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1-31 11:22:52

발레리아누스

 
{{{#FCE774 {{{#!wiki style="margin: -26px -10px -5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F0E09, #9F0807 20%, #9F0807 80%, #8F0E09)"
{{{#!folding [ 펼치기 · 접기 ]
{{{#181818,#E5E5E5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font-size: 0.95em; letter-spacing: -0.35px"
원수정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아우구스투스 | 티베리우스 | 가이우스(칼리굴라) | 클라우디우스 | 네로
네 황제의 해 갈바 |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 | 비텔리우스
플라비우스 왕조 베스파시아누스 | 티투스 | 도미티아누스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네르바 | 트라야누스 | 하드리아누스 | 안토니누스 피우스 | 공동 즉위 루키우스 베루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콤모두스
비정통 아비디우스 카시우스
다섯 황제의 해 페르티낙스 |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 페스켄니우스 니게르 |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세베루스 왕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 공동 즉위 게타 · 카라칼라
- 마크리누스 · 디아두메니아누스
세베루스 왕조 엘라가발루스 |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군인 황제 시대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 공동 즉위 고르디아누스 1세 · 고르디아누스 2세 | 공동 즉위 푸피에누스(막시무스) · 발비누스 | 고르디아누스 3세 | 필리푸스 아라부스 · 필리푸스 2세 | 데키우스 | 공동 통치 데키우스 ·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 | 공동 즉위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 호스틸리아누스 · 볼루시아누스 | 아이밀리아누스 | 공동 즉위 발레리아누스 · 갈리에누스 |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 퀸틸루스 | 아우렐리아누스 | 타키투스 | 플로리아누스 | 프로부스 | 카루스 | 공동 즉위 누메리아누스 · 카리누스
비정통 스폰시아누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등장
- 카리누스 · 디오클레티아누스
서방 동방
양두정치 막시미아누스 양두정치 디오클레티아누스
사두정치
막시미아누스 | 콘스탄티우스 1세 | 발레리우스 세베루스 | 막센티우스 | 2차 재위 막시미아누스 | 콘스탄티누스 1세 사두정치 디오클레티아누스 | 갈레리우스 | 리키니우스 | 막시미누스 다이아 | 발레리우스 발렌스 | 마르티니아누스
통일
콘스탄티누스 왕조 콘스탄티누스 1세
서방 동방
콘스탄티누스 왕조 공동 즉위 콘스탄티누스 2세 · 콘스탄스
비정통 마그넨티우스 · 율리우스 네포티아누스 · 베트라니오
콘스탄티누스 왕조 콘스탄티우스 2세
통일
콘스탄티누스 왕조 콘스탄티우스 2세
서방 동방
콘스탄티누스 왕조 율리아누스 콘스탄티누스 왕조 콘스탄티우스 2세
통일
콘스탄티누스 왕조 율리아누스
- 요비아누스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발렌티니아누스 1세
서방 동방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발렌티니아누스 1세 | 그라티아누스 | 발렌티니아누스 2세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발렌스
비정통 프로코피우스
비정통 에우게니우스
테오도시우스 왕조 마그누스 막시무스 · 플라비우스 빅토르 테오도시우스 왕조 테오도시우스 1세
통일
테오도시우스 왕조 테오도시우스 1세
서방 동방
테오도시우스 왕조 호노리우스 | 콘스탄티우스 3세 | 발렌티니아누스 3세
비정통 히스파니아의 막시무스
테오도시우스 왕조 아르카디우스 | 테오도시우스 2세 | 마르키아누스
비정통 콘스탄티누스 3세 · 프리스쿠스 아탈루스 · 요안네스
최후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 | 아비투스 | 마요리아누스 | 리비우스 세베루스 | 안테미우스 | 올리브리우스 | 글리케리우스 | 율리우스 네포스 |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레오 왕조 레오 1세 | 레오 2세 | 제노 | 바실리스쿠스 · 마르쿠스 | 2차 재위 제노
동방
레오 왕조 2차 재위 제노 | 아나스타시우스 1세
유스티니아누스 왕조 유스티누스 1세 | 유스티니아누스 1세 | 유스티누스 2세 | 티베리우스 2세 | 마우리키우스 · 테오도시우스
- 포카스
이라클리오스 왕조 이라클리오스 | 공동 즉위 콘스탄티노스 3세 · 이라클로나스 · 다비드 티베리오스 | 콘스탄스 2세 · 콘스탄티노스 4세 · 이라클리오스 · 티베리오스 | 유스티니아노스 2세
20년간의 혼란 레온티오스 | 티베리오스 3세 | 2차 재위 유스티니아노스 2세 | 필리피코스 | 아나스타시오스 2세 | 테오도시오스 3세
이사브리아 왕조 레온 3세 | 콘스탄티노스 5세 | 아르타바스도스 · 니키포로스 | 2차 재위 콘스탄티노스 5세 | 레온 4세 | 콘스탄티노스 6세 | 이리니
니키포로스 왕조 니키포로스 1세 | 스타브라키오스 | 미하일 1세 랑가베스 · 테오필락토스 · 스타브라키오스
- 레온 5세 · 콘스탄티노스
아모리아 왕조 미하일 2세 | 테오필로스 | 미하일 3세
마케도니아 왕조 바실리오스 1세 · 콘스탄티노스 | 레온 6세 | 알렉산드로스 2세 | 콘스탄티노스 7세 | 로마노스 1세 · 흐리스토포로스 레카피노스 · 스테파노스 레카피노스 · 콘스탄티노스 레카피노스 | 로마노스 2세 | 니키포로스 2세 | 요안니스 1세 | 바실리오스 2세 | 콘스탄티노스 8세 | 로마노스 3세 | 미하일 4세 | 미하일 5세 | 공동 즉위 조이 · 테오도라 | 콘스탄티노스 9세 | 2차 재위 테오도라
- 미하일 6세
콤니노스 왕조 이사키오스 1세
두카스 왕조 콘스탄티노스 10세 | 미하일 7세 · 콘스탄티오스 두카스 · 안드로니코스 두카스 · 콘스탄티노스 두카스 | 로마노스 4세 · 레온 디오예니스 · 니키포로스 디오예니스 | 니키포로스 3세
콤니노스 왕조 알렉시오스 1세 · 콘스탄티노스 두카스 | 요안니스 2세 · 알렉시오스 콤니노스 | 마누일 1세 | 알렉시오스 2세 | 안드로니코스 1세
앙겔로스 왕조 이사키오스 2세 | 알렉시오스 3세 | 2차 재위 이사키오스 2세 | 알렉시오스 4세 | 알렉시오스 5세
니케아
라스카리스 왕조 테오도로스 1세 | 요안니스 3세 | 테오도로스 2세 | 요안니스 4세 | 미하일 8세
비정통 콘스탄티노스 라스카리스
동방
팔레올로고스 왕조 미하일 8세 | 안드로니코스 2세 | 미하일 9세 | 안드로니코스 3세 | 요안니스 5세 | 공동 즉위 요안니스 6세 | 2차 재위 요안니스 5세 | 공동 즉위 안드로니코스 4세 · 요안니스 7세 | 3차 재위 요안니스 5세 | 2차 재위 요안니스 7세 · 안드로니코스 5세 | 4차 재위 요안니스 5세 | 마누일 2세 | 요안니스 8세 | 콘스탄티노스 11세
아우구스투스 · 카이사르
{{{#FCE774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width: 37px; padding: 0 6px"
}}}}}}}}}}}}}}}
발레리아누스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
 
