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제33대 황제 발레리아누스 VALERIANVS | |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 (Publius Licinius Valerianus) |
출생 | 195년 |
로마 제국 | |
사망 | 260년/264년 (향년 65/69세) |
로마 제국 로마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253년 9월 ~ 260년 6월 (7년) | |
전임자 | 아이밀리아누스 |
후임자 | 갈리에누스 |
배우자 | 에그나티아 마리니아나, 코르넬리아 갈로니아 |
자녀 | 갈리에누스,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 |
종교 | 로마 다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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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33대 황제. 공화정 때부터 이어진 명문 귀족 집안 리키니우스 일족 출신.[1] 트레보니우스와 아이밀리아누스 사이에서 내전이 일어났을 때 군사를 일으켜 내전의 승자인 아이밀리아누스를 쓰러뜨리고 황제가 되었다. 황제가 된 후에는 방어선을 정비하고 장군감인 인재들을 발굴하고 양성하는 데 힘썼으며 [2] 아들 갈리에누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하여 적들의 침략에 대비했다. 또한 그리스도교를 탄압하여 로마 주교(교황) 식스토 2세와 카르타고 주교 키프리아누스가 순교했다. 그러나 260년 봄 에데사 전투에서 샤푸르 1세가 이끄는 페르시아군에 생포되었다.2. 생애
2.1. 황제가 되기 전
발레리아누스는 195년경 태어났는데, 그는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처럼 오랜 세월동안 원로원 의석을 세습해온 이탈리아 로마귀족이다. 그의 가문은 공화정 후기 1차 삼두정치로 유명한 크라수스를 배출한 크라수스 가문이 속한, 리키니우스 가문이다. 이 가문은 공화정 시대때부터 이어진 로마의 오래되고 유력한 소수의 귀족 가문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의 생애 중 즉위 전까지의 삶은 명확하지 않다.리키니우스 가문은 갈루스 가문처럼 옛 에트루리아의 유력 가문에서 시작된 귀족 가문이기도 했지만, 공화정 시대부터 제정 시대 이후에도 원로원 의원을 대대로 배출했으며 의석을 세습해왔다. 따라서 발레리아누스 역시 즉위 전까지 오랜 기간 원로원 의원 생활을 했는데, 여러 연구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당시 로마 원로원귀족들의 일반적인 방식처럼 그 역시 10대 중후반의 나이에 성년식을 올리고 결혼했고 일반적인 원로원 의원 자제들처럼 대대장부터 군복무를 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첫 아내의 친정 에그나티우스 가문은 그에게 도움을 이때 많이 줬을 것이라고 평가받는다. 그 이유는 장인과 장인의 형인 아내의 백부 퀸투스 에그나티우스 프로쿨루스 때문이다. 발레리아누스의 장인 루키우스 에그나티우스 빅토르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를 도와 다섯 황제의 해에서 공을 세운 루푸스 롤리아누스 장군의 사위로 명망 높은 원로원 의원이었다. 장인의 형으로 아내의 백부인 퀸투스 에그나티우스 프로쿨루스는 서기 219년 집정관으로 마리우스 막시무스의 형 루키우스 마리우스 페르페투우스의 사위였다. 따라서 발레리아누스는 이런 처가의 도움 아래 수월하게 에그나티우스 가문과 유대관계를 맺을 수 있었고, 처남 루키우스 에그나티우스 빅토르 롤리아누스와 아내의 사촌오빠로 서기 238년 집정관이 될 루키우스 마리우스 페르페투우스, 아내의 오촌 조카인 퀸투스 에그나티우스 프로쿨루스 등을 본인의 후원자, 파벌 일원으로 거느릴 수 있게 됐다.
세베루스 왕조의 엘라가발루스 또는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시대때부터 원로원 의석을 가문에서 이어 받고 경력을 쌓았다. 그는 처가의 인척들인 마리우스 막시무스에게 큰 도움을 받았을 확률이 농후하며, 마리우스 막시무스의 처남 디오 카시우스과의 친분 속에서 율리아 마이사, 율리아 마마이아, 울피아누스의 지원도 받아 명예로운 경력을 젊은 나이에 수월하게 마쳤을 것이라고 평가받는다. 그래서 그는 세베루스 왕조가 건재했던 238년 전에 보결 집정관을 지낸 상태였는데, 보결 집정관임에도 정규 집정관처럼 사회적 명망이 대단히 높았다.
