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7-03 21:47:27

콘스탄티나

 
{{{#FCE774 {{{#!wiki style="margin: -26px -10px -5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F0E09, #9F0807 20%, #9F0807 80%, #8F0E09)"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color: #4A3800; margin: -5px 0px"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리비아 드루실라 소(小) 안토니아 리비아 오레스틸라 롤리아 파울리나 밀로니아 카이소니아 메살리나 소(小) 아그리피나 클라우디아 옥타비아 포파이아 사비나 클라우디아 아우구스타 스타틸리아 메살리나
네 황제의 해 갈레리아 푼다나
플라비우스 왕조 소 도미틸라 도미티아 롱기나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폼페이아 플로티나 울피아 마르키아나 살로니아 마티디아 비비아 사비나 대(大) 파우스티나 소(小) 파우스티나 루킬라 브루티아 크리스피나
다섯 황제의 해 플라비아 티티아나 만리아 스칸틸라 디디아 클라라
세베루스 왕조 율리아 돔나 풀비아 플라우틸라
마크리누스 노니아 켈사
세베루스 왕조 율리아 코르넬리아 파울라 아퀼리아 세베라 안니아 파우스티나 율리아 마이사 율리아 소아이미아스 율리아 아비타 마마이아 살루스티아 오르비아나
군인 황제 시대 카이킬리아 파울리나 파비아 오레스틸라 안토니아 고르디아나 트란퀼리나 마르키아 오타킬리아 세베라 헤레니아 에트루킬라 코르넬리아 수페라 에그나티아 마리니아나 코르넬리아 갈로니아 코르넬리아 살로니나 술피키아 드리안틸라 빅토리아 제노비아 울피아 세베리나 마그니아 우르비카
사두정치 아우렐리아 프리스카 에우트로피아 갈레리아 발레리아 발레리아 막시밀리아
콘스탄티누스 왕조 플라비아 막시미아나 테오도라 플라비아 율리아 헬레나 미네르비나 플라비아 막시마 파우스타 플라비아 발레리아 콘스탄티나 플라비아 율리아 콘스탄티아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의 딸 플라비아 에우세비아 파우스티나 헬레나
요비아누스 차리토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마리나 세베라 유스티나 알비아 돔니카 플라비아 막시마 콘스탄티아 레타
테오도시우스 왕조 아일리아 플라킬리아 플라비아 갈라 아일리아 에우독시아 마리아 테르만티아 아일리아 풀케리아 갈라 플라키디아 아일리아 에우도키아 유스타 그라타 호노리아 리키니아 에우독시아
레오 왕조 아일리아 마르키아 에우페미아 플라키디아 율리우스 네포스의 아내 아일리아 베리나 아일리아 아리아드네 아일리아 제노니스
유스티니아누스 왕조 에우페미아 테오도라 아일리아 소피아 아일리아 아나스타시아 콘스탄티나
포카스 레온티아
이라클리오스 왕조 파비아 에우도키아 마르티나 아우구스티나 아나스타시아 그레고리아 파우스타 아나스타시아 에우도키아 하자르의 테오도라
아나스타시오스 2세 이리니
이사브리아 왕조 마리아 안나 하자르의 이리니 마리아 에우도키아 이리니 암니아의 마리아 테오도테
니키포로스 왕조 테오파노 프로코피아
레온 5세 테오도시아
아모리아 왕조 테클라 에우프로시나 테오도라 에우도키아 데카폴리티사 테클라 안나 아나스타시아
마케도니아 왕조 에우도키아 잉게리나 테오파노 마르티나키아 조이 자우치나 에우도키아 베아나 조이 카르보노프시나 테오도라 엘레니 레카피니 소피아 안나 가발라 엘레니 테오파노 마마스 베르타 테오파노 테오도라 엘레니 알리피아 조이 테오도라
콤니노스 왕조 불가리아의 예카테리나
두카스 왕조 에브도키아 마크렘볼리티사 알라니아의 마리아
콤니노스 왕조 안나 달라시니 이리니 두케나 헝가리의 이리니 키예프의 도브로데이아 줄츠바흐의 베르타 안티오키아의 마리아 프랑스의 아녜스
앙겔로스 왕조 헝가리의 머르기트 에우프로시나 두케나 카마테리나 에우도키아 앙겔리나
라스카리스 왕조 안나 앙겔리나 아르메니아의 필리파 마리 드 쿠르트네 이리니 라스카리나 호엔슈타우펜의 안나 불가리아의 엘레나 아세니나
팔레올로고스 왕조 테오도라 팔레올로기나 헝가리의 언너 몬페라토의 이리니 아르메니아의 마리아 브라운슈바이크의 이리니 사보이아의 안나 이리니 아사니나 엘레니 칸타쿠지니 이리니 팔레올로기나 불가리아의 케라차 마리아 엘레니 드라가시 이리니 가틸루시오 안나 바실리예브나 몬페라토의 소피아 트라페준타의 마리아 }}}}}}}}}}}}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
로마 제국의 아우구스타
콘스탄티나
Constantina | Κωνσταντίνα
파일:콘스탄티나.jpg
출생 560년
사망 605년
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
아버지 티베리우스 2세
어머니 아일리아 아나스타시아
남편 마우리키우스
자녀 테오도시우스, 티베리우스, 페트루스, 파울루스, 유스틴, 유스티니안, 아나스타시아, 테오티스타, 클레오파트라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동로마 제국 유스티니아누스 왕조아우구스타, 동로마 황제 마우리키우스의 황후.