{{{#FCE774 {{{#!wiki style="margin: -26px -10px -5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F0E09, #9F0807 20%, #9F0807 80%, #8F0E09)"
{{{#!folding [ 펼치기 · 접기 ]
{{{#181818,#E5E5E5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font-size: 0.742em; letter-spacing: -0.35px"
{{{#!wiki style=""<tablewidth=100%><tablealign=center> 라틴어 문구 색상 범례
  • ignotus: 불명
황제 겸 집정관 }}}
201년 202년 202년 보결 203년 204년
루키우스 안니우스 파비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페르티낙스 아우구스투스 티투스 무레니우스 세베루스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 루키우스 파비우스 킬로 셉티미누스 카티니우스 아킬리아누스 레피두스 풀키니아누스
마르쿠스 노니우스 아리우스 무키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레갈리아누스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 마르쿠스 안니우스 플라비우스 리보
204년 보결 205년 206년 206년 보결 207년
루키우스 폼포니우스 리베랄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눔미우스 움브리우스 프리무스 세네키오 알비누스 푸블리우스 툴리우스 마르수스 루키우스 안니우스 막시무스
ignotus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 카이사르 루키우스 풀비우스 가비우스 누미시우스 페트로니우스 아이밀리아누스 마르쿠스 카일리우스 파우스티누스 가이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아페르
208년 209년 210년 211년 212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파우스티누스 헤디우스 롤리아누스 테렌티우스 겐티아누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스페르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 카이사르 퀸투스 헤디우스 롤리아누스 플라우티우스 아비투스 아울루스 트리아리우스 루피누스 폼포니우스 바수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밀리우스 아스페르
212년 보결 213년 214년 215년 216년
(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퀸투스 마이키우스 라이투스 푸블리우스 카티우스 사비누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데키무스 카일리우스 칼비누스 발비누스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아피우스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 마르쿠스 무나티우스 술라 케리알리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아눌리누스
217년 218년 218년 보결 219년 220년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프라이센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오펠리우스 세베루스 마크리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티투스 메시우스 엑스트리카투스 마르쿠스 오클라티니우스 아드벤투스 퀸투스 티네이우스 사케르도스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코마존
221년 222년 223년 224년 225년
가이우스 베티우스 그라투스 사비니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마리우스 막시무스 페르페투우스 아우렐리아누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율리아누스 티베리우스 마닐리우스 푸스쿠스
마르쿠스 플라비우스 비텔리우스 셀레우쿠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알렉산데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로스키우스 아일리아누스 파쿨루스 살비우스 율리아누스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크리스피누스 세르비우스 칼푸르니우스 도미티우스 덱스테르
226년 227년 228년 229년 230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눔미우스 세네키오 알비누스 퀸투스 아이아키우스 모데스투스 크레스켄티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비리우스 아그리콜라
가이우스 아우피디우스 마르켈루스 마르쿠스 라일리우스 풀비우스 막시무스 아이밀리아누스 마르쿠스 폼포니우스 마이키우스 프로부스 카시우스 디오 섹스투스 카티우스 클레멘티누스 프리스킬리아누스
231년 232년 233년 234년 235년
루키우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루키우스 비리우스 루푸스 율리아누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아킬리우스 프리스킬리아누스 마르쿠스 클로디우스 푸피에누스 막시무스 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살루스티우스 파일리그니아누스 루키우스 마리우스 막시무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파테르누스 마르쿠스 무나티우스 술라 우르바누스 루키우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퀸티아누스
236년 237년 238년 239년 240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미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마리우스 페르페투우스 [루키우스] 풀비우스 피우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고르디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아피우스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
마르쿠스 푸피에누스 아프리카누스 막시무스 루키우스 뭄미우스 펠릭스 코르넬리아누스 폰티우스 프로쿨루스 폰티아누스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아비올라 루키우스 라고니우스 베누스투스
241년 242년 243년 244년 245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고르디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베티우스 그라투스 아티쿠스 사비니아누스 루키우스 안니우스 아리아누스 티베리우스 폴리에누스 아르메니우스 페레그리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율리우스 필리푸스 아우구스투스
클로디우스 폼페이아누스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레피두스 프라이텍스타투스 가이우스 케르보니우스 파푸스 풀비우스 아이밀리아누스 가이우스 마이시우스 티티아누스
246년 247년 248년 249년 250년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프라이센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율리우스 필리푸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율리우스 필리푸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풀비우스 가비우스 누미시우스 아이밀리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메시우스 퀸투스 트라야누스 데키우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알리우스 알비누스 마르쿠스 율리우스 세베루스 필리푸스 카이사르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율리우스 세베루스 필리푸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나이비우스 아퀼리누스 베티우스 그라투스
251년 252년 253년 254년 255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메시우스 퀸투스 트라야누스 데키우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비비우스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비비우스 볼루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퀸투스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 메시우스 데키우스 카이사르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비비우스 볼루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포플리콜라 발비누스 막시무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256년 257년 258년 259년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 아킬리우스 프리스킬리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눔미우스 투스쿠스 (눔미우스) 아이밀리아누스 (덱스테르)
마르쿠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뭄미우스 바수스 폼포니우스 바수스
260년 261년 262년 263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사이쿨라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눔미우스 알비누스
가이우스 유니우스 도나투스 루키우스 페트로니우스 타우루스 볼루시아누스 눔미우스 파우스티아누스 덱스테르 (막시무스)
동방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풀비우스 마크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풀비우스 퀴에투스 아우구스투스
갈리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카시아니우스 라티니우스 포스투무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카시아니우스 라티니우스 포스투무스 아우구스투스
호노라티아누스
264년 265년 266년 267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오비니우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퀼리우스 파테르누스
사투르니누스 루킬루스 사비닐루스 아르케실라우스
갈리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카시아니우스 라티니우스 포스투무스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피아보니우스 빅토리누스
268년 269년 270년 271년
아스파시우스 파테르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아우구스투스 플라비우스 안티오키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우렐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에그나티우스 마리니아누스 파테르누스 비리우스 오르피투스 폼포니우스 바수스
갈리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카시아니우스 라티니우스 포스투무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피아보니우스 빅토리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피아보니우스 빅토리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피우스 에수비우스 테트리쿠스 아우구스투스
산크투스
272년 273년 274년 275년
티투스 플라비우스 포스투미우스 퀴에투스 아울루스 카이키나 타키투스 또는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타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우렐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우렐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유니우스 벨둠니아누스 율리우스 플라키디아누스 카피톨리누스 (아우렐리우스) 마르켈리누스
갈리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피우스 에수비우스 테트리쿠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피우스 에수비우스 테트리쿠스 아우구스투스
노빌리시무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피우스 에수비우스 테트리쿠스
276년 277년 278년 279년 280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타키투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풀비우스) 아이밀리아누스 (루키우스 율리우스) 비리우스 루푸스 노니우스 파테르누스 (베티우스) 그라투스
281년 282년 283년 284년 284년 보결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루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리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유니우스 티베리아누스 빅토리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리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누메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카이소니우스 오비니우스 루피누스 마닐리우스 바수스 Ⅱ)
285년 286년 287년 288년
티투스 클라우디우스 아우렐리우스 아리스토불루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막시무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베티우스 아퀼리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폼포니우스 야누아리아누스
동방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서방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리누스 아우구스투스
288년 보결 289년 289년 보결 289년 보결
… a 마르쿠스 마그리우스 바수스 마르쿠스 움브리우스 프리무스 케이오니우스 프로쿨루스
… ivianus 루키우스 라고니우스 퀸티아누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코엘리아누스 헬비우스 클레멘스
브리타니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마우사이우스 카라우시우스
289년 보결 290년 291년 292년
플라비우스 데키무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유니우스 티베리아누스 아프라니우스 한니발리아누스
… ninius 막시무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카시우스 디오 율리우스 아스클레피오도투스
브리타니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마우사이우스 카라우시우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마우사이우스 카라우시우스
293년 294년 295년 296년 297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 카이사르 눔미우스 투스쿠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갈레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안니우스 아눌리누스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갈레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카이사르
298년 299년 300년
아니키우스 파우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 카이사르
비리우스 갈루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갈레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카이사르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width: 37px; padding: 0 6px"
}}}}}}}}}}}}}}}