발레리아누스는 세베루스 왕조가 붕괴되고,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집권한 뒤에도 원로원 안에서 그 위치가 공고했던 것이 여러 근거로 확인된다. 이는 아내의 인척인 루키우스 마리우스 페르페투우스가 이 시절 정규 집정관을 지내면서 원로원과 로마군 모두의 신망을 잃지 않았던 것도 컸지만, 그가 일반적인 로마귀족과 달리 어린 나이부터 군복무를 하면서 원로원 의원으로 경력을 쌓았던 점도 컸던 점도 이유였다. 따라서 발레리아누스는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몰락하던 238년, 당시 정규 집정관을 지내고 있던 아내의 가까운 친척 마리우스 페르페투우스가 집정관이던 당시, 그와 원로원 내부의 신망 있는 이들의 요청으로 프린켑스 세나투스 대리 역할 직책을 맡았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시대 동안 처가 식구 에그나티우스 빅토르 롤리아누스가 판노니아, 아시아 등에서 총독을 지내고 군지휘관을 두루 거쳤던 것을 생각해보면, 로마 귀족들의 관습과 족벌주의 특성상 발레리아누스 역시 비슷한 경력을 쌓은 것은 확실하다.[3]
6세기 역사가 조시무스에 따르면, 발레리아누스는 238년 고르디아누스 1세와 고르디아누스 2세 부자가 황제를 자처한 뒤, 현지 주민들의 추대로 제위에 오르는 척 명분을 쌓고 서한을 보냈을 당시 원로원 대표 중 한명으로 이들 부자의 대리인 및 가문 사람들과 협상을 했다고 한다. 이때 고르디아누스 1세는 당시 근위대장인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비탈리아누스를 죽이기 위해 암살자를 파견하면서 발레리아누스와 접촉했다고 한다. 따라서 일부 전통적인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발레리아누스가 고르디아누스 지지자였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발레리아누스의 처가 식구들의 인척 관계를 생각해보면,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그에게 접촉한 것은 당시 원로원을 이끈 집정관 중 한명이 발레리아누스의 후원자이며 발레리아누스 아내 에그나티아 마리니아나의 친인척인 루키우스 마리우스 페르페투우스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4]
고르디아누스 1세 측은 원로원 의원인 발레리아누스 외의 다른 동료 의원들에게도 사람을 보내, 로비를 하며 자신들의 황제 참칭이 문제가 있어도 원로원에서 지원을 해주어야 한다고 간곡히 호소하고, 본회의날에는 서한을 보내 원로원 동료 의원으로 두 황제와 일찍부터 원수인 누미디아 총독 카펠리아누스를 해임하고 제거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외에도 그들은 가문의 역량과 인맥을 총동원해 로마 곳곳에 로비를 하고, 대리인을 파견해 근위대와 서민들에게는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겠다. 얼마라도 돈을 주겠다"고 약속했으며, 지지자들을 통해 여론을 모으고 자경단 비슷한 무리를 만들었다. 또 추방자들에게는 "상상 이상의 모든 것을 약속하겠다"고 발표했으며, 근위대장 비탈리아누스에게 휘하 재무관으로 변장한 암살범을 보내 협상을 요구하는 척하고 그를 죽인 뒤 트락스가 비탈리아누스를 비열하게 죽인 것처럼 위장해 트락스의 잔인함을 거리 곳곳에 소문냈다. 이때 발레리아누스를 비롯한 원로원 내 협상단은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의 요청을 전반적으로 동조함에도, 고르디아누스 일가에서 조직을 꾸려 로마에서 폭동을 일으키자 대충 돌아가는 판을 눈치채고는 카펠리아누스 해임과 같은 부분에서는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이는 이들이 고르디아누스 쪽을 온전히 믿지 않아서 내린 결론이기도 했는데, 당시 죄없는 채권자, 은행가 등이 살해되고 치안 유지에 힘쓰던 사비누스가 돌에 머리를 맞아 순직하는 일까지 벌어져 발레리아누스와 원로원 입장에선 이렇게 행동해야만 했다. 더욱이 원로원 인사 대부분은 트락스 탄핵에는 찬성하면서도 여러 이유로 고르디아누스 측의 모든 요구 수용에는 사실상 반대 의견을 밝혔던 터라, 전형적인 원로원 귀족인 발레리아누스가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를 적극 지지했다는 추정까지 결론짓기에는 무리하다는 의견이 많다.
