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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미상 |
사망 | 253년 이전 |
조부 | 아울루스 에그나티우스 프리스킬리아누스 |
아버지 | 루키우스 에그나티우스 빅토르 |
남자형제 | 루키우스 에그나티우스 빅토르 롤리아누스 |
남편 | 발레리아누스 |
자녀 | 갈리에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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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군인 황제 시대의 아우구스타,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의 아내로 갈리에누스 황제의 어머니이다. 남편과 아들이 황제가 되기 전에 사망해서 황후의 지위를 누리지 못했으나, 두 사람이 로마 황제가 되는 혈연, 인맥을 제공했다.2. 생애
서기 3세기 저명한 이탈리아 귀족 가문인 에그나티우스 가문 출신으로, 조부는 철학자 아울루스 에그나티우스 프리스킬리아누스, 외조부는 세베루스 왕조 창건의 공신인 장군 루푸스 롤리아누스이다. 남자 형제로는 230년 집정관을 지낸 루키우스 에그나티우스 빅토르 마리니아누스가 있다.그녀의 아버지는 과거부터 아라비아와 모이시아의 총독을 지낸 퀸투스 비리우스 에그나티우스 빅토르 마리니아누스라는 설과 보결 집정관 루키우스 에그나티우스 빅토르라는 설이 대립하고 있었다. 이중 전자의 주장이 맞다면, 그녀는 비리우스 가문 출신으로 에그나티우스 가문의 피를 이은 사람이 되며 갈리에누스의 친척 관계도 개족보 중 개족보가 되면서 설명되지 않는 문제가 발생한다. 따라서 이 주장은 여러 학자들에게 사실일 확률이 떨어진다고 평가받는다. 반면 3세기의 위기를 연구하며 발표된 후자 주장은 의문에 쌓인 데키우스와 발레리아누스의 관계, 발레리아누스의 즉위와 필리푸스 아라부스의 몰락도 설명이 되는 까닭에 사실로 평가받는다.
그러다가 2~4세기 로마 황제 및 원로원 귀족들의 가족사를 연구한 프랑스의 역사가 크리스티안 세티파니를 시작으로 펼쳐진 고전학계의 연구 결과, 에그나티아 마리니아나의 아버지는 루키우스 에그나티우스 빅토르임이 확인됐다. 세티파니는 여러 정황과 근거상, 루키우스 에그나티우스 빅토르가 에그나티아 마리니아나의 아버지라고 주장했다.
세티파니는 로마 귀족들의 작명법, 혈통, 족벌주의 등을 근거로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 고르디아누스 3세, 푸피에누스, 발비누스, 데키우스, 카루스 등의 가계와 출신 신분 등을 맞춘 학자인데, 21세기 들어 관련 비문들에서 관련 증거가 나타난 터라 이는 확실하다고 평가받았고, 21세기 이르러 이탈리아에서 에그나티우스 가문의 비문 등이 발굴되면서, 그의 주장이 정설로 취급받고 있다. 만약 세티파니의 주장이 확실하면, 에그나티아 마리니아나는 발레리아누스와 마찬가지로 에트루리아 출신임이 확인된다.
에그나티아 마리니아나는 루키우스 에그나티우스 빅토르와 이름 미상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외조부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를 도와 다섯 황제의 해 내내 원로원과 전장에서 큰 공을 세운 전직집정관 루푸스 롤리아누스인데, 그녀의 아버지 루키우스 에그나티우스 빅토르는 이런 처가의 후원과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도움으로 207년 판노니아 수페리오르 속주 총독을 지내고 집정관이 됐다.
친정 에그나티우스 가문의 가계를 살펴보면, 그녀의 조부는 로마 제국의 철학자 아울루스 에그나티우스 프리스킬리아누스이다. 아울루스 에그나티우스 프리스킬리아누스는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하드리아누스 황제 치세 후기인 136년생으로 퀸투스 에그나티우스 프로쿨루스, 루키우스 에그나티우스 빅토르, 아울루스 에그나티우스 프로쿨루스를 아들로 뒀다. 이중 그의 장남으로 에그나티아 마리니아나의 큰아버지 퀸투스 에그나티우스 프로쿨루스는 디오 카시우스의 매형으로 세베루스 왕조 전체를 관통한 로마 원로원 의원 마리우스 막시무스의 형 루키우스 마리우스 페르페투우스의 딸과 결혼했다. 따라서 에그나티아 마리니아나의 큰어머니는 238년 집정관 루키우스 마리우스 페르페투우스의 여자 형제였고, 사촌은 원로원 의원 마르쿠스 에그나티우스 포스투무스가 된다.
이는 에그나티아 마리니아나의 남편 발레리아누스, 아들 갈리에누스가 군인황제시대의 혼란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마리우스 막시무스 일가을 중심으로 한 푸닉, 갈리아 출신 인사들에게 지지받아 이들이 게르마니아 일대에서 쉽게 황제 자리를 노릴 수 있는 배경을 제공했다.
그녀의 오빠 혹은 남동생은 루키우스 에그나티우스 빅토르 롤리아누스인데, 그는 에그나티아 마리니아나 생전부터 발레리아누스와 사이가 깊었고, 발레리아누스와 조카 갈리에누스가 공동 즉위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때 그는 발레리아누스를 견제하면서 한직으로 밀어낸 고르디아누스 3세, 필리푸스 아라부스과 협력하면서 이들이 모두 몰락하는 초석을 닦은 뒤, 발레리아누스가 장남 갈리에누스와 함께 황제로 선포될 때, 그들이 안정적으로 황제로 공인되는 성과를 냈다. 에그나티아 마리니아나의 조카는 루키우스 에그나티우스 빅토르 롤리아누스의 아들로, 브리타니아와 게르마니아에서 여러 전공을 세운 에그나티우스 루킬리아누스가 있다.
에그나티아 마리니아나는 10대 때 발레리아누스와 결혼하여 갈리에누스를 낳았다. 그러나 발레리아누스가 황제에 즉위하는 253년경에는 이미 사망했다. 발레리아누스는 사별 후 코르넬리아 갈로니아와 재혼해 둘째 아들 소 발레리아누스를 얻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본인의 집권 과정과 황제 등극 후 세습왕조 구축에 있어, 옛 처가인 에그나티우스 가문과 첫 아내 에그나티아 마리니아나의 도움은 절대적이었다. 이에 그는 공동황제를 지내고 있는 장남 갈리에누스와 함께, 에그나티아 마리니아나를 기념하는 동전을 주조하였으며, 원로원은 그녀에게 아우구스타 칭호를 수여했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를 비롯한 3세기 이후 로마 기록들에 따르면, 아들 갈리에누스는 꽤나 고전적인 귀족이었지만, 성향은 외가 쪽 인사들처럼 사치스럽고 난잡해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으며 양육된 점을 빼곤 주목할 만한 점이 없다"고 대차게 까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고대기록들은 갈리에누스가 이런 성향을 갖게 된 것은 친모와 외가 식구들의 성향과 사생활을 판박이로 빼다 박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런 주장은 갈리에누스가 사후 평가가 나쁜 점에서 의심될 부분일 수 있는데, 발비누스를 비롯한 에그나티우스 가문의 친인척들의 평이 극소수의 인사를 제외하곤 일관된 것을 보면 이는 사실일 확률이 상당하다는 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