로마 제국 제33대 황제
발레리아누스
VALERIANVS
파일:발레리아누스고화질.jpg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
(Publius Licinius Valerianus)
출생 195년
로마 제국
사망 260년/264년 (향년 65/69세)
로마 제국 로마
재위 기간 로마 황제
253년 9월 ~ 260년 6월 (7년)
전임자 아이밀리아누스
후임자 갈리에누스
배우자 에그나티아 마리니아나, 코르넬리아 갈로니아
자녀 갈리에누스,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
종교 로마 다신교
1. 개요2. 생애
2.1. 황제가 되기 전2.2. 황제
2.2.1. 즉위2.2.2. 협동 황제2.2.3. 부자의 분투2.2.4. 기독교 박해
2.3. 포로생활과 사망
3. 영향 및 평가

[clearfix]

1. 개요

로마 제국 33대 황제. 공화정 때부터 이어진 명문 귀족 집안 리키니우스 일족 출신.[1] 트레보니우스와 아이밀리아누스 사이에서 내전이 일어났을 때 군사를 일으켜 내전의 승자인 아이밀리아누스를 쓰러뜨리고 황제가 되었다. 황제가 된 후에는 방어선을 정비하고 장군감인 인재들을 발굴하고 양성하는 데 힘썼으며 [2] 아들 갈리에누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하여 적들의 침략에 대비했다. 또한 그리스도교를 탄압하여 로마 주교(교황) 식스토 2세와 카르타고 주교 키프리아누스가 순교했다. 그러나 260년 봄 에데사 전투에서 샤푸르 1세가 이끄는 페르시아군에 생포되었다.

2. 생애

2.1. 황제가 되기 전

발레리아누스는 195년경 태어났는데, 그는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처럼 오랜 세월동안 원로원 의석을 세습해온 이탈리아 로마귀족이다. 그의 가문은 공화정 후기 1차 삼두정치로 유명한 크라수스를 배출한 크라수스 가문이 속한, 리키니우스 가문이다. 이 가문은 공화정 시대때부터 이어진 로마의 오래되고 유력한 소수의 귀족 가문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의 생애 중 즉위 전까지의 삶은 명확하지 않다.

리키니우스 가문은 갈루스 가문처럼 옛 에트루리아의 유력 가문에서 시작된 귀족 가문이기도 했지만, 공화정 시대부터 제정 시대 이후에도 원로원 의원을 대대로 배출했으며 의석을 세습해왔다. 따라서 발레리아누스 역시 즉위 전까지 오랜 기간 원로원 의원 생활을 했는데, 여러 연구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당시 로마 원로원귀족들의 일반적인 방식처럼 그 역시 10대 중후반의 나이에 성년식을 올리고 결혼했고 일반적인 원로원 의원 자제들처럼 대대장부터 군복무를 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첫 아내의 친정 에그나티우스 가문은 그에게 도움을 이때 많이 줬을 것이라고 평가받는다. 그 이유는 장인과 장인의 형인 아내의 백부 퀸투스 에그나티우스 프로쿨루스 때문이다. 발레리아누스의 장인 루키우스 에그나티우스 빅토르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를 도와 다섯 황제의 해에서 공을 세운 루푸스 롤리아누스 장군의 사위로 명망 높은 원로원 의원이었다. 장인의 형으로 아내의 백부인 퀸투스 에그나티우스 프로쿨루스는 서기 219년 집정관으로 마리우스 막시무스의 형 루키우스 마리우스 페르페투우스의 사위였다. 따라서 발레리아누스는 이런 처가의 도움 아래 수월하게 에그나티우스 가문과 유대관계를 맺을 수 있었고, 처남 루키우스 에그나티우스 빅토르 롤리아누스와 아내의 사촌오빠로 서기 238년 집정관이 될 루키우스 마리우스 페르페투우스, 아내의 오촌 조카인 퀸투스 에그나티우스 프로쿨루스 등을 본인의 후원자, 파벌 일원으로 거느릴 수 있게 됐다.