따라서 오늘날 각종 연구와 고대 기록 등을 토대로 238년 이후 상황을 정리해보면, 발레리아누스는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와 마찬가지로 238년 고르디아누스 1세와 고르디아누스 2세 부자를 강하게 지지하진 않았거나, 지지했다고 하더라도 전직 법무관이며 세습 원로원 의원 동료인 카펠리아누스의 입장까지 감안해 이런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당장 동시대 사가이며 관료 헤로디아누스의 기록만 보더라도, 당시 원로원은 "고르디아누스 당신이 약속한 것을 다 지킬 수 있다면 지지해주겠다. 진짜 믿어도 되느냐"는 입장 아래 움직였던 것만 보더라도 발레리아누스가 조시무스의 주장 그대로 행동해주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으니. 이런 배경 때문에 238년 4월 2일, 원로원에서는 율리우스 실라누스의 낭독 아래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탄핵이 통과되는데, 이 당시에도 원로원은 트락스를 증오하면서도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약속에 관해 살짝 의심하면서 "다시 한 번 묻는데 진짜 약속한대로 할 것이냐"고 전제를 달았다.
고르디아누스 측과의 협상을 한 이후의 발레리아누스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거의 없어 이후 행적은 불명확하다. 하지만 그가 뜻을 함께 한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와 마찬가지로 고르디아누스 3세, 필리푸스 아라부스 시절에 고위직에 후보로 이름조차 올리지 못한 것을 보면, 이때 일로 인해 후일 고르디아누스 가문 사람과 지지자들에게 미운 털이 박혔던 것이 확실하다. 따라서 고르디아누스 1세의 외손자로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복수를 외친 고르디아누스 3세 시대 아래에서는, 여러 이유로 인해 동료 의원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등과 함께 평범하게 원로원 의원 생활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고대 전승 기록 중 하나인 <로마황제열전>에 따르면, 발레리아누스는 이 시기동안 “60년간 칭송받을 만한 인생을 살았으며 영예와 관직을 남달리 훌륭하게 지켜왔다”고 한다. 또 그는 세력을 규합해 음모를 꾸미거나, 폭동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자리를 지키거나 영예를 얻은 적이 없고 “오로지 국가에 봉사해온 권리”, 즉 로마인들이 말하는 전 로마시민의 한결 같은 목소리로 영예의 자리(집정관)까지 오르게 됐다고 한다.
필리푸스 아라부스 집권 이후, 서서히 일이 풀렸던 것으로 보이며 발레리아누스는 40대에 접어든 무렵인 230년대에 이르러 집정관까지 지낸 로마 귀족 내 거물 중 한명이 되었다. 이때 아내의 남자형제 에그나티우스 빅토르 롤리아누스가 발레리아누스의 고속승진에 큰 도움이 된 인맥으로 추정된다. 그는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고르디아누스 3세 집권 이후, 고위직을 독차지하지 못한 발레리아누스와 달리 고르디아누스 3세 통치기간때인 242 ~244년 아시아 속주 총독에 파견됐다. 물론 아시아 총독 자리가 일반적으로 원로원 세습 의원 중 자격 요건이 되는 이들끼리 제비뽑기로 선정된다는 점에서, 롤리아누스가 고르디아누스 3세 내각의 신임을 크게 받았다고 확신하긴 어렵다. 그렇지만 롤리아누스는 고르디아누스 3세 사후 제위를 차지한 필리푸스 아라부스와 그 형 율리우스 프리스쿠스 등과 친분이 있고 그들의 신뢰를 얻어내, 고르디아누스 3세 사후에도 아시아 총독 자리를 보장받고 페르시아 원정 직후의 필리푸스에게 추가적인 지원을 듬뿍 받았다고 한다. 