을 내주었을 뿐이었다.[5] 당시 로마는 두명의 황제와 두명의 부황제가 제국을 나누어 지배하는 방식으로 통치되었다.[6] 영어 위키백과에 defected(전향) to Maxentius라고 나와 있다.[7] 308년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알렉산데르가 북아프리카에서 황제를 자칭해서 311년에 격파했던 상태였던지라 막센티우스가 북아프리카의 실질적인 지배를 시작한 건 얼마 안 되었다.[8] 갈레리우스는 당시 로마 전체의 최강자였으므로 전투는 최대한 피해야 했다.[9] 서방에는 경쟁자가 콘스탄티누스, 막센티우스 둘인데 동방에는 경쟁자가 다이아 하나인 점 때문으로 보인다.[10] 원래 리키니우스는 서방 정제로, 서방에서 가장 중요한, 즉 정제가 영유할 땅은 당연히 로마 시가 있는 이탈리아고, 그런 이탈리아는 식량 안보 및 지정학적 특징 때문에 북아프리카와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원래라면 리키니우스의 땅이었을 곳을 막센티우스가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11] 콘스탄티누스가 20년 간 서방 정제였던 자신의 아버지이자 자기 장인을 죽였다는 명분이었다. 이것은 온갖 것이 전쟁 명분이 된 역사로 보면 전쟁 명분으로서는 차고 넘친다. 물론 본인도 아버지와 관계가 갈라지긴 했었지만 이건 질투심을 이기지 못한 막시미아누스의 잘못이지 막센티우스의 잘못이라 할 수 없으며 막센티우스 본인이 아버지를 직접 죽이거나 하진 않았다.[12] 로마 근교이므로, 오늘날 영국-프랑스 쪽의 콘스탄티누스가 공격하는 입장이었고, 이탈리아에 웅거했던 막센티우스는 수비하는 입장이었다.[13] 유럽에는 그 당시까지도 등자가 없었기 때문에 기병의 돌격력에 제한이 크게 걸렸고, 양성도 쉽지 않은 기병전력을 잘 훈련된 밀집보병대에 꼴아박는건 전술적으로는 대단히 불리한 행동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의 없는 장점까지 만들어가며 칭송하기 바빴던 기독교측 기록도, 이러한 일면에 대해선 강력한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14] 콘스탄티누스처럼 맹장 유형인 항우 또한 즐겨 쓴 전술이다.[15] 퇴각하다가 강물에 빠져 익사했는데, 그런 강물과 다리 자체가 전장이었으므로 사고사라기보다는 전사로 보는 것이 더 맞다. 해전을 치르다가 물에 빠져 죽은 것을 사고사가 아니라 전사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