세베루스 왕조엘라가발루스 또는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시대때부터 원로원 의석을 가문에서 이어 받고 경력을 쌓았다. 그는 처가의 인척들인 마리우스 막시무스에게 큰 도움을 받았을 확률이 농후하며, 마리우스 막시무스의 처남 디오 카시우스과의 친분 속에서 율리아 마이사, 율리아 마마이아, 울피아누스의 지원도 받아 명예로운 경력을 젊은 나이에 수월하게 마쳤을 것이라고 평가받는다. 그래서 그는 세베루스 왕조가 건재했던 238년 전에 보결 집정관을 지낸 상태였는데, 보결 집정관임에도 정규 집정관처럼 사회적 명망이 대단히 높았다.

발레리아누스는 세베루스 왕조가 붕괴되고,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집권한 뒤에도 원로원 안에서 그 위치가 공고했던 것이 여러 근거로 확인된다. 이는 아내의 인척인 루키우스 마리우스 페르페투우스가 이 시절 정규 집정관을 지내면서 원로원과 로마군 모두의 신망을 잃지 않았던 것도 컸지만, 그가 일반적인 로마귀족과 달리 어린 나이부터 군복무를 하면서 원로원 의원으로 경력을 쌓았던 점도 컸던 점도 이유였다. 따라서 발레리아누스는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몰락하던 238년, 당시 정규 집정관을 지내고 있던 아내의 가까운 친척 마리우스 페르페투우스가 집정관이던 당시, 그와 원로원 내부의 신망 있는 이들의 요청으로 프린켑스 세나투스 대리 역할 직책을 맡았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시대 동안 처가 식구 에그나티우스 빅토르 롤리아누스가 판노니아, 아시아 등에서 총독을 지내고 군지휘관을 두루 거쳤던 것을 생각해보면, 로마 귀족들의 관습과 족벌주의 특성상 발레리아누스 역시 비슷한 경력을 쌓은 것은 확실하다.[3]

6세기 역사가 조시무스에 따르면, 발레리아누스는 238년 고르디아누스 1세고르디아누스 2세 부자가 황제를 자처한 뒤, 현지 주민들의 추대로 제위에 오르는 척 명분을 쌓고 서한을 보냈을 당시 원로원 대표 중 한명으로 이들 부자의 대리인 및 가문 사람들과 협상을 했다고 한다. 이때 고르디아누스 1세는 당시 근위대장인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비탈리아누스를 죽이기 위해 암살자를 파견하면서 발레리아누스와 접촉했다고 한다. 따라서 일부 전통적인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발레리아누스가 고르디아누스 지지자였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발레리아누스의 처가 식구들의 인척 관계를 생각해보면,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그에게 접촉한 것은 당시 원로원을 이끈 집정관 중 한명이 발레리아누스의 후원자이며 발레리아누스 아내 에그나티아 마리니아나의 친인척인 루키우스 마리우스 페르페투우스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4]

고르디아누스 1세 측은 원로원 의원인 발레리아누스 외의 다른 동료 의원들에게도 사람을 보내, 로비를 하며 자신들의 황제 참칭이 문제가 있어도 원로원에서 지원을 해주어야 한다고 간곡히 호소하고, 본회의날에는 서한을 보내 원로원 동료 의원으로 두 황제와 일찍부터 원수인 누미디아 총독 카펠리아누스를 해임하고 제거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외에도 그들은 가문의 역량과 인맥을 총동원해 로마 곳곳에 로비를 하고, 대리인을 파견해 근위대와 서민들에게는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겠다. 얼마라도 돈을 주겠다"고 약속했으며, 지지자들을 통해 여론을 모으고 자경단 비슷한 무리를 만들었다. 또 추방자들에게는 "상상 이상의 모든 것을 약속하겠다"고 발표했으며, 근위대장 비탈리아누스에게 휘하 재무관으로 변장한 암살범을 보내 협상을 요구하는 척하고 그를 죽인 뒤 트락스가 비탈리아누스를 비열하게 죽인 것처럼 위장해 트락스의 잔인함을 거리 곳곳에 소문냈다. 이때 발레리아누스를 비롯한 원로원 내 협상단은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의 요청을 전반적으로 동조함에도, 고르디아누스 일가에서 조직을 꾸려 로마에서 폭동을 일으키자 대충 돌아가는 판을 눈치채고는 카펠리아누스 해임과 같은 부분에서는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이는 이들이 고르디아누스 쪽을 온전히 믿지 않아서 내린 결론이기도 했는데, 당시 죄없는 채권자, 은행가 등이 살해되고 치안 유지에 힘쓰던 사비누스가 돌에 머리를 맞아 순직하는 일까지 벌어져 발레리아누스와 원로원 입장에선 이렇게 행동해야만 했다. 더욱이 원로원 인사 대부분은 트락스 탄핵에는 찬성하면서도 여러 이유로 고르디아누스 측의 모든 요구 수용에는 사실상 반대 의견을 밝혔던 터라, 전형적인 원로원 귀족인 발레리아누스가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를 적극 지지했다는 추정까지 결론짓기에는 무리하다는 의견이 많다.

따라서 오늘날 각종 연구와 고대 기록 등을 토대로 238년 이후 상황을 정리해보면, 발레리아누스는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와 마찬가지로 238년 고르디아누스 1세고르디아누스 2세 부자를 강하게 지지하진 않았거나, 지지했다고 하더라도 전직 법무관이며 세습 원로원 의원 동료인 카펠리아누스의 입장까지 감안해 이런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당장 동시대 사가이며 관료 헤로디아누스의 기록만 보더라도, 당시 원로원은 "고르디아누스 당신이 약속한 것을 다 지킬 수 있다면 지지해주겠다. 진짜 믿어도 되느냐"는 입장 아래 움직였던 것만 보더라도 발레리아누스가 조시무스의 주장 그대로 행동해주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으니. 이런 배경 때문에 238년 4월 2일, 원로원에서는 율리우스 실라누스의 낭독 아래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탄핵이 통과되는데, 이 당시에도 원로원은 트락스를 증오하면서도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약속에 관해 살짝 의심하면서 "다시 한 번 묻는데 진짜 약속한대로 할 것이냐"고 전제를 달았다.