이는 발레리아누스 역시 마친가지였는데, 그 역시 처남이 필리푸스 형제의 신뢰를 받았고 필리푸스와는 악감정이 없어 서서히 경력이 풀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발레리아누스가 잘 나갔던 시기는 같은 이탈리아 태생의 세습 의원 출신 공동황제 푸피에누스, 발비누스 시대때였으며 계속 고위직을 역임했다가, 고르디아누스 1세의 외손자와 고르디아누스 가문 쪽이 이끈 당파가 집권하면서 제국의 요직을 차지하지 못하거나 정체된 모양새를 띠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발레리아누스의 인생에서 로마 핵심 고위직에 올라 원로원 내 실력자가 된 시기는, 옛 푸피에누스, 발비누스 쪽 진영 귀족들처럼 필리푸스 재위기와 데키우스 즉위 이후였다. 이 시기 그는 데키우스와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에게 신임을 얻었고 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데키우스는 발레리아누스를 직접 지명해 감찰관 자리를 줬다. 12세기 동로마의 역사가 요안니스 조나라스에 따르면, 일리리쿰으로 데키우스 황제가 친정을 가자 로마 행정과 치안 업무를 대리하는 중책까지 담당했을 정도로 신임을 받았다고 한다. 이는 데키우스의 전사 이후, 뒤를 이은 갈루스 시대에도 계속 되었다. 이때 발레리아누스는 60이 다 된 고령의 나이에, 갈루스를 지지하는 세력의 군사지휘권까지 맡았다. 따라서 발레리아누스는 갈루스의 명에 따라 도나우 강 상류지역까지 가서 갈루스 군을 규합했다. 그러다가 그는 아이밀리아누스가 갈루스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갈루스 부자가 253년 8월 이탈리아 로마 북쪽의 도시 인테람나 근처에서 병사들에게 살해됐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2.2. 황제
2.2.1. 즉위
발레리아누스는 규합한 병사들에게 죽은 갈루스를 대신해 자신을 황제로 선포하게 한 뒤, 3개월 전인 여름 아이밀리아누스가 그런 것처럼 이탈리아로 서둘러 진군했다. 따라서 아이밀리아누스는 자신을 지지한 군을 다시 모아 발레리아누스와 맞붙으려고 했는데, 이때 아이밀리아누스는 절제된 통치를 천명하고 원로원에게 스스로를 “그들(원로원)의 장군”이라고 하면서 원로원과 군대의 지지를 동시에 얻으려고 했다. 하지만 아이밀리아누스는 ‘피의 다리’로 알려진 스폴레토 근처에서 휘하 병사들에게 무참히 살해됐다. 따라서 발레리아누스는 아이밀리아누스와 직접적인 대결도 없이 88일 만에 갈루스의 복수를 하고 제위에 올랐다. 이때 발레리아누스는 58세의 고령이었고 그가 공동황제로 지명한 장남 갈리에누스는 40살이었다.2.2.2. 협동 황제
즉위 당시 58세였던 발레리아누스는 253년 10월 수도 로마에 들어가자마자 원로원과 로마민중들에게 지지를 받고 별 어려움없이 황제로 인정받았다. 이때 함께 로마로 입성한 장남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에그나티우스 갈리에누스는 아버지의 요청에 따라 40살의 나이에 공동황제가 됐으며, 첫 아내 에그나티아 마리아나의 남자형제 루키우스 에그나티우스 빅토르 롤리아누스는 수도 로마의 치안과 행정을 담당하는 수도 장관에 지명됐다. 이는 발레리아누스가 에그나티우스 가문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이 가문과 밀접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는 장남 중심의 후계구도를 굳히겠다는 결정과 똑같았다.즉위 이후, 어느 정도 안정을 찾자마자 넓은 제국을 동부와 서부로 나눠서 부자가 최대한 역량을 활용하려고 계획했다. 즉, 공동황제 제도를 일종의 협동황제 개념으로 활용하려고 했다.
이런 계획 때문에 발레리아누스는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위협과 공격으로 혼란해진 동부를 맡았고, 장남 갈리에누스에게는 서부 전체의 총괄권을 부여했다. 발레리아누스는 즉위 후 254년, 255년, 그리고 257년 집정관에 올라 자신과 아들의 제위 안정화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또 그는 페르시아의 왕 샤푸르 1세의 침략으로 박살나고 있던 안티오크 등 동방의 시리아 속주 내 주요도시 상황 해결에 매진했다. 그래서 발레리아누스는 254년 서둘러 안티오크에 도착해 동부에서 지내며 이 일대 안정화와 페르시아군 격퇴에 노력한다.