2. 생애

560년경 티베리우스 2세아일리아 아나스타시아(당시엔 이노(Ino)로 불림)의 장녀로 출생했다. 574년 12월 7일 정신병을 앓아서 국정을 맡기 어려운 유스티누스 2세를 대신해 제국을 이끌던 황후 아일리아 소피아의 지명으로 아버지가 카이사르에 지명되면서, 그녀는 여동생 차리토와 함께 황실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나 아일리아 소피아 황후가 중간에서 막아섰다. 에페소의 요한에 따르면, 소피아는 이 시기에 티베리우스와 결혼하려 했다고 한다. 이는 아우구스타 자리를 최대한 이어가서 권력을 유지하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아내 이노와 두 딸이 있던 티베리우스는 거절했다. 이에 화가 난 소피아는 이노와 그의 두 딸이 황궁에 한 발짝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이노와 두 딸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황위에 오르기 전에 거주했던 집에 정착했다. 그러나 소피아의 박대가 갈수록 심해지자, 이노는 딸들을 데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떠나 다프누디움으로 돌아갔다. 578년 10월 5일 유스티누스 2세 황제가 사망하고 티베리우스 2세가 황위에 올랐다. 에페소의 요한에 따르면, 소피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에우리티키우스를 티베리우스에게 보내 이노와 이혼하는 대신 자신이나 딸 아라비아와 결혼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거부하고 이노를 아나스타시아로 개명해 황후로 삼았다. 결국 소피아는 티베리우스를 제거하기로 마음먹고, 지난날 자신이 살해했던 유스티니아누스 장군의 동생을 추대할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이 음모는 발각되었고, 티베리우스는 그녀의 궁정을 빼앗고 별궁에 유폐시켰다. 이리하여 아나스타시아는 황후로 인정받아 아우구스타의 칭호를 받았고, 콘스탄티나도 공주가 되었다.

582년 8월, 티베리우스 2세는 중병에 걸렸다. 그는 후계자로 마우리키우스를 지명하고[1] 딸 콘스탄티나와 결혼시켰다. 티베리우스 2세는 임종 전날 연설문을 준비했지만, 임종을 앞둔 시점에서 그걸 읽기엔 힘이 들었기에 제국의 수석 사법관 사크리 팔라티가 대신 읽어줬다. 그 연설은 마우리키우스가 제위 계승자임을 공표하는 것이었는데, 마지막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 소녀와 함께 나의 주권을 너에게 넘겨주노라. 언제나 형평과 정의를 사랑하는 마음가짐으로 훌륭한 통치를 해 나의 선택을 빛나게 하라."

582년 8월 14일 티베리우스 2세는 사망했고 마우리키우스가 새 황제로 등극했다. 마우리키우스와 콘스탄티나 부부는 테오도시우스, 티베리우스, 페트루스, 파울루스, 유스틴, 유스티니안, 아나스타시아, 테오티스타, 클레오파트라 등 5남 3녀를 낳았다.

602년 11월, 다뉴브 강 이북의 숙영지에서 겨울을 보내라는 마우리키우스의 명령에 불만을 터트린 장병들이 포카스를 추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사태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도 반란에 호응하는 봉기가 일어나자, 마우리키우스와 콘스탄티나 부부는 아이들을 데리고 황궁을 떠나 마르마라 해의 아시아 해안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남편과 다섯 아들은 포카스가 보낸 추격병에게 붙잡혔고, 그들은 모조리 참살되어 햅도몬에 효수되었다. 콘스탄티나 황후와 세 황녀는 수녀원에 감금되었다.

605년, 콘스탄티나는 게르마누스 장군과 접촉하여 반란을 도모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세 딸과 함께 칼케돈에서 처형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수원장 게오르기우스 케드레누스는 콘스탄티나의 머리가 효수되었고 시신은 보스포루스 해협에 던져졌다고 기록했다.





[1] 사실 티베리우스 2세는 게르마누스를 황제 후보로 선호했지만, 게르마누스가 거절해서 마우리키우스로 관심을 돌렸다.