고르디아누스 측과의 협상을 한 이후의 발레리아누스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거의 없어 이후 행적은 불명확하다. 하지만 그가 뜻을 함께 한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와 마찬가지로 고르디아누스 3세, 필리푸스 아라부스 시절에 고위직에 후보로 이름조차 올리지 못한 것을 보면, 이때 일로 인해 후일 고르디아누스 가문 사람과 지지자들에게 미운 털이 박혔던 것이 확실하다. 따라서 고르디아누스 1세의 외손자로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복수를 외친 고르디아누스 3세 시대 아래에서는, 여러 이유로 인해 동료 의원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등과 함께 평범하게 원로원 의원 생활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고대 전승 기록 중 하나인 <로마황제열전>에 따르면, 발레리아누스는 이 시기동안 “60년간 칭송받을 만한 인생을 살았으며 영예와 관직을 남달리 훌륭하게 지켜왔다”고 한다. 또 그는 세력을 규합해 음모를 꾸미거나, 폭동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자리를 지키거나 영예를 얻은 적이 없고 “오로지 국가에 봉사해온 권리”, 즉 로마인들이 말하는 전 로마시민의 한결 같은 목소리로 영예의 자리(집정관)까지 오르게 됐다고 한다.

필리푸스 아라부스 집권 이후, 서서히 일이 풀렸던 것으로 보이며 발레리아누스는 40대에 접어든 무렵인 230년대에 이르러 집정관까지 지낸 로마 귀족 내 거물 중 한명이 되었다. 이때 아내의 남자형제 에그나티우스 빅토르 롤리아누스가 발레리아누스의 고속승진에 큰 도움이 된 인맥으로 추정된다. 그는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고르디아누스 3세 집권 이후, 고위직을 독차지하지 못한 발레리아누스와 달리 고르디아누스 3세 통치기간때인 242 ~244년 아시아 속주 총독에 파견됐다. 물론 아시아 총독 자리가 일반적으로 원로원 세습 의원 중 자격 요건이 되는 이들끼리 제비뽑기로 선정된다는 점에서, 롤리아누스가 고르디아누스 3세 내각의 신임을 크게 받았다고 확신하긴 어렵다. 그렇지만 롤리아누스는 고르디아누스 3세 사후 제위를 차지한 필리푸스 아라부스와 그 형 율리우스 프리스쿠스 등과 친분이 있고 그들의 신뢰를 얻어내, 고르디아누스 3세 사후에도 아시아 총독 자리를 보장받고 페르시아 원정 직후의 필리푸스에게 추가적인 지원을 듬뿍 받았다고 한다. 이는 발레리아누스 역시 마친가지였는데, 그 역시 처남이 필리푸스 형제의 신뢰를 받았고 필리푸스와는 악감정이 없어 서서히 경력이 풀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발레리아누스가 잘 나갔던 시기는 같은 이탈리아 태생의 세습 의원 출신 공동황제 푸피에누스, 발비누스 시대때였으며 계속 고위직을 역임했다가, 고르디아누스 1세의 외손자와 고르디아누스 가문 쪽이 이끈 당파가 집권하면서 제국의 요직을 차지하지 못하거나 정체된 모양새를 띠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발레리아누스의 인생에서 로마 핵심 고위직에 올라 원로원 내 실력자가 된 시기는, 옛 푸피에누스, 발비누스 쪽 진영 귀족들처럼 필리푸스 재위기와 데키우스 즉위 이후였다. 이 시기 그는 데키우스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에게 신임을 얻었고 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데키우스는 발레리아누스를 직접 지명해 감찰관 자리를 줬다. 12세기 동로마의 역사가 요안니스 조나라스에 따르면, 일리리쿰으로 데키우스 황제가 친정을 가자 로마 행정과 치안 업무를 대리하는 중책까지 담당했을 정도로 신임을 받았다고 한다. 이는 데키우스의 전사 이후, 뒤를 이은 갈루스 시대에도 계속 되었다. 이때 발레리아누스는 60이 다 된 고령의 나이에, 갈루스를 지지하는 세력의 군사지휘권까지 맡았다. 따라서 발레리아누스는 갈루스의 명에 따라 도나우 강 상류지역까지 가서 갈루스 군을 규합했다. 그러다가 그는 아이밀리아누스가 갈루스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갈루스 부자가 253년 8월 이탈리아 로마 북쪽의 도시 인테람나 근처에서 병사들에게 살해됐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2.2. 황제

2.2.1. 즉위

발레리아누스는 규합한 병사들에게 죽은 갈루스를 대신해 자신을 황제로 선포하게 한 뒤, 3개월 전인 여름 아이밀리아누스가 그런 것처럼 이탈리아로 서둘러 진군했다. 따라서 아이밀리아누스는 자신을 지지한 군을 다시 모아 발레리아누스와 맞붙으려고 했는데, 이때 아이밀리아누스는 절제된 통치를 천명하고 원로원에게 스스로를 “그들(원로원)의 장군”이라고 하면서 원로원과 군대의 지지를 동시에 얻으려고 했다. 하지만 아이밀리아누스는 ‘피의 다리’로 알려진 스폴레토 근처에서 휘하 병사들에게 무참히 살해됐다. 따라서 발레리아누스는 아이밀리아누스와 직접적인 대결도 없이 88일 만에 갈루스의 복수를 하고 제위에 올랐다. 이때 발레리아누스는 58세의 고령이었고 그가 공동황제로 지명한 장남 갈리에누스는 40살이었다.

2.2.2. 협동 황제

즉위 당시 58세였던 발레리아누스는 253년 10월 수도 로마에 들어가자마자 원로원과 로마민중들에게 지지를 받고 별 어려움없이 황제로 인정받았다. 이때 함께 로마로 입성한 장남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에그나티우스 갈리에누스는 아버지의 요청에 따라 40살의 나이에 공동황제가 됐으며, 첫 아내 에그나티아 마리아나의 남자형제 루키우스 에그나티우스 빅토르 롤리아누스는 수도 로마의 치안과 행정을 담당하는 수도 장관에 지명됐다. 이는 발레리아누스가 에그나티우스 가문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이 가문과 밀접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는 장남 중심의 후계구도를 굳히겠다는 결정과 똑같았다.