2.2.3. 부자의 분투
갈리에누스는 254년 이래로 갈리아 및 라인강 일대에서 알레만니족과 프랑크족을 상대로 정신없이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그러면서 갈리에누스는 도나우 강까지 넘기 시작한 마르코만니족과 알레만니족까지 상대해야 했다. 이와 동시에 발레리아누스 역시 제국 동부에서 에메사의 성직자 우라니우스 안토니누스 반란을 진압하는 것을 시작으로 시리아 속주 내 크고 작은 전투를 하면서 속주 안정화에 온 힘을 쏟았다. 따라서 원로원은 이런 발레리아누스에게 ‘동방의 복구자’, ‘인류의 복구자’라는 존칭을 부여했다.그리고 그 이듬해부터 발레리아누스는 260년 샤푸르 1세에게 생포될 때까지 몇 년동안 계속해서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전투를 치렀다. 하지만 이 전투들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고 257년 승전 내용을 통해 그가 페르시아 상대로 거둔 승리의 대가로 원로원으로부터 ‘세계의 복구자’라는 거창한 칭호를 부여받은 것만 확인해볼 수 있다.
2.2.4. 기독교 박해
발레리아누스가 사후 후기 로마제국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포로가 됐다가 분사한 것이 조롱거리가 된 이유는, 본인이 황제가 된 뒤 외세의 침입이 심각함을 밝히면서도 권력 강화 수단의 한 방법으로 지나칠 정도로 기독교 박해를 벌였기 때문이다. 그는 데키우스처럼 제국 동방에서 지속적으로 기독교 박해를 했는데, 데키우스보다 조직적, 광범위적으로 이를 단행했으며, 정적들을 숙청할 때에도 이를 명분으로 내세웠다. 따라서 그는 살아생전부터 초기 기독교도 작가들에게 미움을 많이 받았고, 포로생활을 한 뒤 죽은 이후 신이 분노해 수치스럽게 종말한 증거물이라는 소리를 들었다.발레리아누스의 기독교 박해는 전임자 중 한 명인 데키우스와 달리 로마 상류층 사회 내에서의 기독교 근절을 위한 박해였다는 평이 있다. 왜냐하면 257년과 258년 소위 ‘쌍둥이 칙령’이라고 불린 두 번의 칙령을 통해 로마 사회 내 기독교 근절 및 기독교도 박해를 했기 때문라고 한다.
하지만 발레리아누스의 기독교 박해 명령은, 로마 엘리트 사이의 기독교 확산을 인정하면서 유화책을 펼친 아들 갈리에누스와 달랐고, 데키우스보다 관용적인 측면이 적었다. 그는 친족에게조차 관용적이지 않았으며, 정적들까지 이를 명분으로 숙청으로 대하면서 두 차례에 걸쳐 조직적이고, 광범위하게 펼쳤다.
그는 페르시아와 전쟁을 하는 동안, 원로원에 두 통의 편지를 보내 "기독교인들을 단호히 처벌하라"고 지시했으며, 원로원 내 기독교도 원로원 의원과 원로원 귀족 가족들을 색출하기 위해 로마 신들에게 숭배행위를 하지 않으면, 그들의 칭호와 명예, 재산을 잃게 될 것이라고 협박하고 숭배 거부시 처형하도록 명령했다. 또한 그는 쌍둥이 칙령으로 불린, 257년 명령과 258년 명령을 엄격히 집행하면서, 이를 명분으로 본인과 의견이 상충된 원로원 의원, 관료을 숙청했다. 이때 그는 리키니우스 가문의 황실가족이나 원로원 가문 사람 중 로마 신을 숭배하지 않은 이들을 노예처럼 황실 영지로 보내 강제 노역을 하도록 했다. 이것은 당시 기독교도들이 상류사회에도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발레리아누스와 갈리에누스 부자 공동통치 시절에 순교한 이 중에는 발레리아누스 형제의 딸로, 갈리에누스의 조카 혹은 친척인 성녀 리키니아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외에도 발레리아누스는 쌍둥이 칙령을 반포해, 저명한 기독교 신자들을 대거 처형했다. 나르본에서는 프루덴티우스가 257년 처형됐고, 이듬해에는 교황 식스토 2세가 야누아리오, 빈첸시오, 마노, 스테파노, 펠리치시모와 아가피토, 라우렌시오 등과 함께 8월 6일에 순교했다. 이 외에도 성 로마누스 오스티아리우스(8월 9일), 성 로렌스(8월 10일)도 이때 순교했다고 기독교 사가들은 말한다.
따라서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시대 이후 관용적으로 대응한 로마 정부의 방식과 달리, 데키우스 시대처럼 혹독한 면이 많았다고 비난받았다. 다만, 발레리아누스의 장남으로 당시 서방을 담당한 갈리에누스는 아버지와 달리 기독교에게 관용을 베풀었고, 아버지의 이런 방식을 대단히 부정적으로 여겼다. 이런 이유로 갈리에누스는 단독 통치 직후부터, 아버지가 내린 기독교 탄압을 칙령으로 폐지하고 이들을 보호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2.3. 포로생활과 사망
포로로 잡힌 발레리아누스 앞의 샤푸르 1세를 새긴 부조[5] |
발레리아누스는 아들 갈리에누스와 비교해 눈에 띠는 승리가 적었지만, 동방에서 페르시아를 상대로 분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260년 초여름, 그는 페르시아 측의 맹렬한 공격으로 다시 치열한 전쟁을 재개했는데, 이때 발레리아누스 휘하 로마군에서는 전염병이 돌면서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병력도 격감했다. 또 에데사는 다시 페르시아군의 포위공격을 받았다.(에데사 전투)
그래서 발레리아누스는 협상을 통해 군대를 빼내려고 했다. 이때 샤푸르 1세는 발레리아누스에게 얼마 안 되는 소수의 수행원만 동반해 직접 대면하는 것을 요구했는데, 이는 샤푸르 1세의 계략이었다. 하지만 발레리아누스는 어떤 이유 때문인지 샤푸르 1세의 요구대로 소수의 수행원과 병사만 데리고 나섰다가 그대로 휘하 병사들과 포로가 됐다. 여기에는 황제 외에도 근위대장, 고위 관료, 원로원 의원까지 포함되었다. 이후 발레리아누스는 끝내 풀려나지 못한 채 고령의 나이에 온갖 수모를 겪고 사산왕조 페르시아에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4세기 이후 역사서 기록(특히 초기 기독교도 저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황제는 포로가 되어 지방 곳곳에 끌려 다니며 샤푸르 1세의 승리를 입증하는 살아있는 증거로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고 그 후로도 샤푸르 1세가 말에 올라탈 때마다 인간 발판이 된다. 결국 로마 제국으로 끝끝내 되돌아가지 못하고 그곳에서 옥사했다. 게다가, 일부 기독교도 저자들 기록에 따르면 황제가 사망 후 가죽이 벗겨져 그 속은 지푸라기가 채워지고 박제 인형이 되어 샤푸르 1세의 대승을 기념하는 증거로서 신전에 전시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 야사에 불과할 뿐 과장되었다는 설도 있고, 반대로 실제로 그랬을거라는 이야기도 있다. 먼저 실제로 했을 수도 있다는 측의 주장을 살펴보면, 샤푸르 1세와 발레리아누스가 대군을 이끌고 대규모 전투를 치를 정도로 양국 간의 사이가 벌어질 때로 벌어졌으며 로마 제국은 황제가 직접 참전했음에도 전투에서 크게 대패하고 사로잡힐 정도로 과거 주변 국가들에 대해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던 패권을 누렸던 제국이 더이상 아님이 명백하게 입증되었는데 대규모 전쟁에서 로마군을 갈아버릴 국력을 과시하던 당시 사산조 페르시아에서 자신들의 업적을 과시했으면 과시했지 필요 이상으로 사이도 안 좋은 적대국에 대해 그렇게 눈치를 봤겠냐는 의견도 존재한다.[6][7]
그러나 고대 전승기록 중 기독교인 저자들의 주장이나 로마인들 사이에 돈 소문과 달리 발레리아누스의 포로 생활은 그렇게 비참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고, 실제로는 황제가 포로가 된 지 1년여 만에 홧병으로 사망했을 뿐이라고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그러면서 이 주장을 펼치는 측의 현대 연구자들은 발레리아누스의 포로생활이 치욕과 비참함의 연속으로 흘러가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런 주장을 하는 대표적인 현대 연구자 중 한 명인, 이란 태생의 저명한 고대사 역사가 새투라지 다야이 미국 캘리포니아대 교수에 따르면 사산왕조 페르시아 내에서 발레리아누스와 포로 잡힌 로마인들은 샤푸르 1세로부터 풀려나지는 못했지만, 수도 또는 그 근처의 쾌적한 환경의 도시에서 소문과 달리 훌륭한 대우를 받으며 포로생활을 했다고 한다. 다만 훌륭한 대우를 받으며 포로생활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최초로 로마 황제가 적군에게 사로잡혔다는 사실에 충격과 실의 속에 살다가 그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죽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을 것이다.