즉위 이후, 어느 정도 안정을 찾자마자 넓은 제국을 동부와 서부로 나눠서 부자가 최대한 역량을 활용하려고 계획했다. 즉, 공동황제 제도를 일종의 협동황제 개념으로 활용하려고 했다.

이런 계획 때문에 발레리아누스는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위협과 공격으로 혼란해진 동부를 맡았고, 장남 갈리에누스에게는 서부 전체의 총괄권을 부여했다. 발레리아누스는 즉위 후 254년, 255년, 그리고 257년 집정관에 올라 자신과 아들의 제위 안정화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또 그는 페르시아의 왕 샤푸르 1세의 침략으로 박살나고 있던 안티오크 등 동방의 시리아 속주 내 주요도시 상황 해결에 매진했다. 그래서 발레리아누스는 254년 서둘러 안티오크에 도착해 동부에서 지내며 이 일대 안정화와 페르시아군 격퇴에 노력한다.

2.2.3. 부자의 분투

갈리에누스는 254년 이래로 갈리아라인강 일대에서 알레만니족과 프랑크족을 상대로 정신없이 전쟁을 치루고 있었다. 그러면서 갈리에누스는 도나우 강까지 넘기 시작한 마르코만니족과 알레만니족까지 상대해야 했다. 이와 동시에 발레리아누스 역시 제국 동부에서 에메사의 성직자 우라니우스 안토니누스 반란을 진압하는 것을 시작으로 시리아 속주 내 크고 작은 전투를 하면서 속주 안정화에 온 힘을 쏟았다. 따라서 원로원은 이런 발레리아누스에게 ‘동방의 복구자’, ‘인류의 복구자’라는 존칭을 부여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부터 발레리아누스는 260년 샤푸르 1세에게 생포될 때까지 몇 년동안 계속해서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전투를 치뤘다. 하지만 이 전투들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고 257년 승전 내용을 통해 그가 페르시아 상대로 거둔 승리의 대가로 원로원으로부터 ‘세계의 복구자’라는 거창한 칭호를 부여받은 것만 확인해볼 수 있다.

2.2.4. 기독교 박해

발레리아누스가 사후 후기 로마제국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포로가 됐다가 분사한 것이 조롱거리가 된 이유는, 본인이 황제가 된 뒤 외세의 침입이 심각함을 밝히면서도 권력 강화 수단의 한 방법으로 지나칠 정도로 기독교 박해를 벌였기 때문이다. 그는 데키우스처럼 제국 동방에서 지속적으로 기독교 박해를 했는데, 데키우스보다 조직적, 광범위적으로 이를 단행했으며, 정적들을 숙청할 때에도 이를 명분으로 내세웠다. 따라서 그는 살아생전부터 초기 기독교도 작가들에게 미움을 많이 받았고, 포로생활을 한 뒤 죽은 이후 신이 분노해 수치스럽게 종말한 증거물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발레리아누스의 기독교 박해는 전임자 중 한 명인 데키우스와 달리 로마 상류층 사회 내에서의 기독교 근절을 위한 박해였다는 평이 있다. 왜냐하면 257년과 258년 소위 ‘쌍둥이 칙령’이라고 불린 두 번의 칙령을 통해 로마 사회 내 기독교 근절 및 기독교도 박해를 했기 때문라고 한다.

하지만 발레리아누스의 기독교 박해 명령은, 로마 엘리트 사이의 기독교 확산을 인정하면서 유화책을 펼친 아들 갈리에누스와 달랐고, 데키우스보다 관용적인 측면이 적었다. 그는 친족에게조차 관용적이지 않았으며, 정적들까지 이를 명분으로 숙청으로 대하면서 두 차례에 걸쳐 조직적이고, 광범위하게 펼쳤다.

그는 페르시아와 전쟁을 하는 동안, 원로원에 두 통의 편지를 보내 "기독교인들을 단호히 처벌하라"고 지시했으며, 원로원 내 기독교도 원로원 의원과 원로원 귀족 가족들을 색출하기 위해 로마 신들에게 숭배행위를 하지 않으면, 그들의 칭호와 명예, 재산을 잃게 될 것이라고 협박하고 숭배 거부시 처형하도록 명령했다. 또한 그는 쌍둥이 칙령으로 불린, 257년 명령과 258년 명령을 엄격히 집행하면서, 이를 명분으로 본인과 의견이 상충된 원로원 의원, 관료을 숙청했다. 이때 그는 리키니우스 가문의 황실가족이나 원로원 가문 사람 중 로마 신을 숭배하지 않은 이들을 노예처럼 황실 영지로 보내 강제 노역을 하도록 했다. 이것은 당시 기독교도들이 상류사회에도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발레리아누스와 갈리에누스 부자 공동통치 시절에 순교한 이 중에는 발레리아누스 형제의 딸로, 갈리에누스의 조카 혹은 친척인 성녀 리키니아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외에도 발레리아누스는 쌍둥이 칙령을 반포해, 저명한 기독교 신자들을 대거 처형했다. 나르본에서는 프루덴티우스가 257년 처형됐고, 이듬해에는 교황 식스토 2세가 야누아리오, 빈첸시오, 마노, 스테파노, 펠리치시모와 아가피토, 라우렌시오 등과 함께 8월 6일에 순교했다. 이 외에도 성 로마누스 오스티아리우스(8월 9일), 성 로렌스(8월 10일)도 이때 순교했다고 기독교 사가들은 말한다.