다야이 외에도 고대 기록에서의 비참한 포로생활을 반박하는 주장은 여러 정황을 증거로 제기되고 있다. 그러면서 그들은 실상 로마 황제와 로마 제국의 고위층 인사들이 그 정도로 가혹하게 당했다면 로마 측에서도 나중에 국가를 재건한 뒤 정식으로 문제삼든지, 보복할 때 명분으로라도 썼을 텐데 그런 사례가 전혀 없다고 여러 정황을 근거로 추가 제시를 하고 있다. 특히 결정적으로 발레리아누스의 생포 후 그리 머지 않은 39년 뒤의 299년에 동방 부제 갈레리우스가 사산조 페르시아를 물리치고 크테시폰을 일시 점령하였을 때, 로마의 갈레리우스는 위 가혹행위가 실존하였을 경우 이를 명분으로 삼기에 충분했을 텐데 실제로 그러하지 않았다. 또한 사산 왕조 입장에서도 포로가 된 로마 최고위층 포로들을 외교적 문제 때문에 실제로 가혹행위를 해서 좋을 것은 없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3. 영향 및 평가
발레리아누스가 오늘날 대중들에게 한 어떤 일보다도 유명한 사실은, 그가 포로가 된 황제라는 사실이다. 그것도 로마 역사상 최초로 로마 황제가 적군과 싸우다가 포로가 된 사례였다. 그리고 이 사실이 로마 전역에 퍼진 결과 제국은 팔미라 제국, 갈리아 제국이 독립하여 세 조각 나 버린다. 어떠한 업적보다도 포로가 된 황제라는 사실이 가장 크게 남아 버린 것이다.실제로, 사상 최초로 황제가 포로가 되었다는 것은 제국 전체는 물론 그의 가문에게도 비극이었다.
국가적 비극이 된 것은, 먼저 그 자신만 포로가 된 것이 아니라 로마 제국 전체의 제위와 정통성을 유지할 엘리트 층 인사들까지 사로잡혔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로마 황제의 권위는 그야말로 무너져 내리게 된다. 또한 이 사건 이후, 발레리아누스가 담당했던 제국 동부는 카파도키아가 점령당하고 약 40만 명의 주민이 페르시아 남부로 추방되듯이 이주되면서 반란이 일어나게 된다.
가문의 비극이라는 것은, 아버지가 포로가 되었다는 것은 공동 황제이면서 서방에서 훌륭한 성과를 낸 장남 갈리에누스에게는 그야말로 재앙이었기 때문이다. 갈리에누스는 아버지가 이렇게 포로가 된 뒤 일시적인 분열 속에서 반란을 끝없이 경험했다. 동부에서는 풀비우스 마크리아누스, 소 마크리아누스, 퀴에투스 등이 반기를 들고, 제국의 보호국 내지 자치도시들은 반기를 들어 독립 움직임이 시작됐다. 서부에선 갈리아 일대를 사실상 전담해온 포스투무스가 갈리에누스가 반란 진압으로 정신없는 틈 속에 발레리아누스가 생전부터 신경 쓴 리키니우스 세습 체계의 후계자 살로니누스를 살해하고 갈리아 제국을 선포하며, 발레리아누스가 생전 계획한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갈리에누스는 이 과정에서 끝없는 반란을 진압했음에도 아버지와 함께 취한 내정 개혁에 불만을 표하는 세력들이 나타남에 따라 통치 기반이 흔들리게 되었고, 이는 발레리아누스가 집권 직후부터 취한 세습왕조 구축의 장애물이 됐다. 그러다가 갈리에누스는 결국 근위대장인 아우렐리우스 헤라클리아누스의 손에 살해됐고, 그 일가는 멸문이나 되듯이 일거에 몰락했다.
따라서 발레리아누스는 재위 7년 동안 제국을 안정적으로 통치하며 세베루스 왕조의 뒤를 잇는 새로운 왕조를 구축해 나갔으나, 일순간의 실수로 제국과 가문 모두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고 하겠다. 이런 탓에 군인황제시대의 황제들이 재평가받는 추세 속에서도 부정적인 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 카이사르-폼페이우스와 함께 1차 삼두정치에 참여한 크라수스가 속한 에트루리아계 귀족 가문이다.[2] 이 중에는 나중에 황제가 되는 아우렐리아누스와 프로부스가 있다.[3] 발레리아누스의 장남 갈리에누스의 전체 이름, 고향, 성장과정, 단독 황제 등극 이후의 집권세력, 갈리에누스 아들들의 이름 등을 보면 발레리아누스와 에그나티아 마리아나의 결혼만으로도 리키니우스 가문과 에그나티우스 가문의 끈끈한 연대가 대단했음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더군다나 갈리에누스가 암살됐을 때, 로마에서 원로원에게 살해된 발레리아누스 식구들은 갈리에누스의 아내와 어린 아들, 갈리에누스의 이복동생이자 발레리아누스의 차남 소 발레리아누스 외에도 갈리에누스의 외가이자 발레리아누스의 첫 처가인 에그나티우스 가문의 에그나티우스 빅토르 롤리아누스와 그 아들도 포함됐다. 이는 에그나티우스 가문과 밀접한 관련이 없던 성 리키니아를 배출한 리키니우스 가문의 방계 황족들과 소 발레리아누스 자녀들이 원로원에게 추방되거나 처형되지 않은 것을 보면, 발레리아누스의 리키니우스 가문 역시 이러한 부분에서 로마 귀족들의 족벌주의 관습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이 곳곳에서 확인된다.[4]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는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를 상대로 봉기하고, 준비한대로 황제를 참칭하면서, "이탈리와 푸닉은 하나가 되어, 폭군 막시미누스를 타도하자"고 주장했다. 이때 푸닉의 대표 권세가 중 발레리아누스와 친인척 관계인 집안은 마리우스 막시무스와 그 일가였고, 이 집안을 이끈 이는 238년 당시 정규 집정관으로 상석을 차지 중인 루키우스 마리우스 페르페투우스였다.[5] 이란 쉬라즈 근처의 나크쉐 루스탐 유적에 있는 다리우스 1세의 무덤 바로 옆에 새겨져 있다.[6] 사실 군주 입장에선 외국의 군주라도 일단 군주인지라, 가혹하게 다뤘다간 되려 해당 국가의 증오를 사며 혹시라도 나중에 자신이나 자신의 자손(후대 왕)이 똑같이 당할 명분을 스스로 남기는 꼴이 되기 때문에 그냥 죽여버리든가 최소한의 예우는 해줬으며 쓸데없는 모욕을 알아서 삼갔다. 백제의 성왕이 신라의 포로로 잡혔을 때도, 신라군 장수 도도가 그래도 왕이었기 때문에 성왕에게 두 번 절하고 존댓말을 하며 최대한의 예의를 차려 허락을 구한 후 처형했다.[7] 더군다나 로마는 아르메니아 같이 중간에 낀 처지의 소국도 아니고 로마는 (비록 군인황제 시대로 인해 크게 어지럽고 부패해졌으나) 그래도 당대에 여전히 거대하고 국력이 막강한 국가였다. 업적 과시용으로 가혹행위를 해봤자 보복의 빌미만을 제공할게 뻔한데 그렇다고 해서 로마의 보복을 씹어버릴 정도로 사산왕조가 로마를 압도하는것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