따라서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시대 이후 관용적으로 대응한 로마 정부의 방식과 달리, 데키우스 시대처럼 혹독한 면이 많았다고 비난받았다. 다만, 발레리아누스의 장남으로 당시 서방을 담당한 갈리에누스는 아버지와 달리 기독교에게 관용을 베풀었고, 아버지의 이런 방식을 대단히 부정적으로 여겼다. 이런 이유로 갈리에누스는 단독 통치 직후부터, 아버지가 내린 기독교 탄압을 칙령으로 폐지하고 이들을 보호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2.3. 포로생활과 사망

파일:이란 샤푸르10.jpg
포로로 잡힌 발레리아누스 앞의 샤푸르 1세를 새긴 부조[5]

발레리아누스는 아들 갈리에누스와 비교해 눈에 띠는 승리가 적었지만, 동방에서 페르시아를 상대로 분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260년 초여름, 그는 페르시아 측의 맹렬한 공격으로 다시 치열한 전쟁을 재개했는데, 이때 발레리아누스 휘하 로마군에서는 전염병이 돌면서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병력도 격감했다. 또 에데사는 다시 페르시아군의 포위공격을 받았다.(에데사 전투)

그래서 발레리아누스는 협상을 통해 군대를 빼내려고 했다. 이때 샤푸르 1세는 발레리아누스에게 얼마 안 되는 소수의 수행원만 동반해 직접 대면하는 것을 요구했는데, 이는 샤푸르 1세의 계략이었다. 하지만 발레리아누스는 어떤 이유 때문인지 샤푸르 1세의 요구대로 소수의 수행원과 병사만 데리고 나섰다가 그대로 휘하 병사들과 포로가 됐다. 여기에는 황제 외에도 근위대장, 고위 관료, 원로원 의원까지 포함되었다. 이후 발레리아누스는 끝내 풀려나지 못한 채 고령의 나이에 온갖 수모를 겪고 사산왕조 페르시아에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4세기 이후 역사서 기록(특히 초기 기독교도 저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황제는 포로가 되어 지방 곳곳에 끌려 다니며 샤푸르 1세의 승리를 입증하는 살아있는 증거로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고 그 후로도 샤푸르 1세가 말에 올라탈 때마다 인간 발판이 된다. 결국 로마 제국으로 끝끝내 되돌아가지 못하고 그곳에서 옥사했다. 게다가, 일부 기독교도 저자들 기록에 따르면 황제가 사망 후 가죽이 벗겨져 그 속은 지푸라기가 채워지고 박제 인형이 되어 샤푸르 1세의 대승을 기념하는 증거로서 신전에 전시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 야사에 불과할 뿐 과장되었다는 설도 있고, 반대로 실제로 그랬을거라는 이야기도 있다. 먼저 실제로 했을 수도 있다는 측의 주장을 살펴보면, 샤푸르 1세와 발레리아누스가 대군을 이끌고 대규모 전투를 치를 정도로 양국 간의 사이가 벌어질 때로 벌어졌으며 로마 제국은 황제가 직접 참전했음에도 전투에서 크게 대패하고 사로잡힐 정도로 과거 주변 국가들에 대해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던 패권을 누렸던 제국이 더이상 아님이 명백하게 입증되었는데 대규모 전쟁에서 로마군을 갈아버릴 국력을 과시하던 당시 사산조 페르시아에서 자신들의 업적을 과시했으면 과시했지 필요 이상으로 사이도 안 좋은 적대국에 대해 그렇게 눈치를 봤겠냐는 의견도 존재한다.[6][7]

그러나 고대 전승기록 중 기독교인 저자들의 주장이나 로마인들 사이에 돈 소문과 달리 발레리아누스의 포로 생활은 그렇게 비참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고, 실제로는 황제가 포로가 된 지 1년여 만에 홧병으로 사망했을 뿐이라고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그러면서 이 주장을 펼치는 측의 현대 연구자들은 발레리아누스의 포로생활이 치욕과 비참함의 연속으로 흘러가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런 주장을 하는 대표적인 현대 연구자 중 한 명인, 이란 태생의 저명한 고대사 역사가 새투라지 다야이 미국 캘리포니아대 교수에 따르면 사산왕조 페르시아 내에서 발레리아누스와 포로 잡힌 로마인들은 샤푸르 1세에게 풀려나지는 못했지만, 수도 또는 그 근처의 쾌적한 환경의 도시에서 소문과 달리 훌륭한 대우를 받으며 포로생활을 했다고 한다. 다만 훌륭한 대우를 받으며 포로생활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최초로 로마 황제가 적군에게 사로잡혔다는 사실에 충격실의 속에 살다가 그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죽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을 것이다.

다야이 외에도 고대 기록에서의 비참한 포로생활을 반박하는 주장은 여러 정황을 증거로 제기되고 있다. 그러면서 그들은 실상 로마 황제와 로마 제국의 고위층 인사들이 그 정도로 가혹하게 당했다면 로마 측에서도 나중에 국가를 재건한 뒤 정식으로 문제삼든지, 보복할 때 명분으로라도 썼을 텐데 그런 사례가 전혀 없다고 여러 정황을 근거로 추가 제시를 하고 있다. 특히 결정적으로 발레리아누스의 생포 후 그리 머지 않은 39년 뒤의 299년에 동방 부제 갈레리우스가 사산조 페르시아를 물리치고 크테시폰을 일시 점령하였을 때, 로마의 갈레리우스는 위 가혹행위가 실존하였을 경우 이를 명분으로 삼기에 충분했을 텐데 실제로 그러하지 않았다. 또한 사산 왕조 입장에서도 포로가 된 로마 최고위층 포로들을 외교적 문제 때문에 실제로 가혹행위를 해서 좋을 것은 없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3. 영향 및 평가

발레리아누스가 오늘날 대중들에게 한 어떤 일보다도 유명한 사실은, 그가 포로가 된 황제라는 사실이다. 그것도 로마 역사상 최초로 로마 황제가 적군과 싸우다가 포로가 된 사례였다. 260년 사산왕조 페르시아와 맞붙었는데 상대가 그 샤푸르 1세였다. 발레리아누스는 샤푸르 1세의 계략에 당해 휘하 병사들과 함께 포로가 되었고 이 사실이 로마 전역에 퍼지면서 그 영향으로 로마는 팔미라 제국, 갈리아 제국으로 세 조각 나 버린다. 그가 한 어떠한 업적보다도 포로가 된 황제라는 사실만이 역사에 남아버린, 참 뭐라 말 할 수 없는 황제다.

이런 대중의 인식 그대로 발레리아누스는 로마 황제 중 포로로 잡힌 뒤 전례 없는 사건 아래 다양한 맥락에서 로마 제국에게 새로운 서사를 불러 일으켰다고 평가받는다. 에데사 전투 이후 페르시아의 샤한샤 샤푸르 1세에게 포로로 잡혀 로마 제국 전체에 충격과 불안을 안겨준 최초의 전투 포로가 된 것은 개인적 비극을 뛰어넘어, 국가적 비극이 됐다.

국가적 비극이 된 것은 발레리아누스가 에데사 전투 과정에서 패전 후 포위된 상태에서 포로가 된 과정, 결과 전체였다. 그는 포로가 됐고, 이때 로마 제국 전체의 제위, 정통성을 유지할 엘리트 층 핵심들까지 포로가 되면서, 일거에 로마 제정이 가진 아킬레스건에 제대로 치명타를 입혔다. 발레리아누스가 자신있게 담당한 제국 동부는 그가 포로가 된 뒤 카파도키아가 점령당하고 약 40만 명의 주민이 페르시아 남부로 추방되듯이 이주되면서 제국 동부를 시작으로 반란 촉매제 역할을 했다. 따라서 고대부터 현대까지 발레리아누스가 포로가 된 상황, 결과는 그 영향, 평가 모두 제국에게 큰 타격을 입힌 재앙이었다고 평가받는다.

더군다나 이 사건은 공동황제로 아버지 이상으로 서방에서 좋은 성과를 낸 장남 갈리에누스에게 짐을 넘어 재앙이 됐다고 평가받는다. 갈리에누스는 아버지가 이렇게 포로가 된 뒤 일시적인 분열 속에서 반란을 끝없이 경험했다. 동부에서는 마크리아누스, 마크리아누스 미노르, 콰이에투스 등이 반기를 들고, 제국의 보호국 내지 자치도시들은 반기를 들어 독립 움직임이 시작됐다. 서부에선 갈리아 일대를 사실상 전담해온 포스투무스가 갈리에누스가 반란 진압으로 정신없는 틈 속에 발레리아누스가 생전부터 신경 쓴 리키니우스 세습 체계의 후계자 살로니누스를 살해하고 갈리아 제국을 선포하며, 발레리아누스가 생전 계획한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갈리에누스는 이 과정에서 끝없는 반란을 진압했음에도, 아버지와 함께 취한 내정 개혁의 불만 속에서 지지 기반이 흔들리고, 이는 발레리아누스가 집권 직후부터 취한 세습왕조 구축의 장애물이 됐다. 그러다가, 갈리에누스는 결국 근위대장인 아우렐리우스 헤라클리아누스의 손에 살해됐고, 그 일가는 사실상 멸문되듯이 일거에 몰락했다.

즉, 갈리에누스에게는 아버지가 포로가 되면서, 악몽이 된 것이다.

따라서 발레리아누스는 재위 7년간 어쩌면 가장 안정적으로 제국을 이끌며 세베루스 왕조 이후의 항구적 세습 체제를 성공리에 구축하다가, 순간의 실수로 제국과 가문 모두에게 가장 큰 실책을 안긴 황제로 평가받을 만큼, 평이 좋지 못하다. 고대 기록에서는 그 악평을 장남 갈리에누스가 온전히 뒤집어 썼다는 점은 다행이다. 그렇지만 발레리아누스는 본인이 포로가 됐고, 군인황제시대의 난세가 심화된 과정의 핵심 인물이기에 재평가 중에도 악평을 피하지 못하고 있다.

황제 개인으로 볼때는 수치와 분노, 그리고 가장 암울한 황제였지만, 발레리아누스 생포사건은 로마의 위상과 국력이 저하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일대 사건이었던 것이다.

[1] 카이사르-폼페이우스와 함께 1차 삼두정치에 참여한 크라수스가 속한 에트루리아계 귀족 가문이다.[2] 이 중에는 나중에 황제가 되는 아우렐리아누스프로부스가 있다.[3] 발레리아누스의 장남 갈리에누스의 전체 이름, 고향, 성장과정, 단독 황제 등극 이후의 집권세력, 갈리에누스 아들들의 이름 등을 보면 발레리아누스와 에그나티아 마리아나의 결혼만으로도 리키니우스 가문과 에그나티우스 가문의 끈끈한 연대가 대단했음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더군다나 갈리에누스가 암살됐을 때, 로마에서 원로원에게 살해된 발레리아누스 식구들은 갈리에누스의 아내와 어린 아들, 갈리에누스의 이복동생이자 발레리아누스의 차남 소 발레리아누스 외에도 갈리에누스의 외가이자 발레리아누스의 첫 처가인 에그나티우스 가문의 에그나티우스 빅토르 롤리아누스와 그 아들도 포함됐다. 이는 에그나티우스 가문과 밀접한 관련이 없던 성 리키니아를 배출한 리키니우스 가문의 방계 황족들과 소 발레리아누스 자녀들이 원로원에게 추방되거나 처형되지 않은 것을 보면, 발레리아누스의 리키니우스 가문 역시 이러한 부분에서 로마 귀족들의 족벌주의 관습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이 곳곳에서 확인된다.[4]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는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를 상대로 봉기하고, 준비한대로 황제를 참칭하면서, "이탈리와 푸닉은 하나가 되어, 폭군 막시미누스를 타도하자"고 주장했다. 이때 푸닉의 대표 권세가 중 발레리아누스와 친인척 관계인 집안은 마리우스 막시무스와 그 일가였고, 이 집안을 이끈 이는 238년 당시 정규 집정관으로 상석을 차지 중인 루키우스 마리우스 페르페투우스였다.[5] 이란 쉬라즈 근처의 나크쉐 루스탐 유적에 있는 다리우스 1세의 무덤 바로 옆에 새겨져 있다.[6] 사실 군주 입장에선 외국의 군주라도 일단 군주인지라, 가혹하게 다뤘다간 되려 해당 국가의 증오를 사며 혹시라도 나중에 자신이나 자신의 자손(후대 왕)이 똑같이 당할 명분을 스스로 남기는 꼴이 되기 때문에 그냥 죽여버리든가 최소한의 예우는 해줬으며 쓸데없는 모욕을 알아서 삼갔다. 백제의 성왕이 신라의 포로로 잡혔을 때도, 신라군 장수 도도가 그래도 왕이었기 때문에 성왕에게 두 번 절하고 존댓말을 하며 최대한의 예의를 차려 허락을 구한 후 처형했다.[7] 더군다나 로마는 아르메니아 같이 중간에 낀 처지의 소국도 아니고 로마는 (비록 군인황제 시대로 인해 크게 어지럽고 부패해졌으나) 그래도 당대에 여전히 거대하고 국력이 막강한 국가였다. 업적 과시용으로 가혹행위를 해봤자 보복의 빌미만을 제공할게 뻔한데 그렇다고 해서 로마의 보복을 씹어버릴 정도로 사산왕조가 로마를 압도하는것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